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뒤로 북한산 봉우리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자리한 하비에르 국제학교의 오후는 한가로웠다. 막 수업을 마친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뛰어놀며 데리러 올 부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렌 르브렝 수녀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귀한 존재들인가, 그가 30여 년 넘게 이 땅에서 길러온 보석들이다. 르브렝 수녀는 하비에르 학교의 설립자이며 교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얼마 전 5월말 어느 저녁 주한 프랑스 대사관저에서 르브렝 수녀를 축하하는 작은 모임이 있었다.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레지옹도뇌르 훈장 수훈식이었다. 주인공 르브렝 수녀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겹겹의 꽃다발을 받아 안고 미소 짓고 있었지만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관심과 칭찬은 자기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 같았다.
이번 훈장은 그간 르브렝 수녀가 한국과 프랑스 간의 문화 교류와 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을 기리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33년간 지내오면서 해온 일이다.
"오늘 우리를 한자리로 모은 것은 교육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에 대한 봉사를 가장 소중한 소임 중의 하나로 생각하며 이 숭고한 일에 확신을 가지고 임해왔습니다."
그의 말 그대로 르브렝 수녀의 삶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오로지 교육 현장에서 뿌리내려 있었다.
"저는 16세기 사상가 미셸 몽테뉴가 '가득 채운 머리보다 잘 형성된 머리가 낫다'라고 한 말을 늘 새기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목표로 삼아 왔습니다. 기계적으로 공부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살필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하비에르 국제학교 이사장 엘렌 르브렝 수녀. ⓒ프레시안(최형락)
르브렝 수녀는 큰 키에 금발이 아름다운 40대 초반이었던 1980년, 한국의 한 대학으로부터 교수 직으로 초대받아 왔다. 프랑스에서도 이미 그는 자신이 속한 사도회 소속 학교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고 있던 터였다. 르브렝 수녀는 수도자로서의 삶을 서원한 후 아프리카로 파견될 것을 원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교육 사업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고 했지만 뜻하지 않게 그의 행선지는 한국이었다.
"저는 어려서부터 늘 어딘가 다른 곳, 문화도 다르고 언어와 음식도 전혀 다른 곳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가졌어요. 그런 꿈이 결국 이뤄진 거죠. 한국에서요!"
르브렝 수녀는 프랑스 중부 지방 브루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외과 의사인 아버지 덕분에 집안은 경제적으로도 풍족했고, 자상한 어머니와 10명이나 되는 형제들로 늘 화목한 분위기였다. 북적대는 가운데 여덟 번째로 자라면서 그는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 잘 지켜볼 수 있었다.
활달한 성격과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좀처럼 굽힘이 없는 고집 센 소녀였던 그에게 특히 아버지의 가르침은 그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병원에 심한 화상을 입고 장기 입원한 어린 소녀 환자에게 친구가 되어주면 어떻겠느냐고 어린 딸에게 부탁하였다. '그때 사람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어렸지만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어른이 된 그는 회상한다.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어 가장 불쌍한 사람인 나환자를 돌보는 일을 하겠다고 작정했지만, 18세에 사도회에 입회하면서 그 마음이 달라졌다. 그가 서원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도회는 교육 사업에 사명을 가진 수도회였다. 학문과 신앙의 일치를 주창한 설립자 다니엘루 수녀도 철학 박사였다.
르브렝 수녀는 교육자가 되어 많은 이들이 더 좋은 뜻을 품도록 가르치는 일이 어쩌면 더 나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고전 문학을 전공하였다. 아주 뛰어난 학생이었던 그는 25세에 교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여전히 학생들을 가르치던 그는 곧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파리 교구의 교구장 뤼스티제 추기경이 하비에르 사도회 총장 수녀에게 특별한 당부를 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다. 대학에 지도 수녀를 파견하라는 명이었다. 1969년 르브렝 수녀가 파리 10대학 낭테르 대학 현장으로 파견되었다.
유럽을 뒤흔든 '68 혁명'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때부터 수년간 르브렝 수녀는 이 대학의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의 지도 수녀로 일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지도 신부'가 그 일을 맡았었다. 르브렝 수녀가 최초의 '지도 수녀'가 된 것이다. 낭테르 대학의 이 경험은 훗날 한국에서 대학생을 가르치는 그의 삶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때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폭력에 빠져 있으면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다, 폭력을 통한 혁명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라고 했지요. 그때 대학 교정에 최루탄 냄새가 가득했지요."
