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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 여행(2)
월남(越南)이라는 나라
19시 15분 하노이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3배나 넓다는 국토, 칠레 다음으로 길쭉하게 남북으로 뻗어 하노이는 아열대지역인데 비해 호치민은 열대몬순지대이며 4모작 쌀농사를 짓는 나라. 8600만 인구 중 75%가 35세 이하로, 젊고 활력 있는 나라, GNP 3000불의 발전도상국가인나라를 본격적으로 여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 나라를 우리는 흔히 베트남이라 부르지만 그들 자신은 '비엩남'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중국 춘추시대의 고사 '오월동주(吳越同舟)'에 나오는 월나라와 지금의 월남이라는 나라가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고대사의 추론에 속하지만, 이때의 월나라가 곧 '비엩남'(Vietnam)의 '비엩'(越)이라고 합니다.
월(越)은 분명 한족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중국인들은 강소성으로부터 점점 밀려나 광동, 광서 이남에 자리 잡은 사람들을 남월(南越)사람이라 불렀는데, 형용사가 뒤에 붙는 베트남 말로는 월남(越南)이 된 것이라 합니다.버스를 타고 하롱시로 이동하면서 베트남 현지 가이드로부터 베트남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캄보디아 사람들이 베트남 사람처럼 살고 싶어 할 만큼 인도차이나에서는 선진국에 속한다는 나라.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을 동경하며 한국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 한다고 했습니다. 25,000명의 베트남 아가씨들이 한국에 시집을 와서 살고 있는 것도 그래서인지 모르겠습니다.
한류(韓流) 열풍의 발원지가 베트남이라는 사실도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 원조가 '휘나리'를 부른 가수 구창모라고 합니다. 그는 베트남에서 개인 콘서트를 벌써 세 번이나 열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소지섭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재도 한류 열기는 계속되고 있으며 저녁시간 베트남의 TV 채널을 돌리다보면 적어도 한 곳에서는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고 시내 카페 곳곳에서는 베트남어로 번안해서 부르는 한국 가요를 쉽게 접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한국 연예인들을 모델로 한 달력과 포스터가 구멍가게 구석에까지 걸려 있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 솟아나는 물은 대개 석회질 성분이 섞여 있다고 합니다. 쌀이 흔해 밥은 공짜로 주는데 비해 물은 귀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수도 1병에 1불이라 합니다. 베트남 하면 바나나 잎을 엮어 만든 고깔모자(놈)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시클로와 오트바이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온순한 성질에 보기만 해도 불쌍해 보이는 얼굴들이었는데, 그에 비해 베트남 사람들은 도전적이고 활력에 넘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타고 가는 관광버스는 현대자동차에서 생산된 차였는데 운전기사는 반대편 차선을 무시로 넘나들며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도로의 표지선도 실선은 거의 볼 수 없고 대부분 점선이거나 아예 표시가 없었습니다. 베트남의 관광버스 기사들은 일등 신랑감이라 하였습니다. 60년대의 우리나라 버스들처럼 보조석에 타고 가면서 기사를 보조하는 조수가 있는 것도 특이했습니다.
20시 25분, 삼성휴대폰 공장을 지나갈 무렵 베트남 여자들이 신랑감을 구할 때 가장 먼저 보는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첫째가 손톱이 긴 남자(화이트칼라) 둘째 고급 오트바이를 타는 남자 셋째가 삼성휴대폰을 가진 남자라고 하였습니다. 이곳 삼성휴대폰 공장에는 15,000명의 베트남 사람들이 근무한다고 하였습니다.
22시 25분, 하롱(下龍)시에 도착했습니다. 어두워서 잘 볼 수는 없었지만 버스는 한참 동안 바닷가 도로를 달려 왔습니다. 이곳 하롱베이(下龍灣)의 바다는 파도와 짠 냄새, 갈매기 등 세 가지가 없는 바다라 합니다. 베트남 최고의 휴양지, 세계 최고의 사진 촬영 명소라는 하롱베이의 아름다운 바다풍경을 보게 될 시간도 멀지 않았습니다.
