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장 주석/매튜핸리
판단하지 말자(마태복음 7:1-6)
우리 구주께서는 여기에서 타인의 실수와 관련하여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치고 있으며, 그의 어법으로 보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을 책망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정죄하는 데는 매우 엄격하고 가혹하였으며, 또한 거만하고 불손했으나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내세우는 데는 도도하고 독선적이었다.
Ⅰ. "판단하는 일"에 대한 경고(1, 2절). 판단하는 것이 직무인 사람들이 있는데, 곧 판사와 목사이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재판관이 되시지는 않으셨으며, 그들을 폐하러 오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관원들이 공의를 베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사사로운 개인들, 그의 제자들에게 지시되었는데, 그들은 이후에 "보좌"에 앉아 심판을 하게 될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1. "비판하지 말라"는 금지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되, 우리의 이웃을 비판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또한 타인에게 마치 자신이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것처럼 오만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되며, 타인이 우리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도록 허용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규칙은 "서로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 우리는 심판석에 앉아서 한마디 말하는 것이 각 사람에게 법률과 같이 여겨지도록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심판, 즉 "비방을 하지 말아야 한다"(약 4:11). 또한 "형제를 멸시하거나 업신여겨서도" 안 될 것이다(롬 14:10). 우리는 성급하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단지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심술 때문에 형제를 심판해서는 안 된다. 터무니없이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만을 보고 그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속단해 버리거나 불쾌한 일들을 추측해 내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무자비하고 잔혹하고 혹은 복수하려는 마음을 가지거나 남을 해치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비판을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사람의 신분을, 한 가지 행동을 보아서 판단해 버려서는 안 되며 그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아서 그의 사람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장은 편협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의도까지도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마음을 시험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권이며, 우리는 그의 왕권에 대해 참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영원한 상태를 판단하거나 그들을 "위선자, 버림을 받은 자, 소외된 자"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분수를 지나치게 행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남을 판단하는가? 그러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그를 권고하고 도와줄지언정 비판하지는 말라.
2. 이러한 금지를 강조하시는 이유.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이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한다.
(1) 우리가 남을 비판하러 든다면 우리 자신도 남에게서 비판을 받을 줄로 생각해야만 한다. 재판석을 빼앗는 자는 재판장으로부터 호출을 당할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의 흉을 가장 잘 보는 사람이 가장 많이 비판을 받는 법이다. 사람마다 돌을 들고 그들에게 던지려 할 것이다. 이스마엘과 같이 "모든 사람을 치는" 손과 혀를 가진 자는 그와 같이 모든 사람들의 손고 혀가 "그를" 칠 것이다(창 16:12).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한 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도 인색한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더 큰 심판"을 받게될 것이다. 두 종류의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것인데(롬 14:10), 하나님께서는 "겸손히 참고 견디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시고, "거만하게 비웃는 자"에게는 그의 상당한 심판을 행하여 물리치실 것이다.
(2) 만일 우리가 타인을 책망함에 있어서 심하게 하지 않고 관대스러우며, 남을 판단하는 일을 삼가고 오히려 자신을 판단한다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것같이,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자들을 비판하지 아니할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이는 겸손, 사랑,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증거이며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얻고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롬 14:10).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자들의 비판은 복수법(the law of retaliation)에 따른 것이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2절), 의로우신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실 때에 종종 아도니베섹의 경우와 같이 비례법(a rule of proportion)을 사용하신다(삿 1:7). 또한 요한계시록 18장 10절, 18장 6절을 참조하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판단을 하실 때에 의로우시고 장대하시다 할 것이며, 모든 육체는 그 앞에 잠잠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것은 아마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경우일 것이며, 따라서 사람들은 그들의 심판 받을 때에 자신들의 죄를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것을 알고 우리의 형제를 가혹하게 대하지 말자.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욥 31:14) 우리가 우리 형제를 비판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엄격하고 가혹하게 비판하신다고 하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똑같은 평형으로 우리를 저울질하신다면? 만일 우리가 형제들의 잘못을 과격하게 지적해 낸다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다. 대개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이런 경우에 있어서도 사람들을 가혹하게 다룬다면 그 보응이 자신의 머리에 돌아올 것이다.
Ⅱ. "책망에 대한" 몇 가지의 경고. 남을 판단하는 것은 큰 죄가 되므로 그런 일은 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큰 의무인 동시에 "사망으로부터 영혼을 구원하신 일"의 수단이 될 수 있는 책망까지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책망은 남의 범죄에 동참하지 않도록 우리의 영혼을 지켜 주는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1. 책망은 아무에게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책망 받을 만한 사람에게 해야 한다. 남을 헐뜯는 일을 예사로 일삼는 자들은 그 자신 스스로가 수치를 당할 것이며 따라서 책망 받는 대상에게 아무런 이로움도 주시 못할 것이다(3-5절).
(1) 올바른 책망이란 스스로는 더 큰 잘못을 허용하면서도 형제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논쟁을 벌이려고 하는 자들에게 하는 책망을 말한다. 이와 같이 남을 비난하는 자들은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찾아내는 데는 눈치가 빠르나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찾아내는 데는 민감하지 못한 자들이다. 아니 도리어 자신의 눈이 완전히 멀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는 데 부적당할 때에 그 일을 애써 하려고 하는 "참견 잘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죄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티"와 같이 비교적 적은 죄가 있는가 하면, "들보"와 같이 큰 죄도 있다. 어떤 죄는 "하루살이"와 같기도 하나, 또 어떤 죄는 "낙타"와 같은 것도 있다. 어떤 작은 죄가 있다고 해서 그 작은 죄에 상당하는 작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므로 그 죄가 절대로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티"가 눈 속에 들어갔거나 "하루살이"(또는 "가시"라는 표현이 더 나을 것이다)가 목에 걸려 있다면 그것은 다같이 고통스럽고 위험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들을 빼내고 나서야 비로소 편안해지고 튼튼해질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 자신의 죄를 그것과 똑같은 다른 사람의 죄보다도 더 큰 것으로 여겨야만 할 것이다. 즉 우리는 사랑으로써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죄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며, 회개와 통회함으로써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죄는 가볍게 느껴져야 할 것이며 우리 자신의 죄는 무겁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3]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눈 속에 들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들은 매우 큰 죄악과 그 지배 아래 놓여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회개나 고칠 것이 없다는 듯이 자신을 정당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이와 같이 죄악스럽고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자기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마귀는 교묘하게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자기들의 눈이 실제로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호언장담하면서 "우리는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4] 흔히 죄를 많이 지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책망하는 데는 남달리 앞장서서 제멋대로 지껄이는 법이다. 자신을 의롭다고 내세우는 데는 매우 거만했던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경멸적이었다. 그들은 "티"에 불과했던 사소한 일,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맹렬히 공격했지만, "들보와 같은 일," 즉 그들의 부모를 무시하고 훼방하는 일은 더욱 장려하였다. 자신이 마치 재판관이나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교만과 무자비가 그 눈 속에 있는 "들보"가 된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남이 모르는 죄가 있으며, 그 죄가 발견되는 날이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형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Cogita tecum, fortasse vitium de quo quereris, si te diligenter excusseris, in sinu invenies; inique publico irasceris crimini tuo ─ 즉 "네가 불평하는 그 허물이 엄밀히 따져본 결과 네 자신 안에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경우를 생각해 보라. 네 자신의 잘못에 대해 공개적으로 분개하는 것이 불공평한 일이겠는가?(Seneca, de Beneficiis)
[5] 자신에게는 관용하되 타인의 잘못에 대하여는 엄격하고 가혹한 것은 외식한다는 표식이다. "외식하는 자여!"(5절) 이러한 사람이 꾸미는 것은 무엇이든지 죄에 대해서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하다(적수가 된다면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적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칭찬 받을 아무런 가치고 없다. 아니 오히려 분명한 것은 그는 형제들의 원수가 될 것이며, 따라서 비난을 받아도 마땅하다. 이 영적인 관용은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너를 고칠 수 있게 하라 ─ 자신은 고치지도 않으면서"라고 말할 수 있느냐? 네 자신의 마음이 그러한 어리석음을 나무랄 것이며 싫은 것을 억지로 그것을 할 것이다. 또한 너는 모는 사람으로 하여금 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으면 할 것이다. 의사여! 자네나 고치라고(vice corrects sin)." I prae, sequar─ 즉 "자네가 앞장을 서게, 나는 뒤 따르겠네(롬 2:21, 참조).