그 최루탄 냄새는 한국에서도 역시 익숙한 것이 되었다. 르브렝 수녀가 한국에 도착한 1980년, 전국의 대학가는 비상 계엄령으로 휴교 상태였다. 애초 그는 대구의 한 가톨릭계 대학교에서 불어와 불문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왔다. 하지만 보수적인 지역에서 르브렝 '수녀'가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망설이던 발길은 결국 서울로 향하게 되어 고려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쉽지 않았다. 대학 당국이 학생들이 자유와 진리에 대해서 제대로 말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 '프랑스 교수'에게 배움을 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봉주르, 위, 싸바'만 되풀이해서 가르치는 교양 불어 수업은 르브렝 수녀 역시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배움의 통로는 다양했고 그 흐름은 자유롭고 힘찼다. 당시 그에게서 수업을 받을 수 있었던 학생들은 지금도 그를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꼽고 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분'으로 '르브렝 교수'를 기억한다.
르브렝 수녀는 그 후 서강대학교에서 정년까지 재직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큰 보람을 느끼기도 했고 또 한국 교육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된 세월이었다. 그리고 곧장 그는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학교를 만들자!' 그 결심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002년 르브렝 수녀는 하비에르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시작은 미미했다. 서울 혜화동에서 작은 가정집 규모로 학교를 설립했다.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었는지 모른다.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외국인학교 인가를 받은 것이었지만 결코 크지 않은 소박한 학교에 아이를 보내려는 학부형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학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시작한 하비에르 학교가 벌써 개교 11년째를 맞이하였고 80여 명의 졸업생을 냈다.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2005년 현재 위치인 구기동에 제대로 모습을 갖춘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지금 200여 명의 재학생을 둔 하비에르 학교는 프랑스식 교육방식으로 초·중등 교육을 하고 있다.
흔히 국제학교라고 하는 단어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 자녀를 위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하지만 르브렝 수녀는 '외국인'을 위한 학교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실은 '한국'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학교 설립 당시 교육법상으로는 '국제학교'라는 방식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일단 규정에 맞는 대로 학교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바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귀족적'인 국제학교와는 거리가 먼 학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동안 그가 만나본 '행복하지 않은 아이들'을 하루라도 빨리 학교 안으로 데려와 키우고 싶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많은 이들을 만나보고 나서였다.
"외국에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아이들이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니 안타까웠어요. 또 제가 충격 받은 것은 기러기 아빠들이었어요. 아이들을 조기 유학 보내고 아이들 때문에 부부도 떨어져 산다는 사실이 정말 가슴 아팠어요. 가정이 해체되는 것이지요. 아이들을 멀리 보내지 않고 원하는 교육을 받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 학교를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비에르 학교를 시작하면서 르브렝 수녀는 본격적으로 그동안 '정말 하고 싶었던 교육'을 시작할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정해 놓은 교육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장미를 백합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 장미는 결국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화분에 어떤 식물을 키우겠다고 다짐하는 것보다는 그저 충분한 영양의 흙을 계속 제공해주는 게 우리의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신은 학교 다닐 때 '교사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아이'였다고 고백하며 웃는 르브렝 수녀는 시키는 대로 하기보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찾아내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 한국에서 아이들은 대학 입시를 바라보느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으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찾아내고 알아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오면서 한국 젊은이들의 지적인 활동에 대한 열성과 대단한 암기력에 감탄을 하게 되었다며, 그런 '훌륭한 수단'을 통해서 궁극의 목적에 다다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프레시안(최형락)
그런데 르브렝 수녀가 신념을 가지고 펼쳐오던 교육적인 사명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닥쳤다. 하비에르 학교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처해진 것이다.
최근 불거진 '국제학교 문제' 때문이다. 국제학교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으니 하비에르 학교도 제도적으로는 그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설립 목적이 철두철미한 교육관에 바탕을 두었던 하비에르 학교는 그 문제에 대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고 문명숙 교감은 말한다.
