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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묵상글 들 ( 연중 2주 화요일-최우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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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주 화요일-최우선
지혜로운 사람이랄까 슬기로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러므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무조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지식이 많은지 모르지만
지혜가 많은 사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무리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지혜로운 자라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몰라도
행복에 대해서는 잘 아는 사람이며
무엇이 진정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앞에서 얘기한 지식이나 재산이나 지위가
행복하게 한다고 알고 있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죽자사자 가지려고 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행복에 전혀 이바지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분명 행복의 한 요소들이지요.
사실 너무 가난해서 하루하루 살기도 힘들고 영양 결핍으로 갖가지 병이
있다면 성인 경지에 오르지 않은 한 그럼에도 행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라고
잠언이 얘기하듯이 적당하게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고 사랑 이외의 그 어떤 것도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며 그러기에 돈이든 지식이든 지위든 사랑을 위해
그것들이 쓰일 때 행복에 이바지합니다.
예를 들어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때
돈은 행복에 이바지할 뿐 아니라 돈이 바로 사랑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 이외의 모든 것은 다 사랑의 아랫것들이고,
사랑에 종속돼야 하는 것들인데 이것이 뒤바뀌는 것 곧
주종이 뒤바뀌는 것이 우리 인생에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니 이제 이것을 오늘 복음에 비추어보겠습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라고 따지는데
무엇이 주인이고 무엇이 종입니까?
사람이 주인이고 안식일이 종입니다.
안식일에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미움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최우선하고 사람이 제일 소중한 것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최우선한다는 것은 하느님보다 사람을 우선하고
하느님보다 사람이 더 소중하다는 말인데 그래도 됩니까?
하느님 이외의 그 모든 것보다 사람을 최우선한다는 뜻이지만
하느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듯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니 당연히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고,
모두를 사랑하면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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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연중 2주간 화요일.<물러진 법>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놀 때 놀고 일할 때 일하며, 쉬고 싶을 때 마음껏 쉬고 싶습니다. 주일 미사참례의 의무는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가름하고 휴일을 즐기고 싶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 성당을 찾았는데 미사참례의 계명이 오히려 자유를 옭아매는 느낌이 들어 싫습니다.' 요즘, 비대면 미사를 하다 보니 성당을 가지 않는 것이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교회법에서는 “미사참례 계명은 주일이나 의무축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에 어디서든지 가톨릭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이행된다”(교회법1248조1항). 고 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사가 없는 공소에서는 공소예절(말씀의 전례)에 참례하여야 하고, 공소예절도 참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개인이나 가족끼리 합당한 시간동안 기도에 몰두하도록 권장합니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 예수님께서 33살까지 사셨으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33번을 바치라는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옛날에 우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한글도 모르고, 성경도 라틴어로 된 책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대신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성당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주일 미사참례 의무를 대신하려 한다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2,28).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법조문 보다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쉬어야 함을 내용으로 합니다. 이는 인간이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규정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안식일 규정을 강화하는 가운데 본래의 의미를 잊고 자구에 매인 나머지 단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집착하여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규정들을 세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선과 생명에 보탬이 되기보다 되레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굴레와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단지 일을 해서는 안 되는 날이 아니라 선과 생명에 도움이 되는 날이어야 합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고해성사를 보시면서 “안식에 해서는 안 될 일,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규정을 생각하기보다 그 의미, 알맹이를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요즘 법은 왜 그리 물러졌어요?” 하셨습니다.
안식을 취해야 할 주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영혼의 안식을 취하는 날로 보내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단순히 미사참례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취하고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이날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며 성체성사의 양식으로 배 불리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분명,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해방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확대해석하여 사람들에게 짐을 지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원의와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을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곧 인간을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가르치는 전권을 가진 자로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이영헌).
그러므로 보다, 적극적인 마음으로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미사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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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연중 제2주간 화요일 /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마르코 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분명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확언하시며, 모든 제도와 율법 위에 당신의 권위가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명 앞에 나온 마르코 복음서 2장 10절의 ‘사람의 아들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진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 때 받은 은총의 수혜자로 자유로이 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올바른 의미로 어려운 상황에서 위축된 사람들을 회복된 삶, 구원된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안식일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날로, 이런 개념은 모든 안식일의 규정이나 법규를 넘어섭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때 기도를 많이 할까요? 그리고 어떤 때에 기도하여야 하느님께서 잘 들어주실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기만 하면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언제 기도를 하여야 주님께서 잘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나요? 사실 매일매일 기도 가운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응답하고 계십니다.
때때로 우리가 너무 규범적이고, 율법과 같은 법규 준수에 머물러 있거나,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따지고 자신의 생각대로만 분석하려고 하여 올바로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율법을 보호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 위에 계신 최고 권위시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진 권위만을 주장하게 됩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은 잘 짜여진 그물 같은 바리사이들의 세상에 하나의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주님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분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기도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의 삶이 구원으로 초대된 삶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 신우식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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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연중 2주 화)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마르 2,23)
예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밀밭 사이를 질러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세상에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2,22). 그들이 바로 하느님 밀밭의 일꾼들임을 암시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는 것은 그들을 교회의 사도적 활동에 참여시킴을 암시해줍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바리사이들은 문제를 삼은 것은 그들이 남의 곡식을 수확했다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된다’는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의 본질과 우선순위를 깨닫게 됩니다. 곧 ‘해야 할 일’(생명을 살리고 축복하고 하느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생명을 저해하고 자신이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자신의 유익과 유쾌함 따르는 일)의 순위를 보게 됩니다. 오늘, 진정 ‘나는 어떤 일을 우선하는 사람일까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왜 세우신 것일까?
