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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교회에 임직식과 은퇴식에 참여하면서 교회 직분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일은 하나님께서 충성되이 여겨서 주셨습니다. 실상은 충성되지도 않는데, 충성스럽기를 하나님께서 기대하시고 영광된 직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섬길 영광스러운 일에 앞장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저 감사하고 겸손하게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자리에 주심에 황송한 마음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퇴식에도 내가 잘나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고,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힘 주시고, 은혜 주셔서 황송하게도 감당할 수 있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임직 받는 분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능력이 있어서 피택 되어 직분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성도들에게 권위를 과시하려고 하고, 세상적인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그저 감사하므로, 황송한 마음으로 받은 바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직분을 받으면서, 혹은 행하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분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이런 직분자 때문에 어려운 문제를 당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존재했던 교회 가운데, 정말 바람직한 교회라 칭찬할 수 있는 교회는 그렇게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정말 바람직한 교회, 본 받기를 원하는 교회를 꼽으라고 하면 저는 과감하게 데살로니가 교회를 추천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떻게 설립되고, 어떤 교회로 성장해 왔는지를 쭉 살펴왔습니다. 다시 1장으로 돌아가서 살펴 보십시다. 2-3절을 보십시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데살로니가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까? 믿음의 역사가 있었고 사랑으로 수고하는 교회였고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얼마나 좋은 교회냐? 6절에 보면 예수님을 닮은 교회였습니다. 7절에는 믿음의 본을 보이는 교회였습니다. 8절에는 저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던 교회였습니다.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믿음의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였고, 성도였습니다. 정말 바람직한 교회로 칭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닮은 교회요, 믿음의 교회요, 다른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였습니다.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아름다운 믿음의 교회가 되었는가? 바울은 그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2장 1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그 비밀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신도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였기에 바람직한 믿음의 소문을 내는 교회였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실 때에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기도가운데 특별히 12명을 뽑았습니다. 그리고는 숙식을 함께 하면서 가르쳤습니다. 이중에서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초대교회의 사도들입니다. 이 12 제자 가운데에 사도 바울은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와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바울 서신을 읽어보면 그 첫 머리에 나오는 말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이라고 언급하며 증명합니다. 자신의 사도권이 흔들리면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흔들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늘 자신이 예수님께 부름 받은 사도라는 것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임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그만큼 바울의 사도권을 무시하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한갓 세상의 선생 정도의 유창한 설교로 혹은 거짓 교사의 가르침으로 받아드리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 속에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 그 복음을 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말로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말씀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들었던 복음의 소식을 지금 듣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들었던 말씀을 우리도 그대로 전해 듣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데살로니가 사람들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설교를 들을 때마다 어떤 마음의 자세로 설교를 듣고 있습니까?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나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이 말할 때에 참모들이 어떤 자세를 취합니까? 윗분의 지시를 수첩에 깨알같이 받아 적는 장면을 봅니다.
우리도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 말씀하여 주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리려는 갈급한 마음으로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역사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성경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 생명을 부어줍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고 합니다. 즉 에너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에너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물체나 생명체를 움직이는 힘이 에너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하면 생기가 넘치고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셋째는 좌우의 날 선 검과 같다고 했습니다. 외과의사가 날카로운 칼로 암 덩어리를 싹둑 잘나 내듯이 말씀이 죄악을 찌르고 도려내게 합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사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사도행전 2장 37절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충만하여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인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설교했습니다. 이때에 유대인들이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회개하고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성령충만 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게 될 때에 우리는 회개하고, 성령충만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상적인 생활입니다. 말씀 앞에서 찔림을 받으며 살아야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아침에 조깅을 시작했습니다. 조깅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아는데 차일피일 미루며 실천을 못했습니다. 그런 중에 텔레비전 생로병사라는 프로에서 조깅의 좋은 점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결단하고 조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어떤 충격이나 자극을 받지 않으면 좋은 줄 알면서도 그저 편하게, 쉽게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바르게 살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르게 살려고 한다면 하나님 말씀 앞에 늘 노출시켜야 합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찔림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악한지, 잘못되었는지, 세상과 더불어 편하게만 살려고 하는지를, 매일 묵상을 통해서 나를 통찰해야 합니다. 이때에 비로서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사람이 방자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조명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도 여러분! 말씀 묵상을 하려고 시도하십시오. 바쁘다고요? 밥은 먹고 다니지 않습니까? 몸을 위해서 밥은 꼭꼭 챙기듯이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챙기십시다.
큐티집을 구입하는 것이 좋습니다. 매일매일 말씀을 분담해주고 따라 하면 됩니다. 일년에 30불입니다. 영혼을 위해서 한번 투자해 보십시오. 자녀에게도 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1장 6절에 보니까 어려운 환란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령의 기쁨으로 환란가운데서도 말씀을 받습니다. 믿는 자에게 린치를 가하는 환란 속에서도 말씀을 사모하면서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힘들면 힘들수록,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려고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하게 느낄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시119:105).
교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가장 어려운 때가 언젠가?’를 묻는다면 저는 ‘결혼하여 아기를 출산하고 기를 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결혼해서 겨우 부부가 호흡을 맞추고 있는데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기를 양육하는데 밤낮이 없습니다. 지칩니다. 그 가운데 주일이라고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예배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부부는 아기를 본다고 들락날락하면서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이런 세월을 몇 달, 혹은 몇 년을 하다 보면 말씀이 없는 1ㅜ부들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약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만날수록 지혜롭게,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말씀의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실망한 두 명의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인 줄도 몰랐습니다. 마침내 저들이 뭐라고 하느냐?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24:32)
말씀하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겁니다.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자기들에게 말씀하시고떡을 떼어주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다시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제자의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감동과 치유와 회복을 동반하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바쁘고 힘든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 말씀 중심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십시다.
그때에 말씀의 역사가 분명코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입니다.
(1) 우리는 주님을 더욱 본 받는 자가 되어서 세상의 본이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되어 세상을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3)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게 되어서 세상 앞에서 거룩한 자로 영향력을 드러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매일의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십시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간절한 심령으로 받아 100배의 열매가 있게 하소서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에 감동과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하소서
말씀으로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