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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말, 조선 거주 일본인들이 단출한 짐을 들고 귀국길에 올랐다. 출처=《광복 1775일》. |
1945년 광복(光復) 당시 한국의 사정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구가 있다. 사진도 있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한국에 살던 일본인은 패전(敗戰)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귀국길은 순탄했을까? 궁금한 일이다. 우리로서는 35년간
식민통치를 한 가해자(加害者)로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8·15를 맞았는지, 패전 후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알
필요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끊임없이 과거사 문제를 일으키는 일본인들의 심리 저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총독부 재무국장(현 장관에 해당-편집자 주)을 지낸 미즈타 나오마사(水田直昌·1897~1985), 총독부
식산(殖産)국장과 경성전기(주) 사장을 지낸 호쓰미 신로쿠로(穗積眞六郞·1889~1970)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글과 전남 진도금융조합 이사였던
시모카와 사도시(下川 智)의 수기이다.
총독부
재무국장의 회고
총독부 재무국장을 지낸 미즈타 나오마사는 자서전에 그가 미군에게 요청한 일, 서울의
혼란, 귀국의 행적 등을 적나라하게 기록하였다.
미즈타는 아이치(愛知)현 출신으로 1921년 도쿄(東京)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고등문관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해 후쿠오카와 오사카 남세무서장 등을 지낸 후 한국으로 건너와서 총독부 재무국(지금의 기획재정부에 해당)
사무관으로 근무했다.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대 법대), 경성고등상업학교(현 서울대 상대)에서 재정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1928년에는
사계(司計)과장 서리(署理)가 되었는데, 당시의 총독부 과장은 지금으로 하면 차관보~국장급에 해당한다. 이때 총독부에서는 당시 31세이던 그에게
“너는 젊으니까 우선 서리로 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는 1937년 재무국장이 되었다.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이 하야시
한조 후임으로 국장을 맡으라고 할 때 그는 “사세(司稅)과장 때 수집한 자료로 조선의 금융재정을 쓰고 싶으니 이참에 사직하고 싶다”고
간청했으나, 미나미가 “네 마음대로는 안 된다”며 거부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후일 수집한 수많은 재정관계 사료를 두고 귀국한 것을 누누이
후회하였다. 이로 보아 그는 관리보다도 학문연구, 재정학 집필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재무국장의 바쁜 업무 중에도 《이조시대의 재정》
《통감부 시대의 재정》 《총독부 시대의 재정》이라는 세 권의 책을 썼다. 광복 70년이 되어도 이 저서만 한 연구가 없다고 한다.
미즈타는 사무관·사계과장 13년, 재무국장 8년, 합계 21년을 재무국에서만 근무하였다. 그동안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비롯하여
8명의 총독을 보좌하였다. 역대 총독들은 재무관계만은 전적으로 그의 의견대로 집행하고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총독은 재무 이외 사항도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부임하는 총독마다 그를 애지중지했다.
귀국 후 한국 내
일본재산 찾기 운동 벌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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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방송을 들으며 눈물짓는 일본인들. |
총독부 사세과장이나 재무국장은 조선의 예산을
세우고 결산을 했다. 각국(各局)에서 요청한 예산을 편성하여 일본 대장성에 가서 세밀한 분석, 사정을 받은 후 의회에 나가 설명을 하였다.
그래서 조선에 반년, 일본에서 반년 근무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미즈타는 재무국장 때 조선지적(地籍)협회를 창립(1938)하여
회장과 지적기술강습회 소장을 겸무(兼務)하였고 재무협회를 만들어 회장도 겸무하였다. 조선은행(지금의 한국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감리관도
겸임했다.
미즈타는 패전 후 미군정(美軍政) 조언자로 있다가, 1945년 11월 24일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는 철수 일본인
지원 활동을 했다. 가쿠슈인(學習院)대학 상무이사로 일했고, 일본대학 법과부 여자단기대학, 도카이대학에서 재정학을 강의하였다. 일본이 조선에
남겨두고 간 재산 되찾기 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했으며, 우방협회 이사장에 취임하면서는 “일본이 조선 통치를 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 보존,
조사하여 그 치적을 후세에 바르게 전승하는 일”에 전념했다.
미즈타는 재직 때 맥주, 수건 정도는 받고, 그 이상 되는
물품은 받을 수 없는 사연을 자세히 적은 편지와 함께 되돌려주었다고 한다. 패전 후 이승만(李承晩) 정부 때는 “감옥행이 될까 겁나 한국에 못
간다”고 하였으나 그 후 두 번 와서 재정에 관한 자료를 구하여 갔다. 이때 일본 국적기(JAL)가 아닌 한국 국적기인 KAL을 이용했다. 그의
사위 말을 빌리면 생전에 한국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일본의 《조선신사록》(1931), 《조선공로자명감》(1935),
《일본근현대인물이력사전》(2006)에 그의 이력이 간단히 실려 있다. 한국에는 필자가 광복 43년 만에 《어느 측량사의 수기》(1988),
《한국지적백년사 - 인물, 용어편》(2005), 《식민지조선의 일본인 인명사전》(2011)에 자세히 소개한 일이 있다. 미즈타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8월 14일 終戰 알아
나는 재무국장이란 자리에 있었다. 총독부의 간부이다. 총독 밑에 정무총감(政務摠監·지금의 국무총리 격-편집자 주)이 있고 그 밑에 국장이 9명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인 내가 무조건 항복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대사건을 안 것은 8월 14일이었다. 정말 조선에서는 아무도 몰랐다. 혹은
알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몰랐다.