[6]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한 숙고가 ─ 그것이 우리의 우정어린 책망까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되지만 ─ 우리의 오만한 책망을 금지해야 하며, 남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솔직하게 관용을 베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 보라(갈 6:1). 하나님이 네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두신다면, 너희는 과거에 어떻게 되었을 것이며 현재 어떻게 될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2) 여기에는 비판자가 지켜야 할 본분이 기록되어 있다(5절). "먼저 네 눈 속에 들보를 빼어라." 우리의 잘못은 우리가 비판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비판할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과소평가 해버리는 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내 눈에는 들보다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내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데 협조할 수는 없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범죄(offence)가 결코 그의 방패(defence)가 될 수는 없다. 먼저 내 자신을 고쳐야만 내 형제를 고칠 수 있으며, 그때야 비로소 형제를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남을 비난하는 자는 모름지기 그 자신이 책망할 것이 없고 흠이 없어야만 한다. 남을 판단하는 것을 그 임무로 삼고 있는 사람들, 즉 판사나 목사는 "조심스럽게 행하기를 힘 쓸 것이며 그들의 언사가 매우 규칙적이고 순전해야만 할 것이다." "장로는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 것이다"(딤전 3:2, 7). 지성소에 가위(역주:양초의 심지를 가르는 가위)는 순금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2. 누구든지 책망을 받기에 합당하지는 않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6절). 이 말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이 말씀은 제자들의 복음 전파에 관한 규칙으로서, 사악한 자나 모독적인 사람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그리스도 자신은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전파하셨다), 이를테면 복음을 전해도 강퍅해지거나, 또한 복음을 모독하거나 복음전파자를 박해하는 자들에게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것은 이러한 사람들 때문에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대신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기 때문이다(행 13:14). 휘트비(Whitby) 박사도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계시다.
(2) 이 말씀은 비판하는 자에 대한 규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죄를 대항하려는 우리의 열심은 신중하게 조절되어야 한다. 우리는 실지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거나 도리어 우리에게 화를 낼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에게는 섣불리 권고하거나 훈계해서는 안되며 더구나 위로를 해서도 안 된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 보아라. 그 돼지는 돌을 던졌을 때와 같이 성을 낼 것이다. 이리하여 "경책자"는 "비난자"라고 불리우게 될 것이다(눅 11:45; 렘 6:10). 그러므로 개와 돼지(부정한 창조물)에게 거룩한 것을 던지지 말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훌륭한 권고나 책망은 거룩한 것, 곧 진주와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규례들이며 매우 귀중한 것들이다. 이들은 "금고리나 정금의 장식과 같이" 슬기로운 책망자들이며(잠 25:12), 또한 슬기로운 책망은 "값비싼 머리 기름"과 같은데(시 141:5), 그것은 곧 "생명나무"인 것이다(잠 3:18).
[2] 사악한 자의 족보 가운데는 개나 돼지처럼 여겨지는 사악함의 절정에 이른 사람들이 몇몇 있다. 그들은 무분별하고 소문날 정도로 악독하며, 오랫동안 "죄인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왔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가르침을 증오하고 경멸하며, 또한 복음을 무시함으로써 취소하거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하게 되어버렸다. 그들은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과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이다.
[3] 이러한 사람들에게 훈계할 목적으로 책망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며, 비난자들로 하여금 개나 돼지에게 적용될 멸시와 불행을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시키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다. 사람이 기대할 것이라고는 그들에 대해 무시하고 격분함으로써 그 비난을 묵살해 버리는 길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통제와 반박은 못 견디기 때문에 다시 돌이켜 비난하는 사람을 찢어 상하게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의 선한 이름을 욕설로 훼방할 것이며, 치유하는 말을 상처 내는 말로 환원시킬 것이며, 핍박으로 그들을 찢을 것이다. 헤롯은 세례 요한의 그 깊은 신앙심 때문에 그를 죽였다.
사람을 "개"나 "돼지"와 같은 점에 대해서 알아보자. "책망"하는 것을 싫어하거나 훈계하는 사람을 미워한다든지, 또는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여 죄와 위험을 알려 주는 사람을 정면으로 대항하는 자들은 이런 부류에 속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치유 받기를 거절하고 오히려 그것을 대적한다. 고침 받거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자를 누가 치료하고 도와주려고 할 것인가? 하나님이 이러한 사람들을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신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대하 25:16). 여기에 주어진 규칙은 뛰어나고 또 인을 치는 복음의 규례(성례전)에도 적용될 수 있다. 공공연하게 사악하고 참람한 자들에게 그 규례가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것들이 멸시를 받고 또한 경건치 못한 자가 강퍅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지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개나 돼지처럼 여기고 정죄하는 자들에 대해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시험을 해보아 확실한 증거를 얻을 때까지는 그렇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면 혹 구원받을 수도 있는 사람을 개나 돼지처럼 여김으로써 환자로 하여금 영영 치유 받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모든 고백자들을 위선자로 생각하여 선하거나 악하다라고 칭하는 것을 주의해야 하는 것처럼, 모든 악한 사람들을 개나 돼지로 생각하여 나쁘다, 절망적이다라고 칭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4] 우리 주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안전에 대해 지극히 염려하셨으며, 그들을 "돌이켜 찢어 상하게" 할 사람들의 난폭함에 불필요하게 드러나도록 하시지 않으셨다. 스스로 자멸하지 않으려면 지나치게 자신을 의롭다고 하지 말라. 그리스도는 자기보존의 법칙을 그 자신의 법칙들 중의 하나로 삼으셨으니, 그에게 속한 백성들의 "피는 그에게 있어서 매우 귀중한 것이다."
기도의 교훈(마태복음 7:7-11)
우리 주님께서는 6장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바르게 향하면 보상을 받게 되는 명령된 의무로서의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 특히 때로 우리의 육신과 혈기를 거스리기도 하는 그의 교훈들을 순종하려고 하는 도덕적인 힘(윤리감)을 얻기 위한 지정된 수단으로서의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Ⅰ. 여기에 있는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7절)는 세 단어는 동일한 목적으로 사용된 교훈이다. 즉 이 말은 같은 뜻을 가진 말로서, "기도하라, 자주 기도하되 신실하고 진지하게 기도하라,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 기도의 내용을 의식하면서 계속 기도를 하라. 무시로 기도하되 열심히 기도하라. 거지가 동냥을 구하듯이 구하라." 풍성한 은혜를 얻으려고 하는 자는 그들 스스로가 거지의 직업을 택하여 구걸 행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에야 비로소 이 직업이 성공하는 데 지름길이 되는 직업임을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다.
"구하라, 너의 부족함과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나타내 보아라. 그의 약속을 따라 너희들의 쓸 것과 소용되는 것을 그에게 고하라. 여행자가 길을 물어보듯이 구하라. 기도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겔 36:37). 잃어버렸던 귀중품을 찾듯이, 상인이 값진 진주를 찾듯이 찾으라. 기도함으로써 찾으라(단 9:3). 집에 들어가려는 자가 문을 두드리듯이 두드리라."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하도록 허용될 것이며, 그의 사랑과 은혜, 천국에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죄는 우리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문을 닫고 빗장을 찔러 놓았다. 우리는 "주여, 주여, 열어 주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문을 두드려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며(계 3:20; 아 5:2), 우리가 그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허락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거지에게 허용하지 않는 은혜인 것이다.
찾는 것과 문을 두드리는 것은 구하고 기도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의미한다.
1. 우리는 "구할 뿐만 아니라 찾아야" 한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므로써 기도를 뒷받침해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지정된 방법을 사용하여 우리가 "구할 것"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 과수원지기는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에 대해 일년간을 연장하면서 주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두루 파겠나이다"를 덧붙여 말하고 있다(눅 13:7, 8). 하나님은 성경을 연구하고 지혜의 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에게 은혜와 지식을 주신다. 또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자에게는 죄를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2. 우리는 "구할 뿐만 아니라 문을 두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문 앞에 와서 끈질기게 "구해야"만 하며, 또한 기도할 뿐만 아니라 간청하면서 하나님과 씨름해야 한다. 부지런히 "찾고," 계속적으로 문을 두드리고, 기도하거나 수단을 강구하는 데 오래 참아야 하며, 끝까지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Ⅱ.여기에는 부가된 약속이 있다. 유리들이 기도할 때 온 노력을 기울였다면 노력한 그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마음을 찾으시는 곳에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는 너에게 평화의 해답을 주실 것이다." 교훈은 삼중적(threefold)으로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인데 이것은 "교훈에 교훈"을 더하는 것이다. 그러나 약속은 육중적(sixfold)으로서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약속에 약속"을 더하고 있다. 왜냐하면 약속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1. "약속"은 정확하게 "교훈"에 답하기 위해 기록되어 있다(7절). 하나님은 그를 섬기는 자들을 만나실 것이다. 즉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빌려주거나 파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주시는" 것이다. 선물보다 더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네가 무엇을 기도하든지 약속을 따라 "구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이 네게 적당하다고만 생각하신다면 너희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도록 "주실 것이다." "구하는"것이 곧 받는 것이다. "네가 받지 못함은 구하지 않거나 올바르게 구하지 않음이라." 구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가질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며, 따라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그때에 너희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를 찾으시며," 그분을 찾기만 한다면 풍성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자비와 은혜의 문은 원수나 방해자를 못 들어오도록 단단히 잠가두는 것처럼 닫혀 있지 않고 친구나 자녀들에게 하는 것처럼 너희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문 앞에 서 있는가? 만일 네가 친구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또는 언제든지 제출할 수 있는 약속의 표를 믿음의 손에 가지고 있다면,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아무런 염려도 하지 말라. 한 번 두드려 열리지 않으면 기도함으로 계속 두드리라. 친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그에게 무례한 짓이 된다면 그대로 가버리라. 그가 늦어질지라도 계속 기다리라."
