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서운 아이들
박 완 서
그 여자는 작은 손으로 이마를 가리면서 눈을 떴다. 동으로 창이 난 그 여자의 방은 아침 햇살이 제일 먼저 그 여자의 침대 머리에 꽂혔다. 그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빨리 창에 커튼을 해 달든지 침대를 돌려놓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그렇게 벼르건만 그 여자는 곧 그 일을 잊어버렸다. 아침시간은 서둘러야 하고 저녁 땐 지쳐서 돌아오기 때문이다.
아홉 평짜리 독신자 아파트는 방문을 열자마자 싱크대와 현관문이 정확하게 엎드러지면 코 닿을 거리에 나란히 있었다. 그 여자는 아침에 배달된 우유를 병째 들이켜면서 조간신문을 펴 들었다. 여섯 장을 골고루 펄럭였지만 특별히 관심 있는 면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 여자는 다만 차고 비릿한 우유 맛과 함께 신문 냄새를 즐기고 있었다. 약간은 독한 듯한 조간 냄새가 신효한 각성제처럼 그 여자의 덜 깬 잠을 깨우고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여대생의 의식구조. 능력만 있다면 혼자 살겠다 62%’ 문화면의 이런 머릿기사를 보면서 그 여자는 팽, 소리나게 코웃음을 쳤다. 으스대는 것 같기도 하고 자조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인지는 그 여자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 여자는 열린 채 인 방문을 통해 침대 머릿장에 몇 권의 책과 함께 놓인 가계부를 돌아다보았다. 그 여자는 중학교 선생님이란 떳떳한 직업을 가지고 봉급도 혼자 조촐하게 살기에 부족함이 없건만 가계부를 한 번도 쓴 적이 없다는 게 묘하게 그 여자의 자립감을 위협하고 있었다.
딸의 고집에 못 이겨 따로 사는 걸 허락한 그 여자의 어머니가 이것저것 갖춰준 살림살이 중 제일 먼저 준 게 그 가계부였다. 어머니가 미혼의 딸이 집 떠나 혼자 사는 걸 꺼린 가장 큰 이유는 여자고 남자고 혼자 살면 방종해진다는 거였는데 어머니의 방종은 행실보다는 계획성 없는 씀씀이를 뜻했다. 그러나 그 여자가 꿈꾼 탈출은 집으로부터라기보다는 바로 그 계획성이라는 것으로부터 였다.
그 여자는 먹다 남은 우유를 넣어두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금치무침, 우엉볶음, 고기볶음, 당근볶음, 길게 썰어 식초에 담가놓은 단무지 등으로 작은 냉장고 속이 컬러풀했다. 아침에 김밥을 싸려고 어젯밤 늦도록 그런 것들을 장만할 적만 해도 소풍 간다는 게 그닥 싫은 줄 몰랐는데 막상 오늘이 소풍날이라고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그 여자는 여름 겨울 두 차례의 긴 유급휴가가 있고 남녀의 봉급 차별이 없는 교원직을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오죽해야 이 짓을 해먹겠느냐고 툭하면 자기를 비하시키는 교사도 있었지만 그 여자는 결혼을 단념하고 자립을 결심하고부터 자기가 얻을 수 있는 일자리를 다방면으로 조사 검토한 끝에 바로 이거다라고 점찍은 게 교사 자리였다. 이쪽에서 점을 찍었다고 해서 바로 그 자리를 얻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자리도 아니어서 대학 졸업장만 가지곤 어림없었다. 새삼스럽게 공부해서 순위고사를 보고 발령을 받기까지 자그마치 일 년 반이나 걸렸다. 이렇게 애써 얻고, 또 만족도도 높은 교사직이지만 학교 밖에서 직업 티내는 건 질색이었다.
그 여자는 학교에서 선정릉까지의 아스팔트 길과 뙤약볕과 아파트 단지와 지하도와 네거리를 생각하고 점점 더 우울해졌다. 그 기나긴 길을 칠십 명의 아이들을 무사히 몰고 갈 일이 시골서 처음 상경한 노인이 염소를 끌고 도심의 번화가를 헤매는 일만큼이나 초라하고 막막하게 여겨졌다.
소풍에 신명이 안 나니까 기껏 준비해놓은 김밥을 싸는 일도 열없어졌다. 어젯밤 그것을 준비할 때만 해도 솜씨만 어머니의 솜씨를 흉내낸 게 아니라 마음씨까지 어머니의 마음을 흉내내 제법 흐믓하고 정성스러웠었다. 소풍날 담임선생님이 자기 몫의 점심을 따로 싸갈 필요가 있는 건 아니었다. 교사가 되고 나서 첫 소풍 때만 해도 멋모르고라기보다는 반장이나 누가 점심 준비를 해오려니 바라고 있는 일이 치사스러워서 도시락을 준비 해 갔다가 동료 교사들의 빈축을 샀었다. 그후 한동안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돈 게 그때 혼자서 잘난 척한 것처럼 보인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느니만치 또 제 도시락을 싸려는 건 아니었다.
