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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70) 복음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
시노달리타스, 더 효과적인 복음화 사명 수행하려는 교회 노력
위기의 교회
교회의 성장은 이제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 20세기 후반부에, 세속화라는 거센 파도를 넘어, ‘종교의 귀환’이라 불릴 정도로 종교가 활발해지는 것 같았다. 유럽교회를 제외하고 세상의 모든 교회는 성장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1990년대 한국교회는 팽창의 정점을 이뤘다. 하지만 21세기 탈세속화 시대에 뜻밖에도 종교가 힘을 잃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한다. 한국교회 역시 수축되고 있다. 물론 사목자의 개별적 역량에 힘입어 성장하는 본당도 있다. 또한 인구 유입과 인구 밀집도의 확장이라는 사회적 요인에 의해 성장하는 교구도 있다. 하지만 교회의 전반적 흐름은 성장보다는 수축의 시기에 도달한 느낌이다.
위기는 늘 근본적 질문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무엇을 위한 교회인가? 정체성과 사명에 관한 질문이다. 정체성과 사명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하나이다. 교회는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선교하는 교회가 곧 교회의 정체성이다.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 인식하고 그것을 재구축하는 일이 위기의 시대에 응대하는 교회의 방식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든 노력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 교회는 그 본질상 선교적 교회라는 인식과 신념, 선교적 교회가 되기 위한 교회 내부적 쇄신으로서의 시노달리타스를 향한 노력 말이다.
팬데믹 이후 점점 활기를 잃어가는 교회 현상과 흐름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분석과 전망 역시 비슷한 맥락을 보인다. 교회 수축의 시대에 새로운 생존 전략으로서 선교적 교회로의 복귀, 교회 안 소모임의 활성화, 교회 운영과 통치 방식의 재구성을 주장하고 있다.(「한국교회 트렌드 2024」) 사실, 위기의 시대에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망은 개신교나 우리나 비슷하다.
복음화, 선교, 사목
교회는 복음화를 위해 있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사명과 활동은 선교와 사목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어왔다. 복음화라는 개념은 나중에 추가된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복음화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교회가 선교를 “복음을 선포하며 교회를 심는 일”(선교 교령, 6항)이라고 정의할 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복음화로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즉 복음화를 선교의 한 요소로서 이해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선교의 개념이, 서구중심주의 문화의 특성을 보여주는, 일종의 식민지주의 경향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다. 「현대의 복음 선교」(1975)는 복음화 개념에 대한 총체적이고 새로운 이해를 제공했다. 「현대의 복음 선교」 이후 복음화라는 개념은 교회의 사명과 활동을 총망라하는 개념으로 자리하게 된다. 복음화에 대한 바뀐 이해는 선교 활동을 복음화의 한 요소로 받아들이게 했다. 즉, 복음화로서의 선교를 강조한다. 선교의 한 요소로서의 복음화가 복음화의 한 요소로서의 선교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복음화는 교회의 사명과 활동의 3가지 측면 모두를 포함한다. 복음화는 “신앙인들이 영적 성장을 지향하여 그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더 온전하게 응답하도록 돕는” 일반 사목과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의 요구대로 살지 않은 이들”이 회개를 경험하도록 도와주는 새로운 복음화(재복음화)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 또는 여전히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외방 선교) 모두를 포함한다.(「복음의 기쁨」 14항)
복음화, 선교, 사목은 경계가 분명하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복음화, 선교, 사목이라는 개념은 교회의 사명과 활동을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하게 한다. 선교와 사목에 관한 전통적인 이해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 활동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복음화에 대한 변화된 이해는 교회 활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평신도 참여 영역을 확장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복음화라는 개념은 선교와 사목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것으로서 다양한 측면에서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촉진할 수 있는 신학적 용어로 자리하게 된다.