그리고 그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그리고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야훼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장면에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너희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야훼임을 알리라.”(탈출 31,13)
이처럼, 안식일을 새운 이유를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혀줍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또한,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는 안식일이 누구를 위한 날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쉼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요, 율법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마르 2,25)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은총으로 바꾸십니다. 그렇게 해서,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으며,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 그것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임을 밝히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읽는 것을 넘어서, 그 ‘성경을 어떻게 읽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주님!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새 옷을 입히시니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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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연중 제2주간 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창조해 주셨다. 그래서 인간이 노력하면 그 결실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므로 본래 안식일의 의미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감사드리고 계속 그 축복을 비는 날이었다. 즉 생명의 하느님께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 근본정신이다.
안식일이라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여 생명이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선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베푸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존재한 다음에 생긴 것이며, 그 법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법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인간이 생겨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간은 칠 일로 되어있다. 하느님께서는 엿새는 노동을 위해 주셨고, 하루는 기도와 휴식과 죄 씻음을 위해 허락하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엿새 동안 이런저런 죄에 떨어졌다면, 주님의 날에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 주님의 집에 가서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고, 주님께 대한 감사로 기도를 마무리하여야 한다. 그렇게 깨끗하게 된다면 제단으로 나아가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자르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항의를 하고 예수께서 그에 대한 답을 하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27절). 이 말씀으로 바리사이들의 비난에 대해 대답을 하신다. 즉 하느님께서는 먼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다음에 안식일을 정하셨다는 천지창조 사화(창세 1,26-2,4)의 이야기와 같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안식일의 의미 자체를 밝히는 원칙적인 답변이다. 즉 법보다도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을 내세우셨다. 즉 법률 만능주의가 아니라 인권을, 즉 안식일 법보다 인간애를 앞세우셨다(참조: 마르 3,1-6; 루카 13,10-17; 14,1-6; 요한 5,1-8; 9,1-41). 그리고 하느님의 전권을 받으신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28절)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 주일을 안식일 본래의 의미대로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데, 주일을 지키는 것을 강박관념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되고,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미사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현대적인 율법주의일 것이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사를 지내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주일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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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3-28)”
이 이야기는 “안식일은 어떤 날인가? 안식일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이고, 넓은 뜻으로 “율법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1)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은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다(마태 12,1).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만 생각하고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바리사이들의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율법을 안 지키는 무리’ 라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제자들의 배고픔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변호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심심풀이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다윗이 한 일을 말씀하신 것은,
이웃에게 율법 준수를 강요하기 전에 먼저 이웃의 사정을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한 일은 분명히 율법을 어긴 일이었지만, 배가 고파서 한 일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무도(바리사이들도) 다윗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상황입니다.
율법을 못 지키는 것과 안 지키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못 지킨 것과 안 지킨 것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프다는 것을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각자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남의 사정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율법을 못 지킨 것인지,
안 지킨 것인지를 바로 아시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양심을 모릅니다.
따라서 판단하기 전에 그냥 존중해 주고 배려해 주는 것이 옳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기로 유명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철저함’이 곧 ‘거룩함’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배고픔’을 말씀하신 것은,
“사랑 없는 거룩함은 거룩함이 아니다.” 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함’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또 ‘사랑 없는 거룩함’이 남을 비난하는 무기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정하신 안식일은 ‘사랑으로’ 지켜야 합니다.
사랑 없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즉 사랑 실천을 하나도 안 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3)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모든 율법과 모든 법에 대해서 다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법보다 위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명들과 율법들을 내려주신 것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즉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려고
계명들과 율법들을 내려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계명들과 율법들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절대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율법을 하느님보다 위에 두기도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로마 3,23-25ㄴ).”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를 비판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부 종파에서 ‘믿음만으로’,
즉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의 의도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2장에서는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로마 2,6-7).” 라고 말했습니다.>
4)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는 말씀은,
안식일 규정을 비롯해서 율법 실천은
당신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하느님이신데,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전권을 주셨기 때문에(마태 28,18),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안식일을(또는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고
판단하는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도 함께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그 일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즉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하느님의 사랑’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로
해석되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율법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방법이고(로마 13,10),
율법 준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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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연중 제2주간 화요일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함께하는 신부님들끼리 코로나 검사를 받았습니다. 증상이 없는데 받을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혹시 양성으로 확진자가 되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신자분들을 자주 만나기 때문에, 저도 업무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 때문에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결과 음성판정을 받으면 안심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검사결과 양성판정을 받으면 자가 격리를 하면서 충분한 휴식을 하면 좋습니다. 물론 법적으로 증상이 없으면 굳이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검사를 받는 것은 본인을 위해서도, 이웃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한국도 선별진료소를 많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본인이 원하면 증상이 없어도 무료로 검사를 해 준다고 합니다. 이렇게 검사를 해서 증상이 없는 사람들 중에 양성판정을 받은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방법이 코로나19의 확산을 막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눈이 많이 왔었고,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은 고백성사를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한 어르신이 전화로 고백성사를 볼 수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교회법적으로 전화로 고백성사를 보는 것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성사가 남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의 비밀이 지켜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화로 고민을 이야기하거나, 신앙 상담을 할 수는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은 사회생활은 물론 신앙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저도 대림특강을 영상으로 하였습니다. 많은 신자분들이 영상으로 미사를 보았습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신앙의 갈증을 해소한다고 합니다. 신법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법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 있고, 바꿀 수 있습니다. 남용되거나, 오용되지 않는다고 하면 신앙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사목자의 신중한 판단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법의 절차를 따르는 것도 필요하지만 법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기준을 넘어서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성공, 재력, 권력, 명예, 능력, 지위, 업적은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서 섬기라고도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하는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주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가난한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행복의 기준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획일적인 가치와 제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기존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어떻게 해석하고 싶으신지요? 교회의 법과 규정은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요? ‘안식일의 규정은 최소한의 것이지 좀 더 사랑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석을 할까요? 저는 두 번째 의견에 저의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교황님께서도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교회의 전통과 관습을 너무 쉽게 버리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분명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너무 절대시 하면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해석 기준은 좀 더 온전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식일 규정과 법을 넘어 이웃을 위한 헌신과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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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연중 제2주간 화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
- 신망애信望愛의 삶 -
누구나 원하는 바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누가 과연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신망애信望愛 즉 믿음, 희망, 사랑의 사람입니다. 진정한 영적 성장은 신망애의 성장입니다. 최고의 보물이, 보약이 신망애 향주삼덕입니다. 육신은 비록 세월 흘러 나이들어 노쇠해가도 신망애의 영적성장은 죽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주 인용했던 바 불교의 사찰에서 두 자산은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그대로 이 둘은 절의 산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절이나 수도원을 찾을 때도 우선 확인하는 것이 노수도승과 노목입니다. 예전 수도원 초창기 두 노수사님(빌립보, 마인라도)을 함께 파견한 까닭에 대한 아빠스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젊은 수도자들만 있으면 고아원 같아 노수도자도 함께 보낸다!”
