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한 줄의 금현으로
주반자는 손을 흔들어 고검남이 변명하는 것을 막고 다시 웃으며 입
을 열었다.
[자네는 자기 자신을 감추려고 할 필요가 없네. 이 주반자로 말하면
세상과 다툼이 없는 사람이고 자네의 일을 어떠한 사람에게도 알려주
지 않기로 결정했네. 자네의 몸이 좋아지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네.
그렇지 않고 나를 따라 금루궁으로 간다면, 그 누구도 자네를 의심하
지 않을 것이네...]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수레 바깥쪽에서 정무심의 차갑
고 살기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들은 빨리 꺼지지 못할까? 혹시 내가 다시 손을 쓰기를 기다리
는 것이냐?]
고검남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박립인 등이 이미 정신을 차리고 앞
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 돌계단 위로 올라서더니 정무심을 향해
허리를 구부리고 읍을 했다.
[후배 박립인은 영남 금루궁에서 왔습니다. 삼가 선배님에게 문안을
드립니다.]
그는 자기가 자기의 출신과 지위를 알리면 정무심은 금루궁이 영남
유객이 은거하고 있는 곳임을 모를 리 없고 또 자기 부친의 얼굴을
보아서 자기를 어떻게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정무심은 한평생 풍류남아로 자처하고 있었고 줄곧 자기가 아직도
무척 젊다고 여기고 있었던만큼 다른 사람이 그를 선배님이라고 칭하
는 것을 가장 꺼렸다.
그는 박립인이 말할 때 즉시 안색을 싸늘히 굳히며 비스듬히 치켜올
려진 눈썹을 찡그리며 무거운 어조로 호통을 내 질렀다.
[저리 꺼져!]
박립인은 허리를 막 펴게 되었을 적에 정무심의 호통 소리를 듣고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그는 무림 고수의 집안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무공도
약하지 않았고 거기다가 출두한 후 많은 사람들이 추켜올려 아첨하고
그를 젊은 사람들 가운데 고수라고 칭송해주었기 때문에 자만과 건방
진 태도를 키우게 되었으며 일반 사람을 한 번도 안중에 둔 적이 없
었다.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천하에 이름이 떨친 금성 정무심이 아
니고, 거기다가 조금 전에 그가 단 한 줄의 현을 퉁긴 위세가 어떤지
몸소 보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굽실거리며 문안 인사를 올렸겠
는가?
그런데도 정무심은 그에게 호통을 질렀으니 그가 어떻게 견딜 수 있
겠는가? 어리둥절해지기는 했으나 속으로 노여움이 끌어올라 손에 들
고 있던 종이 우산을 내던지고 오른손으로 어느새 등뒤에 꽂았던 섭
선을 뽑아 들었다.
그의 등 뒤의 네 명의 젊은 호걸들도 박립인이 섭선을 뽑아 들자 즉
시 발걸음을 옮겨 각자 위치를 찾아서는 쌍방이 손을 쓰게 되었을 적
에 함께 대항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금성 정무심은 차갑고도 살기 어린 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돌
계단 위에 다섯 젊은이들을 바라보더니 차갑게 코웃음쳤다.
박립인은 스스로 미래의 천하제일 고수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어찌
그토록 남에게 경멸을 당하고 있겠는가?
가슴속에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그는 손목을 돌려 길
이 두자 남짓한 섭선을 쫙 펼쳤다.
새빨간 부채의 면이 번쩍하며 마치 한 무더기의 불빛을 일으키는 것
같았는데 그 순간 박립인은 섭선을 펼쳐 자신의 가슴을 보호한 채 정
무심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정무심은 입가에 한 가닥 잔혹한 웃음을 띄우고 무릎 위에 놓았던
오른손을 천천히 뻗쳐내 앞에 놓인 그 칠현금을 어루만졌다.
금빛의 칠현금 몸체에 붙어 있던 여섯 줄의 현은 모조리 끊어지고
다만 마지막 현 한줄만 남아 있었는데 그는 오른손의 식지를 바로 그
현에 올려놓았다. 가늘고 긴 손가락은 옥처럼 희고 고왔는데 금황색의
고금(古琴)과 배합을 이루어 눈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한 바탕 혈전이 벌어지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낭랑한 음성이 돌계단
아래쪽에서 울려 퍼졌다.
