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운 시집 {이명 耳鳴} 출간
배영운 시인은 28년간 공무원으로 재직했으며, 시집으로는 야산을 보며(2014), 초봄의 수양버들에서(2016), 차를 마시며(2016), 황홀한 우화(2020) 등이 있고, 현대 대구에서 시를 쓰며 살고 있다.
배영운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인 이명耳鳴)은 그동안의 문학적 역량을 집약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한 이가 발견한 소중한 가치를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배영운 시인이 발견한 소중한 가치의 이름은 ‘가족’이 될 수 있다. 그는 늙음의 상태에 도달한 노인의 입장에서 ‘부모’, ‘자식’, ‘부부’ 등을 자신의 시에 껴안는다. 사회의 핵심 단위이자 형태로서의 가족을 다양한 방식의 언어로 점검하는 시인의 시도가 아름답다.
눈에 차는 자식 하나 없다
하나같이 속을 썩이고
딸년들은 오면 가져갈 궁리만 한다
다른 집들은 안 그러지 싶다
지지리 복도 없지
내같이 복 없는 년은
세상천지에 없을 거다!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속으로 더 못 줘 또 마음 아프다
―「어미 맘」 전문
이 시는 앞에서 살핀 시 「부모 자식 간」과 비슷한 계열에 해당한다. 시 「부모 자식 간」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부모의 입장과 자식의 입장에서 각각 천착한다면, 시 「어미 맘」은 “어미” 또는 ‘엄마’의 입장에서 “자식” 또는 “딸년들”을 생각한다.
이번 시는 ‘딸들’을 향한 ‘엄마’의 “푸념” 또는 ‘원망’을 담는다. “하나같이 속을 썩이고/ 딸년들은 오면 가져갈 궁리만 한다”라는 2연의 진술은 시적 화자 ‘나’ 또는 ‘엄마’의 ‘푸념’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친정에 온 딸들이 돈도 가져가고 음식도 가져가는 등 뭐든 가져가기만 한다면, 엄마로서는 “눈에 차는 자식 하나 없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놀랍게도 딸들을 향한 ‘엄마’의 마음은 ‘푸념’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엄마는 성에 차지 않는 ‘자식’을 “다른 집들”의 ‘자식’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세상천지에 없을”, “복 없는 년”으로 규정하지만, 그녀의 ‘본심’은 달랐기 때문이다. 4연 2행의 “속으로 더 못 줘 또 마음 아프다”라는 문장에 담긴 엄마의 본심을 읽으며 많은 독자들은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무자식이 상팔자라 했던가
자식은 있어도 없어도 걱정
어릴 때 잠시도 손 놓을 수 없고
자라면 염려 속에 잔소리만 는다
자식은 애물단지
안쓰러워하고 속상해하고 후회하고……
그리고, 저절로 큰 줄 알고 시집 장가가면
제 새끼가 제일이고 부모는 뒷전이다
잘된 자식, 못된 자식
잘되면 제 탓, 못 되면 부모 탓
힘든 자식일수록 더 아프고 아리고 안타깝다
아픈 손가락이다
속 썩이는 자식을 두고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해!” 하던,
어느 노인의 한숨이 슬프고 우울하게 한다
―「자식이란」 전문
「부모 자식 간」, 「어미 맘」 등의 시와 유사한 계열을 형성하는 시가 「자식이란」이다. 배영운은 이번 시집에서 ‘자식’ 관련 시를 다수 제시하고 있는데 「자식이란」 역시 이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이번 시는 ‘자식’ 또는 ‘자녀’에 관한 본질을 통찰하고 있는 수작이다.
시인에 의하면 부모에게 자식은 기본적으로 “걱정”, “염려”, “잔소리”의 대상이자 “애물단지”이다. 결혼을 해도 후회하고, 결혼을 안 해도 후회한다, 라는 진술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아마도 결혼에는 장점과 단점이 섞여 있다는 이야기일 테다. 배영운에 따르면 자식에게도 비슷한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곧 “자식은 있어도 없어도 걱정”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이 있어서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아픈 손가락”이라 칭하는 “못 된 자식”, “힘든 자식”, “속 썩이는 자식”은 부모에게 “한숨”, ‘슬픔’, ‘우울’ 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젊어서 사랑으로 살고
중년에 자식으로 살고
노년에 정으로 산다
젊어선 서로를 알뜰하게 아끼고
중년은 자식 사랑으로 인내하고
노년은 미운 정 고운 정 이끌려 산다
그림자처럼 붙어 떨어질 수 없고
서로 닮아 육신의 한 부분처럼
불편함이 없다
젊었을 땐 연인(戀人)
중년은 조언자(助言者)
노년은 친구(親舊)
말없이 교감(交感)하고
습관같이 약속하며
내 몸같이 한 몸으로 산다
―「부부(夫婦)」 전문
배영운은 이번 시집 {이명 耳鳴}에서 ‘노인’ 또는 ‘늙음’의 대상으로서의 자신에 집중하거나, 나이든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생각하는 시들을 생산하였다. 이 시는 “부부”에 주목한다. 시인이 여기에서 주목하는 ‘부부’는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 보낸 “노년”의 부부일 테다.
배영운에 의하면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노년’의 부부에 도달하려면 ‘청년’과 “중년” 등 이전 단계를 거쳐야 한다. 다섯 개의 연으로 구성된 이번 시에서 1연, 2연, 4연 등은 각각 3행으로 이루어지는데 공통적으로 1행에서는 젊은 시절을 다루고, 2행에서는 중년 시기를 언급하며, 3행에서는 노년 시기를 다룬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시인에 따르면 청년 부부는 “사랑”을 내세우는 “연인(戀人)”이고, 중년 부부는 “자식”으로 연결되는 “조언자(助言者)”이며, 노년 부부는 “정”으로 함께 사는 “친구(親舊)”이다. 시(詩)로 쓴 부부론(夫婦論)으로 평가할만한 이번 작품에 공감할 독자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배영운 시집 {이명 耳鳴}, 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