을희를 줄까 해서였다. 어제 을희를 위해 그것을 준비할 적만 해도 저금통을 털어 선행을 꿈꾸던 어린 날의 크리스마스 이브처럼 순수한 마음이었다. 그 여자의 어린 시절 가난한 이웃, 불쌍한 사람은 한낱 추상이었지만 지금 그 여자가 담임 맡고 있는 일학년 오반의 방을희의 가난은 구체적이었다. 어느 집단이고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섞여 있게 마련이고 동방중학이라고 해서 그 예외는 아니었지만 을희의 가난은 좀 유별났고 동방중학의 명물이었다.
교복이 자율화되고 나서 빈부의 차이가 노출될까봐 근심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실제 교육의 현장에 있어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특별히 뛰어난 안목이 아니면 비싸고 싼 옷이 쉽게 구별되지도 않았거니와 뭐니뭐니 해도 입성 하나는 흔한 세상이어서 다들 멀쩡하게 입고 다녔다. 그러나 을희는 살이 비어져나오게 터지고 해진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녔고 감지 않은 머리엔 서캐가 비듬처럼 허옇게 슬어 있었다. 아이큐는 일학년 전체에서 최하였고, 그 아이가 써온 가정환경조사서는 본인의 성명서부터 생년월일이나 가족사항까지 어느 하나고 배치받을 때의 학생조서와 일치되는 게 없었다. 을희도 한자란에 가선 ‘朴乙姬’로 돼 있었고 그나마 어림짐작으로 그러려니 알아볼 수 있는 형편없는 필적이었다. 제대로 써오라고 몇 번이나 되돌려보낸 끝에 을희에게서 얻어낸 건 “엄마가 선생님 마음대로 하시래요” 하는 회답이었다. 그 아이는 어쩌면 박을희인지도 몰랐다. 그 여자는 자기 반에 그런 명물이 있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겉모양만이라도 보통 아이처럼 꾸며놓고 싶었다. 그 여자는 우선 자기가 입던 옷 중에서 유행이 지난 옷을 몇 가지 챙겼다. 요새 아이들은 중학교 일학년에 벌써 어른 옷이 대강 맞을 만큼 성장이 빨랐고, 을희도 그 방면엔 별로 뒤지지 않았다. 그 여자는 을희의 자존심을 존중해서 교무실이나 교실이 아닌 은밀한 장소를 택해 얼른 옷보따리를 건네주면서 내일부터 그 옷으로 갈아입고 오라고 타일렀지만 그후에도 을희의 남루는 달라지지 않았다.
“선생님이 준 옷은 어쩌고?”
그 여자는 옷을 줄 때처럼 은밀한 장소에서 물었다.
“엄마가 뺏고 안 줘요.”
그 여자는 이크, 가난한 사람의 자존심이군, 하면서 긴장했다.
“왜?”
“엄마가 나들이 갈 때 입을 거래요.”
을희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가난한 사람의 자존심은 그 여자의 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혹시 느이 어머니 의붓어머니 아니니?”
“아아녜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엄마를 쏙 빼닮은걸요.”
을희가 또 히죽히죽 웃었다. 이렇게 을희네의 삶의 모습은 그 여자의 생각 밖의 세계에 속했다. 을희는 또 점심을 싸오는 일이 없었다. 점심을 굶는 애가 있는 반엔 으레 미담(美談)이 꽃피게 마련이라는 걸 그 여자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여자는 적어도 그 반의 담임선생이었다. 미담이 저절로 생겨나지 않으면 미담을 조작하고 부추길 책임이라도 느껴야 했다. 그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간혹 자기 도시락을 싸다가 을희를 위해 하나쯤 더 싸고 싶은 기특한 생각이 드는 것조차 억제했다. 을희는 한글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했다. 중학교 교과과정 중 을희가 할 수 있는 거나 흥미라도 느낄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을희는 건성으로 중학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마 한글도 못 깨친 상태로 중학교 졸업장을 받는 것도 무난할 것이다. 을희에게는 생활보호대상자이기 때문에 수업료는 자연히 면제되니까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없는 깨끗한 계산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을희에게 꼭 한 가지 가르쳐서 졸업시키고 싶은 게 있었다. 그것은 이 세상엔 결코 미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섣불리 미담에 응석 부리지 않도록 철저히 길들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 여자가 끼니를 굶는 제자를 보면서도 미담을 조작하려 들지 않는 이유였다. 을희에 대한 그 여자의 이런 생각은 차갑고 단호하고 떳떳했다.
역시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 여자는 일껏 준비해놓은 김밥을 싸지 않는 게 결코 귀찮아서가 아니라는 평소의 소신을 힘겹게 회복했다. 그러나 마음이 속속들이 편한 건 아니었다. 바깥 날씨는 화창하고 신록은 눈부시고, 오늘은 소풍날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여자에겐 어젯밤 색을 맞춰가며 야채와 고기를 볶던 부드럽고 들뜬 마음이 남아 있었다.
소풍날이라고 그애를 배불리 먹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결국 그애를 거지 취급하는 것밖에 안 돼. 예전에 잔칫날이나 제삿날 동네 거지는 물론 이방의 각설이떼까지 배불리 먹여야 뒤탈을 걱정 안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넌 소풍날도 굶주림을 견뎌야 돼. 너의 굶주림을 축제의 손님들의 즉흥적인 자비의 미끼로 줘 버릇하면 곧 그게 거지 근성에 길들여지는 게 되니까.
