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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1편 5절-6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5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의 어머니가 바람을 피워서 다윗을 생기게 했다는 말이냐? 그런 뜻은 아니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잉태가 되듯이 죄를 지은 다윗이 어디서 생겼느냐? 그것은 다윗을 자궁처럼 감싸고 있는 다윗 자기의 환경에서 소산이 됐다는 말이다. 환경에 소산이 된 다윗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다윗은 왕으로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세와 환경과 조건에 살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진리 신앙노선인 좁은 길로 가다가 사망적인 넓은 길로 가게 되니까 그 환경에서 죄 된 생각이 점점 커지다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죄를 지었다는 말이다. 영적 계시로 보면 다윗이 이런 실토를 하는 거다.
사람들은 자기의 환경의 조건이 좋으면 예수를 잘 믿을 것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사가 얼마든지 증명을 한다. 자기의 환경이 좋은데도 죄를 지을 수 있는 거다. 환경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하는 사람이 죄를 짓는다면 자기가 죄 지은 것을 환경에 핑계를 대겠느냐, 자신에게 핑계를 대겠느냐? 환경에 핑계를 댄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환경이 좋은데도 죄를 짓는다면 죄를 지은 이유가 누구에게 있는 거냐? 자신에게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이 환경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짓게 된다는 결론이 되는 거다.
다윗은 왕으로서 환경이 그렇게 좋은데 왜 죄를 지었느냐? 왜 지붕 위로 올라가서 사방을 구경하다가 죄를 지었느냐?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여자에게 있느냐, 자기에게 있느냐? 자기에게 있다. 그런데 보통 생각하기를 자기가 잘못한 것을 남에게 핑계를 댄다. ‘쟤가 그래서 내가 그랬다’ 이렇게 나온다.
환경적으로만 보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서 이룰구원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 얼마나 좋으냐?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 같으면 자기를 에덴동산에 갖다 놓으면 의식주에 무슨 걱정이 있나? 그러니 죄를 짓지 않을 게 아니냐? 그런데 그렇게 환경이 좋았던 솔로몬 왕도 빠져 들었다. 계: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도 빠져 들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얼마나 부자냐? 웬만한 부자는 자기가 부자라고 안 한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고 했다.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해 볼 때 자기가 부자라고 생각이 됐기 때문에 ‘나는 부자라’고 한 거다. 그런데 이들은 주님 앞에 넘어져 있다.
그리고 계:에 물을 타고 앉은 여자가 나오는데 이것도 범죄요, 짐승을 타고 앉은 여자도 나오는데 이것도 범죄요, 산을 타고 앉은 여자도 나오는데 이것도 범죄다. 이게 말세교회의 현상을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교회가 다 죄에 빠져 들어간 거다. 그러면 우리교회는 빠진 거냐, 안 빠진 거냐? 올라가는 중이냐, 내려가는 중이냐?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목사님이다. 목사님이 슬슬 빠지면 목사 자신이 빠지는 줄을 모르고 교인들도 끌어들이게 되는 거다.
다윗을 보면 자기의 지위가 올라가고, 물질적 환경이 평안하고, 세상이 자기를 올려주니까 죄를 짓기가 얼마나 쉬운지? 세상도 그렇고, 속화된 교회의 인도자들은 다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돈인가, 지위인가, 환경인가? 문제는 자기 속의 생각이 문제이고, 마음이 문제이고, 정신 사상이 문제다.
6절: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진실을 원하신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어떤 진실을 원하시는지 우리가 알아야 한다. 원래는 진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진실 하나밖에 없는 거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된 후에 또 하나의 진실이 생겨났다. 이 진실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진실이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라고 했으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이 진실은 죽은 진실이다. 죽은 진실이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진실이라는 말이다.
아담 하와의 타락 이후로부터 세상에는 진실이 둘이다. 하나는 생명과 먹고 나온 진실이요, 하나는 선악과 먹고 나온 진실이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착하다. 진실하다’ 라고 하는 것은 사망적인 진실이다. 하나님께서 인정을 안 해 주시는 진실이다. 교인들이 ‘궁극교회 교인들이 진실하다. 아무개 집사는 참 진실하다’ 라고 하는 것은 생명과 먹은 진실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진실이 있으니 교인들은 목사님이 말씀을 하실 때 어느 걸 따먹고 나온 진실로 말을 하는 것인지 얼른 알아차려야 한다. 세상 속화된 인도자들은 선악과 따먹은 진실로 말을 한다. 우리가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생명과 따먹고 나온 진실로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이것이 사람 앞에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말이냐? 그건 아니다.