2. 약속이 중복되어 있다(8절). 목적은 동일하지만 조금 첨가되어 있다.
(1) 이 약속은 올바르게 기도하는 모든 자에게 적용된다. "내 제자인 너희들만이 기도한 것을 응답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자마다 받을 것이니,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녀노소, 빈부귀천, 계급 학식의 여부를 가릴 것 없이 그들이 믿음으로 나아온다면 다같이 은혜의 보좌에로 영접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2) 이 약속이 중복 기록된 것은 그 주어지는 것을 한 몫에 종합하기 위한 것인데, 현재시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 약속이 미래에 대한 약속 이상의 것임을 나타낸다. "구하는 자마다 앞으로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현재도 얻게 된다. 우리는 실제로 그 약속을 적용시키고 유효하게 하실 것을 믿음으로써 신실하신 약속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며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므로 사실상 현재의 소유물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능동적인 신자는 즉시 시작하여 약속된 축복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우리가 약속을 따라 소망 중에 가진 것은 손에 가진 것처럼 확실하며, 따라서 유쾌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다"(시 108:7, 8). 모든 것이 내 것이며, 단지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믿음만으로도 나는 그렇게 되어질 수가 있다. 조건적인 하사금은 그 조건을 이행할 때에만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도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이 말씀에 근거하여 간구에 대한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는 모든 권세를 가지셨으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3. 이 말씀은 이 세상의 부모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본능적으로 타고난 성품, 즉 자녀들이 요구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주려는 천성과 비교하여 그 유사점을 들어 설명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까다롭거나 기분이 언짢지만 않다면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다라 하면 돌을 주겠느냐?"(9,10절)고 말씀하신 후 계속하여 추론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자라도, 너희 자녀들의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겠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자녀들의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겠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11절)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지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1) 우리의 간구와 기대를 "지도하기"위한 목적,
[1] 우리는 어린 자녀와 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존경과 신뢰의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어떤 자녀가 부족한 것이나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아버지에게로 달려가서 불만을 털어놓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나의 주님!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새롭고 싱싱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자기의 쓸 것을 공급해 주십사하고 기도해야 한다.
[2] 우리는 "좋은 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와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그에게 맡겨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지를 알지 못하지만(전 6:12),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일임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여,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여기에서 어린 자식은 그의 아버지에게 꼭 필요한 "떡"과 건강에 도움이 되신 "생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어린 자식이 어리석게도 "돌"이나 "뱀," 또는 아직 덜 익은 과일이나 장난하기 위하여 예리한 칼을 달라고 졸라댄다면 그 아버지가 아무리 친절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가졌을 때 오히려 우리를 손상시키고 해를 끼치는 것들을 터무니없이 요구할 때가 있다. 그는 이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구하여도 주시지 않는다. 사랑함으로 거절하는 것은 성을 내면서 주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낫다. 만일 우리가 원했던 것을 모두 가졌다면 이것에 앞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방치되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한 이교도 쥬베날(Juve-nal)의 시에 의하여 잘 표현되어 있다(Sat. 10).
네 모든 운명을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맡겨라.
그들로 하여금 너를 위해 경영하게 하고, 그것을 주께 하라.
그들의 뛰어난 지혜가 네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나니,
그들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은 탁월하시도다.
아 ! 우리는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다, 그 반만으로도 충분한 것을!
우리는 어리석게도 자신의 완고한 욕망이 이끄는 대로 동반자를 구하고, 결혼을 갈망하고 그리고 또 상속자를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 만이 우리의 장래의 자손들과 아내가 누구인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다.
Permittes ipsis expendere numinibus, quid
Conveniat nobis, rebusque sit utile nostris,
Nam pro jucundis aptissima quaeque dabunt
Carior est illis homo, quam sibi: nos animorum
Impulsu, et caeca, magnaque cupidine ducti,
Conjugium petimus, partumque uxoris: at illis
Notum est, qui pueri, qualisque fulura sit uxor.
(2) 우리의 간구와 기대를 "격려"하기 위한 목적.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거절되거나 그 결과로 말미암아 실망하게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또한 "떡" 대신에 이를 상하게 할 "돌"을 가지거나(아무리 튼튼한 틀 이를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생선" 대신에 독침으로 깨무는 "뱀"을 가지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실로 그것을 두려워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그것을 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형벌하시지 않고 더 좋은 대우를 해 주실 것이다. 세상은 종종 "떡 대신에 돌"을, "생선 대신에 뱀"을 주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와 같이 하시지 않는다. 아니, 우리는 아버지가 어린아이의 요구를 들어주듯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고 그에 대한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1] 하나님은 부모의 마음속에 그들 자녀들의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는 자비로운 성벽을 부여하셨다. 아무리 의무감이 희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마치 그것이 본능인 것처럼 변함없이 베풀어진다. 일찍이 부모와 그의 법적인 자녀와의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반드시 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것은 솔로몬 시대에 비합법적인 경우(역주:해산한 여인과 어린 아이, 왕상 3:16-18)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2] 하나님은 그가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확실히 나타내시며, 우리를 그 자녀로 삼으신다. 우리가 자녀들을 보살피고 도와주기 위하여 자진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것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그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도와주려고 하실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되는 것이다. 부모들이 가진 사랑과 자비는 자연에서가 아니라 자연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한히 큰 것이라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위해 염려하시고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아버지가 자녀를 염려하는 것과 같으며(시 103:13), 아니 그보다 일반적으로 더 다정한 어머니가 염려하는 것과 같다(사 66:13; 49:14, 15).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자비, 선하심이 이 세상의 그 어떤 부모들의 그것보다도 더 탁월하시다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실은 "하물며"라는 말로 입증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부모들보다 무한히 탁월하시다는 확고부동한 진리에 근거되어 있다. "하나님의 생각은 그들의 생각을 초월하신다."
우리의 육신적인 부모들은 우리를 돌보신다. 또한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을 보살핀다. 하물며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돌보지 않으시겠는가! 이 세상의 부모들은 본래적으로 악하며,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속했던 선한 성품을 상실하였고, 짓궂음과 부정한 타락성을 가진 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주며," 때를 따라 적절하게 "주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왜냐하면 내 부모들은 버렸으나 그는 영접하시기 때문이다(시 27:10).
첫째, 하나님은 더 많이 알고 계신다. 부모는 가끔 어리석게도 분별없이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히 현명하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바라는 것, 또한 우리에게 적절한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신다.
둘째, 하나님은 더 친절하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애로운 부모들의 모든 애정을 한 그릇에 담아 "우리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긍휼"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마치 촛불과 태양, 한 방울의 물과 대양(大洋)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육신의 아버지보다도 더 풍성하게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시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히 사랑하시며, 영원히 살아계시는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아버지들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대했던 것과 같이 불효한 자녀나 방랑한 아들에게까지 극진한 사랑을 베풀거늘 하물며,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이 잠잠하시겠느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복음 7:12-14)
우리 주 예수님은 여기에서 참 경건의 기본 요소인 사람에 대한 의(義)와 보편적인 의(義)의 기본 요소인 하나님께 대한 경건에 관하여 강조하고 계시다.