그 여자는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이렇게 다잡았지만 굶주림이 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끼니를 못 잇는 빈민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안 것도 뒤늦게 교사직을 얻고 나서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이 새로운 발견에 철저하게 무관심하려 들었다. 관심이 미구에 사랑이나 미움, 동정, 실망, 분노 등 불필요한 정서를 유발하게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는 마음속에 갈등이 있을 때의 버릇으로 긴 머리채를 뒤에서 움켜잡아 뒤통수에다 다발을 만들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작고 야무지고 윤곽이 예쁜 얼굴이 거울 속에 떠올랐다. 서른 살의 오월이었다.
심심하면 안 돼. 그 여자도 자신이 심심해질까봐 이렇게 앙탈을 했다. 그러나 곧 젠장 또 심심한가봐, 하고 마음을 능쳐먹었다.
그 여자는 형석을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심할 때면 그 여자는 형석이하고 있었던 일을 따라 그에게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버릇이 있었다. 그건 그를 생각하는 것과 는 달랐다. 그것은 마치 소녀 시절 까닭 모를 비애에 젖어 하릴 없이 집을 나서 이웃동네의 추녀가 낮은 고가(古家)가 즐비한 쓸쓸한 골목길을 지나 구식 두레박 우물이 있는 언덕바지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과 같았다. 철모브던 시절 마음이 쓸쓸할 때 발로 하던 삭책을 젊음의 막바지에 이른 지금 마음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철모르던 시절 그 쓸쓸한 산책로를 척도 삼하 헤아린 이 세상은 미지의 아름답고 빛나는 것으로 충만해 있었지만, 지금 때때로 심심하여 형석이하고 있었던 일을 마음속으로 되풀이 함으로써 그간의 경험에 비춰본 삶은 텅 비고 섬뜩하도록 황량한 것이었다.
형석은 그 여자의 부친이 차관급에 해당하는 경제부처의 고급관리였을 적에 중매로 알게 되어 약혼까지 했던 사이였다. 비록 중매로 알게 되었다고는 하나 형석의 밀어는 감미로웠고 그가 약속한 미래는 행복 그 차체였다. 그는 키 크고 잘생기고 학벌 좋고 집안 좋고 야심만만했다. 뭔가 더 보태고 싶은 게 하나도 없었다. 너무 완벽해서 그가 왜 여자를 원하는지 그게 다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여자는 수많은 친구와 친척들에게 그를 자랑했다. 그 여자가 그를 자랑시키고 싶어할 때마다 그는 마치 여자의 허영심을 위해 만들어낸 마네킹처럼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어느 날 그 여자의 부친이 어떤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신문에 사진이 나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종당엔 혐의 없음이 밝혀졌지만 그 사실은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고 회복될 수 없는 명예 때문에 상심하던 부친은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가파른 계단을 굴러떨어지듯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악화되는 가장의 건강을 지켜보며 가족들은 깊은 비탄에 빠지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홀로 그 여자의 비탄만은 절망스럽지 않았다. 자신의 앞날은 이미 내리막길로 접어든 집안의 운명과는 상관이 없다는 앙큼한 마음 때문에 그 여자의 비탄은 눈에 침칠하고 우는 울음처럼 가짜스러웠다. 결혼도 하기 전에 벌써 남의 식구가 돼 있는 속셈이 스스로 생각해도 가증스러웠지만 우선 혼자라도 잘살게 되면 차차 친정의 몰락을 구할 방도쯤 안 생길까 싶은 생각은 적이 위로가 됐다.
이렇게 그 여자의 집안 형편과 속마음이 다 같이 편안치 못할 때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불쑥 형석이 파혼을 통고해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는데 결혼할 마음이 없어졌어요.”
그는 그 말을 사무처리를 남보다 신속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유능한 사원처럼 자신 있게 그러나 정감을 철저히 배제한 목소리로 말했다. 망설임이나 변명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그의 태도 때문에 오히려 그 여자는 그의 말을 믿지 못했다. 믿지 않으면서도 불쾌했다. 그 여자는 원래 농담을 진담과 진배없이 말해서 사람을 웃기거나 놀려주는 취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자기가 그런 악취미를 경멸한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 웃음기 없이 엄숙하게 말했다.
“형석씨, 우린 약혼한 사이예요.”
“나도 우리가 아직 결혼한 사이는 아니란 걸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마음이 변한다는 건 약혼하고 나서뿐 아니라 결혼하고 나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망설임 없이 그것을 표시하고 뒤끝 없이 처리할 수 있는 건 역시 결혼 전이기 떼문이니까요.”
“마음이 변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 농담 싫어요.”
그 여자는 신경질을 부리면서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는 시늉을 했다. 그가 그 여자의 손을 떼어내다가 탁자 위에 얌전하게 포개놓았다. 그때 그 여자의 손가락에선 약혼반지에 물린 다이아몬드가 치열한 눈을 뜨고 있었다.
“농담으로 치면 곤란해요. 지금은 편한 대로 농담으로 치고 싶겠지. 그러나 집에 가서라도 진담인 걸 인정해야 돼요. 내가 마음이 변한 건 사실이니까.”
