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한 삶을 견디는 날들에 대하여
---이영선의 시세계
조동범
삶이 비루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제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하루하루 비루한 시간을 견디며 삶을 이어간다. 우리 삶의 비루함은 커다란 불행이나 슬픔과 함께 오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평범함 속에 펼쳐지기도 한다. 어쩌면 시인은 이러한 삶의 비루함을 견디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삶의 비루함을 통해 하나의 문학적 세계를 만들어내는 자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거창한 서사를 내세우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사소한 것들에 주목할 때 문학의 진짜 모습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특히 근대 도시에서의 삶은 이러한 비극성을 강화한다. 도시는 편리함만큼이나 불온한 곳이며 많은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인식을 동반하며 다가오는 공간이다. 이런 가운데 문학이 부정의 정신을 통해 비극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영선 시인의 작품 전반은 비루한 삶의 한가운데를 관통한 기록이자 고백록이다. 그것은 비극의 양상이기도 한데, 이영선 시인은 그중에서도 비루함에 특별히 주목하며 삶의 실체를 드러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고유의 개성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시가 비루함에 주목하는 것은 가식 없는 삶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비루함 속의 치욕을 견디는 시간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치욕을 견디며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 작품은 비극을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이영선 시의 비루함 역시 비극을 근간으로 우리의 폐부를 찌른다. 시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시의 언어는 삶의 비루함과 치욕이라는 진짜 모습을 보여주며 진정성 있는 삶을 우리 앞에 부려놓아야 하는 법이다.
이 도시의 밤은 붉은 십자가에 먼저 도착한다
그다음 기다렸다는 듯 러브모텔의 네온사인이 깜빡 깜빡 거린다
서쪽에는 왼팔이 잘린 십자가가 서 있다
그 뒷골목에 있는 화가의 작업실에 가본 적 있다
창과 창 사이에 낀 홍매화 꽃잎이 파르르 흔들리는데
무엇을 그렸는지 덕지덕지 덧칠해진 그림 위로
붉은 나비 한 마리 날고 있었다
천왕선녀 점집 붉은 불빛이 사직산로 아래까지 번져 간다
이혼 하고 싶다고 주저앉아 우는 여자, 사업 망하고 허구한 날 술만 마시는데 어디가야 귀인을 만나냐고 다그치는 남자,
그들의 눈을 마주하고 천왕선녀가 술술 주문을 외우면 신이 접신하여
호통치고 겁박하고 얼래고 달래고 한다는데 영험하다는 소문에 굿판도 자주 벌이고 날마다 방울 속 놋쇠 부딪히는 소리가 골목을 돌아다닌다는데
지금 막 내림굿을 끝냈는지 마당 한편에 떡이며 과일 그득하고
무의를 입은 여자가 검은 철제 대문을 비죽이 열고 나간다
대문 앞을 기웃대던 노인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골목길을 올라간다
-「가지 사이에서 자란 작은 새처럼 사람들이」 부분
비루한 삶은 음험하고 불온한 밤이 순식간에 공중을 장악하며 도래하는 것처럼 이 도시에 도착한다. 도시 속 “왼 팔이 잘린 십자가”는 더 이상 신성의 상징일 수 없다. 도시는 “러브모텔의 네온사인이 깜빡 깜빡” 거릴 뿐이고, 그곳에는 술 마시며 우는 사람들 뿐이다. 이영선 시인이 펼친 풍경화는 아무것도 아닌 듯 무심하게 다가오는 삶이 근간을 이룬다. 그것들은 보잘 것 없으며 남루하고 비루하다. 시인은 그런 것이 바로 진짜 삶이라는 듯 집요하게 파고들며 그것들을 탐문한다. 그러나 그 삶에 특별한 사건이나 사고는 없다. 다만 그곳에는 하루하루 견디며 버티는 사소함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이런 삶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존재하는 법이다. “귀인을 만나”고 싶은 이들은 “영험하다는 소문에 굿판”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 내림굿이 끝난 뒤의 세상이 바뀌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일상은 다시 반복될 뿐이다. “대문 앞을 기웃대던 노인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골목길을 올라”가는 무심한 풍경은 우리가 삶을 견디는 모습이기도 하다. 굿판의 음식을 싸가지고 갔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에서 일용할 양식의 애잔함이 느껴진다. 이영선 시인은 시의 외부에서 시적 세계를 집요하게 관찰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소함의 미학을 시의 한 극단까지 밀어붙이려고 한다.
10리터 물통이 온수기 위에 물구나무 서서 면벽하고 있다
-이 물 아침에 온 건가?