Ⅰ. 우리는 의를 우리의 규범으로 삼아야 하며, 그것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12절). "그러므로" 의로운 생활을 하기 위하여 이것을 너희의 생활 원리로 규정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앞서 말한 특별한 교훈을 따르기 위하여, 또한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도록 일반적으로 이 규칙을 표준으로 삼아라(너는 비난받게 되지 않을 것이니. 비난하지 말라).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이 앞에 말씀하신 약 속의 축복을 얻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공의의 법칙이 기도의 법칙에 적절히 추가되었는데, 이는 우리의 대화가 정직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기 때문이다(사 1:15-17, 58:6, 9; 슥 7:9, 13). 만일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서 "정직하고 훌륭하고 평판이 좋은" 아름다운 일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을 받으려고 하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헌신적이고 정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헌신은 외식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1. 규정된 공의의 규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가 단지 알고 믿어야 할 것에 대해서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바에 대하여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또한 우리와 동일한 신앙과 입장을 가진 동료나 제자들에게 분만 아니라 우리와 관계된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행해야 할 바를 가르치기 위하여 오셨다. 공평의 황금률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그와 같이 해 주는 것이다. 이교도의 황제인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는 이 황금률의 위대한 신봉자였으며, 그의 서재의 벽에 이 구절을 적어 놓고 가끔 재판을 할 때에 인용했으며, 이 구절 때문에 그리스도를 존경하였으며 그리스도인에게도 호의를 가졌다. Quod tibi, hoc alteri-"즉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 구절은 부정적으로 취하든지(Quod tibi fieri non vis, ne alteri feceris), 긍정적으로 취하든지 결국 그 의미는 동일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악한 일을 행하였거나 또는 그들이 악을 행하려고 마음먹더라도 그 일을 그들에게 행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러한 일이 우리에게 행해졌다면 우리의 생각대로 해서는 안 되며 꾸준히 견딤으로써 우리가 소원하던 것이 이루어지도록 해야할 것이다. 이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품은 것과 꼭 같은 사랑을 이웃에게 베푸는 것과 같이, 동일한 선한 임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이 규율의 의미는 3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우리는 스스로 적합하거나 합리적이라고 인정되는 것을 이웃에게 행해야만 한다. 우리 자신의 판단에 호소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경우가 될 때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내용과 관계되어 있다.
(2)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우리 자신과 같은 수준에 놓고, 그들이 우리에게 빚진 것만큼 우리도 그들에게 빚진 것으로 생각하라.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공의를 행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도 또한 우리와 같이 공의로 말미암은 혜택을 얻을 수 있다.
(3)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에 스스로를 상대방의 특수한 경우와 처지에 똑같이 두고, 대하여야만 한다. 만일 내가 이러한 사람과 계약을 맺는다면, 이러한 사람들이 겪는 질병과 고통을 당한다면 나는 어떻게 취급되기를 바랄 것인가? 그들의 경우가 언제 속히 실지로 우리의 경우가 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올바른 추측인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그들에게 행하지 못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남에게 행했던 것과 같이 우리에게 심판하지나 않으실까 하는 것이다.
2. 이 규율을 강화하기 위하여 제시된 논거.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조목으로 된 큰 계명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구절 외에 또 한군데가 있다. 즉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강령이니라"(마 22:40)이다. 이 구절은 단순히 "율법과 선지자"라는 두 단어로 기술되어 있지만, 그것은 곧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말이다. 우리의 이웃에 대한 의무(그것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에 관해 거기에 언급된 모든 것은 이 규율에 함축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이 규율을 황금률에 적용시키고 있다. 구약과 신약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우리에게 규정해 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이 규율에 의해 추천되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이 규율에 비추어 판단을 받는다. Aut hoc nonevangelium, aut hi non evangelici- 즉 이것이 복음이 아니거나,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Ⅱ. 우리는 자진하여 경건에 힘써야 한다. 우리의 언사에 대해 엄격하고 신중한 태도를 지녀야 하며, 이것을 여기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협착한 길로 걸어가는 것"(13, 14절)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다 생각할 수 있다.
1. 죄악의 나쁜 길과 거룩함의 좋은 길. 길에는 두 종류의 길이 있을 뿐이다. 즉 올바른 길과 그릇된 길, 좋은 길과 나쁜 길, 하늘 나라로 가는 길과 지옥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두 개의 길 중에서 우리 모두는 어느 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후에도 중간 장소는 없을 것이며, 지금도 중간 길은 없다. 어린아이들이 장차 성도가 될는지 죄인이 될는지, 또는 경건한 사람이 될는지 불 경건한 사람이 될는지는 끝까지 두고 봐야만 알 수 있다.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1) 죄와 죄인들의 길이 제시되어 있다. 이 길은 가장 좋으면서도 가장 나쁜 길이다.
[1] 이 길은 많은 사람을 유혹하여 끌어들인 후, 그 곳에 머물게 하는 길이다. 즉 "문은 크고 넓어," 많은 여행자들이 이 길로 걸어간다.
첫째, "너희가 이 길로 간다면 많은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문은 크게 열려 있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너희는 너희 욕망을 모두 가지고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또한 이 문에서는 너희의 식욕과 정욕을 제지시키지 않는다. 너희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너희 눈이 보는 대로 걸어가도 좋다. 이 길은 충분한 여유를 제공한다." 이 길은 "넓은 길"이므로 그리로 걸어가는 자를 아무도 막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끝없이 방황한다. 이 길은 "넓은 길"이므로 여러 갈래 길들이 있다. 물론 이 죄인들의 여러 길도 그 선택에 따라 각자의 길을 달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갈래 길들은 모두 "넓은 길" 안에 있다.
둘째, "너는 그 길에서 많은 친구를 얻게 될 것이다. 이 문으로 들어가거나, 이 길을 걸어가는 자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많은 무리를 쫓아"간다면 그것은 "악을 행하는"것이 될 것이다. 만일 군중과 함께 간다면 그것은 그릇된 길일 것이다. 우리가 시내를 따라 내려가려고 하는 것이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이 하는 것처럼 행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들이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저주를 받고 그들과 함께 지옥에 가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지나친 아첨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함께 천국에 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멸망한다면 우리는 더욱 조심을 해야 할 것이다.
[2] "이 길이 멸망으로 인도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죽음, 영원한 죽음이 이 길의 끝에 있으며(죄의 길이 이 방향을 취하고 있다), "주님의 면전에서부터 영원히 멸망"하게 괸다. 이 길이 공공연히 드러내어 행동하는 불경건한 자의 고속도로이든, 늘 폐쇄적으로 숨기는 위선자의 뒷길이든지 간에 그것이 죄의 길이라면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 한 멸망케 하는 길이 되고 말 것이다.
(2) 거룩함의 길이 제시되어 있다
[1] 이 길에는 다른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 있다. 이 길에서 가장 나쁜 조건이 무엇인가를 알자. 그래야만 앉아서 계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신중하게 대하시며, 또한 말씀하신다.
첫째, "문은 좁다"고 하셨다. 회심과 중생의 "문"이며, 우리는 이 문을 통하여 이 길로 들어가며 신앙과 경건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우리는 새로 거듭나는 중생에 의하여 죄의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옮겨가게 된다(요 3:3, 5). 이 문은 두 바위 사이에 있는 통로(삼상 14:4)와 같이 찾기도 힘들고 통과하기도 어려운 "좁은 문"이다.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이 있어야 하며 "오래된 것은 제거되고 지나가 버려야" 한다. 영혼의 성벽은 고쳐져야 하며, 타락한 습성과 관습은 깨뜨려져야 한다. 지난날에 행했던 모든 일들이 그대로 다시 재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시내를 거슬러 헤엄쳐 가야하며,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많은 반대를 직면하여 싸워야 하며, 또한 이를 물리쳐야 한다. 사람을 그 자신에게보다는 온 세상과 싸우게 하는 것이 쉽다. 그러나 회심에는 자신과의 싸움이 있어야 한다.
이 문은 "좁은 문"이기 때문에, 우리는 몸을 굽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높은 생각들은 꺾어져야 한다. 아니, 오히려 그런 생각들을 없애 버려야 하며,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하며, 세상과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기꺼이 버려야 한다. 그 문은 누구에게나 "좁은 문"이다. 어떤 사람들, 즉 부자라든지 오랫동안 종교에 대항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좁은 문이다. "문은 좁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이 문은 닫혀지거나 잠겨지거나 화염검으로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문이 빨리 닫혀질 것이다(마 25:10).
둘째, "그 길은 협착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자마자. 가나안 땅에 있지 않은 것처럼 "좁은 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우리가 천국에 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광야를 통과해야만 하며, 또한 "매우 넓으면서도" 길을 협착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계명으로 둘러싸인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 자아는 부정되어야 하며, 육신은 억제되어야 하며, "오른 눈과 오른 손"과 같은 부패성향은 극복되어야 하며, 매일의 유혹은 제지되어야 하며 우리의 성향을 거스리는 의무는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려움을 견디어야 하며, 역경과 더불어 싸워야 하며, 모든 일을 살피고 매사에 신중을 기하면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많은 환란을 통과해야만 " 한다. 이 길은 "고통의 길"(o`doj teqlimme,nh)이며 주위가 가시로 둘러싸인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이 길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시로 완전히 차단시킨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니고 다니는 육신과 우리 속에 남아 있는 부패성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의무의 길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이해와 이지가 점점 정상적이 됨에 따라 이 길은 열리고 확대될 것이며 더욱 더 즐겁게 될 것이다.