“어쩜 그럴 수가…….”
“배반당했다고 느끼는군요?”
“형석씨가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비로소 그 여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배반감이란 견디기 어려운 고약한 감정이죠. 그렇지만 그런 배반감이 그쪽만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실상 먼저 변한 건 그쪽이니까. 배반의 쓴 잔도 내가 먼저 마셨고…….”
“그럼 내가 형석씨를 배반했단 소린가요? 그런 일 없어요. 절대로 없어요. 형석씨는 뭔가 오해하구 있어요.”
그 여자는 익사 직전에 검부락지라도 잡듯이 필사적으로 그 돌발사가 오해로부터 비롯됐을지도 모를 가능성에 매달렸다. 처음으로 형석의 얼굴에 어떤 표정 이 스쳤다. 그것은 조소였다.
“그쪽의 조건이 바뀐 게 내 오해라구? 내가 마음이 변한 건 그쪽의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이에요. 제발 조건은 변해도 상관없고 마음은 절대로 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마음이나 조건이나 다 가변성은 인정해야 되고 그 둘이 각각 사람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일부분인 건 사실 아녜요. 그쪽에선 내 변심을 듣고 어쩜 그럴 수가 있냐고 분해하고 오래도록 배반감에 치를 떨게 될 것과 조금도 다르거나 덜하지 않게 나 역시 그쪽의 조건이 변한 걸 보고 분해하고 배반감을 느꼈어요. 정말이에요. 그런 의미로 우리 서로 오해도 부채도 없기로 해요.”
그러면서 형석은 약혼 예물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우리 쪽에서 보낸 건 나중에 중매쟁이를 통해서 돌려줘도 돼요.”
형석은 큰 자비라도 베풀 듯이 이렇게 말하고 일어섰다. 형석의 말은 그의 말짝으로 단도직입적으로 시작됐지만 그가 휘두른 칼이 그 여자의 심장에 꽂힌 것은 뒤늦게 되돌아온 예물을 눈앞에 보고 나서였다.
그러나 정말 죽어넘어간 건 그 여자가 아니라 그 여자의 부친이었다. 딸이 파혼당한 걸로 자신의 몰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똑똑히 본 부친은 계단을 굴러떨어지듯이 악화되던 병에서 곧장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그때 그 여자 나이는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 여자는 그때의 자기 나이를 생각할 때마다 꼭 겨우라는 단서를 붙이는 버릇이 있었다. 그 여자의 ‘겨우’ 에는 그 여자만의 각볕한 애정과 연민과 비애가 서려 있었다.
부친의 죽음으로 그 여자의 조건이 더욱 나빠졌다고 해서 그때부터 결혼을 단념한 건 아니었다. 그 여자는 행복하고 싶었고, 행복이란 평범하고 자연스럽 게 사는 속에 있다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성이 그립고 필요로 할 나이에 그것을 억제한다는 건 그 여자의 이런 소박한 행복관에 어긋났다. 그여자는 파혼당한 충격과 부친을 잃은 슬픔을 딛고 열심히 맞선을 보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겨우 스물다섯 살을 넘긴 그 여자는 조건이 마음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무시할 수 없는 일부분이라는 형석의 말에 이의가 없어서 조건이 걸맞는 남자하고만 골라서 선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성사가 되지 않았다. 스물일곱 살을 꼴깍 념길 무렵에 이르러서야 거의 성사가 될 뻔한 일이 한 건 있었을 뿐이었다. 학벌 외엔 남자 쪽이 기우는 게 속 편하다는 게 그 여자가 지니고 있는 마지막 미덕이었기 때문에 별로 속 상하지 않았다. 그쪽도 홀어머니여서 양쪽 홀어머니의 승낙까지 떨어지고 나서 그 남자는 이런 소리를 했다.
“내 처음부터 궁금하던 거지만 체면상 이제야 묻겠는데, 아버지가 뭣 좀 남겨놓고 죽었소?”
죽었소, 소리를 돌아가섰소, 라고만 했어도 좋았을 것을.
그 여자는 버르장머리 없는 말이 부관참시(剖棺斬屍)나 뭐 그런 잔혹한 형벌이 되어 한빈 죽은 사람의 목에 또다시 살의(殺意)를 들이대는 것처럼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 여자는 마치 그런 짓에 이골이 난 탤런트처럼 거침없이 능숙하게 그 못생긴 남자의 따귀를 때리고 헤어졌다. 그러고 그 여자는 다시는 맞선을 보지 않았다.
그 마지막 맞선 이후 그 여자는 평범한 행복을 꿈꾸기를 단념했다. 그게 별로 고통스럽지 않았다. 남들이 다 가진 행복을 자기만 못 가졌다고 여겼을 적 엔 그게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마다 행복에 속고 있을 뿐 어쩌면 행복은 없을지도 모른단 생각도 쓸쓸할지언정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 여자는 그후 행복 대신 자립을 꿈꾸었고 그건 이루어졌다. 그걸 이루고 자립해서 살면서 그 여자는 의식적으로 형석의 단아한 무표정을 닮아갔고, 주위에서 여봐란듯이 행복을 더럭더럭 처바르고 사는 친구나 이웃을 볼 때면 간혹 그 무표정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형석에게서 배운 조소에 지나지 않았다. 그 밖에도 형석과 그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 여자에게 쓸모가 많았다.