거꾸로 박힌 물의 시간을 의심하는 그가 온수 꼭지 밑에
사발면을 들이대고 빨간 코크를 누른다
급히 빠져나오려던 물이 물통 속에서 큰 멍울로 솟구치다가 한 사발 만큼의 물만 빠져 나간다
사발면이 스티로폼 그릇 속에서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다
라디오에서 정오의 음악이 나른하게 흘러나온다
쭈뼛거리며 탕비실 문을 연 물류 기사가
-새벽같이 달려도 기름 넣고 할부 내고 나면 굶어 죽겠네
운임이 적어도 너무 적어, 커피 한 잔 사 마실 돈이 없네
일회용 커피 믹서에 한 잔의 물이 또 빠져 나간다
바닥에 몇 방울 떨어진 커피가 말라가는 사이
몇 번의 문이 열리고 닫히며 몇 사람이 들락거리는 사이
투덜거리던 그가 어느새
입에 종이컵을 새처럼 물고
손을 까딱까딱 거리며 17톤 트럭에 앉아 있다
-「감단 근로직」 부분
역사는 흔히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개인사는 사소함의 영역만으로 치부되며 역사로부터 외면되기 일쑤다. 그러나 쓸모없는 것처럼 다가오는 사소함의 순간들이야말로 역사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감단 근로직」에서처럼 사발면을 먹거나 일회용 커피를 마시는 일상은 어떠한 사건도 되지 못한다. 그것은 사소함이나 무가치함으로 치부되기 쉬운 삶의 순간일 뿐이다. 그러나 온수 꼭지를 눌러 사발면을 익혀 먹거나 일회용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입에 물고 17톤 트럭에 앉는 일을 사소함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더구나 그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하며 아무것도 아닌, 쓸모없는 것으로 판단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그렇게 의미없이 흘러가는 것이야말로 삶의 진짜 모습이다. 시인은 이러한 삶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그리하여 무감한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우리에게 삶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오늘날 문학은 아무것도 아닌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문학적’인 지점을 확보하게 된다. 길가의 돌멩이에 대해 말하거나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문학의 본질이다. 이제 문학은 사건화하지 않음으로써 문학적인 ‘사건’을 만든다. 이것은 문학을 포함한 예술 전반의 특성이기도 하다. 이영선 시인은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장면이 무엇인지 알고 우리에게 그것을 전달한다. 바로 이곳으로부터 이영선 시의 미적 특성과 인식이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무심한 듯 전개되는 그의 시는 현대성이 첨예하게 재현된 장이라고 볼 수 있다.
불을 끄고 TV를 켠다
드라마 속 의사들이 나누는 대화가 누워있는 노인의 침대 위를 자막으로 지나간다
어른거리는 글자들 사이로 패혈증이란 글자가 지나간다
짙은 어둠이 창밖을 지나간다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그는 채널을 돌린다
화면 가득 축구장이 펼쳐진다
한 손에는 캔맥주를, 다른 손에는 마른오징어 다리를 들고 그는
웅크렸던 다리를 길게 뻗어 공 차는 시늉을 한다, 금방이라도 화면 속으로 뛰어들 것처럼
그가 응원하는 파란 티셔츠는 아직 한 골도 못 넣었다
화면 속 공이 바닥을 뒹굴 때 또 그는 머리를 들이밀고 해딩을 하다가 빨간 티셔츠 선수를 툭 치며 밀어낸다
창밖에서 유난히 시끄러운 어둠이 들썩거린다
나는 창밖의 어둠 속을 휙휙 날아다니는 축구공들을 본다
빨갛게 불켜진 십자가들 사이를 축구공이 날아다닌다
어떤 공이 5층 연립 불 켜진 창으로 골인하는 것이 보인다
그가, 다 마신 맥주캔을 휴지통으로 던진다
골인이다
-「불을 끄고 TV를 켜다」 전문
이영선 시의 또 다른 개성은 시적 대상과 배경을 해석하지 않고 관찰하려는 객관적인 시선에 있다. 시 속 화자는 “불을 끄고 TV를 켠다”. 그리고 시적 대상은 시인의 시선을 따라 지나가고 펼쳐지고 들썩거리고 날아다닌다. 이영선 시의 정황은 이러한 상태를 그저 제시할 뿐이다. 바로 여기에 이영선 시의 주요한 특징인 시적 거리가 나타난다. 시는 거리를 통해서 감정을 절제하며 미적 인식을 발생시킨다. 이때 시적 대상과 시인 사이의 거리는 단순히 감정을 절제하는 기능만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시적 거리는 한 편의 작품이 지닐 수 있는 시적 완성도와 깊은 연관을 맺는 법이다. 이영선 시인은 시 언어가 갖는 객관적 거리의 효용과 가치를 잘 알고 그것을 형상화한다. 그럼으로써 그의 작품은 정교하게 구축된 미적 특질을 부여받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삶의 순간은 해석이 아니라 응시의 방법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럴 때 시의 감각은 한결 높은 층위의 미학적 완성도를 갖기 마련이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삶에 대한 사유를 펼쳐놓는 방식은 상투적인 주장으로 남을 뿐이다. 삶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어야 한다. 