셋째,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므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을"것은 매우 당연하다.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그 곁을 지나거나 통과한다. 그들에게는 그것을 찾는 것이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현재 그대로 만족하며, 그들의 길을 돌이킬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쳐다보기는 하지만 그 길을 회피한다. 그들은 한정되고 제한 받는 것을 싫어한다. 지옥에 가려고 하는 자에 비하면 천국에 가려고 하는 자는 너무도 적다. 이들은 포도를 거두어들일 때 남는 이삭과 같이 남은 자 또는 소수의 무리들이며, 방주에서 구원받은 여덟 식구와 같은 자들이다(벧전 3:20), In vitiaalter alterum trudimus; Quomodo ad salutem revocari potest, quum nullus retrahit, et popjlus impellit- 즉 악의 길에도 사람들은 서로 앞장서려고 한다. 군중이 서로 밀어낼 때에 어떤 외부의 제지하는 힘이 없다면, 그 누가 안전한 길로 들어설 수 있겠는가? (Seneca, Epist. 29) 이 글은 많은 사람을 실망케 한다. 그들은 홀로 있기를 싫어한다. 그들은 이것에 걸리는 대신에 오히려 지극히 적은 수효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한다면 나 하나쯤은 더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는 이 길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며," 즉 영혼의 생명인 하나님의 은혜로 위로를 주며, 또한 이 길은 영원한 행복, 즉 우리의 갈 길을 다 간 후 마지막 종착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 동안 걸어온 모든 어려움과 불편에 대해 만족케 할 소망에로 인도한다. 생명과 경건은 함께 놓여 있다(벧후 1:3).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고" 힘들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한 시간이면 모든 것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2. 이 모든 것을 감안해 볼 때 우리들 각자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관심사와 의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분명히 진술되어 있다. 생명과 죽음, 선과 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둘 다 길과 종점을 가지고 있다. 자 이제 이 문제를 온전히 이해하고 편견에 치우치지 말고 신중히 고려한 다음, 오늘 네가 어느 길을 가야할지를 스스로 선택하라. 아니 문제는 논란의 여지없이 너무도 자명(自明)하다. 지각이 있는 사람이 그가 비록 아무리 둔하다고 하여도 교수대로 가는 길이 매우 편하고 재미있다고 해서 그 길로 들어설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한 궁전과 면류관에 이르는 길이 거칠고 더럽다고 해서 그것을 거부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영혼이 부패하고 범죄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체하지 말라.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신실하고 꾸준한 기도와 노력으로써 그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아니, 크고 유효한 문이 열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 없이 이 문을 들어가거나 계속적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며, 그 은혜를 찾고 이것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부족 됨이 없을 것이라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 회심은 어려운 일이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만일, 우리가 애써 노력하면 이 회심은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눅 13:24).
거짓 선지자들을 삼갈 것(마태복음 7:15-20)
여기에서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경고가 기술되어 있다. "선지자"는 원래 장차 올 것을 예언하는 임무를 가진 사람들이다. 구약에는 아무런 보증도 없이 선지자인 체하다가 결국 그들의 허위가 드러나 거짓 선지자로 판명된 시드기야(왕상 22:11)와 또 다른 시드기야(렘 29:21)와 같은 자들이 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또한 백성들에게 그들이 해야할 의무에 대해 가르쳤다. 따라서 여기에 언급된 "선지자들"은 거짓 선생들이다. 참된 선지자이시며 "하늘로부터 온 선생"이신 그리스도는 그의 밑에서 배운 제자들을 널리 내 보내려고 하시면서 야바위꾼(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건전한 교훈을 가지고 영혼을 치유하는 대신에(물론 겉으로는 그렇게 하는 척하지만) 그들에게 해독을 끼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거짓 선생들이며 "거짓 선지자들"이다.
1. 이들은 거짓 위임장을 제출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선지자"로 세우심을 보장받고 지시 받은 것처럼, 또는 마치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처럼(실상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행세하는 자들이다. 비록 그들의 교리가 참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거짓 선지자로 알고"주의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 사도들은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계 2:2)이며, 이런 자들이 곧 "거짓 선지자들"이다. "계시로 가장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하나의 어리석음이 허용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지 않도록 충분한 증거가 없이는 그들을 인정하지 말라."
2. 이들은 종교에 필수적인 문제에 대해 거짓된 교훈을 가르치며 또한 "예수 안에 있는 진리," 즉 "경건에 따른 진리"와 정반대가 되는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이다. 전자는 "거짓" 곧 위선 된 "선지자"(pseudo-propheta)의 적절한 개념으로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후자는 전자와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거짓된 색채를 내거는 자들이며, 고의적으로 가장하여 더욱 더 성공적으로 진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자,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경계하라. 의심해 보라, 시험해 보라. 만일 그들의 거짓과 허위를 발견하였거든 그들을 피하라. 그들과 일체의 교제를 가지지 말라. 이러한 시험에 대하여 너희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 이 시험은 개심 하려고 할 때 끼어 들어와 평상시보다 더 큰 힘과 위엄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빛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되살아날 때에 사탄과 그 부하들은 매우 분주하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Ⅰ. 이 경고를 하는 선한 이유가 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왜냐하면 그들은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이기 때문이다"(15절).
1. 우리는 이들을 매우 조심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위선은 매우 완벽하고 그럴 듯하기 때문이며, 만일 경계를 철저히 하지 않는다면 이런 식으로 우리를 속이려 들것이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관습대로 수수하고 조잡하며 가공되지 않은 "양의 옷"을 입고 나온다. 그들은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을 입는다"(슥 13:4). 칠십인역은 엘리야의 겉옷을 h` mh,loth(양의 가죽으로 만든 겉옷)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는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의 옷차림(눅 20:46)과 같이 사람의 겉모양이나 옷차림에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을 비유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양으로 가장하여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겉으로는 매우 순결하고 흠이 없으며 겸손하고 온유하고 유용하고 모든 좋은 것을 다 겸비한 것처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꾸며 입은 옷 때문에 쉽사리 양들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으며, 이전에 알고 있던 악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것이다. 그들과 그들 자신은 거룩과 헌신으로 철저히 위장되고 가리워 진다. 사탄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 그 원수는 "새끼 양 같이 두 뿔"(계 13:11)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의 얼굴"(계 9:7, 8)을 하고 있다. 미혹하는 자들의 말과 태도는 "털과 같이 부드럽다"(롬 16:18; 사 30:10).
2. 이렇게 가장하기 때문에 그들의 계획은 매우 악하고 해로운 것이다. 즉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인 것이다. 모든 "위선자들"은 양의 옷을 입은 "염소'이지만,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이다. 양이 아닐 뿐 아니라 가장 악한 양의 원수인 것이며, 그들이 오는 것은 양을 찢어 삼키고 "흩어버리기" 위함이며(요 10:12), 또한 양들을 하나님과 서로들 사이에서 내쫓아 꾸부러진 길로 몰아넣기 위함인 것이다. 우리를 거짓으로 속여서 진리를 빼앗고 불법으로 우리를 소유하려고 하는 자들은 결국 어떻게 위장을 해서라도 우리의 영혼에 불행을 초래하려고 계획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그들을 "흉악한 이리"라고 불렀다(행 20:29).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노략질하며, "자기의 배만 섬기며"(롬 16:18), 너희를 먹이로 삼고, 너희로부터 이익을 얻으려 한다. 속는다는 것은 매우 쉽고도 위험한 일이므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해야만 한다.
Ⅱ. 이 경고에 의거한 유익한 규칙. 우리는 "범사에 헤아려야"(살전 5:21)하며 "영들을 시험해야 한다"(요일 4:1). 여기에는 시금석이 있으니, 곧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되는 것"(16-20절)이다.
1. 나무의 열매를 보아서 그들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무의 껍질이나 잎, 또는 가지가 뻗어나간 것만을 보고서는 이들이 어떤 나무인가를 알 수 없으며, 다만 그것들이 맺는 "열매를 보아 그들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열매는 나무에 따라 맺는다. 사람들은 그들의 고백에 있어서 자신의 본성에 강조를 둘 수도 있고, 또는 자신의 내적 원리와는 모순될 수도 있지만, 그들 행동의 경향과 흐름은 그들과 일치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나무와 열매의 일치에 대하여 강조하고 계시는데, 그 가르치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만일 나무가 어떤 나무인가를 알면 어떤 열매가 열릴 것인가를 추측할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려고 하지 말라. 이러한 열매를 맺는 것은 그 나무들의 본질상 불가능한 것이다. 가시에 사과가 꽂힐 수는 있으며, 또한 포도송이가 매달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쁜 사람에게서도 선한 진리와 언행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러한 선행이 계속적으로 유지되지 않음을 이내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유시할 수 있다.
