1. 현포공소 -울릉도
공소를 사용하지 않은 지가 20여년 정도가 된다고 한다.
관할본당: 천부성당
경북 울릉군 북면 현포길 56-11
2. 태하공소-울릉도
사용을 하지 않고 있는 지가 10년도 넘었다고 한다.
관할본당: 천부성당
경북 울릉군 서면 태하길 220-13
3. 청하공소-최해두 회심경당
1959년 5월 5일 설립
'이곳 청하에도 신유박해(1801년)로 인하여 유배 온 경기도의 유인기,
충청도의 박효인, 전라도의 김영손, 장기와 흥해에 유배된 정약용, 최해두,
조선의 밀사로 중국과의 연락책이었던 김 프란치스코,
유치수 필립보 가족들이 이 지역 신앙의 출발점이라 생각된다.'
'이들로부터 신앙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청하의 점말(안심리) 등지에 숨어 지내면서
옹기 굽는 일에 종사하며 믿음을 이어 나갔다.
이후 1959년 5월 5일,
김호현 다니엘이 포항성당( 현 죽도성당) 안 베드로 신부(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와
청하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포항 천주교 청하공소가 설립되었다'
관할본당: 흥해성당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로243번길 8
'흥해성당 청하공소는
새로 발굴된 최해두의 참회록 「자책(自責)」과
청하 유계리 출신 최초 밀사 김 프란치스코의 활동상을 기념하고,
순교자의 영광뿐 아니라 배교자들의 고뇌와 회심도,
우리 교회사의 일부분으로 온전히 자리매김함으로써,
현재의 우리들도 다시 자신을 성찰할 수 있게,
하느님께 사랑의 마음으로 안길 수 있는 믿음의 공간
또한 진리와 평화를 마주할 성소가 될 것이다' 라고 되어있다.
최해두는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 출신으로
부친 최창은, 숙부 최창주 마르첼리노(1749-1781)는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고,
한국 천주교 최초의 밀사였던 윤유림과 두 아들 명수와 명문이
기해박해 때 순교하여 본가와 처가 모두 11명이 순교한 집안이다.
그는 초기 천주교회에 입교하여 정약용, 정약종, 이현, 이희영, 황사영, 홍문람 등
초기 천주교회의 지도급 인사들과 상종, 왕래하며 교회를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최영수 필리보
132위 하느님의 종/ 최해두의 아들
최해두의 사후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구걸하여 생계를 유지
체포 당시 한글로 된 책 2권과 묵주뿐이었다고 문초록에 기록되어 있음
아버지 최해두로부터 교리를 배웠고
기해박해 때 곤장 100대의 형벌로 장사 순교함.
'자책自責'은 1901년 신유박해 때 사학邪學을 믿었다는 죄명으로
문초를 받고 신앙을 버림으로써 흥해( 현 포항시 북구)로 유배된
최해두 자신의 심정과 신앙고백을 담은 참회록이다.
4. 진목공소
진목정에 교우촌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확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경신박해 이전부터 간월공소를 중심으로 하여
언양현과 경주부 남면로서는 산악지대(당시 ‘울산의 죽영리’라 불리던 지역)에는
신자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다블뤼 주교의 편지에 근거하여 이곳에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를
최양업 신부의 사목방문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1850년경부터 최양업신부는 경산의 모개골에서 어의현을 지나
언양의 간월공소로 가는 길을 따라 순회 선교했으며,
최양업 신부의 선종 후에는 다블뤼 주교와 리델 신부가
병인박해 이전까지 이 지역을 순회 선교하였다.
병인박해 때에는 이양등, 김종륜, 허인백이 순교하기도 한 지역이다.
1890년 부산본당이 설립되면서 진목정은
대구본당과 부산본당 사제의 협의에 의해서 로베르 신부, 조조 신부,
우도 신부, 강성삼 신부 등이 진목정 공소에서 판공성사를 주었다.