[공자, 절대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박립인은 한 걸음 물러서서 옆을 슬쩍 바라보았다. 소리를 낸 사람은
바로 주방의 감총(監總)이자 대사부인 주반자였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주반자, 당신은 무엇하러 달려 나왔소?]
주반자는 씩씩거리며 돌계단 위로 올랐다.
[공자, 공자는 금루궁 미래의 주인이고, 본궁의 명성과 명예를 전력을
다해 지켜야 합니다만, 금성 정무심은 절대신기(絶代神技)로 궁주님과
나란히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공자가 어떻게 무례한 행동을 할 수 있
겠소이까?]
박립인은 주반자가 젊었을 때에 금루궁으로 들어와 자기의 조부가
살아 계실 때부터 지금까지 금루궁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
었다.
금루궁의 노복이지만 주방에서 한 번도 나간 적이 없고 이번에는 자
기가 놀이를 하기 위해서 일부러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함께 나서기로
했지만, 결코 궁에서 나설 사람이 아닌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 때 나서서 나를 막는 것일까...?
주반자는 그가 아무 말이 없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정 선생은 한평생 훤칠한 자태로 풍류를 좋아하는 것이 젊은이보다
더했지요. 가장 꺼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를 선배라 부르는 것인데,
공자는 조금 전에 말을 잘못했으니 그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
외다.]
박립인은 그 말에 약간 어리둥절했다.
[당신은 어떻게 알았소?]
주반자는 빙그레 웃었다.
[금성 정무심은 비단금기가 고절할 뿐 아니라 풍류를 아는 멋들어진
양반이며 그야말로 이 혼탁한 세상에서 뛰어난 미남자라 할 수 있어,
옛날의 반안(潘安)보다 더 나은 편이며 매번 미녀들이 꽃을 던져 향기
를 남기거나 과일을 던져 그의 소매에 가득 채우던 사실을 무림에서
모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소? 다만 당신네 젊은 사람이 모를 뿐
이외다.]
그의 이와 같은 설명에 정무심의 얼음과 같이 차갑고 살기가 돋았던
얼굴에 즉시 웃음이 감돌았다. 마치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온 듯, 얼었
던 냇물이 녹듯, 칠현금에 얹어졌던 그의 손도 천천히 거두어 들여졌
다.
박립인은 어리둥절해서 생각했다.
(개방귀 같은 수작이다. 나는 어째서 아버지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까?)
그는 결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공에서 그렇게 높은
성취를 쌓을 수 없었을 것이고, 검성 매화상인의 총애를 받고 매화상
인의 외동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지 못했으리라.
그는 정무심의 얼굴 표정을 보고 즉시 깨닫는 바가 있었다.
자기가 일시적인 충동으로 하마터면 커다란 잘못을 저지를 뻔했으나
다행히 경솔히 손을 쓰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을 때 피를
뿌리며 이 황량한 절간 앞에서 한을 품고 한평생을 마쳤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굳이 일시적인 충동으로 그와 사생결단을 낼 필요가 어디 있는
가? 돌아가서 아버님께 이 일을 알리면 아버님은 결코 십사기의 철위
들이 살해당한데 대해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이 때 정무심이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불초는 과찬을 감당하기 어렵구려. 하지만 나는 강호에서 십삼 년 동
안 떠나 있었기 때문에 강호에 군웅들이 이곳 저곳에서 일어난 사실
을 모르고 있고, 또 형씨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혀 없구려. 실례지
만 형씨의 대명은 어떻게 되시오?]
주반자는 포권을 했다.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불초는 주정(周正)이라 하며 남들은 저를
주반자라고 하지요. 영남 금루궁 주방에서 총관 노릇을, 주방장 노릇
을 하고 있답니다.]
정무심은 주반자가 음식이나 만드는 대사부라고 생각 못한 듯 약간
어리벙벙해졌다.
[당신은 오로지 음식을 만드는 일을 맡고 있는데 어떻게 불초가 옛날
에 풍류를 즐겼다는 사실을 아시오?]