8월 12일 재무국 직원들은 경성(京城·서울-편집자 주)이 언제
폭격을 받을지 몰라 가족을 피신시키기로 했다. 경성에서 200리쯤 떨어진 청주라는 곳, 원산이라든지, 소금을 만드는 염전에 집이 있으니까 각자
생각나는 곳으로 피란을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태평양전쟁에 일로매진하고 있었다.
15일 정오에 총독부에서 라디오로 (천황의)
종전(終戰)의 말씀을 듣고 망연자실하였다. “전 국민은 참기 어려워도 참아 경거망동을 하는 일이 없도록 엄히 삼가라”는 말씀이 강하게 머리에
스며든 기억이 있다. 아베 노부유키 총독은 “우리는 천황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조칙(詔勅)의 취지에 부응하여 우리는 종전 후의 처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주군이 오기까지 조선총독부는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때까지는 모두 침착하게 총독부로서의 임무를 수행토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8월 15일에는 이미 소련군이 함흥 근처, 경성에서 기차로 하루 반이나 이틀 정도 걸리는 곳에 와
있었다.
8월 9일 소련이 선전포고를 해 가장 먼저 영정(影幀·천황의 사진-편집자 주)과 교육칙어(敎育勅語)가 8월 15일
후 속속 경성으로 보내져 왔다. 그때는 경성에 소련군이 오는가, 미군이 오는가 몰랐다. 38도선 이남은 미국, 이북은 소련이 온다는 것을 안
것은 21일경이다.
影幀을 불태우고…
8월 15일 종전의 말씀을 듣고 총독과 총감의 지시대로 각 부서에서 뒤처리에 들어갔다. 15일 저물 무렵 총독부에서 보관하고 받들었던
영정, 교육칙어, 조서, 38도선 이북에서 운반하여 온 것을 일괄하여 후에 능욕당하지 않도록 모두 소각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제일 고참 국장이어서 경무국장(경찰청장-편집자 주)의 호위를 받으며 총독의 대리로 총독부 뒤뜰 깨끗한 곳에서 소각하였다. 그때의 기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비통감…. 옛 경복궁 상공을 저 멀리 꼬리를 끌고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는 그 연기의 행방을 올려다보았다. 경성의
조선신궁(神宮)의 영대(靈代)는 16일에 비행기로 일본에 무사히 옮겼으나 평양신사(神社)는 불에 타는 능욕을 당하였다.
경성에는 서대문 형무소와 경성 형무소 둘이 있었다. 그곳에는 독립사상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둘 다 겸한 자들이 수용되어 이천수백 명 되는 자들이
15일 야밤에 일제히 폭동을 일으켜 모두 형무소에서 뛰쳐나왔다. 그에 따라 강도범, 살인범들도 나왔다. 그래서 16일에는 그들이 중심이 되어
총기, 탄약을 갖고 경성 안은 물론 부근에 경찰서도 일거에 전부 점거하여 치안을 장악하였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1945년
초부터 일본인으로 적어도 총포를 다룰 수 있는 자는 거의 군(軍)에 징집되었다. 그래서 소수(少數)의 일본인만 있었고 나머지는 거의 조선인
경찰관이었다. 그때는 조선군 사령관이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실력 행사를 하여 경찰을 일거에 괴멸 탄압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진주군(進駐軍-미군)이 왔을 때 일본인이 어떠한 보복을 받을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대책으로서는 군에 부탁하여 전차(戰車) 등을 시내에
행진시켜 일종의 데모를 하는 정도로 총포를 쏘아 진압하는 것인데…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16일 이후 시내의
인심은 불안하고 소란하였다. 나는 16일 총독부에서 10여 정(町) 떨어진 본정(本町-충무로)에 자동차를 타고 갔는데 “저것은 총독부 차다”라고
말하며 군중이 몰려왔다. 위험을 느낀 나는 뛰어내려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갔다. 운전수는 박군이라는 충실한 조선인이었는데 용케 빠져나왔다. 그런
정도로 일본인을 살상하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조선인 원한의 가장 큰
원인은 사상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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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자 《아사히신문》. ‘항복’이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
조선인의 원한은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이
있다. 원인은 공산주의자, 독립사상자를 압박한 것이다. 특히 도쿄에 와 있던 조선 학생들을 경시청에서 가택 수색을 하였고 중국 청년에게도
그랬다. 그들은 당시 일본 경찰에 대하여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방침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조선어를
쓰면 안 된다’ ‘국어(일어)를 써라’ ‘메이지(明治)신궁, 이세(伊勢)신궁에 요배(遙拜)를 하라’ ‘흰옷을 입지 마라’ 등 이것들은
선의(善意)지만, 그들로서는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는 것은 이씨나 최씨를 다나카(田中), 미즈타(水田)로 바꾸라는
것인데, 이는 그들에게 상당한 압박이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민중 특히 지식계급에 쌓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식량
공출(供出)은 근인이다. 전쟁이 점점 불리하게 되었고 1940년부터 쌀이 부족하게 되었다. 1937년 지나사변(支那事變·중일전쟁)이 시작될 무렵
식량만은 넉넉하다고 의회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적을 때는 1000만 석, 많을 때는 1500만 석이 조선과 대만에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4년 조선에 큰 가뭄이 있어 평년작 2400만 석이 1000만 석 전후로 감수(減收)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에서 거의 생각만치 쌀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전쟁에 돌입하자 도쿄의 중앙정부는 아무래도 조선에서 식량을 보내지 않으면 전쟁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년 흉작(凶作)이었다.