그 여자는 마음속으로 문득 형석이하고 있었던 일을 따라 그에게로 갔다가 되돌어올 때마다 젠장 또 심심한가, 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부드러워지면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그 여자는 형석이에게 다녀왔고 다녀오고 나면 갈등은 감쪽같이 해소됐다. 또 구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척도 삼하 삶을 재면 결코 손해보지도 배반당하지도 않으리라는 자신감도 혼자 사는 그 여자에게 큰 힘 이 되었다.
그 여자는 을희의 점심을 쌀까 말까 하는 망설임은 물론 을희에 대한 관심으로부터까지 말짱하게 놓여나서 가벼운 마음으로 소풍 준비를 했다. 간단한 샤워를 하고 긴 머리를 묶고 살갗을 햇볕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로션을, 얼굴은 물론 드러나는 살갗에 골고루 바르고 레이스가 달린 캉캉치마에 앵투색 티셔츠를 받쳐입고 넓은 모자를 썼다. 모자 그늘에서 작은 얼굴이 너무 죽는 것 같아 밝고 화려한 색 루즈로 입술을 뚜렷하게 그렸다. 그 여자는 자신이 아직 젊고 예쁘다는 데 짜릿한 기쁨을 느꼈다. 그 여자는 자신을 스치는 이런 순간적인 기쁨을 사랑했다.
밖에선 초하의 푸르름이 미묘하게 살랑이고 있었고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고 기온은 쾌적했다. 아침의 미풍이 그 여자의 풍성한 캉캉치마 폭을 양산처럼 펴 올릴 때마다 소녀의 그것처럼 건강하고 맵시 좋은 다리가 무릎까지 드러났다. 그럴 때마다 그 여자는 흐르는 시냇물에 정강이를 담근 것 같은 상쾌감을 맛보았고, 그 맛에 그 여자는 바지를 거의 입지 않았다.
학교는 그 여자가 사는 아파트 단지와 인접해 있어 걸어서도 십 분밖에 안 걸렸지만 그 동안에도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이삼학년 아이들 중엔 더러 못 본 척하거나 일부러 피해가는 아이도 있었지만 일학년 아이들은 대개 깍듯이 인사를 했고 멀리서 뛰어와서 앞을 가로막으며 머리를 숙이는 아이도 있었다. 좋은 날씨와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그 자신감으로 그 여자의 기분은 한층 좋아졌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을 정렬시키고 출석을 부르다가 방을희 차례에서 그 여자는 무심히 목소리뿐 아니라 모습으로 그 아이를 확인하려고 눈을 들었다. 아이들이 일제히 기성을 지르며 웃기 시작했다. 중학교 일학년짜리다운 맑고 거침 없는 웃음이었지만 어딘지 불순한 찌꺼기 같은 게 느껴져 그 여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을희를 빨리 찾아내기 위해 또 한번 이름을 불렀다. 이 두번째 호명엔 그 여자도 모르는 새에 노기가 섞였다. 을희의 두번째 대답은 잦아드는 것처럼 가냘펐다.
그 여자는 곧 을희와 눈이 마주쳤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더욱 낭자해졌다. 을희는 처음으로 속살이 나오게 해지고 터진 옷이 아닌 새로 산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한눈에 최하의 싸구려라는 걸 알 수 있게 색상과 바탕이 조악한 것까지는 참아주겠는데 마치 운동선수의 번호처럼 앞뒤로 달고 있는 알파벳이 문제였다. 노랑 바탕에 검은 글씨로 선명하게 ‘PLAY GIRL’ 이라고 쓴 티셔츠가 아이들을 그렇게 웃기고 있었다. 흐늘흐늘 살에 달라붙는 화학섬유의 질감이 을희의 제법 성숙한 가슴을 적나라하게 강조하면서 ‘플레이 걸’ 이란 말에 음탕한 암시를 던지고 있었다. 그 여자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을희도 따라서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여자는 자기가 영어선생이면서도 이 땅 도처에 범람하는 꼬부랑 글씨에 격렬한 혐오감을 느꼈다. 웃지 마, 아무도 이 아이를 비웃을 자격이 없어. 제발 웃지 마, 이렇게 악을 쓰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고 그 여자는 나머지 출석을 부르고 출석한 인원수의 점검을 마쳤다.
비록 새옷은 얻어입 었을망정 도시락은 못 얻어가진 모양이다. 을희는 빈손이었다. 빈손이기 때문인지 앞뒤로 단 ‘플레이 걸’ 때문인지 을희는 소풍행렬 가운데서 남들과 보조 맞춰 잘 걸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정릉까지 내내 그 여자의 눈에 거슬렸다. 그 여자는 울고 싶도록 우울했다. 밝은 햇볕도, 살랑이는 신록도, 폭넓은 캉캉치마를 양산처럼 펴주는 싱그러운 바람도 그 여자의 기분을 돌이키지 못했다.
