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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빛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고른세상
잊혀진 혁명가 김산의 눈물과 투쟁과 죽음
1937년 7월 중국혁명의 수도 연안(延安)이 지루한 장마를 겪고 있을 때, 미국의 젊은 여류작가 님 웨일스는 장명(張明)이라는 조선인 혁명가를 만난다. 수없이 일어나는 손의 경련을 참아가며 25명의 중국인 혁명가를 인터뷰하여 그들의 자서전을 썼던 님 웨일스는 연안에서 자기 말고는 유일하게 노신(魯迅)도서관에 소장된 영어 책을 집중적으로 빌려가는 이 미지의 인물에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어렵게 수소문해서 만난 장명에게서 님은 독특한 매력을 느꼈고, 장마로 길이 끊어진 김에 조선이라는 서구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 온 33세의 혁명가와 두달간 20여 차례에 걸쳐 집중적인 대화를 나눈다. 그 결과가 바로 김산(金山)과 님 웨일스의 공저로 1941년에 간행된 <아리랑>(Song of Ariran)이다.
무엇이 님 웨일스를 매료시켰나
김산이라는 이름은 이 책을 간행하기 위해 김산과 님 웨일스가 상의하여 붙인 이름으로 금강산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본명은 장지락(張志樂), 최근에 그가 일본 경찰에게 취조받을 때의 사진이 발굴되었는데, 그 사진에는 본명이 장지학(張志鶴)으로 되어 있다.
Song of Arirang의 간행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 모두에서 잊힌 혁명가가 된 김산의 생애는 1984년 이 책이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동녘출판사에 의해 번역 출간되면서 새로운 관심을 끌게 된다. 대학원생 시절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받은 감동과 흥분이야 지금도 생생하고 이 책을 읽은 모든 이들이 공유하는 것이지만, 또 하나의 감정, 당혹감이 필자를 사로잡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비슷한 시기 박노해의<노동의 새벽>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박노해가 실존인물이었는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인 것처럼 사학도들은 장지락이 과연 실존인물이냐를 의심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사가 걸어온 길을 몰랐던 것이다.
김산이 님 웨일스의 펜을 빌려 우리를 인도하는 세계는 정말 미지의 세계였다. 1984년 당시 사학도들은 김산이 님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난 이듬해에 일제간첩으로 몰려 중국공산당에 의해 부당하게 처형당한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금강산의 붉은 승려 김충창이 김성숙(金星淑)이었는지도 몰랐다.
김산과 갈등을 빚은 한모가 한위건(韓偉建)이었는지도 몰랐고, 조선과는 수만리 떨어진 광동(廣東)에서 일어난 봉기에 조선혁명운동의 정화라 할 수 있는 청년 수백명이 참가하여 이슬처럼 사라진 사실도 알지 못했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일본으로, 만주로, 상해로, 북경으로, 광동으로, 연안으로 중국대륙을 좁다 하고 혁명투쟁의 현장에 몸을 내던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섬 아닌 섬이 되어버린 분단국가의 남쪽에서 낳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연안 교외 나가평의 토굴집.
김산도 이런 토굴집에 살았을 것인다.
님 웨일스가 절묘하게 표현한 것처럼 당시의 동아시아는 한 세대 동안에 역사가 천년이나 흘러가는 곳이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김산이라는 33살의 청년은 자기가 자신의 젊음을 어디선가 잃어버린 젊은이라고 고백했다.
그렇게 어디선지도 모르게 청춘을 잃어버린 청년, 내 인생에 행복했던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청년이 이미 내로라하는 중국혁명가 25명의 삶을 인터뷰한 님 웨일스를 매료시킨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김산의 폭넓은 체험, 특히 중국혁명에 투신하였으면서도 중국공산당에 의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국외자로서의 위치에서 얻은 성찰과 고통이었다.
항일전투에 나선 중국의 해방군
칠백릿길을 걸어 신흥무관학교로
생물학에서 개체 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말이 있지만, 김산의 짧은 삶은 바로 우리 민족해방운동의 성숙과정이기도 했다. 어느 곳에 가던 사람들이 울부짖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불행한 조국에서 1905년에 태어난 김산은 이 시대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3ㆍ1운동의 좌절 속에서 정치의식을 갖게 된다.
