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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맛들이기] 바리사이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4복음서 내 중요한 길목마다 자리잡고 있는데, 그 자료만 해도 양이 상당합니다. 복음서 내 기도에 대한 가르침만 잘 묵상하고 실천한다면, 다른 어떤 참고서도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내용도 얼마나 풍부하고 알찬지 모릅니다. 주님의 기도, 겟세마니에서의 기도, 수난 직전 당신과 제자들을 위해 바친 기도, 골방 기도에 대한 가르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마음모아 함께 청하라는 가르침, 끊임없이 간청하라는 가르침….
그중에서도 참으로 흥미로운 가르침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세리 두 사람의 기도를 극명하게 대조시키며 전개하는 생생한 가르침입니다. 이 비유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선호하시는 기도와 혐오하시는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선 바리사이의 기도를 보십시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11-12).
사실 바리사이의 신앙생활은 경탄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일 년에 두 번이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빼먹지 않고 단식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어렵다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실천했습니다. 윤리 도덕적으로도 깨끗했습니다. 정말이지 그 정도면 완벽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그러나 바리사이에게는 딱 한 가지 치명적인 흠결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왔고, 많은 것을 주님께 봉헌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지나친 우월의식, 지나친 자신감, 스스로를 들어 높이는 교만한 마음이 애써 쌓아올린 아름다운 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바친 기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겸손의 결핍이요, 진지한 성찰과 자기 인식의 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리를 한번 보십시오. 송구스러움과 부끄러움에 당당히 성전으로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성전 기둥 뒤에 숨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외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사실 세리가 바친 기도는 기도중의 기도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진심어린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자기반성을 바탕으로 한 간절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그저 주님 자비만을 바라는 진솔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는 바로 세리의 기도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 자비를 구하면서, 그분의 은총에 호소하면서, 우리가 직면한 절박한 처지를 있는 그대로 주님께 보여드리면서, 그분의 일상적 현존을 청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 맛들이기] 응답 없는 기도 앞에서
삶이 고달플 때마다, 고통이 쓰나미처럼 밀려올 때마다, 하느님이 원망스러울 때마다 펼쳐보는 최애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 예언서’입니다. 어린 시절 소명을 받은 예레미야는 평생토록 고통을 친구처럼 끌어안고 살았던 예언자로 유명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서를 천천히 읽어 나가다 보면 저절로 큰 동정심과 측은지심이 밀려옵니다. 자연스레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은 별것도 아니로구나’ 하는 위로도 다가옵니다.
말빨이 제대로 먹히지도 않고, 가는 곳마다 천대받고 무시당하던 예레미야가 하루는 얼마나 괴로웠던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 15,10).
그가 사면초가 상태에서 바친 기도를 한번 들어 보십시오.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당신께서 완전히 유다를 버리셨습니까? 아니면 당신께서 시온을 지겨워하십니까?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저희를 치셨습니까? 평화를 바랐으나 좋은 일은 하나 없고 회복할 때를 바랐으나 두려운 일뿐입니다”(예레 14,19).
깊은 구렁 속에 엎드려 주님께 간절히 탄원하는 예언자의 기도가 참으로 솔직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주님께 아룁니다. 비록 하느님의 즉각적인 응답이 없을지라도 예언자는 탄원하고 또 매달렸습니다.
위대한 대 예언자들은 기도의 응답 여부와 상관없이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정성을 다 쏟아가며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도가 지닌 문제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열심히 기도를 바치는 과정에서 자신이 바치고 있는 기도에 대한 정화와 쇄신 작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응답 없는 기도란 결코 없습니다. 다만 기도에 대한 응답은 때로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때로 한평생에 걸쳐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을 기대하는 것처럼 위험스러운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 앞에 하느님께서는 자주 인간의 사고 방식, 논리,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청할 것은 하느님의 성령이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작은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시선으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기도 맛들이기] 아빠! 아버지!
복음서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기도는 모두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마태 11,25).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마르 14,36).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요한 17,1).
유다 문화 안에서 이 표현은 어린이가 자신의 아버지를 정겹게 부를 때 사용하던 아람어 ‘아빠’(Abba)라는 단어의 번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 지극히 친근하고 다정한 어조로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에게 있어 하느님이란 존재는 꽤나 멀리 계시고, 무척이나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감히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 하느님은 너무나 편안하고 따뜻한 아버지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자녀다운 신뢰와 존경은 바람직한 기도 생활의 두 기둥입니다.