주반자가 언제 정무심이 젊었을 때 행한 풍류적이고 멋들어진 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겠는가?
그가 나서서 이 싸움을 말린 것은 작은 주인이 해를 당하는 것을 두
고 볼 수 없어서 고검남에게 물어 본 결과 정무심이 젊었을 적에 자
기가 풍류적이었다고 자부하는 괴퍅한 성질이 있음을 알아냈던 것이
었다.
바로 그 점을 노리고 말했던 것인데, 과연 정무심의 얼굴에 서릿발같
은 기운이 싹 가시고, 요행으로 계책이 맞아떨어지게 되었는데 뜻밖에
도 정무심이 그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이었다.
그 순간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 하! 그건... 물론 우리 궁주께서 그런 말을 하셨지요. 그는 매번
정선생을 들먹일 때마다 감탄해 마지않았답니다.]
[감탄까지?]
주반자는 말했다.
[궁주께서는 정선생께서 금기가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을 움직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절세적이고도 풍류적인 자태는 다른 사람이 도
저히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적이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 분
은 감탄해 마지않는데 한편으로는 정선생에게 탄복하고 한편으로는
자기가 그렇지 못한 점을 한탄한 거지요...]
정무심은 미소를 지었다.
[노박(老朴)은 한평생 오만하게 행동해 온 사람이고 십팔 년 전 나를
처음 만나게 되었을 적에 나는 그의 안하무인격인 태도가 눈에 거슬
려 버릇을 한바탕 가르쳐 놓으려고 했는데, 다행히도 매화상인이 나서
서 말렸기에 그와 안면을 바꾸지 않았었지... 이제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그는 사람들을 좀 업신여기고 겉으로는 안하무인인 척하지만 기
실 마음속으로 이 정무심에 대해서 무척 탄복하고 있었구려.]
그는 박립인을 한 번 슬쩍 바라보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그 자신이 영특하고 잘 생겨서 풍류 인물로 자처하고 있
다는 것도 알고 있지. 그러나 사실 아직도 멀었어. 훗날 만나게 되었
을 때 나는 그에게 미녀를 사냥하는 수법을 가르쳐 주어야지. 그래야
그가 나를 추켜올려준데 대한 보답이 되겠지.]
박립인은 주반자의 말을 듣자 속으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아버님이 언제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그 어르신은 완궁(宛宮)에 서
른 여섯 명의 시첩을 거느리고 있지만 절색의 미녀 아닌 사람이 없다.
다른 것은 고사하고 그 어르신의 당당한 얼굴 모습만 해도 정무심의
말상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는 정무심의 그 말을 듣자 속으로 기분이 언짢아 검미를 치켜올리
며 반박을 하려고 했다.
주반자는 박립인의 안색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재빨리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정선생, 우리 공자가 조금 전에 실례된 점 용서하시구려. 이제 소나
기가 멎었으니 우리들은 이만 작별할까 하오.]
[좋지! 당신들은 가 보도록 하시오. 가서 박 노귀에게 훗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왼팔의 소맷자락으로 입을 가리고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 내었다.
단장애에서 고해이란인 근소소의 단검에 적중되어 상처를 입은 그는
줄곧 금금을 겨드랑이에 끼고 곤륜산에서 달려 내려왔다.
그는 천지구분이라는 잔혹한 금기(琴技)를 써서 고검남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체내에 갈무리된 진력을 모조리 돋구어 올린 바 있었다.
일곱 줄의 현이 모두 끊어지고 고검남이 쓰러지는 것을 본 그는 속
으로 일시적인 쾌감을 느꼈으나 다음 순간 근소소의 홍검으로 펼치는
어검술(御劍術)에 뒷등을 적중 당한 것이었다.
그는 확실히 절세적인 재간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 단검을 등뒤에
꽃은 채 수백 리를 달려가 곤륜산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그제야 달음
질을 멈추고 상처를 치료할 곳을 찾았다.