일본 정부에서는 몇백만 석의 쌀을 보내라고 계속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총독부의 간부는
이것은 조선인에게 나무 열매나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목숨을 이어가는 비상사태가 계속되는 큰 문제라며 거절하였다. 식량이 부족하면 전쟁에 진다.
총독부는 마지못해 어느 정도 힘써서 식량 공출을 독촉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물질적인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큰 부담이고 한(恨)이었다.
쇠 供出, 사람 供出
쇠 냄비나 놋그릇도
공출했다. 조선은 예부터 식기는 모두 놋그릇을 사용했는데 놋그릇은 군수품(軍需品)이 되었다. 형식은 자발적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는 강제로 공출한
것이다. 먹는 쌀을 앗아가고 식기도 앗아갔다. 이에 대체할 사기 그릇이 연료 부족으로 일본에서 약속한 때까지 안 되었다. 조밥을 먹지 않으면 안
됐다. 이를 상상해 보라, 한스럽지 않겠는가.
징병(徵兵)제도는 끝판에 시행되었다. 대개 지원병(志願兵)제도로 이는 크게
원한받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노무(勞務)가 매우 부족하였다. 노동력이 있는 남자는 모두 군대에 징집되었으니까 그 노무의 부족을
조선인으로 보충하는 것이 중앙정부의 정책이었다. 금년에는 몇만 명을 보내라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오면 군 기밀상
이유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통신을 할 수 없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다. 남양(南洋)에서 비행기 기지라든지 군항(軍港)을 조성하는
데 조선인을 일부 징용했는데, 가는 도중 잠수함에 당하여 죽은 자도 꽤 있다. 그 외 대부분은 석탄을 캐는 데 사역(使役)하였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전쟁 중에 석탄이 많이 필요했는데 그 노무자의 6할은 조선인이었다.
군항을 구축한다든지 석탄을 캐는 것이 예정대로
안 되었다. 그러면 필히 전쟁에 진다. 전쟁에 지면 안 된다는 지상명령에 총독부는 마지못해 트럭을 몰고 가서 정해진 인원만큼 마을에서 데려온다.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인명과 식량 공출을 했다. 민족 1억 옥쇄(玉碎)라고 하지만 조선 민족이 전쟁을 저주하는 기분은 상당히
치열하였다.
우리만 안 것이지만 개전(開戰) 당초 이승만이라는 독립주의자가 워싱턴에서 한국 독립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편집자 주)를 세우고 미국에서 초단파(超短波)로 조선에 정보를 보내 일본의 패전에 조력(助力)을 했다. 반(反)일본
사람들은 일본이 지는 것을 일찌감치 믿고 있었다. 표면은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었으나 무슨 기회가 있으면 불타올랐다. 그럴 때는 할 수
없으니까 실력으로 탄압했다. 군대와 경찰의 힘으로 탄압하는 이외는 길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軍政 당국에 4가지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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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9일 아베 노부유키 조선총독(가운데)은 한국에 진주한 미군에 항복했다. |
9월 7일 미군이 진주하며
군정(軍政)을 선포했다. 진주군 사령관은 9월 12일 총독과 총감을 파면하고 14일에는 각 국장을 면직(免職)하였다. 다만
“조언자(Advisor)로서 남아 있고 경성을 떠나서는 안 된다. 총독부에 나와라”라고 했다. 연금(軟禁) 상태로서 물론 도망갈 수는
없었다.
나의 후임 재무국장은 찰스 고든(Gordon) 육군 중령으로 9월 15일 서대문 관사(官舍)를 그에게 넘겨주고 나는
조선 경찰 당국에 구인(拘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회현동 어느 집 2층 한 칸을 빌려 늑막염을 앓고 있는 장녀 마쓰기 마사코와 같이
들어갔다.
나는 군정 재무 당국에 4가지를 제의하였다.
① 조선인은 지폐에 대하여 이해력이 부족하니
일본은행권의 유통을 중지하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조선은행권의 유통은 중지하지 않는 것이 좋다. 군표(軍票) 발행도 좋지 않다.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군표 발행을 여간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 사정은 잘 모르지만 여기서는 절대로 안 된다.
조선에는 미발행 은행권이 축적되어 있다. 그러니까 군표를 발행하지 않아도 지장이 없다”고 강하게 요망했다.
② 나는
지불정지(Moratorium)는 하지 않는다고 조선인에게 약속했으니까 지불정지를 안 했으면 한다.
③ 기존의 은행 문을 닫지
말라. 모든 금융기관은 종전과 같이 명칭도 변경하지 말고 지점도 당분간 현상 유지해야 한다. 다만 수뇌부의 경질은 부득이하다. 그러나 조선인을
갑자기 수뇌부로 하면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생길 수 있다. 조선인은 수뇌부가 될 훈련이 아직 충분치 않다. 제군(諸君)이 잘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된다.