그는 국제정의의 실현과 민족자결주의의 약속 이행을 곧이곧대로 믿다가 베르사유 강화회의의 결과에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맛보고, 또 외국인 선교사들이 서툰 우리말로 “한국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한국에 벌을 내리고 계신 것”이라고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것에 분개하여 기독교를 버리게 된다.
어린 김산은 3ㆍ1운동의 충격이 가라앉자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을 다닐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일본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거기서 그는 좋은 일본 친구들을 사귀기도 했지만, 어린 김산이 보기에 동경은 단지 지적 중심지로서는 2류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사상의 원천인 모스크바에 가서 학교를 다닐 결심을 했다. 그렇다고 이 무렵 김산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아직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으며, 단지 새로운 문명, 새로운 희망의 진원지인 소련에서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신흥무관학교의 생도들
집으로 돌아온 김산은 작은형이 맡겨둔 생활비를 몽땅 훔쳐 중국 안동(安東)으로 건너가 소련으로 가기 위해 하얼빈행 기차를 탔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이 러시아 혁명에 간섭하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병하였던 관계로 하얼빈에 갈 수 없게 되자, 김산은 방향을 바꾸어 만주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 있던 신흥무관학교로 찾아갔다.
이회영(李會榮) 등 민족주의자들이 세운 군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입학연령을 18살로 삼고 있었다. 아무도 열다섯 어린 나이의 김산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김산은 마적이 우글거리는 험한 길을 중국어 한마디도 못하며 옥편 하나 들고 걸어온 이야기며, 밤마다 돈을 땅속에 파묻었다가 새벽이면 다시 파내어 아침도 먹지 않고 길을 떠나 칠백릿길을 한달여 동안 혼자 걸어온 사연을 엉엉 울면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학교 당국은 예외적인 조치로 김산에게 시험을 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 시험에서 김산은 국사와 신체검사에서 떨어졌지만, 학교는 3개월 코스의 속성반에 입학하도록 배려했다.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
학교를 마치고 어느 보통학교에서 가르치던 김산은 좀더 넓은 곳에 가서 배우며 혁명활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고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로 떠나게 되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식자공으로 일하면서 김산은 소년시절의 영웅이던 이동휘를 비롯해 자신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하나로 꼽은 안창호, 그리고 이광수 등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정작 김산을 매료한 것은 테러행동이었다.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가진 민족주의자였던 김산은 상해에서 의열단을 만나 무정부주의에 빠져든다. 아직 나이가 어리던 김산은 의열단의 정식 단원이 되지는 못했지만, 무정부주의자들의 촉망받는 제자가 되어 그들만의 작은 서클에 들어가 생활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혁명선배이자 친구가 되는 김약산(金若山=金元鳳)과 오성륜(吳成崙)을 만나게 된다. 김산 자신을 포함하여 당시의 테러리스트들 대부분은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사상에 심취한 톨스토이주의자들로서 김산은 이 모순을 “시대는 때로 가장 온화한 사람들 중에서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삼으려는 가장 열렬한 영웅을 만들어낸다”는 말로 정리했다.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전개된
3.1운동 1주년 기념시위(1920)
김산이 마르크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은 1921년 그가 북경으로 옮긴 뒤의 일이었다. 그는 테러리스트들의 영웅적인 희생에 찬탄을 금치 못했고, 동지들 사이에 만연한 자유로운 정신을 좋아했지만, 그들의 활동이 실패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느낌이 든 것은 비단 김산만이 아니었다. 1920년대 초반 중국과 한국의 열렬한 무정부주의자들 중 상당수가 1922년에서 24년 사이에 마르크스주의로 경도된 것이다. 김산을 마르크수주의로 이끌어준 사람은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김충창이었다.
다른 사람의 감화와 신사상에 대한 감수성이 가장 풍부한 열일곱 사춘기의 나이에 자신보다 열살 위의 김충창을 만난 김산에게 김충창은 단지 선배일 뿐 아니라 가장 친한 벗이요 동지가 되었다.
