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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례
이남희
과거청산의 ‘모범’ 사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우리에게 낯설고 먼 나라이다. 하지만 반세기 가까이 권좌를 차지하고 독재와 인종차별을 자행해온 국민당 정권이 물러나고 장기수 출신 넬슨 만델라로 상징되는 민주화세력이 1994년 집권한 이후 진행된 과거청산 과정에 대해서는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알려진 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과거청산기구인 「진실과 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는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의문사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2000년 구성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모델로 참조했다. 이렇게 관심을 끌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우선 우리 사회가 지난 수 년 간 진행된 정치적 변화를 거치면서 과거청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식민지, 전쟁, 독재의 시기를 차례로 거치면서 누적된 갈등의 고리를 어떻게 풀고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냐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최근 몇 년간 정치적 현안인 동시에 학술적인 이슈로 부각되었다. 사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과거청산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지난 10년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과거청산은 세계 각국의 언론인, 정치가, 학자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위원회 활동을 했던 인사들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 방문학자나 강연자로 초청받았다. 이렇게 세간의 기대와 주목을 끌게 된 이유는 세계정치와 경제에서 아프리카의 대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갖는 위상이 중요한 탓도 있지만, 청산 과정에서 진상 규명과 국민적 화해라는 잡기 어려운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좇은 이상적인 사례라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과거청산작업은 국내의 통합을 이루는데 한 몫 했을 뿐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이미지를 바꾸어 놓았다. 한 때 인종차별을 자행하는 독재국가로 국제 스포츠 경기에도 출전이 금지될 정도로 따돌림 받던 나라가 이제 본받을 만한 민주적 이행 사례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1996년 4월부터 2년에 걸쳐 피해자와 가해자를 주 대상으로 실시했던 청문회 실황은 국내뿐 아니라 외국의 유수 방송사를 통해서도 중계되었다. 한동안 만델라, 청문회, 로빈섬(Robben Island:만델라가 장기 복역했던 감옥이 있던 섬)은 민주주의에 관심이 있는 국제 인사라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할 때에 반드시 만나거나 들러야할 코스로 여겨지기도 했다. 한 나라의 자랑스러운 과거뿐만이 아니라 부끄러운 과거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문화적인 자산이 되고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인종주의에 기반을 둔 독재체제였던 남아프리카와 달리 단일 민족이면서 분단이란 상황 속에서 독재를 겪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만델라 대통령이나 용서와 화합을 앞세워 파국적 충돌을 피해가는 데 기여한 투투(Desmond Tutu) 대주교 같은 인물도 당장 떠올리기도 힘들다. 이렇게 상황이 다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과거청산으로부터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참조하고 배울 수 있을까? 만일 이상적인 모델로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례를 찬양하는데 그친다면 과거청산의 내용이나 절차를 둘러싸고 합의가 쉽사리 도출되지 않는 우리와의 격차만 오히려 더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외부에서 보기에 혹은 공식적인 담론 수준에서는 합의 속에 순조롭게 진행된 것 같은 남아프리카의 과거청산이지만 사실은 그 과정에서 치열한 논란과 갈등, 협상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바로 논쟁과 입장 차이를 중심으로 남아프리카의 과거청산 과정을 재조명하고 성과를 평가해보도록 하겠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구성과 임무
한 나라의 과거청산이란 한 시대를 지배한 패러다임의 변화와 연관되어 있다. 단지 정권만이 아니라 가치관, 역사의식 등이 같이 바뀌어야 과거를 새롭게 대면하고 평가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특정 과거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은 결국 그 시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차이와 갈등을 그대로 보여주는 축소판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과거청산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민주화를 통한 정권 교체와 더불어 인종주의와 폭력, 이데올로기의 남용에 의존해서 통치하던 시대가 스러져간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권 교체 다음 해인 1995년 ‘국민통합 및 화해 증진법(The Promotion of National Unity and Reconciliation Act)’이 제정되고 그 결과 「진실과 화해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청산 작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된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위원장을 포함해서 17명의 위원으로 이루어진 중앙위원회와 인권위, 사면위, 보상위의 3개 소위 및 사무국과 조사국 등 실무부서로 구성되었다. 중앙위원회의 위원은 정파, 시민단체별, 성별, 인종, 분야, 지역별로 골고루 안배해서 공개적인 추천 및 선정절차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했다. 위원장은 성공회 주교이자 인권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1984년)한 바 있는 투투가 맡았다. 인권위가 주로 피해자에 대해 다루었다면 사면위는 가해자에 대해 다루었다. 인권위나 보상위는 정부에 권고하는 권한을 가진 반면 사면위는 직접 사면을 부여하는 사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임무는 a)1960년 3월 1일에서 1994년 5월 10일 사이에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내외에서 발생한 중대인권침해 사건의 구체적인 상황과 원인을 피해자 및 가해자의 관점에서 조사하고 b)가해자의 경우 정치적 동기를 가진 사건에 한해서 사실을 전면 밝히는 조건으로 사면을 부여하며 c)피해자의 행방 조사, 인간 및 시민으로서 존엄성회복, 적절한 보상책 등을 정부에 권고하고 d)위원회가 벌인 활동이나 발견을 토대로 장차 동일한 인권침해가 재발하지 않도록 권장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간하는 것이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1998년 10월 만델라 대통령에게 5권의 보고서를 헌정했다. 그 후 사면위와 보상위의 활동을 마무리한 보고서 6, 7권이 2003년에 추가 발간됐다. 활동 기간 중 21,290건에 달하는 피해자 진술서를 받았고, 그중 19,060건 정도가 인정됐으며 사면신청 과정에서 2,950명의 피해자가 추가됐다. 사면위에는 7,112명이 사면을 신청했고 그중 2000년 11월 1일 기준으로 849명이 사면을 부여받았으며 2001년에 287건에 대한 사면이 추가되었다. 2003년 3월 최종 보고서 6,7권이 완간될 당시 총 1200명이 사면을 받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조사대상은 ‘중대인권침해’로 제한했는데, 그 내용은 ‘사람에 대한 살인, 유괴, 고문, 가혹행위를 하거나 그 행위를 하는데 가담, 모의, 선동, 명령, 주선하는 것’을 의미했다.