하롱베이(Halong Bay, 下龍灣)
여행 제4일-2010년 2월 26일.
아침 9시, 세계 8대경승지로 꼽히며, 1994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하롱베이의 아름다운 바다풍경을 보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향했습니다. '하롱'이란 下龍, 즉 용이 내려왔다는 뜻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한 무리의 용들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했고,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 내뱉은 보석들이 3,000여 개의 아름다운 섬이 되었다고 합니다.
날씨의 변화가 무쌍해 하롱베이로 나가는 배를 타보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관광객들도 많다고 하는데, 당일은 날씨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바다 한가운데 많은 봉우리들이 불끈불끈 솟아 있있었습니다. 석회암의 기암괴석들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이어 형성된 카르스트 지형의 그 봉우리 모습들이 '바다 위에 펼쳐진 계림(桂林)'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봉우리 사이를 오가는 목선들의 모습 또한 퍽이나 낭만적이었습니다. 그 관광유람선들은 임진왜 란 때 조선 수군의 판옥선을 개조한 것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줄 지어 바다로 나아가는 유람선들의 행렬을 보면서 조선 수군이 되어 전쟁 치러 나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40분 후, 하롱시 부두에서 4km 거리에 있는 하롱 석회동굴에 도착했습니다. 1902년 한 어부가 표류하여 상륙해 살다가 잃어버린 원숭이를 찾아 나선 끝에 발견했다고 하는데, 하롱베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굴이라고 합니다. 천궁(天宮)동굴이라고도 하고 승솟동굴이라고도 부른다 하였습니다.
130m 길이의 동굴 안에는 억겁의 세월 동안 만들어진 갖가지 종유석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멧돼지 한 마리가 용을 타고 내려오는 형상을 비롯하여 원숭이상, 용머리상, 여인의 유두(乳頭)상, 마리아상 등 기상천외한 형상의 종유석들이 무척이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동굴이었습니다.
10시 40분, 천궁동굴을 출발하여 다시 바다로 나갔습니다. 고기를 잡아 가두어 놓고 파는 어장에 도착하여 생선횟감 고기를 샀습니다. 한국에선 1kg에 15만원쯤 하는 다금(多金)바리를 부담 없이 맛볼 수 있었습니다. 다금바리 14kg과 문어와 갑오징어 각 3.5kg을 비롯하여 조개 종류를 곁들여 375불을 지불했는데, 1달러=1160원으로 계산,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니 435,000원쯤 되었습니다.
12시 35분, 옛 쏘련의 우주인 Dao Titopd이 방문한 곳이어서 베트남의 민족영웅 호치민이 티톱섬이라 직접 명명했다는 금모래섬에 도착했습니다. 427계단을 밟고 이 섬의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하롱베이의 아름다운 바다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습니다. 장엄한 파노라마를 펼쳐 보이는 이곳의 경치를 두고 '1000만 불짜리 풍경'이라고 하는데, 영화 '인도차이나'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하였습니다.
14시, 모터보트를 타고 하롱베이의 비경 중 비경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작은 배를 타고 작은 바위 문을 통과하니 사방이 막힌 둥근 호수와도 같은 곳이 나왔습니다. 사방이 막혀 있어 파도가 아예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잔잔하며 큰 소리를 내면 메아리가 되어 사방에 울려 퍼지는 곳이었습니다. 흔히 이곳의 이름을 '항루원'이라 하는데 원래의 명칭은 '항 루온(HANG LUON, 바다 위의 호수)이라 하였습니다. 낮고 자그마한 바위 구멍(문)까지 물이 차버리면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곳으로, '007영화 '네버다이'에서 모터보트 추격 장면이 촬영된 곳입니다.
여행 제5일-2010년 2월 27일.
