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2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청주] 나의 희생이 필요하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에제 37, 21ㄴ - 28
† 복음 : 요한 11, 45 - 56
★ 기원전 733년 이스라엘은 두 개의 나라로 분단되었고,
두 나라 모두 이민족에게 멸망당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새 임금을
보내시어 통일 왕국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를 살리신 일을 두고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 그러나 이들의 결의는 사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큰 사랑을 받다가
형제들의 질투로 말미암아 노예로 팔려 이집트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곳에서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의 재상이 됩니다.
이후 요셉은 기근 때문에 이집트에 식량을 구하러 온
자신의 형제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형제들을 만나면서
하느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위하여 자신을 이집트로
보내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형제들을 용서하였고, 아버지 야곱의 후손 모두가 기근으로
굶어 죽지 않고 이집트에 정착하여 편히 살 수 있도록
조치합니다.
요셉이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형제들보다 먼저 이집트로 보내시어 기근에도 당신 백성이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도록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의
질투와 증오로 이집트로 팔려 갔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악의까지도 이용하시어 당신 백성을 살리신 것입니다
(창세 45,7-11 참조).
그렇습니다. 인간의 악은 조화와 질서를 파괴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그것마저도 이용하여 선을 이끌어 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백성의 지도자들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의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결의는 카야파 대사제의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말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들의 악의에 앞서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진흙탕과
같은 인간들의 죄악 가운데에서도 구원의 연꽃을 피우시는
분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나의 희생이 필요하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3월2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 요한 11,45-56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박근혜정부의 인사스타일에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여당 마저도 청와대의 인사검증에
구멍이 뚫려 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당도 눈치
보기에 급급해 하다가 후보자들이 스스로 물러난 후에야
문제삼고 나서는 것을 보면서 그야말로 ‘사후약방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중도 탈락하는 사람들의 뻔뻔스런
항변을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됩니까? 왜 나는 안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 시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희생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 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좀 더
청념하고 마음을 바로 하여 국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공직을 맡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교회를 이끄시는 분
2013년 다해 3월2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복음 : 요한 11,45-56
< 교회를 이끄시는 분 >
어느 종교나 ‘세상에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 어떻게 하나?’
하며 숨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톨릭도 밝히기 부끄러워하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는데, 종교재판을 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사형에 처한 역사도 있고 십자군 파병을 했지만 그들이
예루살렘까지 가기 싫어서 중간에서 약탈을 일삼고 그냥
돌아온 적도 있었으며 베드로성당 재건축을 위하여 죽은
이들의 죄의 용서를 조건으로 돈을 거둔 적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여겨지는 타락했던
교황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 가장 타락했던 교황은
보르히아 가문의 교황 알렉산더 6세(1492~1503)이고
[보르히아]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하였습니다.
영화에 따르면 그는 스페인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으며
이름이 로드리고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발렌시아의
대주교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친여동생인 호아나였습니다.
이렇게 로드리고는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사생아였으나,
후일 교황이 된 아버지의 권능으로 불과 25세의 나이에
대주교가 되었고, 교황 이노센트8세(1484~1492)가 죽었을
때 로드리고의 아버지가 성직과 성물매매로 이룩한 막대한
유산으로 교황자리를 사려고 하였으나 추기경회의에서 한
표가 모자랐다고 합니다.
반대한 한 표의 주인공은 베니스의 한 수도사였습니다.
그 수도사는 5,000크라운의 돈과 당시 아름답다고 소문난
로드리고의 12살 된 딸 루크레씨아와 하룻밤을 자는 것을
조건으로 제시하였습니다. 로드리고는 그 조건을 수용하고
드디어 교황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교황이 된 로드리고 즉, 알렉산더 6세는 거칠 것이 없이
마음대로 했습니다. 교황은 로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17세의 자기 아들 세사레를 발렌시아의 대주교로 임명하고
둘째 아들 후안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당시 절세의
미소녀로 이름난 15세의 귤리아라는 여자를 위조죄에 걸린
그녀의 오빠를 용서해 주는 대가로 손에 넣었습니다. 이
밖에도 교황 일가는 입에 올리기에도 쉽지 않은 매우 문란한
일들과 근친상간까지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며 살았다고
합니다.