과거청산 과정에서 피해자 문제와 가해자 문제는 둘 다 핵심적인 의제이며 상호 연관되어 있지만 그 해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피해자에 대해서는 사회와 국가가 피해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 경험에 귀를 기울여 주는 자리가 우선 필요하다. 보상과 복권을 위한 후속 조치도 물론 뒤따라야 한다. 반면 가해자에 대해서는 가해 사실을 입증하고 행위의 책임 소재를 일단 밝혀야 하는데 그 경우 증거와 자백이 뒷받침되어야한다. 피해자와 달리 가해자는 자신의 과오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고 보복이나 처벌이 우려되는 경우 과거청산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다. 아무리 피해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가해자가 입을 닫거나 책임을 회피해버리면 반쪽짜리 과거청산이 될 수밖에 될 수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설치, 운영 과정에서도 특히 가해자에 대한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관심과 논란이 집중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역사적 배경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우리에게 낯선 나라이니 만큼 왜 이런 과거청산 작업이 필요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식민화, 인종차별, 독재, 폭력적 갈등이 이어진 역사적 배경을 간단히 스케치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1488년 포르투갈의 배가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아서 가다 희망봉을 ‘발견’한 이래 남아프리카 지역은 서구의 제국주의 역사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남단의 중심도시 케이프타운은 동쪽으로 가는 항로의 중간 기착지로 장기 항해에 필요한 채소나 과일 등 물자를 대주는 곳이었다. 채집이나 유목, 사냥에 익숙한 원주민 대신 농사를 지을 일손을 얻기 위해 한 때는 멀리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노예를 수입하기도 했다. 대부분 무슬림인 이들은 지금도 수는 적지만 인종 구성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백인들은 처음에는 네덜란드에서 건너왔고, 18세기말부터 영국인의 진출이 부쩍 늘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사람들도 남아프리카로 들어왔다.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딴 간디도 한때 북부의 도시 나탈(Natal)에서 개업을 했다. 간디가 기차에서 백인 전용 칸에 탔다가 3등 칸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당한 곳도 남아프리카였다. 훗날 국민당 정권은 모든 국민을 인종별로 나누면서 원주민인 흑인과 식민지배층인 백인 이외에 아시아인, 인도인, 혼혈인의 범주를 더했다.1)
1860년대 다이아몬드광산이 개발되고 1886년 금광이 발견되면서 노동력의 수요는 크게 늘어나고 식민지로서 정치적 비중도 커졌다. 그 결과 줄루, 코사 등 여러 부족으로 구성된 원주민, 선이주민인 네덜란드계 백인2), 나중에 온 영국계 백인 사이에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끊이질 않았다. 영국은 안전한 광물 채굴과 수송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정치적 지배권을 강화하길 원했다. 이는 결국 1899-1902년 남아프리카전쟁(보어전쟁)을 일으키는 동기로 작용했다. 자신들을 이주민이라기보다 아프리카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네덜란드계 백인들은 영국의 제국주의와 원주민의 저항에 이중적으로 맞서는 과정에서 강한 민족주의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1934년 말란(D. F. Malan)이 주도하는 순수국민당이 탄생하고 ‘분리’를 뜻하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는 슬로건을 처음으로 내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경제변화가 일어나면서 흑인노동력의 도시 집중, 흑인 노조 활성화가 진행되고 백인의 독점영역이던 숙련분야에도 진출하면서 백인들의 위기의식이 조성되었다. 순수국민당은 국민당(National Party)으로 이름을 바꾸고 1948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국민당은 1994년 만델라가 이끄는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 National Congress, 약칭 ANC)에 정권을 내줄 때까지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
국민당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미리부터 원대한 구상(Grand Plan)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실행된 것이었는지, 국민당 집권 이전부터 시행되던 인종차별 정책과 그때그때 상황에 대응한 억압조치의 우연적 합성물인지는 논란거리이다. 분명한 것은 국민당 집권 이후 각종 인종분리를 제도화하는 입법이 제정, 실시되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로 1950년 실시된 주민등록법(Population Registration Act)에서는 인종에 따라 그룹을 나누었다. 주민등록증에 백인, 혼혈인, 흑인, 인도인, 아시아인으로 구분해서 명시했을 뿐 아니라 거주지, 상점, 해변 등 모든 시설을 인종별로 나누어 쓰도록 하는 인종별 거주지역제한법(Group Areas Act)도 실시했다. 자기가 속하는 인종에게 배당된 지역이 아닌 곳에 살고 있던 사람은 강제로 이주시켰다. 부도덕방지법(Immorality Act)을 도입해서 인종 간의 결혼을 금했을 뿐 아니라 이미 함께 살고 있는 다른 인종의 부부도 떼어놓았다. 1958년부터 도입된 통행제한법(Pass Law)에 의하면 다른 인종 구역을 지날 때는 반드시 통행허가증이 있어야 했고 불시에 검문해서 증이 없으면 경찰서로 끌고 갔다. 통행허가증 제도는 당장 백인 지역을 드나들며 생계를 잇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제도였으므로 반발이 컸다. 백인들은 노동력으로서 흑인이 필요했지만 질병이나 범죄를 옮긴다는 이유로 너무 가까이에 너무 많이 있는 것은 원치 않았으므로 도시로 유입되는 흑인의 자격이나 수를 제한했다. 광산 지역의 경우 가족을 데려오지 못하게 하고 남자 혼자 와서 호스텔이라 불리는 합숙소에 집단 거주하게 했다.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에이즈의 높은 감염률은 바로 이런 독신 거주 관행으로 인한 성생활 패턴 변화와 연관 있다는 분석이 있다. 도시지역에서 청소부나 가정부 등 온갖 허드레 잡일을 전담하는 흑인들은 백인들의 안정된 주택가와 적당한 거리에 살면서 통근하도록 흑인집단거주구역인 타운쉽으로 내몰렸다.
1960년대는 소위 ‘아파르트헤이트 강화기(High Apartheid)’라고 불린다. 제 구역이 아닌 곳에 사는 흑인들을 대거 강제 이주시키고, 흑인 자치구역을 만들어 그 안에서만 참정권을 허용하고, 부족을 인위적으로 재구성하는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군경을 동원한 정부의 감시를 강화했다. 인종적 위계에 대해서는 감춘 채 ‘분리해야 발전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는데 정부의 이런 정책은 1960년대 아프리카 대륙을 휩쓴 탈식민 독립운동의 영향을 우려한 것이기도 했다. 1960년 3월 21일 흑인거주지역인 샤프빌(Sharpeville)에서 통행증 발급 및 소지에 반대하는 대중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이 발포해서 67명이 사망하고 150명이 부상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일로 국내에서 저항운동 세력이 불법화되는 한편 국제적으로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정책의 혹독함이 알려지게 된다. 훗날 과거청산에 나선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는 바로 이 날을 청산해야할 과거사의 기점으로 삼았다.