사실 잘 성장한 노선배는 보고 배울 스승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보고 배울 것은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 향주삼덕입니다. 며칠전 작년에 죽은 노목 소나무 일곱을 베어 냈습니다. 거의 100년 수령에 육박했던 나무들의 생애가 흡사 사람들의 생애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하루 자라서 거목이 되는 나무들처럼 사람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처럼 수령이 있어 수명을 다하면 나무 역시 죽습니다.
나무의 성장이 상징하는바 우리의 영적성장입니다. 영적성장이 없는 삶은 무의미합니다. 바로 신망애의 영적성장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향주삼덕 이전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신망애, 향인삼덕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끝없는 기대, 즉 하느님의 신뢰와 믿음, 사랑입니다. 참으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를 신뢰하고 희망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이며 이를 깨달을 때 끊임없이 샘솟는 힘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자기를 신뢰하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압니다. 참으로 신뢰받고 희망의 대상이 되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때 참으로 높은 자존감에 이웃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신뢰를, 희망을, 사랑을 받고 있으면 더욱 하느님을 신뢰하고 희망하고 사랑할 것이며, 이것이 진정 살 힘을 줍니다.
수도원의 일출 장면이 참 장관입니다. 제가 가장 많이 찍는 카톡 사진중 하나가 일출장면입니다. 바로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이 바로 우리 인간에 대한 주님의 한결같은 믿음, 희망, 사랑의 표현입니다. 끝까지 우리에 대한 신뢰와 희망,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이십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을 깨달을 때 한결같은 성소도 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신뢰를, 희망을, 사랑을 깨달았던 대표적 인물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과 다윗, 아브라함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의 신뢰와 희망과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었기에 저리도 당당하고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바리사이의 비유가 아니라 예수님과 다윗의 비유라 함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다윗에 견주어 말합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에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바로 사무엘 상권21장에 나오는 다윗의 예화입니다. 바로 이런 다윗과 똑같은 절대적 자유를 누리는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과 다윗의 놀랍고 과감한 자유로운 행위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신뢰하고 있다는 그들의 신뢰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신뢰하고 희망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하기에 저리도 자신감 있는 자유로운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느님께 신뢰받고 희망받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수록 하느님을 신뢰하고 희망하고 사랑할 수 뿐이 없기에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수 뿐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음을 확신했기에 예수님은 이처럼 단호하게, 자유롭게 감히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절대적 사랑의 법에 안식일법을 비롯한 모든 법은 상대화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신뢰와 희망과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음을 확신했고 누구보다 하느님 사랑의 마음에 정통했기에 거침없이, 주저함 없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었음을 봅니다. 새삼 하느님과 사랑으로 하나된 예수님 자신이 모든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과 다윗에 이어 히브리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또 신망애의 모범입니다. 하느님께 전폭적 신뢰와 희망, 사랑을 받았던, 신망애의 사람, 아브라함처럼 되라는 우리 모두를 향한 히브리서 저자의 촉구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처럼, 다윗처럼, 한결같이 끝까지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 때, 또 하느님께 깊은 신뢰와 희망,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낄 때 이런 항구한 믿음과 인내에 희망입니다. 이어지는 히브리서 말씀도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 까지 들어가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영혼의 닻인 희망입니다. 영혼의 닻인 희망이 없는 삶이라면 평생 항해 인생, 얼마나 암담하겠는지요! 영혼의 닻인 희망이 없다는 것은 방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희망없는 삶은 그대로 방향없는 삶이니 이보다 큰 불행도 재앙도 없습니다. 하여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대사제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는, 하느님께 영혼의 닻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영혼의 닻인 희망을 내릴 때 안전 인생 항해입니다. 영혼의 닻인 희망을 잃어 표류하고 조난당한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중요한 것이 우리 향한 주님의 신뢰와 희망, 사랑을 깨닫는 것이며 영혼의 닻인 희망을 주님께 깊이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이 강론을 요약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바꿔말해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신뢰하시고 희망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끝까지! 이런 주님의 우리 향항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기대에 응답해 우리 또한 언제나 끝까지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는 우리 향한 주님의 한결같은 신망애의 표현이자, 동시에 주님 향한 우리의 한결같은 신망애의 표현입니다. 우리 모두 희망이란 영혼의 닻을 주님께 깊이 뿌리내리는 은총의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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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은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오는 바오로의 회심 축일(1.25)을 앞두고 그의 신앙과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생각해 보는 이즈음에 오늘 말씀에 비추어 부각되는 주제는 희망과 계약이고,
그 내용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현장선교입니다.