아침 08시, 하롱시에서 170km 거리에 있는 하노이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우리가 탄 버스는 물론 길거리에 보이는 관광버스들이 모두 현대자동차에서 생산된 차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선 차량 제조기술을 이전해 준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을 최고 국빈으로 대접한다고 합니다. 트럭 등을 만들어 캄보디아를 비롯한 외국으로 수출, 자국의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도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 섬들이 마치 산맥처럼 보였는데 모두 빼어난 풍경을 보여 주었습니다. 섬과 육지 사이의 해변 곳곳에 원두막 같은 집들이 보였습니다. 함초처럼 소금물에서 자라는 나무인 망그로브를 키우는 바다 과수원이라 하였습니다. 망그로브 나무는 열대 및 아열대의 해안과 바다에 접한 강의 경계에 군생하면서 해안토양의 유실 방지 등 생태적으로 그리고 산업적 이용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나무라고 합니다. 이들은 물이 빠진 간조(干潮) 때에는 여러 개의 지지근(支持根)이 마치 커다란 옥수수 대처럼 뿌리를 내려 서있는 기이한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9시 35분, 아베쎄(ABC) 쇼핑센터에 도착했습니다. 프랑스 귀족들이 즐겨 마셨다는 다람쥐커피를 한 잔씩 마시고 쇼핑을 시작했습니다. 가장 맛있는 것만 본능적으로 골라 먹는다는 다람쥐들의 배설물에서 나온 커피열매로 만든 커피라 합니다. 일명 '똥커피'라 하네요. 다람쥐의 소화기관을 거치면서 침과 위액 등에 의한 화학적 작용을 일으켜 '명품 커피'의 원두로 재탄생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커피 맛은 진하고 구수했습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베트남이 세계 3대 커피 수출국이며, 미국과 타이에 이어 제3위의 쌀 수출국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메콩델타 앞바다에는 엄청난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입증됐으며, 사우디아라비아를 능가하는 산유국이 될 것이라 합니다. 쇼핑센터 고객의 대부분은 한국 사람들로 주로 명품 가방 키플링과 '노스페이스' 브랜드의 등산용품을 구입하는 것 같았습니다. 키플링은 소설 <정글북> 등의 작품으로 190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작가인데 어떻게 가방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10시 25분,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가이드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습니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전쟁이 끝나고 지금은 태평성대라는 베트남 국민들은 "내 옆에 신랑이 있고, 우리 애들은 학교 갔어요"하는 주부들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행복지수가 매우 높다고 합니다. 베트남 국민들은 행복은 경제 순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산다고 합니다. 국민 행복지수 조사 당시 한국이 세계 31위일 때 베트남은 세계 5위였다고 하며, 1979년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국민들의 자존심도 상당히 높아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분단국가였던 베트남. 한국은 38선으로 분단됐고 베트남은 16선으로 남북 분단이 되었다 합니다. 남북통일이 되기까지 가장 큰 공로자인 민족지도자 호치민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은 대단하다고 합니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호치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의 첫째가 정약용의 <목민심서> 탐독이라 하였습니다.
10시 40분, 화력발전소 옆을 지났습니다. 북쪽 지방에서 채굴한 석탄들이 강을 통해 이곳까지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곧 우리나라에서 원자력발전소가 수출될 것이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후진 기술은 라오스나 캄보디아 등으로 넘기게 된다 하였습니다. 베트남은 아직도 유교 성향이 강해 각 가정의 제사도 5대 봉사를 하며, 남쪽 지역에서는 막내가 상속권을 가진다고 합니다. 문맹률이 5%도 안 되고 젊은 사람들이 많아 발전 가능성이 매우 큰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차창 밖의 농촌 풍경이 옛날의 우리 시골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습니다.
아직 이앙기가 없는지 허리 굽혀 모심기를 하고, 소를 끌고 써레질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모내기 후 100일이면 수확을 한다고 합니다. 길거리에 바나나 나무가 늘어선 풍경도 눈에 들어오고, 대규모 바나나 농장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바나나 껍질로 만든다는 베트남 전통 모자 '놈'을 쓴 농부들이 거리를 오가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기아자동차에서 생산된 화물트럭에 적힌 '개별화물'이라는 한글과 스쳐 지나가는 버스에 '영일고속관광'이라는 한글이 그대로 적혀 있는 걸 보니 어색함과 친근감이 함께 느껴졌습니다. 한글이 적힌 상품을 최고로 치기 때문에 한글 적힌 차량은 비싼 값에 팔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물차의 '위험물 적재'라 적힌 부분을 떼 내어 관광버스에 붙이고 다니기도 한다고 하여, 모두 웃었습니다.