반세기에 걸친 국민당의 독재체제는 1994년에 끝이 났지만 사실 국민당 정권의 위기는 이미 80년대 말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국민당 정권은 백인우월주의와 더불어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에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의존해왔다. 정권 측은 반정부 활동이나 인종주의 반대운동을 모두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로 돌려 탄압해왔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사회주의권이 바뀌고 동서 냉전 구도가 무너지면서 더 이상 만능열쇠로 써먹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인구의 10% 대에 불과한 백인이 80%에 달하는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을 노동력으로는 이용하되 시민권은 주지 않는 체제를 유지하기란 점점 불가능하게 보였다. 결국 1989년 취임한 드 클럭(F. W. de Klerk) 대통령 재임 시기에 이미 정권이양을 대비한 준비가 진행되어야 했다. 구체적으로 만델라 석방, 아프리카민족회의 등 저항운동 세력 해금,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에 대한 총선 선거권 부여를 골자로 한 개혁이 90년대 들어 진전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평화적으로 해체시킬 조건을 마련한 공로로 드 클럭과 만델라는 1993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1994년 4월 모든 인종이 참여하는 첫 총선이 실시된 결과 46년 만에 국민당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그동안 반정부세력으로 취급받던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승리했다. 아프리카민족회의는 비교적 높은 지지율(62.7%)을 획득했으나 콰줄루-나탈(Kwazulu-Natal) 지역을 중심으로 흑인 자치를 주장하고 백인정부와 협조해온 인카타자유당(Inkata Freedom Party, 약칭 IFP)이나 전 집권당인 국민당은 여전히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경제력이나 군부, 치안병력의 핵심은 여전히 소수 백인의 손에 있었다. ‘협상된 혁명’3)의 결과인 정치적 승리는 아직 위태로운 기반 위에 놓여 있었다. ‘국민통합정부’에서 대통령은 만델라, 드 클럭은 음베키(Tabo Mbeki, 현 대통령)와 함께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프레토리아의 대통령관저 앞에 10만의 축하객이 운집한 가운데 치러진 취임식 연설에서 만델라 대통령은 ‘치유의 시대(Time of Healing)’를 주창했다.
과거청산방식을 둘러싼 논쟁-사면이라는 당근
정권교체 후 곧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저질러진 과오나 해결되지 않은 의혹 등을 다루기 위해 과거청산을 추진해야한다는 요구가 현안으로 등장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청산하기 위한 위원회가 필요하다는 발상은 정권교체 전인 1993년 아프리카민족회의 측에서 먼저 나왔다. 아프리카민족회의는 국내에서 불법조직으로 간주되었으므로 탄자니아 등 해외에 망명 캠프를 운영했는데 그곳에서 고문, 성폭행 등 인권유린이 일어났다는 의혹을 당시 받고 있었다. 아프리카민족회의는 자체 진상조사에 나서는 한편, 이 사태는 국민당 정부의 인권침해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아파르트헤이트 기간 중 저질러진 인권침해 전반에 대해 조사할 권한을 가진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다른 정파에게 요구했다. 문제는 방법과 수위였다. 스페인의 망각협정처럼 과거를 아예 들추거나 묻지 않고 넘어가는 방법도 있고, 2차대전 후의 뉘른베르크 재판처럼 책임자를 기소해서 처벌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으며 그 중간의 어디쯤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가를 두고 정파간의 의견대립이 있었다.
전 집권세력은 과거청산을 위한 위원회를 만든다는 구상 자체에 대해 반발했다. 전 남아프리카 방위군 사령관이 이끄는 자유전선(the Freedom Front) 및 남아프리카 경찰은 위원회 운영이 백인에 대한 마녀사냥이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 만일 설치한다하더라도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일어난 일들은 통치행위로서 집단책임을 질 일이며 명령을 받아 시행한 군인이나 경찰 개개인은 개별책임이 없으므로 일괄사면(blanket amnesty)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시민단체인 IDASA4)관계자는 ‘전 국가방위사령관이 집단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고상하게 보일지는 모르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명령의 연결고리를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내가 모든 책임을 다 지겠다고 말하는 걸로 끝인 것보다는 전체 돌아가는 이야기를 알 필요가 있다.’고 반박했다. 21개 엔지오 단체들은 시민단체의 참여 없는 청산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고 결과도 충분치 않을 것이라고 정부에 건의했다. 새 정권의 중심이 된 아프리카민족회의 내부에서도 견해 차이가 있었다. 크게 나누면 뉘른베르크 재판과 같이 철저한 처벌을 지향하는 청산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과 여전히 반대 세력이 건재한 상황에서 장구한 아파르트헤이트의 유산을 일시에 뒤엎을 경우 내란이 일어날 위험이 크기 때문에 응징보다는 사면을 택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1995년 새 정부에 의해 「국민통합과 화해 증진법」이 통과될 때 사면 보장이 기본으로 포함되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진상규명은 철저히 하되 스스로 나서서 사실을 털어놓는 가해자에 대해서는 처벌이 아닌 사면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5) 그 이유는 당시 정치 상황과 권력관계를 통해 설명된다. 과거청산 작업의 수장 역할을 맡은 투투(Desmond Tutu) 대주교는 「진실과 화해위원회」 보고서에서 뉘른베르크 재판식의 청산이 불가능한 이유를 이렇게 정리했다. ‘우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해방운동 측이 제2차대전 이후 연합국처럼 ‘승자의 정의’를 행사할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또한 전 정권 관련자들은 만일 자신이 과거 저지른 일로 혹독한 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면 협상을 깼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평화로운 이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이미 1990년대에 국민당을 포함한 중요 정치세력이 정권 이양에 대비한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저질러진 불법 행위에 대해 처벌하지 않고 사면을 제공한다는 합의가 만들어졌다. 당시 아프리카민족회의 측 협상 대표였던 오마르(Dullah Omar)는 이렇게 전한다. ‘우리 과도헌법에 삽입된 사면 조항은 정치적 협상의 결과이다... 만일 사면 조항이 없었더라면 정치적 안정도 없었을 것이다. 사면 조항은 민주선거를 실현하기 위한 노정에서 필요한 이슈 중의 하나였다.’ 만일 사면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국민당은 새 정권에 협조하지 않고 맞설 것이 분명했다. 아프리카민족회의 소속 국회의원 호프메이어(Willie Hofmeyer)는 ‘우리는 이미 일찍부터 완전한 정의를 실현하기는 어렵겠다는 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과정에서 여러 가지 타협안이 마련되어야했는데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해 그런 타협안을 강력히 지지했다. 우리는 혁명을 취하고 협상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협상하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우리를 과거에 가혹하게 다루었던 이들, 그래서 우리가 아주 싫어하는 이들과 더불어 살고 일하며 이 나라를 다시 세워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결정은 과거 정권에서 저질러진 불법행위를 밝히는 동시에 새 정권을 안정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반세기에 걸쳐 온갖 악행을 자행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선거혁명을 통해 무너진 자리에 다인종이 공존하는 새로운 ‘무지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동안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철저한 처벌을 표방한다면 간신히 이룬 공존의 기반 자체가 깨질 상황이었다. 이런 딜레마를 풀어내는 타협안이 바로 진상은 낱낱이 밝히되 사면이라는 당근을 집어넣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식의 해법이었다.
