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선한 사마리아인이 됩시다!(눅10:25-37)
- 우리는 이런 교회를 꿈꾼다 ① -
2023.1.8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사랑해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 중의 하나가 어려운 이웃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는 종교나 교파나 인종을 초월해서 존경받는 분이다. 어느 날 밤 테레사가 어린아이들이 8명이나 되는 인도 캘커타 빈민촌의 어느 가난한 성도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집의 아이들은 이미 오랜 영양실조로 얼굴에 뼈만 남아 있었다. 테레사는 아이들의 엄마에게 가져온 쌀을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쌀을 나누더니 절반을 들고 얼마동안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다. 테레사가 그녀에게 어디에 갔다 온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웃집에요. 그 집도 배가 고프거든요!”
이 말을 들은 테레사는 그녀가 이웃집도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대게 사람들은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마음을 돌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설령 안다 해도 내 것을 나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들은 어떤가? 이웃의 눈물을 알고 있는가? 이런 종류의 질문들이 요즘처럼 나하나 살기도 바쁜 세상에서는 사치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행복은 관계에서 오고, 관계는 필요를 섬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필요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볼 때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던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님도 이렇게 말한바 있다.
“누구나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구나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의 말처럼, 어려운 이웃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 남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봉사자(the greatest service of God) 이시다.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죄와 고통 속에 신음하는 우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독생자를 보내기로 결정하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영혼육의 모든 필요를 채우기 위해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당하셨다.
새해가 되면서 말씀묵상과 기도 중에 우리교회와 성도들은 어떤 교회와 성도들이 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실 지를 생각해 보았다(주님이 바라시고, 우리들이 꿈꾸는 교회의 모습).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 우리들이 꿈꾸는 교회와 성도의 모습을 함께 나눌 것이다. 그 중에도 주님께서 말씀 묵상 중에 주신 첫 번째는 모든 성도들이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려운 이웃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이 이야기는 어떤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일 목적으로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했을 때, 대답해 주신 말씀이다(눅10:29).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게 되었다.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사람을 보고도 피해서 가버렸다. 왜 이들은 그냥 지나가 버렸을까? 이런 저런 이유들을 추론해 볼 수 있겠지만, 어쩌면 ‘보는 사람이 없어서’라는 말이 정확하지 않을까? 만약 다른 사람들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쉽게 그냥 지나갈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세 명의 걸인들이 나란히 앉아있고, 어떤 여자가 가운데 있는 걸인에게 적선하고 있는 그림이 있다(좌측). 그런데 자세히 보면 유독 가운데 있는 걸인 앞에 더 많은 돈이 놓여 있다. 왜 가운데 앉은 걸인에게 더 많은 돈이 쌓여 있을까? 해답은 CCTV의 방향에 있다. 가운데 앉은 걸인의 뒤에 CCTV가 있다. 어쩌면 이 그림에서 나오는 여인과 같은 심리나 행동이 바로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가 버린 제사장이나 레위인 또는 우리들의 이중적인 모습과 비슷하지 않는가?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렇지 않았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 그래서 상처를 싸매주고, 주막에 데려가 돌보아 주었다. 심지어 주막 주인에게 돈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 주겠다고 까지 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 10:33)
여기서 쓰인 “불쌍히 여겨(에스플랑크니스데)”라는 말은 ‘긍휼(Compassion)’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이 단어는 마음이 아플 정도의 애정과 연민으로 가득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했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이셨다.
생각해 보면, 나눔과 섬김(봉사)은 단지 이웃의 필요를 채우고 사랑하는 것 이전에 주님의 필요를 채우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봉사와 섬김은 반드시 전도의 목적이 아니라도, 봉사는 봉사 자체만으로 이미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나눔과 섬김은 어려운 이웃의 친구가 되는 것 이전에 사실은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하버드대 의대교수이면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인생연구’의 책임자로 있는 로버트 윌딩어 교수는 신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1월2일 특집기사) 한국인들은 서울대나 하버드대를 나오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하버드대를 나온 사람들이라고 해서 결코 더 행복한 삶을 산 것이 아니고, 사람들과의 따뜻한 관계가 행복의 열쇠였다. 특히 나이가 들어가고 노년으로 갈수록 더욱 더 다른 사람들과의 질적인 관계에 행복이 달렸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윌딩어 교수 같은 분은 수십 년 동안 연구해서 행복한 관계의 중요성을 알았지만, 사실 알고보면 우리들은 이미 성경말씀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너무도 알고 있어 왔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그 사랑의 관계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면, 이웃의 필요가 보이고, 나눔과 섬김으로 필요를 채우면,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나도 엄마가 있어요(I have a mother too)”라는 제목의 사진이 있다(좌측). 인도 어느 고아원의 소녀가 엄마 그림을 그리고 그 속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을 때, 어느 사진작가가 찍은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에 대해서 더 설명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지금 우리 주변에도 안 보이는 곳에서 사진 속의 아이처럼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나라에서 지난 4년 동안 우울증 진단을 받은 2030 청년들이 50% 급증했다고 한다. 출산율은 세계 꼴찌인데, 자살률은 OECD국가 중에 1위이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한국인들의 모습이다. 마치 우리 사회는 강도만난 사람들과 같은 상태에 있다. 이들을 향해서 단지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본 것으로만 끝낼 것인가, 아니면 사마리아인처럼 주님의 마음으로 다가갈 것인가? 우리교회와 성도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지는 명확하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보든 안보든 상관없이 찾아가서 사랑을 베푸는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되자.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의 모습이고, 우리가 꿈꾸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 주님은 더 잘 섬길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