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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 |
진한(辰韓) 12국중 근기국(勤耆國)의 영역 |
삼국시대 신라초기 |
근오지현(斤烏支縣, 일명 烏良友·烏川 이라고도 함) |
통일신라시대 |
경덕왕 16년(757) 임정현(臨汀縣), 의창군(義昌郡 : 후의 興海郡)의 영현 |
고려시대 |
태조 13년(930)에 영일현(迎日縣 또는 延日懸)으로 개명하고, 현종 9년 (1018) 경주부(慶州府)에 내속 |
조선시대 |
영일현 (현감 : 종 6품), 경주부의 영현 |
- 1765년 : |
8면(邑內·夫山·驛·古縣·南·舊邑·西北面) |
- 1789년 : |
8면 82리(읍내면 11리, 북면 10리, 서면 6리, 구읍면 3리, 역면 2리, 남면11리, 부산면 17리, 고현면 21리) |
- 1832년 : |
구읍면이 남면에 편입되어 7면 78리가 됨(읍내면 16리, 북면 9리, 서면 7리, 남면 13리, 고현민 13리, 부산면 18리, 역면 2 리) |
- 1871년 : |
7면 104리(고읍면에 해도·상도·하도·분도·죽도등의 섬 마을이 개척됨) |
- 1895년 5월 26일 : |
영일현이 영일군으로 개칭되어 동래부에 속함, 8면 102리(고현면을 분면하여 일월면을 신설, 1면이 늘어남) |
- 1896년 8월 4일 : |
13도제(道制)실시로 영일군이 연일(延日)군이 되어 경상북도 (41군)의 관할이 됨 | |
일제강점기 |
- 1912년 1월 : |
8면 104리(읍내면 17, 서면 8, 남면 18, 고현면 15, 일월면 12, 동해면 18, 동면 8, 북면 8), 군청 소재지 :읍내면 생지동 |
- 1914년 3월 1일 : |
흥해·연일·장기·청하군을 영일군으로 통폐합할 시 연일군 지역을 연일면·동해면·오천면·대송면·포항면(북면 지역) 5개면으로 분면하여, 연일면을 13개동(구 연일군의 읍내면과 서면 및 구 경주군 강동면 중명리를 통폐합)으로 개편, 면사무소 : 생지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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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
- 1957년 10월 29일 : |
달전면을 폐지하여 학전·달전·자명·유강동을 연일면에 편입하고, 나머지는 의창면에 편입함으로써 17개동을 관할 |
- 1980년 12월 1일 : |
연일면이 연일읍으로 승격 |
- 1983년 2월 15일 : |
연일읍의 대잠동·이동·지곡등·효자동·생지동 일부 오천동 일부를 포항시로 편입하여, 관할면 13개동이됨. |
- 1987년 1월 1일 : |
오천동 일부가 대송면 제내동으로 편입함 |
- 1988년 5월 7일 : |
洞을 里로 개정 |
- 1992년 11월 12일 : |
읍사무소를 생지리 226번지에서 괴정리 289-1번지로 신축 이전 |
- 1993년 7월 22일 : |
생지리를 생지 1·2리로, 동문리를 동문 1·2리로 분리 법정리 13, 행정리 21리 관할함 |
- 1998년 2월 12일 : |
생지3리 분동 법정리 13, 행정리 22리 관할함 |
- 2000년 10월 21일 : |
유강3리 분동 법정리 13, 행정리 23리 관할함 |
- 2003년 12월 20일 |
생지리,괴정리,동문리,유강리 분동 법정리13,행정리 30 관할함 |
- 2004년 5월현재 : |
법정리 13, 행정리 30리 관할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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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군 읍내면 지역으로 형산강을 경계로 농업용수가 풍부하여 농사짓기 위해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예부터 이곳은 저지대로 미나리가 자생하였다. 연일 부조시장의 번성시에 강 포구가 있던 곳이라 생고기배의 하치장으로 어시장이 존재하였는데 이곳에서 생고기를 거래하는 어시장이 있어서 생거리로 불러왔다. 한편 이곳에서 자생하는 미나리를 디쳐 생고기(회)에 맛이 일품이라 연일군수가 생미리로 칭해 오면서 한자의 음을 따 생지리로 불러오게 되었다. 1866년 연일현청이 옮겨지면서 남순현군수가 넓은 들판에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팽이나무 느티나무를 6리 8리로 심어 큰 숲을 이루었다. 이 나무들이 형산강 수로 변경과 도시화과정에서 농지개발로 훼손되어 몇 그루만 현재 남아있다. 예부터 연일이 관공서가 이곳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파출소 우체국 보건지소가 연일초등학교가 있고 읍청사는 괴정으로 이건 되었다. 형산강 주변에 놓인 이곳에는 마을이 팽창하여 고층건물 APT가 늘어나면서 1.2.3리로 분리되고 자동차 운전 교습소와 자동차 면허시험장이 있으며 강변을 따라 늘어나는 현대식 APT와 고수부지에는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비늘하우스 단지들이 줄비하게 있다. 생지리에는 형산강 북쪽을 연결하는 잠수교가 있는데 나루로 있을때는 이 잠수교가 환영받았으며 연일대교가 놓이면서 천시되어 보수가 실행되지 못하여 방치되어 있다. 또 고층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2001년 형산초등학교가 연일초등에서 분리되어 최신식으로 건립되어 있으며 그 위 쪽으로 고층 채소단지를 이루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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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군 읍내면 지역으로 이곳에는 회나무가 무성하여 여름철 행인들이 쉬어가며 땀을 씩혀가는 장소로서 회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칭해왔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자연부락인 서문리 신흥리를 합하여 한자의 음을 따 괴정리로 영일군 연일면에 이속 되었다. 서문리는 옛 연일현청의 서문이 있던 곳의 바깥쪽에 마을이 생겨나면서 불러온 곳이다. 그 아래에는 도축장이 있었는데 하루는 행인이 이 곳을 지나면서 더위에 지쳐 부채질을 하면서 쉬고 있었는데 주변을 살펴보고 깜짝 놀라 마을의 형국이 범과 같으니 마을에 해를 입게되니 매월 보름에 소를 잡아 피를 뿌려야만 마을의 액운은 피할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그 뒤에 마을의 주민들이 사안일을 빌기 위해 소 피를 뿌려 액운을 막는 일을 해 왔다고 한다. 새태, 새터는 일명 새로 생긴 마을로 신흥리로 불러왔고 앞에 놓인 어미들에 농사를 짓기 위해 새로 마을이 생겨나면서 새터 신흥으로 칭해 왔다. 괴정리는 김해김씨들이 최초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생겨난 것으로 전해지고 기록되어있으며 1700년대에 경주이씨 경주김씨 영일정씨가 취락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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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장터.서문장터걸(西門)
괴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연일읍성의 서문이 있었던 곳이며, 인가가 많이 들어서자, 장이 생겼기 때문에 이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이곳에는 도살장이 있었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마을의 형상이 마치 범의 모습과 같아서 마을이 잘 되려면 소의 피를 흘려야 한다고 하여 해마다 8월 보름이면 소를 잡아 마을의 평안과 번영을 빌었다고 한다. |
☞ 새터.새태(新基.新興)
서문장터 마을의 인가가 점차 늘어나자, 서문장터의 동쪽에 새롭게 부락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같은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괴정리 전체의 모양이 범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중 이곳은 가장 나중에 생겼을 뿐만 아니라 모양 또한 범의 꼬리와 같다고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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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군의 읍내면에 속한 마을로 읍성의 동쪽에 마을이 생겨나면서 동문껄이로 불러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으로 영춘리를 합병하여 동문리로 연일면에 이속 되었다. 동문리의 앞 어미들에는 넓은 지역에 쌀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마을이 생겨났다. 이곳은 영일정씨들이 개척한 마을로 전해지고 있으나 1960년대까지 영일정씨들이 부락을 이루고 살아왔으며 언덕을 이룬 지형적인 모래밭을 개간하고 평지로 만들어 농업에 종사한 마을이 현재 APT와 외래인이 유입하여 옛모습을 찾을 길이 없고 1951년 설립된 영일중학교와영일고등학교가 있다. 1960년대부터 흥농종묘의 채종장이 이곳에서 재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종사하여 농가소득을 올렸고 현재도 재배중이다. 