골고타 언덕에서의 끔찍한 십자가 죽음을 고스란히 예견하신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마음이 심란하고 괴로운 나머지,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바쳐 온 몸과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살벌한 죽음의 현장,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22,42).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최종적인 결정은 아버지께 맡겨드립니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의 편리함이나 안락함, 만사형통이나 승승장구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뜻, 주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 끝에 이 기도를 덧붙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소리 내어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유롭게 기도한다고 하지만, 정해진 틀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자신을 앞세우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본질은 ‘모든 것을 하늘 아버지께 의탁하는 것’에 있습니다. 자기를 앞세우는 기도를 지양하고, 하늘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 누워, 그 사랑에 몸을 맡기는 은혜의 때가 참 기도의 때입니다”(‘하늘 아버지께 드리는 77가지 기도’ 하레사쿠 마사히데 신부, 생활성서).
[기도 맛들이기] 분심 앞에서
제가 몸담은 수도회는 활동 수도회이다 보니 공동 묵상 시간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미사 후 딱 30분입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그 짧은 시간조차도 온전히 깨어있지 못하고, 다양한 분심 속에 묵상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묵상이 끝날 무렵 너무나 송구스러워 주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요즘 주로 드는 분심이 무엇인가 분석해봤습니다. 우선, 당면한 시급한 업무들이 의외로 큰 분심거리였습니다. 묵상 시간에 앉아있으면 주말 피정 일거리들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그런 분심이 끝나자마자 다가오는 또 다른 분심이 있습니다. 아직도 떠올리기만 하면 분노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그분’, 아직도 용서가 안 되는 또 다른 그분, 수도회 걱정, 나라 걱정…. 이런저런 다양한 분심의 홍수 속에 앉아있던 어느 날,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툭 던져주셨습니다. “다 부질없단다. 다 지나간단다. 다 내려놓거라. 그저 오늘에 충실하거라.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거라.”
묵상이나 기도를 제대로 한번 시작해보려고 자세를 잡기만 하면, 어김없이 달려와 우리를 힘겹게 하는 분심, 대체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심도 여러 종류였습니다.
의도적인 분심도 있더군요. 주님과의 깊이 있는 만남에 대한 열정이 처음부터 아예 없는 경우입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깊은 친교를 꿈꾼다면 공짜는 없습니다. 기도에는 열정과 정성, 몰입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묵상에 임하는 우리에게 주님과의 감미로운 만남을 위한 간절한 지향이나 의도가 조금도 없다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자연스레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기 마련입니다. 제주도로 지리산으로 갯바위로 올레길로…. 그런가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떨칠 수 없는 분심이 있습니다. 기도만 시작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그분의 얼굴, 그때의 사건, 잘 나가던 내 인생을 깊은 수렁으로 밀어넣은 그분…. 이런 분심 앞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떠오를 때마다 즉시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기도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르면 분심을 적으로 여기지 말고 친구처럼 바라보랍니다. 분심을 우리 각자의 영적 현주소를 파악하게 하는 도구로 바라보랍니다. 분심은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인식하게 합니다. 결국, 분심은 우리를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도록 안내합니다. 그러나 의도적이고 습관적인 분심은 주님 앞에 예의가 아니므로 언제나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기도 시간에 어떻게든 맑은 얼굴로 깨어있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분심은 오늘도 내일도 다양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와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분심을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겨드려야겠습니다.
[기도 맛들이기]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가톨릭 신자들이 일과 안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주 바치는 염경기도는 ‘성모송’입니다. 돈보스코 성인 역시 성모송을 각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분은 밤기도를 마치고 침실로 향하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잠들기 전 성모송을 꼭 세 번 바치기 바랍니다. 성모님께서 여러분을 굳건히 지켜주실 것입니다. 평생토록 계속할 때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급이 클 것입니다.”
저희 살레시안들 역시 돈보스코 성인의 모범을 따라 짧고 단순하면서도, 심오하고 아름다운 기도, 성모송을 애지중지합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강의를 하기 전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떨릴 때, 가끔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분노가 치밀어 얼굴이 후끈거릴 때도 성모송을 바치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진정됩니다. 누군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즉시 성모송을 바칩니다.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님께서도 성모송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주교님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은총을 지켜 영혼을 구원하고, 성모님께 헌신하는데, 성모송 세 번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침에 눈 뜰 때,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 바치는 정성 담긴 성모송 세 번은 거룩함을 회복하고, 유혹 앞에 강건하게 하고, 궁극적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성모송의 첫째 부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는 하느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님께 외친 말입니다. 엘리사벳의 집에 도착한 성모님께서 그녀에게 인사를 하니 그 인사말을 들은 태중의 아기가 뛰놀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그녀의 외침은 성모송의 둘째 부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죄인인 인간들의 필요에 따라 교회가 첨가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이렇게 성모송은 짧은 기도문이지만, 구약을 상징하는 엘리사벳이 신약을 상징하는 성모님과 연결되는 매우 아름답고 심오한 기도입니다. 신약과 구약은 이 안에서 조화를 이룹니다.
