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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역사 : 문자에서 텍스트로
문자에서 발원하여 인간의 특권인 사고를 나타내는 책은 그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불변하는 세 가지 속성에 근거한다.
즉, 얼마 동안 취급하기 쉬운 소재의 사용과 재생산, 그리고 양식에 따라 무한히 변조가 가능한 텍스트의 보급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세 수도사들이 양피지 위에 쓴 수사본이야말로 완벽한 책의 형태를 갖춘 것이다.
제1장 손으로 만든 책
선사시대를 알리는 어원
'책'이란 낱말을 라틴어 리베르(liber)에서 유래했다. 이 용어는 본래 목재와 표피 사이의 얇은 껍질을 뜻하는데,
사람들은 돌과 마찬가지로 이곳에 최초의 문자를 새겼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필기 소재였다는 뜻은 아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바빌로니아, 니네베 같은 지역에서는 부드러운 널빤지를 사용했으며, 유골, 피륙, 밀랍판,
목판, 종려나무 잎사귀, 짐승가죽, 돌 등을 사용한 지역들도 있다.
'책'을 뜻하는 그리스어 비블리온(biblion)은 '파피루스'라는 뜻을 지닌 비블로스(biblos)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성서라는 '바이블(bible)'이 이 말에서 생겨났는데, 프랑스어 비블리오필(bibliophile, 애서가:역주)이나 비블리오테크
(bibliotheque, 도서관:역주) 같은 많은 어휘도 그 어원을 공유한다.
나일강 계곡에서 자라는 동명의 식물을 가공 처리하여 얻어지는 파피루스는 고대에 가장 널리 사용되던 소재였다.
B.C. 3000년에 등장한 이 소재는 이집트를 장악한 후 그리스와 로마로 건너갔다.
파피루스는 접기가 불편하고 양면 기록에 적합하지 못했다. 따라서 최초의 책은 낱장을 나란히 이어붙이고 양끝을
나무나 상아로 된 막대기에 말아서 만든 두루마리(라틴어로 권을 뜻하는 volumen에서 프랑스어 '볼륌'이 파생됨)
형태를 띠었다. 아주 드물긴 하나 두루마리의 길이가 10m에 이르고 거기에 세로로 25행에서 45행까지 써넣은 텍스트
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대체로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책 이집트의 벽화 등을 살펴보면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필사하는 필경사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필경사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전혀 발견 되지 않았던 아테네나 로마에서는 노예들이 필사작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그 대신 책을 낭독하는 장면을 많이 남겨놓았고 그런 그림들은 대부분 책의 상거래에
관해 기술하고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대형 도서관이 존재했고, 특히 소아시아의 페르가논 도서관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50만권이 넘는 서책들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 도서관들이 필사작업실과 긴밀한 연계 속에서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로마의 책 발행인들은 제국 내에 그리스와 라틴 문학 작품을 보급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중 많은 작품들이
완전히 유실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작품들은 매우 빈약하다. 그 예로 소포클레스는 123편이나 되는 비극을 썼건만
우리는 그중 단일곱 편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다른 작품들 역시 결국 뒤늦게 복사된 사본을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9세기 이전에 제작된 플라톤의 수사본도 거의 현존하지 않는다.
'코덱스': 책 역사상 최초의 발명품
기원후 초창기부터 책의 형태가 변모되었다. 볼루멘(두루마리)은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외양인 낱장을 묶어 함께
꿰맨 코덱스(codex, 고자본)의 형태로 변했다.
양손에 들고 읽을 수 있으며 비교적 보존이 용이한데다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여행시엔 더 편리했다) 코덱스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보다 훨씬 취급이 간편하고 양면 기록이 가능하다는 이점도 지녔다.
2~4세기 사이 기독교의 전파와 더불어 코덱스 사용은 널리 일반화되었다.
코덱스의 등장으로 책을 대하는 관점에 변화가 생기면서 사용법에 역점을 둔 텍스트의 구조화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오늘날 그대로 전수되었다. 즉, 쪽 매기기, 각 장의 분리, 제목, 목차, 낱말 구분 등 고대의 코덱스는 점차 체계화
되었다.
양피지의 비약적인 발전
새로운 형태의 책이 성공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파피루스가 아닌 다른 재료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재료란 이후 1000년 이상 꾸준히 사용 될 양피지였다.
전해지는 바로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페르가논의 군주들이 파피루스 조달을 더 이상
이집트에 의존하지 않기위해 B.C. 2세기부터 양피지 산업을 육성했다고 한다.
문제는 재료를 동물로부터 얻는다는 것이었다. 양이나 염소, 소 같은 짐승의 가죽은 오랜 제조 준비과정을 거치고
나면 파피루스보다 훨씬 더 유연성, 내구성이 뛰어나며 양면 사용도 가능했다.
상등품은 양피지였으나 사산된 송아지나 염소의 가죽으로 벨럼지를 만들기도 했다. 제조기술은 거의 변하지 않은
채 차츰 서양으로 전파되었고, 종이가 출현하기 전까지 양피지는 중세 동안 문서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
양피지 제작에는 많은 가죽이 필요했는데-중간 판형의 책 한 권에 열다섯 마리가 소요되었다-이는 막대한 제작비를
의미했다. 경비 절약을 위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판단된 텍스트의 양피지들은 바닥을 긁어서 재활용했는데, 이것은
팔랭프세스트(pslimpsestes, 글자를 지우고 새 글자를 새긴 양피지:역주)라고 불렸다.
오늘날에는 과학적인 처리법을 동원해 사라진 텍스트를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수도사의 작업장
로마 제국 붕괴 이후 비잔틴 제국에서는 장서가 풍부한 도서관들이 번창했고, 서양의 채식장식에 영향을 준 세밀화
기법이 발전되었다.
한편 라틴 문명은 유럽에서 영적 삶의 근원지요, 경제적 생산활동의 중심지이며 동시에 문명의 관리자였던 수도원
으로 숨어들었다. 6세기부터 8세기까지 아일랜드(골롬반 성인)와 영국(보니파키우스 성인)의 선교활동으로 특히
주목을 끌었던 수도원들은 대규모 건립운동을 벌여 유럽전역으로 세력을 확산해 나갔다.
베네딕트 수도회는 브누아 성인이 정한 율법을 전파했는데, 그는 529년에 몽 카생수도원을 창설하였다.
몽 카생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그들의 하루 일과를 기도와 육체노동, 영적인 작품을 읽는 일에 배분해서 활용해야 했다.
수도원마다 필사 전용실인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을 갖추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그곳에서 종교적인 텍스트는
물론, 라틴어 문장 습득에 필요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세속적인 작품을 줄곧 베껴 쓰면서 삽화를 그려넣었다.
활약이 큰 스크립토리움에는 추기경, 대주교, 주교 들의 복사본이 구비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수도사들은 수도원 고유의 활동이나 수도사의 의무를 면제받고 있었다.