이곳에는 주로 양파, 도마도, 오이등의 종자를 대량 재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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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운재산 동북쪽에서 흘러내린 물이 내를 이루어 형산강에 합류하는 남천이 있고 이 개천을 따라 마을이 생겨났다. 또한 이 개천에는 예부터 원시림들이 우거져 가마귀 때가 많이 서식해온 지역이다. 영일군의 읍내면 지역인 오천리 당사리 북리 북성리를 합병하여 1914년 행정구역 통페합 때 오천리로 연일면에 이속 되었다. 오천의 어원은 남천에 우거진 숲에 까마귀가 서식하여 오내벌이 오천리로 불러왔다. 당사리는 당수촌으로 불러왔는데 고려 때 당나라의 신하가 귀하하여 당수촌으로 불러왔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하고 회나무가 있어서 그 아래에 동제를 지내면서 당수림이 있다고 당수촌으로 불러왔다는 설도 있다 . 북리 마을은 연일현 소재지의 북쪽에 있어서 북리로 칭해왔다. 1970년대부터 제철공업의 공장이 들어와 공장지대로 변하면서 연관단지와 접해 크고 작은 공장들의 집산지가 되어, 두 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북성리는 연일현의 성의북쪽에 마을이생겨나 북성리라 불러왔는데 이곳에서 나루가 있었고 현재는 강변에 고층건물과 APT가 세워져 있다. 오천리는 마을의 위치 상, 공단과 접하여 크고 작은 공장이 무질서하게 많이 있고 1981년에 건설된 공단진입로 주변에는 각종 상업로로 서비스업으로 변했고 마을 앞뒤의 논과 밭은 공장으로 부지로 변하여 분진이 많아 생활에 어려움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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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수마을(堂樹村.唐士里)
원오천마을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고려때 당나라의 사신이 이곳에서 서당을 열고 글을 가르쳤다 고 하여 당사리라 불렀다고 하며, 또 마을 북쪽에 큰 회화나무 당수가 있어서 당수마을 당수촌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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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리(北里)
원오천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연일현 소재지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리라고 불리어졌으며, 옛날에는 형산강으로 나룻배가 드나들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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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군 서면지역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연일면에 이속 되었다. 적계산이 동서로 뻗은 능선을 따라 조박골, 대박골, 사심골, 납딱골, 새낙골, 큰골, 작은골의 7개 자연부락이 있는데 이 곳 7개의 마을을 인주리로 정했다. 이곳은 저계못을 경계로 대송면과 경계를 하고 있으며 마을 뒤의 옥여봉(225m)의 봉우리 5개가 마치 구슬을 꿴 형국으로 보여 인주리로 불러왔다. 조박골, 적계못 위쪽에 있는 마을로 예부터 조를 많이 심어 불러왔다고 하며 조씨가 처음 입향하여 조박골로 불러왔다는 설도 있다. 인주리에서 어뜸 가는 마을이다. 대박골, 이곳은 조박골에서 서쪽 능선에 있는 마을로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리있는 곳이라 대박골로 불러왔다. 사심골, 조박골의 서쪽 능선에 있는 마을이며 대박골의 동쪽에 있는 자연부락으로 지형이 사슴과 같다고 하여 사슴골로 불러왔다. 납닥골, 대박골 옆에 있는 부락으로 능선과 능선사이에 넓은 평지가 넓게 펼쳐 있다고 불러온 이름이다. 새낙골, 대박골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모양이 새의 부리와 같이 뽀죽하여 새납골로 불러왔다 . 큰골, 조박골의 남쪽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큰골이라 불러왔다. 작은골, 큰골 옆 작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골짜기가 적고 마을이 작아서 불러온 것이다. 인주리는 쌀 생산을 위해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못이 1936년에 확장하여 넓은 어미들의 농사를 짓도록 만들어진 못이었고 경상북도 카누 훈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 못은 장연경관이 뛰어나고 작은 웅덩이를 만들어 낚시터로 활용되고 있다. 그 옆에는 해맞이 도정공장이 최근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다. 이곳 인주리 김해 김씨 집안에서 열녀가 살았는데 남편이 간질병에 걸려 자식이 성장하여 출가를 시켜야하는 처지에 놓이자 친정 이웃에 가서 사람고기를 먹이면 간질병을 고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에 돌와와 칼을 갈아서 자기의 허벅지 살을 배어 남편에게 먹여 간질병을 고쳤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실화로 익명을 요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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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박골(照璞谷)
조박지(적계못) 뒤쪽 골짜기에 위치하며, 인주리에서 가장 으뜸되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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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박골
조박골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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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의 상징인 우뚝 솟은 옥여봉의 동북방향에 크고 작은 골짜기를 따라 마을이 존재해왔다. 영일군의 서면의 중심부락으로 존재해 오다가 택전, 대골, 댁골숲, 세비장골을 합쳐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택전리로 연일면에 이속 되었다. 택전의 어원은 옛 신라시대 때 이곳에 제상이 살고 있었는데 그 문전에 움막을 지어 마을이 생겨나면서 제상의 집 앞에 있는 마을이라 택전으로 불러왔다. 택전, 최초에 생겨난 마을로 남원 양씨들이 대잠동에서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이다. 대골, 죽고, 택곡-대나무가 많아 자생하여 대골, 죽곡으로 칭해왔다는 설이 있고 옛 신라 때 이곳에 제상의 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 택곡이라 불러왔다는 설이 있다. 대골 숲, 대골 마을 입구에 수백년 먹은 고목이 숲 을 이루고 있는데 동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고 마을을 보호하고 있다. 이곳에는 여름이면 숲의 그늘에 마을 전체가 휴식처로 지나가는 행인들의 쉬어 가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을 대골 숲으로 불러왔다. 수종은 회화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기타 여러 종이 형성하고 있는데 마을 수호신으로 1년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세면곡, 서면곡, 세비장골, 대골의 뒷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맑고 깨끗하여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모여 즐겁게 음식을 먹고 놀던 곳이며 그 뒤에는 물에 항아리에 담아 씻던 곳이라 세비장골로 불러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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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전1리(宅前1里)
댁골 앞에 인가가 많이 들어서서 마을이 형성되자 댁골 앞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택전이라고 불렀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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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골(宅谷.宅里).대꼴(竹谷)
신라 때 이곳에 벼슬아치들이 대궐같은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택곡, 택동이라 하였다고 하며, 또 대나무가 많이 있는 곳이라 하여 죽곡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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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댁골수(宅前藪)