교회의 복음화 - 시노달리타스
교회의 존재 방식과 작동 방식에 따라 복음화의 방식도 달라진다. 오늘날 복음화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교회의 존재 방식과 작동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사실, 교회가 존재하는 모습, 교회가 움직이는 모습 그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복음의 증거가 된다. 교회의 존재 방식과 작동 방식은 복음화 수행 방식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지만, 그 자체로서도 복음화 수행의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복음화를 향한 교회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서 복음화가 이루어지지만, 또한 동시에 교회는 자신이 존재하는 방식을 통해 복음화를 수행할 수 있다는 의미다. 교회 구성원들의 복음화, 교회 구조의 복음화를 통해 복음화를 더 잘 증거하고 수행할 수 있다. 세상의 복음화와 교회의 복음화는 늘 함께 간다.
교회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자율적인 공간이 아니다. 교회는 언제나 시대와 문화의 영향 속에 있다. 교회는 당대의 문화로부터 많은 것을 빌려온다. 하지만 교회는 그 빌려온 것을 복음의 관점에서 낯설게 하고 새롭게 해서 자신만의 고유한 문화를 창출한다. 구조, 관계 방식, 통교 방식 그 모두를 새롭게 창조한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 안의 구조와 관계 방식과 통교 방식을 새롭게 하여 복음화 사명을 더욱 잘 수행하려는 교회의 움직임을 반영한다. 시노달리타스는 세상 안에서 교회의 복음화 사명 수행을 더 효과적으로 하려는 교회의 노력이다.
시노달리타스는 단순히 기능적인 차원에서 교회 작동 방식의 변화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존재 방식과 활동 방식에 새로움을 불어넣으려는 노력이며, 영성적이고 사목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교회 방식을 추구하려는 노력이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교회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이며, 신학적이고 문화적이고 제도적인 다양한 형태의 복음화 사명 수행 모델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복음화의 목표가 단순히 교리를 교육하고 제도로서의 교회를 형성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복음화의 총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질 때, 복음화의 구체적 실천 방식에 관한 생각들도 달라질 것이다. 복음화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가질 때, “수많은 교리를 두서없이 전달하고 이를 끈질기게 강요하려고 집착하지” 않을 것이고 “본질적인 것에, 곧 가장 아름답고 가장 크고 가장 매력적이면서 가장 필요한 것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복음의 기쁨」 35항)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교회의 복음화를 깊이 고민해야 하는 시절이다. 변화와 쇄신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것인지, 기존의 방식으로 살다가 쇠퇴의 길을 걸을 것인지?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71) 위령 성월 한가운데서
죽음을 향해가는 시간은 우리 삶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
- 지난해 11월 2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서울 용산성직자묘지에서 기도를 바치고 있는 신자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능력 안에서 산 이와 죽은 이가 연결되어 있음을 믿고 고백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늙어감, 죽음
늦가을의 풍경은 어김없이 시간의 흐름을 절감하게 한다. 자연은 색깔이 바래져 가고, 사람은 몸이 늙어간다. 세월의 흐름 끝에는 죽음이 있다. “우리는 늙어가며 시간을 발견한다.”(장 아메리 「늙어감에 대하여」) 지금의 이 시간, 지금의 이 나이에 이르렀듯이 언젠가 그 죽음의 시간, 그 소멸의 시점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세월의 흐름과 늙어가는 몸을 통해 죽음의 소멸을 예감한다.
우리는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내가 죽는 그 순간은 경험의 경계를 벗어나 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이다. 타자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은 삼인칭인 ‘그’의 죽음과 이인칭인 ‘너’의 죽음이다. 삼인칭과 이인칭의 죽음은 과거와 현재의 죽음이 될 수 있지만, 일인칭의 죽음은 언제나 미래의 죽음이다.(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죽음: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 과거와 현재는 경험과 성찰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미래는 경험을 넘어서 있는 상상과 추론의 대상이다. 가깝고 친밀한 타자, 즉 이인칭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조금 더 정서적으로 체감할 뿐이다.
이별, 부재
죽음은 슬픈 일이다. 가끔 돌아보면 우리가 알던 많은 이들이, 내가 사랑했던 어떤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게 된다. 갑자기 느껴지는 그들의 부재가 슬프고 가슴 아리게 한다.
