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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기 넘치는 도시
마드리드 (Madrid)
마드리드는 이베리아 반도 중앙, 표고 655m의 메세타(고원)에 자리잡고 있다.
마드리드는 9세기 후반 무하마드 1세가 이슬람 정복지의 북쪽을 지키는 성채로 건설한
'마주리드'라는 이름의 작은 취락이었으나, 1561년에 펠리페 2세가 똘레도에서 마드리드로 궁궐을 옮긴 후,
전세계적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는 스페인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스페인에서 마드리드는 비교적 새로운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마드리드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라면 역시 스페인 회화의 전당 프라도 미술관을 비롯한 3대 미술관에서
훌륭한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이다.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와 함께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미술관이다. 1819년 페르난도 7세가 역대 왕실의 소장품을 한곳에서
공개하기 위해 세웠으며, 개관 당시에는 311점에 불과했던 전시품은 계속된 왕실의 미술품 수집과
귀족들의 기증으로 회화 9000점, 그 외 작품까지 합쳐 3만 점에 이른다고 한다.
현재 미술관에는 3000여 점의 예술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미술관을 찾아간 날이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은 미술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길고도 긴 줄에 서서 가슴을 설레며 입장 차례를 기다리는 관객들의 표정은 밝고도 밝다.
미술관 이름인 'Prado'란 말은 경작지, 목초지란 뜻인데,
예전에 이곳은 시내의 중심지가 아니라 농사를 짓는 외곽으로,
가톨릭의 헤르니모회에서 경작하던 땅이다. 그때의 이름이 헤르니모회 경작지였으며
나중에 이곳에 건물이 들어서고 미술관이 되면서 그 이름이 그대로 붙여진 것이다.
벨라스케스가 팔레트와 붓을 들고 미술관 정문 앞에 앉아 있다
전시실 앞쪽에 있는 고야(1746.3~1828.4)의 동상 하단에는
'Nude Maja'가 조각되어 있다
프라도에서 만난 그림들은 대부분 왕실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화가들의 것이다.
까를로스 1세 때의 궁정화가였던 타치아노를 비롯하여,
펠리페 2세 때의 엘 그레꼬, 펠리페 3세 때는 궁정화가는 아니지만
궁정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루벤스, 펠리페 4세 때의 벨라스께스,
까를로스 4세 때 고야 등의 그림이 주류를 이룬다.
2층 전시실
프란시스코 고야 - 결혼식The Wedding / 1792 / 269X396cm
당시 사회상의 풍자를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의 못생긴 얼굴과
신부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이 결혼이 어떤 거래에 의해 성사되었음을 암시한다
고야 -1808년 5월 3일.마드리드 -프린시페 피오 언덕의 학살 / 1814 /266X345cm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과 학살을 고발한 역사의 기록으로 유명하다
고야 - 옷 벗은 마하(Nude Maja) / 1800 / 97X190cm
고야 : 옷 입은 마하(Clothed Maja)/ 1800~1803 / 95X190cm
마하(Maja)는 옷 잘입는 멋쟁이 젊은 여인을 뜻한다. (스페인어에서 j는 ㅎ 발음이 난다)
벨라스케스- 시녀들 / 1656 / 318X276cm.
프란시스코 고야 - 카를로스 4세의 가족 / 1801 / 280X336cm
로지에 반 데르 바이텐-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 1443 / 262X276cm
라파엘로-양과 함께 있는 성 가족 / 1507
고야의 무덤이 있는 작은 성당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성당
이 성당은 카를로스 4세 때 이탈리아 건축가 프란시스코 폰타나에 의해 건축되었다(1792~98)
1798년 고야는 이 작은 성당 내부에 천정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대제단 위쪽 천정에 그린 "성 삼위일체에 대한 경배'와
중앙의 둥근 천정에 그린 "안토니오 데 파두아 성인의 기적이라는 작품이다.
