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학산(鶴山) 금광평(金光坪)<3>
<4> 금광리 천주교 공소(公所)와 용금정(湧金井)
천주교 공소(公所) / 연혁 소개 / 신기한 샘물 용금정 / 설명문
금광평 앞 금광리(金光里)에는 천주교(天主敎/Catholic) 공소(公所)가 있고, 그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면 너무나 놀라운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곳 금광리는 가톨릭의 성지(聖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66년 대원군(大院君)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당시 9명의 선교사(宣敎師)와 수천 명의 교우(敎友)들이 살해당했던 아픈 역사가 있는데 박해를 피해 전국 가톨릭 신자들은 강원도 산골로 피했다 하고, 당시 산골마을이었던 이곳 금광리로 피신한 신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1887년, 이곳에 교회를 세워 금광리 성당을 열었고, 당시 소문을 듣고 이 산골에 모여든 신자들이 100명이 넘었다니 놀랍다.
그것을 보면 영동지방에 최초로 복음(福音)이 전파된 곳이 이곳 금광리라 할 것인데 박해가 끝나자 피신했던 신자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니 이곳에는 성당도 사라지고 없어졌다고 한다. 1921년에 작은 건물을 세우고 주일마다 한번 신부님이 와서 미사를 올리는 공소(公所)로 존속되었다고 하니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이곳 금광리는 어찌 보면 강릉지역 기독교 탄생의 모태(母胎)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6.25 사변 후 가난에 쪼들리던 시절, 이곳 공소에서 성경 구절을 기록한 손바닥 크기의 작은 문답집을 나누어 주고 와서 외우면 옥수수가루(玉粉)와 밀가루를 나누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자주 가서 받아왔는데 우리 어머니는 기특하다고 내 머리를 쓰다듬고 식량으로 쓰던 가난의 시절..
금광리 금광평 언덕 쪽에 조그마한 샘(泉)이 있고, 아무리 가물이 들어도 샘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샘물로 머리를 감으면 윤기가 흐르고 흰머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로 확인되지는 않았다지만 어떤 마을 사람이 그 샘 속에서 금을 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근 들어 마을 이장이 용금정(湧金井) 비석을 세웠는데 관광객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5> 무장공비(武裝共匪) 동해안 침투사건
무장공비 소탕작전 / 북괴 잠수함 전시 / 정동진 강릉통일공원 전시장(외부모습)
가장 가슴 아픈 사연으로, 1968년 10월, 동해안을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遊擊隊)들은 무자비한 살상과 만행을 저질렀는고, 우리나라는 군경(軍警)과 예비군(豫備軍)을 소집, 포위에 성공하고 소탕(掃蕩)작전에 나서 2달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진압에 성공은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참혹하였다.
북괴(北傀) 무장공비들은 잠수함을 타고 동해안에 들어온 다음 특수정으로 수차례 걸쳐 120명이 상륙에 성공한다.
침투한 곳은 안인(安仁), 삼척(三陟), 울진(蔚珍), 포항(浦港) 등 동해안(東海岸)이었다.
북괴의 수령(首領) 김일성(金日成)은 6.25의 실패가 응어리로 남았었는지 북괴군을 특수교육하여 남침(南侵), 남한을 적화(赤化)하겠다는 계획 중 하나가 동해안 침투 작전이었다고 한다.
무장공비들은 무자비한 살상을 서슴지 않았으며, 강릉 안인(安仁) 해변으로 침투하였던 공비들은 군경(軍警) 토벌대(討伐隊)의 활약이 심해지자 뿔뿔이 흩어져 북한으로 도주하는데 인적이 드문 단경계곡(檀京溪谷)이 태백산맥을 따라 북한으로 넘어가는 주 도주로였다고 한다. 2개월여 참혹한 살육전(殺戮戰)으로 이어졌던 무장공비 토벌(討伐) 작전은 이제는 기억에서 멀어져 가지만 너무나 가슴 아팠던 민족의 비극이었다.
토벌 작전의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의 전사자(戰死者)는 군경(軍警) 38명, 민간인 23명으로 총 61명이 사망하였고, 북한 무장공비 120명은 사망 113명, 생포 7명으로 종결되는, 너무나 참혹한 사건이었다.
강릉 안인진리(安仁津里) 해변 언덕 위에는 ‘강릉 통일공원(統一公園)’을 조성하여 당시 상황 등을 전시하고 있고, 해변에는 당시 좌초(坐礁)되었던 북괴 잠수함을 발견, 인양(引揚)하여 전시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