마을 앞에는 동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가로막아 마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댁골수(宅前藪)가 있는데, 회화나무 팽나무 느티나무가 어울려 숲을 이루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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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전에서 중명으로 가는 길목 도로를 따라 좌우로 마을이 형성한 곳이며 능선을 따라 못골, 새각단, 중단 자연부락이 형성되어 왔다. 이 곳은 영일군 서면지역에 속한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3개의 자연부락을 합병하여 중단리로 영일군 연일면에 이속 되었다. 중단의 어원은 이곳의 중심마을이 중단이 있었고 들 가운데 달처럼 생긴 작은 산이 있었는데 중달 또 중단이라 불러왔다. 또 옛날 이곳에 유명한 참외밭이 있었는데 참외 맛이 일품이라 "외명청ㆍ중심단"이라고 하여 중단이라 불러왔다는 설도 있다. 새각단, 신촌, 새로 생겨난 마을로 불러온 이름이며 신촌이라고 했다. 이 곳에는 넓은 들판에 농사를 짓기 위해 생겨난 마을이다. 못골, 지곡, 들판에 농사를 짓기 위해 골짜기 를 따라 못을 막았는데 못 옆에 있는 마을이라 못골모선옆 한자로 지곡이라 불러왔다. 이 마을은 들판에 형성된 마을이라 사철바람이 많이 불어 겨울철 생활이 어려움을 겪어 오던 중 강하게 불어온 북서풍으로 인해 1963년 화재가 발생하여 인근 마을 전체가 불에 타 버렸다. 급보에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여사가 위로 차 방문하고 특별융자와 해병장병들이 지원하여 최초 이곳의 시멘트(벽돌)집을 건립하게 되었다. 한편 이곳에 있던 못은 메어 마을회관을 지어 유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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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달(中丹)
중단리의 중심 마을이다. 들 가운데에 달처럼 생긴 작은 산이 있다 하여 중달, 중단이라고 불리웠다 하기도 하며, 또 옛날 이곳에 유명한 참외밭이 있었는데 그 참외 맛이 일품이라서 외명청중심단('外明靑,中心丹') 이라고 말한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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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각단.새마(新村)
못골 남동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각단, 신촌이라고 부른다. 약 100여년 전에 생겨난 마을로 마을 앞에는 넓은 들이 있다.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한다. 포항문화방송 송신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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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골(池谷)
새각단과 비슷한 시기인 약 100여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앞의 들에 물을 대기 위하여 골짜기 밑에 200여 평 규모의 못을 막았기 때문에 이 같은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1963년 12월 10일 큰 화재가 발생하여 가옥 10여 채가 소실되어 정부와 군부대의 지원으로 마을을 새로이 정비할 때, 이 못을 메웠으며 그 자리에 마을회관이 들어서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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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산의 동쪽 능선과 골짜기에 길게 뻗은 조두봉과 조족곡 사이에 형성된 마을이며 지질시대 말인 제4기부터 인류가 출현하면서 고대인이 살아온 흔적인 고분들이 앞 뒤산에 있다. 영일군 서면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중메골, 원동, 경주군 강동면 중명을 합병하여 중명리로 연일면에 이속 되었다. 형산사 절 아래에는 우안 양수장이 설치되어 농업용수를 공급하며 400년이 가까운 회나무가 있고 마을 입구에는 노거수가 군집된 곳에 중명정을 김수근(진성산업 대표)씨가 건립하여 마을 수호신으로 삼고 있다. 그 아랫 쪽에는 옛 부조 시장 터에 새로 생긴 도로가 아름다운 풍경을 막고 있다. 이곳 중명은 부조시장이 흥행했을 때 현재 중명 1, 2리 중간에 흘러내리는 작은 보를 경계로 영일군 중명과 경주군 중명으로 행정구역을 달리했다. 경주군에 속한 중명은 행정과 통신은 경주군의 것을 이용하나 생활권이 영일군으로 불편한 것이 해소되었다. 이곳에는 옛 부조시장의 흥과 망에 대한 유허비가 방치되어 있다. 원골, 원리, 고려말기에 문정공 설곡 정은 도선생의 서원을 세웠는데 많은 유생들이 모여들어 공부를 하였다고 하며 이곳에 있던 곳이라 하여 원골 원리로 불러왔다. 서원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리고 그 자리에는 [고려 문정공 설곡 정선생 유허비]라는 흔적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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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명골(중메골)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연오랑 세오녀가 왜국으로 떠나 버리자 신라 땅에는 해와 달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왜국에 연오랑과 세오녀를 찾아갔던 사신이 대신 가져온 세오녀의 비단옷으로 제사를 올렸더니 해와 달이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이 때 광명이 비치는 한 가운데에 위치하였다 하여 중명(中明)이라고 불렀다 한다. 중메골 가운데를 흐르는 작은 보가 경주시와 포항시의 경계이며, 이 경계로 한 마을이 행정구역을 달리하게 되었다. 영일 중메골로 따로 부르기도 하며, 통신시설은 경주시의 것을 이용하나 생활권은 포항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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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부조(下扶助)
강동면 부조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아래부조라 부르게 되었다. 형산 강수로를 통하여 해산물의 집산지던 전국 3대시장의 하나였다. 현감 조동훈(趙東勳) 선정비와 현감 남순원(南順元) 선정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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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리(院里)
고려말 공민왕 때 문정공 설곡 선생이 이곳에 서원을 세워 많은 유생들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현재 마을 뒤쪽에 높이 1미터 가량의 비석에 고려문정공설곡정선생유허비(高麗文貞公雪谷鄭先生遺虛碑)라는 비석은 있으나 서원의 위치나 흔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서원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원골, 원동이라 불려졌다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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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여봉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본 읍에서 남쪽에 있는 지역이다. 동으로 대송면과 접해있고 도로가 이곳 대송면 남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을의 남쪽과 서쪽은 경주시와 접해 있어 마을을 둘러싼 크고 작은 능선들이 피난지의 제1로 꼽고 있는 곳이다. 본래 영일군 서면직역에 속한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홍사, 사각곡, 홍사를 합병하여 우복리로 연일면에 이속 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 중엽에 우복 또는 우노동으로 칭해왔다. 우복(우복1리), 우노, 마을의 지형이 소가 업드려 있는 형국이라 우복으로 불러왔다. 