하노이(Hanoi)
하노이 도심지로 들어서니 홍강(紅江, Song Hong, Red River)이 흘러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노이는 중국말로 하내(河內)라는 뜻입니다. 이때의 '河'는 이 지역에 흘러내리는 홍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노이는 홍강이 흐르는 그 안쪽에 자리 잡은 도시라는 뜻입니다.
12시 15분, 하노이 서호 주변의 어린이대공원 옆에 있는 센(Sen) 레스토랑에 도착했습니다. '센'(Sen)은 베트남의 국화인 연꽃을 뜻하는 말이랍니다. 54개의 소수민족의 수십 가지 음식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뷔페식 식당으로, 베트남의 음식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13시 35분, 식사를 끝내고 하노이 시내 관광에 나섰습니다. 쇼핑코스인 아베쎄그룹의 라텍스 판매장에 들른 후 씨클로를 타고 하노이 최고 번화가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여러 나라에 인력거에 있지만 손님이 앞에 타는 인력거는 베트남의 것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앞자리에 앉으니 탁 트인 넓은 시야로 앞을 볼 수 있어 그 시원함과 자유로움으로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이동수단으로서의 이용보다 색다른 체험을 위한 관광상품으로 인기지만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운 가운데 이뤄지는 시클로 체험관광은 교통체증 때문에 올해까지만 허용한다고 합니다.
씨클로 관광 중 만나는 최고 명소는 호안키엠(환검, 還劍)호수였습니다. 이 조그만 호수는 '되돌려준 칼의 호수'로 유명한 곳입니다. 명군의 침략을 물리친 레 타이 투 왕이 잃어버린 검을 찾기 위해 작은 배를 타고 호수에 있었는데, 거대한 황금 거북이가 수면으로 올라와 왕에게 검을 건네주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였습니다.
19세기에 이 호수 가장 자리에 세워진 옥썬사원(Ngoc Son ․ 玉山祠)은 짧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황금 거북 모형도 있습니다. 호수에는 거대한 거북이들을 볼 수 있는데 어떤 것들은 몸무게가 250킬로나 나간다고 합니다. 호수 부근으로 CCTV를 설치해 거북이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관찰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에는 운동을 하러나오는 시민들이 많고, 호수주변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와 분위기 있는 까페들은 느긋한 주말을 즐길 수 있는 시민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합니다. 호숫가 주변의 도로에 오토바이와 씨클로, 자전거가 붐비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이색적인 풍경이었습니다.
호수 남쪽으로는 프랑스식 아름다운 건물들로 이루어진 해외 공관들이 밀집되어 있었는데, 한국대사관 옆에 있는 대우건물도 보였습니다. 이 건물은 외국 자본으로 건축된 최초(1996년)의 건물이라 합니다. 관공서마다 망치와 낫이 그려진 공산당 깃발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 깃발은 전 세계 모든 공산국가들의 공동 깃발이라 합니다.
공원에 레닌동상이 서 있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공산국가의 역대 지도자 가운데 호치민, 모택동, 김일성의 시신은 방부 처리하여 보존되고 있다는데, 국민들이 진정으로 존경한 사람은 호치민과 체 게바라밖에 없다고 합니다. 16시 15분, 호치민 묘소가 있는 바딘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1941년 30년만에 프랑스에서 돌아온 호치민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1945년 8월 혁명을 통해 월남 전역을 장악하고, 그해 9월 2일 그가 직접 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이 바로 이곳 바딘광장입니다. 바딘광장은 전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박호'(호 아저씨=호치민)가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침이면 길고 긴 참배 행렬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연꽃 모양을 하고 있다는 건물에는 거대한 일성기(一星旗)가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의 국기인 일성기의 붉은 바탕색은 혁명을 뜻하고, 별의 오각(五角)은 '士 ․ 農 ․ 工 ․ 商 ․ 軍'으로 이뤄진 전체 인민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묘소 옆에 붉은 글씨로 적힌 글이 있었는데, "위대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만세"라는 뜻의 구호라고 했습니다.