독서에는 히브리인들의 전통을 상기시키며 마치 닻과 같아서 안전하고 견고한 희망을
간직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 본보기로 제시된 인물은 그들의 으뜸가는 조상인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처음에 살던 고향 땅은 수메르 문명권으로서 아직 하느님을 모른 채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고향 땅을 떠나서 새로운 땅으로 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처음으로 들려온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일흔 다섯 살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히브 6,14)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그의 후손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며, 하늘의 별들이나 바다의 모래처럼
많이 불어나게 해 주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끈기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백 살이었고, 약속된 실현의 실상은 외아들 이사악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축복의 내용이 빈약하고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같이 보입니다만,
그 다음 대인 야곱에 이르러 열두 아들을 얻었고 그들이 이집트로 내려가서는
4백여 년만에 60여 만명에 이르는 큰 인구를 가진 민족으로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시켜서 그 이집트 땅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이러한 과정 전체가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실현이었고,
그 열매는 하느님과 히브리인들과 맺으신 시나이 계약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계약을 맺게 된 연유는 하느님께서 부르셨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억울하게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목격하시고 공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7-10).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갈릴래아 지방의 여러 고을들을 다니시면서 아프고 마귀 들려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다니시며 그들의 고난에 함께 하셨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어 주셨으며,
할 수 있는 한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옛날 모세를 통해
하느님께서 하셨던 일처럼, 고난받고 울부짖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해방시켜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가고자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그 해방의 과업을 멈출 수는 없었고,
오히려 해방의 과업을 기억하자고 제정된 안식일에는 더욱 그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이를 문제 삼았습니다.
그네들은 무조건 안식일에는 그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답답해지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타이르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고달프게 살아가면서 고통당하고 때로 하느님께 울부짖는 사람들의 현실은 외면한 채로
율법 조문에만 매달리고 있었던 백면서생(白面書生)들에게
안식일 계명이 포함된 십계명의 정수에 대해서 한 수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속박이 아니라 해방의 길잡이라는 시나이 계약을 상기시켜 주신 겁니다.
히브리 서간의 저자도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성도들에게 봉사하였고
지금도 봉사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행위와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히브 6,10-12).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벼락치는 소리 속에서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나 크게 회심하게 된
바오로도 14년 동안이나 구약의 율법에 대해 숙고한 끝에 다시 선교사의 길로 나서면서,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에 이르기까지 그 멀고 먼 길로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앉아서 율법 책을 뒤적이기보다 사람들이 고난받는 삶의 현장을 찾아나선 것입니다.
이 ‘찾아가는 선교’는 그의 활동을 바리사이들과 구분짓는 특징이었습니다.
20여 년에 걸친 세 번의 선교여행이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라는 데도 없었고 가야할 곳이 딱히 정해진 것도 아니었지만,
사도 바오로는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사람들이 사는 현장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 찾아가는 선교로써 사도 바오로가 보여준 신앙의 모범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실제로
사람들의 고난받는 삶과 일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찾아서 신앙을 증거하고 복음을 전하하도록 재촉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는 일이요, 우리의 인내와 희망이 밝혀주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복음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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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새벽을 열며.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빠다킹 신부님.
두 사람에게 담배를 권했는데 각각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저는 담배를 끊었습니다.”
“저는 비흡연자입니다.”
누가 앞으로도 담배를 태우지 않을 가능성이 클까요? 비흡연자라고 말하는 후자라고 합니다. 끊었다고 말하는 전자는 행동 차원의 답이지만, 비흡연자라고 말하는 후자는 정체성 차원의 답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흡연하다가 어느 날 담배를 피지 않는 신부에게 “담배 안 피워?”라고 물었을 때, “끊었어.”라고 대답하는 신부의 대부분은 어느 날 다시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비흡연자야.”라는 식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말을 하는 신부는 쭉 담배를 피지 않았습니다.
정체성은 ‘나는 어떤 사람’이라는 믿음입니다.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깊어져서 정체성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말을 찾아봐야 합니다. 이 말이 반복되면서 자신이 원하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상한 정체성을 가져서는 안 됨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지,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이 아닙니다. 올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엿새는 노동을 위해 주셨고, 하루는 기도와 휴식과 죄 씻음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즉, 하느님과 화해의 시간으로 주인이신 분이 우리를 위해 특별한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의 시간이고 은총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사람은 화해의 시간인 안식일을 단순히 일하지 않는 시간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의 주인이 계시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죄인 취급을 하면서 자신들이 안식일의 주인인 것처럼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행동의 변화를 반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행동의 반복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깊어지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정체성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뜻은 사랑에 있었습니다. 이 사랑만을 바라보고 실천해나간다면 분명히 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악이 끼어들 틈을 마련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과 함께하면서 행복의 삶을 마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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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이 남기고 간 것을 보아라. 고통도 지나고 나면 달콤한 것이다(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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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어디서?
두려움을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두려움은 왜 생길까요? 무지(無知), 즉 알지 못함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시험 볼 때의 두려움,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면서 갖는 두려움, 깜깜한 밤에 혼자 있는 두려움, 모두가 알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뇌는 무지의 상태를 매우 싫어합니다.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는 고통과 불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확실하지 않은 무지의 상태를 메꾸려고 하는데 이것이 ‘상상’입니다.