일부 개신교 종파에서는 이런 일들을 놓고 짐승도 꺼려하는
짓을 하던 인간을 ‘신의 대리자’로 떠받들고 있는 종교가
바로 가톨릭이라고 비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창피하다고 그런 일들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끝까지 우기기만 하면 될까요, 아니면 끝까지
덮으려고만 해야 할까요?
집 안의 등불은 끌 수 있어도 태양은 끌 수 없는 법입니다.
군대 있을 때 꿩 새끼들이 도망 다니다가 무서워서 자신들의
머리를 풀숲에 박고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들이 안 본다고 다른 사람들도 안 보이는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
정정당당하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사과하였습니다. 그대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망했을까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사람들은 다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숨기는 것이 더 의심받을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장 오랫동안 가장 큰 종교로
교회가 계속 유지되는 것은 교회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베드로 사도부터 완전한 분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위에 교회를 세우고 또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고도 예수님을 하룻밤에 3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여전히 베드로의 수위권을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교회의 생명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력은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죽은 라자로까지 살리신 예수님의 인기가
너무 올라가기 때문에 기득권들이 회의를 소집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사실 이들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이지 백성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백성을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을
걱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마음이 정해지면 그것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은 매우 쉽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이 반란을 일으키실
분은 아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없는 사실들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정당한 이유를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은 이것이 대사제 가야파가 한 그 해의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는 것이
낫다는 말을 자신의 입으로 하면서 바로 그런 분이 예언서에
계시된 ‘메시아’이심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어쩌면 앞으로 이런 문제들이 발생할 것을
예상하였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죽이려고 하는 유다교의 대사제를 통해서도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다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는 가장 악한 사람에게서까지 예언을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놀라운 교훈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죽이려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유다 종교의
지도자라는 이유만으로 예언을 하게 하게 하셨다면 당신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를 위해서는 얼마나 큰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교회는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의 타락을 말하는 사람들도 자신들도 모르게
뒤에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이런 종교가 멸망하지 않고 존속된 것이 기적이라면
기적일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종교는 인간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존속하기 때문에 기적의 연속인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부족함이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더욱 크게
드러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새 교황님이 당선되어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는 기사를 보게 됩니다. 여기에는 돈세탁이니
권력구조이니 하는 부끄러운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춘다고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감추려고만
하는 것은 교회가 인간의 힘으로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두려움과 교만의 소치입니다. 오히려 잘못을 떳떳이
인정하는 것이 우리 인간 스스로가 아니라 그런 부족한
인간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교회를 이끄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가야파가 예언을 했다는 사실은 교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본당신부님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여도
그 분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몸이 아프다고
영혼까지 타락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
잘못되었다고 성령님까지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위대하신 이유는 위대한 인물들을
통해 당신 뜻을 펼치시기 때문이 아니라 터무니없이
부족한 인간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완성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나의 문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여러분들은 노래방에서 노래 부를 때 어떤 사람이 가장
좋은가요? 노래 잘 부르는 사람(기죽어서 다른 사람
노래 못 부르지요)? 신나게 춤추며 노는 사람(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정신이 없습니다)? 저만을 쳐다보면서
제 노래만을 들어주는 사람(엄청난 부담입니다)? 아닙니다.
가장 좋은 사람은 내가 노래 부를 때 박수도 쳐 주고 또
따라 부르면서 열심히 호응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노래방에 가면 그런 사람을 찾기 힘들기에 솔직히
요즘에는 노래방 가는 것을 꺼리게 됩니다. 청년들과도
또 어른들과도 노래방을 가보았지만, 늘 마찬가지이더군요.
모두들 자기 노래 선곡하기 바쁘기 때문에 남의 노래에
대해서 호응을 해주지 않습니다. 물론 자기 노래 선곡이
끝나고 예약까지 마치면 조금 호응을 해주기는 하지만,
시간에 쫓기면서 바쁘게 진행되는 그 분위기가 저와는
맞지 않는 것 같더군요.