1925년 김산은 김충창을 따라 북경을 떠나 광동으로 갔다. 쑨원(孫文)의 정부가 세워진 광동은 중국혁명의 중심지가 되었고, 다양한 배경이 있는 한국청년 수백명이 자진하여 혁명에 참가하기 위해 광동으로 왔다.
북경에서 의과대학에 다니던 김산은 광동에 와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한국혁명청년연맹의 간부로 활동했다. 의열단의 영수 김약산, 일본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폭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뒤 체포되었다가 탈옥한 오성륜도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광동으로 와 황포군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그러나 제1차 국공합작의 열띤 분위기 속에서 군벌들을 타도하기 위해 시작된 북벌전쟁은 1927년 4월 장제스(蔣介石)의 상해쿠데타로 인해 좌초되고, 중국에는 험악한 반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그해 12월10일 중국공산당 광동성위원회의 지도 아래 중국공산당원들은 광동에서 봉기를 일으켜 시가지를 장악했다.
이 봉기에는 앞으로 몇시간 안에 자신들 중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어떻게 하면 적을 때려부술 수 있겠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던 한국청년 200여명이 가담했다.
그리고 사흘 뒤 반혁명의 대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너무 열정적인 조선청년들, 앞으로 전진하는 법만 알지 후퇴하여 자신을 보존하는 법을 모르는 조선청년 대부분은 희생되었다. 6천여명의 중국민중들과 함께….
1927년 12월 일어난 중국 공산당원들의 봉기에는
200여명의 조선청년들이 가담해 대부분 희생됐다.
이 봉기에서 희생된 조선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
고문 끝에 석방… 그러나 의심을 받다
다행히 목숨을 구한 김산은 한인 동지 15명과 함께 인근에서 농민운동의 대왕이라고 하던 팽배(彭湃)의 해륙풍(海陸豊) 소비에트로 피신했다. 광동에서 해풍까지는 요즈음에는 고속도로가 뚫려 있어 차로 3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지만 김산 일행은 그 길을 적들의 추격을 피해가며 25일가량을 걸어야 했다.
해륙풍 소비에트의 농민들은 반혁명의 공세를 잘 막아내었으나, 1928년 5월 마침내 적의 공세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이 무렵에는 김산 등 살아남은 조선청년들도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 너희 가족에게 뭐라고 전해줄까를 서로 물으며 가족과 친지들에게 남기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김산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곳에서 행복하게 죽어갑니다. 노예의 땅에서 죽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여기가 우리의 빛나는 혁명투쟁과 같이 그렇게 자유로운 한국땅이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런 편지까지 썼지만 김산은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채 수천명의 희생자를 뒤로 하고 홍콩을 거쳐 상해로 탈출했다.
상해로 온 김산은 극적으로 광동에서 헤어진 김충창·오성륜 등과 재회하고 중국공산당 상해 한인지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상해에서 김산은 그와 악연으로 맺어진 또 다른 뛰어난 혁명가 한위건을 만난다. 한위건은 3ㆍ1운동 당시 시위를 이끈 학생대표의 한 사람으로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의 지도부로 있다가 1928년 봄 당이 일본경찰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 때 구사일생 탈출해 중국으로 망명한 사람이었다.
사회주의 탄압에 혈안이 되었던 일제가
1926년 당시 조선공산당을 검거한 내용의 기사
김산은 스스로가 용서를 모르는 단호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할 만큼 혁명적 순결성을 고집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남들의 사소한 탈선도 용납하지 않고 비판해서 로베스피에르란 별명을 들을 정도였다.
김산은 한위건을 일제의 첩자로 보지는 않았지만, 한위건이 조직을 얼마나 허약하게 꾸렸기에 단 한번의 검거로 천여명이 무더기로 검거되게끔 한 실수와 오류를 용납할 수 없었다. 더구나 당시 김산은 광동코뮌에서 그토록 많은 훌륭한 동지들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새까만 저주처럼 짓눌려 있었다.