조선조단종사화 때 장낙원 주부를 지낸 노은 김예중이란 선비가 이곳에 피신하여 살면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우복 우노곡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원김씨의 입향조인 예중의 조부인 김상여는 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병마절제사를 지내고 있을 때 단종을 옹호하다가 세조에 화를 당하자 그의 손자인 예중은 모든 것을 버리고 충청도 예산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피난을 하게 된 것이며 농사를 지으며 외부의 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기고, 쌀개실, 우복2리에 속하는 곳으로 1600년대 연일 중단에서 김해김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어느날 도적들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집도 불에 타버리자 이곳에 숨어 들어와 살게 된 곳으로 마을의 모양이 디딤돌 방아의 쌀개와 비슷하여 불러온 이름이다. 홍사, 어원은 작은 골짜기를 따라 몇 가구가 살았는데 마을 뒤의 붉은황토가 있는 골짜기로 붙여진 이름이다. 포항지역에 유일하게 순천 김씨가 이곳에 취락을 하고 있으며 1970년대 전까지 흥행한 마을이 도시화의 변화를 추구하며 이곳을 떠났고 교통이 불편한 곳이다. 쌀개실 서쪽 길가에 큰바위 두 개의 지 석묘가 있는데 옛 전설에는 신라 때 한 장수가 이 바위를 들고 경주에 성을 쌓으려고 가다가 성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곳에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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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복(牛伏.愚伏).우노(愚老,牛老)
우복이나 우노란 지명은 마을의 지형이 소가 엎드려 있는 형상을 닮았는 데서 연유되었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조선조 계유정난 때 장낙원(掌樂院)주부를 지낸 노은 김예중(金禮仲)이라는 선비가 이 골에 숨어 들어와 살면서 스스로 낮추어 말하여 우복, 우노골이라 이름하였는데, 훗날에 오기하여 우복(牛伏)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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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강의 주변 경주시 강동면과 접한 곳으로 형산과 제산의 양 산맥을 지나기 전에 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 형강리이고 개양골 앞 양자쪽이 강양리이다. 자명리 입구 제산의 동쪽에 노적봉이 서로 뻗어 용 두산을 만들고 동쪽으로 구릉지를 여러개 이루며 효자리에 닿는 계곡으로부터 오촛골, 채앙골, 원동 골의 자연부락이 있다. 용두산 아래 용잠동, 원동, 개남번데기 류동을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유강리로 달전면에 이속되었다. 본래는 흥해군 남면 지역으로 여기 저기 흩어진 마을들을 합병하면서 주장이 강하여 골치 아픈지역이라고 한다. 형산, 강양, 원리, 용잠리, 유리를 합병하여 큰 마을의 이름을 부쳐 버드나무골의 유지와 강양리의 강자를 넣어 유강으로 정했다. 유강, 형산강변에 놓인 마을로 비가 오면 마을이 물에 의해 침식이 되자 버드나무를 심어 버드나무골 유리로 불러왔다. 이곳에는 옛부터 시장이 흥행할 때 주점이 있던 곳이라 쉬어가는 나루도 있어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강양리, 강과 하천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의 침식을 방지하기 위해 땅버들을 심어 버드나무가 무성한 곳이라 하여 강양으로 불러왔다. 형강리, 형산강을 따라 생겨난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예부터 강주변 고기잡이와 나루가 성행한 곳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원리, 원골, 노주골로 칭해온 곳으로 큰마을 중의 하나로 옛날 서원이있던 곳이라 원골로 불러왔다. 이곳에 왜구가 자주 침입하여 마을 사람들이 마을 뒷산 모양을 보고 노적가리처럼 보이기 위해 위장하여 산에 가마니와 어엉을 둘러 군량미를 쌓아둔 것으로 보이게 했는데 왜구가 놀라 물러나자 이곳을 노주골이라 불러왔다. 용잠, 용잠이골, 용두산 아래 있는 마을로 용이 잠자는 형국이라 붙여진 것이다. 일명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국으로 명당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설곡 정은도 선생의 출생지로 정선생이 과거에 급제하자 유명해져 정선생에 비하여 붙여진 것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이곳 유강은 강변에 보잘것 없는 취락지로 농토가 적고 남향한 양지바른 곳으로 놓여 강 건너 넓은 들에 농사를 지었고 농경사회를 겪어 오면서 나루에서 접객소 죽세공으로 변해왔다. 근대화의 발전으로 고층아파트 취락지로 변하여 유강초등학교가 건립되었고 새로운 신도시화로 변해 교통의 요충지로 살기 좋은 곳으로 옛날을 잊혀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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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강리(兄江里)
형산강을 따라 생겨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산멱, 제산 아래를 지나는 동해남부선의 유강굴이 있다. 1979년에 창건된 성봉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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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양(江楊)
행정구역이 흥해군에 속해 있을때는 강양동(江楊洞)이라 불렀는데 연일읍으로 편입되면서 개양리로 많이 불려지게 되었다. 마을 앞 강가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어서 그렇게 붙여진 것이라 한다. 포항시수도사업소 정수장이 마을 동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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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골(院洞).노주골
유강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마을 뒷산 모양이 노적가리처럼 생겨서 이엉을 둘러 군량미를 노적같이 보이도록 하였더니 왜적이 놀라 물러갔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을 노주골이라고도 부르고, 옛날 서원이 있었다 하여 원골, 원동이라고도 불렀다. |
☞ 용잠(龍岑).용잠이골
용두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국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용잠이골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또 고려때 설곡(雪谷)정사도(鄭思道)의 탄생지로 선생이 과거 급제하여 유명해지자 선생을 용에다 비유, 그분이 살던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포항시 제2상수도수원지가 있다. |
☞ 버드마(柳洞.柳恃)
경주로 가는 도로변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 효곡동과 맞닿아 있으며, 옛날 버드나무가 많아서 유동,버드마라고 불려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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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리 위쪽 형산강으로 유입되어 자명천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우측으로 농지가 펼쳐지고 서로는 제산의 능선이 펼쳐진다. 동으로는 유강리와 효곡동이 접한다. 이들 능선이 들판을 경계로 마주보고 있는 골짜기를 따라 자방리, 등명리가 있다. 이곳은 본래 흥해군 남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자방리, 등명리를 합병하여 자명리로 영일군 달전면에 이속 되었다가 1957년 달전면이 폐지되면서 연일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명곡, 자방골로 칭한 이곳은 옛날 중국사람이 이곳을 지나면서 지형과 산세를 보고 후세에 스스로 아름다움이 있겠다고 하여 한자로 붙여진 이름이다. 또 전해지는 말로는 중국인 장자방이란 사람이 다녀간 곳이라 자방으로 불러왔다는 설이 있다. 등명 자명 2리에 속하는 지역으로 마을 주위의 산세가 등잔을 걸어 놓은 형상이라 하여 등명으로 불러왔다. 조선초기 회득 황씨 선조가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조선후기에 해주최씨가 정착한 마을이다. 조선시대까지 연일에서 경주로 이어지는 도로가 이곳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마을 중턱에 약수탕이 있었는데 속칭 황물탕으로 불러왔던 곳으로 피부병에 효염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1957년 설립된 자명초등학교와 1981년 설립된 자명교회가 있고 새로 생겨난 포항-기계간 도로가 생겨나면서 교통이 더욱 편리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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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명(燈明)