이게 무슨 꼴이람. 그 여자는 마치 한 떼의 을희를 이끌고 어디론지 한없이 허기진 나들이를 가고 있는 것처럼 느꼈고 이런 자신의 모습을 연변의 아파트 단지의 무수한 창으로 행복한 여자들이 내다보면서 깔깔대고 비웃고 있는 것 같아 속으로 억울하고 창피했다. 깔깔대는 행복한 여자들 중엔 이젠 아이가 둘쯤 되고 남편이 과장 아니면 조교수쯤 된, 그 여자의 고등학교 동창, 대학교 동창들의 모습도 보였다. 살짝 멋도 부리고 햇볕도 가리기 위해 쓴 차양 넓은 모자를 이젠 오로지 그 여자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가리기 위해 깊이 눌러쓰고 그여자는 땅만 보고 걸었다.
선정릉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그러나 그 여자에겐 견디기 어려운 긴 여로였다. 타고만 다녀 버릇한 아이들의 원성도 자자했다. 다리가 아파 죽겠다는 둥, 발이 부르텄다는 둥, 딴 학교는 다 목적지 근처에서 모이는데 우리 학교 촌스러운 건 알아줘야 한다는 둥 불평도 가지가지였다. 그 여자는 목적지를 바라보는 지점에서 앞에서 반을 인솔하고 있는 반장 옆으로 가서 같이 걸으면서 말했다.
반장은 나무랄 데 없는 소녀였다. 유복하고 교양 있는 집안의 맏딸이었고 두뇌 명석하고 공부 잘하고 통솔력이 뛰어나고 용모와 품행이 단정했다. 그 여자는 그런 뛰어난 소녀가 자기 반 반장이라는 걸 매우 믿음직스럽게 생각했지만 반장을 마음으로부터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어디 하나 꿀릴 데 없는 아이가 흔히 그렇듯이 반장도 선생을 우습게 알았다. 물론 총명한 아이니까 그런 티가 겉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었는데도 그 여자는 과민할 정도로 반장에게서 그런 걸 느꼈다.
학기 초였을 것이다. 환경미화를 의논하려고 반장 부반장을 방과후에 남으라고 했더니 부반장은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고 난처해 하길래 그냥 돌려보냈다. 결국 반장과 단둘이 남게 되어 흉허물 없이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가 무심히 반장의 책상에 걸터앉게 됐다. 그때 반장은 깜짝 놀라면서 “선생님, 그 책상은 제 밥상도 돼요” 하고 무안을 주는 거였다. 그때 그 여자는 아무리 선생이라도 잘못은 잘못으로 인정해야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미안, 미안” 가벼운 사과까지 하면서 일어났지만 속으론 선생을 감히 무안 준 건방진 반장이 몹시 괘씸스러웠다. 책상 밥상의 정결이 대단한 만큼은 선생의 존엄성도 대단한 거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담 선생의 궁둥이를 선생의 존엄성에 포함시키지 않고 다만 궁둥이로 보는 반장의 당돌한 시선은 얼마나 모욕적인가.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자리에서 그런 감정을 풀지 못하고 그만큼 반장을 모욕 줄 수 있는 기회만 엿보고 있었기 때문에 피차 편안치 못한 긴장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을희 말인데…….”
그 여자가 을희 얘기를 꺼내자 반장은 푹 하고 웃기부터 했다. 그 여자는 따라 웃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보아하니 오늘도 도시락을 안 싸온 것 같더라. 오늘 같은 날은 네가 알아서 도시락을 하나 더 준비하지 않고.”
“전 반장이니까 선생님 도시락도 싸야 하잖아요? 그것도 어머니한테 미안한데 어떻게 또 도시락을 싸달래요?”
반장이 그 여자를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대들었다. 반장한테 도시락을 얻어먹어야 한다는 일이 이렇게까지 치사스러울 줄은 미처 몰랐다. 그 여자는 자기를 위해서건 을희를 위해서건 꼭 필요한 도시락을 준비까지 다 해놓고 귀찮아서 안 싼 게 후회스러워서 발이라도 구르고 싶었다. 반장이 그 여자보다 한걸 총명하고 싹싹했다.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따로 싸오진 않았지만 을희가 점심 굶을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우리 그룹에 데려가면 어떻게 되겠죠 뭐.”
“그래주련? 고맙다. 그럼, 그래야지. 공부 잘하는 애들이 끼워주면 걔도 아마 좋아할 거다.”
그 여자는 우선 아쉬운 대로 이렇게 찬동했다. 반장 그룹은 극성맞고, 공부 잘하고, 공부 말고도 한가닥 하는 아이들을 망라하고 있었다. 도시락이나 하나 싸다주어 외딴 나무그늘에 숨어 혼자서 까먹게 하느니 그런 쟁쟁한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는 게 얼마나 좋으냐 말이다. 그 여자는 조급하게도 이번 소풍이 을희가 외로운 명물 신세를 면하고 정상적인 교우관계를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꼇까지 기대하면서 울적하던 기분을 돌이켰다.
능을 한 바퀴 돌고 교장선생님이 능에 묻힌 왕이 어떤 분이었는가를 대강 설명 하고 나서 점심시간으로 들어갔다.