④ 일본인이 조선에 있는 물건을 갖고 갈 수 있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하여 달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보호해 줬으면
한다.
앞의 3조항은 들어주었다. 그러나 마지막 ④조항은 승낙하지 않았다. 9월 15, 16일이라고 기억하는데 내게 아무런
언질 없이 1945년 8월 9일 이후 일본인 관계 모든 처리, 매매, 수출입 관계는 모두 무효(無效)라고 포고했다.
금덩어리 처리
조선은행에 금덩어리가 2개 있었다. 한
개는 당시 400만 엔, 들려고 해도 들을 수 없을 만한 무게였다. 이것을 미군이 오기 전에 일본은행에 보낼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였다. 결국 조선은행 호시노(星野) 부총재와 둘이서 결정한 것은 “지금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은행에 보내도 맥아더에게 압수될 것이다. 일본이
자유로 쓸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미군이 왔을 때 일본에 보내 횡령의 의사로 비치면 바보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있는 것
모두 깨끗이 목록을 만들어 넘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였다.
재무국장 이하 전매국 간부들이 아편 밀매 혐의를 받아 밤중
서대문 관사를 급습한 경찰에 15~16명 모두 유치장에 연행되었다. 나는 일찌감치 몸을 숨겨 연행을 피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구출에 땀을
흘리며 한나절 가까이 고생하였다. 미군 주둔 후 나는 재계 교란죄, 관금(官金) 횡령, 아편 밀매, 미군정탐 등의 혐의를 받았다. (그러나)
고든 중령의 “아무것도 없다”는 조치로 11월 귀국하게 된 것이다.
나의 가족은 아내와 자녀 7명(5세부터 21세까지),
가정부까지 9명이었다. 재무국 소재지로 할당된 청주 교외 가주거에 다른 가족과 함께 가 있었다. 신경이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공무가
다망(多忙)하여 무엇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어 방치하여 두었다. 그런데 모 과장이 그 가족과 함께 귀국한 것을 그 후에 들었다. 늑막염으로 누워
있던 장녀 하나만 남기고 8월 하순 철수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일본이 식량 부족으로 큰일이라는 소문이 있어 쌀과 된장,
소금, 우메보시(매실로 만든 반찬) 등 먹을 것으로 배낭을 가득 채웠다. 부산에 아는 사람 호의로 며칠 머물다가 겨우 60톤급 일본 배로
3가족이 현해탄을 26시간이 걸려 무사히 횡단, 야마구치(山口)현 북쪽 해안에 상륙하였다. 이 또한 후에 들었다.
경성을
떠날 때 가족은 옷가지 등 화물 몇 개를 꾸려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의 호의로 일본에 탁송(託送)을 맡겼으나 도중 모두 약탈되어 한 개도 도착하지
못했다.
세 번의 눈물
귀국하기
전 눈물이 복받쳐 흐르는 일이 세 번 있었다.
첫째, 전술(前述)한 것과 같이 8월 하순 총독 대리로 니시히로 경무국장
입회하에 폐하의 영정을 총독부 뒤뜰에서 불태웠을 때.
둘째, 9월 8일 총독부 현관의 일장기(日章旗)를 내리고 미국의
성조기(星條旗)가 드높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볼 때.
셋째, 10월 중순 이승만이 미국에서 돌아와 총독부 청사에 들어올 때
정문 앞에서 도열 환영했을 때.
지금도 어제 일같이 생생하다.
경성에서는 실로 언짢은 기분으로 매일을
보냈다. 일이 끝나면 하루라도 빨리 일본에 가고 싶다는 것이 거짓 없는 심정이었다. 오쿠무라는 서너 번 도둑을 맞아 11월에 여름 양복을 입고
있었다. 도둑맞은 양복이 다음날 아침 헌 옷 가게에 걸려 있었다. 순사에게 가서 “저것이 도난당한 것이다”라고 하면 “돈을 갖고 가서 사면
좋겠소” 하였다.
나는 구실을 붙여 재무국장 고든 중령에게 “대장성과의 여러 가지 교섭이나 재산문제의 교섭이 어렵다. 나는
책임자로서 일단 일본에 가서 대장대신과 문제를 절충할 필요가 있으니 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고든 중령은 “GHQ가 있으니까 당신 손을 빌릴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다시 미 군정 당국자에게 “실은 도쿄의 집은 4월 13일 공습당하여 살 집이 없다. 아내는 몸이
약하고, 아이들은 배가 아프다. 가족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먹을 것이 없으니까 걱정이다”라고 했다. 미 군정은 “그건 안 됐다. 그렇다면
곧 가라”고 했다. 미국인과 일본인의 감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2개월 휴가를 얻어 11월 24일 귀국길에
올랐다. 이 무렵에는 미군도 일본인의 통치가 그들이 미국에서 들은 것 같이 압박 착취를 한 정도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예컨대 토지 총면적의
8할은 일본인 소유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7~8% 정도였다. 도처에서 일본인이 당하는 현실을 보고, 미군은 오히려 일본인들을 보호하여
철수하도록 태도가 변하였다.
