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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8일 입동이라 날씨가 조금 추운 것 같다. 그동안 미루어 왔던 대구수목원 국화축제를 보러갔다. 9시 28분 구포역에서 IPX새마을 열차를 타고 1시간 남짓 걸려서 동대구역에 도착하였다. 동대구전철역에서 대구1호선 전철을 타고 대곡역에 내려 수목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걸으면 20여분 걸리는데 지금은 수목원 가는 길 양옆의 은행나무가 단풍이 들어 볼만하기 때문에 구경하면서 걸어가는게 건강에도 좋고 일거 양득이다.
이때쯤 대구수목원에는 단풍이 참 멋있는데 올해는 단풍나무가 단풍이 들지 않았다. 기대하고 갔었는데 아쉬웠다. 축제장 안으로 들어가니 휴일이 아닌데도 시랍들이 많았다. 국화상태는 완전히 활짝 피어 있었다. 축제를 시작 할때는 모든 국화축제장에서 꽃이 덜 피어 실망했었는데 참 좋았다. 대구수목원에는 유치원아이들이 구경하러 많이 오는데 오늘도 많이 와서 선생님들이 사진 찍는다고 난리다. 1시간 30분 정도 구경하면서 사진 찍고 수목원 식당가에서 식사하고 귀가했다. 4시 20분경에 구포역에 도착했다. 중학생 정도의 학생들이 길에서 손잡고 퍼포먼스인지를 하고있다. 점심식사 한집. 한식부페다. 대구수목원으로 들어가는 길 방랑 시인 김삿갓
김삿갓이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여인은 그제서야 등 뒤에서 누가 엿듣고 있음을 알았는지 약간 당황하는 빛을 보이며 , "산월아 날이 저물었으니 그만 돌아가자 ." 하고 부랴부랴 인풍루에서 내려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 김삿갓은 돌아서는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니 천하의 절색이었다 . 게다가 그녀는 치맛귀를 왼쪽으로 감싸 돌리지 있었다 . 따라서 김삿갓은 그 여인이 기생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
(그렇다면 한 번 수작을 걸어 보아도 되겠군 !)
순간적으로 그렇게 결심한 김삿갓은 멀어져 가는 여인을 뒤 따르며 용기를 내어 큰 소리로 여인의 뒤를 따르는 계집아이를 불렀다.
"애 , 산월아 ! 이리 와 , 나 좀 보고 가거라 ."
여인과 계집아이는 김삿갓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잠시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 그러더니 여인은 돌아서서 가던 길을 다시 천천히 걸어가고 , 계집아이는 김삿갓 앞으로 걸어왔다 .
"저를 부르셨어요 ?"
계집아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김삿갓에게 물었다 .
"네게 부탁을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불렀단다 ." "부탁이라뇨 ? 저에게 무슨 부탁의 말씀을 ...." "내가 편지를 한 장 써줄 테니 , 네가 모시고 있는 너희 집 주인 아가씨에게 전해 다오 ."
그리고 김삿갓은 부랴부랴 행장 속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 다음과 같은 괴상한 편지를 써 주었다 .
"榴 ! 金笠 "
계집아이는 김삿갓이 건네 준, 종이쪽지를 받아 들고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 "무슨 편지가 이런 편지가 있어요 ? " 하고 힐난했다 .
거지 차림의 불량배가 장난을 치는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김삿갓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
"너는 몰라도 되는 일이다 . 그러나 너희 아가씨만은 이 편지의 뜻을 잘 알 것이다 . 만약 이 편지의 내용을 알아보지 못하겠거든 답장을 주지 않아도 좋으니 , 너희 집 주인에게 전해주기만 하여라 ."
계집아이는 시답지 않은 듯 김삿갓의 옷 주제를 잠시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여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 버리는 것이었다 . 김삿갓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 아득히 멀어져 가는 두 여인의 뒷모습을 그윽히 바라보았다 .
...
김삿갓이 이름조차 알 지 못하는 생면부지의 기생에게 써보낸 <榴 >자는 오래 전에 송도 (松都 ) 명기 황진이가 그 이름을 만천하에 떨치고 있을 때 , 한양에서 풍류객으로 소문 높은 소세양 (蘇世讓 )이라는 거유 (巨儒 : 큰 선비 )가 개성 만월대 (滿月臺 )에 놀러 왔다가 정자 위에서 황진이를 우연히 마주친 일이 있었다 .