삶과 죽음의 단절, 이승과 저승의 단절은 깊고 아득하다. 삶과 죽음의 이별은 참 아프고 쓰라리다. 이승을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저승으로 떠나보낸 사람을 다시는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나와 깊은 인연을 지녔던 사람이 지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부재감은 참 서늘한 슬픔을 낳는다.
풍진 세상을 살면서, 진흙탕 같은 세속을 살면서, 내 한 몸 건사하기 위해 허겁지겁 사느라,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그러나 더 이상 이승의 땅에 나와 함께 있지 못하는 그 사람들을, 내가 까맣게 잊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깊은 미안함에 사로잡힌다. 살아남은 자가 늘 죽은 자를 배반한다. “사람은 사는 동안 죽은 자에게서 많은 것을 얻지만 생각은 늘 자신을 향해 있을 뿐이다.”(권경인 「낮아서 오르는 길」) 산다는 것은 언제나 망각과 이기심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위령의 날
우리 곁에 머물다 사라져 간 사람들을 신앙 안에서 기억하고 기도하는 날이다. 우리의 이기적 무심함 속에서, 우리의 욕망들을 실현하기 위해 발버둥 치느라,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죽은 이들을 우리들의 따뜻한 기억 속에서 불러내어 마음 깊은 곳 안에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또 그들을 위해 주님께 정성으로 기도하는 날이다. 비록 삶과 죽음의 경계가 우리와 죽은 이들을 갈라놓고 있다 할지라도, 신앙 안에서 그와 나의 인연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날이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삶과 죽음은 영원한 단절이지만, 주님의 시선 안에서는 삶과 죽음, 산 이와 죽은 이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산 이와 죽은 이가 연결되어 있음을 믿고 고백한다. 주님의 그 크신 능력 안에서 언젠가 우리는 이승을 떠난, 우리가 사랑했던 이들을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믿고 희망한다. 죽음이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갈라놓지 못하리라는 것을 믿고 희망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신앙 안에서,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죽은 이들 역시 주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삶은 죽음을 매개로 더욱 빛난다
“오늘도 나는/ 내 봉분 하나 넘어가지 못한다.”(조은 「무덤을 맴도는 이유」)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 가까이 알던 사람의 죽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은 죽음이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하지만 내가 아닌 타자의 죽음은 언제나 그 순간의 충격일 뿐, 우리는 일상 대부분의 자리에서 죽음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사실, 늘 죽음을 의식하고 산다면 우리의 삶은 불안하고 피폐한 모습일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마저도 망각하고 사는 것이 때론 우리 삶의 한 지혜이다. 하지만 또 때때로 우리가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갈 때 우리 삶의 역설적 소중함을 알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때론 죽음을 잊고 살아야 하며, 때론 죽음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묘한 줄타기의 연속이다.
운명은 거부함으로써가 아니라 수용함으로써 오히려 운명을 극복하고 완성할 수 있다. 죽음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그 죽음의 운명을 건강하게 끌어안고 사는 것이 오히려 죽음을 극복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완성시킬 것이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가는 여정이며, 삶과 죽음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승의 삶은 죽음으로 끝이 나고 또 완성되며, 죽음은 이승의 삶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죽음은 분명 삶을 소멸시키는 파괴적 힘이지만, 죽음은 또 한편 삶을 더욱 소중하고 빛나게 한다. 삶은 죽음의 그림자 안에서 역설적으로 더 아름답다. 무한히 계속될 수 없는 이 이승의 삶, 언젠가 끝마쳐야 할 이 이승의 삶, 그래서 오히려 삶은 더 눈부시게 아름답고 눈물 나게 고마운 것임을 우리는 안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죽음은 삶에 대한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죽음 때문에 우리는 삶의 시간을 얼마나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지, 죽음 덕분에 우리는 이 눈물 나는 노역(勞役)의 시간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을 넘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고백한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문제는 철저히 하느님의 영역이다. 우리는 그저 믿고 희망할 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이 무로 돌아가는 소멸이 아니라 우리 삶의 성숙과 완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쳐 준다. 죽음이 우리 생의 완성과 성숙을 뜻한다면, 죽음을 향해가는 시간의 여정과 세월의 흐름 역시 완성과 성숙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과정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부활하신 주님, 그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의 인생도 늘 빛나고 새로울 수 있음을 우리는 믿고 희망한다. 산다는 것은 분명 죽음을 향해가는 슬픈 일임은 틀림이 없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늘 새로울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은, 산다는 것이 또 얼마나 그 자체로 축복인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산다는 것은 늘 새롭게 서 있는 것이며, 신앙인이란 죽는 그 순간까지 성령 안에서 늘 새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72) 시노달리타스와 신학에 관한 상념들
시노드적 신학, 다양한 요소들과 대화·경청하고 식별·통합하는 여정
신학, 교회
신학자로 살고 있다. 학문적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신학에 관한 나름의 깊은 관심은 신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전하다. 신학을 배우기 시작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는 질문은 신학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신학의 본질과 정체성에 관한 질문보다는 신학의 사명과 역할에 관한 질문에 더 관심이 많았다. 신학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것과 신학이 교회와 세상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학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것은 신학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를 낳는다.