이런 예를 프랑스의 생드니 수도원과 생마르탱 드투르 수도원, 독일 풀다 수도원과 라이헤니우 수도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스위스의 생골 수도원처럼 규모가 큰 본원들은 양피지의 제작과정부터 제본에 이르기까지 책의 생산 공정
전체를 소화할 수 있는 시설을 내부에 완벽하게 확보하고 있었다.
스크립토리움의 설립 움직임은 르네상스 시기의 카롤링거 왕조에 와서 강화되었다.
필사작업
양피지 제작이 마무리되면 수도사는 필사작업에 착수했다. 작업은 스크립토리움의 책임자를 겸한 작업실 조장의
지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는 아마도 사서계 수사(armarius, 아르마리우스)였을 것이다.
흔히 수도사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의자에 앉아 경사진 독경대에 몸을 숙인 채 구술을 받아 적거나 다시 베껴쓰는
작업을 했다.
그들의 필기도구는 간단했다. 식물 성분의 잉크가 든 점토 잉크병이나 소뿔, 그리고 이전에 즐겨 쓰였던 작은 칼로
깎아 만든 갈대붓 대신 가장 흔히 쓰였던 깃털펜이 있었다. 또 흑연 연필, 나무자, 컴퍼스, 그리고 글을 적어넣을
양피지 등이있었다.
필사본 여백에서 종종 눈에 띄는 특이한 문장들은 필경사들의 자기 희생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그리고 필사본 말미에서는 이런 글귀를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마치며. 겸허한 신앙심으로 옮겨 썼고 완성했다."
필사작업에서 또 하나 중요한 일은 많은 수도사들을 동시에 한 작품의 필사 작업에 투입하여 대부분 다른 수도원
에서 빌려온 원본을 너무 장기간 묵혀두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필사작업이 끝나면 텍스트를 다시 읽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는 일이 남는다.
교회어이자 문명어였던 라틴어
수도사들이 번역한 저술들은 교단설립자들이 추구하는 바가 내포되어 있는 공동체적 삶의 필수적인 텍스트들로서
우선은 종교문학을 부흥시켰다. 그 가운데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것이 성서였다.
성서와 더불어 수도사들의 명상을 살찌우기 위한 주석들, 다양한 성무일과서들(미사경본, 성사, 복음서 초록, 시편집,
층계송(미사 때 신약의 서간문 낭독과 복음서 낭독 사이에 부르는 시편:역주), 성가집, 순교자 축일표), 모범이 될
궤적을 알려주는 성인전들, 믿음을 강화하는 한편 신학 논쟁에 필요한 논리를 제시해 주는 역대 교황들의 저술(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제롬) 등이 있었다.
그들은 또한 라틴어로 된 법률 텍스트들과 그리스, 로마의 고전작품들도 필사 했다. 그중에는 번역 형식을 취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키케로와 대플리니우스를 비롯, 이따금 뒤늦게 발견된 많은 작가들도 끼여 있었다.
특히 스크립토리움은 성직자 교육을 위해 4세기에 로마에서 생활했던 문법 교수의 이름을 따서 '도나서'라고 칭한
라틴어 문법서들도 제작했다. 결국 필사작업은 방대한 영역에 걸쳐 보존된 고문서들에 기초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제국은 붕괴되었지만 라틴어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5세기에 서양을 침략했던 야만족의 언어로까지 채택
되었다. 야만족의 승리는 기독교주의의 전파 를 촉진했고, 그에 따라서 라틴어는 교회의 언어로, 동시에 로마 제국에
소속되어 있지 않던 북유럽 지역의 문명어로 확산되어 갔다. 구어 자체는 라틴어와 동떨어져서 대다수의 언어들이
변질되어 갔다.
8세기부터는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의 출현을 예고하는 세속적인 텍스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성공한 작가
물론 중요성이란 측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여러 수도원의 도서관들은 그 시대로서는 유일하게 많은
도서를 구비한 문화의 중심지였다. 예를 들어서 콘스탄체 호숫가에 자리한 라이헤나우 수도원의 도서관에는 822년에
400권이 넘는 서책을 소장하여 가장 중요한 도서관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었고,
그와동등한 위치에 있던 이탈리아의 보비오 수도원 도서관에는 666권이 소장되어 있었다.
주축이 되었던 성서 텍스트의 경우 성서 이해에 도움이 되는 작품들을 흔히 접할 수 있었다.
모든 편찬자나 주석가들이 존재하려면 먼저 많은 작가들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 시대에 성공한 작가들 가운데는 일종의 교육 프로그램인 (신성한 인간의 학교)라는 작품을 쓴 시칠리아 출신의
카시오도레가 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 존자 베데의 과학적 주제를 다룬 저서들,
보에시우스의 철학서, 그리고 세비야 출신의 이지도르 성인이 쓴 (어원학)등이 있었다.
특히 (어원학)은 최초의 백과사전 중 하나로 손꼽히며 대단한 성공을 예고했던 작품이다.
동업조합과 가내작업
12세기 말엽부터, 도시가 부흥하고 특히 학교수가 증가하면서 책의 제작과 보급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수도원의 스크립토리움은 꾸준한 활동을 계속해 갔지만, 13세기 대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작품들에 대한 새롭고
강렬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책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직업들도 아울러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양피지 제조업자, 필경사, 채식장식가, 제본공이라는 각기 독자 적인 동업조합을 이루어 조직화되었다.
책의 수요가 증가하자 에에 부응하기 위해서 페시아(pecia)라고 부르는 시스템이 유럽의 큰 대학 도시 주변에
정착되었다.
페시아 시스템에 따르면 대학 당국이 어떤 서적의 필사를 주문받으면, 우선 교정을 하고 원본과 차이가 없음을
검토하여 승인한 공식 사본인 엑장플라(exemplar)를 서적상에게 일임한다.
서적상은 낱장의 묶음이나 책의 일부(라틴어로 페시아)를 떼어내어 학생이나 필경사 에게 자율적으로 맡길 권한이
있고, 필경을 맡은 이들은 그것들을 가져가서 필사작업을 한다.
매우 값싼 작업방식인 이 시스템은 작품 전체를 한곳에만 묶어 두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하나의 텍스트를 여러
개의 복사본들로 만들어냈다.
새로운 대중, 새로운 책들
도시의 팽창과 더불어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른 부르주아지는 결과적으로 법학자, 상인, 대학인 등 다시 말해 성직
자가 아닌 일반인이라는 고객을 등장시켰다. 그들은 책이라는 전통적 산물에서 만족을 구할 수 없었고,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 대한 열망을 드러냈다.
그들은 기사도 소설((장미 이야기)), 역사를 다푼 작품(장 드 망드빌의 (프랑스 대연대기) (해외 여행기)), 희곡,
성인전 등 이채로운 내용을 담은 작품들에 관심으 보였다.
12세기에 라틴어의 위상이 급격 히 하락하면서 통속어로 된 문학작품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테가
라틴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로도 글을 써야 했던 사정을 들려준다.