어디 가서 이 사람들 - 한국혁명의 정수이며 당 전체의 중핵이던 사람들 - 을 보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혼자 있으면 이들 희생된 사람들의 망령이 자신을 괴롭히던 때였다. 그런 처지에 있던 김산은 한위건을 곱게 보지 않아 그의 중국공산당 입당을 반대했다.
김산이 북경으로 옮겨 북경시당의 조직부 일을 보고 있을 때 한위건도 북경으로 옮겨와 북경시당에 입당을 신청했다. 그러나 김산은 여전히 한위건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고 그의 입당을 처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30년 11월 김산은 국민당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산은 곧 일본경찰로 이첩되었지만, 고문을 견뎌내며 혐의를 부인한 끝에 석방되어 1931년 6월 북경으로 돌아왔다.
김산이 피신했던 해륙풍 소비에트를 이끈 팽배
동지들은 적에게 체포되었다가 무사히 돌아온 김산을 겉으로는 친절하게 맞아주었지만, 실제로는 그와 접촉하기를 꺼려했다. 어떻게 그리 쉽사리 감옥문을 나설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당시의 분위기에서 당연한 의심이었다. 특히 이런 의심을 제기하는 데에서 김산이 투옥되어 있는 중에 당에 들어온 한위건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는 혁명적 순결성을 고집하며 다른 사람의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던 김산에게 돌아온 부메랑과도 같은 의심이었다.
“나는 승리했다”
이 사건은 김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좌절과 궁핍 속에 병까지 얻은 김산은 한위건이 계속 자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는 사람이 아니라 독사이며, 그는 나에게 한 짓을 다른 사람에게도 할 것이기 때문에 그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비수를 품고 한위건을 찾아가기까지 했다.
비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5분 내에 우리 둘 중 하나가 죽게 될 것이라 한위건을 노려보며 말했을 때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본 김산은 칼을 두고 그의 집을 빠져나왔다. 머나먼 중국 땅에서 동족 혁명가끼리의 의심과 불화는 김산의 내면을 갉아먹었다.
더구나 김산도 훌륭한 사람이지만, 한위건 역시 뛰어난 혁명가였다. 현재 중국공산당의 문헌에서 한위건은 중국혁명에 참가한 숱한 조선인 혁명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며, 그의 빼어난 인품을 증언하는 기록도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의심하며 반목해야 했다는 것은 당시의 혁명이 얼마나 힘든 조건하에서 진행되었는가를 보여준다.
김산과 갈등을 빚었던 한위건.
김산도 훌륭한 사람이지만,
한위건 역시 뛰어난 혁명가였다.
이런 마음고생을 겪으며 김산은 더 이상 혁명의 견습생도 아니고, 혁명적 낭만주의자도 아닌, 장차 올바른 지도자가 될 자격을 갖춘 하나의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동지들에게서 받은 부당한 의심은 그를 지적으로 성년기로 끌어올려 주었다.
김산은 자신의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고,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지만, 자신은 단 하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승리하였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또 다년간의 마음의 고통과 눈물을 통하여 오류가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얻은 이런 귀중한 깨달음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날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여러 나라의 민족과 계급을 지도하는 소련을 어머니처럼 사랑했고, 그 삶과 운명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국혁명을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이 사랑했으며, 어리고 불확실한 어린 아이와도 같은 한국혁명을 사랑하던 국제주의자 김산. 그러나 한국에서, 시베리아에서, 일본에서, 중국에서, 만주에서 혁명가로서 나라를 넷이나 가진 인간이란 나라를 하나도 갖지 못한 인간보다도 훨씬 비참했다.
각국에서 그가 받는 것이라고는 오직 천국행 차표 한장 뿐이었기 때문이다. 혁명이 있는 곳에 온몸을 내던진 김산, 아니, 그들 자신의 님 웨일스를 만나지 못해 김산만큼 파란만장했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남기지 못한 수많은 김산들은 과연 어떻게 죽어간 것일까?
간도를 휩쓸고 간 민생단 마녀사냥의 중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캉솅(康生)은 연안으로 돌아와 왜 김산을 일제의 특무로 의심하여 처형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