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 4,1-2.6-8; 야고 1,17-18.21ㄴ-22.27; 마르 7,1-8.14-15.21-23
+ 오소서, 성령님
무시무시했던 8월이 지나고 드디어 9월이 되었습니다. 아직 여름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름이 지나가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면서도, ‘올여름이, 다가올 여름에 비하면 가장 시원한 여름이었다’라는 말을 들을 때면 시름이 깊어집니다.
오늘은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창조 질서 보전을 위한 세계 기도의 날’(THE WORLD DAY OF PRAYER FOR THE CARE OF CREATION)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이라고 번역했는데요, 잘못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피조물인데 누가 누구를 보호한다는 말입니까?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우리가 더 이상 훼손하지 말고 보전하자는 의미입니다.
어제도 주교회의에서 일하시는 분께 전화를 드려, ‘창조 질서 보전을 위한 기도의 날’이라고 제 이름을 찾아야 한다고 건의를 드렸더니, 그분 말씀이, 많은 분이 이에 공감하고 계시지만, 한번 번역한 것을 다시 고치는 과정이 쉽지 않다고 하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는 노력이 너무나 강하다’는 오늘의 복음 말씀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교황님께서 2015년에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반포하셨을 때, 당시 신학교 총장이시던 곽승룡 신부님의 제안으로 신학교 신부 세 명이 번갈아 가며 교구 내 한 본당에 가서 회칙에 대해 강의를 했습니다.
저는 그때 강의를 시작하면서 몇 편의 영화 예고편을 보여드렸는데요, 그 영화들은 ‘인터스텔라’,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 ‘터미네이터’, 그리고 ‘월-E’라는 에니메이션이었습니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여쭈어보았습니다.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지구가 더 이상 사람들이 생존할 수 없는 행성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들은 왜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생태 파괴가 지금의 수준으로 지속된다면, 이 영화들이 그리고 있는 미래는 머지않아 우리의,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강의가 끝난 후, 자매님 한 분이 제게 쪽지를 주고 가셨는데요,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신부님, 하느님께서 지구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거예요. 너무 걱정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제 강의가 그분을 불편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사실 ‘찬미받으소서’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회칙입니다.
자매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는 지구를 멸망시키지 않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런 하느님께 협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거스르고 있는가’입니다. 세상을 보전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에 협력하고, 하느님의 도구가 되기로 다짐하는 것이 ‘창조 질서 보전을 위한 기도의 날’을 지내는 이유입니다.
기후변화와 관련된 말씀을 여러 곳에서 듣고 계시고, 실천 방안에 대해서도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탄소배출 원인 중 가장 큰 것은 화석 연료를 사용한 전력 및 열 생산이고, 산업, 토지 이용, 교통 등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 노력하는 한편, 가정에서보다 산업 현장에서 훨씬 더 많은 에너지 소비가 일어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범국가적, 범세계적 논의가 멈추지 않고 진행되어야 합니다. 교황님은 이러한 논의에 참여하고 행동하는 것을 ‘시민적 사랑’, ‘정치적 사랑’이라고 표현하십니다. 또한 이를 위해 우리의 소비문화가 대대적으로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몇 해 전에 신학교로 부임하신 선배 신부님 한 분이 자동차를 팔고 오셨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차를 갖지 않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학교는 대중교통으로 오가기에 무척 불편한 곳입니다. 도로가 많이 생길수록, 대중교통 노선은 점차 사라져갔습니다. 그러나 이 형님은 불편을 감수하며 살고 계십니다. 생태적 삶은 불편하게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편리하게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바로 생태 위기의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어떻게 창조 질서 보전을 위해 노력할 수 있을지 기도하고 고민하고 함께 논의해야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규정과 법규를 전하면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여기에 많은 것을 보탰습니다. 복음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어째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느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사제들이 만남의 천막으로 들어갈 때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는 것(탈출 30,17-21)이었고, 사제들이 봉헌 제물을 받아서 먹기 전에(민수 18,11-13) 정결례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모든 사람이, 매 식사 때마다 제사를 거행하듯 정결 예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야 하던 시절, 식사때마다 정결 예식을 행하는 것은 서민들에게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의 논쟁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오천 명이 손을 씻고 식사를 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기적에 흠집을 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을 드리지 않고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는 것을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이사야의 말은, 예배의 중심에 사람의 규정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시고, 마음을 다하여 진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1독서에서 모세가 했던 말과 같습니다.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신 분 앞에서 바리사이들은 ‘왜 당신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후 군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선언하십니다. 첫째,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인간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더럽히는 것은 그 자신입니다. 둘째, 유다인들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 그리고 유다인과 이방인의 구분도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서는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성경에서 믿고 있는 유일한 부분은, 당신이 실천하고 있는 그 부분밖에 없다.” 우리가 무엇을 실천하고 있는지가,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lex orandi lex credendi”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네가 기도하는 바가 네가 믿는 바이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이는 여기에 lex vivendi 라는 말을 덧붙여 ‘네가 기도하는 바가 네가 믿는 바이고 네가 살아가는 바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믿음과 실천은 하나입니다. 창조 질서 보전을 위한 기도와, 하느님께서 이 세상과 나의 창조주이심을 믿는 것과, 지구를 보호하려는 실천은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고, 무엇을 믿고, 무엇을 실천하고 있을까요?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호하시려는 하느님을 믿으며, 아버지의 그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실천해야겠습니다.
아폴로 17호 승무원이 찍은 지구, 1972. 12. 7.
출처: Earth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