그는 천지구분이라는 절세적인 재간을 펼쳤고 그 자신의 기혈을 모조
리 끌어올려 고갈 상태에 빠져 중도에서 알약을 복용했으나 이미 끊
어진 경맥을 다시 이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홀로 이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암암리에
내공을 돋구고 상처를 치료하게 되었고 그런 후에 등에 꽂힌 단검을
뽑아내고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베조각으로 싸매었던 것이다.
이 며칠 동안 그는 절간 뒤쪽에 농사꾼들이 심어 놓은 토란이나 고
구마로 배를 채우고 온종일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기현공하여 내상
을 치료하는 외에 그 잘라진 금현을 다시 이으려고 했으며 두 가닥을
하나로 묶어서 잇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내력이 부족하여 천년독각교(千年獨角蛟)의 껍질로 만든
금현을 녹여서 이을 수 없었고 며칠 동안 정성을 들여서야 겨우 한
가닥을 이을 수 있었다.
그는 강호에 출두한 이래 근소소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을 뿐, 어떤
여자라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는 한평생 여색을 즐겼고 근소소 때문에 곤륜산에서 십삼 년이라
는 세월을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반목해서 싸우는 국면을 이
루게 되니, 생각만 해도 괴로웠다.
그토록 엄중한 중상을 입고 홀로 황폐해진 절간에서 토란이나 고구
마로 배를 채운다는 것은 그가 한평생 겪어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의 무공 수위나 무림에서의 위명으로 볼 때도 이와 같은 일은 꿈
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가 마음을 안정시키고 상처를 치료하지 않는다면 자기의 무
공이 되살아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목숨 또한 끝내 보존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가슴속의 통한을 참고 치밀어 오르는 원한을 억누른 채, 장래에
기회만 있으면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앙갚음을 하리라 작정하
고 있었다. 맹세코 근소소에게 앙갚음을 하리라 결심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정서속에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면서 그는
끝내 내상을 억제할 수 있었는데 뜻밖에도 한바탕 내린 소나기에 한
떼의 비를 피하는 사람들이 절간으로 들이닥치게 되었던 것이다.
명을 받고 황폐한 절간을 청소하기로 된 철위들은 절간 안으로 들어
가자 마자 정무심이 절간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금루궁 영남유객의 명성을 믿고 거의 다른 사람을 안중에 둔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정무심을 쫓아내려고 한 태도는 너무나 건방
지고 억지였다.
정무심은 며칠 동안 황폐한 절간에서 보냈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무척
기분 나쁜 상태에 있었는데 그 두명의 철위가 함부로 대해 오자 그들
의 불손한 언사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가 되었다.
그는 단 한 줄의 금현을 퉁겨 두명의 철위가 충격을 받고 죽도록 만
들었다. 그 결과 옥면랑군 박립인이 들이닥치게 되었고 다시 십여 명
이나 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만약 주반자가 고검남의 말을 듣고 좋은 말로 정무심의 호감을 사서
긴장된 정세를 완화시키지 않았더라면 정말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지
의문이었다.
정무심은 지극히 유쾌한 상태에 놓이게 되자 정서를 억제해야 한다
는 사실을 깜박 잊어, 그만 내상이 재발하여 목구멍이 달콤해지더니
한 모금의 선혈이 입안으로 왈칵 넘어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커다란 원한을 품은 직후에 크게 기쁜 일을 당하면 반드시 체내의
기능을 크게 해쳐서 내상을 일으키게 마련이었다.
정무심은 한 모금의 선혈이 목구멍으로 넘어오게 되었을 때야 그와
같은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자기가 중상을 입고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잔금지기
(殘琴之技)를 펼쳐 십여 명이나 되는 금루궁의 철위들을 죽이기는 했
지만 경맥에 너무 많은 부담을 주어 상처가 가중된 것을 떠올리게 되
었다.
속으로 깜짝 놀라 그 한 모금의 선혈을 다시 삼키려고 했으나 이미
너무 늦어서 촉망중에 왼손 소맷자락으로 가리고 흠, 하니 입안으로
넘어온 그 선혈을 토했던 것이었다.
그가 소리내어 웃은 후에 안색이 갑자기 변한 것을 절 앞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무심이 피를 토
하리라고 생각 못했기 때문에 정무심이 어째서 그러는지 이상하게 여
겼다.
