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사람 최순성은 ‘물려받은 재산이 수만(數萬)에 달하는 부자’였다(아마 개성상인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재산을 쌓아두는 것보다 흩는 것이 나은 일인 줄 알게 되었다.” 구체적인 계기는 알 수 없지만, 축적이 아니라, 시여(施與)가 훨씬 가치 있는 줄 알게 되었다는 고백이다.
이후 최순성은 ‘시여하는 인간’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친구 고경항(高敬恒)이 죽자 어진 인물을 잊히게 할 수 없다며 돌을 사서 비석을 만들어 세워 주었고, 임두(林㞳)란 인물이 고결한 인품에도 가난으로 인해 자살하려는 것을 구제하였다. 전염병 환자가 있으면 감염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접 약을 쓰고 간호하여 살려내었다.
시여는 거의 강박적이었다. 지인에게 우환이나 상사(喪事)가 있다는 말을 “이 사람이 어찌하여 내게 알리지 않았을까? 내가 혹시라도 그 사람에게 비루한 사람 취급을 당한 것은 아닐까?” 하고 자문하며 돕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바보 같은 인간’이라고 비웃었다. 그는 자신의 호를 ‘치당(癡堂)’이라 지어 받아쳤다. 그래, 나는 바보다!
시여에 몰두하던 그는 급기야 재산을 털어 ‘급인전(急人錢)’이란 자선기금을 따로 설치했다. 김택영(金澤榮)은 이렇게 말한다.
“최순성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계산해 보고, 한 해의 제사와 손님 접대, 의복에 드는 비용을 제하고 수만금을 따로 갈라 두고 ‘급인전’라고 불렀다. 가까이로는 친척과 친구로부터 멀리로는 다른 군읍(郡邑)의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까지 만약 곤궁한 자라면 급인전으로 도와주었다.
초상과 장례에 부의를 하니 망자는 수의와 관(棺)을 갖출 수 있었고, 탈것을 빌려주니 말을 탈 수 있었고, 기명(器皿)과 의복을 돌려쓰니 심의(深衣)와 단령(團領)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톱과 도끼, 가래와 호미 같은 것까지도 그렇게 하였다. 흉년을 만나면 곳간을 남김없이 털어 진휼을 하였다.”
친척과 친구는 물론 다른 지방의 친지, 또 생면부지의 사람까지 곤궁한 자라면 모두 급인전으로 절박한 사정을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이가환(李家煥)은 최순성의 시여로 생계를 잇는 사람이 수십, 수백 명에 이르렀고, 혼인과 장례를 치른 사람이 수백 명이었으며, 기근을 면한 사람, 급한 사정을 알려 도움을 받은 사람, 또 그가 스스로 찾아내어 도움을 베푼 사람은 이루 다 셀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박지원은 그가 죽었을 때 거만(鉅萬)의 재산이 한 냥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가 죽자 찾아온 조문객이 성을 가득 메웠다. 마침 비가 와서 장례날짜를 바꾸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는 자들이 있었지만, 사실 그는 뭇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던 그의 이타행(利他行)에 대한 최고의 보상이었다.
최순성의 시여와 이타행은 이기적 욕망이 범람하는 21세기 한국사회에 너무나도 낯선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람이 있다. ‘어른 김장하’다. 21세기의 최순성이 아닌가.
강명관/인문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