이때 소세양은 첫눈에 황진이의 미모와 재주에 반해 수작을 걸어 보았다. 그러나 황진이는 소세양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 총총히 돌아가 버린 일이 있었다 . 이에 소세양은 즉석에서 편지를 한 장 써서 방자를 시켜 황진이에게 보내게 되었으니 , 그때 보낸 편지의 내용이 바로 <榴 >라는 글자 한 자였던 것이다 .
우리말로 <석류나무 유 >로 읽히는 글자를 한문으로 바꾸면 <碩儒那無遊 (석유나무유 )>가 된다 . 이것을 우리 글로 풀게 되면 <큰 선비인 내가 여기 와 있는데 , 너는 어째서 나와 함께 놀아 줄 생각 없이 그냥 돌아가 버리느냐 >하는 뜻이 되는 것이다 .
소세양은 그런 뜻에서 <碩儒那無游 >라는 글 대신에 외 자인 <榴 (석류나무유 )>를 써 보낸 것이었다 . 김삿갓은 그와 같은 옛날 일이 불현듯 떠올라 , 짐짓 장난삼아 <榴 >자 편지를 써 보낸 것이었다 .
그때 황진이는 소세양의 편지를 대번에 알아보고 즉석에서 답장을 써 보냈는데, 그때 황진이가 보낸 답장은 <漁 (어 )>라는 글자 한 자뿐이었다 .
그렇다면 황진이가 답장으로 보낸 한 자뿐인 <漁 >자는 무슨 뜻이었을까 . <漁 > 자를 우리말로는 <고기잡을 어 >라고 부른다 . 이것을 소세양이 보낸 한 글자의 해석대로 한문 글자로 바꾸게 되면 <高妓自不語 (고기자불어 )>가 되는 것이다 . <高妓自不語 >란 <품위가 높은 기생은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
소세양이 보낸 편지에 대한 명기 황진이의 대답은 실로, 변죽을 두드려 복판이 쩡쩡 울리는 기가 막힌 대답이었던 것이었다 . 소세양과 황진이는 그날의 주고받은 편지가 인연이 되어 , 그 후에는 뜨거운 사이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
김삿갓은 어렸을 때, 서당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었기에 , 이 날 , 그 옛날 소세양의 수법을 이용하여 , 여인에게 <榴 >자 편지를 자기 이름으로 보냈던 것이었다 . 그리고 답장이 오기를 한참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노라니 , 이윽고 계집아이가 달려오더니 답장을 전해주고 부리나케 달아나 버리는데 . 답장의 내용을 읽어 본 김삿갓은 깜짝 놀랐다 .
김삿갓이 깜짝 놀란 이유는 답장의 내용이 기가 막혔기 때문이었다.
榴字書翰則 巨儒蘇世讓之書翰也. 勿爲剽竊 .... 秋月 (류자서한즉 거유소세양지서한야 , 물위표절 .... 추월 ) 榴 자 편지는 거유 소세양이 썼던 편지이니, 그대는 남의 글을 자기 글인 양 함부로 표절하지 말지니라 ... 추월
김삿갓은 답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월이라는 기생이 소세양과 황진이의 고사를 알고 있다는 일도 놀라운 일이거니와 , 더구나 <남의 글을 제 것인 양 쓰지 말라 >는 꾸지람을 보내온 데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음 --- 추월이라는 기생은 보통 기생이 아닌 모양이로구나 !)
이러다 보니 김삿갓은 답장을 보내온 추월이라는 기생에게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어젯밤 만호재 서당에서 아이들이 말한 추월이라는 기생 이름을 들은 바도 있거니와 , 만호재 훈장 변대성의 처제 이름도 기생 추월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던가 ? 그리고 추월은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지만 , 시를 특별히 잘 지어 , 엔간한 선비는 거들떠도 안 본다는 말도 하지 않았던가 .
김삿갓은 이렇게 명성이 자자한 일등 명기를 인풍루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장난 편지를 보냈다가 <남의 글을 함부로 표절하지 말라 >는 훈계를 받았으니 , 세상에 이처럼 기가 막히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
김삿갓은 추월이 보내온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어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웃었다 .
"허허허 ... 추월이 나를 ‘남의 글이나 표절하는 협잡배 ’로 알고 있는 모양이니 , 추월이와 한번 어울려 보기는 영영 틀린 일이 되겠구나 !"