교장선생님을 위시해서 층층시하 윗분을 모시고 앉은 교사들의 자리엔 속속 점심밥과 음료수, 과실, 케이크 등 먹을 것이 답지했다. 교사들은 제각기 자기 반에서 들어온 걸 제 앞에 쌓았다가 그중 먹음직스러운 도시락이나 외제 과자, 철 아닌 귀풀스러운 과일 등은 윗분에게 상납하고 동료들과 나누어 먹으면서 자랑스러워했다. 그 여자네 반에선 반장이 유부초밥과 김초밥을 반반씩 담은 은박지 도시락을 하나 달랑 가져왔을 뿐 그 흔한 콜라 한 병 들어오는 게 없었다. 음식을 들고 다니며 상납하고 자랑시킬 필요가 없어서 되레 잘됐다 싶으면서도 그 여자는 반장한테 또 한번 당한 것 같아 불쾌했다. 평교사 중에서는 젊은 여선생끼리 들어온 음식을 모으니 통닭만 해도 한 사람 앞에 세 마리는 돌아갈 만큼 넉넉했다. 그 여자도 통닭 뜯고, 미제 주스에 미제 초콜릿만 골라서 먹으면서도 속으론 열등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반장이 선생님의 엉덩이라고 해서 보통 사람 엉덩이 이상으로 존엄성을 인정 안 해줬던 것처럼 선생님의 입의 존엄성 역시 저희들의 것 이상으로 여겨주지 않은 게 괘씸스러웠다. 그렇다고 먹을 걸 많이 받은 것을 마치 훌륭한 교사 노릇에 대한 응분의 대가인 양 의기양양해하는 게 부러운 것도 아니었다. 유별나게 구는 것 같아 동료 교사들이 권하는 대로 받아먹긴 했지만 그후의 만복감은 천격(賤格)에 오염된 것처럼 께적지근한 거였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반별로 여흥이 시작됐다. 여흥시 간에도 반장 그룹이 판을 잡았다. 당장 직업가수로 나가도 손색이 없을 만큼 풍부한 성량과 세련된 율동으로 유행가들을 뽑아댔고 즉흥극, 모노드라마도 재미와 천기에 섹스 무드까지 아슬아슬하게 가미된 프로급의 것이었다. 흥이 무르익어 기성 가수 흉내내기에 디스코판까지 벌어지자 그곳으로 놀이 나왔던 일반 사람들까지 겹겹이 에워싸고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그냥 놓아두었다간 구설수에 오를 만큼 난잡한 꼴을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담임으로서 약간 흥을 깨는 한이 있더라도 막 나가는 판을 학생답게 바로잡아줘야 할 것 같았다.
자아, 이번엔 내가 한 곡 뽑을까, 하면서 점잖게 우리 가곡을 부르면 분위기가 어느 만큼 경직되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겹겹이 둘러싼 사람들 앞에서 그런 역할을 해낼 자신이 없었다. 반장을 불러 의논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반장은 멀리서 무슨 모의를 꾸미는지 얼굴을 괴상하게 분장한 단짝과 이마를 맞대고 소곤대고 있었다.
그 여자는 그때 문득 을희에게 노래를 시킬 생각이 났다. 딱 한 번 을희의 노래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한 번도 준비물을 갖춰오지 않는 을희 때문에 노발대발한 가정선생이 그런 애는 벌로 화장실 청소라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늙고 고집불통의 선생이 하도 여러 번 그렇게 말하는 걸 번번이 못 들은 척하기가 안 되어 하루는 방과후에 을희를 불러 그 늙은 선생님 보는 앞에서 꾸짖고 나서 화장실 청소를 명령했다. 그러고 나서 이것저것 잡무 처리를 하고 그 학교의 특색인 길고긴 교원 종례까지 끝내고 교문을 나서다가 말고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화장실까지 되돌아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을희는 화장실 문턱에 오두마니 쪼그리고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삐꾹새 숲에서 울 때……
을희의 노래는 음정이 엉망이고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지능이 좀 모자라는 소녀 특유의 투명한 목소리를 통해 아직 아무하고도 만난 적이 없는 순수한 영혼을 엿본 것처럼 느꼈다. 을희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노래를 다시 부를 수만 있다면 자기 반이 학생답지 못하게 놀아나고 있다는 비난쯤 쉽게 모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을희에겐 생전 처음 맛보는 참여의 기쁨이 될 것이다.
그 여자는 눈으로 을희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먼발치로 바라다만 보던 반장네 그룹이 모여앉은 데로 찾아갔다. 거기에도 을희는 보이지 않았다.
“을흰 어디 갔니?”
아직도 못다 발휘한 끼가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어 그걸 풀 준 비에 여념이 없는 그애들은 선생님을 변변히 거들떠도 안 봤다.
“을희 점심은 먹인 거니?”
그 여자는 빽 하고 악을 쓰고 말았다.
“네.”
그제서야 정신이 좀 난 아이들이 한꺼번에 대답을 했다. 한꺼번에 한 대답이 되레 믿음직스럽지 못해 그 여자는 누가 그애의 도시락을 싸왔느냐고 따졌다.
저요,
저요, 저요·…· 이번에는 열 명도 넘는 애들이 한꺼번에 대답을 했다.