재판을 통한 정의 구현의 가능성과 한계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선택이기도 했지만,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가해자에 대해 사면이라는 해법을 통해 진상규명과 화해를 동시에 성취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는 입장에서는 뉘른베르크 재판과 같은 방식을 도입해 책임자 처벌을 했어야 한다고 보는 견해가 여전히 강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법정이 좀더 나은 정의를 이끌어낼 것이라는 기대는 실현가능한 것이었나? 필자의 견해로는 뉘른베르크 식의 재판이 당시 정치적 역관계 속에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현실정치의 맥락을 무시하더라도, 재판을 통한 청산이 피해자들에게 좀더 정의로운 결과를 가져왔으리라고 반드시 확신하기는 어렵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청문회 및 조사과정과 재판의 절차를 비교하는 것으로 논의를 풀어본다면 우선 증언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법정이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증인들의 진술이 간섭받지 않고 진행될 수 있었다. 재판에서는 증인 자신의 방식대로 증언할 수 없다. 재판기록이 형량을 좌우하므로 변호인 등에 의해 피해자나 제3의 증인의 진술은 제한되고 제지된다. 재판의 경우 피고의 진술목적은 보다 자세한 사실을 알거나 알리는 것이 아니라 형량을 받는데 유리한지 여부가 관심사가 된다. 또한 재판의 경우에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시기에 저질러진 가혹행위 중 상당 부분은 증거가 인멸된 상태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조사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문서가 파기되었다는 점이라고 최종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없는 물증이나 진술 없이는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기란 어렵다. 재판에서는 판결에 불리할 경우 진술을 왜곡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청문회에서는 가해 당사자가 사실을 밝히는 것을 조건으로 사면을 제공하므로 보다 광범한 사실의 진술이 진행될 수 있었다. 가해자들은 자신의 진술과정에서 다른 연루자들의 이름을 거명했고 그들은 증인으로 불려나오거나 자신이 기소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면을 신청했다. 그렇게 해서 밝혀진 사실 덕분에 적어도 이그나티프(Michael Ignatieff)의 표현대로 ‘공인된 거짓말이 회자되는 비율을 줄일 수 있었다.’
재판을 통한 청산의 실효성에 회의적인 이유는 사법 절차 자체의 효율성 문제도 있다. 실제로 남아프리카 사법제도의 현실을 보더라도 살인, 무장강도, 강간 등 중죄를 저지른 범죄자 중 4%만이 2년 이상의 징역형에 받는데 그친다. 재판을 통해 더 많은 범죄 사실을 밝혀내고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한다는 이상은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재판절차를 거치고도 실현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전 국방장관 말란(Magnus Malan)은 사면을 신청하지 않았으므로 13명의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기습에 대한 책임을 물어 기소를 당했다. 7개월에 걸친 재판 기간동안 7백만 란드의 소송비용과 9백만 란드의 변호사비용을 국고로 소모했지만 결국 유죄판결을 받아내지는 못했다. 말란과 같이 국무를 수행한 일로 기소된 피고의 경우 재판비용을 국고로 지원해야하는 규정이 있었다.
사면을 제공한다는 것은 가해자들이 ‘진실’, 즉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한 사실(facts)을 털어놓도록 유혹하는 구실을 했다. 투투위원장은 ‘나는 사면신청과정을 통해 펩코의 3인6)이나 크래독의 4인7), 비코 등 대표적인 의문사에 관한 새로운 정보가 밝혀진 것에 감격했다. 우리는 이전에는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이제 그런 정보를 알만한 자격이 있다. 얼마라도 이렇게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는 것 자체가 위원회의 존재가 정당함을 입증한다.’라고 평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밝히기에는 재판을 통한 처벌보다는 진실을 밝히면 사면을 제공한다는 회유가 더 효력이 있었다. 그러나 사면 신청자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정황을 각색하거나 아예 자신이 사면신청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 한계다.
흑인 대 흑인의 갈등?
사면의 조건은 진실을 털어놓는 것 이외에 사면 대상 행위가 ‘정치적 동기’를 가졌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했다. 그렇지만 막상 사면신청을 받게 되었을 때 ‘정치적 동기’를 가진 인권침해범죄와 일반 범죄행위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는 문제였다. 공권력의 남용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심지어 단순한 강도 살인인지 인종적 증오에서 비롯된 정치적 살인인지를 구분하는 것도 실제로 모호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칠천여 명의 사면 신청자들 중에 정치적 동기가 명백히 인정되는 사례는 극히 소수였다. 이렇게 사면 심사와 결정이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원래 데드라인이었던 1996년 12월 14일을 1주일 앞둔 시점에서 단 4건 만이 사면을 부여받았다. 사면 신청 대상자들은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 주시하면서 자신의 사면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그렇게 미루다가 마감 직전에 1,000여명이 한꺼번에 사면을 신청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누가 사면을 신청했는가? 그들은 곧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가해자를 대표하는가? 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해서 인권위와 사면위 청문회를 각기 시작하고 사면신청을 받으면서 가해자의 윤곽이 드러났다. 사면 신청자 중에서 가장 직접적인 가해 집단은 경찰과 군 관계자로 신청자의 50%를 차지했다. 그러나 인종적인 분포를 보면 사면신청자의 80% 이상이 흑인이었다. 인권침해 피해자로 신고한 사람의 99%가 흑인이었는데, 백인우월주의 정권 하에서 인권침해범죄와 연관된 가해자 대다수 역시 흑인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이었다. 사면 신청을 한 흑인들 가운데 많은 수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하수인으로 활동했던 이들이었다. 백인은 흑인 공동체에 직접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흑인을 군인과 경찰의 말단 행동대원으로 고용했다. 때로는 비밀 정보원도 빈번히 동원했는데 이런 관행은 흑인 공동체와 해방운동 진영에 불신의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한 때 반체제 운동가였으나 정부 치안조직 말단에서 일하는 흑인을 아스카리(askari: 원 뜻은 독일이 탄자니아를 점령했을 당시 독일군대에 있던 아프리카 병사를 의미)라고 불렀다. 또한 국민당 정권과 협조 관계를 긴밀하게 맺고 아프리카민족회의를 비롯해서 해방운동 진영과 대립하면서 1990년대에 대량 유혈폭력 사태를 일으킨 인카타 자유당 관련자들도 사면을 신청할 죄목이 많았다. ‘흑인에 의한 흑인의 폭력’은 결국 흑인들 사이의 내분이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 억압구조가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정의로운 전쟁’ 과 ‘전쟁에서의 정의’