김삿갓은 추월이가 이처럼 도도한 기생이라면 꼭 한 번 어울려 보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협잡배로 낙인이 찍혀 버렸으니 , 이제는 그녀와 어울려 볼 기회가 영영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
(헛 참 ! 추월과 나는 인연이 없어도 보통 없는 게 아닌가 보구나 . 그런데 , 지난 날 노상에서 점을 쳐보았을 때 , 점쟁이가 ‘강계에 가면 귀인을 만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겠다 ’고 하지 않았던가 ? 허허… 그 점쟁이 허튼 말에 , 공연히 마음만 들떴군 ! ... 쯔쯧 , 에라 ! 이제는 모든 것을 단념하고 절 구경이나 다녀야 하겠군 .)
김삿갓은 다음날부터 강계에 있는 절을 하나씩 구경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봉향산 (奉香山 ) 법장사 (法藏寺 ), 백운산 (白雲山 ) 영각사 (英覺寺 ), 선주산 (善住山 ), 심원사 (深原寺 )등을 돌아보았다 .
김삿갓이 들른 심원사에선 칠십이 넘어 보이는 스님 하나가 김삿갓을 보고 깜짝 놀라며, "아니 , 삿갓 선생께서 이 깊은 산중까지 웬일이십니까 ?" 하며 반기는 것이었다 .
너무도 뜻밖의 일이어서 김삿갓은 스님에게, "스님은 어떻게 저를 아시옵니까 ? " 하고 물으니 , "저는 금강산 불영암에서 공허 (空虛 ) 스님을 모시고 있던 범우 (凡愚 ) 화상 입니다 . 나뭇잎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고 하더니 , 저도 이제는 고향에 돌아와 이 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 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예전에 금강산에서 만났던 기억이 새로웠다 .
"반갑습니다 . 스님 , 그동안 건강히 지내셨는지요 ?"
이렇게 범우 스님과 반가운 해후를 한 김삿갓은 심원사에서 여러 날을 묵는 동안에 스님에게 강계 지방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강계 고을은 워낙 궁벽한 산촌인지라 , 글을 숭상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삿갓 선생의 문명 (文名 )을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 강계에는 시를 잘하는 추월이라는 기생 하나가 독보적 존재라 할까 ..."
"추월 "이라는 말을 듣고 , 이번에는 김삿갓이 놀랐다 .
"추월이라면 , 시를 잘한다는 기생 말씀입니까 ?" "추월은 재주가 비상한 기생이지요 . 일전에 우리 절에 들렀기에 , 이런 말 저런 말 하다가 , 선생께서 금강산에서 공허 스님과 시 짓기 내기를 하셨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요 . 그랬더니 추월은 별안간 얼굴이 새빨게지면서 , ‘김립이라는 분이 그렇게도 유명한 시인입니까 ? ‘하고 물어보는 거예요 . 그래서 제가 ‘지금 우리나라에서 삿갓 선생을 당해 낼 시인은 아무도 없을 것 ’이라고 큰소리를 쳐보였답니다 ."
"하하하 , 당치않은 과찬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 그려 ."
"과찬이 아니라 사실이지 뭡니까 . 공허 스님께서도 ‘삿갓 선생이야 말로 시에 있어서 당대의 일인자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 그런데 추월은 내 말을 듣곤 , 다시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이에요 . 어째서 추월이 얼굴을 붉혔는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
범우 스님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때 추월이가 연이어 얼굴을 붉힌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 그것은 추월이 김삿갓이 유명한 시인인 줄을 모르고 인풍루에서 <榴 , 金笠 >이라는 편지를 받고 , ‘그대는 남의 글이나 우려먹는 협잡꾼 ’이라고 호되게 모욕을 주었던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이러나저러나 그런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한 번 , 깨져버린 요강물을 어찌 주워 담으랴 ? 지나가 버린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삶이 아니던가 !)
이런 생각이 든 김삿갓은 얼마 전에 지나간 일을 회상하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김삿갓은 심원사에서 십여 일을 더 지내다가, 동지가 가까워서야 읍내로 돌아왔다 . 그 무렵 강계의 추위는 살을 에이는 듯 맹렬하였다 . 눈은 오는 대로 계속 쌓였고 , 모진 칼바람은 날이갈수록 기승을 부려 솜옷을 입고서도 밖을 나다니기가 어려웠다 .
