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능·기술 앞섰던 가스냉장고
변신 거듭 전기냉장고에 밀려나
차세대 이동통신 기술 '와이브로'의 미국시장 진출 소식에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삼성전자와 100여개 중소기업이 공동 개발한 이 기술을 미국 스프린트사가 도입함으로써 토종기술이 세계 차세대 이동통신 시장을 선점할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를 돌아보면 기술이 앞서 있다고 장미빛 미래가 보장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1920년대에 미국에서는 가정용 냉장고 전쟁이 벌어졌다. 가스냉장고와 전기냉장고가 등장, 소비자들의 선택을 기다린 것이다. 당시 객관적인 면에서 보자면 가스냉장고가 훨씬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가열된 암모니아의 기화열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던 가스냉장고는 전동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당연히 소음도 발생하지 않았고 구조도 간단해서 고장이 나더라도 정비가 용이했다. 반면 초기 전기냉장고는 결점 투성이였다. 무엇보다 냉매를 고온, 고압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전동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진동과 소음이 발생했다. 가격 역시 너무 비쌌고 전기료도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웠다.
이쯤 되면 승부는 분명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1940년대를 기점으로 전기냉장고가 기세를 날리기 시작했고, 가스냉장고는 소형에서나 겨우 명맥을 이어갈 정도가 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일까? 당시 가스냉장고를 제조하는 업체는 세르벨이나 소르코와 같은 중소기업들이었다.
반면 전기냉장고의 보급은 제너럴일렉트릭, 제네럴모터스, 웨스팅하우스와 같은 대기업들이 주도했다. 전기가 한참 보급되는 시절, 발전소에서부터 전등까지 만들며 전기산업을 주도하고 있던 이들 대기업 입장에서는 전기냉장고의 성공이 반드시 필요했다.
때문에 대기업들은 전기냉장고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성능을 개선하고 가격을 내렸다. 이러한 물량공세 결과 1940년대가 되면서 미국 가정의 45%가 전기냉장고를 소유할 정도가 됐다.
비단 냉장고 전쟁에서 뿐만 아니다. 생활필수품이 된 거의 모든 가전제품들 비슷한 과정을 거쳐 왔다. 1980년대 비디오 표준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였던 소니의 베타맥스와 제이브이시(JVC)의 브이에이치에스(VHS)도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베타막스가 화질면에서 월등하게 나았다.
그러나 소니가 기술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 있는 사이, 제이브이시(JVC)는 화질은 낮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기기를 공급하고 영화사들을 대거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기술면에서 한수 위인 소니를 시장에서 밀어내 버렸다.
이 싸움은 현재 연간 240억 달러로 추산되는 차세대 디브이디(DVD) 표준을 놓고 벌이는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DVD용량을 늘린 새로운 DVD포맷을 정하자는 것인데 소니의 '블루레이(Blu-ray)'와 도시바의 '에이치디디브이디(HD-DVD)'가 그것이다. 블루레이의 저장용량 25GB는 HD-DVD의 15GB를 압도하지만, HD-DVD는 기존 DVD 설비를 활용할 수 있어 가격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다.
확실한 것은 과거를 돌아보면 시장을 주도하는 표준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만으로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적자생존'을 외쳤던 찰스 다윈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살아 남는 것은 크고 강한 종(種)이 아니다. 변화하는 종만이 살아 남는다."
(글 : 유상연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