교회에 몸을 담고 살고 있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는지에 늘 관심이 많다. 교회의 신학적 본질과 정체성에 관한 질문보다는 실제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과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모든 실재의 본질과 사명은 연결되어 있다. 존재적 본질과 행위적 역할을 구분하고, 전자를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통적 존재론의 편견일 뿐이다.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과 본질을 드러낸다.
위기와 불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생태 환경의 파괴는 지구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후기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경제적 양극화 현상과, 이념의 갈등이 초래하는 사회의 양극화의 현상은 미래의 전망을 우울하게 한다. 종교 역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동력으로 작동되기보다는 때때로 근본주의적 형식으로 작동되어 세상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기도 한다. 세상이 점점 음울한 풍경으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와 신학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시노드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제1회기가 로마에서 개최되었다. 회기가 끝난 후, 20개 안건들에 대해 ‘수렴된 것들’(Convergences), ‘숙고가 필요한 문제들’(Matters for Consideration), ‘제안들’(Proposals)이라는 형식으로 세부 항목들을 분류한 「종합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번 시노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참여 구성원과 진행 방식의 변화였다. 투표권을 가진 평신도 여성과 청년의 참여와 소규모의 원탁 형식으로 이루어진 대화 과정은 이번 시노드의 주제인 시노달리타스를 그 시작부터 실천하려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종합 보고서」 내용에서도 표현되었듯이, 주교들의 시노드(the Synod of the Bishops)와 교회 회의들(Ecclesial Assemblies)은 구별이 필요하다. 또한 교회의 문제들에 대해 모든 구성원들이 대화의 여정과 결정에 도달하는 과정(Decision-making)에 참여하는 것과 주교들의 직무적 책임인 결정을 내리는 것(Decision-taking)은 구별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시노드가 보여준 회의 구성 방식과 대화 과정은 시노드적 교회(the Synodal Church)를 향한 첫걸음으로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시노드가 보여준 또 다른 큰 특징의 하나는 교회 안에 다양한 의견이 있고 의견의 불일치도 존재한다는 것을 정직하게 보여준 데에 있다. 사목적·신학적·교회법적 측면에서 더 깊은 이해와 숙고가 필요한 문제들을 정직하게 기술하고 있다. 수렴된 내용의 안건들에 대한 투표에서 가장 많은 찬성표를 받은 것은 경청하고 동반하는 교회를 향한 항목이었다. 346명의 투표 참여자 가운데서 찬성 345표 반대 1표였다. 다른 한편으로, 가장 많은 반대표를 받은 것은 여성 부제직에 관한 두 개의 항목이었다. 각각 69표, 67표의 반대표를 받았다. 여성 부제직에 대한 언급 자체가 아직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 역시 교회의 현실이다. 물론 시노드는 교리를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하지만 여성 부제직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노드에서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진전이다. 어느 여성 신학자가 언급했듯이, 필요한 것은 조급함이 아니라 끈기 있는 기다림과 노력이다.
