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해쪽 여행을 많이 못했습니다.
해서 늘 가보고 싶은 차에
부산일보 (busanilbo.com )에 강화도 보문사 소개를 하고 있군요.
시인이 쓴 글이라 참 좋군요.
같이 나누고 싶은 좋은 기획 프로그램도 많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부산일보 (busanilbo.com )를 찾아가 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행복하십시오!!
[이산하 시인의 산사기행] <9> 강화도 보문사
탁트인 풍광 멋진 천년고찰, 연중 참배객 가득한 기도도량
배를 타고 강화도 보문사로 가는데 인디언 이야기가 불쑥 떠오른다. 어느 곳으로 가든 무엇을 보든 요즘의 내 버릇이다. 인디언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풀들은 '키 작은 형제', 나무들은 '키 큰 형제'라 부르며 잎이나 줄기에 귀를 대고 풀과 나무들의 속삭임을 듣는 훈련을 받는다. 먼저 귀 기울이지 않으면 세상과 자연의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다는 어른들의 철저한 교육 때문이다. 이 아이들이 자라면 나중에 풀과 나무들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수액 올라가는 소리만 듣고도 그들의 건강과 심리상태를 알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최소한의 삶을 위해 사냥을 할 때도 사냥 가기 전에 먼저 반드시 동물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먹기 전에도 꼭 기도한다.
'우리 작은 형제들이여,너희들을 죽여야만 해서 미안하구나. 지금 우리 아이들이 배가 고파 울고 있단다. 부디 용서해 다오. 잘 가거라,우리 작은 형제들이여.'
인디언들은 고기는 먹되 영혼은 먹지 않는다. 그들은 동물들처럼 생존에 꼭 필요한 만큼만 고기를 취한다. 자연이 잠시 빌려준 생명이므로 다시 자연에게 반납할 때까지 자연의 일부만 취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요즘 한동안 인디언 음악과 다큐멘터리에 흠뻑 빠져 있었더니,보고 생각하는 것마다 인디언의 피가 콸콸 흐르는 것 같다. 죽음보다 깊은 밤,방 안의 모든 불을 끈 채 자폐아처럼 혼자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인디언 음악을 듣고 있으면,마치 동물 다큐멘터리의 배경음악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도 주어진 생을 체념하고 수용하는 듯한 그 잔잔한 깊이의 음률과 죽어 가는 어머니의 맥박을 짚는 듯한 그 아득한 저음이 나의 영혼을 하염없이 적셔놓는다.
강화도 선착장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보문사로 가는 길은 떠나는 겨울과 오는 봄이 겹쳐진 풍광이어서 눈 속의 꽃을 볼 때처럼 내 마음의 그늘부터 먼저 뜨거워져 온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은 늘 사물에 대한 감도를 엇갈리게 해 삶의 발목이 접질리기가 쉽다. 특히 머리에는 싹이 트는데 발 밑에는 잔설이 깔려 있는 이른 초봄일수록 더욱 위험한 것이다. 한 생이 매듭지어지고 다른 생이 시작되는 그 경계는 아슬아슬하게 바통을 이어받는 릴레이 경기처럼 단절과 연속의 낙차를 오로지 바통 하나에 걸고 있다. 바통 없이는 달릴 수도 없으며,달리는 의미도 없다. 그 바통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 주는 침묵의 언어이자 달리기와 달리기를 이어주는 고삐 같은 굴레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지막 주자는 앞서 달린 모든 이들의 모든 무게와 호흡들을 짊어지고 달리는 것이다. 모래알 같은 공기를 거칠게 몰아쉬면서 혼자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외로이 달리는 것이다. 생의 낙차가 깊어지면 호흡이 가팔라지고,호흡이 가파르면 바통을 떨어뜨린 주자처럼 생의 마감도 가파르게 다가온다. 어차피 가파르게 살아온 생이라면 거꾸로 봄에서 겨울로 간다 한들,아니 뜨거운 여름에서 추운 겨울로 곧장 간다 한들 무엇이 더 가팔라지겠는가. 애당초 건네주고 이어받을 바통도 없었던 생이 아니던가. 바통 없이도 달리는 삶이 진짜 삶이고,바통이 있어야만 달릴 수 있는 삶은 가짜 삶이다. 그런데 나는 그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서 자주 바통을 떨어뜨리고 만다. 그래서 항상 엇갈리는 사랑이 되풀이될 것 같은 계절의 간이역이 슬픈 것이고 그 가운데서도 이른 초봄은 더욱 슬픈 것이다.