세상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옳다고 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한다. 이 주장성은 하나님에게 속한 게 아니라 전부가 임시적인 것, 불타지고 썩어질 것에 속하는 거다. 이게 세상의 진실이다. 이 진실은 하나님의 것과 하늘나라, 그리고 생명과를 먹고 나오는 진실을 마다하고 세상 것을 주장하는 진실이다. 주님께서 원하는 진실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영생의 말씀을 먹고 나온 중심에서 나온 진실이다.
그러면 마음으로는 주님의 진실을 가지고 있지만 여건상 행동적으로 진실한 행동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이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 아니냐? 그건 아니다. 이 사람 자체가 진실의 사람인 거다. 진실의 사람이라면 세상바람을 타지 않는다. 이게 진실한 사람이다. 이 진실한 사람은 정신과 사고방식이 세상사람들처럼 세상의 유행바람을 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럴 정도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 이러면 사람이 고상해진다.
진리진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거고, 진리진실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진리진실이다.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신다. 이것을 진리진실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진리진실은 그 효력이 영원히 간다. 하늘나라에까지 들어간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주는 진리진실이다. 이 진리진실은 선악과를 따먹은 이방 세상사람에게는 없다. 진리진실은 선악과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영은 죽어있고, 따라서 자기가 아무리 양심대로 진실하게 한다고 해도 그 정신은 타락된 지식으로 되어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걸 모르면 안 믿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예수 믿는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다. 주님과 대적노릇을 하게 된다.
영이 죽어있는 안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자기 양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싫다고 대립을 일으키고 미워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내가 보기에 안 믿는 사람이 아무리 선해 보이고 좋아 보여도 안 믿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내가 그들과 같이 일을 하게 되면 나중에는 내가 피를 보게 된다. 그들에게 이용당할 대로 다 당하고 그제서야 ‘아차, 내가 미친 놈이었구나’ 라고 할지라도 이미 손해 볼 것은 다 본 후가 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믿는 사람들끼리 무슨 일을 할 때 안 믿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끼면 안 된다는 거다. 예를 들면 교인들끼리 어디에 갈 때 안 믿는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대절해서 가게 되면 오가면서 차 안에서 교인들끼리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 아무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다. 그러면 믿지 않는 운전사가 이것을 보고 듣고 나서 ‘어느 교인은 어떻고’ 하는 말을 할 것이고, 이러면 그 말이 자꾸 퍼져나가게 되기 때문에 교회적으로도 덕이 안 되고, 믿는 사람에게도 덕이 안 되고, 예수이름을 깎아내리게 된다. 그래서 좀 고생스러워도, 돈이 조금 더 들더라도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끼리 해야 한다. 믿는 사람이 하는 일에 안 믿는 사람을 끼워 넣지 말아라.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할 때도 안 믿는 사람을 끼워 넣지 말아라. 예를 들면 교회에서 청년들이 축구를 할 때 전도한다는 명목으로 동네청년들을 불러서 같이 시합을 하게 되면 열심히 뛰다보면 교인의 입에서 안 좋은 말이 나올 수도 있고, 안 믿는 청년들과 싸움이 벌어지거나 교인들끼리 싸우게 될 수도 있다. 설령 그런 일이 없다고 해도 안 믿는 청년들이 교인들과 같이 공을 찼다고 해서 ‘아이고, 오늘 참 은혜로웠습니다. 나도 예수를 믿겠습니다’ 라고 하느냐? 아니다.
그들은 놀 곳도 마땅치 않고 갈 곳도 없는 차에 교인들이 같이 공을 차자고 하니까 ‘마침 잘 됐다. 공짜인데 가서 놀고 오자’ 라고 하며 교인들이 점심 싸온 거 같이 먹고, 간식도 같이 먹고 나서 공을 차다가 싸우고 헤어지고 한다. 이러면 하나도 덕이 안 된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걸려 있다. 혹 안 믿는 사람들과 무슨 일을 하게 될지라도 어쨌든 믿는 사람이 주체가 돼야 한다.