조선에서 갖고 온 통장, 지불 못
하겠다니…
나는 사람들에게 “일본인은 예금을 인출하고 귀국할 수 있다. 현찰 준비는 충분하다. 그러나
앞을 다투어 모두 인출하면 조선인의 불안감에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면 철수에 장애가 될 수 있다. 또한 큰돈을 갖고 있으면 강도를 당할
염려가 있다. 현재 부산행 귀국 열차가 도중 야밤에 수십 명의 무장 강도가 정차(停車)시켜 승객의 돈을 모두 강탈하는 예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지참금은 당장 쓸 정도로 하고 나머지는 통장에 넣어 갖고 가는 편이 안전하다”고 하였다.
9월 24일경 맥아더는
“외지(外地)에 가 있던 일본인은 외지 침략의 선봉에 섰다. 그쪽에서 일본에 통장을 갖고 와도 일본의 지폐로 바꿀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인플레의 우려가 있으니 곧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조건 항복의 ‘달콤한 맛’이 이런 것이다. 대장성에서도 어찌할 수
없다. 일반 민중은 “그런 것은 우리는 모른다. 재무국장이 대장대신과 약속했다고 하니까 통장만 갖고 온 것이다. 그런 걸 알았으면 우리는 모두
현금으로 갖고 왔다. 모두 미즈타라는 사나이가 현찰을 갖고 귀국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라고 원망했다.
나는 최선을
다한 것이지만 ‘나 한 사람이 죽어 많은 원한이 사라진다면…’이라고 자책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46년 1월 이후 조선에서 철수한
사람의 우편저금만은 지불한다는 GHQ의 명령이 완화되어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기관사들, 열차 강도와 共謀
귀국 열차에는 헌병 3인이 감시원으로 동승하였다.
조선인 기관사는 처음에는 강도에게 묶여 있다가 약탈이 끝나면 강도가 풀어주어 기차가 움직였으니 피해자였다. 그러다가 점점 교활하게 되어 일당과
공모하여 그들이 숨어 있는 인적과 떨어진 산간에 열차를 세우고 약탈이 끝났다는 신호를 기다려 출발 후에 일당으로부터 한몫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귀국 열차에 타자 곧 헌병에게 신분증명서를 보였다. 거기에는 나의 전력(前歷)과 미군정에 협력한 자라는 것,
이 말을 믿고 보호를 하라는 것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 약간의 팁을 주고 부탁했다. “도중 역이 아닌 곳에 기차가 급히 정차하면 곧 기관사에게
달려가기 바란다. 틀림없이 기관사는 묶여 있을 것이니 풀어주고 권총을 들이대고 곧 발차(發車)를 명하시오. 강도의 약탈을 막기 위해서요”라고
말했다. 헌병은 곧 OK하였다. 도중에 두 번 급정차하는 사건이 있었으나 덕분에 일동이 다 난을 피했다.
부산에 도착하여
세관 창고 안의 짚 위에서 하룻밤을 잤다. 귀국 후 온 가족이 고향에서 살았다. 나는 12월 도쿄에 나가 친구 집에서 동거하면서 조선총독부
잔무(殘務)정리사무소에 출근하여 철수 사업에 종사하였다. 피로 때문인지 1946년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간 고향에서 병으로 누워 있었다.
일어나자 다시 상경(上京)했다. 마침 철수문제에 관심을 갖고 양원(兩院) 의원 20명으로 동포구원의원연맹이 결성될 기운이 있었다. 정부에 근무할
때에 낯익은 것을 이용하여 연맹 결성에 참여, 그 사무국장이 되었다. 비서 역이었던 후지하라에게 권유해 조선을 비롯한 외지 전반의 철수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는 데 미력(微力)을 바쳤다.
前
총독부 식산국장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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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식산국장을 지낸 호쓰미 신로쿠로의 《내 생애를 조선에》. |
다음은 호쓰미 신로쿠로의 기록이다. 그는 총독부 때
식산국장을 지냈다. 일본 명문가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미즈타 나오마사의 선배이다. 미나미 총독 및 군부(軍部)와의 불화로 1941년
사임했다. 이후 경성전기(주) 사장을 지냈다. 패전을 맞아 경성도움회 회장을 하면서 일본인 철수에 진력하였고, 1946년 4월 귀국하였다. 그
후 우방협회 이사장으로 일제 때 자료를 수집, 연구하였고, 나중에 이를 미즈타에게 인계하였다. 그는 자서전 《내 생애를 조선에》를 남겼는데
여기에 극히 일부분을 인용하는 것이다.
탈출자에 10원, 20원씩
빌려줘
특히 부산은 귀환의 입구라고 할 요소(要所)였으니 매우 바빴던 것 같다. 귀환 도움회 중에 가장
활동이 원활했던 곳은 인천이었다. 회장인 고타니(小谷)의 인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민이 시종 단결하여 미군과 연락도 잘되고 철수할 때도 단체로
‘이별의 노래’를 합창하며 정든 인천을 떠나갔다. 경성에서는 11월 6일(1945), 8월 9일 이후에 받았다는 이유로 도움회의 자금을 모두
미군에게 몰수당하여 고난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후루이치는 젊은이를 인천에 보내 인천 도움회의 잔금을 모두 받아왔다. 두
젊은이는 될 수 있는 한도의 지폐를 몸에 둘러 갖고 왔는데 기차 안에서 움직이면 바삭바삭 겨드랑이 밑에서 소리가 나서 신경이 곤두서 숙사에
돌아왔을 때는 손을 맞잡고 울었다. 1000만원 이상 몰수되기도 하고 해가 지나 1946년이 되자 북한으로부터의 탈출자가 증가하여 돈이 없어
어려웠다.