친한 친구와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친해졌을까요?
나의 말과 행동에 호응을 해주는 친구의 마음에 감동해서
친한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또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친한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관계를 생각하면서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쉽게
이해가 됩니다. 냉담하고 있는 신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왜 성당에 나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성당에 와도
아무런 감응이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내가
주님께 호응을 보이지 않으며 또 주님을 보려고 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볼 수 있으며 그분께 감응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주님이 문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기 자신은 전혀 돌아보지 않으면서 주님께만 불평불만을
던집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대사제 카야파는 말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그는 예수님에 관한 논쟁을 정치적인 차원으로 옮기지요.
즉, 종교적인 배경과 동기가 어떻든 간에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공공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 한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이고 이기적인 뜻이 담긴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곧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지는 않고 무조건 남 탓만을 외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대로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먼저 주님의 사랑을 떠올려보고 그 사랑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보면 어떨까요? 분명히 주님께서 결코 먼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주님이 반드시 내 삶에 있어 가장
필요하며 중요한 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의 문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무조건 주님 탓으로
미뤄버리는 나쁜 악습을 과감하게 몰아낼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자신에게 다정한 한마디를 하는 것은 머지않아 좋은 감정으로
자라날 씨앗 하나를 심는 일이다(크리스토퍼 거머).
춘천에 있는 다문화, 새터민 아동들을 위한 '한 삶의
집'에 다녀왔습니다.
사람과 이야기할 때....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 과연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하십니까?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한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작년 말에 종합검진을 받고 그 검사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약간 의심이 되는 두 부분이 있다면서
이야기를 하시는데,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보며 이야기할
뿐 도무지 눈을 마주쳐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검사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긴장을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얼굴을 보면서 긴장을 풀어주었으면
했지만, 전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컴퓨터 모니터 화면만을
바라보면서 기계적으로 말씀하시는 모습에 실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을 보면서 저 역시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어떠했는지를 말입니다. 저 역시도 때로는
시선을 피하면서 또 다른 행동들을 하면서 무심히 말했던
적이 있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 다짐했지요.
항상 눈을 마주치며 말을 하자고요.
겸손해야 한다고 말을 하지요. 또 낮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그러한 작은
행동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겸손과 낮은 자리는 결국 남의 몫이 되고 말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더 큰 가치의 획득을 위해
32013년 다해 3월2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 요한 11장 45-56절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더 큰 가치의 획득을 위해>
우리에게 언젠가 다가올 죽음이란 것, 난 데 없이 다가오는
고통이란 것이 예고 없이 다가온다는 것,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예고된 수난을 묵상하다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이 일 년 뒤, 육 개월 뒤,
3개월 뒤, 사흘 뒤...이렇게 하루하루 다가와 보십시오.
얼마나 피 말리는 일이 되겠는지, 얼마나 좌불안석,
안절부절, 전전긍긍하겠는지.
그러나 예수님께는 정말 다가오지 말았으면 하는 순간,
아버지께서 정하신 끔찍한 순간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이 다가옴을 예견이라도 하는 듯이 예수님은
공공연한 표적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과
표징을 바라본 몇몇 사람이 대사제에게 일렀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자질한 것입니다. 당혹스러웠던 대사제는 임시
의회를 소집하여 대책 마련에 고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일으키셨던 놀라운 기적과 표징
앞에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는데,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크게 4부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베풀어주신 은총을 통해
예수님을 메시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주류에 끼지 못한 소외된
사람들이었고,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사랑들이었습니다.
그런 반면 의회에 참석했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의 걱정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위축될 자신들의 입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오랜 습관에 따라 정치적 득실만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 추종자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면, 세가 커진
민중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폭동을 일으키게 되고,
로마의 강경한 진압은 불을 보듯이 당연한 것이며, 이를
통해 쥐꼬리만큼이나마 확보하고 있던 사제들의 권위가
실추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걱정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해의 대사제였던 가야파는 아주 특별한 발언을 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앞날에 대해 정확한
예언을 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고
가느냐, 무죄를 선고하느냐 보다도 유다 전체를 위해 예수님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편 유다인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그들은
철저하게도 방관자로서 ‘예수님 사태’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대단한 호기심거리일 뿐입니다. 마치
내기라도 걸 태도입니다.
