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법인화를 둘러싼 갈등으로 학생들이 본관을 점거한 지 열흘째인 8일. 대학 본관에는 "총장님, 얘기 좀 해요"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이날 본관을 찾은 사람은 총장이 아니라 교직원 20여 명이었다. 이들은 업무 방해를 중단하라며 본관에 진입하려고 시도했다.
출입문을 앞에 두고 들어가려는 교직원과 막으려는 학생들이 승강이를 벌였다. 그러자 서울대 법인화 반대 공동대책위원회 소속 교수들도 "총장이 직접 나서 해결해야 한다"며 교직원의 출입을 막는 데 가세했다. 결국 30분 동안의 대치 끝에 교직원들의 진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학생과 교직원이 대치하는 동안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다. 학생들이 하나둘씩 본관 밖으로 빠져나가는 광경을 본 교직원이 "(본관에서) 나오는 사람은 환영"이라고 말하자, 학생들이 "지금시험(기말고사) 보러 가는 거예요"라고 받아쳤다. 몇몇이 떠난 후에도 본관은 여전히 학생으로 붐볐다.
▲ 서울대 본관(행정관)에 진입하려고 시도하다 학생들과 승강이를 벌이는 교직원. ⓒ연합
시험기간에도 본관 지키는 이유는…
긴장 상태가 끝나자 본관은 다시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갔다. 몇몇은 시험공부를 했고, 몇몇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일부는 삼삼오오 모여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시험기간인데도 자리를 지키는 이유를 묻자 한 학생은 "지난 6일 총장의 무성의한 대화태도가 큰 이유인 것 같다"고 했다. 오연천 총장의 '동문서답'이 학생들의 공분을 샀다는 것이다. 그는 "총장은 학생들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선의로 법인화했다, 법인화는 기업화가 아니라 자율화'라는 식으로 원론적인 답변만을 되풀이했다"고 말했다.
최영찬 농생대 교수도 "학생들이 장기간 농성하는 게 안타까워서 빨리 (농성을) 풀 수 있게 해달라고 총장한테 얘기했는데, 본부는 대화하는 흉내만 냈다"고 비판했다.
"한나라당, 반값 등록금을 실현하려면 법인화부터 반대해야"
최영찬 교수는 "법인화를 찬성하는 측에서는 대학 경쟁력 강화를 그 근거로 들지만, 법인화는 경쟁력 강화는커녕 서로 경쟁 안 하는 구도를 만든다"며 법인화에 반대하는 뜻을 밝혔다.
"좋은 학교를 많이 만들어야 서로 경쟁하면서 경쟁력이 강화될 것 아닌가. 지금도 서울대가 독식하는데 (법인화하면 서울대를 제외한 나머지 국공립대에) 무슨 경쟁력이 확보되겠나. 서울대만 더 독식할 것이다. 정말 대학 경쟁력을 강화하려면 지방 국립대를 키워줘야 한다. 지금은 법인화보다 고등교육재정 확충이 필요하다."
최 교수는 "법인화는 한나라당의 반값 등록금 취지에도 역행하는 처사"라며 "한나라당은 반값 등록금을 시행하고 싶으면 법인화부터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립대학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국에서 국공립대학의 비중을 늘리지 않고서는 '반값 등록금'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립대가 늘어나면 반값 등록금은 많이 해결된다. 국립대 등록금이 사립대의 반값 아닌가. 그런데 미국에서조차 국공립대 비율이 70%인데 한국은 17%다. 미국은 사립대 비중 자체가 높지 않다. 좋은 국립대를 많이 만들어도 모자라는데 국립대 중에서도 상징성이 큰 서울대를 기업화한다면 이는 등록금을 낮추자는 '반값 등록금' 정책의 취지에도 역행하는 처사다.
사립대에 비리재단이 많은데, 감사도 잘 안 되고 족벌 중심으로 운영된다. 한나라당이 사립학교법을 재개정하면서 그동안 문제가 많았던 대학들에 비리 이사가 다시 들어갔다. 차라리 비리 사학은 국공립화해야 한다. 그것만 해도 (해당 대학에) 반값 등록금이 실현된다. 한나라당은 '반값 등록금'을 시행하고 싶으면 법인화부터 반대해야 한다."
"서울대에 CJ 관련 업체가 늘어난다"
▲ 서울대 본관에 학생들이 붙여놓은 그림. ⓒ프레시안(김윤나영)
본관 점거에 참여한 학생들은 서울대 법인화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단지 '등록금' 때문만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사회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최형통 씨는 "등록금은 법인화의 본질과 멀다"며 "중요한 건 대학이 기업화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기초 학문이 사라질까 걱정이 된다고 했다.