성당 바닥에는 고야의 머리없는 시신이 묻혀있는 무덤이 있다.
고야는 1828년 프랑스 부르데오스에서 사망하였으므로 1919년 그의 시신을 마드리드로 이장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시신을 옮길 때 머리는 이미 도둑을 맞아서 그 나머지만 이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혼여성과 재봉사들의 수호성인 '산 안토니오'의 축제일인 6월 13일에는,
연인이 없는 아가씨들이 가봉바늘을 들고 이 성당을 참배한다.
중앙의 둥근 천정에 보이는 그림이
"안토니오 데 파두아 성인의 기적((Un milagro de S. Antonio de Padua)"이다
자연광선이 한가운데 동글게 뚫린 구멍으로 들어옵니다. 여닫이에 쓰이는, 늘어진 줄이 보이지요?
(*성당 내의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산 안토니오의 기적'은 13세기에 리스본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안토니오 성인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고발당했다. 그런데 고발한 사람이
바로 살인자였다. 성인은 살해된 사람을 되살려 그의 아버지가 범인이 아니라
고발자야말로 범인이라고 법정에서 증언시키는 역전극을 연출했다.
고야는 이 기적에 얽힌 이야기를 13세기 리스본의 법정에서 18세기의 에스파냐로 가져왔다.
"안토니오 데 파두아 성인의 기적"은 리스본에서 살해 당한 한 청년을 부활시킨 안토니오 데 파두아 성인의
기적을 표현하고 있는데, 고야는 이 작품 속에서 종교화에 대한 전통적인 규범으로부터 탈피하여 자유분방한
필치와 색조를 통해 종교적 내용을 표현했으며, 그림 속의 인물들을 특이하게도
고야가 살았던 마드리드의 사람들로 그리고 있다.
성당 건너편의 조촐한 공원에 있는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동상
그는 18세기 스페인 회화의 대표자로 특히 고전적인 경향에서 떠나 인상파의 시초를 보인 스페인 근세의
천재 화가로 알려져 있다.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대담한 붓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찌 미술관이나 성당 안에만 예술작품이 있으리오. 길가다 만난 이 사람도!!!
...... ,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새로운 창작이 이뤄진다.
사바티니 정원에서 왕궁의 입장시간을 기다리며 몇 번이나 되뇌인다.
삶은 기다림이 있을 때 기쁘다고.
마드리드 왕궁
Palacio Real de Madrid
마드리드 왕궁은 스페인의 왕실 공식 관저이다.
후안 카를로스 왕과 가족은 실제로 이곳에 머물지는 않는다. 마드리드 외곽의 작은 궁전인
사르수엘라 궁에 머물고 있다. 국가적 상황에만 사용이 되는 것이 원칙이다.
1083년까지 마드리드는 마드리드가 아니었다. 무어인(Moor)의 손에 넘어간 땅이었으니,
스페인의 중앙정부와 왕궁이 자리한 곳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마헤리트라 불리는 이슬람교도의 성채에
불과했던 마드리드는 빼앗고 뺏기기를 반복하는 역사를 증명하듯 1083년, 알폰소 6세에 의해 다시
스페인 그리스도교의 땅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슬람교도의 성채는 그리하여 스페인 국왕의
임시 숙소로, 또 다시 스페인 수도의 왕궁으로 제 모습을 바꾼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왕궁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1734년 크리스마스의 화재는
왕궁은 물론 왕족의 소장품마저 모두 태워버려 왕궁은 제 모습을 바꿀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다.
지금의 왕궁은 1738년에 이탈리아의 건축가 유바라가 착공해 그의 제자인 사케티와 프란시스코 데 사바티니,
벤투라 로드리게스 등이 1764년에 완공한 모습이다.