정무심은 천천히 소맷자락을 거두고 담담한 눈빛으로 모든 사람들을
한 번 쳐다본 후에 느릿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가시오.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하지!]
주반자는 크게 기뻐서 재빨리 허리를 구부렸다.
[그렇다면 불초는 정선생에게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정무심은 눈처럼 손을 내저었다.
[당신은 가 보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서 그는 눈을 감았다.
주반자는 박립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공자, 우리 갑시다.]
박립인은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정무심을 한 번 바라
보았다.
(네가 아무리 건방지게 굴어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나중에 내가
금루궁에 돌아가 아버님께 이 사실을 알리면 네 꼬락서니가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 그때 너는 영남 금루궁이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라
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잠시 동안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갑시다.]
곁에 서 있던 네 명의 젊은이들은 줄곧 박립인을 우두머리로 떠받들
고 그의 눈치를 보아 행동하고 하고 있었다.
그들은 돌계단 앞에 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가 이때 박립인의 말을 듣자 다투어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주반자는 정무심이 마음을 바꾸게 될까봐 허둥지둥 돌계단을 내려오
게 되었다.
박립인이 몸을 돌려 겨우 몇 걸음 옮겨 놓게 되었을 적에 다시 한마
디의 무거운 호통이 절간 쪽에서 흘러나왔다.
[게 서라!]
박립인은 검미를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정무심은 여전히 눈을 감고 앉았으며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마치 그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 같지 않았다.
주반자는 물었다.
[정선생...]
정무심은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니 당신은 가 보시오.]
그는 눈길을 돌려 다섯 젊은이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들의 집안 어른들은 자네들에게 예절을 가르치지 않았는가?]
박립인은 묵묵히 정무심을 바라보며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곁에 있던 능운검 하기봉이 볼멘 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은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오. 우리들은...]
그 말이 미쳐 끝나기도 전에 정무심의 안색이 변하더니 눈에서는 매
서운 광채를 쏘아 내며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뭐라고 했지?]
능운검은 자기의 말속에 아직도 어떤 병폐가 있었는지 알지 못하고
어리둥절해졌다.
[당신이 무림 선배라고 해서는 우리 젊은 사람들을 억누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오. 우리들도 이름 없는 사람은 아니오.]
정무심은 극도로 노해서 웃었다.
[하! 하! 하! 이름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정말 말 한 번 잘 하는구
나.]
그 말이 떨어지자 그는 다시 차갑고 살기 어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누구지?]
능운검 하기봉은 대답했다.
[불초는 하기봉이오. 화산의 제자이며 매화상인은 바로 불초의 사백부
님이오.]
정무심은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흠! 자네가 매화노귀의 이름을 내세우면 나를 놀라게 할 줄 아는가?
하가야, 너는 죽었다.]
박립인은 하기봉이 입을 열기도 전에 어느 덧 몸을 날려 그 앞을 가
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한 번도 누구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소. 오히려 당신이 무
림 선배의 신분을 믿고...]
주반자는이미 원만하게 해결된 일이 다시 갑작스럽게 변화를 일으
키자 박립인의 말을 중단시켰다.
[공자... 안 되오...]
박립인은 뭇 사람들의 우두머리로 자처하는 터에 어찌 하기봉이 정
무심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그도 하기봉이 거듭 정무심의 금기를 범했던 만큼 너그럽게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이것
저것 돌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매서운 어조로 주반자를 향해 소리쳤다.
[노주, 비키시오!]
주반자는 다급해진 나머지 온몸에서 땀을 뻘뻘 흘렸다
[공자, 정무심의 금기는 절세적이니 절대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아니
되오!]
쾌검 노빈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 하! 불초의 못난 견해로는 정노귀는 이미 몸에 중상을 입고
있어, 아무래도 다시는 그 절세 금음을 퉁겨내지 못할 것 같군.]
그는 옆에서 줄곧 차가운 시선으로 관찰을 하고 있었는데, 정무심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고 입에서 선혈을 토하게 되었을 때도 정무심이
이미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단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금성의 이름은 실로 사람들을 압도했던 것이었다.