그럼에도 중세 말까지는 수도원이나 소교구에서 쓰이던 종교서가 생산에서 여전히 주요한 영역을 차지했다.
일반 신자용 기도서 모음집인 일도서는 개별적이고 정적인 독서의 발달과 함께 14~15세기에 대단한 성공을 거두
었고 가장 유행하는 작품들이 되었다.
군주와 문예학술의 옹호자
왕가와 군주들, 세속적인 대영주들은 화려하게 장식되었거나 간간이 텍스트에 그림이 들어간 책들을 수집하는
취미를 유행시켰다. 이로써 문예학술 옹호활동이 발전했다.
헌사 장면이 그려진 많은 작품들에서 저자가 스승에게 필사본을 바치는 모습은 흔하게 발견되곤 한다.
샤를 5세는 연작 번역서들의 간행과 먼훗날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의 전형을 엿보게 하는 수천 권에 달하는 과학
도서관의 설립에 착수했다. 그의 동생이자 베리 공작이던 장은 랭부르 형제에게 자신의 유명한 작품 (아주 넉넉한
시간들) 의 삽화를 그러넣게 했고, 공정왕 필리프는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들에게 작업을 요청했다.
한편 이탈리아의 명문가였던 스포르차가와 비스콘티가, 메디치가는 특히 뛰어난 문화예술 지원 활동을 지속적
으로 펴갔다. 전문화된 출판 판매업자들은 이 최초의 애서가들에게 책을 공급하기위해 서적매장을 열었다.
판형과 선표시
책의 전개과정을 시대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겠지만, 책 그 자체만 보면, 중세의 책은 외형상의 차이점만을 드러
냈을 뿐 구조적으로는 대동소이했다. 실제로 책은 접혀진 낱장들을 한데 묶은 절지들의 형태로 되어 있었고,
낱장을 몇 번 접었는가에 따라 책의 판형(2절판, 4절판, 8절판 등)이 결정되었다.
필경사는 뾰족한 펜이나 흑연으로(7세기부터) 지면을 꼼꼼하게 준비해야만 필사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여백을 수직과 수평으로 동일한 경계선 들을 그러야 했다. '양피지 선긋기'라는 용어 아래 작업한 것을
모두 다시 모으면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균형 있는 지면을 확보할 수 있었다.
양피지를 경제적으로 활용하려면 대개 촘촘한 서체로 텍스트를 베껴 써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가 행을
놓치지 않도록 난외의 참조나 방주(본문 옆에 다는 주석:역주)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매우 빈번하게 사용된 생략법도 시간과 공간의 확보를 고려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축약, 중략, 관용부호 사용이나
자간 사이에 가로줄 긋기 같은 생략법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부호들은 고문서 학자들이나 해독할 수 있을까!
텍스트 밖의 기술들
난외의 부분이 항상 빈 공간으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대개 좀더 작고 다른 활자체로 중세의 교시에 기초
하여 원문을 해석한 주석이 기술이 기술 되었다. 12세기부터 난외는 더욱 넓은 공간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성서 텍스트들의 원형도 크게 변형되었다.
절지들을 순서에 맞게 모아 제본하려면, 각 절지들 끝에 일련번호(순서 표시) 나 다음 장의 첫 낱말(쪽수 매김 부호,
쪽 밑여백에 기입하여 다음 장에 계속딤을 나타내는 부호:역주)을 기입해야 했다. 13세기부터 절지들이 낱장에 번호
매기기(쪽배열)가 시작되었다. 속표지는 대개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텍스트는 첫 장 위부터 시작되었고, 표제는
아예 없거나 첫 장 시작에 앞서 색잉크를 사용해 가장 큰 문자들로 표제(라틴어로는 머리말)를 적어넣거나 했는데,
대개 저자의 이름은 빠졌다.
많은 작품들은 간단한 기술(끝이라는 말을 명시함)로 끝났다. 이따금 몇몇 필경사들이 마지막 서식에서 통일된
관례를 취했는데, 그에 대해 역사가들은 책의 신원을 알리는 몇 가지 정보로서 판권(그리스 단어로 '완결'이라는
뜻이다)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거기에는 책제목과 종종 저자명이 들어갔고, 발행인과 드물게는 필경사의 이름, 복사
날짜와 장소도 기입되었다.
옹시알체, 샤를마뉴체, 그리고 고딕체
유형이 다른 서체들이 중세 전반에 걸쳐 계승되고 혼합되었다. 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더 이상 정방형의 머리
글자는 표제에 사용되지 않았다.
옹시알체는 둥근 모양의 글자나 굵은 모듈로 특징을 나타내는데, 4~9세기 동안 여러 나라들을 경유하면서 상당히
변형되었다.
우아하고 읽기 쉬운 샤를마뉴 소문자는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이후 거의 전유럽으로 확산되어 널리
쓰여졌다. 샤를마뉴체는 12세기까지 줄곧 사용되다가, 몇몇 인쇄활자 유형들과 마찬가지로 15세기에 이탈리아
에서 성공을 거둔 인문주의적 서체가 고안되는 토양이 되었다.
12세기 말에는 곡선을 파기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는 미학적으로 동명의 건축양식과 관계가 있는 고딕체를
가리킨다.
고딕체의 수직선은 폭이 좁고 길이는 더 길며 각이 졌는데, 15세기까지 특히 북유럽에서 사용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한 페트라르키는 보카치오에게 글을 보내면서 이 활달한 활자체에 대한 불만을
한껏 토로해 냈다. "이 서체는 읽혀지기보다는 마치 다른 모든 글자들보다 단연 돋보이려고 만들어진 듯합니다.
멀리서는 시야를 혼란스럽게 하고 가까이에서는 피로감을 주는군요."
그림이 있는 책들
짐작하는 것처럼 볼루멘(두루마리)의 경우에는 양호하게 보존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삽화예술은 코덱스에서
발전하기에 좋은 적절한 소재를 찾아냈고, 결국 체식장식이라는 대단한 선풍을 불러일으킨 기법을 낳게 되었다.
실제로 책은 프레스코 벽화와 더불어 중세 전기의 회화예술이 융성하는 데에 근원적인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이 시기에 들어서면 예술적으로 훌륭한 여러 화가들이 서로 경합을 벌이는 한편, 세밀화 예술 부문에서는 매우
뛰어난 지역 화파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세기까지 채식장식은 주로 수도 내부에서 행해졌다. 일반 공방들이 생겨나면서 채식사는 세속적인 직업으로
변했고 -‘여류 채식사들’이 많이 종사해 이 일은 대개 여성적이었다. -파리의 라틴가처럼 책 소비자들이 밀집한
대학가에서 집단을 형성하기도 했다.
대형 공방은 몇 가지 과정으로 작업의 분담을 꾀했다.
화가가 실제적인 세밀화 작업을 했다면, 채식사는 말 그대로 ‘부속적인(장식 문자들, 테두리 그림)’장식만을 했다.