왕궁 앞에서 나는 깨닫는다. 현재는 곧 과거가 될 것이며,
미래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마드리드의 발전이 더딘 이유가 지나치게 과거의 문화를 유지하려는
성향에서 나왔다면, 그 과거 때문에 현재의 마드리드가 존재함을.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태어나고 자란 부르봉 왕조 제1대 국왕 펠리페 5세는
1734년 크리스마스에 소실된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 자리에
프랑스 이탈리아풍으로 왕궁을 건설할 것을 명한다.
이탈리아 건축가 유바라가 시작했으며, 이후 사케티, 사바티니 등에게 승계되어
1764년에 완성되었다. 사방 150m의 건물 안에는 2,700개나 되는 방이 있으며,
현재도 공식 행사에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대사도 처음 부임하면
이곳 알현실에서 스페인 국왕에게 신임장을 증정한다.
왕궁의 입구Entry Hall
마드리드 왕궁에는 방이 2,800 여개에 달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돌아 볼 수 있는 곳은 겨우 10여 개 뿐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대리석 계단은 낮고 넓게 만들어져 있어
황족 부인들이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오르내릴 수 있다고 한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의 방'을 본떠 만든 옥좌의 방 Sal
베네치아 화가가 그린 천정화는 신대륙을 발견해서 왕실에 바치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옥좌 앞의 네 마리 사자는 4개의 대륙을 의미한다.
국왕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초상이 있는 방(고야 그림)
가스빨리니의 방 Salón de Gasparini
가스빨리니가 장식한 이 방은, 벽면이 은실로 수놓은 비단으로 장식되고
천정의 화려한 그림은 오리엔탈 바로크 양식이며 전체적으로 바로크 양식의 걸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바닥과 탁자는 천연 대리석을 이용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는데
여러 가지 색채가 혼합된 색상과 정교한 구성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벽면까지 도자기로 되어 있는)도자기의 방
태피스트리의 방
각 방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휘황찬란한 샨데리아 이다.
금빛으로 치장한 기둥과 천장에 육중하게 매달린 샨데리아 등, 그리고 방 마다에
진열된 수 많은 시계, 그림과 동상, 금빛 실내 가구와 장식품들.......
이곳엔 왕실의 엄청난 사치와 함께 왕의 무한한 권위가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대식당
알폰소 12세가 두 번째 부인과의 결혼을 위해 1879년에 만든 곳으로
145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대식당이다.
궁전 예배당
변화무상이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할까. 그래도 한결 같이 지켜온 모습이라면 화려한 왕궁의 면모다.
방, 방, 방. 화려함에 이끌려 이리저리 발길을 옮긴 곳에는 용도를 달리한 방이 끝을 보이지 않을 기세로 늘어서 있다.
왕좌의 방은 물론 아버지를 위한 방, 만찬을 위한 방, 악기를 전시한 방, 음식을 만드는 방 등 용도도 너무나 다양하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위한 방과 동양식으로 꾸민 흡연을 위한 방까지 따로 마련돼 있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내부 장식은 또 어떤가.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을 모방해 12개의 모양이 다른 거울로 장식한 왕좌의 방은
이탈리아의 화려한 샹들리에로 더욱 빛난다. 아버지를 위한 방의 샹들리에는 프랑스에서 가져온 것이다.
만찬을 위한 방에는 147명이 앉을 수 있는 거대한 식탁이, 악기를 전시한 방에는 300만달러에 이르는 바이올린이
놓여있다. 음식을 만드는 방에 놓인 펀치를 담는 그릇조차 심지어 런던에서 공수했다.
또 있다. 이 방, 저 방의 벽면과 바닥을 장식한 태피스트리. 너무 많아 눈길조차 주기 힘든 이들은
당시 가장 기술이 뛰어났다는 벨기에의 직공들이 만들어낸 것이 많다. 세계에서 좋다는 것은
다 모아놓은 이곳의 화려함, 놀랍고 또 놀랍다.
알무데나 대성당
왕궁 바로 맞은 편에 우람한 성당이 서 있다. 바로 마드리드 대성당이다.