인류 최대의 선물이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참으로
야박하게 대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표독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감사와 보답과 찬미는커녕 무시하고, 시험하고,
놀려대는 사람들입니다. 극진히 정성껏 모시기는커녕
문전박대하고, 그를 향해 돌을 들고,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 모든 모욕적인 언사와 배은망덕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길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더 큰 사랑의 실천을 위해, 더 큰 가치의 획득을 위해,
사사로운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는 예수님의 큰 걸음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부산] 인간, 경제적 동물
살아가면서 우리는 손실과 이익을 산술적으로 따지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다 보니 산술적으로 따져야
할 것과, 그렇게 해도 좋을 것과,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때때로 손익이라는
잣대와는 다른 잣대를 들이대어야 하는 일이 분명히
있음에도, 여기서도 그냥 이 잣대를 사용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 그렇다. 이 일은
손익의 잣대가 아니라, 존엄성의 잣대, 하느님
닮은꼴이라는 잣대를 사용해야 함에도 여전히 같은
자로 재고 만다. 그리고 그 결과는 때때로 사람 자체를
희생하는 일에까지 이른다.
인간은 분명 경제적 동물이지만, 이 특성은 인간이 지닌
많은 속성 가운데 단지 하나일 뿐이다. 이 개념만으로
인간 전체를 규정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희생양 개념 또한 그런 개념 가운데 하나다. 카야파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생각은 한편으로는 인간보존 욕구의
자연적 발로인 척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격하해 버리고 있다.
경제면에서 이익이 되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듯한 사회에서
카야파의 이 말은 내 사고의 방향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경제적 동물로 자신의 지위를 낮출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모상으로 서 있을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 홍경완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교수) -
◈ [기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3월23일 토요일 복음묵상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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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듯 하게 들리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다수를 위해서
소수가 희생되어도 된다는 말이다. 전체를 위해서 몇
명쯤이야 희생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결국 지혜로운
선택이라는 말이다.
인류의 역사는 모두 이러한 선택을 해오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틀린 방법이고 무척 이기적이고 위험한
생각이다. 우리도 언제나 많은 쪽이 아니라 적은 쪽에 놓여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희생이란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만 한다. 늘 약자의 편에 서서 방향을 잡으려
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크고 작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잘못 판단하기 쉽다.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느냐의 기준은
많고 적음이 아니라, 옳고 그름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옳고 그름의 판단은 복음적이어야만 한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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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새로운 영성'이 아닙니다.