안 믿는 사람들은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가지고 ‘좋다, 나쁘다. 선이다, 악이다’ 하고 판단을 한다. 그리고 판단하는 지식도 사람들마다 양심에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좋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같은 것을 나쁘다고 한다. 더 나아가 기독교인과 이방 종교인은 양심으로 판단되어 나오는 지식이 서로 다르다. 정 반대로 다르다. 믿는 사람은 영원 궁극적인 것을 염두에 두고 현재에서 판단을 내리고, 안 믿는 사람들은 상황적으로 돈이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하는 면에 판단을 내린다. 사람이 망가지든지 말든지 돈만 많이 버는 쪽으로 판단을 내린다.
세상사람들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일을 시키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망가지던 말던 돈 때문에 일을 시킨다. 기독교의 정신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일을 시키는 거다. 우리 믿는 사람은 예수 잘 믿게 하느라고 일을 시키고, 어찌하든지 하나님 앞에 바로 살게 하려고 일을 시킨다.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남의 회사에서 일을 할 때 사람과의 관계성을 바로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월급을 타면 ‘오늘 내가 한 턱 내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도 있어야 사람이 사는 맛이 나는 거다. 이런 게 없으면 자기가 쭈그러지고, 자기가 사랑 못 받고, 자기의 일터가 없어진다. 사람을 사귀면 일터가 있지만 사람을 멀리해 놓으면 일터가 없다. 내가 타로부터 일반적인 혜택을 받았다면 그에 대한 감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지식이 있다. 하나는 영생하는 하늘의 지식이요, 하나는 영원히 멸망되는 땅의 지식이다. 그래서 진실의 근원도 다르다. 선악과 따먹은 진실의 터는 땅에 속한 것이고, 생명과를 따먹은 진실의 터는 하늘에 속한 거다. 하늘에 속한 것은 하늘이 높듯이 그 지식의 차원이 높다. 이 높은 지식의 차원을 가지면 땅에서 진실이라고 하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거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진리로 된 진실은 가지고 있다면 법정에서 재판하고 판단하는 그 판단의 지식을 판단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만큼 수준이 높은 거다.
주님의 진리진실과, 세상 재판관의 진리진실이 같으냐? 다르다. 세상 재판관들의 진실은 주님 앞에 심판받을 진실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속의 지식을 하나님의 것으로 갈아 넣어야 한다. 예수 믿는 게 그냥 믿는 게 아니다. 세상사람들의 양심보다 더 정확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만이 진실이다. 죽은 지식에서 나온 것은 본질적으로 진실 된 것은 하나도 없다. 선악과 따먹고 나온 죽은 진실은 하나님 앞에 진실이 하나도 없다. 세상의 진실은 아무리 깨끗하다고 해도 죄 아래서의 깨끗이지 영생으로 깨끗은 아니다.
이방인들은 죽은 사람에게 제사를 지낸다. 예수 믿는 사람은 추도식을 하는데, 이 추도식이 귀신에게 제사하는 거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거냐? 추도식을 하는 사람 중에 귀신에게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다. 그러면 죽은 사람을 앞에 놓고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거냐? 만일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거라고 한다면 제사는 죽은 사람에게 하는 건데 죽은 사람을 앞에 놓고 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느냐? 하나님이 죽었느냐? 그러니까 추도식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우상숭배가 되는 거다.
제삿날 예수이름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 자리에 귀신과 예수님이 같이 참석을 하겠느냐? 예수이름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예수님도 그 자리에 참석을 해서 그 예배를 받으셔야 할 게 아니냐? 참석을 하지 않는다면 그런 예배는 드릴 이유가 없는 게 아니냐? 추도식을 하면서 예수이름을 부르면 예수님이 그 예배를 받고,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기도를 하면 그 기도를 귀신이 받고 그런 거냐? 그러다 보면 추도식 날 예수님과 마귀가 서로 좋은 것을 받아먹으려고 싸울 게 아니겠느냐?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다. 이렇게 되면 두 지식이 대립을 일으키게 된다. 왜 대립을 일으키느냐? 옳다고 인정을 하는 지식이 서로 다르니까 그렇다. 지식이 서로 다르면 대립이 일어난다. 하나님과 우상은 다르다. 기준이 다르다. 터가 다르다. 질이 다르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우고 예배를 하더니 이스라엘이 앗수르 나라에게 완전히 멸망을 당했다. 남자들은 다 죽고 여자들만 남으니 이방남자들이 들어와서 그곳의 자식들이 혼혈족이 돼버렸다. 이것은 이스라엘 속에 이미 비진리적인 정신 사상이 들어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다. 하나님의 진리진실을 모르면 인간 자기가 스스로 옳다고 주장을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에 멸망을 당하는 거다.
