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고려) 忠烈王(충열왕)때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고 三重大匡(삼중대광),今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에 올라 樞密院知奏事(추밀원지주사)로 固寧伯(고령백)에 封(봉)해진 貞烈公(정렬공)金潤華(김윤화)와 洛川君(낙천군)金隨(김수)가 有名(유명)했다.朝鮮時代(조선시대)에 와서는 良平公(양평공) 金彌(김미)의 맏아들 金彬吉(김빈길)이 뛰어났다. 그는 金末露王(김말로왕)의 34世孫(34세손)으로 1397年(太祖6年) 倭寇(왜구)를 擊退(격퇴)하는데 功(공)을 세워 三道水軍道節制使(삼도수군도절제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再侵(재침)한 倭寇(왜구)를 滅岳山(멸악산)에서 大破(대파)하여 兵曹判書(병조판서),正憲大夫(정헌대부),檢校正丞(검교정승)에 오르고 뒤에 右議政(우의정)에 追贈(추증)되었다.그의 아들 金原亮(김원량:吏曺正郞),金希亮(김희량
: 水原府使 兵曺判徐), 金文亮(김문량:戶曺判書)3兄弟(형제)도 모두벼슬에 登用(등용)되어 家門(가문)을 크게일으켰다.金慶賢(김경현)은 1467年(世祖13年)李施愛(이시애)가 反亂(반란)을 일으키자 左大將(좌대장) 魚有沼(어유소)의 從事官(종사관)으로 功(공)을 세워 咸吉道巡撫中軍(함길도순무중군)을 歷任(역임)하고 嘉善大夫(가선대부:從2品 文武官의 品階)에 올랐으며,金世應(김세응)도 이때 北靑(북청)에서 功(공)을 세워 魯城縣監(노성현감)을 지낸 後(후) 戶曹參議(호조참의)에 追贈(추증)되었다. 그밖의 人物(인물)로는 壬辰倭亂(임진왜란)때 倭敵(왜적)을 大破(대파)하여 守門將(수문장)에 오른 月村(월촌) 金仕弘(김사홍)과 肅宗(숙종)때 平海郡守(평해군수)를 거쳐 順天府使(순천부사)를 歷任(역임)한 金遇秋(김우추)가 有名(유명)했으며,金復光(김복광)은 孝行(효행)이 뛰어나 1718年(肅宗44年) 故鄕(고향)에서 孝行碑(효행비)를 세웠다.韓末(한말)에 와서는 金鳳燮(김봉섭)이 1905年乙巳條約(을사조약)이 締結(체결)되자 國運(국운)을 恨嘆(한탄)하며 五大山(오대산)에 隱遁(은둔)하였고,金重五(김중오)는 普通學校(보통학교)를 設立(설립)하여 民族精神(민족정신)을 鼓吹(고취)시키다가 韓日合邦(한일합방)이 되자 激憤(격분)함을 이기지 못해 哀死(애사)하여 家門(가문)을 더욱 빛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