[1] 부패하고 사악하고 불결한 심령은 죄와 더불어 생겨난 쓸모 없고 귀찮고 결국 불에 타버릴 가시나무가 엉겅퀴와 같다.
[2] 선행은 포도나 무화과와 같이 "좋은 열매"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
[3] 이 "좋은 열매"는 "더러운 것에서 깨끗한 것이 나올 수" 없듯이 악인에게서 기대될 수는 결코 없다. "악한 재물"은 "악한 것"을 낼 수밖에 없다.
(2) 이와 정반대로, 만일 열매가 어떤 종류의 열매인가를 안다면 자연히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때에 이러한 열매는 저절로 맺어진 그 본래의 열매라는 것, 즉 계속적으로 많은 열매를 맺고 산출하는 열매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특수한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일상적인 대화나 흔히 하는 행동, 특히 자유스럽게 나타나는 행동에 의해 알 수 있는데, 이것들은 대개 그들 자신이나 적어도 외부적인 동기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다.
2.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 말씀이 적용됨.
(1) 두려움과 위협의 방법으로 적용됨(19절).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히느니라." 세례 요한도 이와 똑같은 말을 하였다(마 3:10). 물론 그리스도는 동일한 이 말씀을 다른 말을 갖게 할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는 세례 요한이 그보다 앞서 말했던 동일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자신의 명예를 손상시킨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는데 자부심을 가져서는 안 도며, 또한 사람들은 고상한 것만을 들으려고 열을 올려서는 안 된다. 동일한 것을 말하고 쓰는 것은 그렇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할 수 있다.
[1] 열매를 맺지 않는 쓸모 없는 나무에 대한 묘사. 이들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들이다. 비록 열매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좋은 열매"가 아니라면(비록 좋은 열매를 맺었다고 하더라도 그 수단이나 방법, 목적이 좋은 것이 아니라면), 그 나무는 쓸모 없는 나무로 간주될 것이다.
[2] 쓸모 없는 나무의 운명. "그들은 현재, 아니 앞으로 분명히 찍혀 불에 던지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땅만 버리는 메마른 나무를 다루듯이 그들을 다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불쾌의 표식으로서 그들을 점검하실 것이며, 역할과 선물들을 빼앗음으로써 그들을 벗길 것이며, 죽음으로써 그들을 찍어버릴 것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진리의 풀무로 바람을 불어넣고 쓸모 없는 나무들을 땔감을 삼는 지옥불에 던져 넣을 것이다. 이 말씀과 에스겔 31장 12, 13절, 다니엘 4장 14절, 요한복음 15장 6절을 비교하라.
(2) 시험의 방법으로 적용됨.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1] 그들의 인격과 언행, 대화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옳은가 그른가를 알려고 한다면 그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관찰해 보아라. 그들의 행위는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입증해 줄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율법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교만하고 탐하며, 거짓되고 억압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들과 이들의 "누룩"에 대하여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막 12:38). 만일 사람이 자칭 선지자라고 주장하면서 자기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꾸며댄다면, 그들의 위선은 머지않아 백일하에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이며, 그들이 무엇을 고백하든지 간에 "저희의 신은 배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이다(빌 3:18, 19).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그로 말미암아 보내심을 받은 자들도 아니며, 그들의 생활은 자신들이 불결한 영에 의해 인도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화를 질그릇 속에 넣어 주시되 이와 같이 부패한 그릇 속에는 넣어 주지 않으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지만, 그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 그들의 교훈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곧 선지자로서의 열매이다. 이것은 그들의 교훈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한가지 방법은 될 수 있다. 그들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어떻게, 무엇으로 자기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어 가려는가? 만일 그 가르침이 "하나님에게" 속하였다면 엄숙한 경건과 겸손, 자비, 거룩, 사랑과 그 밖의 기독교인이 구비해야할 은혜 등을 장려하고 촉진시키려 할 것이지만, 그 반대로 그 가르침이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선지자들이 전파한 교훈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만하고 세상적이며 투기적으로 만들며 그들의 대화를 산만하고 부주의하게 하며, 또한 불의하고 무자비하고 당을 짓고 공중적인 평화를 교란시키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만일 이 교훈이 육적인 방탕을 만족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나 가족들이 "좁은 길"의 엄격한 규율에 의하여 지배받는 것으로부터 떼어놓는다면 우리는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갈 5:8)는 것을 쉽게 결론 내릴 수가 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다"(약 3:15). "믿음과 착한 양심"은 함께 결합되어야 한다(딤전 1:19; 3:9).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논쟁을 일으키는 의심스러운 교리"는 신앙 고백에 의한 확실한 은혜와 책임에 의해 시험되어야만 한다. 죄로 인도하는 그러한 견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그 열매로 알 수" 없다면 시금석이나 율법, 간증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즉 그들이 그 규율에 따라 말하고 있는가를‥‥
결론 (마태복음 7:21-29)
여기에는 지금까지의 길고도 탁월한 산상 설교의 결론, 즉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해야할 절대 필요성을 보여 주기 위한 의도가 기술되어 있다. 이 부분은 마치 못을 확실한 위치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그 끝을 두드려 구부리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이 말씀들을 그의 제자들에게 들려주었는데, 제자들은 그가 설교하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그의 발 밑에 앉아 있었으며 그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 다녔다. 만일 그가 사람의 영광을 얻으려고 하셨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가 세우려고 오셨던 종교는 말에만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이며(고전 4:20), 따라서 더욱 필요한 것이 있다.
Ⅰ. 예수님은 여기에서 외부적인 신앙 고백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 고백과 일치하는 회심이 없다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평범한 충고로서 보여 주고 있다(21-23절). 모든 심판은 우리 주 예수님에게 위임된다. 즉 열쇠는 그의 손에 쥐어지며, 그는 삶과 죽음의 새로운 한계를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에 따라 사람을 심판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 구절은 그 능력에 의한 엄숙한 선언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규정된 그리스도의 법(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은혜와 영광의 왕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시편 15편 1절에 있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즉 "주의 장막(전투하는 지상 교회)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승리하는 천상 교회)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이다.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사실들을 보여 주고 있다.
(1)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주님이라는 호칭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인으로 인정하거나, 또는 그를 지칭하거나 고백할 때 사용되는 칭호이다.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사람과 대화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여, 주여"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그러한 분이시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13:13). 그러나 과연 이렇게 부르는 것이 우리를 천국까지 충분히 데려갈 수 있는가? 이러한 형식적인 한 마디가 그렇게 보상될 수 있을까? 또한 마음을 아시고 요구하시는 그분이 겉모양만 보고 그렇게 쉽사리 일을 처리해 버릴 수 있겠는가? 사람들 사이에 오고 가는 인사는 단지 상대방에 대해 서로가 지키는 일종의 예의에 불과하며 참된 봉사로 드려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경우와 어떤 연관을 지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주여, 주여"라고 기도하는 것은 겉으로 끈덕지게 조르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마음속의 생각이 외부로 나타난 표현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고 기도하거나 또는 진지하게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거나 그것을 담대하게 고백할 때 "주여, 주여"라고 부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면서" 가증 되게 부르지 말라는 뜻이다.
(2) 실제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인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에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은 복음에서의 그의 뜻이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또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의 뜻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화되는 것도 역시 그의 뜻"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면서,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부르던 자들처럼 그를 조롱하게 될 것이다. 말하는 일과 행하는 일은 별개의 일이지만 종종 대화에서는 구분된다. 예를 들면 "나는 가겠소이다"라고 말하고는 실제로 가지 않은 경우가 있다(마 21:30).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계명에서 두 가지 일을 "함께 결합시키고" 있다. 그 둘을 "떼어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생각을 하지 말라.
2. 이 율법의 엄격함에 거스려 순종 대신에 다른 것들을 제시하는 외식가의 탄원(변명) (22절). 이러한 탄원은 모든 사람들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그 날에," 즉 그 큰 심판의 날에 있게 될 사실이라고 추측된다. "그날에는 모든 마음의 비밀이 드러날"것이며 또한 남은 자 가운데서 죄인들의 헛된 소망을 현재 지탱시켜 주는 숨겨진 위선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변명의 강점을 알고 계신다. 그러나 그것은 한낮 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들의 약점을 숨기려해도 심판 날에는 하나도 숨겨질 수 없으며, 또한 이것을 구실로 삼아 판결을 멈추게 하거나 연기시킬 수는 더구나 불가능하다. 그들은 매우 끈질기게 "주여, 주여"라고 탄원하며, 큰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호소하고 있다.