사면신청자 중에는 해방운동 진영에 속하면서 테러 행위를 실행했던 이들도 있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청산 방식에서 특징적인 것은 과거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인권침해는 물론 해방운동 측에서 행한 인권침해도 동등하게 다루었다는 점이다. 1980년대에 정권의 탄압이 강화되는 것에 비례해서 저항운동의 투쟁 방식 또한 격화되었다. 때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술집, 교회, 골프장 등에서 폭탄을 터뜨리기도 했다. 아프리카민족회의 소속으로 술집을 폭파하는데 가담했던 한 특수대원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비극적 사태에 책임이 있다. 세 사람의 목숨을 잃게 한 것은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무고한 남아프리카인 수백만이 그동안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겪어온 고통과 죽음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아프리카민족회의 측에서는 자신들은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8)로 세계적으로 비난받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반대하는 도덕적인 투쟁, 즉 ‘정당한 전쟁(just war)’을 수행했으므로 소속 당원들이 사면을 청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투투 위원장은 만일 중대 인권침해범죄를 저지른 개인은 누구나 사면을 신청해야 기소를 면할 수 있다는 법 조항이 자기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아프리카민족회의 측이 생각한다면 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고 버텼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와의 회동 이후 아프리카민족회의는 당원이 개별적으로 사면 신청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자신들의 행위도 사면 받아야 할 대상으로 인정한다는 원칙에 당도 동의한 셈이다. 하지만 막상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최종보고서가 나올 때 당 대표였던 음베키(Thabo Mbeki)는 이것이 ‘억지 공평성(artificial even-handedness)’이라고 불평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도 담겨있는 보고서 발간을 막으려고 막판까지 시도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전의 해방운동 진영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자유를 위해 싸우는 해방운동으로서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저지른 실책과 백인 우월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수십 년간 권력을 강점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잘못을 동일시하는 것은 벼룩과 코끼리의 크기 차이를 생각하지 않은 것만큼이나 말이 안 되는 얘기(Michael Lapsley)라는 입장과 ‘그 명분이 무엇이건 간에 인권침해가 있었다면 해방운동도 그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한다’(Alex Boraine)는 입장으로 나뉘었다. 저항운동 세력 중의 하나인 범아프리카회의(Pan-Africanist Congress, 약칭 PAC) 측에서는 청문회를 보면서 「진실과 화해위원회」가 해방운동의 투사들을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신문 「Argos」, 1998년 2월7일자 기사). 1997년 웨스턴 케이프(Western Cape)의 「진실과 화해위원회」 사무실에서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는 ‘정의로운 전쟁(jus ad bellum)’과 ‘전쟁에서의 정의(jus in bello)’는 구분되어야한다는 논리가 강조되었다. 아무리 명분이 옳더라도 전쟁에서 지켜야할 정의로운 원칙 즉 비전투원은 죽이면 안 된다든지 하는 사항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원칙적으로 그 말에 동의하지만, 탄압의 강도가 세지고 저항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이런 원칙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도 사실이다. 피억압자는 억압자를 미워하면서 닮아간다. 상대적으로 아프리카민족회의는 전쟁의 정의를 준수하려고 노력했다는 평을 듣는 편이었다.9) 1980년대에 들어 정부의 탄압이 더 심해지면서 해방운동 측도 무장투쟁 노선을 강화하고 그 과정에서 민간인 살상을 야기하는 폭탄 테러 행위를 실행했다. 1990년대에 들어 당에서는 지역의 자경단에 무장을 허용했다. 밀고자로 지목된 사람을 사법적인 절차 없이 처벌하는 관행도 묵인되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흑인공동체 내부의 불신과 갈등은 지역공동체와 해방운동 진영에 큰 상처를 남겼다. 동네에서 밀고자로 의심되는 사람의 목에 타이어를 두른 후 불을 질러 처형하는 일(necklacing)도 있었다. 국가 공권력은 반체제 운동가를 추적하거나 백인지역을 경비하는데 쓰일 뿐 흑인지역은 치안공백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 결과 동네에서는 자경단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장기간에 걸친 폭압 체제는 피해자를 동시에 가해자로 만드는 해악을 끼쳤다. 때론 피해/가해의 이분법으로는 포착되기 어려운 갈등이 드러났다. 감리교 비숍이자 신학자로 오랫동안 반체제운동에 함께 해온 스토레이(Peter Storey)는 ‘근본적인 종양은 아파르트헤이트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자들도 2차 감염이 되어 선과 악을 구별하는 분별력이 흐려졌다. 삶의 비극중의 하나는 우리가 가장 미워하는 것, 즉 우리가 저항해서 싸우는 그릇된 일과 닮은꼴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 권력과 자유의 남용을 저지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스토레이가 말한 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넬슨 만델라의 전 부인 위니 만델라(Winnie Madkizela-Mandela)가 연루된 사건이었다. 위니 자신이 아프리카민족회의의 활동가였으며 오랜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유명한 반정부 활동가를 남편으로 둔 탓에 지속적인 경찰의 감시, 구금, 가혹행위를 겪은 피해자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녀 자신이 흑인 공동체에서는 ‘국모’로 불릴 정도의 권력에 기대어 가해자의 역할도 했다. 자신의 친위세력 격인 만델라연합축구클럽(Mandela United Football Club)을 거느리고 지역에서 밀고자로 지목되거나 눈 밖에 난 청소년들에게 린치를 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묵인, 방조 내지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피해자 부모 등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나 위니는 청문회에 불려 나와서도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사면을 신청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아직도 여전해서 당 내에서 고위 서열에 올라있다.
사면신청자와 가해자
사면신청자의 분포만 두고 보면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갈등이란 마치 흑인과 흑인 사이의 갈등이 주된 것이었던 것으로 해석하기 쉽다. 그러나 사면을 신청한 이들만이 가해자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가해의 구조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면을 신청한 가해자들은 주로 직접적인 폭력을 저지른 당사자들이었다. 또한 사면이란 제도의 특성 상 신청자의 65%가 이미 형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정작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만들고 살해명령을 내렸던 지휘권자인 ‘큰 고기’들은 아예 사면을 신청하지도 않았고 체제의 말단에 있던 ‘작은 파리’들이 주로 사면 신청자로 등장했다. 사면을 신청한다는 것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중대한 인권침해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는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움직인 최고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전직 대통령 보타(P. W. Botha)나 드 클럭(F. W. de Klerk)은 드러난 각종 혐의에도 불구하고 사면 신청은 물론 사과도 하지 않았다. 전 정권의 각종 치안 조직에서 일하다가 실형을 살거나 살 위기에 처한 실무자들은 자신의 구명을 위해 사면을 신청하고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털어놓은 반면 역할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당국의 고위 책임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는 얘기만 되풀이했다. 예를 들어 행정수도인 프레토리아(Pretoria) 인근에 자리한 블락플라스(Vlakplaas)는 반체제 운동가에 대한 고문과 암살 전담 요원을 양성하고 각종 잔혹행위를 실행하는 거점으로,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공공연히 알려진 정부 조직이었다. 그곳의 전 책임자 드 콬(Eugene de Kock)은 ‘원조 악(Prime Evil)’이라고 불리는 인물로 청문회 당시 이미 살인혐의로 212년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드 콬은 사면위에 나와서 자신의 전 동료들과 함께 납치한 반체제 운동가들을 어떻게 고문하고 불태우고 묻었는가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동은 남아프리카 경찰, 정부 각료. 국무회의, 심지어는 대통령의 명령을 따라서 한 것이므로 개인적인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거론된 고위급 인사들은 아예 증언을 거부하거나 한결같이 블락플라스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다고 부인했다. 어쨌거나 침묵의 트러스트를 깸으로서 다수 관련자들이 입을 열게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드 콬은 2001년에 자신이 저지른 행위 일부에 대해 사면을 받았으며(http://www.doj.gov.za/trc/decisions/am01.htm), 현재는 종신형의 두 배에 해당하는 나머지 징역을 살고 있다.
