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콩보다 더 크게 자라고 있는 잡초들을 뽑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농원의 주작물인 복숭아나무와 블루베리 나무를 돌보는 시간에도 콩밭이 마음에 걸렸고, 텃밭의 야채들에게 물을 주면서도 건너편에 있는 콩밭을 넘겨다 보며 풀의 키를 가늠하곤 했다. 누가 채근하는 것도 아닌데, 빽빽하게 들어찬 잡초들 때문에 콩들이 제대로 숨도 못 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나 스스로 숙제를 안은 것처럼 전전긍긍했다.
남편이 출근한 틈을 타 서둘러 농원으로 향했다. 콩밭 옆에 몇 줄 심어 놓은 들깨밭부터 풀을 뽑기 시작했다. 친정엄마가 주신 모종을 심었던 들깨가 벌써, 뜯어서 먹을 수 있을 만큼 잎이 넓게 자라 있었다. 가만히 풀을 뽑고 있자니, 들깻잎들이 향을 내뿜으며 고맙다고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싱그러운 초록의 냄새와 빛깔에서 생명력이 느껴졌다.
내 손들이 콩밭으로 바쁘게 옮겨졌다. 비가 오락가락해서인지 흙이 물기를 품고 있어 풀들이 쑥쑥 잘 뽑혔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땀이 흘러내렸다. 해가 내 얼굴까지 닿았을 때 방향을 바꿔서 해를 등지고 풀을 뽑았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등이 뜨거워졌다. 햇살이 등짝을 뚫고 심장을 덮이는지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오늘 목표인 콩밭의 풀을 모두 뽑으리라는 결심이 잠깐 흔들렸다.
쇠비름, 명아주, 쇠뜨기, 공중대가 콩밭을 제 밭인양 점령하고 있었다. 특히, 콩과 잎이 비슷하게 생긴 공중대가 세력이 좋았다. 주인의 발자국 소리에 작물이 큰다는 말이 있다. 주인의 발자국 소리가 없으니 풀이 무성하게 자란 것이다. 그런 풀들을 뽑아내는 것도 힘들지만, 더 큰 문제는 벌써 씨앗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후손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씨를 말린다는 말을 역사적 사실들이 보여 주듯이 씨앗이 떨어지지 않도록 미리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더 바쁘게 했다.
정신없이 풀을 뽑다가 '뚜둑'하며 제법 튼실해진 콩을 부러뜨렸다. 어릴 때, 마을 아주머니 한 분이 허리가 심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허리가 굽을 나이가 아닌 것 같은 아주머니셨다. 친정 엄마가 들려주신 이야기가 충격이었다. 그 아주머니의 시어머니가 콩이나 깨밭 등 풀을 뽑을 때, 작물들이 다친다고 앉아서 일하지 말고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주머니는 일찌감치 허리가 구부러졌다는 것이다.
그 시어머니는 노년에 치매에 걸려서 별의별 종류의 이상한 행동으로 며느리를 힘들게 했다. 며느리가 들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방바닥의 장판을 모두 개켜서 그 위에 앉아 계시곤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시어머니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한 잘못도 모르고, 당연히 며느리한테 사과도 못하고 돌아가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락 없이,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세상 불쌍한 사람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아마도 용서받지 못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어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콩이 부러진 것을 보며, 젊을 때부터 허리가 구부러졌던 그 아주머니가 생각났다. 내가 콩을 부러뜨리는 것을 내 시어머니가 보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나의 선하디 선하신 시어머니는 여전히 부처님 같은 미소를 잃지 않으시고 "니는 안 다쳤냐?"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내 시어머니는 당신의 마음은 다치셨을 거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라 아직도 내 마음에 살아계신다.
콩밭을 매며 옛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손은 바지런히 콩이 아닌 모든 초록을 뽑아내고 있었다. 양팔의 힘이 빠지고, 손가락이 뻣뻣해지며 감각이 둔해질 무렵, 드디어 콩밭 고랑에 길이 열리고 바람이 지나간다. 내 가슴으로도 한 줄기 소슬바람이 쏟아져 왔다.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콩이 잘 여물어야 할 텐데 심는 시기가 늦었던 콩이라 걱정되었다. 콩들아, 이제 마음껏 춤을 추며 속성으로 자라렴. 너무 자라서 콩나무가 되어도 말리지 않을게. 저기 가을이 오고 있단다.
첫댓글 어느 분은
들깨순도
콩순도
치는 걸 유투브에서 봤어요
육수 같은 땀방울 먹고 자란
콩 숨 좀 쉬겠어요
일이 이젠 점차 무섭습니다
그쵸?
인내가 고갈 되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