후루이치의 제안으로 밤에 무전(無電)을 도용(盜用)하여 일본 정부에 “이곳에서 돈을 빌렸으니 갚아달라”고 요청을
했다. 무전은 낮에는 미군이 감시하지만 한밤중에는 일본 기술자뿐이니까 잘 되었다. 대답은 “도움회장의 차용증(借用證)만 있으면 지불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이름으로 차금(借金)을 시작하였다. 경성에는 일본인도 적어졌고 마지못해 탈출자에게 10원, 20원을
빌려주었다. 그것이 1억원이 되었다.
김계조
사건
이 무렵부터 도움회 일 외에 시끄러운 사건에 얽히기 시작했다. 전쟁 중 내가 500만원을 모아 조선
젊은이의 지도에 쓰라고 정무총감에게 준 돈이 경무국장에게 갔다. 종전이 된 후 도움회는 그중에서 100만원을 받았다. 어느 날 경무국장을 만나니
“김계조(창씨명 中村一夫)라는 사람이 미군이 진주해 오면 시내 부녀자들이 잘못되면 안 되니까 미쓰코시(三越)의 지하실에 카바레를 열어 미군을
그곳에 흡수하여 난폭을 방지하는 안(案)을 내놓아 경무국에서도 지원하고 싶은데 돈이 부족하니 100만원 중 60만원을 나카무라에게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해도 미군은 곧 중지할 것이니 소용없다”고 항의했다. 하지만 워낙 경무국장이 강력히
부탁하고, 원래 경무국에서 받은 돈이어서 그중 60만원을 나카무라에게 건넸다. 이 카바레는 미군이 오자 곧 폐쇄되었다.
어느
날인가 조선인 한 사람이 “김계조가 카바레를 통하여 미군을 농락하고 해방 후의 임시정부를 파괴하는 음모를 하였다. 그 계획의 근원은 경무국장인
니시히로(西廣), 도움회장 호쓰미다”라는 선전문을 도움회에 갖고 와서 “10만원에 이것을 사라”고 했다. 총무부장인 스기야마(杉山),
다카시마(高島)가 그 문장을 보았다. 원래 근성이 있던 나는 이런 협박을 받으면 참을 수가 없었다. “돈을 내지 않으면 거리에 붙인다”하기에
“마음대로 해라”하고 만나지도 않고 쫓아버렸다. 만일 돈을 주면 약점이 있으니까 협박에 졌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런
선전문이 거리에 붙지는 않았지만 진주군이 소송을 걸어왔다. 하루건너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담당자는 중국인 2세 CIC(방첩대) 중위였는데 여러
가지 심문을 해도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까 3개월쯤 해서 그만두었다. 바쁜 도움회 일에 방해가 되었다. 그동안에도 일본인이 억류되면 석방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군정청에서는 무슨 사유를 붙여 불러내어 전혀 틈이 없었다.
1945년 11월에 재판권이
미군으로부터 조선의 임시정부로 이관되었다(호쓰미는 ‘조선의 임시정부’라고 표현하였으나,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재판권을 이양한 적이
없으며, 안재홍을 민정장관으로 하는 남조선과도정부가 수립된 것은 1947년 6월이었다. 호쓰미가 말하는 ‘조선의 임시정부’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하다.-편집자 주). 그와 동시에 ‘김계조 사건’을 다시 취조(取調)하게 되어 나는 몇 번인가 재판소에 불려갔다. 검사는 총독부 때부터
아는 자로 처음부터 이 재판은 바보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습으로 취조에 열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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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부산에서 철수하는 일본인들. 미군이 일본인들의 짐을 검색하고 있다. |
10일간 수감 생활
나는 김계조에게 돈을 건넨 사정을 대강 말했다.
“조선인이 협박하러 왔을 때 만나지 않았다. 다만 협박에 굴하는 것은 싫으니까 협박장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런데 고소인은 내가
‘새파랗게 질렸다’고 하는데 내가 당사자를 만났는지 아닌지는 스기야마나 동석한 다카시마 군을 소환하여 물으면 알 일이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니 검사가 난처한 기색을 표했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조선인이 지금 일본인을 미워하는
기분은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면, 장차 두 나라를 위하여 유익한가 어떤가를 숙고해 보면 어떤가. 그리고 당신은 지금까지
조선에서의 자신의 과거도 잘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검사는 난처해 하면서 “내가 당신을 취조하는 것인지, 당신에게
취조를 받는 것인지 모르게 되었군”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3월 상순에 “아무것도 조사할 것이 없으니 이 사건은
이것으로 종료한다”며 방면하였다. 안도하여 느긋한 기분이 되었는데 이번 일로 은밀히 걱정한 후루이치 군이 “이 어른을 억지로 일본에 귀국시키지
않으면 어떠한 불행한 일이 일어나겠다”며 나의 귀환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2주 정도 무사히 지났는가 싶었는데, 3월 18일 재판소로부터 “좀
나와라”는 통보가 왔다.