필경사가 삽화를 위해 남겨둔 공간에 주서가가 붉은 잉크로 교정부호들을 지정하고 나면 그때부터 채식사는
작업에 들어갔다.
머리글자 장식, 테두리 그림, 지면 전체를 메우는 삽화: 그림으로 내용을 알다.
필사본에서 삽화는 텍스트의 구성이나 정보 제공, 그리고 장식과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삽화는 크게 세 가지 주요 장르로 구분된다.
머리글자 장식은 텍스트의 첫 글자를 강조할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초기에는 단순히 크기를 키워 돋보이게 하다가
점차로 인물이나 동물의 형상, 또는 기하학적 모티프를 장식해 넣음으로써 그 독창성은 한층 더 부각되었다.
12세기부터 머리글자 장식은 장식문자로 발전했고, 그 곡선 윤곽이 그림에 액자 구실을 했다.
테두리 그림 역시 텍스트나 지면을 돋보이게 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테두리 그림은 머리글자를 길게 늘여서
식물대롱 모양을 취하거나, 대개 재미있는 형상들(기도하거나 연주하는 사람들, 동물들, 기이한 형상들)이 숨겨진
작은 당초무늬들이 함께 그려졌다.
지면 전체를 메우는 삽화는, 책 내용은 알려주는 역할을 했던 고대의 파피루스 두루마리 장식 그림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코덱스에 와서 서책의 형태는 중세 확가들에게 완벽하게 정해진 하나의 틀(낱장)을 제공해 주었다.
중세 전기부터 복음사가들의 초상이나 헌사장면들이 지면을 가득 메웠고, 시대가 흐르면서 이러한 삽화 형식은
더욱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4세기와 15세기에 이르면 필사본들은 더 이상 성상집이 아니었는데, 어떤 개정판 성서들은 연재만화를 또올리게
해줄 정도였다
제본
성서에 대한 경외심은 더 이상의 이론의 여지가 없었기에 그 파급효과는 책 제작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미쳤다.
동업조합과 지식계층은 어떤 책을 만들 것인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고심했다.
책이란 오랜 수고와 많은 희생이 뒤따르는 것이므로 보호받고 보존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필경사가 작업을 끝마치면, 널빤지(중세 제본술에서 책표지에 쓰였던 도구:역 주)를 철끈들로 고정시킨 다음 그
위에 가죽을 씌우고 절지 묶음들을 한데 꿰메었다.
제본의 목적이 책 보호에 우선 순위를 두기는 했지만 장식적 취향 또한 충분히 고려되었다.
가장 오래된 장식 기법은 열을 가하지 않은 탁본이었다. 비교적 희귀한 몇몇 작품을은 상아나 천 또는 보석들로
표지 장식을 했다.
일단 제본된 서책들에는 고리쇠가 갖추어졌다. 가죽을 보호하기 위해서 굵은못장식들과 구리나 놋쇠로 된 조임
쇠붙이들이 사용되었다.
도서관의 서책들은 층층이 보관되었고, 13세기 부터는 도난 방지를 위해서 독서대에 사슬로 묶어 고정시켜 두었다.
1000년 뒤 코덱스가 등장하여 기존의 제본과 인쇄업자의 제본이 분리되었고,
1000년이 흐르는 동안 계승되어온 이 완성된 서책의 형태는 구텐베르크의 발명으로 재생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비해 친숙해지기는 했으나 15세기 중반까지 책은 여전히 희소가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일찍이 구텐베르크만큼 명성과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던 발명가는 없었다. 전기는 그를 인류에 혜택을 준 위인
들에 모셔두었지만, 사실 전기 작가의 작업이 어려울 만큼 그에 관한 자료는 턱없이 부족해졌다.
결국 구텐베르크가 전세계적인 발명을 한 대부란 점에는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제2장 구텐베르크, 논란의 발명자
늘어나는 텍스트들을 전부 수용하기에는 복사 필사본들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훨씬 오래 전부터 한결 신속
하게 많은 필사본들을 생산해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연구들이 행해져 왔다.
드디어 종이 등장!
당시 필사본 서책을 장악하고 있던 양피지보다 더 유연하고 값싼 재료가 유럽에 당도하지 않았다면, 인쇄술은
그처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더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제조 연대가 2세기 초로 알려진 중국의 발명품 종이는 지중해 연안의
회교 국가들이 처음으로 수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이는 이후 유럽 지역으로 서서히 확산 되어갔다. 우선 에스파냐 에서 시작하여 3세기에는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좀더 내구성 강한 재질에 역점을 두고서 기법의 대혁신이 이루어졌다. 18세기 말까지 종이의 제조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종이는 책 제작 비용을 현저히 낮추기는 했지만, 필경사들이 작업했던 과거에 견주어볼 때 수사본 작품들의 재료
처럼 사용상에 한계를 드러내는 취약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dlg 2세기 동안 종이는 북유럽 기독교 국가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종교화를 위한 목판
구텐베르크의 발명이 비록 목판술(xylography,그리스어로 '나무'라는 뜻의 xulon과 '기술하다'라는 뜻의graphein의
합성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는 해도, 목판 조각 기법은 이미 오래 전부터 tjad 장식에 사용되고 있었다.
그 원리는 간단했다. 목판의 볼록한 부분에 잉크칠을 해서 거기에 종이 낱장을 붙이고 나무 주걱으로 문지르면 된다.
이런 프린트 기법은 특히 14세기에 종교화한 목판으로 찍어낸 다음 채색하는 카드 제작에서 비액적인 발전을 거두
었다.
16세기까지 거의 5000개나 되는 목판 작업들이 보존되었으며, 그것들 대부분이 종교적 주제를 표현했다.
이후 목판은 지면이 많고 이따금 긴 텍슽들이 삽입 된 책자 조판 (일명 목판술)에서 흔히 쓰였다.
가장 오래된 목판 책자는 1451-1452년(같은 시기에 구텐베르크는 성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목판 기법은 안쇄술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았고, 무엇보다도 책장식에서 꾸준히 이용되었다.
활자와 인쇄기, 그리고 잉크
활판술(typhography)은 식자공이 원하는 대로 금속분리활자들을 조합할 수 있는, 아주 상이한 결합 방식에 그
원라를 두고 있다. 활자들을 얻으려면, 매우 단단한 금속(강철)자형위에 글자를 돋움새김 한다.
그런 다음 활자가 새겨진 모형을 덜 단단한 금속(구리)원형에 움푹 패게 찍어낸다. 이어서 이것을 납과 주석, 안티몬
(금속원소로 활자를 만드는 데 쓰임: 역주) 합금을 흘려넣은 주형속에 안착시킨다.
이렇게 해서 완벽하게 동일한 일련의 글자들을 얻을 수가 있는데, 그 활자들로 인쇄된 지면은 매우 깔끔하고 정교
했다.
이 결정적인 발명은 두 가지 중요한 기법을 수정, 보완함으로써 가능했다. 우선은 인쇄기의 원리 도입이었다.
