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일 목요일 맑음. 처음으로 신경주까지 ktx로
서울서 우리 고향 영해까지 다니는 길은 안동을 경유하거나, 대구를 경유하는 게 보통이나, 오늘은 신경주까지 특급열차가 다닌다고 해서 처음으로 그것을 타 보았다. 거기서 포항까지는 1시간에 한번씩 다니는 버스가 있다는데, 모르고서 경주시내로 들어가서 다시 포항가는 버스를 갈아타고서 고향 집까지 오니 서울역을 떠난지 5시간 반쯤 걸리었다. 이만하여도 많이 시간이 단축된 것이다. 또 요즘 기차나 버스가 모두 얼마나 편한가?
시골집에도 우리가 태어나고 자랐던 안방에까지 겹 창문을 하고 보일러와 수세식 변소를 설치하여 매우 편리하게 되어 있다. 옛날에는 겨울만 되면 그 방 바닥에 타작한 벼를 말리려고 늘어놓고서, 그 위에 엉성한 대나무 자리를 깔고서 거처를 하였는데, 밤만 되면 쥐가 출몰하여 안식구들이 밤잠을 설치기도 하였고, 또 어린 아이들에게 기저귀라는 것을 채우지 않고, 똥을 자리위에 누면 흔히 개를 불러다가 핥다먹게 한 뒤에 걸레로 대강 닦고 지냈다. 그러던 옛날 방에 윗쪽에는 수세식 변소와 사워를 설치하고, 아랫쪽에는 난방용 보일러까지 설치하다니!
사촌 동생이 그 방에서 혼자 자라고 하고 자기는 딴 방에 들어가서 잤다. 장작불을 넣고 자는 온돌이 아니어서 좀 뜻밖이었으나, 전기 불 조명이 밝아서 밤중에도 마음 놓고 책을 좀 읽을 수 있었다.
11월 21일 금요일. 맑음. 형제봉 산소에 성묘
10대 조부 산소가 있는 형제봉(영해읍에서 보면 가장 높게 보이는 산, 해발 800이상) 중턱에 사촌과 같이 걸어올라가서 벌초를 하고, 가을 묘 제사를 지냈다. 우리 집안의 산소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가장 명당으로 치는 자리인데, 내가 맡아서 몇 년째 가을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가을이면 단풍이 절경이고, 동해 바다도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곳이니 등산코스로도 이만한 곳이 없다.
근년에는 이산 꼭대기 뒷쪽으로 풍력발전기를 설치하고, 또 임도林道가 산소 가까운 곳까지 나서 그 길로 차를 몰고 올라갈 수도 있으나, 11월 초부터는 그것을 닫아두어, 오늘은 두 사람이 산 밑에 차를 세워두고서 임도를 따라서 걸어서 올라갔는데, 단풍은 이미 퇴색하였으나, 몇일 전에 비가 많이 내려 골짜기 마다 깨끗한 물이 제법 많이 흘러 내렸다. 이 일대야 말로 완전한 청정지역이니 그 물을 그냥 마셔도 될 것 같고, 발이라도 좀 담구어 보았으면 싶었으나 길이 멀고 저녁 약속도 있어 그렇게 여유 있게 놀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오후 5시경에 내려와서 집안사람들 5명과 함께 병곡 고래불 해수욕장 북쪽에 있는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서 잤다.
11월 22일 토요일. 흐림. 다시 신경주를 경유 상경
새벽 2시 반에 잠이 깨었다. 전기를 켜놓고 앉아서 있다가 좀 밝아지자 나가서 가까이 있는 집안 산소를 들려보고 들어와서, 사촌에게 아침대신 홍시 2개와 꿀물 한 잔을 달라고 해서 먹고서는 영해읍까지 그 사람의 차를 타고 나왔다. 이틀 전에 오던 길을 다시 돌아서,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 신경주역을 들어와서, 아침 겸 점심을 사서 먹고 서울역에 오니 1시 반쯤 되었다.
이전보다는 그래도 많이 빨리 다닐 수 있게 된 것 같다. 어제 갔던 조용하고 아름다운 고향 산길을 다시 자주 밟게 되었으면 싶어진다. 이곳이 바로 내 집안 뿌리가 500여년 동안 조용하게 서린 곳이 아닌가?
첫댓글 선생님 고향집을 저희도 그려볼 수 있습니다.선생님처럼 추억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잘 것 없는 글을 읽고 댓글까지 달아주니 고맙습니다. 사실은 좀 긴 감상문을 초하여 두었으나 너무 사적인 추억을 공개한다는 게 좀 멋적어 다 적지 못하였습니다. 앞으로 틈이 있으면 책이라도 한권 쓸가하고 생각중입니다.
고향이 너무나 멋져 보입니다. 가족이 해체되는 요즘 선생님의 글을보면 새롭게 가족이 복원되는 느낌입니다.
옛날엔 영해의 수령이 부사였으니 영덕보다 더 큰 곳이였을 것이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