따라서 두려움이 생겼을 때, ‘상상’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 아니라 더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상상을 제거할 수 없다면 긍정적인 상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만이 진정한 리더가 될 수 있다고 하지요. 두려움은 또 다른 두려움을 가져오기 때문에, 이 두려움을 끊어버릴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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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 뜻을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할지 성찰하라고 초대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자 지켜보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예수님처럼 훌륭한 스승의 제자들이라면 율법 정도는 응당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비아냥이 깔린 항변입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뒤 일곱째 날에 쉬시면서 창조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창조"만큼 "쉼"도 사랑하셔서 피조물 중 각별히 당신 모상을 나눠주신 사람을 쉼으로 초대하셨지요.
안식일은 하느님 앞에서 영육의 쉼을 통해 원기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이익을 위한 일체의 경제활동을 중단함으로써 종들과 가축들, 심지어 땅까지도 쉬게 해 주는 것이 본래 정신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생계를 지탱하는 노동에서 손을 떼라고 하다보니 안식일에는 세세한 규정이 많이 붙게 되었습니다. 특히 해서는 안 되는 금지 명령, 부정 명령이 많았지요.
오늘 복음 속 바리사이들은 밀이삭을 뜯어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제자들의 행동을 도둑질이 아니라 추수에 준하는 노동으로 말도 안 되게 확대해석해서 제동을 겁니다. 지나친 금지의 필터가 왜곡되고 굴절된 시야를 양산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마르 2,26)
예수님은 이스라엘 역사 안의 일화를 들어 바리사이들에게 되물으십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지만, 안식일에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일깨우시는 겁니다. 때로 금지 규정이 사람을 더 경직되고 편협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금지 명령은 신앙을 소극적이고 위축되게 하기 쉽지만, 그래도 금지 명령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긍정 명령은 자유롭게 사랑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지만 자칫 방종으로 흐를까 염려하고 경계하는 눈도 있지요. 성숙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이지만, 바로 그 신앙의 성숙이 그리 만만한 경지가 아니기에 어려운 겁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마르 2,27)
중요한 건 하느님께서 왜 그걸 바라시는지 알아듣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금지 조항보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앞서겠지요. 그랬다면 생명의 원기를 회복하는 일에는 너그럽고 허용적이 될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우리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과 맹세를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히브 6,17)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복"과 "번성"을 약속하셨고 이 계약은 그분과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유효합니다. 진리이신 하느님께는 거짓이 없습니다. 그러니 두려움에 싸여 해서는 안 되는 일만 적당히 잘 피하면서 사는 것보다, 예수님처럼 당당히 사랑하며 나아가도 좋습니다. "정녕코"(히브 6,14)라고 선언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에서 어떻게든 당신의 사랑을 믿도록 확신시키시려는 강세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예수님은 안식일에 끌려가지 않고, 오히려 안식일을 풍요롭게 하시는 주인이십니다. 요즈음 감염병 확산으로 인해 주일을 잘 지킬 수가 없어서 답답합니다. 율법적으로 따지자면 주일 규정을 어겼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이럴 때 일수록 생명을 살리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아듣는다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크고 강한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릅시다. 누구보다 자유롭게 사랑하신 예수님께서 괜찮다 하시고, 또 앞장서 가시니 두려움을 떨쳐내고 나아갑시다. 세상에는 사랑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벗님!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자유로이 사랑을 선택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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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마르2,27)
오늘 복음이 우리의 미사와 예배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미사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떤 말기 암 환자가 '암과의 동거'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암이 자신을 찾아 온 친구', '내게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친구', 그래서 '동거할 수밖에 없는 친구'로 받아들이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코로나 19도 지금 우리에게 올 수밖에 없었던 친구, 우리가 불러들인 친구이니, 부정적인 친구가 아닌 긍정적인 친구로 받아들여야 우리가 이 불안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묵상해 보았습니다.
특히 믿는 이들이 무엇을 믿고 있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답을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현실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묵상했습니다.
'안식일'과 '미사'와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있습니다.
형식적인 안식일, 죽은 안식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미사가 예배가 죽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히브6,20)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그 이후 수많은 성인성녀들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너를 위해 그렇게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살아있는 미사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수많은 제자들도 그렇게 살아있는 미사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 내가 드리는 미사와 예배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68년(1953-2021)만에 거행되는 본당 설립미사이지만, 이것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본당으로의 첫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의 구원을 위해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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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 28)
새 날이
밝아오고
있다.
사람과 안식은
분리될 수 없다.
안식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고갈과
재충천을
오가는
우리들
삶이다.
생명은 안식을
필요로한다.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서
평화를
맛보게한다.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
안식일의
본질이다.
안식일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우리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어리석음과
교만을
내려놓는 것이
안식일의
핵심이다.
우리의 몸도
우리의 영혼도
휴식을 필요로
한다.
영적인 삶은
안식일의
선물이다.
영혼을
돌보시는
하느님과의
접촉이
중요하다.
하느님에게서
살아갈
새 힘을 얻는
것이다.
안식과
생명은
하느님께
속하여 있다.
하느님께
속하여
있기에
안식은
하느님을 향한
순명이 된다.
걱정과
두려움까지
평화로
바꾸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삶의 무거운
짐을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
맡겨드린다.
집착이 아닌
기쁨과 평화를
주신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안식이며
회개이다.
새 날을
창조하시고
기쁜 안식을
지친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은 분명
사랑이시다.