미군의 폭격으로 이곳에 있던 옛 궁궐과 불교 유적들은 모두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묘소 주변에는 호치민이 생전에 살았던 공간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베트남의 식민 지배를 위해 지었던 총독 관저는 독립 이후 주석궁으로 사용했는데, 호치민의 집무실과 호치민이 죽을 때까지 기거했다는 가옥, 호치민이 거닐었던 정원 등 그 모든 것들이 호치민의 이름으로서 기념되어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에는 '베사메무초'라는 멕시코 노래 가사에 나오는 '리라꽃 향기'의 리라나무 거목들이 많았고, 분재에 심어진 리라나무도 많았습니다. 꽃이 예쁘고 향이 참 좋았습니다. 16시 50분, 호치민 묘소 인근에 있는 일주사(一柱寺, One Pillar Pagoda, Chua Mot Cot)에 도착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의 커다란 기둥에 위에 세워진 절로, 하노이를 상징하는 절이라 합니다. 베트남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리성종의 아버지이자 리씨 왕조의 창시자인 리태종(Ly Thai Tong, 1028-1054 재위)이 1049년 연꽃을 타고 나타난 관세음보살로부터 아이를 받는 꿈을 꾸고 나서 왕자를 낳은데 보답하기 위해 하나의 큰 기둥 위에 연꽃 모양의 정자(탑)를 세웠다고 합니다.
왕궁의 동쪽 해가 뜨는 곳, 최고의 명당에 대리석 기둥을 박고 흑단목으로 절을 건축했는데, 전란으로 여러 차례 훼손이 있었고 1954년 프랑스군이 하노이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파괴했으나 콘크리트 기둥으로 새로이 복구했다고 하네요. 한 개의 원형 기둥 위에 절을 지었는데, 계단을 통해 올라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그 예술성이 높이 평가되어 하노이를 찾는 사람들은 이 일주사를 꼭 찾는다고 합니다. 연화대(蓮花臺)라고 한문으로 쓴 현판이 걸려있는 법당에는 관음보살을 모셔 놓았는데, 이곳에서 예불을 올린 후 밑으로 내려와 왼쪽으로 세 바퀴를 돌면 아들을 낳고, 오른쪽으로 세 바퀴를 돌면 딸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합니다.
17시 15분, 하노이 관광 일정을 모두 끝내고 하노이공항으로 향했습니다. 20시 하노이공항 이륙, 21시 50분 호치민공항 착륙, 24시 10분 호치민공항 이륙의 일정이 이어지는 가운데 베트남여행의 여정도 끝났습니다. 앙코르와트 같은 탑이 2,000개 이상이나 있다며 미얀마 여행을 강력 추천하던 가이드의 말을 새기면서 인도차이나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하였습니다.
호치민 공항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타는 즉시 신문을 펼쳤습니다. 김연아에 대한 세계 언론의 찬사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김연아는 한국에서 온 살아 숨 쉬는 예술품(work of art)' '스케이팅은 바람처럼 빨랐고, 착지는 깃털처럼 부드러웠다. 악보 위의 음표처럼 은반 위를 미끄러졌다.' '국적과 성별은커녕 종을 망라해 눈 달린 생명체라면 감히 시선을 거둘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여행하는 사이 김연아는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것입니다. '김연아의 메달 획득으로 그를 모델로 삼은 기업들은 제품 판매와 브랜드 상승효과를 톡톡히 보게 됐고 대한민국의 국가 브랜드도 크게 상승하게 되었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도차이나 2개국을 여행하는 동안 그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예사스럽지 않게 대하던 태도가 김연아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김연아가 딴 금메달의 가치는 국민이 받은 '희망'과 '자긍심'까지 감안하면 가히 천문학적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