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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문 4월 10일 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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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득재 |
| 오봉이라는 유쾌하지 못한 단어가 있다. 커피 배달하는 여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쟁반을 가리켜 오봉이라 한다. 물론 일본말이다. 그런데 오봉이라는 말에는 다른 뜻이 더 들어가 있다. 어느 특정 계층을 비하하는 뜻이 오봉이란 말에 담겨 있다.
꼬봉이 어느 나라 말인지는 알 수 없어도 꼬봉이나 오봉은 계층을 위계질서적으로 파악할 때나 나타날 수 있는 단어들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오봉이 맨 꼴지는 아니더라도 밑바닥 인생에 한걸음 다가간 여자들을 가리킨다면 꼬봉은 그야말로 누군가에게 빌붙어서 비굴하게 굽신 거릴 줄이나 아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얼마 전 초등학교 교장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언론들은 전교조 죽이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오봉도 꼬봉도 되기 싫어서 이메일을 쓴 여교사에 대해 학부모들은 그 교사가 있는 학교에 아이들을 보낼 수 없다며 등교거부운동까지 벌였다. 그러나 교사가 남자이거나 정교사일 경우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었을까?
그 교사가 여자이고, 게다가 기간제교사이다보니 커피를 타주니, 안 타주니 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닐까라는 말이다. 어느 신문 사설처럼 전교조가 무조건 강성으로 나가고 안나가고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일까? 오봉이라는 말 자체도 사용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자 하면 으레 오봉이나 꼬봉으로 보려는 심사나 아양이나 떠는 것이 여자라는 심사가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다.
얼마 전 우리 동네에서 떡볶이를 먹다가 아줌마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얘기인즉슨 학교에서 오라고 해서 일하다 말고 옷 그대로 입은 채로 학교를 갔는데 웬 학부형들이 말끔하게 옷을 입고, 아줌마 말로는 무슨 기생들처럼 화장까지 하고 학교 교실에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학부모회에 졸지에 참석하게 된 아줌마는 그 순간 자기의 옷차림과 다른 학부모들의 옷차림이 너무도 비교되어 교실에서 바로 나왔고, 학부모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어서인지 자기 초등학교 6학년 딸에게 담임선생님이 대하는 태도가 여간 떨떠름하지 않다는 거였다.
아줌마 이야기를 듣다가 필자는 우리 사회에 여자들이 스스로를 오봉이나 꼬봉으로 만들게 하는 뭔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겠지만 우리사회는 여전히 커피 타 주는 사회다. 조교가 교수들에게 커피 타 주고, 학부모가 교장선생님 커피 타주고, 기간제교사가 교장선생님에게 커피 타주며, 여사원이 윗 상사에게 커피를 타준다. 일종의 접대문화가 뿌리 박혀 있는 것이다. 조교도 학부모도 기간제교사도 여사원도 접대부가 아닌데도 말이다. 일제가 여자들을 위안부로 삼았다면 우리 사회는 여자들을 무슨 접대부쯤으로만 생각하는 모양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교장선생님이 기간제교사에게 커피를 타주면 하늘이 두 동강이라도 나는 것처럼. 예의 ‘커피’가 사건을 만들었을 때, 필자는 영국에 있었을 때 영국인 교수가 과 사무실에 들러 조교에게 아무런 소리도 없이 혼자 알아서 커피 타 마시는 모습이 떠올랐다.
사회계층의 위계질서에 따라 밑의 것들이 윗 것들에게 커피를 타주는 일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주체집단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예속집단으로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남자의 제국에서 여자가, 게다가 학교사회의 주변부 인물인 기간제교사가 커피문화, 접대문화를 거부하며 주체로 올라서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예속집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인간이 ‘짱’이 되고, 주체가 되며, 공주가 되는 것을 우리는 눈꼴사나워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한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오봉이나 꼬봉이 되든지 노예가 되거나 하녀가 되어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 인터넷상에 올라온 글들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기 아버지가 커피를 타달라고 했을 때에도 그 기간제교사는 커피 타 주는 것을 거부할 것이냐는 황당한 내용의 글이었다. 순간, 필자는 교장이라는 사회적 주체가 아버지라는 가족의 이름으로 둔갑하는 가족주의의 악몽을 다시 확인했다. 기간제교사는 그냥 교사일 뿐이지 교장선생님의 딸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러한 사실 또한 우리에게는 사회적 주체를 거세하려는 무의식적인 음모가 일상화되어 있고 거기에 우리가 길들여져 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만든다. 주체가 가족을 떠나 사회로 진입하는 것을 우리는 허용하지 못한다. 그 주체가 여성일 경우 문제는 더 심각하다. 여성이 사회로 가출하는 것을 꿈도 꿔보지 못하는 사회가 우리 사회 아니던가? 여자는 사람, 인격을 갖춘 독립적이고 사회적인 주체가 아니라 그저 ‘집’사람이거나 딸일 뿐이 아니던가? 기자가 남자일 때에는 x기자라고 부르다가 여자일 때에는 꼭 x여기자라고 부른다.
기자가 여자일 때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꼭 ‘여’기자라고 부르는 것은 여자가 이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주체성이 거세되었던 여자가 사회적 인물인 기자로 나타난 것이 하도 신기하다 보니까 ‘여’기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자가 빨래나 하고 밥이나 할 일이지 감히 사회적인 인물로 출현하다니!
이번 사건이 터지자 자칭 유력 언론들은 문제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기간제여교사와 전교조를 희생양으로 삼기 시작했다. 매일신문은 전교조의 뺨을 때리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하며 전교조의 강성을 부각시켰고 조선일보는 돌팔매의 유혹을 주장했다. 특히나 조선일보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며 돌팔매질을 해대는 유혹의 본거지가 있고 그 무리들이 자신의 모습은 숨긴 채 조선일보에 돌팔매질을 해대고 있다고 에둘러 비아냥거렸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돌팔매에 맞는 기간제 교사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는 듯하더니 그 측은지심이 이내 사이버혁명의 저주의 본능에 대한 비난의 눈초리로 바뀐 것이다. 전교조의 잘한 점을 칭찬하다는 듯하다가 전교조가 강성으로 치닫는 것을, 부드러운 톤으로 우려하는 목소리는 측은지심에서 저주의 본능으로 옮겨가는 돌팔매의 구조와 흡사한 데가 있다.
우리 시대에 ‘강성’이라는 단어는 ‘개혁’이나 강성국가 북한을 연상시키는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다. ‘강경한’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직도 이러한 언어의 주술적인 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언어의 주술적인 힘을 권력에 이용하는 무리들이 여전히 건재해있다는 징표이다. 전교조가 강성이라고 몰아붙이는 순간 개혁과 북한은 우리 시대의 표상체계에서 그야말로 저주본능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창동 문화부 장관을 둘러싼 해임결의안 운운하는 입씨름도 마찬가지다. 자칭 국민의 대표라고 일컫는 국회의원들을 가르치려드는 강성적인 이미지가 한나라당 의원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나라당이 반개혁세력이라는 뜻을 나타낼 뿐이다. 한나라당에는 부드러운 남자들만 있고 기간제교사는 전교조 소속으로서 부드러운 커피 하나 타주지 못하는, 강하게 뻗대기만 하는 여자일 뿐일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