스페인 회복 후에 이 성당의 '알무데나'라고 하는 벽 속에서 성모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아랍인들이 이곳을 점령했을 때 성모상을 차마 부수지 못하고 벽속에 숨겨 놓은 것으로 추측한다.
펠리페 5세때 지어진 이 왕궁 앞에는 선왕 펠리페 4세의 동상이 서 있다.
왕국 북쪽에 있는 '사바티니 정원'
왕궁은 1734년 펠리페 5세의 명으로 이탈리아 건축가 유바라가 시작했으며,
이후 사게티, 사바티니에게 승계되어 1764년에 완공되었다.
문득 십자가의 성 요한이 지은 시 한구절이 떠오른다.
소리 있는 고독 Soleded sonora
소리 없는 음악 Musica callada
마요르 광장
1619년 펠리페 3세 때 완성한, 4층 건물에 둘러싸인 풍치있는 광장이다.
과거에 세 번이나 대화재를 당하고 그때마다 개장을 거듭하였으며
현재와 같은, 9개의 아치를 갖춘 직사각형 관장으로 완성된 것은 1953년의 일이다.
마요르 광장의 말굽모양 아치
중세시대엔 상인들이 모여 살며 물건을 팔던 곳이었는데 이후에 왕실의 행사, 사형집행,
투우경기, 승마경기 등 마드리드 시민들에게 온갖 볼거리를 제공하는 야외행사장으로 사용되었다.
마요르 광장은 19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차량 통제를 실시하고 있어,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활기로운 광장으로서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광장을 건설하고 이름을 붙인 펠리페 3세가 말 위에 높이 앉아 있다
마드리드의 마요르 광장은 규모면에서나 건축학적 측면에서 가장 뛰어난 광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펠리페 2세가 수도의 중앙에다 이와 같은 광장을 만들라고 명했으나 실제로 지어진 것은
그의 아들인 펠리페 3세가 재위에 있었던 때에나 가능하였다.
그리하여 1620년, 스페인의 다섯 성인을 기리는 시성식을 이곳에서 치름으로써
마요르 광장이 공식적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마요르(mayor)란 영어로 'major'란 뜻으로
이름에 걸맞게 마드리드의 중요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고.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4층 건물의 1층은 카페, 레스트랑과 바, 2~4층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1층에 들어서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은 노천카페 형식으로, 밖에 테이블과 파라솔을 마련하고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음료를 제공한다
건물 외벽도 예술!
잠시 발길을 멈추고 화가의 손끝을 따라 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몽'을 파는 상점은 항상 손님들로 북적댄다.
하몽은 돼지 넓적다리를 통째로 훈연하여 건조 숙성시킨 스페인의 대표적인 햄이다.
다른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순수 돼지고기 살 그 자체로 만들어진 햄으로,
전통적으로 스페인인들의 식생활과 아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몽 (Jamón) 은 스페인의 전통 음식으로 소금에 절여 건조한 돼지의 다리로 만든 햄이다.
스페인의 마트에선 다리채로 팔기도 하고, 조각내서 진공 포장된 것을 팔기도 한다.
대개 익혀 먹지 않고 얇게 썰어서 먹으며, 조각을 보면 마치 날것과 같다.
다른 것은 먹이지 않고 오로지 도토리만 먹여서 키운 것을 최상품으로 이베리코 (Iberico) 라 한다
-위키백과-
세르반테스의 석상이 있는
스페인 광장
꼭대기에는 여러 민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머리에 지구를 이고 책을 보고 있는데,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가 전 세계의 다양한 민족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것을 표현했다고 한다.
(中央 上)-세르반테스 / (中央下)-돈 키호테와 산쵸 판자
(좌)- 돈 키호테의 이상형 둘네시아 / (우)- 현실적인 여성 아르돈사
세르반테스(1547~1616)는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소설, 극작가, 시인이다.