1996년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각 정당 및 군, 경찰에 대해 소명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각 정당의 지도자들은 ‘과도한 행위’가 있었던 점은 시인했지만 살인이나 고문이 자신들의 공식적인 정책이었다고 인정한 이는 없었다. 국민당 측을 대변한 드 클럭(De Klerk)은 통치기간 중의 정치적 결정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책임을 져야겠지만 개인이 승인 받지 않고 행한 살인까지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재임 중에 일어난 모든 일을 다 알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변이었다. 드 클럭은 군과 경찰 안의 ‘한 줌 실무자’의 손을 통해 저질러진 행위를 전해 듣고 자신도 놀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 측이 증거로 제시한 문건 중에 1986년 국무회의 자리에서 국가의 적을 ‘제거하도록’ 치안대를 창설하라는 결정을 했다는 내용이 명시된 자료도 있었다. 드 클럭은 ‘제거한다’는 것이 곧 ‘죽인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답했다. 인카타 자유당도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도자 부텔레지(Mongosuthu Buthelezi)는 상대편인 아프리카민족회의 측의 폭력에 대해서만 비난했을 뿐 자신은 정치적 목적에 의한 어떠한 폭력행위도 승인한 적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 확인했다. 정당 청문회에 이어 1997년 10월 군과 경찰 및 군경 수뇌부가 만나 상의하는 기구인 국가안전대책회의(State Security Council)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다. 전 군사령관 빌존(Constand Viljoen)은 남아프리카방위군이 중대인권침해를 저질렀다는 것은 순전히 날조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진실과 화해위원회」 부위원장 보레인(A. Boraine)은 ‘남아프리카 방위군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단 한건의 죽음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을 정말 믿을 수가 없다’고 반박했다. 경찰의 경우는 청문회 당시 이미 여러 명이 살해, 고문, 폭파 건에 대해 사면을 신청한 상태였으므로 개입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경찰 총수 역시 ‘제거하라’는 말이 ‘죽이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고 변명했다. 모호한 명령을 내리는 것은 고위직이 책임을 면하기 위해 자주 활용하는 수법이다.
국민당이나 군, 경찰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일어난 일은 통치행위로서 집단책임을 질 일이며 명령을 받아 시행한 개개인은 죄가 없으므로 일괄 사면(blanket amnesty)을 보장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정권의 주역이 된 아프리카민족회의의 핵심인사들도 자신들의 혐의에 대해 일괄 사면을 요구했다. 반면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채택한 방식은 가해자가 진실을 털어놓는 조건으로, 개별적으로 심사해서 사면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면을 과거사의 해법으로 취한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남아프리카 과거청산 방식에서 중요한 특징이자 성과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누구에 의해 일어났는지 사실을 알지 못하면 처벌도 용서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용서하고 싶지만 누구를 용서해야할지 모르겠다’라고 말한 어느 피해자 가족의 말은 보복이 아니라 용서를 위해서도 사실이 밝혀져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
피해자 입장에서 본 사면
그러나 다른 한편 이미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고 고통받아온 피해자나 그 가족들에게는 조건부라 할지라도 가해자에 대한 사면이란 결정 자체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가해자 자신이 가혹행위가 불가피했음을 주로 강조하는 사면위 청문회와 피해자와 가족의 피해 경험이 언어로 살아나오는 인권위 청문회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영문도 모른 채 죽음에 가까운 상황에 처하거나 가족을 잃은 피해자 가족들은 가해자 처리문제에 대해 ‘재판 없이 정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게다가 위원회의 절차상 사면을 신청한 가해자에 대한 사면은 심사절차를 거쳐 바로 결정이 나는 반면,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위원회를 거쳐 정부에 권고안을 보낸 후 시행되길 기다려야 했다. 이 점도 피해자들에게는 부당하게 여겨졌다. 위원회 활동이 진행 중인 1996년 4월, 흑인의식운동의 선구자 비코(Steve Biko)10)를 비롯한 의문사 피해자 가족들은 사면 조항이 위헌이라는 소송을 헌법재판소에 제기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사면위를 통해 사면 받은 가해자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추후에 형사처벌하거나 민사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규정한 ‘국민통합 및 화해 증진법’의 조항은 피해자 개인의 사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헌법 재판소는 피해자는 보상을 받고 사면신청자는 범죄의 진상을 털어놓게 된다는 점을 들어 기각 판결을 내렸다.
청문회와 심사절차를 걸쳐 사면이 주어되자 피해자들은 사과를 제대로 받거나 용서하기도 전에 화해를 강요받은 것 같은 느낌에 시달렸다. 최초로 사면을 부여받은 미첼(Brian Mitchell)은 사면신청 당시 종신 복역 중이었다. 지방의 경철서장이었던 그는 1988년 12월 3일 테러 용의자가 모였다고 의심되는 장소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작전 결과 11명이 살해됐다. 뒤늦게 그릇된 정보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1992년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사면위에서 자신의 명령이 관할 지역에 대한 저항 세력의 공격에 대비해 고위 간부와 상의한 후 결정한 정치적 행위였다고 증언했다. 결국 경찰로서 관할지역에서 일어나는 반정부 세력의 움직임을 제압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는 주장이 인정되어 1996년 12월 사면을 부여받았다. 이때 피해자들이 느낀 분노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러한 반응에 직면해서 투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안정을 위해 치러야할 대가가 얼마나 큰가를 역설했다. 반면 1997년 앞서 말한 비코의 죽음과 관련된 고문 경관 5명이 사면을 신청했으나 모두 거절되었다. 위원회는 가해자들의 행위가 사면법에서 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행위의 범주에 들지 않고, 제대로 사실을 털어놓지도 않았으며, 고문이 정보나 범죄가담 사실에 대한 자백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는 동기 설명도 부적절하므로 사면을 해줄 수 없다고 판결했다. 실제로 사면신청자 중 사면을 받을 수 있었던 비율은 1/5을 밑돌았다. 그러나 사면이 허용된다는 상황 자체가 주는 충격과 파장은 피해자와 가해자 양 쪽 모두에게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방관자와 수혜자의 책임