나의 이같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난 이미 그 초봄의 한복판에 두 발을 내리고 있었다. 보문사 입구의 주차장은 밴댕이젓갈이 가득 쌓인 좌판들과 절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시음용이니 일단 맛이라도 보라'며 권하는 강화 인삼막걸리 장수 아주머니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방앗간 그냥 지나치는 새 없듯 몇 군데 기웃거리며 넙죽넙죽 받아먹은 인삼막걸리는 그 걸쭉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이 혀를 착착 감아 온다. 싱싱한 오이와 깻잎,상추를 듬성듬성 썰어 넣어 버무린 도토리묵과 고추장에 푹 찍어 먹는 풋고추 안주도 있겠다 싶어 그냥 눌러앉아 서해낙조가 질 때까지 취해 버리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어디 오늘만 날인가. 간신히 후일을 기약하고 돌아서는데,제법 술기운이 얼큰하게 오른다.
주차장에서 일주문을 거쳐 절 마당까지 가는 길은 숨 고를 곳도 없는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절 마당에 올라서니 짙푸른 서해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갯벌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라 선덕여왕 때 금강산에서 내려온 회정 스님이 창건했다는 낙가산 중턱의 이 보문사는 그다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매년 40만~50만명이나 찾는 천년고찰이다. 동해 낙산사의 홍련암,남해 금산의 보리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3대 기도터인 이 세 절은 모두 바닷가에 있다. 절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바다의 일부가 되어 있고,바다 또한 절을 올려다보며 절의 일부가 되어 있다. 그 절과 바다 사이에 사람이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또 부처가 있다.
400여 계단을 밟으며 우여곡절 끝에 염불소리가 우렁찬 눈썹바위까지 올라가 뒤돌아 섰는데,한 마디로 가슴이 탁 트이는 풍광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을 배경으로 고기잡이 어선들이 미끄러지듯 물살을 가르는 서해 바다며,이름 모를 무덤처럼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들과 암초들이며,끝없이 펼쳐진 갯벌 너머 염전지대와 수차들이 기지개를 펼 채비를 하고 있는 듯 부지런히 오가는 염부들의 손길이 바쁘다.
일찍이 강화 8경으로 유명한 절경이 내 시야 가득히 찰랑거린다. 마애불이 새겨진 거대한 눈썹바위 아래에는 두툼한 옷을 입은 수십 명의 참배객들이 절을 하고 있다. 촛불들이 타오르는 복전함 주위로 울긋불긋한 과일바구니들과 쌀을 비롯한 깨,콩,보리쌀 등의 잡곡 광주리들이 제물처럼 늘어서 있었다. 이 마애불은 1920년대 말 보문사 배선주 주지스님과 금강산 표훈사의 이화응 스님이 절벽의 위험을 무릅쓰고 몇 년에 걸쳐 피땀 흘려 깎은 아주 귀중한 관음보살상이다. 불상이 앉은 곳은 멀리서 보면 관음보살의 눈동자에 해당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돌아오면서 그 유명한 서해낙조를 만났다. 갯벌과 염전지대를 거쳐 수평선 끝까지 길게 드리운 붉은 저녁노을이 서럽도록 찬란하다. 20여년 전,지금은 사라진 협궤열차를 타고 인천 소래역에 간 적이 있었다. 저녁노을에 붉게 물들어 가는 하얀 소금탑들과 낡은 소금창고들이 고색창연한 풍경으로 다가오고,염전 위로 목선을 타고 돌아오는 염부들의 지친 어깨가 그렇게 가슴 저밀 수가 없었다. 물이 마르면 하얗게 남는 소금들. 그것이 당시 내 눈부시도록 고요한 마음의 바다였다.
그런데 지금의 내 바다에는 소금이 없다. 나는 바다를 헛짚고 있는 것이다. 바다의 넓이와 깊이에만 경도한 나머지 그것이 결국 하나의 작은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이와 깊이를 가진 공간이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큰 것이 작은 것을 겸하지 못한다는 것 못지 않게 인디언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다를 단순히 소금을 담는 빈 공간으로만 생각한다면 나는 한없이 슬퍼진다. 내 진정한 슬픔은 나도 주체 못하는 사슬이요 장벽이다. 그 끊을 수도 넘을 수도 없는 슬픔의 바닥에 눈물이 다 마르고 나면 마침내 하얗게 소금들이 남을 것이다. 아직 나는 더 슬퍼져야 한다.
이제 붉은 해는 서해낙조라 불리는 모든 삶의 후광들을 다 거둬들이고 어부의 제사상에 오른 홍시처럼 바다 끝에 얌전히 앉아 있다. 빛도 그림자도 없이 제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옆에 나도 같이 앉아 있고 싶다. 얌전하게.
입력시간: 2002. 02.14.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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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하 시인은?
△1960년 부산 출생
△부산 경남중 혜광고 졸업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82년 동인지 '시운동' 등단
△1987년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절필.
△1998년 '문학동네' 통해 재활동
△1999년 도서출판 '이레' 편집주간
△2000년 '현대문학' 편집주간
△2001년 도서출판 '명상' 편집주간
첫댓글 글이란 누가 쓰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집니다,,,뻔히 보고도 못 느끼는 마음도 있고, 그 속의 미세한 부분도 읽어내는 마음을 가진 이도있고,,,, 가슴 찡 한 글 고맙게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