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복지사가 온라인 강의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래에는 드론이 반찬 배달을 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자기 삶을 살아가며 나아가 더불어 살게 돕는 게 진보이고,
그렇게 일상에 녹아드는 게 발전입니다.
미래의 어느 때가 되면 임시로 이뤄져 온 복지 서비스가 삶에 스며들어
이제 스스로 만들어 먹고, 이웃과 나누고 함께하며 끝까지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사회복지사의 이상입니다.
복지 서비스는 그대로 놓아두고 그 전달 방법만을 첨단 기기로 활용하는 걸 진보나 발전이라 본다면,
그런 시스템에서 탈주하고 싶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나보다 나를 더 잘하는 인공지능 인형과 함께하고 싶지 않습니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인형 모습을 한 인공지능을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소식이 이어집니다.
인형 모습의 인공지능으로 치매 예방? 외로움 해소??
되묻고 싶습니다.
첫째, 평범한 사람 관계와 꾸준히 이어온 일상을 거드는 게
‘예방과 해소’에 더 효과적일 겁니다.
둘째, 사람을 관리의 대상으로만 본 건 아닐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용과 효율로 계산하여 빚어낸 일 같습니다.
셋째, 나와 내 가족의 삶은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다면 다른 이에게도 권하기를 주저합니다.
사회복지사가 벌인 일이라면 서운합니다.
사람 사이 관계를 잇고 인간성 회복을 향하는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이런 기기라도 만들어 보급하려는 진정성을 믿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일에는 순서가 있듯, 사회복지사로서 해볼 만한 일들을 벌인 뒤에 나온 결정이면 좋겠습니다.
「한여름 날의 낭만잔치」(박세경·권대익, 구슬꿰는실) 속 어르신들을 생각합니다.
삼삼오오 둘레 이웃과 때때로 만나 먹고 나누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그런 곳에서 삶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내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녹음되고 텍스트로 만들어 쌓여갑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인공지능과의 대화. 오늘 무얼 먹을지 미리 짐작하여 말하고,
무얼 사고 무얼 할지 미리 안내합니다.
철학자 이반 일리치의 말처럼
이런 사회 속에서 인간은 ‘복지 서비스’를 유지하게 하는 재료 정도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복지 산업의 소비자로 추락하는 존재일지 모릅니다.
김동식 작가의 단편소설집 「회색인간」에 실린 ‘디지털 고려장’을 읽었습니다.
최첨단 기술 도입이 정말 발전일까 돌아보게 했습니다.
좋은 기술이 도입되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어르신을 관리의 대상으로만 보는 시선은 그대로인 체 그 ‘관리 기술’이 발전하니 씁쓸한 미래가 그려집니다.
노인복지 현장의 발전이 ‘끝까지 나로서 누리는 삶’이면 좋겠습니다.
지구의 인류가 포화 상태에 도달했을 때, 정부는 데이터상의 가상 지구로 이주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사람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가상 지구 따위로 이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미는 정책은 있었다.
비노동 인구인 노인들을, 요양원이나 노인정이 아닌 가상 지구로 이주시키는 정책이었다.
사실, 노인 부양 문제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이미 많은 노인이 가족과 떨어져 독거 생활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가족에게 버림받은 노인들도 많았다.
어차피 자식들과 떨어져 요양원 등에서 혼자 지낸 노인들이라면,
차라리 가상현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게 더 낫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갱신을 늦추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가상 세계에 접속해 부모님의 모습을 살피는 빈도도 점점 줄어만 갔다. 참 신기하게도 똑같았다.
현실에서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던, 신경 쓰지 않던 그 모습들이, 가상현실에 모셔두고 똑같이 나타난 것이다.
혹자는 이 서비스를 한마디로 표현했다.
“마음속 죄책감에, 할 만큼 했다는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
「회색인간」 ‘디지털 고려장’
어르신을 섬기는 현장에서 헌신하는 동료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의 뜻과 열정과 그 수고를 낮게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어르신을 어떤 존재로 보는 가에 따라 어르신을 섬기는 방법이 달라진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일은 어르신을 정명(正名)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관점이 방법을 만들어 냅니다.
어르신을 돌봄과 부양의 대상 정도로 보는 시선이 달라지지 않은 채
여기에 결합하는 최첨단 기술이 두렵습니다.
어르신을 삶의 지혜와 경험이 풍부한 ‘원로’로 본다면 완전히 다른 사업이 그려질 겁니다.
“노인 하나가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입니다.”
서울 어느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일하는 김승철 선생님은
얼마간 어르신께 점심 도시락을 만들어 전하는 사업을 담당했습니다.
김 선생님은 도시락을 전할 때마다 문 앞에서 어르신께 큰절을 올렸습니다.
어르신의 건강을 기도했습니다.
바쁘고 차가 밀린다는 이유로 도시락만 덩그러니 놓아두고 돌아서는 이의 식사와 분명 맛과 영양에 차이가 있을 겁니다.
적어도 그 사업을 맡아 진행하는 사회복지사의 마음을 바르게 만들었을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그 일이 달리 보였습니다.
전남 어느 노인복지센터는 어르신 모두 모여 앉아 계신 그 앞에서 전 직원이 큰절을 올리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르신의 인자한 눈빛들이 풀어진 마음을 여미게 했을지 모릅니다.
형식적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반복하면 물들기 마련입니다.
서비스로 도울지라도 이를 풀어내는 이의 마음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일이 됩니다.
진정 어르신을 위하는 일이 무엇일까 궁리합니다.
살아 계신 한 끝까지 당신 삶의 주인이게 돕습니다.
사회복지사라면 어르신을 어르신답게 섬깁니다.
살아오며 쌓아왔고, 살아가며 다져가는 여러 관계 속에서
어른 구실 어른 노릇 하게 거드는 일이 어르신다움의 핵심입니다.
사회복지사라면 사회복지사다움을 지켜갑니다.
물질의 진보가 사회의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농부는 사람 사이 인정이 깊어지는 걸 발전이라 봅니다.
땅을 아끼는 농법이 자리 잡으려면 궁극적으로 사람 사이 관계가 살아나야 합니다.
관계가 살아나야 내가 기른 농작물을 먹는 사람을 생각할 테고,
그래야 기르는 과정에 정성을 쏟고 애정을 담게 됩니다.
농부에게 생명보다 귀한 게 땅과 씨앗이라고 합니다.
사회복지사에게는 당사자의 자주성과 지역사회 공생성이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일 겁니다.
땅과 씨앗이 없다면 농부가 존재할 수 없듯,
맡은 일이 무엇이든 그 일속에 자주와 공생이 없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가치 없이 이뤄지는 서비스라면,
다가올 미래에 인공지능이 우리를 대신할 겁니다.
첫댓글 큰절은 아니더라도, 바쁘다는 핑계로 도시락만 덩그러니 놓고 오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함께 힘써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