가해 당사자들이 책임을 부인하는 것을 보고 피해자들은 그럼 ‘누가 진짜 범인인가? 고문에 직접 가담했던 경찰관인가? 그들을 보낸 장군인가? 체제를 통괄한 정치인인가? 안된다고 소리 높여 맞서지 않고 침묵했던 유권자들인가?’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다. 과거청산에서 누가 중대 인권침해를 초래하는 명령을 내렸는지 계통을 추적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을 묵인하고 나아가 그로부터 이익을 받은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성찰하는 것이다. 남아프리카에서 방관자(bystanders) 혹은 수혜자(beneficiaries) 문제가 중요한 까닭은 소위 일반 백인 가운데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청문회 전인 1996년 5월 폭력과 화해연구소(Centre for the Study of Violence and Reconciliation)에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백인응답자 중 44%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셋 중 하나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이 많다고 답변했다. 국민당 지지자 중에서 흑인공동체를 탄압했던 일에 어떤 방식으로건 스스로 책임을 느낀다고 한 이는 14%에 불과했다. 청문회 이후 이러한 반응은 바뀌었지만 그것이 곧 자신이 누린 부당한 혜택에 대한 반성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억압에 가담했던 백인이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몰랐다’고 하는 백인이나 체제의 모순과 자신의 책임을 연관시켜 생각하는 경우는 극히 적었다. 예를 들어 정부의 보안조직인 블락플라스에서 일했던 쿳시(Dirk Coetzee)는 한 인권변호사를 40여 차례 찔러 죽이는 등 잔혹한 고문과 살인을 저질렀던 인물이다. 그는 사면위 증언에서 아주 어릴 때부터 아프리카너로서 받은 교육 덕분에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신념을 내면화했다고 변명했다. 교회나 학교, 아프리카너 청년 조직을 통해 ‘신은 남아프리카를 아프리카너에게 주셨다’는 믿음을 갖게 됐고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신이 주신 남아프리카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정당화는 그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백인들 중에 쿳시처럼 직접적인 가해를 저지른 자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대부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로부터 이익을 본 사람들(beneficiaries)이다. 직접 살해나 고문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로 인해 덕을 보았던 백인들은 청문회를 보고도 자신들의 책임을 별반 심각하게 느끼지 않았다. 언론을 통해 만들어진 가해자에 대한 공식적인 이미지는 ‘사악하게 보이는 나찌 스타일로 진한 아프리카너 액센트를 쓰는 자’로서 굳어졌으므로 자기와 동일시할 필요가 없었다. 청문회를 통해 끔찍한 사례들이 터져 나올수록 대다수의 백인들은 그런 일은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 느꼈다. 청문회를 통해 살인, 고문, 인종박멸을 목표로 한 생화학전 프로젝트 등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체제의 폭력성을 입증하는 증언이 쏟아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도덕성은 무너졌지만 다른 한편 그것을 듣고 분노할수록 평범한 백인은 체제와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분리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어찌 보면 그것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통해 이익을 본 다수의 수혜자들에게 오히려 면죄부를 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청문회를 통해 엄청난 가해사실을 접할수록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들이 그 체제를 통해 본 모든 일상의 혜택은 용서를 빌 만한 정도의 중대 사안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반면 체제의 전반적인 피해자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던 다수 흑인들은 그런 수혜자들의 자족감, 무반성에 분노를 느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수혜자에 대한 특별청문회
백인 가운데 개인뿐 아니라 집단도 수혜자의 범주에 속했다. 1997년 언론, 의료, 사법, 기업, 종교기관을 대상으로 특별청문회가 실시되었다.11) 이 분야는 군, 경찰 등 아파르트헤이트에서 직접 폭력을 행사했던 집단과 달리 눈에 띠지 않는 조력을 하거나 상당한 정도의 혜택을 누린 집단을 포함했다. 이들에 대한 청문회는 중대한 인권침해에 집중되었던 개별 청문회와 달리 일상 속에 스민 아파르트헤이트의 흔적을 돌아볼 기회가 되었다.
우선 의료청문회에서는 비코의 의문사 당시 검진 의사의 윤리문제가 이슈로 제기되었다.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고 의식을 잃은 비코를 장거리 이송하려는 경찰의 요구에 따라 동의서를 써주어서 결국 죽음에 이르도록 한 관련 세 의사의 처치가 윤리적으로 적절했는가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 사건이 문제가 되었을 때 남아프리카의료위원회(SAMDC)는 의사의 책임이 없다고 인정했고 남아프리카의사협회(MASA)도 그 결정을 지지했다. 8년 후인 1985년 그 결정은 대법원에서 뒤집혔고 의사들은 부적절한 처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거의 모든 의사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사윤리 문제를 두고 입장이 갈렸다. 「진실과 화해위원회」 보고서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동안 경찰의 요청으로 수감자를 진료했던 의사 대부분이 환자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결론지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국가 비상사태동안 수감자가 고문 받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사태가 자주 일어났으나 경찰 담당 의사는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건부가 제출한 소명자료에 따르면 ‘그 의사들은 수감자가 국가의 적이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으므로 국가를 전복시키는 행위를 한 수감자로부터 경찰이 정보를 알아내려는 것은 정당한 행위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의사 중에는 효율적인 고문방식을 고안하거나 사망자의 사인을 조작하고 흔적이 남지 않게 전기 고문하는 법을 알려준다든지, 환자의 동의 없이 인적사항이 담긴 의료기록을 경찰이나 군에 넘겨주는 등의 범법행위를 한 이도 있었다. 심지어 군 의료진은 흑인에게만 작용하는 독약이나 불임제 등 생화학전에 사용할 약품이나 균을 개발하고 있었다. 의료혜택을 보면 흑백의 인구구성비에도 불구하고 백인에게 돌아간 의료비가 흑인에게 돌아간 의료비의 4배에 달했다. 의사의 봉급도 인종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몇몇 흉악한 인물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체제 안에서 자기 일을 한 평범한 의료인들이 범한 일이었다.12)
다음으로 기업 청문회가 열렸다. 대기업의 대표들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자신들에게 해를 끼쳤고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기업인들의 주장에 대해 아프리카민족회의나 남아프리카노조대표자회의(COSATO) 및 남아프리카 공산당은 반발했으며, 기업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지탱에 큰 역할을 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제출했다. 진정한 피해자는 흑인노동자고 기업은 흑인노동자의 건강 및 산재보험, 의료부조, 연금을 박탈한 책임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기업인들은 계속 피해자 논리를 폈다. 영어사용 백인 기업인들은 아프리카너에 비해 상대적으로 혜택을 덜 받았고 불이익을 받았으므로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몇몇 기업인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반자본주의적인 요소가 있어서 자본주의 발전과는 대립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백인들을 위해 일자리를 보전하도록 한다든지, 거주구역제한법을 만들어 흑인을 멀리 보내 노동비용을 높인다든지 흑인들에게 열등한 교육을 실시함으로서 유능한 노동력을 공급하지 못했다든지 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남아프리카 공산당은 기업이 흑인노조를 방해하고 파업을 하면 경찰을 부르는 등 체제와 협력해 왔음을 지적했다. 기업은 인권보호 기관이 아니므로 정부의 인권침해를 감시하는 것은 기업의 의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기업인도 있었지만, 체제로부터 그들이 혜택을 보았다는 사실은 감추기 어려웠다.