안식일은
하느님 사랑을
만나는 사람의
날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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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주간 화요일(마르코 2,23-28)
<용서받지 못하면 회개하지 못한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왠지 ‘공동체’의 중요성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공동체는 죄를 용서받는 장입니다. 그러나 규율이 지배하는 공동체에서는 죄의 용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르코는 이런 규율이 지배하는 대표적인 공동체를 ‘바리사이들’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서는 하늘 나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죄의 용서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남의 집 땅에서 자라는 밀이삭을 훔쳐 먹었습니다. 율법 규율이 그 집단의 지배 원리인 바리사이 공동체는 이 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율법을 어기는데도 그들을 옹호해 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율법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에는 참다운 안식이 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율법을 뛰어넘는 당신이 그 안에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그렇게 이루어진 안식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주인이십니다.
피아제와 콜버그는 사람은 성장하면서 도덕성도 발달한다고 말합니다. 도덕성의 발달은 규율로부터 얼마나 자유롭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래의 지문을 읽고 하인츠의 행동이 정당했는지 살펴봅시다.
“하인츠는 암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는 데 필요한 약을 구하고자 합니다. 이때 한 약국의 약사가 아내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약을 발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하인즈는 약을 사러 갔지만 약사는 제조비의 대가로 원료값의 10배인 한 알에 2000달러를 요구하였습니다. 하인츠는 모든 지인에게 찾아가 돈을 빌렸지만 1000달러밖에 구하지 못해 약사한테 사정을 해봐도 약사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인츠는 절망하고 죽어가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약국을 부수고 약을 훔쳤습니다.
이때 하인츠는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옳은가요?”
“그러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가장 낮은 단계입니다. 유아들은 옳고 그름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생존에 유익한 것이 옳은 것입니다.
만약 “그래도 법을 지켜야지요. 법은 지키라고 있는 거예요.”, 혹은 “돈을 안 내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잘못된 거죠.”라고 대답하면 어린이 정도의 도덕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혼나기 싫어서 부모의 말에 복종합니다. 자율적 판단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단 횡단하거나 신호등을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참지 못하고 신고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의 모습입니다.
더 높은 단계는 법보다 상황과 사람을 더 중요시하는 단계입니다. “법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법을 위해 있지 않기 때문에, 분명 벌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단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과 자비가 법을 넘어서는 단계입니다.
장발장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습니다. 그런데 그 죄로 19년을 복역했습니다. 원리 원칙을 강조하는 자베르 경감은 장발장을 주시합니다. 장발장은 19년 동안 자신이 당연한 죗값을 받는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나라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2005)에서 하정우는 가슴 따듯한 사람으로 나오고 그의 후임으로 온 친구는 그런 사랑을 받았음에도 무자비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후임을 용서하지 못하고 후임은 자살을 선택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발장도 용서받지 못했기에 남의 물건을 훔칩니다. 먹여주고 재워줘도 주교관에서 금 촛대를 훔쳐 달아난 것입니다. 만약 빵을 훔친 것에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공동체였다면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교는 그것을 그냥 준 것이라 말합니다.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장발장은 그날 이후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공동체를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제자들을 옹호하십니다. 겉보기엔 남의 곡식을 훔쳐 먹고 안식일을 어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모든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함께라면 그 공동체는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죄의 용서가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아마 다시는 예수님께 그런 상황을 만들어드리지 않기 위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코는 처음에 바오로와 바르나바 공동체와 함께 다녔습니다(물론 그 마르코가 마르코 복음 사가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형성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르코가 바오로의 뜻을 거스릅니다. 그래서 더는 마르코를 데리고 다니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바르나바는 마르코가 사촌이었기 때문에 그를 옹호합니다. 이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갈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마르코가 베드로의 통역관 일을 맡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마르코는 자신의 믿음이 교회 공동체 때문에 형성되었고 그 공동체가 자신 때문에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바오로에게 용서를 청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바오로가 용서해 주어서 자신이 변화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마르코가 회개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공동체의 자비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서 죄의 용서가 일어나고 새로 태어남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벌 받는 게 두려워서 지켜야만 하는 율법주의자 수준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누군가의 회개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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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주간 화요일]
해질녘 강가, 과수원에서
어린 시절, 주말만 되면 저는 ‘고기잡이 전문가’였던 형을 따라 강으로 계곡으로 따라다녔습니다.
저도 슬슬 재미를 붙여 해지는 줄 모르고 고기를 잡았습니다.
고기를 잡는 방법도 다양했지요. 낚싯대로 잘 안 잡히면, 커다란 해머로 물에 잠긴 바위를 내리칩니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바위 밑에 숨어있던 고기들이 기절을 해서 떠오르지요.
어떤 날, 저는 하루 온 종일 형과 같이 타고 간 자전거의 페달만 열심히 돌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형은 페달을 돌릴 때 생기는 전기 에너지를 이용해서 고기를 ‘감전’시켜서 잡았습니다.
또 형은 손으로 고기를 잡기도 했는데, 정말 귀신같았습니다.
그렇게 잡은 고기는 날걸로 먹기도 하고, 튀겨먹기도 하고, 매운탕도 끓여먹었습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해가 넘어가곤 했습니다.
강가에는 큰 과수원이 하나 있었는데, 늦여름 쯤 되면 사과의 크기도 크기지만, 그 빛깔이 너무 고왔습니다.
낮에는 괜찮았는데, 해만 떨어지면 그리도 유혹이 커졌습니다.
때로 유혹을 참지 못해 과수원 담을 타고 넘어갔습니다.