대표작 '돈 키호테'는 산문으로 된 서사시로 세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았으며, 근대소설이
뚜렷한 형태를 얻은 것도 이 작품에 이르러서다.
세르반테스의 말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명언은
원래 프랑스의 속담이었다고. 이것이 그의 소설 '돈 키호테'를 영어로 옮길 때 번역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이말을 집어 넣었기 때문에 세르반테스의 말이라고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로시난테를 탄 돈 키호테와 당나귀를 탄 산쵸 판자의 주변엔
라 만챠 La Mancha지방에서 가져온 올리브 나무가 빙 둘러져 심어져있다.
이룰 수 없는 꿈을꾸고 (Dream the impossible)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Do the impossible love)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Fight with unwinnable enemy)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Resist the unresistable pain)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Catch the uncatchable star in the sky)
- 돈 키호테 명언 중에서 -
중앙 우체국
시벨레스 분수 너머에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중앙우체국'
시벨레스 광장의 분수
마드리드 중앙부의 시벨레스 광장 한가운데 있는 분수로 마드리드시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분수 중앙에 세운 조각상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풍요와 자연의 여신 시벨레(Cybele)를 형상화한 것으로,
광장의 명칭은 이 여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두 마리의 사자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오만하게 앉아 있는 이 여인은
바로 대지의 여신인 시벨레스이고, 자기 이름을 딴 시벨레스 분수의 여주인이다.
에스파냐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이자 아티스트인 벤투라 로드리게스(Ventura Rodríguez)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1782년에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완성했다.
웅장한 규모의 원형 분수는 원래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 외부에 있었으나 19세기에
이곳으로 이전했다. 이 분수는 밤이 되면 환상적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조명으로도 유명하다.
마드리드를 연고지로 하는 명문 프로 축구팀인 레알 마드리드(Real Madrid)가 에스파냐 리그나
유럽컵에서 우승한 날에는 이 분수를 일시적으로 개방하는데, 이때 선수들과 열광적인 팬들이
이 분수 안에 들어가 함께 어울리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한다.
알칼라 문 Alcala Gate
시벨레스 광장 맞은편에 있는 알칼라문은
1778년에 카를로스 3세의 명으로 궁정 건축가 사바티니가 건축했다.
문이 위치한 곳은 19세기 말까지 마드리드의 동쪽 경계가 되었는데, 아라곤에서 이 문을 통해
마드리드로 오는 상인들에게 마드리드가 얼마나 중요한 도시인지 보여주기 위해 세웠다.
앞면
뒷면
'세르반테스의 고향 알칼라로 향하는 문'이라 하여 '알칼라문'으로 이름 지어졌다.
알칼라문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이 문은 앞면과 뒷면의 디자인이 전혀 다르다. 그 이유는, 건축가 사바티니가
카를로스 3세에게 두 가지 각각 다른 대문의 설계도를 제출했는데
왕은 무심결에 설계도 둘을 모두 승인해 버렸다.
사바티니는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기지를 발휘했다.
즉 두 개의 설계도로 앞면과 뒷면의 모습을 달리 건축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중앙의 아치형 출입구 위쪽으로는 사각형의 기념석이 박혀있는데,
까를로스 3세의 이름과 알칼라 문이 완성된 해(1778)가 로마자로 적혀있다.
잠깐 틈을 내어 문의 앞면과 뒷면을 대조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문 중앙 위쪽의 다른 점, 지붕 난간에 앉은 천사들, 이오니아식 기둥의 생김새 등등...
알칼라문이 있는 주변을 스페인 독립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독립광장이라고 한다.
알카라문 곳곳에는 독립전쟁 당시의 총격에 의해 수없는 총탄 자국이
훈장처럼 새겨져 있다.
첫댓글 이 선생님 부럽습니다! 아직 거긴 못가봤어요. 건강히게 잘 나녀오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