그 외에 언론청문회도 열렸다. 정권과의 관계로 언론을 나누어보면 국민당 정부가 소유했던 남아프리카방송사(SABC), 정부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아프리칸스 사용 언론, 자유주의 입장에서 소극적인 반대를 표방했던 영어 사용 언론,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고 그로 인해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대안 언론 등이 있었다. SABC는 왜곡 보도를 통해 정부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이미지, 흑인 저항세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청문회 자료에 따르면 보도지침이 있어서 ‘평화를 해치거나 경제를 약화시키거나 혁명적 목적을 고취하거나 직간접적으로 법을 어기도록 유도하는’ 그 어떤 내용도 방송이 금지되었다. ‘테러’조직의 관점은 보도될 수 없었고 경찰이나 군이 자행한 폭력도 방송화면에 비추지 않았다. 백인들은 방송을 통해 정부가 선전하는 내용을 보고 믿었다. SABC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동반자였을 뿐 아니라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는 평을 들었다. 영어 사용 언론은 전통적으로 국민당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야당 역할을 해왔다. 아파르트헤이트 기간 중에 경찰 요원이 기자로 들어오고 기관원이 신문사 사무실에 상주했으며 보도 내용은 검열을 받았다. 기자들로서는 어느 정도까지 보도 가능하고 어느 정도가 금지되는지 판단하기 어려우니까 알아서 기는 습성을 갖게 되었다. 언론사들은 전국언론연합(National Press Union)을 결성해서 군 및 경찰과 협정을 맺어 보도통제를 따르기로 정했다. 결론적으로 영어 사용 언론은 체제의 과도한 권력 남용에 비판적이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개혁하려는 시도는 별로 하지 않았다. 정부에 전적으로 협조하지도 않았지만 충분히 맞서지도 않았다는 것이 영어 사용언론에 대한 청문회에서의 평가였다.
흑인 독립 언론은 1970년대 흑인의식운동 과정에서 성장했다. 영어 사용 언론도 지면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반대했을지라도 신문사 사무실 안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실시했다. 일상이나 부서배치, 급료 등에서 흑백 기자 사이에 명백한 차별이 있었다. 흑인 기자에게는 ‘흑인 이슈(선정주의, 섹스, 축구)’를 주로 다루게 한다든지 흑인 지역에 나가는 면만을 맡겼다. 독립적인 흑인언론들이 생겨나면서 저항운동을 ‘테러리스트’라거나 ‘공산주의자의 사주를 받은’이라고 서술하는 관행이 바뀌었다. 정부는 대안 언론의 기자들을 자주 구금, 고문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 청문회에서는 대안언론으로서 흑인 언론이 해온 역할을 인정하는 한편 흑인 언론이 객관성을 결여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기자로서의 정체성보다 강하고 경찰의 폭력에 대해서는 보도해도 저항운동 측의 폭력은 넘어간다는 것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권력의 편차가 엄청난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는 흑인 언론에 대해 그런 비판을 가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만 정권이 바뀐 이후에는 고민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위원회 이후의 과제
인권침해 행위를 직접 저지른 가해자뿐만 아니라 기업, 언론을 비롯해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일상을 지탱해온 사회 기구와 그 대표를 청문회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아무런 성찰 없이 정권이 바뀐 상황에 대응하는 전략만 키운다면 결국 정권 담당자만 바뀔 뿐 대안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전망을 갖기는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청산 작업은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동시에 미래를 설계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2003년 3월 최종 보고서 중 추가 부분인 6,7권이 발간되면서 1996년부터 진행해온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통한 과거청산 작업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숱한 논란을 빚었던 사면 절차도 마무리되었다. 그렇지만 피해자의 보상과 복권을 위한 대책은 이제 비로소 본격적으로 진행될 수 있게 된 셈이다. 투투 위원장은 ‘실질적인 보상이나 복권 프로그램 없는 사면은 중대한 부당행위가 될 것’이라고 했고 덧붙여서 피해자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점을 지적했다. 위원회는 정부에 권고안을 낼 때 보상에 소요되는 비용을 약30억 란드13)로 잡았다. 수만 명의 희생자가 그동안 겪어온 모든 고통을 돌이켜볼 때, 그리고 일인당 돌아가는 실질적 배당액수를 생각하면 헐값에 불과하지만 정부에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것은 큰 숙제였다. 구체적으로 국내 기업의 자발적인 기부를 받거나 세금을 부담시키는 방안, 정부예산에서 군사비 등 지출을 감축해서 일정액을 확보하는 안,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이득을 본 스위스 은행 등 외국계 기업이나 금융에서 받아내는 방안 등이 다각도로 제시되어 진전되고 있다. 진상규명을 위해서 사면이 중요했던 만큼이나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화해와 공존을 위해서는 피해 보상 또한 중요하다. 물론 금전적 보상은 사회적으로 가능한 보상의 여러 형태 중 하나에 불과하고 개인 혹은 공동체의 정신적 치유나 명예의 회복 등 필요한 조치들이 아직도 쌓여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과거청산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감동을 준 것은 인권위에서 실시한 피해자 청문회였지만 가장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한 것은 사면위의 활동이었다. 피해자에게 가해자와의 대질은 지난날의 고통스런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권력의 전도를 경험하면서 얻는 카타르시스 효과도 있었다. 고문자로 등장했을 때는 전지전능한 권력자로 보였으나 청문회장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사면을 구하는 가해자의 모습을 접하면서 그 역시 평범하고 나약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오랫동안 느껴온 공포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했다는 피해자도 있었다. 그러나 카메라 앞에서 피해자가 한 두 시간 남짓한 진술가정을 거친다고 트라우마가 치유되는 것도 아니고 가해자가 눈물을 보이며 진술을 한다고 해서 바로 용서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진실을 밝혀내고 화해를 성취했다고 외국의 정치가나 연구자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에 비해서 국내에서의 논쟁은 격렬했던 편이다. 특히 사면을 둘러싼 갈등도 컸다. 그러나 그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과거청산을 추진할 수 있었던 합의 기반과 동력은 평화로운 공존을 향한 갈망이었다. 사면이라는 쓴 약을 택한 것도 보복과 보복이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응보적 정의’보다는 ‘회복적 정의’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자신을 불구로 만들고 자기 가족을 죽인 가해자가 사면 받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피해자로서는 또 다른 고통이다. 그러나 기나 긴 억압의 세월동안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얽히고설키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폭력과 죽음의 공포를 체험한 국민이 선택한 길이라는 사실을 숙고해야할 것이다. 물론 진실을 밝힌다는 또 다른 축이 없었더라면 그러한 선택은 냉소로 돌아왔을 것이다.
어떤 이는 ‘진실’의 존재 자체가 의심받고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진실위원회를 통해 과거의 진실 찾기란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냐는 냉소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애초에 진실위원회를 통한 과거청산 작업은 ‘유일한’ 진실을 찾으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보다는 ‘일방적인’ 진실을 강요받는 것을 넘어서 여러 겹의 진실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과거청산 과정에서 찾아낸 ‘진실’이 한 겹이 아니듯 ‘화해’를 위한 접근도 한 가지가 아니다. 사회 각 진영 혹은 개인이 품고 있는 화해에 대한 개념은 때로는 대립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다른 기억을 동등하게 말하고 들을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진상규명과 사면을 동시에 내건 사면위의 활동은 가해자가 자신의 범죄를 시인할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피해자의 목소리는 더 잘 들릴 수 있게 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지 않으면서도 공존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것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과거청산의 완결 편은 결코 아니지만, 과거에 대해 충돌하는 기억을 공론화함으로써 화해의 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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