가보니 검사는 미안한 얼굴로 이상한 요구를 했다.
“당신이 아무 죄가 없는 것은
알지만, 누군가 돋보이는 인물을 감옥에 넣지 않으면 민족감정이 가라앉지 않을 거요. 길지는 않으니까 10일간만 감옥살이를 해주시오. 재판은
되도록 일찍 끝낼 테니까.”
도움회 업무 인계상 필요하니 후루이치를 불러달라 하자 만나게 해주었다. “도움회는 자네가 있으면
충분하니 내가 수감되는 것쯤으로 동요가 없도록 뒤를 부탁한다. 건강에 주의하여 한층 열심히 노력하라”고 격려하고 헤어졌다. 후루이치는 후에
도움회 사람에게 “위로하러 갔다가 위로받고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선인들의 위로
1945년이 저물자 경성에는 남은 일본인이 얼마 없었다.
조선인의 태도도 점점 변했다. 1946년이 되었을 때 내가 길을 걸어가면 도로상에서 공사를 하고 있던 경전(京電・경성전기) 인부가 정다운 소리로
“사장님, 아직 계셨군요. 몸조심하십시오”라고 위로하였다. 군정청에서 나를 부르면 경전에서는 도움회로 자동차를 보내주었다. 경전 사원이
차중(車中)에서 “무엇 때문에 부릅니까. 이번에도 어려운 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걱정해 주었다. 내 방에 있던 소녀는 내가 회사에서
나온 후 나를 쫓아와 “정말 몸 잘 건사하십시오”라며 울었다. 경전 사장 때 사원 특히 조선인의 대우를 개선한 것이 어지간히 그들의 마음을 울린
것 같다.
이와 같이 신변의 위험도 점점 적게 되면서 다툼도 줄어 맑은 기분이었다. 한편으로 북쪽 탈출자는 점점 늘었다.
추운 날 한밤중에 탈출 도중 갓난아이가 죽어 묻으려 해도 땅이 얼어 있어 땅을 파지도 못하고 울면서 시신을 소나무 뿌리 근처에 눕혀 놓고 온
어머니, 해로(海路) 탈출 도중 돈을 잃어 가족 전원이 바다에 던져져 사망하고 혼자서 살아남아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던 젊은이, 이 추위에
속옷만 입고 가까스로 도착한 어느 부윤(府尹・시장)…. 어느 절 뜰에 피곤하여 늘어져 있던 노인은 “난 북선(北鮮・북한-편집자 주)에서 손자를
등에 업고 50여 일을 걸어서 왔소. 나쁜 나라에 태어난 것이죠”라며 엉엉 울었다. 위로할 말도 없었다.
지방
금융조합 이사의 조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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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협회에서 미즈타 나오마사가 감수 발행한 《조선금융조합 회고록》. |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글은 우방협회에서 미즈타 나오마사가
감수 발행한 《조선금융조합 회고록—조선금융조합과 농촌과의 관계》에 시모카와 사도시가 기고한 〈장흥에서 철수한 조난 보고—현해탄의 12시간〉이라는
수기(手記)다. 그는 미즈타 같은 총독부 고관이 아니라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지방 금융조합 이사였다. 미즈타 나오마사나 호쓰미 신로쿠로 등은
일본 배로 무사히 귀국하였으나, 시모카와는 밀항선을 타고 가다가 난파, 800여 명 중 260명이 바다에 빠져 죽는 참사를 겪었다.
시모카와의 기고문을 보면, 그의 직함은 전라남도 진도금융조합 이사라고 했는데, 제목을 보면 장흥에서 철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더
이상 그의 이력을 알 수 없다.
형과 어머니, 바다에
빠져
장흥 철수자는 약 800명에서 900명이었는데 이들은 5척의 야미배(밀항선)로 나누어 타고
출발했다. 그중 3척은 무사히 귀국하였으나, 우리가 타고 있던 1척은 난파하는 바람에 생존자가 겨우 19명에 불과했다. 다른 한 척은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다. 이와 같이 장흥 출신자의 약 3분의 1이 죽는 비참한 결과로 끝났다.
트럭 화물 위에 타고 장흥을 출발,
수문포 근방 작은 항구에서 야미배로 출발했다. 우리 178명을 태운 야미배는 1945년 11월 1일 밤중에 대마도에 도착했다. 곧 출발할
것인가, 혹은 하룻밤을 새우고 다음날 아침 출발할 것인가 배 안에서 의논이 있었다. 그 결과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 곧
출발하기로 했다. 해뢰(海雷·기뢰)가 여기저기 떠 있는 현해탄을 밤중에 통과한다는 것은 위험하기보다는 무모한 일이었다.
12월 2일 오전 2시경 돌연 선미(船尾)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걱정했던 해뢰에 접촉이 된 것이다. 선미 근방에 있던 자는 즉사(卽死)했다.