우리가 진리진실을 바로 알면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가 진실이라고 주장할 때 그 진실들이 어디에 속한 진실인지 금방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거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려면 하나님의 진리를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 진리가 자기 자체화 된 것이 진실이다. 진리진실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먼저 자기의 지식이 진리지식으로 바꿔져야 한다. 그래야만이 진리진실의 사람이 된다. 자기의 지식이 세상 일반지식의 기준에서 진리지식의 기준으로 바꿔지는 것이 진실 된 사람이 되는 거다. 안 바꿔진 상태에서 아무리 충성봉사를 해도 결국에는 ‘나는 너를 모르겠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너를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진리진실의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예수님 당시에 진리이신 예수님을 안 따르며 예수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자들이 있었다. 지금도 보면 신유은사를 받았다고 하며 병든 사람을 고치겠다고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무슨 불을 받았다고 하며 펄펄 뛰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서 아무리 방방 떴어도 자기가 진리진실로 자체화가 안 됐다면 전부가 거짓이다. 하나님 앞에 거짓이다. 거짓에 속하는 것은 신령세계에 못 들어가지만 진리진실에 속한 것은 전부 신령세계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진리진실로 만들어 졌느냐?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진리진실의 사람으로 바꿔지면 이 사람은 지혜가 생긴다. 지혜의 일반적인 뜻은 사리를 밝히고 일을 잘 처리해 나가는 능력이다. 세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없으면 이 지혜가 나오지 않는다. 영적인 신앙 면에서도 그냥 지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이치를 많이 깨달아야 지혜가 생기는 거다.
예수 믿는 나는 이 세상에 살다가 짐승처럼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도덕성을 가진 인격자요 자유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심판이 있고, 신령세계에 들어가는 존재다. 인간이 죽음으로 끝나서 무로 돌아간다거나 금수로 변해질 것 같으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지 않았을 거다. 우리 인간은 어떻게 보아도 하나님으로부터 금수와는 다른 영과 육으로 결합된 인격성과 자유성과 심판성을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니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진실이다. 이 말씀을 따라 살면서 진리진실의 사람이 되면 영원 궁극적 결과적 최종적 목적적으로 영원히 후회가 없는 지혜로운 영생의 사람이 된다. 사람을 교육할 때는 이렇게 살아나게 해야 하고 살려야 한다. 죽이면 안 된다. 죽을 것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고 살리는 쪽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 교회의 교육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걸 아느냐 하면 모르고 있다. ‘예수 믿고 충성봉사 하다가 죽으면 천국에 가고’ 이런 식이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주님이 책임을 지고 있으니 이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고, 현실에서 그냥 놔두면 어차피 죽을 것을 가만 내버려두지 말고 살려야 한다. 죽을 것을 방편을 써서 살려야 한다. 어차피 죽을 것이 사는 쪽으로 이용을 당하면 사는 게 나온다. 이게 예수 믿는 거다. 이게 충성봉사다.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충성봉사의 의미와는 다른 거다.
우리의 육신은 시간이 가면서 점차적으로 죽어가지만 삶 전체가 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들면 학생이 공부할 때 나이가 들어가지, 젊음과 시간과 물질이 들어가지만 마음을 기울이고 정신을 기울여서 열심히 공부를 하니 투자한 모든 것이 자기의 공부실력으로 살아난다. 그걸 살리려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듯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의 속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살아나야 한다. 교인들을 가르칠 때도 이렇게 되게 해야 한다. 이게 아니면 교회에 가서 예배 한 시간 드리고, 헌금이나 내고, 예수이름만 부르다가 그대로 죽는 거다. 이러면 예수 믿는 게 무슨 가치가 있느냐? 교회에서는 사람을 죄에서 건져내고, 사망권에서 풀어내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으로 만들어지게 해야 한다. 이게 사람을 진리로 자유케 하는 거다.
나는 이런 교훈을 하느라고 하는 거다. 그래서 내가 야단을 하건, 일을 시키건, 충성봉사를 하라고 하던 내 중심은 살리는 쪽으로 들어가 있다. 자기를 영원히 영광스럽게 만들어지게 하려는 것인데 이걸 모르고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복 달라고 안 해도 먹고 마시는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올 사람이 되는 것. 이렇게 되면 세상 사는 게 쉽다 그 말이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진리진실로, 지혜로운 자로 살아가야지 몰라서 죄를 짓고, 몰라서 딱하게 죽는 자로 살아서는 안 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