- 이해욱신부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새로운 영성"이 아닙니다
어떤 분께서는 제가 전하는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영성"이라고 생각하거나 말씀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제가 그렇게
이름을 지어서 그렇지, 결코 어디서 새로 생겨나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새로운 영성"이 전혀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분은 "루이사 피카레타의 하느님 뜻
영성"을 흉내 내서 만든 새로운 영성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영성,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긴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저는 처음에 지금 이곳 지리산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제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을 그 어떤 "영성생활"로
이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산으로 들어온 목적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단지
저의 병든 몸도 고치고, 병든 영혼도 고쳐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그런 생활을 해 보고자 한 것이 바로 그
목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서울대교구 사제휴양원 원장직을
맡게 되면서부터는 이곳에 휴양하러 오시거나 개인 피정을
하러 오시는 신부님들을 돌보아 드리는 일이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소명이리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소명"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명"을 주님께서 저에게 주셨음을 알게 된 것은 불과 2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들어오기 전 저의 영육은 모두 망가진
상태였고, 그래서 저는 지리산의 어느 조그만 절에서 30일
단식기도 (15일씩 단식과 보식)를 하면서 큰 깨우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저의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릴 것을
아주 굳게 결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저의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릴 것"을 결심했다고
생각했는데, "버린다"는 표현은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임을, 그 "버린다"는 말보다 "맡긴다"는
말이 더 우리에게 더 알맞고 정확한 표현임을 한참 나중에서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존재를 부정하는 불자(佛子)들의 입장에선
무(無)와 공(空), 어느 곳에도 다 버릴 수 있겠지만, 그래서
그분들에겐 "버리거나 내려놓는다"는 표현이 참으로 알맞는
용어가 될 수 있겠지만, 하느님을 신앙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맞지 않는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은 그 모두가 사실은 자기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지식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깨닫는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아무데나 버리거나 내려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버려도 하느님께 버리고, 내려놓아도 하느님께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버릴 곳도, 내려놓을 곳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버리다, 내려놓다"라는 말보다 버리고 내려놓는
곳의 주인이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 맡겨 드리다"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정말 엄청난 영적충격을 던져 주었던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이라는 책과 "거룩한 위탁"이라는 책을 통하여
그때 비로소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영성(靈性)"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영성"이란 무엇을 말합니까?저는 과거엔
"영성"이라는 단어와 전혀 관계없는 생활을 해오던 사람
중의 "대표"였습니다.
영성이라는 말은 영성신학을 공부한 영성신학자나 쓰는 말인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성"이라는 말이 저에게는
늘 참으로 부담스럽고 무겁게만 느껴졌습니다.
과거에 제가 읽었던 영성책자도 모두 "강론 준비"를 위한
하나의 자료수집 과정이었지 저의 영적 성숙을 위한 그 어떤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그러하던 제가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니 "무슨 영성"이니,
영성생활이 어쩌구 저쩌구 떠들고 다니는 지금의 저의 모습이
참으로 제 자신 스스로도 믿겨지지 않는 "웃기는 짜장면"입니다.
하느님은 쩡말로, 쩡말로 "욱끼시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웃기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미 다른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느님께서
저에게 알려주신 당신의 모습은 지금까지,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시고, 오묘하시고, 놀라우시고,
위대하시고, 희한하시고, 웃기시는 모습"이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저를 알고 있는 친구 신부들을 비롯한 모든
신자분들 앞에 정말로 "욱끼는 짜장면"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좋습니다. 원래 저는 친구들을 잘 웃깁니다.
웃겨 왔습니다, 여러모로 말입니다.
웃기는 제가 느낀 "영성"에 대해 한 말씀 올려 드린다면,
"영성"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냥 "하느님을 싸랑하믄서 살믄 되는 거"라는
것입니다.
"영성! 영썽! 영썽!"을 아무리 떠들고 외쳐대도 영성을 살지
못하믄 영썽이 "썽"을 내고 오히려 싸람들을 잡아먹으려
대들게 될 것입니다.
영성을 외치는 분들께 이 기회에 부탁 한 번 드려 보겠씸더!
"싸람들에게 "영성"을 제발 너무 어렵게 알려 드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영성은 기냥 살믄 되는 것입니다. 어케?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느님을 쩡말로 뜨겁게 싸랑하도록 하게" 하여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도록 하믄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쩡말로 싸랑하십니까?
하느님 때문에 맨 날 눈물을 짜고 계십니까?
하느님 싸랑으로 가심이 뜨겁게 달아오르십니까?
아하~~~ 그렇타고요?
기러믄 당신은 하느님의 백썽, 평신도들에게
"영성"을 말하고 가르칠 자격이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당신을 정말 존경합니다. 그러한 당신을 저는
만나고 싶고 당신과 대화를 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저를 지도해 주시기를 정말로 원합니다.
참으로 영성은,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여 받들고,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고,
그분만을 사랑하며, 그분과 뜨거운 사랑을 서로 나누며
사는 것" 그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님을 널리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성신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학문이 되어야지, "하느님을 가르치는 학문의 가르침"이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앎"을 방해하고 어렵게 해서는 절대로
아니됨을 이 기회에 하느님을 가르치는 많은 교사들께 정말
크게 강조하고 싶습니다.