약 500년전, 회덕황씨(懷德黃氏) 선조가 낙향하여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주위의 산세가 등잔을 걸어 놓은 형상이라하여 마을 이름을 등명이라 전해오고 있다. 서쪽에는 경주시 유금리를 넘어가는 등명현이 있고 또 1981년에 설립한 자명교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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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방곡(自芳谷)
옛날 중국의 방지라는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지형과 산세를 보고 후세에 스스로 아름다움이 있겠다고한 예언에 따라 자방이라 칭하게 되었다고도 하며, 또 중국 사람 장자방이 다녀갔다 하여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자방골 숲의 흔적으로 느티나무와 이팝나무 몇 그루가 남아있다. 자명초등학교(1975년 개교)와 해주 최씨의 원모정(遠募亭)과 서당이었던 모당(慕堂)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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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산 한줄기가 남주하는 지역에 능선을 따라 마을이 생겨났고 흥해군으로 연결된 지방 1급 도로따라 자연부락이 생겨났는데 자망태산 아래쪽으로 송학 마을이 있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당수마을 중간마을이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칠전이란 마을이 있다. 본래 흥해군 남면지역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송학리, 칠전리, 당수마을 중간마을을 합병하여 학전리로 영일군 달전면에 이속 시켰다. 1957년 달전면이 폐지가 되면서 연일면에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학리,윤점리, 놋점리 라고도 불러온 곳으로 이곳에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겨져 있었는데 학이 날아와 살았다고 한다. 학을 길조로 보고 우리들의 정서에 학이 소나무에 서식한다고 송학으로 불러왔다. 이 곳에 무성한 소나무는 6.25 전쟁과 산불로 인해 황폐화되었고 남아 있는 곳이 제당에 원시림 몇그루만 있다. 당수마을, 당수촌, 송학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능선을 따라 언덕을 끼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마을 입구에 큰 소나무 당산목으로 불러오면서 당수마을당수촌로 칭했다. 중간마을, 당수마을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1900년초에 작은 못이 있던 자리였는데 제방이 무너져 사용이 불가능해지자 그 자리에 미가가 들어와 마을이 생겨나서 송학과 당수마을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불러온 마을이다. 칠전, 돌개지니, 학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데 예부터 이곳에 옷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고 또 능선을 따라 생겨난 밭에 7가지의 잡곡을 풍성하게 수확하여 붙여졌다고 전해지는 설도 있다. 고름세기, 맛골, 붉은댕이, 울골, 작은 울골, 큰 울골, 텃골, 등의 골짜기에 많은 밭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어 왔다고 칠전으로 불러왔다는 설도있다. 예부터 이곳은 작은 능선을 따라 삼림이 울창하여 땔감을 구하기 편리하였고 우거진 송림에 학이 서식하여 맑고 깨끗한 곳으로 알려져 왔으며 빈농으로 산지 개발을 위해 인가가 모여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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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학(松 ). 놋점리(店里)
옛날 이곳에는 송림이 울창하여 많은 학이 날아와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13세기경 김수택이란 사람이 이곳 지명을 송학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많았던 소나무는 거의 없어지고 제당 근방에 불과 몇 그루만 남아 있으며, 학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뒷산 자망태산이 마치 학이 춤추는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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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수마을(堂樹村)
송학에서 1km쯤 남쪽으로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언덕위에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앞에 큰 소나무 당산목이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하며, 지금도 그 당수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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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마을
당수마을 남동쪽 언덕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약 10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못이었는데 홍수로 제방이 터져 못이 없어진 후, 그 자리에 한 두집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중간마을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송학과 칠전의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
☞ 칠전(七田.漆田).돌개지니
학전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옛날 이 일대에는 옻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는데, 마치 밭에 씨를 뿌려 가꾼듯이 무성하다 하여 칠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고름새기, 밋골, 뽈은뎅이, 울골, 작은 울골, 큰 울골, 텃골의 일곱 골짜기에 많은 밭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하여 칠전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지금도 주로 논농사를 짓고 있다. 마을서편에 인조봉(人造峰)인 '식은밥덩이산'이 있고, 골짜기에는 김해김씨 문중에서 세운 돌비정(乭裨亭)과 군수이공선정비(郡守李公善政碑)가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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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흥해군의 남면지역에 속한 지역으로 달전지를 중심으로 광방평, 달밭들, 쑥곡들,절골의 자연부락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달전리로 영일군 달전면에 이속 되었다. 1957년 달전면이 폐지되면서 연일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부터 이곳은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을 이용하여 크고 작은 들에 농사를 지어 곡창지로 벼농사를 잘 지어 왔다고 한다. 달전의 어원은 능선을 따라 개간한 밭에 농사가 잘되어 달밭들이란 어원에서 붙여진 것으로 전곡에 무엇이든 심어두면 잘되었다고 한다. 광방평, 광발리로 불러온 곳으로 달전지에서 동남쪽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 옛날 기계유씨와 평해 황씨가 입향하여 마을을 개척해 왔는데 조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마을이 불에 타 버리자 살아가기 어려워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성황당을 짓고 기도를 드리니 그때 신령이 나타나 산넘어 옹달샘을 잘 청소하고 식수로 삼으라고 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신령이 시키는 데로 행하였더니 마을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에 구사일생으로 살았다고 하여 [구태]로 불러왔다. 