김삿갓은 싸구려 객줏집을 숙소로 정하고, 날마다 방구석에 들어앉아 술을 마셔가며 책이나 읽고 있었다 . 이렇듯 생전 처음 겪는 북쪽의 추위로 인해 날마다 침울하게 지내자니 따뜻한 남쪽이 그리웠다 .
(대동강도 우수 경칩이 지나야 풀린다고 하는데 , 그보다 훨씬 북쪽인 독로강의 얼음은 언제나 풀릴까 ?)
매일 방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궁상을 떨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럽던 김삿갓, 문득 날을 헤아려 보니 오늘은 내일이면 새해가 되는 섣달 그믐날이었다 .
(허허 ... 덧없는 세월만 가는군 . 내일이면 새해가 되렸다 ?)
김삿갓은 땟국이 꾀죄죄 흐르는 이불때기를 등거리 삼아, 이날도 할 일없이 독서에 열중해 있었다 . 이때 , 대문 밖에서 누군가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 "혹시 이 댁에 유숙하는 손님 중에 김립이라는 분이 계시지 않나요 ?" 하고 묻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러나 김삿갓은 자기를 찾아올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 이름을 잘 못 들은 줄 알고 여전히 책만 읽고 있었다 . 그러자 객줏집 아주머니가 찾아온 사람과 한동안 도란거리더니 방 앞으로 다가오며 , "글쎄요 . 우리 집에는 손님이라곤 한 사람밖에 없지만 그 양반 이름은 모르지요 . 어디 한 번 물어보기나 합시다 ."
그리고 방문 밖에 다가와서 안을 향해 묻는다.
"손님 , 웬 여인네가 김삿갓이라는 양반을 찾아왔는데 , 혹시 손님을 찾는 것은 아닌가요 ?"
김삿갓은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방문 앞에는 두툼한 솜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 여인이 하나 서 있었다 . 머리에는 명주 수건까지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 그러나 여인은 김삿갓을 대번에 알아보았는지 ,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활짝 풀어내더니 , 허리를 공손히 수그려 인사를 하며 말을 하는데 ,
"저는 강계 고을에 기생 추월이라고 하옵니다 . 혹시 선생께서 이십여 일 전에 인풍루에서 쇤네에게 희롱의 편지를 주셨던 김립 선생이 아니시온지요 ?"
김삿갓은 그제서야 추월을 알아보고 내심 크게 기뻐했다.
"이제 보니 그대는 노래도 잘하고 글도 잘한다는 추월인 모양일세 그려 . 나는 자네에게 희롱의 편지를 보냈다가 ‘글 도둑놈 ’이라는 낙인이 찍힌 김삿갓임이 틀림없다네 . 그런데 어떤 일로 나를 이곳까지 찾아왔는가 ?"
추월은 김삿갓이 틀림없음을 알고 나자 잠시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김삿갓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애원하듯 조그맣게 말했다 .
"쇤네는 선생님께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 있사오니 , 방안에 잠깐 들어가게 해 주시옵소서 ." "무슨 애기를 하려는지 모르지만 , 어서 들어오게 !"
김삿갓은 일어서서 추월을 부랴부랴 방안으로 맞아들였다. 추월은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옷매를 바로잡으며 , "쇤네는 선생님을 몰라 뵙고 방자스럽게도 모욕적인 답장을 올린 일이 한없이 부끄럽사옵니다 . 늦게나마 용서를 비는 마음에서 큰절을 올리겠사오니 너그럽게 받아 주시옵소서 ." 하고 김삿갓에게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김삿갓은 당황하였다 .
"이 사람아 ! 자네 같은 미인을 다시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기쁜 일인데 , 용서가 무슨 용서란 말인가 .... 그나저나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어찌 알고 찾아오셨는가 ?"
그러자 추월은 무릎을 단정하게 꿇고 앉아, 차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
추월은 인풍루에서 김삿갓의 ‘榴 ’ 자 편지를 받아 보는 순간 , 김립이라는 불량배가 소세양과 황진이가 주고받은 고사를 이용하여 자기를 유혹하려는 줄 알고 몹시 불쾌하였다 . 그리하여 물위표절 (勿爲剽竊 )이라는 답장으로 김삿갓을 호되게 꾸짖어 주었던 것이었다 .