영성을 가르치는 교사가 "영성을 사는 것"이 곧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교사가 사는 삶이 곧
"신학(神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성신학을 공부해 보지도 못한 -제 기억에 신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없으면 안 배운 것이고, 사실 교과과정에도 빠져
있었으며, 구약과정도 리포트로 대체한 신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한- 무식한 신부가 용감해서 마구 떠들어 대고 있음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알고 배우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더 알고 배우려 신학교나 신학원을 찾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야 더 알게 되고 배울
수 있는 하느님이라면, 그런 하느님은 믿을 필요가 없는
하느님입니다. 공부해야 알 수 있는 그런 하느님은 이미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식"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분명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인간의 "대가리"로 얻을 수 있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뜨거운 가슴"으로 느껴야 얻어지는
그런 분이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듯이 뜨겁게
사랑할 때 얻어지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적어도 저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유아세례 후 지금까지 오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얻은 저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결론입니다.
당신의 결론은 어떠하시다고요?
당신의 그 결론으로 하느님을 얻으셨으면 그 결론을
대중께 알려 드려야 합니다. 물론 저에게도 알려 주시고요.
당신이 얻으신 하느님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영성신학
(靈性神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제가 얻게 된 하느님!
하느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거룩한 내맡김"입니다.
저는 "내맡김"을 했고 "내맡김의 삶"을 살기에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을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절대로 "새로운 영성"이 아닙니다.
제가 만들어 낸 영성도 아니요, 어디서 만들어진 영성을
각색한 것도 아닙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모든 영성의 원조"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알파요 오메가 입니다."와 "<斷想>
23. 평생 딸랑 이거?"를 이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제가 이곳 지리산으로 들어와
5년에 가까운 생활 속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저를 이끌어
주시어 당신을 깊이 체험케 해 주신 참으로 고귀한 저의
"체험"에 의해 나오게 된, "저와 하느님과의 사랑 이야기"
임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그님과의 러브 스토리"를 잘 읽어보시면, 여러분도
"그분과의 러브 스토리"를 써 나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러브 스토리를 저처럼 다른 분들에게
힘차게 그리고 훌륭히 전하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전국을, 아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을 함께 퍼트릴 그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하느님께서 그것을 간절히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사순 제5주간 토요일
2013년 다해 3월23일
국회에서 여당과 야당의 합의로 이석기, 김재연 의원에
대한 자격심사를 하겠다고 합니다. 저는 이석기, 김재연
의원이 누구인지, 그들이 왜 자격심사를 받아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윤리위원회에서 자격심사를
한다고 하니, 그분들이 무슨 윤리적으로 비난 받을 행동을
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를 들면 기자들에게 성추행을
했다거나, 사망한 형의 부인에게 잘못을 했다거나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공공의 장소에서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하는 말과 행동을 했다거나, 사기나
폭행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국회의원으로서
윤리적인 자격심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그런
행동을 했던 국회의원들이 있었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자기식구 감싸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솜방망이 징계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 모두가 죄지은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을 정도로 조금씩은 그렇게
잘못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석기, 김재연 의원이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처럼
의원수가 많은 정당에 속해있다면 윤리위원회를 통해서
자격심사를 하려했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저는 언론을
통해서, 또는 검찰의 발표를 통해서 그분들이 무슨 윤리적인
잘못을 범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주 예전에 권력은
조봉암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사형에 처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분의 무죄가 드러났고, 사법부는 고인과
유족들에게 사죄하였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내란과
국가 전복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물론 이는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에 의해서 벌어진 사법살인입니다.
국회의원들의 일이니 제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국민의 선택으로 선출된 국회의원이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힘이 없다는 이유로 다수의
폭력에 의해서 의원직을 상실하게 된다면 그것은 국민의
선택을 무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분은 2000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야파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는 아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법정에 세우려는 것은 그분께서
윤리적으로 잘못을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그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당하게 판결을 받으셨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때로 힘들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참고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향하실거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들도 주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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