「종합 보고서」는 성직주의에 대해 분명한 비판을 담고 있다. 성직주의는 사명과 직무 수행을 위한 권위와 힘을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이 아니라 세속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직무와 권위를 섬김을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특권으로 이해하는 데서 발생한다. 「종합 보고서」는 사제 양성의 쇄신을 요청한다. 사제 양성이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 유리된, 인위적이고 폐쇄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솔직히 고백하면, 사제들은 신학생 시절부터 타인과 또는 신자들과 함께하는 방식을 잘 교육받지 못하고 있다. 신학생과 성직자들의 양성 교육과 문화 역시 시노드적이라기보다는 위계적이다. 사실 교계적 질서를 존중하고 순명하는 것과 교회 안에 시노드적 삶과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은 서로 대립적이지 않다. 시노드적 교육과 삶과 문화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교계적 질서(Hierarchical Order)와 삼위일체적 친교(Trinitarian Communion)가 형성된다.
이 시대의 신학
11월 1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학에 관한 짧은 ‘자의 교서’를 반포했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시노드적이고 선교 지향적 교회에 관한 자신의 비전에 신학자들이 참여해주기를 바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각이 담긴 문헌이다. 시노드적, 선교적,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를 위한 신학 역시 관계적이고, 사목적이며,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은 시대의 변화와 도전에 직면해서 신앙을 새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신학은 이해와 해석의 작업이다. 계시는 불변이지만 계시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발전할 수 있다. 신학은 과거의 공식과 체계를 반복하거나, 세상과 다른 학문과 격리되어서 자기 참조적이며(Self-referential) 추상적이고 이념적으로 작동하는 책상머리의 학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신학은 근본적으로 맥락적(Contextual)이다. 신학적 성찰은 맥락들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출발한다. 신학은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신앙의 진리와 예수의 가르침을 오늘의 언어로 소통하고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신학은 다른 학문들, 비신앙인들, 타교파와 타종교의 사람들과도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시노드적으로 신학한다는 것은 복합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을 경청하고 대화하고 식별하고 통합하는 여정이다.
신학은 학문적 행위이지만 동시에 신앙의 지혜이기도 하다. 신학은 영성적, 사목적, 실천적인 특성을 갖는다. 신학은 교회의 복음화 사명과 신앙 전수를 위해 존재한다.
오늘의 한국교회와 한국신학은 시노드적 교회, 시노드적 신학이 되기 위해서 과연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73) 내가 세상을 읽는 방식
‘읽기’는 보이지 않는 소리 경청하고, 감춰진 진실 발견하는 일
읽기와 식별
늘 읽고 있다. 읽는 행위는 내 생의 가장 큰 의식(Ritual)이다. 사회를 읽고, 교회를 읽고, 사람을 읽고, 책과 글을 읽는다. 신문을 읽고, 잡지를 읽고,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읽는다. 언제부터인지 TV 뉴스를 보지 않는다. 문자와 텍스트 중심의 읽기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책상머리 신학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의 읽기는 책상과 컴퓨터 모니터를 잘 벗어나지 못한다.
읽기는 관심과 질문이다.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무엇이 오늘의 사회를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끌고 가는지. 이 시대의 교회는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살고 있는지. 시간 속의 인간 실존은 늙음과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응대하고 있는지. 읽기는 주목하는 일이다. 사유와 인식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가기도 하고, 감정과 정서를 담고 있는 것에 끌리기도 하고, 의지적 행위와 우연적 행위를 포함하는 사건들이 시선을 사로잡기도 한다.