(1)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한 것을"알지 못하시나이까? 아마 그것은 사실일는지 모른다. 발람과 가야바는 예언에 좌우되었으며, 사울은 "선지자들"중에서 예언을 하였다(역주:삼상 10:11). 그러나 그것이 그를 구원하지는 못하였다.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소용되기 때문에 임시 변통하여 이 이름을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어떤 사람은 전도자가 되어 목회의 은사를 받고 또한 목회로 외적인 부르심을 받아, 혹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사악한 사람일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다른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 자신은 못 들어갈 수도 있다.
(2)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낸 것"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아마 그것도 사실일는지 모른다. 가롯 유다도 "귀신을 쫓아내었지만," 그러나 그는 "멸망의 자식"이었다. 오리겐은 말하기를, 그의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 널리 유행되었으므로 때로 사악한 기독자들이 함부로 이 이름을 도용할 때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내어쫓을 수" 있을지도 모르나 오히려 그 자신이 마귀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 그 자신이 마귀가 될 수도 있다.
(3)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것"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의로운 신앙이 없는 곳에도 신앙의 기적은 있을 수 있다. "사랑과 순종으로 역사 하는 믿음"이 없는 곳에도 물론 신앙의 기적은 있을 수 있다. 방언이나 병고치는 은사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은 참된 거룩과 성화이다. 은혜와 사랑은 "산을 옮기는 것이나,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것"보다 더 "탁월한 방법"이다(고전 13:1, 2). 은혜는 기적을 행하지 않아도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갈 수 있지만, 기적을 행한다고 해서 은혜 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이 일을 행할 때 그들의 마음이 의지하고 신뢰한 것은 그들의 경이감이었다. 박수인 시몬은 이적에 놀랐으며(행 8:13), 따라서 동일한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하여 돈을 주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은 변명할 만한 많은 선행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경건과 자비의 선행을 많이 행한 것처럼 꾸밀 수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것이 그들의 설명에 있어서 불순종으로 시종일관하는 동안 전혀 쓸모 없는 "많은 이적과 권능"을 행한 것보다 더 잘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기적은 끝났고 또한 그들의 이러한 변명도 끝났다. 그러나 아직도 육적인 마음들은 그들 자신의 근거 없는 소망을 이와 같이 헛된 버팀대로 띠 받치면서 스스로 자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자신들이 천국에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신앙 고백자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으며, 금식을 하며, 자신을 베풀며, 교회에서 우두머리이기 때문이다. 마치 이러한 일들이 그들의 지배적인 교만과 세속적이고도 호색적인 것,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결핍을 보상하고도 남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벧엘을 의뢰하였고"(렘 48:13), "성산을 인해서 교만해진 것"이다(습 3:11). 또한 그들은 "자신이 여호와의 전"(렘 7:4)이라고 자랑을 했다. 우리는 많은 무리들과 같이 "우리의 오른 손의 거짓말로 스스로 속이거나 영원히 멸망하지 않기 위하여 외부적인 특권이나 행위에 머무는 것을 조심하자."
3. 어리석은 변명에 대한 기각. 율법 제정자(21절)는 바로 여기에 기록된 율법에 의한 심판자(23절)이다. 그는 변명 따위를 공개적으로 기각시키실 것이다. 그 때에 그는 마치 재판장이 판결을 내리듯이 엄숙하게 그들을 향하여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할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1) 무엇 때문에, 무엇에 근거하여 그는 그들과 그들의 변명을 묵살시키셨는가?- 그 이유는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아무리 경건한 자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불법을 행하는 자"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은 "더 큰 형벌"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고백이라는 외앙적인 외투에 감추어진 은밀한 죄의 소굴은 외식가의 파멸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들의 범죄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므로 자기들에 관해 아무리 변명을 늘어놓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한낮 헛된 노력에 불과하고 말 것이다.
(2) 이 사실은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곧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이다. "나는 너희를 내 종으로 인정해 본 적이 없다. 아니, 너희가 내 이름으로 예언했을 때나, 신앙 고백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나, 또는 최고의 칭찬을 받을 때에 내 종으로 여겨본 일이 결코 없다." 이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만일 주님께서 "주께서 저를 아신 것같이" 그들을 아셨다면, 또한 그들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시고 사랑하셨다면 그는 "끝까지"그들을 아시고 인정하시고 "사랑하셨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그들을 알지 못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가롯 유다에 대해 미리 아셨던 것처럼 언제나 그들을 외식가나 마음이 부패한 자로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손님들을 필요로 하셨을까? 그가 육신으로 오셨을 때는 죄인들을 그에게로 부르셨으나(마 9:13),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죄인들을 그에게서 내어쫓으실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 "그에게로 나아 오려고 하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기 위해 "그에게서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그것이 곧 지옥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죄 받은 자가 그리스도와 그의 중재로부터 모든 은혜의 소망이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 마는 비참한 처지의 근거가 된다. 주님은 황량하고 노골적인 신앙 고백보다도 그리스도의 봉사에 더 진력하지 않는 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이며, 또한 큰 심판날에 그들을 인정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사람은 가장 높은 소망의 정상에서 가장 낮은 비참의 심연으로, 천국문 곁에서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라! 이 말씀은 모든 기독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귀신들을 내어쫓고" 기적을 행하였던 전도자도 "불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내어버림을 당하였다고 한다면 하물며 우리에게서 이러한 불법이 발견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분명히 이와 같은 처지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때에 신앙 고백은 사람의 죄악 된 행위와 방종을 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불법에서 떠나라."
Ⅱ. 그리스도는 비유를 통하여, 우리가 이러한 말씀들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듣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만일 이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우리의 행위는 축복을 받는다"(24-27절).
1.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두 종류로 구분되어 있다. 즉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이다. 그리스도는 지금 두 종류의 사람들이 혼합되어 있는 무리들에게 말씀하셨으며, 따라서 그들을 "두 종류의 사람으로 각각 나누고" 계시다. 주님은 이와 같은 일을 "모든 민족들이 다 그 앞에 모이게 되는 큰 심판의 날"에 행하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여전히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하늘에서 말씀하시며, 또한 교역자들과 섭리들을 통하여 그의 말씀을 듣고 있는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1) "그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그 수효가 비교적 적기는 하지만 이러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가까스로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정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말씀을 듣는 것"도 일종의 자비이다.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17). 그러나 만일 우리가 들은 것을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헛된 은혜를 받는"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행하는"것은 자의적으로 그가 금지하는 죄들을 삼가며, 그가 요구하는 의무들을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 말과 행동, 마음의 기질과 생활의 경향 등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일치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곧 그가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 즉 그가 제정하신 율법뿐만 아니라 그가 제시하신 진리들은 우리로 말미암아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말씀들은 "우리의 눈에 "만 아니라 "우리의 발"에 등불이며, 우리의 판단을 정돈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개조시키기 위해 마련된다. 만일 우리가 그 말씀에 따라 생활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그 말씀을 믿지 못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거나, 듣고 기억하거나, 듣고 말하거나 반복하거나 논의하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으며, 그 말씀을 "듣고 행하여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듣고 행하는 사람만이 복되며"(눅 11:28; 요 13:17), 또한 그리스도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마 12:50)이 될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가 있다. 그들의 신앙은 단순히 듣기만 하는 데 있으며, 그 이상은 더 나가지 않는다. 곱사등이인 어린아이와 같이 그들의 머리는 공연한 생각과 미숙한 의견으로 꽉 차 있지만 그들의 뼈마디는 무기력하고 힘겨 우며 늘쩍지근하다. 그들은 선행을 베풀 때는 억지로 약간 움직거리거나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의를 행하였던" 백성과 같이 "하나님의 길을 알려고"하는 것처럼 그의 "말씀을 듣기는 하나" 그 말씀을 "행하지는" 않는다(겔 33:30, 31; 사 58:2). 그들은 그 스스로가 속이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미가가 주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는 않았지만 한 레위인을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해서 그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여겼던 것과 매 한 가지이다. 씨는 심기웠으나 돋아나지는 않는다. 그들은 말씀의 유리를 통하여 자신들의 흠점을 발견하지만 그것들을 씻어내지는 않는다(약 1:22, 24).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기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들음이 순종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면 우리의 불순종을 더욱 악화시키는 촉매제의 역할을 할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단지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천국가는 길의 중도에 주저앉아서 그들의 여정을 끝까지 마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반 정도만이 피가 섞인 그리스도의 형제이며, 우리의 법이 이러한 것을 물려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2. 여기에서 이 말씀을 듣는 두 종류의 사람들을 두 건축자로 비교함으로써 그들의 참된 성격과 상태가 잘 묘사되어 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었으므로" 태풍에서도 견고하였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지었으므로" 결국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1) 이 비유의 일반적인 의도는 우리의 영혼과 내세에 대해 확고한 건축 공사를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려는 것이며, 산상에서 친히 설교하신 그의 말씀들은 전적으로 실천적이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그들의 욕정과 혈통에 어려운 것으로 생각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 말씀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야 한다"(딤전 6:19). 어떤 사람들은 "좋은 터"를 "좋은 속박"이라고 읽는다. 이 속박은 복음적인 의미에서 볼 때 구원을 확실케 해 주는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고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추측에 실제로 구원을 가져다주는 "좋은 속박"인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의 발 "곁에 앉았던" 마리아와 같이 "좋은 편"을 다짐하였다. "주여, 말씀하소서. 당신의 종이 듣겠나이다." (2) 이 비유의 특수한 부분들은 여러 가지 좋은 교훈들을 가르쳐 준다.
