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요한복음 3 : 16 - 17
제목 : 세상과 관계하시는 하나님
일시 : 2013. 11. 24
장소 : 라이프찌히 교회
I. 오늘 말씀에는 “하나님”과 “세상”이 나온다. 이 둘의 관계는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시고 흡족해 하셨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로 있지를 못하고 무질서하게 되고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죄 때문이었다. 이제 “세상”은 더 이상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망쳐놓은 썩고 더럽고 죄 많은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참 무던하시다. 이미 카풋되어 고장난 세상을 고쳐서 쓰시겠다는 것이다. 이미 병들고 소망없는 세상을 가엾게 보시고 다시 치유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스토리가 성경전체의 주제이다. 하나님은 끊어진 세상과의 관계를 다시 열고 싶어하신다. 그 근본적인 동기는 사랑 때문이다.
II.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다.
이제 하나님께서 사랑받을 자격이 없고 사랑할만한 가치가 없는 수준 이하의 세상을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기에 하나님께서 아주 손해나는 계약을 하셨다.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로 한 것이다. 휴가 보내는 것이 아니다. 뒷짐짓고 그냥 한번 둘러 보라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와서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회복을 위한 화목의 희생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하는데 손해볼 것 없기에 정말 당케쇈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 특권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우리 입장에서는 값이 없지 값은 이미 치루어진 것이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불하신 액수는 “예수님어치”이다. 예수님어치는 수백만 유로도 아니고 예술작품처럼 부르는게 값도 아니다. 아예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애초에 지불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무런 기대도 않으시고 당신이 모든 것을 지불하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니까 누구 눈치 볼 것이 있는가? 그냥 “야 없던 것으로 하자”고 해서 죄도 무마할 수 있겠지.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의의 속성을 부정하지 않으셨다. 우리 인간이야 내 자신의 양심을 속이더라도 없던 것으로 할 수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당한 거래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세상 사이에 골치덩어리인 죄를 없애기 위해서 예수님을 희생의 제물로 지불하신 것이다. 그렇게 하신 것은 바로 그 사랑이라는 속성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다 만족시켜서 세상과 관계할 수 있게 하는 열쇠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데 꼭 필요한 것은 희생이었다. 그 희생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끼여 있는 죄 때문이었다. 그것이 해결되지 아니하고서는 관계가 설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희생제물이 되게 하신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을 주변나라들이 곱게 보지 않을 것이다. 힘 좀 세다고 다른 나라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 싸움꾼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주변나라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겠는가? 그들이 할 일은 사과하는 일이다. 그것도 진정한 사과를 할 때이다. 그러한 사과 이후에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1969-74년까지 서독의 사회민주당 SPD의 수상을 지내고 71년 동방정책과 공산권정책으로 노벨평화상을 탔던 빌리부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1970에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방문했다. 당시 폴란드 사람들은 “왜 2차세계대전 나치 시절에 점령했던 곳을 되찾으려 오느냐”는 비아냥과 비난을 해댔다. 그런데 빌리브란트는 바르샤바를 방문하여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2차세계대전 전쟁희생자 비석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면서 지난날의 만행에 대해서 사죄했다. 그 모든 장면들이 TV가 생중계하는데 방영되었다. 폴란드 국민들은 그의 진정한 사죄에 아픈 마음의 감정을 털어낼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한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까? 그래서 독일은 지금까지도 전범들을 재판에 회부하고 지금까지도 희생자들에게 피해 보상을 해주고 있다. 관계회복을 위해서 사과와 보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질문은 늘 이어진다. 그러면 일본은? 한국과 일본이 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이러한 과거의 일들이 해결되어야 한다. 여전히 일본의 아베 정권은 전혀 사과도 없고 보상도 없고 오히려 정신대도 없고 징용자와 2차 세계대전의 피해 보상도 국가 차원에서 다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 세상이 관계를 하기 위해서 과거사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했다. 우리가 처리해야 할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의 제물로 우리에게 주심으로 해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사랑이다.
III. 보내었으면 영접해야 한다.
관계는 쌍방이지 혼자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쪽에서는 희생의 제물로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주셨다. 그렇다면 세상 쪽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 구체적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악셉티어렌 해야 한다. 영접해야 한다. 영접하는 것은 믿는 것이다. 보내어서 왔는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하면 얼마나 민망하고 답답하겠는가?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을 보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으면 우리는 영접해야 한다. 소 닭 보듯이 보면 정말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응하고 영접하는 자와 관계하신다.
세상은 역사 속에 뛰어든 그를 보았다. 그래서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하지만 구원을 받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는 자에게만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케하시는 그 제물의 역할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설 때는 각자 그분 앞에 서게 된다. 엄마 아빠하고 함께 가는 것이 아니다. 아내와 남편이 함께 세트로 묶어서 가는 것이 아니다. 자녀를 동반하고 가는 것도 아니다. 각자이다.