그리고 그 일이 있을 지 며칠 후, 심원사에 들렀다가 범우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 김삿갓이라는 사람은 운수승 (雲水僧 )처럼 전국 각지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명한 방랑시인이라는 것이 아닌가 . 더구나 그는 그 옛날 금강산에서 대선사 (大禪師 )인 공허 스님과 시 짓기 내기를 한 일이 있었는데 , 공허 스님조차 김삿갓에게 꼼짝을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
추월은 범우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천하의 대시인을 불량배로 잘못 알고 모욕을 주었던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 그리하여 그날부터는 자신의 경망스러웠던 행실을 사과하기 위해 강계 읍내에 있는 객줏집이란 객줏집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김삿갓을 찾아다니다가 , 오늘에서야 간신히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 김삿갓은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뭉클해 오도록 감격스러웠다 .
"이 사람아 ! 내가 자네에게 소세양의 편지를 표절해 보낸 것만은 사실이 아닌가 . 자네가 그 편지가 표절임을 단박에 알아차린 것만 보아도 , 오히려 나는 자네의 풍부한 학식에 정말 놀랐다네 !"
추월은 그제서야 얼굴에 웃음이 들며 말했다.
"황진이와 같은 답장을 저에게서도 꼭 받고 싶으시다면 ,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써 올리겠습니다 ." "하하하 ... 황진이가 소세양에게 보낸 것과 같은 답장을 보내 줄 용의가 있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없네 그려 !"
이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에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로 무르익어 오고 있었다. 추월은 문득 김삿갓의 옷 주제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하는데 , "제 입으로 이런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 선생님을 오늘부터 저희 집에 모시고 싶사오니 허락해 주십시오 ."
김삿갓은 생전 처음 겪는 강계의 엄동설한과 궁핍한 생활에 시달려 온 터인지라 추월의 뜻밖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 사람아 ! 나는 돈 한 푼 없는 처지일세 . 그런 나를 어쩌자고 자네 집에 데려가겠다고 하는가 ..."
그러나 추월은 잠시 샐쭉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저는 돈에 눈이 어두워 선생을 저희 집으로 모셔가고자 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 저의 간절한 소원을 어찌 돈으로 비기겠습니까 . 저는 다만 , 공허 스님조차 당해 내지 못한 선생님의 해박한 지식에 한걸음이라도 접근해 보고 싶어 , 저희 집으로 모셔가고 싶을 따름이옵니다 . 바라옵건데 저의 간절한 염원을 기꺼이 들어 주시옵소서 ."
김삿갓으로서는 고맙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허허허 , 동가식서가숙 (東家食西家宿 )하는 나로서야 자네 집으로 데려가 주기만 한다면 어찌 마다 하겠는가 . 그야말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일세 ."
이리하여 김삿갓은 추월을 따라 숙소를 그녀의 집으로 옮겨갔다. 추월의 집은 인풍루가 멀리 바라보이는 산기슭에 있었다 . 비록 집은 초가집이었으나 , 몸체와 아래채가 규모 있게 짜여진 아담한 집이었다 .
게다가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안마당 한복판에 백 년도 훨씬 넘어 보이는 오엽송 (五葉松 ) 한 그루가 있어서 , 백설이 만건곤한 한겨울에 독야청청한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
"마당에 멋들어진 소나무가 있는 것을 보니 , 자네는 소나무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네 그려 ." "저는 이 소나무 한 그루를 보고 이 집을 엄청나게 비싼 값을 주고 샀사옵니다 .”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방안으로 들어오니, 바람벽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한 폭 걸려 있었다 .
富貴功名可且休 (부귀공명가차휴 ) 인간사 부귀영화 탐하지 말고 有山有水足敖遊 (유산유수족오유 )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노닐어 보세 與君共臥一間屋 (여군공와일간옥 ) 정든 님 모시고 호젓한 오두막에서 秋風明月成白頭 (추풍명월성백두 ) 갈바람 밝은 달과 함께 늙어나지고 .
89. 술 많이 마신다고 타박 말게 , 지금은 부질없는 백발만 남았으니 ... (莫怪今多把酒頻 , 世上空留白髮身 ...)