읽기는 시대를 읽는 행위이다. 시대를 읽는다는 것은 뉴스를 읽는 일을 포함한다. 오늘날 뉴스의 홍수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탈진실의 시대에 대부분의 미디어는 공동선을 지향하지 않는다. 모든 소식이 상업적 맥락 속에서, 당파적 시선 속에서 처리되고 소비된다. 심각하고 중대한 사건들마저도 호기심과 상품성의 차원에서 취급된다. 이 시대의 뉴스 읽기는 식별을 요청한다. 온갖 정보의 홍수 속에서 세상에 대한 올바른 관심, 섬세한 식별, 정직한 성찰을 포함하는 읽기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뉴스를 읽는 일은 세상을 향한 관심과 사랑이다. 몇 년 전부터 포털 뉴스를 읽지 않는다. 좋은 언론 사이트를 직접 찾아가서 읽는다. 뉴스에 대한 식별과 선택을 스스로 하겠다는 최소한의 의지 표현이다. 상업적으로 또는 이념적으로 오염되고 왜곡된 뉴스들이 너무 많다. 소심한 일상인인 나는, 식별과 선택을 통한 올바른 뉴스 읽기가 세상을 향한 정직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있다. “뉴스를 읽는 것이 그 자체로 선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 및 비그리스도인 이웃들과 함께하는 여정에서 보탬이 되는 도구적 선이 될 수 있다.”(제프리 빌브로 「리딩 더 타임스」, Ivp, 2023)
시 읽기를 통한 세상과 사람 읽기
문자주의자인 나는 글을 통해 세상을 읽는 것을 선호한다. 좋은 글을 통해 세상과 사람에 대해 배우는 즐거움이 크다. 주간 잡지를 통해 읽고 있는, 정치학자 박이대승과 소설가 장정일의 글은 이 시대의 사회적 흐름과 문화적 풍경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페이스북에서 팔로우하고 있는, 한신대 박선화 교수와 미국 교포 정재욱 선생의 글은 일상의 혜안적 성찰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을 준다. 나는 도처의 좋은 글들에서 생을 배운다.
시 읽기를 통해 사람의 내면과 정서를 읽는다. 한 개인적 실존이 자기 생의 여정에서 어떤 인식과 신념을 지니고 살아가는지. 어떤 시선으로 세상과 자연, 사람과 사물, 사건들을 바라보는지. 어떤 감정과 태도로 운명과 우연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응대하는지. 적어도 나에게는 시만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이성복, 김명인, 허수경, 최승자 등 숱한 시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과 삶을 읽어왔다. 시를 읽으며 내 생의 시간들을 건너왔다. 시가 없었다면 내 생은 얼마나 밋밋하고 헛헛했을까. 신앙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시를 읽으며 생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내 생의 가장 큰 은총과 축복이다.
다른 세대의 삶을 알고 싶어서 젊은 시인들의 시집을 의도적으로 자주 읽는다. 낯선 감성에 익숙해지기 위해 젊은 여성 시인들의 시집을 일부러 더 읽기도 한다. 하지만 늘 벽에 부딪힌다. 시의 감정과 정서는 논리가 어긋나고 막히는 곳에서 시작한다. 생의 신비는 논리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만, 시의 미학적 측면보다는 시가 보여주는 생의 이면과 삶의 역설에 관심이 많다 보니 아무래도 나와 비슷한 세대 시인들의 시가 이해하기 더 쉽다. 확실히, “나이가 들면 쓸 수 없는 시가 있는 반면 나이가 들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시도 있다.”(황유원) 시간의 흐름이 초래하는 삶의 아픔과 슬픔은 삶의 시간을 경험한 시인들만 쓸 수 있는 것인지.