그 원리는 포도를 으깨는 기구 같은 다른 분야에도 적용되었다. 또 하나는 유동적인 잉크 제조 방식이 성공을 거두
었던 점이었다.
이 세 가지 결정적인 구성요소들에 역점을 둔 새로운 인쇄기술의 발명에는 적어도 15년의 연구 기간과 숱한 사행
착오가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 발명품은 세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 천재의 노력으로 탄생되었다.
선구자와 연구자들
적어도 한국은 14세기부터, 중국은 그보다 조금 뒤늦은 시기에 이미 금속 분리활자들을 사용해 텍스트를 중식하는
법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 목판술 인쇄 만큼 널리 전파시키지는 못했다. 8세기부터 목판술은 동양의 여러 나라들
에서 인쇄물의 매우 폭넓은 전파를 용이하게 했다.
유럽도 마찬가지로 구텐베르크가 인쇄 분야 연구에 착수했던 유일한 인물은 아니였다.
16세기부터 발명의 영예를 자국에 돌리려던 애국적인 역사가들이 속 속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 중 구텐베르크의 연구를 도용해 왔던 네덜란드의 하를렘라우렌스 안존 코스터는 인쇄 기술의 기초들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프라하 출신의 금은세공사인 프로코프 발드보겔은 1444∼1446년경 아비뇽에서 거주했다.
고문서에 따르면 그는 당시 금속 소재를 이용해 '인위적인 기술방식'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제작물들 중 어느 것도 보존된 것이 없으며, 활판술과 관련된 것인지도 미지수 였다.
구텐베르크, 아직은 무명의 발명가
구텐베르크에 관해 알려진 사실은 그리 많지 않다. 설사 그에 대한 대다수 의혹들을 인정하는 수많은 연구 논문
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의 작없 성과는 국제적으로 인정되었고, 각기 다른 시기의 작업물들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간혹 발견되는 구텐베르크에 관한 간략한 사본들,고문서 자료 들을 통해 인쇄업자로서 살았던 그의 생애중 몇몇
시기들만은 추적해볼 수가 있다.
요한 겐스플라이시, 일명 구텐베르크는 14세기말, 당시 경제적으로 매우 활기를 띠었던 작은 교역도시인 마인츠의
금은 세공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적어도 1434∼1444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장기 체류하며 작업했던 것으로
보인다.
1439년에 작업 진행중이던 부품들을 통해 그과 인쇄술과는 매우 동떨어진 분야에서 신속한 제작방식을 연구하고
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성지 순례순례 기념물의 알종인 작은 반사경 세트를 제조했을 정도니, 다양한 산업활동들에 주력하고 있었
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그는 3년전부터 '새로운 기술'과 관련하여 한층 은밀한 연구들을 꾸준히 추진해 오고 있었다.
정확한 텍스트의 실현을 위해 그는 인쇄기와 판형들, 활자, 그리고 '압착하는 행위', 엄밀히 말해서 '찍어 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도구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1459년 이전까지 스트라스부르에서 인쇄된 작품은 단 하나도 없었다.
1448년부터 1454년까지 마인츠에서 그의 행적을 발견할 수는 없다. 연대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지만, 이 시기
마지막 무렵에 도나서와 책력들을 처음으로 인쇄한 듯 싶다.
이 인쇄물들은 구텐베르크에게 실패로 간주되었고,그 때문에 당시 이런 일을 제시도한 자는 없었다.
또다시 성서
이와 같은최초의 모색들에 이어 구텐베르크는 매우 야심찬 계획들을 실행에 옮긴다. 바로 성서의 인쇄였다.
이러한 시도에는 막대한 투자가 요구되었기 때문에 자본가들을 물색한 끝에 재정가인 요한 푸스트란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초기인 1449년∼1450년에는 도구를 제작하는데, 그 이후에는 전적으로 인쇄비용 (종이나 양피지,잉크 구입, 급료
지불)에 막대한 경비가 지출되었다.
푸스트는 재정이외의 일도 관여 했으며, 페터 쇠퍼 역시 발명에 역점을 두고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처음 인쇄된 것으로 알려진 (42행 성서)는 쪽의 행수가 책명으로 붙여진 것인데, 바로 뒤이어 나오게 될 다른 간행
물들 (그 예가 (36행 성서)과는 차이점을 보였다.
1454년 마지막 분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그 책은 어디에도 인쇄 날짜나 인쇄인의 성명조차 나와 있지 않다.
마인츠의 장식문자생이자 제본가였던 하인리히 크레머가 작업한 견본 하나에만 그가 필사본을 완성한 날짜가
정확히 1456년 8월이렀다고 기입되어 있다. 필사본의 장식과 제본 작업에 필요한 시간을 계산해볼 때, 이 자료는
1455년에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활판술의 기념비적 저작물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3세의 비서는 교황 특사인 피콜로미니 주교(장래의 교황 비오 2세)에게
보내는 1455년 3월 16일 서신에서, 1454년 10월에 프랑크푸르트의 성서 묶음들을 엄청나게 많은 견본들로 나누
어서 판매 하고 있는 '놀라운 인물'을 우연히 만나게 된 얘기를 전하고 있다. "어느 한 군데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고
정확한 서체로 되어 있어 존엄하신 귀하가 돋보기를 끼지 않으시고 별 수고 없이 독서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럼 이 위인은 누구였을까?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나, 아마도 이 시점이라면 아직 미완성이었을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성서와 관계되었던 게 분명하다.
2열 종단으로 인쇄된 이 최초의 책은 인쇄할 지면을 두 번 접어 제작한, 이른바 2절 판형의 책의로서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 활판술의 기념물이나 다름없었다. 이 성서를 제작하는 데에는 335만 개에 달하는 부호들과 대략 300개를
헤아리는 상이한 활자들이 필요했는데, 그 활자들의 형태는 전례용 필사본에서 사용 되어온 고딕체에서 착상한
것이었다.
인쇄부수는 160권에서 180권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 30권은 독피지(벨럼지, 사산한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종이:역주)에 인쇄했다. 현재 남아있는 50권은 파손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라도 충분히 식별할 수 있고,
베껴쓰기도 가능하여 당대의 책으로서는 보기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여섯명의 식자공들이 1452∼1454년
까지 2년여에 걸쳐 작업을 배분하는, 말하자면 공정작업을 거친 후 출판된 것이었다.
정확한 수치를 확인해볼 수는 없으나 그의 성서는 불티나게 팔렸을 것이다. 하지만 수익이 투자액을 상쇄하는 기간은
오래지 않았고 투자액만 현저히 불어났다. 아마도 푸스트가 실망한 것도, 구텐베르크와 계약을 파기한 것도 이 때문
인 듯한데, 공식적으로 1455년 말에 쇠퍼는 자신이 출자한 총액을 발명가가 지불할 수 없음을 선언하고 그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이 후 두 사람은 결별하고 각자의 길을 걸었다.