시인이 시적 사유를 직설적으로 말하며 개입하는 순간 시적 거리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영선 시인은 시적 대상의 상태를 통해 의미의 영역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영선 시인에게 시적 대상의 외적 상태는 기표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그 너머를 수용하고 내장함으로써 기의를 시에 끌어들인다. 일견 건조해보이는 묘사 유형의 문장이지만 절제된 표현은 기계적인 문장으로 전락하지 않고 감각적 세계를 확보한다. 이영선 시인은 묘사와 사유, 상태와 거리가 어떤 경계에 놓일 때 미적 가치와 사유를 제시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운구차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다
몇 대의 검은 승용차가 뒤따라 선다
승용차 사이로 이륜차가 위태롭게 끼어든다
횡단보도 건너편으로 시퍼런 배추 한 트럭이 치렁치렁 실려가고
떨어진 배춧잎을 *신선한 아침 우유가 밟고 가고
노란 스포츠카 한 대가 납작 질주한다
구급차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끼어든다
길을 건너는 남자의 등산화 한쪽 끈이 풀어져 있다
운구차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그가 모자를 꾹 눌러쓴다
-「길」 부분
객관적인 거리를 통해 나타나는 이영선 시의 미학은 「길」에서도 잘 나타난다. 「길」을 비롯한 이영선 시인의 작품은 흡사 오규원 시의 ‘날이미지시’를 떠올리게도 한다. 대상이 지니고 있는 모습을 가장 객관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시적 의지가 돋보인다. 더구나 오규원의 ‘날이미지시’가 시적 감흥의 문제에 직면한 것과 달리 이영선 시인의 시는 감각을 통해 감흥의 문제를 해소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감각적인 언어와 정황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시적 감흥을 강렬하게 내장하고 있다. 「길」은 “운구차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고 “몇 대의 검은 승용차”는 그 뒤를 따라 선다. 그리고 “승용차 사이로 이륜차가 위태롭게” 끼어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에 전개되는 장면 역시 시적 정황의 상태와 이미지에 집중한다. 시적 수사를 통해 대상을 꾸미기보다 객관적인 모습만 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정황은 감각화된 느낌을 자아낸다. 바로 여기에 이영선 시의 매혹이 시작된다. 그의 시는 대부분 시인의 눈에 기대어 언어화되지만 언제나 시지각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특별한 개성과 깊이를 확보한다.
모과에 핀 얼룩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니
점액질이 끈끈하게 배어 나온다
얼굴에 핀 검버섯처럼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반짝거린다
모과의 귀에 면봉을 깊숙이 넣으니
갈색의 가루가 묻어 나온다
너는 그것이 벌레의 똥이라고 우기고
나는 달빛을 밟던 고양이들의 발소리라 하고
천둥소리에 놀라 날아들던 새의 날갯짓 소리라 하고
새벽바람에 잔가지 서로 부딪던 소리라 하고
첫서리 내려앉던 아침 새끼 고라니 울음소리라 하고
면봉으로 조심스레 그것들을 끌어내니
온갖 소리들 잠잠하다
구멍이 깊다
구멍 속에서 노란 벌레 한 마리가
향내 가득한 사막을 건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 전문
여기 모과가 있다. 모과라는 대상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모과를 바라보는 존재가 무엇이냐에 따라 모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럼으로써 하나의 존재는 서로 다른 것으로 치환되며 완전한 타자로 분리되기에 이른다. 「모과의 귀지를 파내다」는 시적 대상의 본질에 집중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가 드러난 시이다. 바라보는 자의 시선에 따라 변하는 대상을 제시함으로써 주관적 판단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시인의 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스스로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벌레의 똥”인지 “고양이들의 발소리”인지, 아니면 “새의 날개짓 소리”나 “잔가지 서로 부딪던 소리”, “새끼 고라니 울음소리”인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은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모과의 실체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고자 한다. 이영선 시인의 시집은 그야말로 잘 짜인 시의 집이다. 일관된 시론 속에 시를 축조하는 빼어난 건축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