시 구절들로 생각을 구성한다
김소연 시인의 「촉진하는 밤」(문학과지성사)을 읽었다. 김소연 시인은 흐르는 시간이 주는 슬픔과 아픔에 예민한 시인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슬플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시인은 알고 있는 것 같다. 때때로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촉진하는 밤’)을 믿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는 역설 또한 안다. 시간 속에서 사람의 얼굴도 변해간다. “겨우 버틸 수 있는 얼굴, 타인에게도/ 슬픔이 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린/ 얼굴, 기억하던 그 얼굴은 간데없고/ 기억해주길 바라는 어리광이 서린 얼굴.”(‘얼굴이라도 보고 와야겠어’) “얼굴이 지워졌을 뿐인데 생애가 사라지는”(‘분멸’) 느낌이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아무르’를 생각나게 한다. 늙음과 죽음 앞에서 사람과 사랑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생은 늘 어긋남의 연속이다. 삶의 여정에서 듣기와 말하기는 자주 빗나간다. “응, 듣고 있어/ 그녀가 그 사람에게 해준 마지막 말이라 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이 입술을 조금씩 움직여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그 사람은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그렇습니다’) 우리의 생은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사람을/ 밤새 기다리다가 홀연히 아침이 와버”(‘올가미’)리는 일이며, “자신의 목숨만큼만 자기 육체를 이끌고/ 자신의 방식으로 놀다가/ 가는”(‘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 일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사랑과 혁명
“한때 모든 노래는 사랑이었다/ 한때 모든 노래는 혁명이었다// 모든 노래는 사랑에서 발원하여 혁명으로 가는 급행열차였다.”(박정대 ‘안녕, 낭만적으로 인사하고 우리는 고전적으로 헤어진다’) 하지만 구호화된 사랑과 혁명은 끝났다. 사랑은 뒤집혔고, 혁명은 후유증에 가깝고, 우리는 나부끼는 깃발을 바라보지 않는다.(성기완 ‘블랙에서의 변주’ 참조)
이 짧은 생의 여정에서 우리가 끝끝내 해야 하는 일은 사랑과 혁명이다. 이 시대의 사랑은 읽기와 식별, 이해와 공감이다. 읽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소리를 경청하는 일이며 감춰진 진실을 발견하는 일이다. 엇갈림과 어긋남 속에서도 끝까지 그에게 가 닿는 일이다. 이 시대의 혁명은 신념과 자세와 생활 방식의 쇄신이다. 신앙을 통한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가 우리 시대의 혁명이다.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이 읽기와 변화의 삶을 살고 있는지.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74 · 끝) 교회와 신앙의 미래를 생각한다
교회 안에 정직한 생각 나누는 ‘대화의 문화’ 꽃피게 하자
전망하는 인간
거대한 시대의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생명 과학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삶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기후 변동이 초래하는 지구 생태의 변화가 우리를 어디로 밀고 갈 것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경제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 체계 속에서 의미와 가치와 공동체적 이상(理想)이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다. 우리의 미래가 디스토피아적 방향으로 움직이는 느낌이다. 이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방식, 세상을 작동하게 하는 운영체제에 대한 전반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브뤼노 라투르는 “다가오는 문명에 대한 적절한 준비의 결여”가 가장 큰 위협이라고 진단한다. 미래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새로운 존재양식과 운영체제를 설계하자고 라투르는 제안한다. 협상을 통해 구체적 실행의 방식을 모색하고 탐구하는 행위를 그는 “외교”라고 부른다.(「존재양식의 탐구」, 사월의 책, 2023)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지금 깨어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오실 그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삶, 대림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본성상 언제나 전망하는 인간이다. 흔히 종교는 과거, 즉 전통과 역사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종교는 아주 초기부터 회고적이면서 전망적이었다.”(마틴 셀리그먼 「전망하는 인간, 호모 프로스펙투스」, 웅진지식하우스, 2021) 그리스도교는 거룩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동시에 항상 종말론적 완성을 겨냥한다.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에 기능했던 방식대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을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다.”(브뤼노 라투르) 오늘의 세상은 전통과 역사에 대한 충실성보다 미래를 향한 비전과 전망이 더 절실히 요청된다. 어려운 길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론적으로 측정할 수 있지만, 미래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기에 측정할 수 없다. 과거는 현재와 인과 관계로 얽혀 있지만 미래는 그렇지 않다.”(마틴 셀리그먼) 하지만 파국을 막고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전망에 따라 우리의 생각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을 새롭게 조정하고 변화시켜야 한다.
교회와 신앙의 미래를 전망한다는 것은
오늘날 누구나 교회와 신앙의 위기를 말한다. 교회 안에서 청소년과 젊은 세대를 발견하기가 점점 어렵다. 그렇다고 노인 세대를 위한 새로운 방식을 찾고 실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신앙을 살아내는 방식, 사목이 실현되는 방식, 교회의 작동체계는 여전히 기존의 것을 답습하고 있다. 위기의 담론은 언론 속에서 소비되고만 있다. 변화와 쇄신을 향해 애써 노력하는 교회 구성원들도 있지만, 교회의 전반적 흐름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다.
