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쉬어간 나무,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
【한국아트뉴스=어랑】500년 세월을 품은 천연기념물…바다와 농촌을 지켜온 ‘이순신 나무’
경남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의 평온한 농촌 마을. 짙푸른 바다와 논밭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 거대한 녹색 동산을 닮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299호로 지정된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다.
해안선을 따라 몇 개의 다리를 건너 창선도에 들어서면, 멀리서도 넓고 웅장한 나무의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많은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며 만들어낸 부드러운 반달 모양의 수관은 마치 커다란 우산을 펼쳐놓은 듯하다.
나무 가까이 다가가면 그 웅장함은 더욱 선명해진다. 굵은 밑동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진 줄기와 하늘을 가득 뒤덮은 가지마다 500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왕후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하는 늘푸른나무로, 일반적인 후박나무보다 잎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해안 지역에서 잘 자라고 뿌리를 깊게 내리기 때문에 예부터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으로도 활용됐다. 창선도 왕후박나무는 민속적·문화적·생물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신비한 씨앗
마을에는 왕후박나무의 탄생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약 500년 전, 이곳에 살던 노부부가 바다에서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다. 물고기의 배를 가르자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씨앗이 나왔다. 노부부가 그 씨앗을 마을 앞마당에 심었고, 싹이 자라 오늘날의 거대한 왕후박나무가 됐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나무를 신성하게 여기며 해마다 나무 아래에서 당제를 올리고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해왔다. 왕후박나무는 단순한 노거수를 넘어 주민들의 삶과 신앙, 공동체의 역사를 함께 간직한 마을의 수호목이다.
이순신 장군의 전설을 품은 나무
창선도 왕후박나무는 ‘이순신 나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마을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운 뒤 이 나무 아래에서 식사하고 휴식을 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난중일기』에도 이순신 장군이 1592년 한산도로 향하는 과정에서 창선도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장군이 실제로 이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는 내용은 지역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당시에도 이미 넉넉한 그늘을 드리울 만큼 자라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후박나무. 장군과 병사들이 잠시 무기를 내려놓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쉬어가는 모습을 떠올리면, 나무를 바라보는 감동이 더욱 깊어진다.
바다와 어우러진 한 폭의 풍경
왕후박나무의 아름다움은 나무 자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짙푸른 바다와 초록빛 논밭, 작은 섬과 농촌 마을이 나무를 둘러싸며 한 폭의 풍경화를 완성한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과 구름은 왕후박나무에 새로운 표정을 더한다.
넓게 퍼진 나무의 전체 형태를 담으려면 주변 바다와 논을 함께 넣어 촬영하는 것이 좋다. 굵은 줄기와 복잡하게 얽힌 가지에서는 세월의 질감을, 나무 아래에서는 그늘과 햇살이 만들어내는 빛의 변화를 표현할 수 있다.
50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바닷바람과 마을 사람들의 삶을 품어온 왕후박나무. 이 나무는 자연유산이면서 동시에 남해의 역사와 전설, 주민들의 간절한 소망이 살아 숨 쉬는 특별한 공간이다.
삼천포대교를 넘어 남해로 향하는 길에서 만나는 창선도 왕후박나무는 여행자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그리고 말없이 묻는다.
“당신은 이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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