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남한산성, 한양 인근에서 가장 큰 소비 도시
평시에는 수도를 지키는 장벽
전시에는 임시 수도 역할을 맡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서울한양도성은 수도를 보호하는 장벽이었다. 정확히는 국가의 상징인 왕을 보호하는 거였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서 보듯 한양과 왕궁이 침탈돼도 왕만 무사하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고 여겼었다. 그래서 한양의
남과 북의 산에는 유사시 왕이 머물 행궁을 설치하고 이를 보호하는 장벽을 길게 둘러쳤다.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이다.
(2022. 11. 02) 남한산성 남문.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남한산성은 유사시 기능을 실제로 했다.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그곳으로 피난했고 조선의 군사가 자기를 구원해주길
기다렸다. 남한산성은 외부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장벽이기도 했지만 그 안에서 정치와 행정이 이뤄지고 백성들이 살아가는
도시이기도 했다.
역사에서의 남한산성
남한산성이 역사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장면은 아마도 병자호란 때일 것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저술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인조 임금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유시(酉時)에 신천(新川)과 송파(松坡)의 두 나루를 건너니, 강물이 처음 얼었다. 산 밑에 이르자 날은 이미
캄캄하고 이경에서야 비로소 남한산성에 들어갔는데, 임금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단지 5, 6명뿐이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권25,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 故事本末)>
인조가 한강에서 신천과 송파의 두 나루터를 건너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는 기록이다. 신천나루는 지금의 자양동에서 (잠실이 섬이었던 시절) 잠실 북쪽의 신천리로 건너가는 나루터이고, 송파나루는 섬의 남쪽 잠실리에서 송파로 건너가는 나루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을 김훈 작가는 소설 『남한산성』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행렬은 수구문으로 도성을 빠져나와 송파나루에서 강을 건넜다. 강은 얼어 있었다.
나루터 사공이 언 강 위를 앞서 걸으며 얼음이 두꺼운 쪽으로 행렬을 인도했다. 어가행렬은 사공이 흔드는
횃불의 방향을 따라서 강을 건넜다. (중략) 임금은 새벽에 남한산성에 들었다.
『대동여지도』을 보면 이 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지도에서 길은 검은 선으로 표시되었는데 도성을 나온 길이 잠실을 관통해
다시 육로로 광주의 남한산성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동여지도. 한양과 광주유수부 일대 확대. 초록 원이 한양 노란 원이 남한산성이다.
빨간 원은 잠실섬. 검은 선들은 길이다. (사진: 서울대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제공)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로 올라간다. 백제가 한강 유역을 지배하던 시절에 쌓았다는 설과
신라가 나당전쟁 당시에 쌓았다는 설이 있다. 두 주장 모두 남한산성이 역사가 오랜 성임을 보여준다.
그 후 임진왜란 중인 선조 28년(1595) 남한산성 자리에 다시 성을 쌓았고, 광해군 13년(1621)에 개수했다.
인조 1년(1623)에도 개축했다.
도시 그 자체였던 남한산성
인조 8년(1630)에 광주목(廣州牧)을 광주부(廣州府)로 승격시키며 남한산성은 읍치(邑治), 즉 지방 행정 중심지가 된다.
덕분에 병자호란 시절 임금이 피난하며 임시 수도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정조 19년(1795)에는 광주부에 유수(留守)를 파견해 광주를 유수부로 격상시켰다. 유수부는 옛 도읍지나 행궁이 있던 곳,
혹은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한 특수한 행정구역이었다.
동국여도의 남한산성도. 광주유수부가 자리한 남한산성과 한강 유역의 송파진이 간략하게 묘사되었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제공)
'광주전도'에서 남한산성 부분 확대. 1871년 광주부 읍지에 실렸다. (사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이렇듯 남한산성에 자리한 광주는 한양 외곽의 중심지였고 자연스럽게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이를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는 “관아가 들어서기 전부터” 백성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다”묘사한다.
마을에는 오일장터, 술도가, 색주가, 대장간, 푸줏간, 숯가마, 옹기가마 등이 있어 번화했다.
그리고 평시에는 광주 부사나 유수가, 유사시에는 임금이 정무를 보는 관아와 행궁이 있었다. 남한산성은 어엿한 도시였다.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자료에 따르면 광주의 읍치였던 남한산성은 한양 인근에서 가장 큰 소비도시였다.
그러나 1895년 갑오경장 이후 광주유수부가 폐지되고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행정구역 통폐합까지 일어나 중심지로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남한산성 안에 있던 군청도 산성을 떠나 경안동으로 이전하며 군사도시, 행정도시로서의 위상이
사라졌다. 하지만 산성은 남아 있었다.
도립공원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남한산성은 넓다. 전체 넓이는 35.16㎢로 광주가 61%, 성남이 14%, 하남이 25%를 차지한다.
그만큼 많은 진출입로가 있다. 각 지자체는 자기네 지역을 지나는 남한산성 둘레길을 자랑한다.
산성 내 소나무 숲은 수도권 최대의 소나무 군락이다. 이 소나무 숲은 일제 강점기에 전쟁 물자와 땔감으로 무분별한 벌목이
이루어졌었다. 그래서 남한산성이 소재한 산성리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금림조합’을 결성해 소나무 숲을 가꾸고 보전했다.
남한산성의 성벽 길.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남한산성의 암문. 암문은 정식 문은 아니지만 비밀 통로 역할을 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남한산성은 1971년에 경기도 도립공원이 된다. 이후 성벽과 행궁 등 산성 내 문화재와 시설을 보수한다.
이를 발판으로 2014년에는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남한산성이 총 12.4km에 달하는 성곽이 잘 보존되고 있는 점,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성곽 축성 기술의 모습을
발달단계별로 볼 수 있는 점, 그리고 다른 산성들과는 달리 산성 내에 마을과 종묘·사직을 갖추어 유사시 조선의
임시수도로서 역할을 한 점 등이 그 등재 사유로 꼽혔다.
남한산성의 가을 정취.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남한산성에서 바라본 송파 지역. 병자호란 때 롯데타워 인근에 청나라 군이 진을 쳤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11월 초 어느 날의 오후,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도로는 차량으로 붐볐다. 가을을 만끽하려는 관광객들이 몰린 것으로 보인다.
산성을 일주하는 산책로와 등산로에도 사람이 많았고 산성 인근의 맛집을 가려는 차량도 많이 보였다.
성벽을 따라 놓인 길은 경사가 심하거나 돌계단이 높아 힘든 구간도 있다. 하지만 송파와 성남과 하남은 물론 멀리
북한산까지 조망할 수 있는 구간도 있어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요즘에는 단풍까지 짙어져 가을 정취를 더해준다.
산성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 난 암문과 옹성, 그리고 옛 군사 시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혹시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나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을 미리 본다면 더욱 뜻 깊은 나들이가 될 것이다.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시설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남한산성 행궁의 외행전.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