김삿갓은 시를 읽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는 조운 (朝雲 )이라는 기생이 남지정 (南止亭 )에게 보낸 시가 아니었던가 ?" "그러하옵니다 . 저는 이 시를 유난히 좋아하여 하루에도 몇 차례 읽어 보며 혼자 즐거워하옵니다 ." "이런 시를 즐기는 것을 보니 , 자네도 산수를 어지간히 좋아하는군 그래 ."
김삿갓은 추월이 떠다 바치는 대야물을 받고 세수를 한 후 아랫목에 주저앉으니, 추월은 새 옷 한 벌을 가지런히 갖다 놓으며 말하는데 , "저녁을 드시기 전에 옷을 갈아 입으시옵소서 . 옷이 몸에 맞으실지 모르겠사옵니다 ."
김삿갓은 새 옷을 보고 적이 놀랐다.
"아니 , 자네 집에 웬 새 옷인가 ?"
혹시나 정부가 입던 옷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 김삿갓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느껴졌다. 추월은 그런 눈치를 재빨리 알아채고 ,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나무랐다 .
"저는 집에 남자 옷을 준비해 둘 만큼 다정한 남자는 없사옵니다 ." "그럼 , 이 옷은 웬 옷인가 ?" "범우 스님으로부터 선생 말씀을 듣고 나서 , 혹시 선생께서 저희 집에 오시게 되면 드리려고 일부러 지어 둔 옷이옵니다 ."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너무도 감격스러워 가슴이 뭉클했다.
"그럼 , 이 옷은 나를 위해 일부러 지은 옷이란 말인가 ? "
추월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인풍루에서 선생을 순간적으로 만나 뵈었을 때 , 옷이 너무도 남루해 보였기에 …”
추월은 거기까지 말하고, 이마를 약간 찌푸려 보이며 , "눈짐작으로 지어 놓았기 때문에 , 몸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
김삿갓이 옷을 입어 보니, 화장과 길이가 놀라울 정도로 잘 들어맞았다 . 게다가 솜까지 두툼하게 넣어서 , 전신이 금방 훈훈해왔다 .
"이 사람아 ! 이 옷은 마름질이 정확한 것을 보니 , 맞춤 옷 같네 그려 . 그러고 보니 자네는 눈썰미가 대단한 사람인 걸 ." "옷이 잘 맞는다 하시니 기쁘옵니다 . 이제는 술을 한잔 드시면서 강계 명물인 두부장찌게와 싸장찌게 맛을 한번 보아 주시옵소서 ."
저녁상은 결코 요란스럽지 않았다. 술은 강계 특산인 인삼주였고 , 더덕 구운 것과 강계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두부장 찌게와 싸장찌게는 독특한 것이었다 .
"아 , 이거 참 , 향기가 기막히구려 . 이런 향기는 처음 맛보는 향기인데 , 도대체 두부장이라는 것은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 "두부장은 날두부를 베 보자기에 싸서 된장 속에 오래 묻어 두면 , 두부가 된장 맛과 혼합되어 독특한 맛을 내게 되는데 , 이때 두부가 기름 덩이처럼 흐물흐물해집니다 . 그것을 두부장이라 하지요 ." "음 -- 향기가 천하의 일미인걸 ! 싸장찌게 맛도 기막히군 그려 ." "싸장은 기장쌀로 밥을 지어 두부장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드는데 , 그것은 그것 대로 또 다른 향취가 나옵니다 ." "음 -- 두부장찌게와 싸장찌게가 천하의 일품인 데다가 자네 같은 미인까지 앞에 있으니 , 이제야 말로 강계에 왔다는 실감이 절실하네 그려 , 하하하 ..."
김삿갓은 기분이 너무도 좋아 통쾌하게 웃었다.
이렇게 옷을 새로 갈아입고 맛나는 음식을 안주삼아 인삼주를 몇 잔 마시고 나니, 술이 거나하게 올라오는데 김삿갓 자신은 마치 자기 집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
그리하여 이런 수고를 마다않는 추월을 향해 치사의 말을 건네는데, "여보게 , 추월이 ! 나는 오늘밤처럼 호사를 해보기는 난생 처음이네 . 내가 어쩌다가 자네 같은 미인을 만나 이런 호강을 누리는지 , 정말 꿈만 같네 그려 ."