평해 황씨들이 후손 보존에 큰 덕을 입었다고 하여 광방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기계 유씨들이 이곳을 떠나면서 비를 세워 조상의 지혜로움을 기린다고 한다. 쑥곡들, 예부터 쑥이 많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른 봄부터 양식이 없어 쑥을 넣어 죽을 쒸어 먹기 위하여 아낙네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쑥을 케면서 쑥덕거린다고 불러왔다는 설도 있다. 절골, 마을 뒷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절이 있었다고 절골로 붙여져 왔다. 절골에는 불과 3-4호가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현재 한가구도 살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 달전리는 1958년 저수지를 준공하였고 옛 신라 때부터 물이 좋아 인가가 생겨났다고 한다. 위치 상으로 영일현과 흥해군의 경계지점에 있어서 부패된 말단행정기관이 농민들에 착취가 심해져서 흥해군에서 세금을 내어라고 하면 영일현에 산다고 하고 영일현에 세금을 내어라고 하면 흥해군에 산다고 하여 세금 부담이 없어서 이곳에 이주 해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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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꾸림 . 국굴안
옛날에는 숲이 울창하여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을 정도의 깊은 골짜기였으며, 마을 뒤편 벼랑에 호랑이 굴이라고 일컫는 굴이 있다하여 [국굴안]이라고 불렀다. 일제시대와 광복을 전후해서 무분별한 벌목으로 지금은 큰 나무는 거의 없고 골짜기 좌우를 개간하여 주민소득이 높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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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광방리(光方里)
달전지 남동쪽 산기슭에 있는 마을 옛날 기계유씨와 평해황씨가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는데, 임진 왜란으로 온 마을이 불에 타서 살기가 어려워지자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성황당을 짓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때, 신령이 나타나 산너머 조그마한 옹달샘을 잘 청소하고 식수로 사용하면 모든 어려움이 사라지고 무사할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행하였더니 과연 마을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하여 [구태]라고 부르다가 평해 황씨들이 자손보존의 큰 덕을 입었다고 하여 광방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기계 유씨들은 그후 이곳에서 떠났는데 그들도 비를 세워 조상의 지혜로움을 기리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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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국가 시절에는 근기국으로 영일만 주변에 형성되었고, 신라초기 근오지현 또는 오천현, 오량지현으로 칭해왔다. 경덕왕16년에 임정현으로 개칭하여 의창군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때 해가 뜨는 곳이라 하여 영일현으로 개칭하고 현종 9년에 동경유수관의 속읍이 되었다가 공양왕 2년에 감무를 두어 관군만호와 겸했다. 조선 태종 3년에 연일현으로 개칭하고 진을 두어 병마사와 지현사를 겸하게 하였고, 세종 때는 병마겸 절제사로 개칭하고 후에 현감을 두었다. 고종 건양원년에 건국의 현을 군으로 승격된 뒤에 현청이 대잠리에서 생지리로 옮겼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읍내면과 서면 북면의 일부마을을 관할하는 연일면으로 격하되었다. 4개군(장기, 연일, 흥해, 청하)의 통합으로 영일군 소재지를 생지리에 두고 경무서(경찰서)와 독립되었다. 따라서 연일면 소재지를 택전리에 두었고 1917년 영일군청이 포항으로 이전하여 면 소재지를 생지리로 옮겨왔다. 1957년 10월 달전면이 폐지되면서 학전, 달전, 자명, 유강 4개리를 연일면에 이속되고 1980년 12월 1일자로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에 의해 효자, 지곡, 대잠, 생지, 이동, 형산강, 북쪽지역 일부의 마을이 포항시로 편입되었다. 현재 본읍은 36.01㎦로 13개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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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은 포항과 경주를 경계로 하고 있는데 포항에서 우측은 제산 좌측은 형산이다. 이곳은 옛부터 붙어 있었는데 경주의 남천과 북천이 합류하여 기계천으로 흘러내려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강동과 안강이 물에 잠겨 범람하면 신광, 흥해 방면으로 물이 흘러내렸다. 우기가 되면 안강까지 물에 잠겨 신라 수도 경주가 홍수의 피해를 입게되자 동쪽 영일만으로 물이 빠지면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어 신라는 숙원사업의 하나로 대대로 물려받았다. 신라말 경순왕 김부가 왕이 되기 전 철원에 도적 떼가 마진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되고 남쪽에는 부여에 도둑떼가 일어난 후 백제왕이라 자칭하게 되자 신라는 치안이 문란하게 되었다. 경순왕 김부가 왕위에 오르자 나라 안밖에 물정이 소란하고 사방에 도적떼가 일어나 국가 장래가 염려되어 신라의 장래를 위해 점을 쳐보게 하니 수일 후에 사관이 말하기를 앞으로 새로운 제왕은 북쪽 궁예도 아니고 남쪽의 견훤도 아니며 동쪽의 영일현(당시 임정현)으로부터 역적이 일어나 신라 수도인 경주를 침범할 것이라 했다. 경순왕은 환란의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방법을 찾게 되었는데 사관은 형산포의 산을 끊어 안강 호수를 영일만으로 역류시키면 영일땅이 지정왕기가 제압되어 신라 수도를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그 후 많은 사관들이 형산포의 단맥에 대한 논의가 되어도 방법이 없어 경순왕의 태자 김충과 약은 신라의 장래를 위해 금후 백일간 기도하고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와 천지심명과 신라왕실을 조종 종묘사직의 안녕과 연장을 기원하기로 하고 태자 김충을 용으로 화신하여 득천하면서 꼬리로 산맥을 쳐 단절하도록 기도를 하게 되었다. 태자는 기도 끝에 용이 아닌 대사로 화하여 사람으로부터 용이란 존칭을 받아야만 용으로 변신된다고 했다. 그리하려 길가에 누워 지나가는 사람으로부터 용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도 용이라고 하지 않고 "아이고! 저 큰 뱀 보아라"고 했다. 약속된 기일이 다 되어 가는 날 노파가 손자를 업고 길가를 지나치다가 깜짝 놀라면서 "아이고 뱀 보아라" 하자 등에 업힌 손자가 할머니를 보고 "할머니! 왜 경솔하게 말을 합니까? 저것은 뱀이 아니고 용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뒤 덮여 일진광풍이 일어나니 태자가 뱀에서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면서 형산산맥을 꼬리로 쳐서 산맥을 끊어버려 호수의 물을 영일만으로 흘러 내리도록 했다고 한다. 그 뒤 신라의 왕은 경주를 수해로부터 구하고 나라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고, 이 아이의 이름을 따 유금이라하고 그 주변의 이름을 유금들 이라하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형산 아래 형산사에서는 김충의 태자의 목상을 만들어 배향하며 유덕으로 추보해왔다고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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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에 영일현 형산강 도선장에서 가난한 사공의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옛부터 이곳에 우기가 되면 큰물로 강변에 사는 사람들이 물이 범람하여 피해를 많이 보아왔다고 한다. 때 마침 형산강이 범람하여 불편한 몸으로 표류하는 사람이나 짐승을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뱃사공은 강에 나아가서 열중하고 있을 때 15세 가량의 사내아이가 기진맥진하여 표류하는 것을 인양하고 있으니 노루가 배를 향해 오는 것을 보았다. 노 뱃사공은 하잖은 짐승이지만 생명이 있다고 건져주었다. 그 때 누런 뱀도 배에 올라탔다. 