"대학이 기업화되면 수익 사업을 할 것이다. 공대에서는 학과 지원을 따낼 수 있겠지만, 인문사회대는 지원금을 타내기 어려워진다. 교수도 단순히 1년에 논문을 몇 편이나 썼는지 실적을 내는 데 시달릴 것이다. 성과 때문에 자살한 교수도 있는데, 우리도 그런 경쟁 체제로 갈 것이다. 학생도 카이스트의 사례처럼 성적대로 장학금이 차등 지급될 수도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우려도 있다. 본관 점거에 참여한 학생인 유진우 씨(가명)는 "언제부턴가 학내에 CJ 관련 업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지난 3월 31일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준비위원회'의 학외위원으로 CJ 손경식 대표이사 회장이 포함됐다"고 말했다.
"학교 안에 투썸플레이스, 비비고, 뚜레쥬르와 같은 CJ 계열사들이 늘어났다. 올해부터는 식당에도 CJ가 들어왔다. 학생들은 학교가 'CJ 기업화'될까 봐 우려한다. 삼성과 성균관대학교의 관계처럼 가는 것 아닌가 싶은 학생들의 불신도 커졌다."
"이사회 독점 구조는 대학 '자율화'가 아니라 '제약'될 것"
학생들은 "앞으로는 대학구성원들이 학내 의사결정 구조에 참여할 수 없게 됐다는 점도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최형통 씨는 "지금도 대학 내에서 평의원회가 제 목소리를 못 내는데, 법인화가 되면 교수와 학생 대신에 총장과 이사회의 독재적인 체제로 나아갈 것"이라며 "이는 학내 민주주의 후퇴"라고 주장했다.
서울대 법인화법을 보면, 서울대 이사회는 교육과학기술부 차관과 기획재정부 차관 2명을 포함해 7명 이상 15명 이하로 구성되며, 반 이상은 외부 인사로 채워야 한다. 총장 직선제는 간선제로 바뀌고, 교수 평의원회는 심의·의결기구에서 심의기구로 권한이 줄어든다. 반면에 이사회는 △예·결산 등 대학 재정 관리 △대학의 조직 설치 및 폐지 △정관 변경 △중장기 대학 운영 및 발전 계획 등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다.
유진우 씨는 "이사로 차관이 두 명이나 오는데 사외이사 중에 친정부 이사가 서너 명만 와도 정부 입맛에 맞는 학교가 될 우려가 있다"며 "이사회라는 독점 구조에서 모든 게 정해질 확률이 높다. 이는 대학 자율화가 아니라 대학의 제약"이라고 비판했다.
정부와 대학 본부의 동상이몽
서울대 총학생회는 "정부와 대학 본부가 동상이몽을 꾸고 있다"고 꼬집었다. 총학생회 관계자는 "본부는 독립성과 대학 운영의 자율성을 얻고 싶어 하지만, 만약 이사회를 정부가 장악한다면 대학에는 실제로 별 자유가 없을 것"이라고 봤다. 그는 "반면에 정부는 대학에 지원하는 재정을 줄이고 싶어 한다"며 "재정을 확충하려는 대학의 시도가 학문이나 대학의 구조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총학생회는 "정부는 법인화를 빨리 전환하는 대학에 이익을 주겠다고 한다"며 "(법인화 논의가 가장 빨리 진행된) 서울대는 당분간은 이전과 같은 규모로 재정을 지원받겠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현재 법인화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경북대, 부산대, 인천대, 전남대 등 다른 국립대는 법인화로 받을 타격이 더 클 수도 있다고도 했다.
"제대로 대화하기 전에는 점거 풀 수 없다"
총학생회는 "가장 큰 문제는 학내 구성원이 '법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법인화가 진행된 것"이라며 "법인화에 대한 로드맵도, 구성원의 동의도 없이 졸속 추진됐다"고 비판했다. 지윤 총학생회장은 "서울대 법인화법이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됐고 학생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비민주성을 해결하지 않고는 (점거를) 풀 수 없다"고 강조했다.
조건부로 찬성하든 반대하든지 간에 법인화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법인화 절차'에 문제가 있었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서울대 학생들은 지난달 30일 개최한 재학생 비상총회에서 찬성 1715표, 반대 69표로 서울대 법인화 설립준비위원회의 해체안을 가결했다. 투표에 참여한 학생 1327명 중 1110명이 본관 점거 방식을 지지해 곧바로 본관 점거에 돌입했다.
화학과 4학년인 장우혁 씨는 "법인화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점거에는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장 씨는 "학생들의 점거 행위는 총장과 제대로 된 대화를 요구하는 것"이라며 "학생들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