그러자 추월은 술을 공손히 따라 주며 가냘픈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범우 스님으로부터 선생은 무진 고생을 해 오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오니 모든 시름을 잊으시고 , 술을 마음껏 드시옵소서 ." "아 참 , 그러고 보니 오늘이 섣달 그믐 이렸다 ? 그렇다면 왜 , 섣달 그믐날 밤에는 잠을 자지 않고 새해를 맞는 풍습이 있지 않은가 ?" "강계에도 그런 풍습이 있사옵니다 ." "그렇다면 술이나 마셔 가며 , 우리 시 타령이나 한번 해보세 그려 ."
그리고 김삿갓은 술잔을 비워, 추월에게 잔을 건네 주며 말했다 .
"오늘이 제야 (除夜 )라니 , 나의 고향 사람인 신응조 (申應朝 )가 지은 <제야 >라는 시를 한 번 읊어 보겠네 ."
莫怪今多把酒頻 (막괴금다파주빈 ) 술 많이 마신다고 어줍게 생각 말게 明朝七十歲華新 (명조칠십세화신 ) 내일 아침이면 내 나이 일흔 살일세 夢中猶作靑年事 (몽중유작청년사 ) 좋은 청춘 꿈결같이 헛되이 보내고 世上空留白髮身 (세상공유백발신 ) 지금은 부질없는 백발만 남았다네 .
김삿갓은 술이 거나해 오자 고향 생각이 불현듯 간절하여 고향 선배의 시를 무심결에 읊었던 것이었다. 추월은 가냘픈 애수를 지으며 말했다 .
"선생은 칠십이 되시려면 아직도 멀었사온데 어찌 이같이 나약한 시에 자신을 비교하십니까 ? 혹시 오늘이 그믐날 밤이라서 고향이 그리워 그런 시를 읊으신 것은 아니옵니까 ?" 하며, 선반 위에서 거문고를 그윽히 끌어내려 잠시 줄을 고르는가 싶더니 , "매우 외람되오나 , 제가 자작시 한 수를 거문고에 실어 선생의 시름을 달래 드리겠사옵니다 ." 하고 즉석에서 거문고를 타며, 은율에 맞추어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읊어 주는 것이었다 .
♪~♩ 歲暮寒窓客不眠 (세모한창객불면 ) 이 해가 지나는 밤 나그네 잠 못 들고 ♪~♩ 思兄憶弟意凄然 (사형억제의처연 ) 형님 생각 아우 생각 심사가 처량하오 ♪~♩ 孤燈欲滅愁歎歇 (고등욕멸수탄헐 ) 등잔불 가물가물 시름 참기 어려워 ♪~♩ 泣抱朱絃餞舊年 (읍포주현전구년 ) 거문고 껴안고 가는 해를 보내노니 ...
90. 천지자만물지역여 (하늘과 땅은 만물의 객줏집 같다 )
김삿갓은 추월의 거문고 솜씨도 대단했지만, 시를 그렇게까지 잘 지을 줄은 몰랐다 .
"허어 ! 강계 같은 벽촌에 자네와 같은 훌륭한 시인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네 ! 과연 , 자네의 실력은 허난설헌 (許蘭雪軒 )이 무색할 지경이네 그려 ." "과찬의 말씀이시옵니다 . 실은 외람되게도 제가 먼저 시를 읊은 것은 선생께서 손수 지으신 시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부디 한 수 들려주시옵소서 ."
시를 읊게 하려는 수법이 교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하하 , 자네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솜씨가 기막히군 그래 ! 그럼 , 자네가 나의 시름을 <제야 >라는 시로 달래 주었으니 나는 그 운자 (韻字 )로 화답을 해야 되겠군 그래 ."
그러자 추월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 제가 어찌 선생께 화답 시를 바라겠사옵니까 ?" "그러면 나더러는 어떤 시를 지으라는 말인가 ?"
추월은 잠시 말이 없더니, 문득 고개를 힘차게 들며 말했다 .
"범우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 선생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곳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 한평생을 죽장망해로 살아 오셨다니 , 그동안의 인생에 대한 남다른 점이 많으시리라 생각되옵니다 . 그런 점을 시로 읊어 주신다면 저에게는 많은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
추월의 주문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하하하 ... 이제 보니 자네는 나에게 술을 몇 잔 먹여 놓고 , 시를 빙자하여 나를 빨가숭이로 만들 작정을 한 모양이군 ." "저는 선생의 인생관에 대해 꼭 듣고 싶습니다 ." "이 사람아 ! 자네의 주문대로 시를 짓자면 , 인생관 뿐만 아니라 , 천지만물의 우주관까지 송두리째 털어 놓아도 부족할 것 같구먼 !" "저는 오래 전부터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를 좀 더 깊이 알고 싶어 가르침을 받을 만한 선생님을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 외람된 부탁이오나 삿갓 선생님께서는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시옵소서 ."