그는 강남세가(江南世家) 출신이고 강남대협 노윤원의 아들로서 정무
심의 금을 퉁기는 절예가 초인적이어서 남에게 얻어맞아 내상을 입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무심이 소맷자락을 휘두르게 되었을 적에 그는 마침 금황
색의 소맷자락에서 핏자국을 발견하게 되었고 정무심의 몸에 이미 중
상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단정할 수 있었다.
그는 정무심과 같은 고수가 내상이 심하지 않으면 결코 피를 토하지
않음을 떠올리고 그래서 그와 같이 각박한 말을 한 것이었다.
정무심은 안색이 변했으며 악독하고 매서운 눈빛이 노빈의 얼굴에
쏘아졌다.
그의 입에서 느릿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자네는 누구인가?]
노빈은 가슴을 편 채 대답했다.
[불초는 쾌검 노빈이오.]
정무심이 말했다.
[자네는 혹시 강남 사람이 아닌가?]
노빈은 대답했다.
[조금도 틀림 없소. 가부는 노윤원이요.]
정무심은 갑자기 소리내어 웃었다.
[하! 하! 하! 노윤원이 강남대협이라 일컬어지고 있지만 내 눈으로 볼
때는 강아지만도 못해.]
노빈은 노해서 소리쳤다.
[속담에도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을 밀어낸다고 했소. 당신이 옛날에
위명을 크게 떨쳤다고 하나 강호에는 영웅 호걸들이 잇따라 배출되고
있소. 불초는 당신이 개뿔도 아니라고 생각하오.]
말하는 사이에 그는 어느 덧 허리에 찼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정무심은 흉측한 웃음을 흘렸다.
[허! 허! 허! 너는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애송아!]
그는 왼손으로 칠현금을 어루만지며 오른손의 다섯 손가락을 휙 뿌
리며 깊이 숨을 들이 마시면서 손가락 끝으로 금현을 퉁겼다.
쩡!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몇 걸음밖에 서 있던 노빈이 전신을
흠칫하더니 마치 커다란 방망이에 심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휘청하더
니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 가닥의 핏물이 그의 입에서 뿜어지며 청백색의 돌계단에 쓰러지
는데 그 핏물은 재빨리 빗물에 흐려지고 있었다.
느닷없이 들려온 금음에 돌계단 위에 섰던 네 명의 젊은이들은 자기
도 모르게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들이 어리둥절해지게 되었을 때 노빈이 땅바닥에 쓰러진 것을 보게
되었다.
박립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앗...!]
노빈은 피바닥 속에서 고개를 쳐들고 창백한 얼굴을 부들부들 떨더
니 즉시 고개를 떨구었다. 숨이 끊어진 것이었다.
능운검 하기봉과 노빈은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노빈이 죽는 것을 보자 두 눈이 충혈되어 호통을 질렀다.
[정가야! 목숨을 바쳐라!]
검의 광채를 번쩍이며 그는 몸을 날려 달려가며 장검으로 벼락같이
잇따라 사초를 펼쳐 내어 공격했다.
정무심은 손가락을 움직여 한번 금음을 퉁겨낸 후에 줄곧 음침한 안
색으로 노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줄기의 선혈이 노빈의 입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입가
에 잔혹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 웃음이 미쳐 입가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더
니 하기봉이 어느덧 몸을 날려 덮쳐 드는 것이 아닌가.
검의 광채는 세찼고 너무나 매서웠다. 정무심은 윗몸을 뒤로 슬쩍 제
치게 되었다. 이미 현을 퉁길 여유가 없어서 왼손으로 금을 잡고 재빨
리 후려치려고 들었다.
금빛의 광채가 급히 번뜩이는 가운데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 덧
금금은 하기봉의 검을 후려치게 되었다. 대뜸 검의 광채가 사라지고
장검은 땅바닥에 떨어지며 하기봉의 비쩍 마른 몸은 어느 덧 허공으
로 날아갔다.
검을 뻗쳐내고 현금으로 후려치고 검이 떨어지는 것은 삽시간에 일
어난 일이었다.
박립인과 두 명의 백씨쌍영(白氏雙英)은 모두 어리둥절해지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게 되었을 적에 하기봉의 신형이 되날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