해뢰에 맞은 경우 철선(鐵船)이라면 곧 가라앉는다. 목선(木船)이기 때문에 침몰하지 않았는데 배 안에 순식간에 바닷물이 들어왔다. 젊은이들이
교대로 펌프로 물을 퍼냈는데 그때 나는 갑판 위에서 당번을 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좁은 승강구를 통해 차차 사람들이
갑판으로 올라왔다. 승강구는 앞과 뒤에 하나씩 있었는데 뒤쪽은 해뢰에 맞아 사용할 수 없고 앞쪽만 성했다. 많은 사람이 밤중에 단 하나밖에 없는
승강 계단을 올라오는 것은 큰일이었다. 그중에 나의 어머니와 형의 모습이 보여 소리를 질렀으나 혼잡하여 잃어버렸다. 몇 시간 후에 아마 어머니는
바다에 떨어졌고 이를 구하려고 효자인 형이 함께 뛰어들었다고 생각한다. 갑판에 올라오지 못한 약 3분의 1(60명) 정도는 배 안에서 익사한 것
같다. 겨우 갑판에 올라온 이들도 밤중의 격랑에 차차 휩쓸려간 것 같다.
새벽이 올 무렵 그곳은 사나운 파도의 한가운데 문자
그대로 난파선의 모습이었다. 수면상에 겨우 남은 곳에는 몇 시간 전까지 조국에 돌아간다는 기쁨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이 세상에 생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미쳐서 양팔에 아이를 안고 서서 계속 웃어대는 남자는 우편국 우쓰 기(宇津木) 씨, 발이
재목인가 무엇인가에 끼여 머리만 해면상에 내놓고 신음하면서 바닷물을 계속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미나카와(皆川) 씨의 아버지,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로프를 잡고 있는 사람은 나카가와 판사와 그의 부인, 이것을 보면서 곁으로 가지 못하고 큰소리로 격려를 계속하는 이는
당시 19세의 그들의 아들….
누이동생도
물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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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진주한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있다. 출처=《광복 1775일》. |
나의 여동생 도키코(時子) 등 몇 명이
가까이 모여 있었다. 난파선은 정기 항로로부터 멀리 떨어졌는지 배 그림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날이 새어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사람들을
강하게 앗아가는 큰 파도, 힘이 빠져 배에서 떨어지는 사람들….
그런 와중에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는 상당한 거리였으나
수영을 해서 갈 만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혹은 반미치광이가 되었는지 젊은이 몇이 그 섬을 목표로 헤엄쳐 나갔다. 그러나 모두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이렇게 되면 영구히 구출의 길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누군가 결심하고 닻을 내렸다. 바닥이 없는 깊은 바다에 닻을
내렸으니 배는 전복(顚覆)되기 시작했다. 배의 갑판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배의 둥근 바닥이 해면에 나타났다. 그 바람에 그때까지 살아남았던
50~60명의 사람은 한순간에 바다에 던져졌다. 낮 1시경의 일이었다.
주위를 돌아보다가 나는 또 처참한 모습을 보았다.
둥근 배 바닥에서 올라가려다 미끄러지는 자, 손을 휘저어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바다 가운데서 한 사람이 겨우 배를 붙잡았다. 그러자 그 발을
다른 사람이 잡았다. 다시 그 발을 잡은 사람의 줄이 이어졌다. 그중에 나의 여동생 사치코(幸子)가 있었다. 여동생의 발은 이마이(今井) 씨의
아버지가 붙잡고 있었다.
이렇게 차차 몇 명인가 죽어가고 있었다. 겨우 이십몇 명이 배 바닥 위로 올라왔다. 그중에 나의
누이동생 도키코가 있었다. 당시 20세였던 그녀는 “다 죽어버렸네요”라고 했다. 너덜너덜한 옷, 허벅지를 감추려는 몸놀림이 애처롭게 보였다.
도키코가 “앗”하는 사이 파도가 그녀를 휩쓸었다. 의자에 걸터앉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곳을 보는 그대로 대단한 기세로 멀어졌다. 손을 올릴
수도, 한마디 할 새도 없이 얼마 안 있어 그녀는 가라앉았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도다(戶田) 씨도 무릎 위에 아이를 꼭 안은 채 파도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떨어져
나갔다. 무로(室) 씨도 멀리 떠내려갔다. 고바야시(小林和歌子) 이야기는 태양여관의 대장(주인)이었던 아저씨가 배에서 손을 놓치고 갈 때
“와가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라고 외친 후 경전을 외우며 가라앉았다 한다.
많은 화물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지
한 척의 조선 배가 가까이 온 것은 약 1시간 후의 일이다. 구조선이 배 바닥에 닿았을 때 순간에 나는 뛰어 그 배로 건너갔다. 구조선에선
사람들과 접촉이 어려워 한 사람씩 로프로 구조하여 올렸다. 이때 구조된 자는 178명 중 겨우 20명뿐이었다.
그러나 그중
한 명 오사카 군은 구조되어 안심했는지, 긴장했던 힘이 빠졌는지, 머리가 부딪혔는지, 우리가 꽤 격려했지만 시모노세키에 도착하기 전에 배 안에서
죽었다.
구조 완료 때 본 나의 시계는 오후 2시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12시간의 사투였다. 그 구조선이 적어도 1시간
일찍 도착했으면 60명 정도의 목숨은 구했을 것이다. 아쉬운 일이다.
일가 전멸의 가족도 많다. 나도 매우 소중한 사랑하는
육친 8명을 잃고 나 하나만 살아남았다.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3&nNewsNumb=20150818105&nidx=18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