크고 잘 익은 것은 미안해서 손을 못 대고, 떨어진 것들 몇 개씩 주워서 나오곤 했습니다.
‘훔친 사과가 더 맛있다’는 말, 누가 했는지 정말 정답이었습니다.
그 맛이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그러다 가끔씩 주인아저씨에게 들켜서 밤늦게까지 벌도 서고, 거름도 옮기던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우리 시골 전통 안에 ‘서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별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젊은이들이 혈기를 한번 부려보는 것입니다.
어르신들은 관대한 마음으로 눈감아주는 좀 특별한 전통이지요.
대표적인 것이 ‘닭서리’ ‘수박서리’ 인데, 아직도 그 기억이 손에 잡힐 듯합니다.
그러나 적당히 했었지요. 요즘같이 ‘차 때기로’, ‘무자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안해하면서,
닭 한두 마리, 혹은 수박 한 두통, 그 정도였습니다.
어르신들도 자신들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허허’ 하고 슬쩍 눈감아주셨지요.
요즘같이 경찰에 고소한다든지, 법정에까지 간다든지 하지는 않았습니다.
서리란 것은 적정선의 ‘장난끼’가 발동되는 것이었습니다.
심각하게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호기부리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가다 보니,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장난기가 발동되었습니다.
아니면 어린 시절 밀 이삭을 잘라먹던 추억이 떠올랐겠지요.
자연스럽게 밀 이삭 몇 가닥을 뜯었습니다. 비벼먹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웃으면서 따라했겠지요.
장난으로 그랬지, 그것을 ‘노동’한다면서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지금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기가 치지도 않았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래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안식일을 정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신체구조, 신체리듬 상, 한 엿새 일하고 나면 지치기 마련입니다.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칩니다.
스트레스 지수도 높아만 갑니다. 그런 상태에서 계속 일을 하게 되면 일의 능력도 떨어집니다.
그 정도 되면 일이 기쁨이요 보람이 아니라 인간을 힘들게 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괴로움의 원천이 됩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노동은 삶의 큰 보람입니다. 노동은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안식일(혹은 주일)이라도 먹어야 합니다.
안식일이면 오히려 재미있게 지내야지요. 안식일 날 꼼짝 없이 집 안에서만 지내기보다는 산으로 들로 나가 맑은 공기를 쐬는 것은 더욱 의미가 있겠습니다.
안식일 규정에 나와 있는 것처럼 송장처럼 꼼짝없이 지낸다는 것은 너무나도 웃기는 일입니다.
당시 안식일 규정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때로 너무나 사소한 것들에 대한 규정이어서, 너무나 이치에 맞지 않는 규정이어서 배를 쥐고 웃을 정도였습니다.
수많은 안식일의 세부 규정 때문에 안식일이 오히려 더 괴롭고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1,392미터 이상 걸으면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밀 이삭을 한 개 자르는 것 역시 큰 위반이었습니다.
꽃 한 송이 꺾는 것도 일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열매에 손대는 것조차도 위반이었습니다.
나무에 올라가는 것도 위반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쫀쫀하게’ 된 바리사이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되찾아주고 싶으셨습니다.
안식일의 핵심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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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9일 화요일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매일미사
_김용찬 사도요한 신부 집전
https://youtu.be/KEIX4PsXyd0 (30:35)
•2021. 1. 19.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김용찬 사도요한 신부 (서울대교구 국내수학) 집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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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19.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안식일의 주인 (마르2,23-28) 제1독서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히브6,10-20) 형제 여러분, 10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성도들에게 봉사하였고 지금도 봉사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행위와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11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2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14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5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는 보증이 됩니다. 1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18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로,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20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화답송 시편 111(110),1ㄴㄷㄹ-2.4-5.9와 10ㄷ(◎ 5ㄴ 참조) ◎ 주님은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 그 집회에서, 내 마음 다하여 찬송하리라.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그 일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치네. ◎ ○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 당신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 ○ 당신 백성에게 구원을 보내시고, 당신 계약을 영원히 세우셨네. 그 이름 거룩하고 경외로우시다. 주님 찬양 영원히 이어지네. ◎ 복음<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마르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히브6,10-20)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13-15)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6장 9-12절에서 끝까지 믿음과 인내를 지켜 약속된 상속을 받으라고 권고한 바 있다. 이어지는 히브리서 6장 13-20절에서는 이러한 목표를 세우고 추구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다룬다. 특히 이 단락을 시작하는 히브리서 6장 13-15절에서는 히브리서의 일차 독자들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 인내를 통해 약속을 성취 받았다는 사례를 제시하여 용기와 격려를 주고 있다. 본문에서 '약속하실 때'로 번역된 '에팡게일라메노스'(epanggeillamenos)의 원형 '에팡겔로'(epanggello)는 '공언하다', '약속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인간의 약속과 제의는 물론(2베드2,19; 마르14,4) 하느님의 약속에 대해서도 쓰였다(로마4,21). 저자는 본절에서 하느님의 약속을 근본으로 삼아 생활했던 아브라함에 대해 언급한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창세12,1-7;17,5-6;18,18; 22,16-18), 히브리서 저자가 염두에 둔 것(히브6,14)은 창세기 22장 16-18절의 내용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주실 때에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심으로써, 이것이 확실하고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임을 보증하여 주셨던 것이다. '맹세하시면서'로 번역된 '오모센'(omosen)의 원형 '옴뉘오'(omnio)는 원래 성전의 뿔이나 제단과 같은 거룩한 대상들을 '굳게 잡다'라는 뜻을 나타내었으나 후에 '맹세하다'는 의미로 발전되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는 은총의 맹세로서 그 효력이 끝없이 미친다. 