문 교감은 역시 사도회 소속으로 하비에르 학교를 설립할 때부터 지금까지 르브렝 수녀와 동고동락하며 학교 발전에 애를 써오는 이다. 문 교감은 이번 조사 과정에서, 특정 직업군의 부모를 둔 재학생 수를 공개하라는 식의 외부 요구가 있었다며 너무 지나친 처사였다고 안타까워했다.
"재학생 중에 일부 자격이 미흡한 아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교육 이념에 충실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입학금이나 그런 경제적인 이유는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수도회의 종교적 정신과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형제들 가운데 큰 아이는 입학 자격이 되어 다니지만 막내는 안 될 경우가 있을 때엔 그 아이도 받아들였다. 외국에서는 이런 경우가 얼마든지 허용되는 사항이다. 또 외국에 살다가 부모의 이혼으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아이 역시 받아 주었다. 학교 적응이나 아이의 정서문제로 볼 때 마땅히 갈 수 있는 학교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교육적 고려가 앞섰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이고 싶은 사실이 있다.
"우리가 학교를 만들고자 했을 당시의 법은 지금하고 달랐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바뀌면서 지금에 이르렀는데, 처음엔 합법적인 것이 지금은 불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흔히 국제학교는 무조건 귀족 학교라는 좋지 않은 이름을 달기 쉬운데, 하비에르 학교가 과연 이에 해당되는지 의문이다. 전체 학비로 볼 때 하비에르 학교보다 더 높은 학비를 받는 일반 학교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하비에르 학교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해 7년 내내 기숙사비까지 전액 지원해 주는 제도도 가지고 있다.
최근 벌어진 일들로 인해 사도회의 수녀들은 마음이 많이 아프다. 그동안 하비에르 학교가 해온 일들은 제쳐두고 한 가지 시각으로만 평가하는 잣대가 못내 서운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올바른 신념을 바탕으로 한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좋게 키워내고 싶지만 법과 제도적 문제에 가로막혀 어쩔 수 없게 된다면 너무 안타깝고 슬픈 현실이라고 고백한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도밖에 없다고 르브렝 수녀는 애써 웃는다.
ⓒ프레시안(최형락)
르브렝 수녀의 전문 분야는 교육만이 아니다. 한국과 프랑스가 서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문화적인 물꼬를 제대로 트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서로 다른 나라 간의 이해와 소통이 더 좋은 세상, 더 나은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게 기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최고의 작가인 박완서, 김원일 등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냈으며 지금도 그의 책상에는 번역원고가 놓여 있다.
그동안 르브렝 수녀가 하비에르 학교에서 펼쳐 보이는 교육 철학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켜왔다. 여러 기관이나 단체에서 더 나은 교육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를 초대한다. 그때마다 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학생들을 진·선·미를 추구하는 데로 인도해야하는 게 교사의 역할입니다. 인간의 위대성은 항상 자기보다 더 원대한 그 무엇에로 개방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잠시도 기계에서 떨어져 있지 않으려는 인터넷 세대, 온갖 정보에 노출된 아이들이 걱정스럽다. 그는 아이들이 이렇게 커갔으면 좋겠다고 밝힌다.
"진리를 바탕으로 한 참된 소유를 위해 대가를 치룰 수 있는 사람, 남에게 열려있으면서 자기의 정체성을 지닌 책임감 있는 사람,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생활하는 용기를 지닌 사람, 이런 인재를 키우고 싶어요."
르브렝 선생은 프랑스 교육사에서 널리 알려진 격언을 소개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려고 했다.
"중세 작가인 프랑수아 라블레는 이렇게 말합니다. '양심이 없는 학문은 인간성을 파괴할 뿐이다.' 지금 한국의 학생들은 지식 습득에 온갖 열성을 다하는 데, 공부를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실현만을 위한 지식의 축적이라면 오히려 자기를 축소시키는 것이지요. 남을 배려하고,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기 위해 우리는 배우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한국의 건국 이념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인데, 이에 역행하는 것이라면 다시 생각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저의 교육 이념은 바로 홍익인간을 키워내는 것입니다."
그는 '종교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옛날에 버렸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수녀이다. 혜택을 받은 사람이 남을 도와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책임이라는 사실을 그는 자신의 삶에서 실천해왔다. 그는 앞으로도 더 오래 학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의 대화가 이 땅에서 계속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