늙은 뱃사공은 황급히 노를 져어 도선장에 정박하고 사람을 등에 업고 집으로 가는데 노루는 뒤돌아 보고 또 뒤돌아 보고 고맙다는 뜻을 표시했고 뱀은 혀를 내어 날름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노 뱃사공은 자식이 없어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며 오고 갈 때 없는 사람이란 말에 양자를 삼고 더욱 열심히 일하며 배고프지 않도록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노루가 찾아와 옷자락을 물고 따라오라는 흉내를 내어 뒤따라가 보니 어느 산중턱에 앞 두 다리로 땅을 파라는 흉내를 내어 땅을 파니 금은 보화가 나왔다. 노 사공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집에 와서 논밭을 마련하고 자식에 물려주려고 반 정도는 장독 뒤에 묻어 두었다. 그 뒤 노부부가 재산을 더 늘여 자식에 물려주자고 하여 두 부부는 얼마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장독 뒤를 가서 확인하는 것을 아들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금은 보화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구명양생의 은혜도, 부자간의 인륜도 저버리고 영일현 관아를 찾아가 우리 아버지가 남을 죽이고 재물을 훔쳐 부자가 되었다고 하자 현감은 사령을 시켜 살인 강도죄로 옥에 가두게 되었다. 그 뒤로 아들은 글공부도 하지 않고 매일 주막에 가서 술을 마시며 흥청거리며 방탕생활로 살아갔다. 밥 주고 잠 잘곳 있고 옷 있고 같이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편했다. 뱃사공은 팔자라니 하며 옥에서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던 차에 누른 구렁이가 옥에 와서 노인의 다리를 물었다. 놀난 노인은 상처를 움켜쥐고 아픔을 신음하는데 또 구렁이가 약초를 물고 와서 상처에 붙이니 깨끗하게 아물었다. 그 때 구렁이는 현감의 아내를 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영일현감은 방을 붙이고 의원을 찾아 뱀이 물고 간 상처를 치료하고자 노력을 하였으나 허사였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의원들은 모두 고개를 저으며 떠났고 옥직이가 큰일이라 왁자지글 떠들고 있을 때 노 사공이 내가 고쳐보겠다고 하자 옥직이가 "야 죄인인 네가 무슨 재주로 고치느냐" 꾸짓자 만약 현감 부인이 죽게되면 너의 책임이라고하자 할 수없이 옥직이가 현감에 아뢰었다. 현감은 "너 이놈 죄인이 무슨 수가 있어서 사람을 고치는가 만약 고치지 못하면 바로 너를 사형으로 집행하겠다"고 하며 환자를 보였다. 환자는 온몸에 독이 채여 죽는 시간만 기다리는 처지에 있자 뱀이 물고온 약초를 상처에 붙이자 환자는 점점 회복되었다. 현감이 하도 신통하여 그 연유를 묻게되자 사실을 아뢰니 현감이 노사공을 석방하고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 하여 아들을 무고죄로 옥에 가두어 버렸다. 며칠이 지나서 노사공은 영일현감을 찾아가서 아뢰기를 "인덕이 없고 나에게는 그것도 자식이니 대신 옥살이를 하겠다"고 하여 현감이 감동하여 아들을 혼내고 석방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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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조선말 세상이 어지러운 융희 2년에 형산강 하구인 중명마을 앞에서 괴이한 물고기시체가 표류하였는데 길이 20자, 발이 6개, 머리 둘, 눈이 넷, 입이 둘인 괴이한 물고기의 괴물이었다. 한일 보호조약으로 각처에서 의병들이 봉기하고 호상학교의 서도 홍의사가 행방불명이 되어 이상한 소문이 있던 처지에 민심이 흉흉하여 세상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때를 같이하여 괴어가 출현하니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별 이야기가 떠돌고 일본인은 물고기는 바다에 사는 것으로 하천에 올라오니 나라가 안되니 민심이 악화되어 전쟁이 일어나니 별소리가 나왔다. 노인들은 갑오년에 괴이한 고기가 표류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났는데 전쟁에 휘몰리게 될 징조가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이 물고기가 인무치라 하며 속된말로 이무치라고 하는데 이가의 정치가 없어진다는 징조라 하였다. 어떤 사름은 동의보감을 들어 동해바다에 비늘 없는 물고기가 장생불사약이라 하여 이 물고기가 효험이 좋은 약이라 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형산은 옛부터 사산이라 하여 그 아래 사어가 많이 살았는데 말세를 뜻하니 지금이 말세라는 징조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였다. 대부분 연일지역 사람들은 부조시장 아래 괴이한 물고기가 나타나서 부조시장이 폐시 되었는데 연일에 사는 것이 불안하다고 했다. 이 괴어가 나타난지 3일이 지나자 소문은 꼬리를 물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경주에 사는 손모씨가 이 물고기를 발견한 사람에게 20량을 주고 싸가서 나환자를 고아 먹여 아들의 병을 고치었다고 한다. 사람은 남의 말을 자기 생각대로 함부로 하는데서 나왔다고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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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현의 북면 용당리에서 전해지는 전설로 일찍 남편을 잃고 외아들을 키우는 과부가 용당리에 살고 있었는데 낮에 아버지 대신 논밭에서 일하고 아들이 저녁을 먹고 잠든 사이에 어디론가 가서 잠을 자고 이른 새벽에 매일 돌아왔다. 아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하루저녁은 어머니가 가는 길을 뒤따라 나갔는데 어머니는 차가운 겨울날씨에 버선을 벗고 칠성강 다리를 건너 상도동에 홀아비 집을 찾아가서 홀아비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보고 내탓이요 나 때문에 어머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재혼 못한다는 죄의식을 갖고 그 이튿날 무거운 돌을 운반하여 개천에 다리를 놓았다. 그 뒤 어머니는 아이고 고마워라 이제는 편안하고 버선발로 다니게 되니 이 고마움이 어디 있는냐 하며 다리를 건너다니게 되었는데 너무 기뻤다 . 아들은 어머니가 반가워하며 다리를 건너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 뒤에 마을 사람들은 이 다리를 어머니에게는 효자요 아버지에게는 불효자라고 하여 효불효 다리라 불러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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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현 효자리의 전설로 나이 어린 전희가 9살 때 아버지를 잃어 장례를 하고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상을 지냈는데 어린아이가 겁도 없이 첩첩 산중에 움막을 지어 효성을 다하자 밤마다 호랑이가 내려와 지켜주고 새벽이 되면 떠나갔다고 한다. 아버지의 3년 상을 지내고 얼마 후 어머니 마쳐 세상을 떠났다. 전희는 슬피 울며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아버지의 묘 옆에 어머니를 모시고 또 다시 움막을 지어 3년 상을 지냈는데 밤마다 호랑이가 탄복하여 이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무사히 6년동안 산중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상을 지내고 마을 돌아오자 사람들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무사한 것을 보고 효자 전희라 불러왔다. 행동과 마음이 착실하여 마을 사람들이 연일 현감에 이 사실을 알려 현감이 친히 불러 표창하고 효자 전희가 사는 고을이라 하여 효자리로 불러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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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본의 힘센 역사가 일본전체를 다니며 힘 자랑을 해왔다. 일본 전체를 돌아다녀도 자기와 대적해서 이긴 사람이 없어 일본은 좁은 곳이고 조선을 거쳐 중국에 가서 힘 자랑을 하려고 조선에 건너왔다. 일본 역사는 조선에 와서 도처에 다니며 힘 자랑을 했는데 이제 내가 왕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서울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연일현 운제산에 올라와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저 지평선 넘어 '나의 고국이 있다'고 회상하는데 바로 그 때 등뒤에 인기척이 있어 돌아보니 팔척장신의 거구인 역사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는 하늘에 닿고 몸은 태산과 같고 눈은 형형하여 혜성같이 빛나고 팔과 다리는 구리철로 감아 둔 것 같이 보였다. "야 이놈 너가 최근 일본에서 건너온 역사냐?" 그러자 일본역사는 놀라며 "그렇다 일본에서 왔다." "참 잘 만났다. 