푸스트는 페터 쇠퍼와 손잡고 발명품을 이용해 인쇄인의 성명과 날짜를 기입햇 인쇄한 최초의 작품으로 1457년 8월
14일에 완성된 (마인츠의 시편)을 출간 했다. 이 활판술의 걸작품은 약500개의 상이한 활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전면
벨럼지에 인쇄했다. 두 협력자는 1466년까지 30권의 책을 모두 함께 제작했다.
구텐베르크로서는 이제 전처럼 화려하지 않은 계획을 세우게 되어, 특히 수요가 많은 면죄부 서식을 인쇄하는 등
나름의 돌파구를 찾게되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시기에 접어든 이때 그는 또 다른 간행물을 출간해 작업장이나 발명도구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런 작품들로는 책력들과 1460년경 인쇄한 (36행 성서) 라는 새로운 성서가 있었다.
게르만족의 특성
구텐베르크의 발명은 오래지 않아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의 오랜 동업자들이 새 작업장들을 열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학가나 종교구역 내의 서점들이 최초로 인쇄된 책자들을 시판하게 되자 아직 이 분야에서 뒤떨어져 있던
파리 같은 주요 도시들도 인쇄술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후 잠재적으로 시장성이 무한하리라는 직관은
당연히 이 직업에 대한 소명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인쇄술은 마인츠 지역과 라인강 연안 국가들에서 발달하기 시작했고, 작업장의 수가 늘어나 멘텔린(스트라스부르,
1459), 피스터(밤베르크, 1460), 첼(쾰른, 1466), 루펠(바젤, 1468), 차이너(아우쿠스부르크, 1468)의 인쇄작업장
들이 차례로 들어섰다.
구텐베르크의 옛 동료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든 방면에서 독일 인쇄인들은 대단한 사업수완을 보였다.
수량이 극히 제한되어 있기는 하나 새롭고 구미가 당길 만한 새로운 기술요소가 많은 인쇄도구를 들고서,
그들은 아주 멀리있는 나라에까지 동업자들을 찾아 분주하게 다녔다.
단 열 권의 책을 출간하기 위해서 브루타뉴에 있는 자신의 성 가까이에 작은 인쇄소를 설립했던 장 드 루앙 같은
인물은 문예학술 옹호자라고 칭할 만하다.
초기 인쇄업자들의 탄생 경위가 대부분 성직자들의 위력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종교서나 미사경본,
성무일과서, 신학 이론서나 교시를 담고 있는 책들의 비중이 큰 편이었다. 대학도시에는 주고객층이 최적의 장소
였다.
인쇄의 노정에서 최초의 식자공들의 이동으로 인쇄술은 급속도로 보급될 수 있었다. 가장 단적인 예로 식자공
요한 노이마이스터를 꼽을 수 있는데, 아마도 그는 제작할 작품들을 인쇄할 장소에 따라 유럽여정을 변경시키곤
했을 것이다. 1460년경 만년의 구텐베르크의 직공이던 그는 처음에는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1464년까지 로마에
있다가 움브리아에 있는 폴리뇨로 가서 1470년에 첫 간행물로 단테의 작품들을 인쇄했다.(이곳에서 그는 빚
때문에 감옥살이를 했다.).
1479년 그는 마인츠에 체류했고, 이듬해에는 주교의 부름을 받고 남프랑스에 있는 알비로 가서 머물렀다.
도피네의 비엔을 거쳐 마침내 그가 정착한 곳은 리옹(1485)이었다.
두명의 독일 인쇄업자, 마인츠의 콘라트 슈방니하임괴 쾰른의 아르놀트 판나르츠는 로마 부근에 있는 수비아코의
베네딕트 수도원 내에 최초의 작업장을 설립했고, 2년 후에는 로마에도 작업장을 냈다.
메디치가가 여전히 필사본의 명맥을 충실히 잇고 있던 피렌체뿐 아니라, 1469년에 장 드 스피르가 기반을 굳히고
있던 베네치아까지, 인쇄술은 북부 이탈리아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샤를 7세는 구텐베르크의 발명품을
알아보도록 14589년에 프랑스인 니콜라스 장송을 마인츠로 보낸 것으로 보이며, 이듬해 그는 구텐베르크를 모방
하여 인쇄술의 몇몇 걸작품을 만들었다.
베네치아는 1500 년까지 4000권의 간행물을 펴내 유럽 활판술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1472년, 하이델베르크 출신의 요한 파릭스는 에스파냐의 도시 세고비아에 활판작업장을 열었다.
이듬해에는 베르셀로나에 다음에는 발렌시아와 사라고사에 차례로 작업장을 설립했다.
네덜란드에서는 1473년 이후부터 루뱅이 작업장 하나를 인수해서 운영했다.
스위스는 맨 처음 바젤(1478)에, 그 후 제네바(1478)에 작업장이 등장했다.폴란드는 1474년부터 크라코우에,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는 1474년에 작업장들이 생겨났다.
북유럽에는 조금 뒤늦게 인쇄술이 퍼져나갔다. 영국의 잡화상인이던 윌리엄 켁스턴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에 이어
쾰른에서 활판술을 익혀 브뤼즈에서 작업장을 연 후, 1476년에 웨스트민스터 성당 내에 인쇄소를 설립했다.
덴마크는 1482년에야 이것이 가능했고, 스웨덴도 시간이 조금 걸려야 했다. 1480년, 유럽의 110개가 넘는 도시
들이 이미 작업장을 수용하고 있었다.
인쇄술이 시작된 시기에 절정에 올랐던 목판 인쇄 착자들은 오래 버티질 못하고 인쇄술의 발달 속도만큼 빠르게
퇴행해 갔다.
1460년, 인쇄업자 피스터는 삽화를 넣은 최초의 책들을 밤베르크에서 출판했다. 당시에는 교육용이나 성지순례시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파는 판매용으로서 간결한 텍스트가 곁들여진 성상집 같은 목판 인쇄 책자들이 1471년
(프랑스에서는 1478년에 리옹에서 등장했다.)에야 다시 등장할 수 있었던 건 이러한 경쟁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목판의 사용은 이 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만 일반화되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분리 인쇄했던 삽화들을 곧 활판인쇄의 판 안에 끼워 넣게 되었고, 대개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재사용하곤
했다.
소르본 대학에서 '르 솔레이 도르'에 이르기까지 1466년부터 인쇄 책자들은 파리에서 시판되었다.
이로써 프랑스에서 최초로 인쇄되어 출간된 작품들 역시 소르본 대학 당국이 자체 제작했음직하다.
소르본 대학을 이끌어가던 두 주축, 사부아 출신 기욤 피셰와 라인강 연안 출신 장 행령이 주도권을 쥐고서 독일인
이었을것이 분명한 세인쇄공들, 올리히 계링과 마르틴 크란츠 그리고 미하엘 프리부거를 불러들였다. e 시림은
그들에게 대학의 활자체로 된 필사본을 일임했다. 이탈리아의 교수인 가스파리노 바르지자가 쓴 서한문 기술의
개론서, (에피스토레)는 그들이 인쇄한 그들은 1473년 생쟈크가에 '르 솔레이 도르(황금 태양)'라는 간펀을 내걸고
인쇄소를 개업했다.