“너희들, 선생님을 놀리는 거니? 누가 그애의 도시락을 싸왔냐니까.”
그 여자는 왠지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만약 아이들이 거짓말을 한 게 탄로가 나면 안 하던 체벌이라도 가할 것처럼 주먹이 렸다.
“선생님도 참, 십시일반이라는 소리도 못 들으셨나봐.”
반장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여유 있게 말했다. 무슨 소린지 알만했다. 아이들이 밥 한 숟갈이나 김밥 한두 개씩 내놓아 을희를 먹였을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름답고 정겨운 광경이었다. 나무랄 까닭이 없었다.
“그래, 지금 을희는 어디 갔기에 안 보이니?”
“물 뜨러 보냈는데 아직 안 오네요.”
그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도가 보였다. 그러나 을희는 보이지 않았다.
“목마르면 제가 떠다 먹지 왜 하필 그 길눈도 어두운 애를 시키니? 얘가 어디로 갔나?”
“선생님, 걱정 마세요. 거진 올 때 됐으니까요. 수돗물 뜨러 간 게 아니라 약숫물 뜨러 갔어요.”
“약숫물? 여기 약숫물이 어디 있기에…….”
“봉은사 약숫물이 좋대요. 그래서 떠오라고 시켰어요.”
누군가가 그 여자 뒤에서 조그맣게 말하고 혀를 날름 내밀었다.
“뭐, 봉은사 약숫물을? 맙소사. 누구니? 누가 걔한테 그런 일을 시켰어, 응?”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들의 대답은 저요, 저요, 저요ㅡ 였다. 열 명도 넘는 아이들이 앳되고 겁 없는 입을 모아 제각기 자기라고 나섰다.
“아니, 얘들이 선생님을 놀리기로 작정한 아이들 아냐?¨
“아녜요, 정말 우리들이 다 시켰어요. 밥값을 하라고…….”
그 여자가 오래 말문이 막혀할 새도 없이 저만치서 을희가 오고 있었다. 열 개가 넘는 물병을 양 어깨와 목에 주렁주렁 매달고도 모자라 양손에 든 을희는 연시처럼 농익은 얼굴에 땟국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플레이 걸 티셔츠가 땀에 늘어붙어 젖무덤과 젖꼭지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얼키설키한 물병들의 끈 때문에 셔츠 목둘레가 형편없이 늘어나고 가슴팍의 알파벳이 한쪽으로 흘러내린 형상은 맡은 바 그 비극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시침 딱 떼고 웃기려는 노련한 광대처럼 보였다. 여기저기서 유쾌한 폭소가 터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을희는 손에 든 물병을 내려놓고 어깨의 것을 벗어내기 시작했다. 어깨가 가벼워진 을희는 티셔츠 자락을 치켜올려 얼굴의 땀을 닦기 시작했다. 속에 입은 게 없어 배꼽과 허리가 드러났다. 아이들이 좀더 낭자하게 웃었다. 땀을 닦고 난 을희는 영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긋빙긋 따라 웃었다.
그 여자는 이런 을희의 손목을 낚아채가지고 들입다 달리기 시작했다. 천방지축 사람들이 놀이판을 벌인 데를 지나 언덕을 넘어 으슥한 곳을 찾아 헤맸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외딴 고목나무 밑까지 온 그 여자는 을희의 손목을 아프게 쥔 채 숨가쁘게 말했다.
“이 바보야, 왜 얻어먹니, 왜 얻어먹어? 차라리 빼앗아 먹지. 뺏어 먹을 기운이 없으면 훔쳐 먹든지 왜 얻어먹느냐 말야. 이 바보 같은 계집애야. 이제부터 정 배가 고프면 홈쳐 먹든지 빼앗아 먹어, 알았지?”
그 여자의 목소리는 실로 오랜만에 싱싱하고 건강했다. 을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밥값을 하기 위해 열 개도 넘는 물병을 메고 봉은사에서 선정릉까지 뙤약볕 속을 걸어오고 나서도 히죽히죽 웃을 여유가 남아 있는 을희는 선생님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태평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 여자도 자신이 큰 실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을희가 못 알아듣기가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알아듣고 못 알아듣고에 상관없이 실수는 실수였다. 선생님으로서 제자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실수를 뉘우치기보다는 사랑스렴게 생각했다. 자기가 뜻하지 않게 저지른 실수를 통해 그 여자는 뭔가 달라지기 시작한 스스로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짜릿하고도 고통스러운 쾌감이었다.
앞으론 심심할 때 습관적으로 하던 짓 ― 형석이하고 있었던 일을 따라 그에게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짓을 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일을 척도 삼아 삶을 헤아리는 어리석은 짓도 다시는 안 할 것 같았다. 그 짓으로부터 해방되고 나면 뭔가 새로운 게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형석과 헤어진 지 오 년 만에 그 여자는 비로소 그로부터 자유스러워진 자신과 그와는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가능성이 자신 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비록 처음 움튼 실수일지라도 불모(不毛)보다는 사랑스러웠다. 그 여자는 자신의 실수와 더불어 아무 것도 모르는 을희를 부드럽게 보듬어 안았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