이놈! 나는 조선의 역사다. 너가 일본에서 온 뒤에 너 놈을 찾기 위해 수 십일을 찾아 헤매다가 오늘 여기에서 만난 것도 천우신조로다. 야~ 이놈!" 창해 역사와 일본역사는 서로 어울려 던지며 치고 박으며 싸움을 했다. 두 역사가 한데 어울려 싸우니 운제산 뿌리가 흔들거리며 먼지가 자욱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치열하게 싸우며 역사가 힘에 부디껴 넘어지면서 손을 짚은 곳이 영일만이었다. 영일만이 일본역사가 짚은 손에 푹 꺼져 바닷물이 밀어닥쳐 바다와 연결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일본 역사는 조선역사에 무릎을 꿇고 군신의 예를 취하여 창해 역사는 왕이 되어 산이 둘러 쌓인 우뚝 솟은 바위를 그 증거로 대왕암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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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주리에는 조박골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까지 마을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가 조박골 조부자 집에 들어와 하루를 유해 가는 이가 많아지게 되었다. 하루는 대사가 요랑을 울리며 시주를 요구하자 조박골 조부자는 "스님! 시주는 얼마든지 드리겠으니 저희 집에는 지나가는 나그네가 많이 찾아와 귀찮으니 손님 못 오도록 해 주십시오" 간청을 했다. 스님은 염불을 중단하고 집을 한바퀴 돌며 "저 뜰에 있는 돌을 치워버리면 찾아오는 손님이 없게 될 것입니다"하며 떠나려고 하자 주인은 바가지에 쌀을 시주하였다. 조부자는 하인들을 불러모아 온 힘을 다해 뜰에 있는 바위를 밀어내었다. 바위 아래는 비둘기가 택전으로 날아가 택전에 큰 부자가 생기고 조부자는 하루아침에 가족들이 아파 누워 거지가 되어 버렸다. 뜰에 있던 바위는 인주 못에 굴러내려 날이 가물 때는 보였다고 하며 1920년대 일본인들이 어미들 쌀생산을 위해 못을 확장하면서 치워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밥 얻어먹을 만한 곳에 손님이 찾아오며 재물이 없고 가난한 집에는 자연적으로 손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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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현 동면 지역인 송정리에서 동촌에 이르기까지 어룡불이라고 불러온 곳이 있다. 이곳을 옛사람들은 장기곶이 영일만을 동북으로 감싸고 동해로 길게 돌출한 것을 보고 마치 용이 승천하는 형국이라 하였고 서북쪽으로 길게 뻗은 흥해읍 용덕리가 돌출한 부분을 어약승천형국으로 보아왔다. 두 곳의 형상을 풍수지리학적으로 어룡상투의 형국으로 영일만의 내륙중심인 이곳을 어륭사로 칭해왔다. 또 넓은 의미에서 어룡사는 북부해수욕장인 두호동에서 동해면 약전리의 백사장 끝까지를 어룡사로 불러오기도 했다. 이 백사장의 중심지역이 동촌리 지역은 백사장을 지나 바다에 닿는 곳에 100년이 가까운소나무 숲이 있었다. 때마침 유명한 풍수지리학자인 성지가 이곳을 지나게 되면서 사방을 살펴보게 되었다. 성지는 사방을 또 다시 살펴보고 풀 한 포기 나지 않고 더문 더문 농막을 지어 생활해온 이 지역에 영일의 명산으로 창해온 운제산에서 수십리 떨어진 이 곳에 좀 늦었지만 수십만이 살아갈 곳이라 예언하게 되었다. 100여년이 지나자 백사장을 개발하고 인가가 늘어나게 되었고 19세 초기에 와서는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백사장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또 1914년 연일 수리조합이 생겨나면서 형산강과 냉천의 물을 이용하여 농지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농업인구가 급중했다. 오늘날에 와서 성지가 남긴 말을 해석해 보면 어룡사에 대나무가 솟아나면 가히 수만인이 살 곳이라는 말을 남기었고 서쪽 그릇이 동쪽 하늘에 오면 모래밭이 없어질 것이니라 해석된다. 세월이 흘러 일제 강점기를 맞아 강물을 끌어들여 넓은 들판에 농지가 개발되었고 해방이 되면서 교통의 요람지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던 사람이 더욱 늘어났다. 6.25 때는 백사장과 송림에 피난처가 마련되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게 되었다. 성지가 예언한지 수백년이 지나면서 종합제철공장이 세워지고 대나무 대신 굴뚝이 높이 세워지면서 모래밭이 간 곳이 없는 장소로 변했다. 이곳에 종사하는 공원과 사원들이 수십만이 모여 미래를 열어가는 첨단공업단지로 변해 성지의 예언이 오랜 세월이 지나서 실천되었다고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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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엽 영일현감 어득호라는 유능한 현감이 있었는데 그는 성품이 호탕하고 인자하여 덕행이 많아 항상 가난하고 약한 사람 편에서 고을을 다스려 왔다고 한다. 또한 그는 보기 드문 민을 착취를 하지 않은 관리로 유명하여 항상 공평한 재판으로 백성들이 명판관으로 신임이 두터웠다. 하루는 옹기장수 한사람이 옹기를 팔기 위해 옹기사라고 외치며 돌아다니다가 들판을 지나면서 짐을 바쳐두고 소변을 보게 되었다. 때 마침 하늘바람이 불어와 옹기짐이 넘어지면서 산산조각난 옹기를 보고 하늘바람의 원망과 노모와 처자식에 대한 걱정으로 꼼짝없이 굶어 죽게되어 화가 치밀어 대성통곡을 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정선달이라는 사람이 지나다가 산산조각난 옹기 앞에서 울고 있는 옹기장수에게 사유를 묻고 난 뒤에 "어허! 딱하구다. 나를 따라오라"해서 옹기장수를 엉금 따라가게 되었다. 정선달은 옹기장수를 집으로 데려가서 하늘바람에 고소장을 써주고 어득호 현감에게 직소하라고 했다. 옹기장수는 소장을 고맙게 쥐고 연일현청 동헌 마당에 들어가 사또 뵙기를 청하고 소장을 바치며 울면서 자초지종으로 설명을 한 뒤에 노모와 처자식에 먹여 살리기 위해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게 되었다. 어득호 영일현감은 소장을 보고 어이가 없어 옹기장수와 소장을 번갈아 보며 히죽 웃고 나서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부모에 대한 효성이 놀랍구나 옹기를 깨서 너의 장사를 망친 하늘바람이 고약한 놈이다. 내가 그 놈을 잡아 옹기 값을 변상토록 할 터이니 기다리고 있거라"고 했다. 겁이 난 옹기장수가 마음을 조아리고 있던 차에 부드러운 현감의 말은 너무 고마웠다. 현감 어득호는 아전들과 군노사령을 불렀다. 사령들을 불러모아 두고 현감은 "하늘바람을 즉시 포박하여 대령하라"고 했다. 명을 받은 사령들은 어리둥절하여 도무지 뭔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현감은 "이놈들아!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관아에서 일한지 20년이 넘은 몸이 그다지도 무식한가? 하늘 바람을 잡아오란 말이다." 하고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말할수록 더욱 당황한 것은 사령들이었다. 현감의 얼굴만 바라본 사령들을 어리둥절하게 있던 차에 현감은 사령들에 말하기를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부조시장에 가서 정박하고 있는 강원도,함경도의 배들과 부산, 동래, 목포, 군산 방면의 선주와 사공을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했다. 사령들이 황급히 부조시장에 가서 잡아온 선주와 사공을 포박하여 동헌 마당에 시립시켜 두고 아뢰었다. 현감 어득호는 "형산포에 머물고 있던 선주와 사공은 잘 들어라 이 고을에 너희들이 머문지가 벌써 수십일이 경과되어 배에 싣고 온 상품은 모두 매매거래가 이루어졌는데 어찌 돌아가지 아니하고 아직 머물고 있느냐, 그 이유를 이실직고하라."고 했다. 선주와 사공들은 한결같이 "배는 모두 하늘바람이 불어야 움직일 수 있는데 하늘바람이 불지 않아 아직 출발을 못했다"고 아뢰었다. 따라서 어득호 현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네놈들이 고향에 빨리 돌아가기 위해 천지신명에게 하늘바람을 불어달라고 매일 기도하고 제사를 지냈단 말인가 오늘 하늘바람이 갑자기 불어 이 성중에 옹기장수 한사람이 옹기짐을 넘어뜨려 옹기가 모두 박살이 나서 오십량의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하늘바람을 불러온 너희들의 죄인 즉, 배 한척 당 돈 두냥씩을 모아 옹기장수에게 배상하라"고 했다. 이 판결로 선주들은 어이없는 표정을 하며 현감의 판결에 불복할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있었고 현감 덕분에 옹기 장수는 춤을 추며 "우리 사또 명사또, 명판관!"이라 했다. 이 말은 오랫동안 전해지고 있는데 자기에게 유리하면 [명사또요. 불리하면 남을 원망하고 욕질]하는 습성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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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청 자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