이듬해 바로 그 옆에 역시 게르만족 출신의 두 식자공, 피에르 세자르와 장스톨이 '슈발리에 뒤 시뉴(백조 기사에게)'
라는 서점을 열었다. 특히 라틴 구역인 생쟈크가는 편집 전통에서 줄곧 독보적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활발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파리 최초의 인쇄작업장들은 에콜(교습소)을 형성했다. 그로써 15세기에 인쇄술을 수용했던 프랑스의 도시들만
해도 작업장이 최소한 36군데에 이르렀다. 주로 대학도시들(툴루즈, 앙제, 그르노블)이 인쇄술과 관계있었지만
리옹은 달랐다. 실제 널리 소문난 정기장이 서면서 상업적 교차로 역할을 했다는 점과 막강한 부르주아지가 존재
하고 있었던 점이, 1473년 리옹에 인쇄술이 부리내리고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었다.
세기가 바뀔 무렵 프랑스 인쇄물의 80%각 파리와 리옹에 편중되어 있었다.
고서적들
중앙 아메리카(멕시코는 1539년, 리마는 1584년)와 아시아(마카오, 1588)처럼 동유롭(모스크바, 1563)만이 인쇄
술을 뒤늦게 받아들였을 뿐, 16세기 초 중서 유럽 전역이 구텐베르크의 발명품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1501년 이전까지 유럽의 250개 도시들은 고서적들을 제작해 왔다. 17세기에 와서 명확해진 이 명칭은 라틴어로
'요람'을 의미하는 '인쿠나볼륨(incunabulbum)'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1501년을 기점으로 책 제작 여건
들과 그 체제의 변화가 맞물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고서적들이 온갖 장서와 검색 목록들에서 채택되고 있었다.
독일이 변화에 박차를 가했다면, 베네치아는 이 시기의 선두주자였고(1495-1497년 사이 출간된 간행물의 4분의 1
을 차지했다.) 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당시 출간된 인쇄 책자들은 1000만 부에서 1500만 부에 해당되는 대략 2만 7천 종으로 추산되며, 그 책들은 210
개가 넘는 도시들에서 출판되었다. 물론 부수들에 대한 표시가 없으므로 이 숫자는 어림 계산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많은 작품들이 견본으로만 알려져 왔고, 그걸 감안하더라도 여러 작품들이 완전히 유실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예로서 제네바에서 검색된 몇몇 간행물들 중 37권은 단 한 부만이, 26권은 단 두 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더욱이 벽보나 플랜카드, 증서나 면죄부처럼 선전용이나 행정적 성격을 띤 특정 양식의 자료들은 아마 소장품에서는
하위로 밀렸을 것이다. 그사이 책들은 유통되고 있었다.
인쇄술이 초기에는 도시중심으로 성장한 건 사실이나 그 때문에 인쇄책자들의 유통에 장애가 되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도시나 지방들이 인쇄 작업장을 수용하기도 전에 책이 도달한 걸 목격할 수 있었다.
대규모 서적상들은 외국에도 점포들을 개업했다.
특히 독일에서는 도붓장수(행상인)들이 도시 밖으로 최초의 가제본(부로슈어)을 유포시켰다.
특히 중세 전기에 시작된 유럽의 정기장들은 가장 다양한 물품들을 교환했던 장소로서 서적상들과 인쇄업자들이
번갈아 드나들던 곳이었다. 그런 곳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들로는 리옹, 라이프치히가 있었고,
1485년 부터는 프랑크푸르트가 단연 우세했다.
인쇄술의 발명은 혁명적이었지만 책의 형태란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필사본 서책처럼 인쇄책자들도, 한 권의 책은 접은 낱장들을 모아 함께 제본한 절지 묶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쪽 단위로 조판하는 것도 동일했다. 둘 다 사용 활자들은 고딕체와 인문주의 서체 같은 기존 서체들에서 고안한
것이었고, 그 서체들은 종교적인 텍스트들에서 가장 선호되었고, 그 다음이 고전 작품의 텍스트들이었다.
책은 인쇄되자마자 완성되는 것이었다, 인쇄 후에 좀 더 수작업을 거쳐야했는데, 머리글자 장식, 채식장식, 구두점
뿐만 아니라 인쇄공들이 남겨둔 넓은 여백에 독자들이 필기 습관을 붙일 주석난 등도 만들어야 했다.
필사본과의 유사성 때문에 아직은 그늘에 가려져 있던 책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 전역을 떠들석하게 했던
부활과 논쟁의 정신을 위해 봉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혁의 중단으로 인해, 책 또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줜력의 편에서 보면 물신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전후 맥락에서 책은 지지의 폭을 넓힐 수 있었고, 전통적인 형태로서 변화를 서두르게 되었다.
제3장 인쇄술의 승리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문화적 변동으로 14세기 페트라르카가 선구자 역할을했던 인문주의는 다음 세기를 위해
필요한 교양을 쌓는 시대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고대의 그리스 로마문명으로 희귀한 인문주의는 책에 대한 보다 철저하고도 새로운 접근방식, 즉 왜곡된 텍스트를
과감히 물리치는 완본과 원본의 추구로 특색을 드러냈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적 전통에서 벗어나 잊혀지고 홀대해왔던 텍스트를 찾아 도서관을 뒤졌다.
인쇄인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중세의 필경사들이 제작한 잘못된 간행물을 수정
하는 일에 동참했다. 당시의 할판인쇄 작업장은 안쇄인과 학자의 긴밀한 협력장소 였다.
책과 인문주의: 알도 마누치오
알도 마누치오는 가장 명성을 얻은 인쇄인이었다. 교수 출신의 라틴어 학자이자 그리스어 학자였던 그는 고전
텍스트의 편집자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는 수많은 그리스의 지식인들이 이탈리아에 은거 할 수 밖에 없었던 1453년
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한창 그 연구가 부활하고 있던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을 원어로 출판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마누치오는 베네치아에 인쇄소를 설립했고, '알디네 나카데미'라는 지식층 그룹을 포진 했다.
1494-1515년 사이 150권에 이르는 작품을 출간했고, 학술서 이외에 값이 저렴한 포켓판 학생용 서적들도 발간
했는데, 그는 인문주의자들의 필사본 원고의 초서체를 본판 이탤릭체를 거기서 처음 사용했다. 제작하는 데 물질적인
부담 못지않게 정신적인 노고가 뒤따랐던 만큼 이러한 작품들은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고 대개 표절의 대상이 되곤
했다.
바젤에서 파리까지
유럽의 중심 도시들에서 편집자, 인쇄인, 그리고 연구자간의 공조관계가 이루어졌다.
오래된 주요 대학 도시였던 바젤에서 인쇄인 장 아메르바흐와 장 프로벤은 종교적 인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뉘른베르크에서 코베르거와 함께 작업했던 장 아메르바흐는 특히 성 암브르시우스(1492년)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1592년)등 교부들이 쓴 정확한 텍스트를 출판하는데 전념했다.