김삿갓은 스승이라는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 나더러 애인이 되어 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환영하겠네 . 그러나 나 같은 걸객이 자네의 스승이 될 수가 있단 말인가 !"
김삿갓은 농담 삼아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고 다시 말했다.
"그럼 , 이왕 말이 났으니 자네의 소원대로 시를 한 수 지어 보기로 하겠네 . <하늘과 땅은 만물의 객줏집 같다 >는 뜻으로 <천지자만물지역여 (天地者萬物之逆旅 )>라는 제목으로 시를 한번 지어 보기로 하겠네 ."
말을 마친 김삿갓이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시상을 가다듬자, 추월은 부랴부랴 붓과 종이를 김삿갓 앞에 갖다 놓았다 . 이윽고 눈을 뜬 김삿갓은 붓을 들기가 무섭게 먹을 찍어 거침없이 휘갈겼다 .
造化主人蘧盧場 (조화주인거노장 ) 천지는 조물주가 만든 객줏집과 같은 것 隙駒過看皆如許 (극구과간개여허 ) 말을 달리며 틈새로 엿보는 것 같도다 . 兩開闢後仍朝暮 (양개벽후잉조모 ) 낮과 밤이 두 개의 세계로 서로 엇갈려 一瞬息間渾來去 (일순식간혼래거 ) 눈 깜빡할 사이에 오고 가고 하노나 .
추월은 꼼짝도 하지 않고 김삿갓의 일필휘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김삿갓의 시는 첫 구절부터가 실로 웅장하고 거창했기 때문이었다 . 별로 깊이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건만 그의 붓끝에서는 마치 강물이 도도하게 흘러내리듯 웅장한 시가 연성 흘러나왔다 .
回看宇宙億千劫 (회간우주억천겁 ) 돌아보면 우주는 억천만 년 내려오는 것 有道先生昨宿所 (유도선생작숙소 ) 뜻 있는 선비들이 간밤에 자고 간 곳이네 無涯天地物有涯 (무애천지물유애 ) 만물은 끝이 있어도 천지는 끝이 없나니 百年其間吾逆旅 (백년기간오역려 ) 백 년쯤 살고 가는 나의 객줏집이다 .
蒙仙礨 空短長篇 (몽선뢰공단장편 ) 몽선의 현묘한 이야기 짧고 긴 수수께끼 釋家康莊洪覆語 (석가강장홍복어 ) 석가도 번잡한 거리에서 많이 떠들었지만 區區三萬六千日 (구구삼만육천일 ) 구구하게 살아온 그들의 백 년 세월도 盃酒靑蓮如夢處 (배주청연여몽처 ) 연꽃 잎에 고인 한 잔 술처럼 허망하도다 .
東圓桃李片時春 (동원도이편시춘 ) 봄 동산에 잠시 피는 복사꽃 오얏꽃은 一泡乾坤長感舒 (일포건곤장감서 ) 하늘땅이 내뿜는 숨결과 같은 것 光陰倏去倏來局 (광음숙거숙래국 ) 광음이 화살처럼 오가는 이 마당에서 混沌方主方死序 (혼돈방주방사서 ) 죽고 사는 일이 어지럽기만 하구나 .
人惟處一物號萬 (인유처일물호만 ) 인간은 한 번 살고 가더라도 만상은 복잡하여 以變看之無臣細 (이변간지무신세 ) 변화의 면에서 보면 크고 작음이 없나니 山川草木成變場 (산천초목성변장 ) 산천과 초목은 끊임없이 바뀌어 가고 帝伯侯王飜覆緖 (제백제왕번복서 ) 제왕과 호걸조차 흥왕이 항상 번복되도다 .
김삿갓은 단숨에 이렇게 써 갈기고 붓을 던지고 추월을 바라보았다.
"이 시는 나의 우주관을 솔직하게 고백한 시일세 . 이 시에 대한 자네의 소감은 어떤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