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훌쩍 지나간 시간의 의미
칼 융이 말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의도를 갖지 않은 사람에게만 열려 있다"고.
남산 도서관에서 [칼 융 레드 북]을 읽다가 멈췄다. '의도를 갖지 않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 베스트셀러가 되겠다는 의도를 갖지 말라는 말이다. 장사를 하는데 돈을 벌겠다는 의도를 갖지 말라는 말이다. 세상을 사는데 행복하겠다는 의도를 갖지 말라는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오늘 이 책을 100쪽까지 읽을 작정이었는데 34쪽에서 멈추고 책을 덮는다. 그리고 산책하러 나간다. 사색이 이어진다.
'의도를 숨기라는 건가? 아니면 아예 없애라는 건가? 돈을 벌고 있는데 돈을 벌겠다는 의도를 어떻게 없애지?'
남산 도서관에 붙어 있는 작은 공원을 돌고 돌고 또 돈다.
'어떻게 하면 의도를 갖지 않을까? 테레사 수녀, 법정 스님 정도가 되어야 가능한 일 아닌가? 나처럼 세상에 물든 사람이 어떻게 의도를 갖지 않을 수 있을까?'
갑자기 후두둑 하고 날아든 새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남산 도서관 간판에 불이 켜졌다. 3시에 나온 것 같은데 벌써 저녁 6시다.
'몇 시간째 여길 돌고 있었던 거지? 시간이 이렇게 지나간 줄 몰랐네 . 앗! 이거다. 이거야.'
몰입이다. 의도를 잊는다는 건, 의도를 숨긴다는 건 바로 몰입하는 거였다.
처음 공원을 걷기 시작할 때 내게는 무언가를 깨닫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계속 걸었다. 그러다 생각에 빠져들었고, 그 사유에 잠기는 순간 깨닫겠다는 의도는 사라지고 오직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의도를 갖지 않는 것'이란 문장에만 집중하게 됐다. 그 뜻을 깨달아서 책에 쓰겠다는 의도는 없어지고 오직 문장과 내가 하나가 되어 걷고 또 걸은 것이다.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된 순간! 이 순간이 바로 몰입이다.
'몰입(flow)' 이론의 창시자이자 세계적 석학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교수는 [몰입 Flow]에서 몰입을 이렇게 정의한다.
플로우란 행위에 깊게 몰입하여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 더 나아가서는 자신에 대한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될 때를 일컫는 심리적 상태이다... [몰입Flow] 5쪽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인간은 몰입해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다. 이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켤 때까지만 해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해외로 수천만 부가 팔려 나가길 바라는 의도를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고, 자료를 찾고 생각을 모아서, 글 자체에 집중하자 의도가 사라졌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생각에 잠겨서 걸었던 그 순간이, 결과를 떠나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별이 빛나는 밤>과 <자화상> 등 수십 년간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은 그림 작품을 남긴 빈센트 반 고흐는 이런 말을 남겼다.
"때때로 너무나도 강렬한 감정에 빠져 나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중략) 마치 말을 할 때나 편지를 쓸 때 거침없이 단어들이 줄줄 쏟아져나오듯이 붓놀림이 이루어지곤 한다."...
[서양미술사] 547쪽
즐긴다는 건 이런 순간이다. 그림을 그리는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했을 때 걸작이 탄생하는 것이다. 내가 장사할 때도 마찬가지다. 메밀국수를 팔러 출근할 때는 항상 돈을 벌겠다는 의도가 있다. 하지만 장사를 시작하고, 주문을 받고, 서빙하고, 메밀국수를 삶다보면 어느새 행위 자체에 몰입하게 되고 돈을 벌겠다는 의도를 잊는다. 무아지경 속에서 바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그러다 보면 돈은 저절로 벌려 있다.
'훌쩍 지나간 시간'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이런 순간을 경험했을지 모른다. 처음에는 책을 읽어 돈을 벌고, 지식을 얻고,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겠다는 의도를 품었지만,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경험(내 책이 그런 책이 되기를... 앗! 의도가 또 생겼네 이런!). 독자는 자신과 잘 맞는 책을 통해 임계점을 돌파하게 된다.
의도는 전략이고, 몰입은 전술이다. 돈을 벌겠다는 의도는 얼마든지 가져라. 대신 일에 들어가면 집중하고 몰입해서 즐겨라. 돈을 좆지않고 돈이 나를 따라오게 만드는 방법이 바로 이거다. 당신이 창업해서 일을 하든 직장에서 일을 하든 상관없다. 어디에서든 일하기 시작하고 10분 후에는 몰입하라.
당신의 일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나를 위해 일하지 말고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래, 나도 남을 위해 한번 일해보자. 지구를 위해 가치를 만들어보자" 하고 덤비면 된다.
더 좋은 방법은 주어진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찾아서 일을 해보는 거다. 이게 바로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전략가 세스 고딘이 말한 '지시받는 사람이 아닌 지시하는 사람의 삶'이다.
지시하는 사람이란 권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스스로 지시하는 사람이다. 남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 그때 인간은 몰입할 수 있다.이렇게 해봤는데도 몰입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곳을 떠나라. 몰입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라.
오늘 하루 미치도록 몰입해서 일했다면 나는 죽음이 당장 닥쳐와도 평화롭게 맞이한 자신이 있다. 지금은 2023년 12월 30일 새벽4시 10분이고 욕지도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칼 융 레드 북]에서 [몰입Flow]로 생각이 이어지며 완성된다. 이런 깨달음이 내게 자유를 준다. 돈으로부터 자유,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부터의자유.
새벽 2시에 일어나 글을 쓰기 시작했고, 다시 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내게 이보다 행복한 두 시간이 있을까? 억만금을 쓰며 여행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쇼핑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다.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책 표지를 다시 본다. 제목에 '몰입'이라고 크게 쓰고,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라고 적었다. 소비를 통해서는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날 수 없다. 소비는 끌려가는 것이고 지시 받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시간을 지배할 때 미치도록 행복해진다.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은 몰입이다.
이 글을 읽는 새 10분이 훌쩍 지나갔다면 당신은 미치도록 행복한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기억하라 이 순간을!
고전이 답했다
마땅히 살아야 할 삶에 대하여
고명환 지음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몰입=나 자신의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행복
마음에 와닫는 글이네요~^^
오랜만에 흰 여백을 찾고 글을 옮겨봅니다.
몰입의 즐거움...
몰입(flow)미치도록 향복한 나를 만난다.
헝상 좋은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지배할 때 미치도록 행복해진다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은 몰입이다"
오늘 시간가는줄 모르고 몰입해보려 합니다~
늘 감사한 아침을 여는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