절대로 변함이 없는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후손은 모두 축복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육적 이스라엘을 가리키지 않고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말하며(갈라4,7),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축복을 이어받는다. 한편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담보로 하여(카타; kata ; by) 맹세의 약속을 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담보로 내어놓으신 당신 자신은 얼마나 믿을 만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아니시므로 식언하지 않으시고(민수23,19) 거짓말하지 않으시며(히브6,18) 변함이 없으실(야고1,17) 정도로 믿을 만하다. 이보다 더 믿을 만한 맹세의 담보는 없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담보로 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는 것은 그 약속이 천지가 진동하더라도 지켜질 것임을 말한다.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정녕코'로 번역된 '에이 멘'(ei men)은 '참으로', '확실히', '틀림없이'라는 뜻으로 서약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틀림없이 어떤 것을 이루어주시겠다고 맹세로 약속하셨는데,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22장 17절을 70인역(LXX)에서 인용한 말씀이다. 신구약 성경을 모두 알고 있는 우리는 그분의 이 약속이 이사악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갈라3,16; 4,26.28 ;사도3,25). 한편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너를 복 주고 복 주며)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동사 구문법에서 강조를 나타내는 형식으로 '틀림없이 복을 줄 것이다' 란 의미가 된다. 영어로 하면, 'I will surely bless you,and I will surely multiply you.' 이다.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로 번역된 '플레튀논 플레튀노'(pllethynon pllethyno)에서 본문에 두 번 쓰인 동사의 원형 '플레튀노'(pllethyno)는 '가득 참'(fullness)을 의미하는 '플레튀스'(pllethy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가득하게 하다', '번성하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번성하게 하신다는 약속은 본래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창세22,17)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2인칭 단수 대명사 '쎄'(se), 즉 '너'(you)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나타내는 비유법적 표현(제유법; 사물의 한 부분으로 전체를 또는 한 말로 그와 관련되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이 약속은 이사악이나 이스라엘 시대에 성취되지 않고,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신약 시대의 교회를 통해 성취되고 있다(갈라3,9).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끈기있게 기다린 끝에'로 번역된 '마크로튀메사스'(makrothymesas)는 '마크로튀메오'(makrothymeo)의 과거분사이며, '마크로튀메오'는 '인내하다', '오래참아 기다리다'는 뜻이다. 이 단어속에는 '질긴 기질'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마크로튀메오'는 '(무엇을) 묵묵히 기다리고자 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끝에'에 해당하는 '후토스'(hutos)는 '이같이'(so)라는 뜻을 강조의 의미로 쓰인것 같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이 당장 성취되지 않는다 하여도 체념하지 않고, 믿음으로 큰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으므로, 하느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에서 '받았습니다'로 번역된 '에페튀켄'(epetychen)은, '얻다','도달하다'를 뜻하는 '에피튕카노'(epitingchano)의 부정 과거로서 결과를 나타낸다. 물론 아브라함이 사는 날 동안에 그 약속의 성취가 있었지만, 그 기간에는 매우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가 죽어서 천국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동안, 이 약속은 신약 시대의 교회를 통해 더 많은 성취를 맛보고 있다. 그의 약속은 점점 더 충만하게 성취되었는데, 메시아의 강생과 그의 영적 후손의 번성이 그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참된 것이었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충실했으므로 이같은 놀라운 일이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하느님의 약속은 변경되거나 취소되는 법이 없다. 그분은 언제나 성실하시며(2티모2,13), 변함이 없으시므로(야코1,17) 그분의 입으로 내신 모든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성취된다(이사55,10-11). 설사 그 약속의 대상인 인간의 성실성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주님의 약속이 무효가 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27~28) 마르코 복음 2장 27절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라는 구절은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2장 1~8절이나 루카 복음 6장 1~5절에는 없는 내용이다. 아마도 마르코 복음사가가 다른 복음사가가 전승된 내용들 중에 간과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빠트리지 않고 기록한 것 같다. 그리고 이 구절의 메시지는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관한 39개 세부 조항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단죄하고 힘들게 만들었던 것과는 달리,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오히려 사람들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 또한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호스테'(hoste; therefore)도 병행구절에는 없고 마르코 복음에만 있는 단어인데, 앞문장과 뒷문장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여기서는 앞문장을 받기보다는 안식일에 대한 전체의 논쟁을 결론짓기 위해 도입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바리사이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데에는 열심이었지만, 안식일이 왜 있는지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깨닫지 못했고, 그 결과 그들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제공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단죄와 억압, 죄의식의 굴레만을 덧씌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분명한 의미와 안식을 사람들에게 되찾아 주셨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표현인 것이다. 마르코 복음 2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죄사함의 권한이 있으시고(10절),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17절), 혼인 잔치 집의 신랑(19절)이실 뿐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28절)까지 되시는 분으로서 나온다. 즉 이 네 편의 논쟁은 모두 예수님의 신적(神的)인 권위에 도전하려는 바리사이들이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인위적 규범을 근거로 제시하며,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시도를 다루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도전에 대해 바리사이들이 반론을 펴지 못할 정도로 각각의 명쾌한 답변들을 일일이 제시하였다(10,17.22.28절). 그런데 그 답변들을 살펴보면, 어떤 분야에 대한 질문이든지 하나의 공통된 관점들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답변자이시고 논쟁을 일으킨 행위의 중심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점진적 계시이다. 예수님은 바로 '땅에서 죄를 사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10절)이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17절)이시며, '새 포도주, 즉 새로운 질서로서의 복음을 가져오신 분'(22절)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28절)이시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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