[1] 우리들 각자에게는 지어야 할 집이 있으며, 그 집은 하늘나라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소명과 선택을 확신하는 일"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다짐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늘 나라의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진리를 확고히 하는 일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실패하여 넘어질지라도 영원한 거주지로 영접될 것이다"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스스로 다짐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결코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생각과는 멀리 동떨어진 일이다. 그들은 마치 이 땅위에 언제나 존재하게 될 것처럼 이 세상을 위하여 집을 짓지만 다른 세상을 위해서는 집을 지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신앙 고백을 하는 모든 자들은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궁극적으로 하늘나라를 획득할 수 있으며, 잠시동안이나마 하늘 나라에 대한 확고한 근거를 가진 소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를 찾으려고 고백한다.
[2] 이 집을 짓는 데 있어서 우리를 위해 마련된 "반석"이 있는데, 이 반석은 곧 "그리스도"이다. 그는 "기초로 놓여졌으며 능히 이 터 이외에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다."(사 28:16; 고전 3:11). 그는 "우리의 소망"(딤전 1:1)이시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죄의 용서, 그의 성령의 능력을 위해, 우리의 성품의 성화와 그의 간구의 유효를 위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매입하신 모든 좋은 것들의 운반을 위해 하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그리스도의 공로의 완전한 분량 위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그는 "복음에서 우리에게 알려지시고" 주어지신 것과 같이 우리의 모든 불만을 시정해 주시고 우리의 처지에 꼭 필요한 모든 것을 응답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따라서 그는 "최고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이 반석 위에 세워지며," 모든 믿는 자도 역시 그와 같다. 그는 "반석"과 같이 강하고 부동적(不動的)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그에게 내어 맡길 수 있으며, "우리의 소망이 수치를 당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3]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이 반석 위에 소망을 두는 남은 자가 있다. 또는 이것이 그들의 지혜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믿음의 순종은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왜냐하면 "그를 순종하는 자들에게나 그들에게만" 그리스도는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자들은 주님을 참으로 그들의 왕이신 구세주로 인정하였으므로 그의 거룩한 종교의 모든 규칙들에 적합(순응)시키는 것이나, 그 점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움과 열납됨을 위해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시키는 것이나 또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에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조심하는 자들이다. "반석 위에" 세우는 것은 조심과 수고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소명과 선택"을 확신하려고 하는 자는 모름지기 정성을 들여야 한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일을 마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세우기를 시작하는 사람이다(눅 14:30). 그러므로 견고한 기초를 세우는 것이다.
[4] 하늘 나라로 가기를 희망한다고 고백하지만 이 "반석"을 무시하고 소망을 "모래 위에" 세우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러한 일은 많은 수고를 하지 않아도 능히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은 모래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소망을 세상적인 번영 위에 세우는데, 이것이 마치 하나님의 은혜의 표식이나 된 것처럼 여긴다(호 12:8). 또 어떤 사람들은 외적인 신앙 고백이나 그들이 얻은 특권, 신앙 고백의 내용대로 일을 성취하여 이로 말미암아 얻어진 명성 위에 그들의 소망을 세우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기독자로 불리우며 세례를 받았고 교회에 다니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기도를 드리며 그 누구도 해하지 않으며, 설령 그들이 망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많이 도우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들이 걸어다니는 그 자신의 불빛이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에 확신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하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위한 기초로 사용되기에는 너무도 약함 모래들이다.
[5] 우리의 소망이 기초된 것을 시험하려고,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가를 시험하려고"(고전 3:13),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시려고"(합 3:13) 불어오는 태풍이 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딛힐 것이다." 이 세상에는 종종 시련이 있다. "말씀 때문에 시련과 박해가 일어날"때 말씀을 듣기만 한자와 말씀을 듣고 행한 자 사이가 분명히 구별될 것이다. 우리의 소망을 이용할 필요가 있을 때가 올 것인데, 그때는 그 희망이 옳은지 확고한 근거가 있는지의 여부가 시험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나 심판이 오고 태풍이 몰아쳐 올 때에는(또한 이것들은 분명히 앞으로 일어날 것이다) 결코 지금처럼 조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때에는 이 소망들 이외의 것들은 우리를 실망시킬 것이며, 그때에 소망이 있었다면 그들은 영원한 성취에로 돌려질 것이다.
[6]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이러한 소망들은 견고히 설 것이며, 태풍이 불어올 때도 집 지은 자를 굳게 세울 것이다. 그들은 버림받음과 불안에서 그의 보호하심을 입을 것이다. 그의 고백은 시들지 않을 것이며, 그의 위로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확실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이" 그의 힘과 노래가 될 것이다. 그가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마지막 날에 이러한 소망들은 죽음의 공포와 무덤을 제거할 것이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하여 기꺼이 그를 인도할 것이며, 심판자에 의해 인정될 것이며, 큰 심판날에 시험을 견딜 것이며, 무한한 영광으로 관을 쓸 것이다.(고후 1:12; 딤후 4:7, 8).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에게 복이 있으리로다"(마 24:26).
[7]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것에 기초를 세우는 어리석은 건축자들의 소망은 태풍이 부는 날 틀림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며, 고난에서와 죽을 때, 또한 심판의 날에 참된 위로와 만족을 가져올 수 없을 것이며, 환란을 당할 때 이단적인 유혹에 대처할 아무런 방비도 갖추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에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욥 27:8).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욥 8:14, 15). 이 집은 건축자가 그 집을 가장 필요로 할 때, 그것이 자신에게 피난처가 될 것이라고 기대할 때 태풍에 무너져버릴 것이다. 또한 이 점은 다른 집을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을 때, 즉 "사악한 사람이 죽고 그의 기대가 소멸되었을 때" 무너지며, 그가 성취되었다고 생각할 무렵에 "무너지는데 그 무너짐이 심하다." 건축자에게 이 사실은 큰 실망이 아닐 수 없다. 그 수치와 손해는 실로 막대한 것이다. 높은데 소망을 둔 사람은 일으킴을 받았지만 낮은 데 소망을 둔 사람은 무너져 버릴 것이다. 형식적인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의 최후는 이렇게 비참한 것이다. 가버나움의 멸망이 이 사실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Ⅲ. 마지막 두 구절에는 그리스도의 설교가 청중에게 끼친 인상에 대한 모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너무도 탁월한 설교였으며, 그는 아마 여기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을 설교하셨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가 친히 입으로 증거 하신 은혜로운 말씀들은 그것을 듣는 청중들로 하여금 무한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한층 더 위엄 있는 말씀으로 돋보이게 했을 것이다.
1. "그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그러나 한 가지 두려워한 사실은 그 무리들 중에서 이 말씀을 듣고 그를 따르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단지 그 때에 그들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었다. 여기에서 유의해야할 것은 사람들이 좋은 설교라고 칭찬은 하지만 아직도 무지와 불신앙에 머물려 있을 수 있으며, 설교 말씀에 놀라워하지만 아직도 성화 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2.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기관들은 그 어떠한 선생들보다 권위가 많은 것처럼 행세했으며, 획득이 가능한 모든 외적인 유익들을 소유한 것처럼 꾸며댔지만 실상 그들의 설교는 천박하고 시시하고 무미건조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설교한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자들처럼 말하였다. 그들이 행한 말들은 어떤 생명력이나 힘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학생이 공부 시간에 어떤 과(課)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치 재판장이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그는 실로 "권위 있는 어조로 말씀하셨다."(dominari in conscionibus). 그의 교훈은 율법이었고 그의 말씀은 계명이었다. 그리스도는 산 위에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서기관들보다 더 참된 권위를 보여 주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의 성령으로 영혼에 권위 있게 가르치셨다. "빛이 있으라"고 그가 말씀하시니 "빛이 있으니라."
첫댓글 후원을 해주셔야 카페가 계속해서 운영됩니다
그렇지만 후원참여는 전혀 안되고 있습니다....
월말입니다 낼것도 많고 월세도 내야합니다
후원은 카페지기에게 큰힘과 용기가 됩니다
치료약값이 필요합니다 많이 힘이드네요...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먹을것 반찬거리도 사야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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