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나부 소생이라 하여, 관나 부인이라고 붙여진 그녀, 머리가 아홉 자(최소 200CM이상)나 되었다고 한다. 중천왕은 이를 총애하여 소후로 삼으려고 했는데, 왕비가 이를 걸고 넘어진 것이었다. 위나라가 후궁을 뽑는다고 하는데, 관나 부인을 보내자고, 그러자 관나부인은 두려움에 떨며 왕비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고 하며 왕비를 참소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중천왕은 관나 부인을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기록이다.
내용을 요약한다면, 즉 관나 부인이 왕비를 투기하여 몰아내려다가 죽음을 당한 것처럼 기술했는데, 사실은 정반대 얘기일 것이다. 동천왕의 패배 이후 고구려의 왕권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왕후 세력이 강화되었을 것이다.
왕은 왕의 절대적인 권한이라고 할 수 있는 후비 책봉마저도 왕비에게 제제를 받을 정도로 약화된 상태에서 관나 부인이 감히 왕비를 쫓아내려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었다. 결국 관나부인의 죽음은 왕비세력에 의한 철저한 정적 숙청으로 벌어진 사건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천왕이 죽은 후 서천왕이 왕위에 즉위했다. 서천왕은 중천왕 때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주력했다. <삼국사기> 서천왕 본기에 보면 사슴을 잡았다는 기록이 두 군데 있는데, <삼국사기>가 은유법을 잘 쓰는 편이기 때문에 당시 왕권강화를 통한 신하들의 대숙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 고이왕 조를 보자.
"3년(236) 겨울 10월에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
고이왕은 자신의 조카인 사반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간 것으로 되어있다. 삼국사기에는 사반왕이 어려서 정치를 못함으로 고이왕이 즉위한 것처럼 말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사비왕(沙沸王; 혹은 사이왕沙伊王)은 구수왕(仇首王)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보살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즉시 이를 폐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세웠다. 혹은 말하기를, 낙초(樂初) 2년 기미(己未)에 사비왕(沙沸王)이 죽고 고이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점을 본다면, 당시 고이왕이 단순히 사반왕을 대신하여 집권한 것이 아니라, 사반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고, 이를 반발한 사반왕 세력 40명을 제거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천왕 조에 이것이 적용될까? 서천왕 조를 보도록 하자.
"7년(276) 여름 4월에 왕은 신성(新城)<혹은 신성은 나라 동북쪽의 큰 진[大鎭]이라고도 하였다.>으로 가서 사냥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가을 8월에 왕은 신성으로부터 돌아왔다. 9월에 신비로운 새[神雀]가 궁정에 모여들었다."
"17년(286) 봄 2월에 왕의 아우 일우(逸友)와 소발(素勃) 등 두 사람이 반역을 꾀하여,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 온탕으로 가서 자기 무리들과 무절제하게 놀며 패역한 말을 하였다. 왕은 재상을 시켜준다고 거짓으로 이들을 불러, 그들이 오자 힘센 장사를 시켜 잡아 죽였다."
"19년(288) 여름 4월에 왕은 신성으로 행차하였다. 해곡(海谷) 태수(太守)가 고래를 바쳤는데 [고래의] 눈이 밤에 빛이 났다. 가을 8월에 왕은 동쪽으로 사냥 나가서 흰 사슴을 잡았다. 9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겨울 11월에 왕은 신성(新城)으로부터 돌아왔다."
서천왕이 의외로 신성을 많이 방문했는데, 당시 신성이 서천왕 세력의 군사적 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슴을 잡았다는 것은 당시 반역 세력에 대한 숙청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본다면, 17년에 왕의 지나친 반대 세력 제거에 반발하여 일우와 소발이 반란을 일으켰고, 남은 세력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