1899년에는 영남지역 사제협의회의 결정에 의해서
진목정은 드망즈 신부가 관할하던 부산본당 소속의 공소가 된다.
1926년에 경주성당이 세워지자 진목정은 경주성당 소속 공소로 바뀐다.
진목정 공소는 경주성당(현 성동성당) 소속에서 성건성당으로 소속이 변경되었으며,
이후에 건천성당을 거쳐서 현재는 산내성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관할본당: 산내성당
경죽 경주시 산내면 상목길 13-59
5. 와항공소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높은 산 계곡의 마을이고 부근에 1801년 신유박해 이후부터
신자들이 살았던 선필, 탑골, 진목정 등의 신자촌이 있으므로,
이곳에도 박해 시대 때부터 신자들이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병인박해 후인 1896년 대구에 살던 황 루카 가정이 이곳에 자리 잡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한다.
신자들의 힘으로 현재 공소 맞은편에 처음으로 공소를 설립했다.
1910년부터 1926년 경주 본당이 설립될 때까지는
부산진 본당(현 범일 본당) 관할 공소였다.
그러나 6·25 전쟁을 전후하여 이곳에 빨치산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소굴이 될까 두려워서 공소를 자진 철거했다.
그러다가 7대 공소 회장 황달오 시몬이
당시 경주 본당 주임 신부였던 윤광재 신부의 도움과
신자들의 열성으로 다시 초가집 공소를 지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신자들 스스로 성미를 모아서 기와를 올렸다.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에서 일부 발췌)
현재는 이 지역에 신자가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범곡공소 보다 더 먼저 폐쇄 되었다고 합니다.
관할본당: 산내성당
경북 경주시 산내면 대현와항길 68-7
6. 범곡공소
1910년 설립
범곡공소 교우 수가 현재 네 명이고,
미사는 관할본당에서 참례를 하고 있답니다.
공소 활동이 정지된 지가 근 20여 년이나 된다고 합니다.
관할본당: 산내성당
경북 경주시 산내면 대현범골길 46-2
7. 감포공소
1980년대 설립
1980년대에 이곳으로 이사온 신자를 비롯하여 두 명의 신자로 시작하여
이땅에 공소까지 탄생된 것이 감포공소이다.
관할본당: 양남성당
경북 경주시 감포읍 감포로12번길 19-8
8. 신당공소
1960년 대 중반 경 설립
“신당공소의 시작은 5.16 군사혁명 이후 나라에서 실시한
한센인 정착사업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권 회장은
“상태가 깨끗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착마을을 조성한 가운데
함께 모인 사람들과 칠곡 애성원에서 처음 시작된 신앙이
경주 내 보문단지를 거쳐 지금의 신당공소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매일미사 책 2020년 3월호가 보이고
주보도 같은 시기 것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2020년까지는 최소한 공소 활동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관할본당: 용강성당
경북 경주시 천북면 신당소티고개길 115-49
9. 빌기공소
빌기공소에서 앞에 바로 보이는 산만 넘으면 진목정성지다
천주교 박해시대부터 시작된 빌기공소의 역사는
안타깝게도 정확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6.25전쟁 후에는 한 때 신자가 100여명에 이르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관할본당: 성동성당
경북 경주시 내남면 학동1길 40-2 (비치리640)
10. 백산공소
1961년 4월 2일 설립
공소 설립은 되었지만
장소의 잦은 이동으로 공소 신자들은 안정적이지 않은 공간에서
힘들게 신앙생활을 이어나가야 했다.
공소의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대구대교구 이찬현(야고보) 신부의 어머니
김분선(마리아) 여사는 공소 건립에 필요한 기금을 전액 희사하였다.
현재의 공소 강당은
김마리아의 희사와 신자들의 노력으로 1979년 5월 20일에 준공되고,
1979년 8월 4일에 봉헌된다.
관할본당: 고령성당
경북 고령군 쌍림면 백산길 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