지난 월요일 엘리자베쓰 크랑켄하우스에 아내가 들어갔다. 전 주에 권사님이 함께 해 주셔서 시원하게 대부분의 수속을 해 주셨다. 월요일은 아내와 저 둘이만 갔는데 수술을 위한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입원실로 들어가기 전에 간호사는 내게 집에 가라고 한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묻기를 Kannst Du die Duetsche sprechen? 이라고 한다. Einbischen! 결국은 자신이 들어가서 독일말로 해야 하는 것이다. 옆에 부축하고 대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어도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내 개인기가 필요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더 이상 들어올 수 없는 곳에서는 혼자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도 자기 무기가 있어야 한다. 군인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은 개인소총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갈 때도 우리는 각자 가는 것이다. 아내의 치맛자락 붙잡고 간다고 농담으로 말하지만, 결코 치맛자락을 붙잡지 못한다. 오직 그를 믿는 자만이 구원과 영생이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라. 저는 “인격적인 관계”란 말을 아주 좋아한다. 그것은 깊은 것이고 개별적이라는 것이고 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격적인 관계는 총체적인 관계이다. 하나의 선, 단선으로 이어진 그런 관계가 아니다. 병원에서 의사와 환자? 다 치유되면 더 찾아볼 것이 없는 관계이다. 병원에서 비더젠하는 것은 좀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면 병원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더 친절하다느니 그래서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레스토랑에서 배고파 밥먹으로 온 고객과 레스토랑오너는 밥을 주고 돈을 받는 관계일 뿐이다. 그러나 생일을 알고 신경쓰던 것을 여전히 기억해서 고객에게 안부를 묻고 하게 되면 관계는 더욱 깊어진다. 그러면 뜨내기손님이 아니라, 늘 찾는 고정고객이 될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카톡, 페이스북, 인터넷 등으로 많은 교제를 하고 관계를 하면서 산다고 느껴도 알고보면 아주 피상적인 관계를 가지고 산다. 얼마나 우리는 깊이 알고 넓게 알고 뗄 수 없는 인격적인 교제를 하면서 관계하는가? 사람보다 심지어는 동물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런 관계가 생기면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애뜻한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되고 희생하게 된다.
독일에 와서 애완동물을 키웠다. 아이들을 위해서. 정확히 말해서 우리가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을 허락한 것이다. 토끼 한 마리와 쥐 두 마리인데 벌써 우리 집 올 때부터 이름이 주어진다. 토끼는 설주 혜주를 합쳐서 주주고 쥐 두 마리는 플렙션과 니키로 지었다. 이름이 지어지면 더 이상 잡아먹을 수 있는 토끼가 못되고 더 이상 더러운 생쥐가 아니다. 그냥 식구처럼 늘 밥주고 화장실 치워줘야하는 가족이 된다. 특히 니키의 목에 큰 혹이 나는 병이 들었다. 집 앞의 수의병원에 갔더니 이렇게 커지면 그것에 못 이겨 죽을 수 있단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수술을 할 수 있는데 그 마취와 수술과정을 못 이겨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과연 수술을 해서 더 생명을 연장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냥 혹이 커지게 내버려 두고 죽게 할 것인가? 가족회의를 했다. 목에 혹이 나서 무게중심이 흩뜨러져 삥삥돌면서 먹이를 까먹는 모습이 우리 눈에 아른거린다. 결국 수술을 결정했다. 심지어 적어도 50유로 이상의 수술비가 든다는 과감한 투자도 하면서 말이다. 수술 일정이 잡혀 있는 당일 저와 아내는 드레스덴을 가고 있었다. 수술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무척 긴장이 되었고 수술 시간이 지나서 딸들에게 전화해서 물었다. 결국 운명은 죽음으로 끝났다. 얼마나 마음이 안좋았는지... 사실 애완쥐를 사려면 한 마리에 1유로 정도하는 생쥐를 50마리는 더 살 수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생쥐가 아니고 우리 니키이고 그는 가족처럼 늘 함께 했었다는 것이다.
동물들 뿐 아니라, 내가 사용하던 자동차조차도 인격으로 대하기도 한다. 10년된 나의 뚜란 폭스바겐, 이제 내일 월요일이면 팔린다. 일년전 그것이 고장이 나기시작할 때 왜 이차가 말썽이지 하면서 불평했던 것을 후회 한다. 얼마나 나를 위해 교회를 위해 애쓴 차인데 말이다. 아빠가 미안해하면서 부둥켜 안아 주었다. 그런 차를 어제 마지막으로 사용했다. 장을 보는데 말이다. 그때 그만 그 차의 트렁크고장난 것에 내 머리를 박고 피를 흘렸다. 그때 나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아 너가 정을 뗄려고 하는구나”였다. 함께 스토리를 가지고 했었던 녀석이기에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다.
IV.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장애물이 있었다. 죄였다. 그것으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과 속된 우리는 관계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그것은 순전히 우리를 사랑하신 이유에서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이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피로 이루어진 관계이다. 그러므로 그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다.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다. 관계한다는 것은 자녀의 특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번 주 화요일 오후 17:00부터 바이나흐트 즉 크리스마스 장이 선다.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날인 이 크리스마스가 나와 연관없는 날이 아니기를 바란다. 보내시고 영접하는 귀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