음울한 전망이지만 희미한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페이스북에서 최승자 시인이 포항 어느 성당에서 세례를 받는 동영상을 봤다. 정희진 선생의 새 책 머리말에서 선생의 어머니와 딸의 세례명을 밝혔다. 신앙의 사소한 흔적들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신앙을 향한 갈망이 세상 구석구석에 존재한다는 증거 같았다. 사람들은 신앙을, 공동체(교회)를 여전히 원한다. 단지 오늘의 교회가 그 원의를 채우고 키워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새로운 신앙 방식, 새로운 교회 작동체계가 요청된다. 기존의 신앙생활 방식, 기존의 교회 운영체제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쇄신이 필요하다. 전통으로의 복귀를 통해 위기의 극복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의 해결책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와 미래는 언제나 연결된다. 하지만 거대한 패러다임이 전환하는 시대에 더욱 필요한 것은 과거에 대한 향수보다 미래를 향한 전망과 현재의 성찰이다.
미래를 전망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측과 추론을 통해 괜한 호들갑을 떨자는 것이 아니다. 불확실할 수도 있지만 미래의 비전과 전망을 통해 지금 여기의 모습을 성찰하고 미래를 향한 준비를 하자는 의미다. 불안과 혼돈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을 믿고 지금 여기서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자는 뜻이다.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
변화와 쇄신의 말들 역시 그저 담론으로 소비되기만 한다. 현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지만, 구체적 대안을 내어놓지 못하기 때문일까. 신앙을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 교회를 작동하는 체제의 쇄신은 과연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구조와 제도의 변화를 모색하는 정치적 혁명,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촉진하는 문화적 혁명, 무엇이 더 교회의 변화와 쇄신에 적합할까. 살아가는 방식과 운영체제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시노달리타스는 신앙을 살아내는 방식의 변화와 교회 운영체제의 변화, 둘 다 겨냥하고 있다.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프로그램을 제안한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일시에 해결하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이란 없다. 그리스도교의 혁명은 신념과 자세와 생활양식의 변화를 통한 일상의 혁명이다. 진정한 혁명은 인식의 전환, 새로운 상상력,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생각, 문화, 법과 제도는 상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일반적인 순서는 생각과 인식의 변화가 문화의 변화를 초래하고 법과 제도의 변화를 가져온다. 교회는 정치적 혁명보다 교육과 문화를 통한 변화와 쇄신을 지향하는 경향이 강하다. 문화란 넓은 의미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뜻한다. 신앙 역시 문화가 되어야 한다.(「촉진하는 신학」 8항) 신앙인은 이 혼탁한 세상에서 “용감한 문화적 혁명”(「찬미받으소서」 114항)을 이루어내야 한다.
근본적인 변화는 질문을 새롭게 하고 정직한 생각과 성찰을 나누는 대화에서 시작된다. 대화는 토론이 아니다. 논리적 우위를 점하려는 싸움이 아니다. 정직한 말의 나눔 속에서 자신의 변화를 모색하는 행위다. 대화는 타자의 변화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를 지향한다. 시노달리타스는 경청과 대화에서 시작된다. 정직한 말들을 나누는 대화의 문화를 교회 안에 꽃피게 하자. 신앙의 혁명은 투쟁이 아니라 정직한 대화를 통해 시동된다.
신앙의 문화를 새롭게 형성하자. 함께하는 몇 사람들끼리라도 고유한 신앙의 문화를 만들어가자. 주어진 언어, 기존의 행동 방식이 아닌 새로운 언어, 새로운 행동 방식을 찾아가자. 타성적인 질문에 응답하지 말고 우리가 스스로 질문을 재구성하자. 권력과 지위, 성취와 업적이 아니라 신앙과 영성의 넓이와 깊이에 초점을 두는 삶의 문화를 구성하자. 권력자들과 허상의 존재들보다 신앙적 영감을 주는, “옆집의 성인”들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자.
신앙의 혁명은 교육(공부)과 문화(살아가는 방식)를 통해 이루어진다. 교회의 신앙 교육과 신앙 문화에 대한 전반적 검토와 재구성이 절실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