성모송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라고 성모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궁극적으로 아들 예수님께 드리는 인사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끊임없는 찬미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성모송을 반복하는데, 그 자체가 예수님의 인류 구원의 신비를 계속 묵상하도록 이끄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성모님의 아들이시라는 진리를 기억하고 우리도 성모님처럼 주님 은총으로 충만한 존재, 주님 현존으로 인한 복된 존재로 살아갈 것을 다짐해야겠습니다.
[기도 맛들이기] 성모님의 피앗(Fiat) 기도
길을 가다가 한 주점 앞에 걸린 커다란 입간판 문구를 보고 혼자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낮술 환영!’ 마음이 허전할 때, 그래서 술이 당길 때, 주야를 막론하고 언제든지 오라는 사장님의 너그러운 초대에, 마음이 훈훈해졌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유형의 초대를 받습니다. 마음 설레는 초대, 마음이 껄끄러워지는 초대, 당장 달려가고 싶은 초대, 생각만 해도 부담스러운 초대….
루카 복음 1장 26절 이하에는 아주 특별한 초대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나자렛의 마리아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루카 1,30-32).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초대는 너무나 엄청나고, 끔찍할 정도로 부담되는 초대입니다. ‘그렇게 하겠노라.’라는 응답으로 인해 다가올 고초가 만만치 않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담담하게 대답하십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틴어로는 “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 간단히 피앗(Fiat)이라고도 합니다. ‘피앗’은 성모님께서 당신의 생애에 걸쳐 되풀이해서 바치신 기도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함께 바쳐야 할 기도의 모범입니다. 성모님은 틈만 나면 또 다른 도전, 또 다른 부르심, 또 다른 난감한 상황 앞에 계셨는데, 그때마다 계속해서 피앗이라고 응답하며 기도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의 피앗은 그 길이 분명 고통스러운 길,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뻔히 알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 주님을 위한 길이기에 기꺼이 그 길을 떠나겠다는 의미에서의 피앗입니다. 끊임없는 피앗, 평생에 걸친 피앗의 결과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 새로운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되십니다. 이제 성모님은 그 안에 메시아가 끊임없이 살아 계시는 계약의 궤가 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성모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울 같은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얼굴은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가장 맑고 투명하게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울이 되신 배경에는 끝도 없이 반복된 피앗 기도가 있었습니다.
돈보스코 성인께서는 당신 스스로 하느님의 손수건이 되기를 원하셨고, 후배 살레시안에게도 장상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손수건같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접든 펴든, 더러운 손을 닦든, 코를 풀든, 그저 주인의 손아귀에 든 손수건처럼 하느님의 손수건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아주 좋은 피앗 기도입니다.
[기도 맛들이기] 평생에 걸친 성모님의 기도 방식, ‘간직하였다’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 예루살렘 순례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벌어진 작은 사건은 그분의 연대기에서 아주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사가들은 서른 살 이전 그분의 거취에 대해 한결같이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유일하게 이곳에서 소년 예수님과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가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소년 예수님 실종 사건’입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식음도 잊은 채 이곳저곳 샅샅이 뒤지다가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아냈습니다. 아들을 되찾은 데서 온 기쁨도 컸겠지만, 성모님께서는 매우 속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아들에게 묻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그 순간 소년 예수님께서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잠시 한눈팔다가 그랬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라고 말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웬걸 한술 더 뜨십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갑작스레 툭 튀어나온 예수님의 이 말씀, 어떻게 보면 예의 없는 말, 이유 없이 반항하는 사춘기 청소년의 버르장머리 없는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 말씀은 심오한 진리, 큰 의미를 담은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혈육에 매여계실 분이 아니라, 인류 만민을 한 형제로 묶어야 할 큰 사명을 지니신 분임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당신은 작은 고을 나자렛에만 머무실 분이 아니라, 더 큰 바다로, 온 세상 방방곡곡으로 나아가야 할 크신 분임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돌출 발언 앞에서 보여주신 성모님의 태도를 우리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간직하였다.’라는 말의 의미는 분노를 겨우 참고 삭이며, 꽁하니 마음에 담아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이는 평생에 걸친 성모님의 기도 방식이었습니다. 아들 예수님으로부터 유발된 이해하지 못할 사건이나 언행 앞에서 성모님께서는 우선 침묵하셨습니다. 비수처럼 다가온 예수님 말씀의 진의(眞意)가 무엇인지 곰곰이 묵상하였습니다.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였다는 말은 ‘그냥 참지, 그냥 웃고 말지.’라는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아무리 이해해도 하지 못할 상황, 견디기 힘든 상황이라 할지라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도 지속적으로 긍정하며, 기도의 끈을 놓지 않겠다라는 표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