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회 몰락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던 초교파주의
18세기에 점차로 형성되기 시작한 미국 기독교의 초교파주의는 19세기에 제 2 차 대각성운동의 여파로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때부터 더욱 견고하게 형성된 미국 기독교 정신은 더 이상 교회 안에서 각 교파의 교리를 가르칠 수 없는 형태의 초교파주의 교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장로교파가 장로교 교리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주장하면 분파주의자로 내몰리는 형세가 되었다. 이렇게 각 교파의 교리를 배제하고 종교적 체험을 강조하는 부흥주의로 나아갔을때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으로 이어지는 미국 기독교는 신비주의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20세기 미국 기독교는 정통 교리와 교회사와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이 매몰되어 교회 안에서 언급되지 못하고 종교적 신비한 체험을 통하여서 신의 경지에 이르는 미신적 종교로 전락하였다.
조선의 기독교는 심각하게 이반되어가는 미국 기독교의 개혁주의 전통이 남아 있던 시대에 내한한 선교사들에 의하여서 신앙의 노선이 결정되었다. 그래서 초기 선교사들에 의하여서 성경의 무오성이 가르쳐 졌고 그 이후에 모든 개신교 전체의 신조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자유주의 신학이 왜정 시대부터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해방 이후에 장로교 계통 신학교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변질되는 것은 다만 시간의 문제였다.
결국 1960년데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과 (합동)의 분열은 장로교 계통 교세의 반 정도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변질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W.C.C. 문제로 갈라진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과 (합동)의 분열은 통합측이 W.C.C.를 지지하면서 몰락하였다. 이렇게 교회가 신학의 부재로 찢어지고 갈라져도 한국 기독교는 초교파주의로 인하여서 교리를 말하지 못하게하는 풍토가 대세였다. 이렇게 장로교 교리를 배우거나 가르치는 것에 무지하게 되면서 한국 장로교회는 더욱 쉽게 세속화되었다.
초교파주의는 미국 기독교로부터 발생한 분파주의의 보편화 정신이다. 더 이상 교리를 말하지 말고 종교적 체험과 행사 위주의 교회로 가도록 한국 교회 전체에 내몰렸다. 그래서 기독교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조차 모르게 되어 버렸다. 그것이 초교파주의를 지향하였던 한국 기독교의 실체이다.
무엇보다 장로교 교리를 학습하지 못한 장로교 신자들은 여러 가지로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앙에 머물렀다. 결국 일제 강점기 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대소요리 문답과 교회 정치 예배 지침서가 가르쳐지는 교회를 찾아보기 어렵다. 장로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그 정체성이 되는 장로교 교리를 가르칠 수 없는 초교파적 한국 기독교 풍토는 신자들이 교리에 대하여서 전적으로 무지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버렸다. 신자들 사이에서 교리를 말하면 분파주의자로 오해받는다. 그렇게 한국 기독교 안에 초교파주의는 깊게 한국 교회 안에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이제 장로교회만이라도 장로교 교리가 무엇인가를 살펴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교리 없는 삶을 강조하는 계몽주의 종교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와 아이삭 뉴튼 그리고 임마누엘 칸트로 이어지는 세속주의자들의 기독교 미신화는 효과를 보았다. 점차로 기독교 본질을 훼손 시켰다. 기독교의 본질은 정통 교리에 달려 있다. 정통 교리가 없는 교회는 거짓 교회이다. 그렇게 초교파주의는 한국 장로교를 근원적으로 몰락시키는 원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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