그는 도 기독교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헤브라이어 교본을 출간했던 인문주의자 장 뢰클랭과 협력했다.
바바리아 출신으로 아메르바흐의 사위였던 장 프로벤역시 장인 못지않은 명성을 떨쳤다.
1521년부터 1529년에 이르기까지 바젤에 자주 머물곤 했던 에라스무스는 프로벤의 집에 2년 동안 거주하면서
라틴어 번역서를 포함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과 신야성서의 고증본들을 출간할 수 있었다.
인쇄술에 힘입어 에라스부스의 사상은 몇 년 후에는 국제적인 호응을 얻게 되었다.
조세 바드는 리옹에서 양성된 인쇄인으로서, 파리로 건너와 뛰어난 인문주의자들의 그룹을 만들어 기욤 뷔데의
작품을 발굴했다. 그러나 여전히 에스티엔가는 가장 괄목할 만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우선 당대 프랑스 최고의 인문주의자로 추앙을 받던 르페브르데타플의 편집자였던 앙리를 비롯해, 과학서들을 출간
했던 시몬드 콜리네가 있었고, 한편으로 프랑수아 1세의 비호를 받았던 앙리의 아들느 1539년에 마침내 라틴어와
히브리어 출판물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인쇄인이 되었다.
교육학관계 저서들과 꼼꼼하게 주석을 붙인 고전 텍스트들에 정통한 편집자로서 사전류의 집필에 헌신하기도 했던
그는 크고 작은 판형의 여러 가지 다양한 성서 버전들을 출간한 바 있었다.
라볼레와 마로 같은 문인들을 포진시키고 있던 세바스티앙 그리프의 활약에서 알 수 있듯 리옹의 인문주의도 한창
활기를 띠고 있었다.
책과 종교개혁
흔히 종교개혁을 인쇄술의 자녀라고 기술한다. 그러한 단언이 무리가 아닌 것이 당시에 책을 읽을 수 있는 개인들의
수가 극히 적었다는데 전적으로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활판술의 비약적 발전이 루터와 종교개혁가
들의 사상을 급속히 전파시키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던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1517년에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면죄부 폐지를 주장하는 95개 조항을 공표하고 마침내 교황권과의 단절을 뜻하는
단초를 알리면서 사건의 발단은 시작되었다. 그는 인쇄술을 통해 자신의 사상들이 눈부시게 확산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보다 폭넓은 대중에게 다가가디 위해 독일어를 사용했던 종교개혁가들의 저작물들은 하나같이 당애로선 예로서
1520년에 발행된 루터의 < 독일 국민의 고귀함에 대하여 >라는 팸플릿 4000부는 며칠 만에 동이 나버렸다.
특히 농민전쟁처럼 독일인들에게 피폐함을 안겨주었던 잇단 종교적, 사회적 항쟁들이 터지면서 새로운 사상을
전파시키는 데 필요한 팸플릿과 소책자, 간략하고 쉽게 쓴 전단용 텍스트들이 전례 없이 보급되는 계기가 마련
되었다.
루터가 번역한 성서의 경우 1522-1546년 사이에 430쇄를 인쇄할 정도였다.
규제를 받게 된 작업들
종교적인 불과용이 절정에 다다른 상황에서 책은 불신과 적대감을 선동하고 있었다. 법률로 규정하여 이런 일에
가담한 직업들은 모조리 감시와 종종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책 관련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검열이 행해졌다.
1534년의 플래카드 사건('교황의 미사'에 대한 적대적인 벽보들이 광장과 교회 입구들에 나붙었는데, 왕이 체류
해있던 앙부와즈를 극도로 비난하는 내용을 담았다.)은 탄압의 강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유럽 전역의 인쇄술에 대한 박해는 다양한 양식들을 띠었다. 즉, 특정 책이나 특정 양식의 작품들의 출판, 판매 또는
수입금지, 저속한 언어로 된 간행물들의 독서 규제, 저자 인쇄, 인쇄인 또는 발행인 들에 대한 기소가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수감생활을 하는 이도 있었고, 1546년에 파리의 모베르 광장에서 화형당한 에티엔 돌레처럼 사형선고를
받는 이도 있었다.
수많은 프랑스 프로테스탄스들의 뒤를 따라 1550년에 제네바로 은신해 갔던 로베르 에스티엔처럼 많은 인쇄인들이
망명을 선택했다. 하지만 종교개혁 사상의 확산을 막기 위해 취해졌던 여러 탄압 조치들은 뒤늦게야 실효를 거두었다.
에스파냐만은 유일하게 프로테스탄트 서적의 유입에서 완전히 제외된 나라였다.
반종교개혁
이렇듯 종교개혁 세력이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예상 밖으로 팽창해가자 카톨릭 역시 인쇄술의 이기를 이용하여
반격을 시도 했다.
트리엔트 공의회(1645-1563)는 반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되어 교회의 교리를 재확인했고, 이단에 대항에 투쟁할
방법을 강구했다.
공익회는 4세기에 성 제롬이 라틴어 텍스트로 번역하여 확립시킨 불가타 성서를 유일한 공정판 성서라고 선언했다.
그밖에도 전례서를 개정하는 데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서적상들은 이 일로 오히려 상업적인 호기를 맞게 되었다.
결국 이단에 대한 투쟁을 계디로 연구(계시의 발전, 종교적인 고증학의 연구)와 기도생활을 고무시킨 셈이었다.
화려한 양식으로 된 신앙서는 17세기에 널리 보급되었다.
한편으로 교황은 <금서목록>을 공포했다. 교회가 승인 하지않은 성서 버전들과 무신론을 찬양하거나 윤리에 어긋
나는 작품들은 필히 이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금서복록>은 정기적으로 공개되어 오다가, 1966년에 와서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폐지되었다.
유럽의 책
16세기 유럽 출판물의 총 부수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 프랑스의 간행물이 7만 5천 권, 독일어 10만 권 이상,
이탈리아가 5000에서 1만 권 사이였을것이다. 베네치아, 파리와 리옹은 출판문화가 꽃핀 주요 도시들이었다.
독일과 네달란드에서는 매우 귀중한 출판물이 각지로 유포되었다.(앙베르, 쾰른, 뉘른베르크, 스트라스부르 등지로).
에스파냐의 출판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뒤쳐졌다.
책의 운송은 그 양과 빈도수가 무척 많았음에도 그 소요기간은 꽤 길었다. 책이 워낙무게가 나가고 파손되기 쉬운
탓이었다. 운반되는 동안 책의 무게를 줄이고 고객의 취향에 맞게 제본을 조정할 수 있도록, 이른바 제본이 안된
상태의 '낱장 묶음으로'서적상에게 수송되곤 했다. 커다란 보자기 안에 낱장들로 보관되어 전혀 파손 없이 도로나
해상으로 운송되었다. 이때 대형 서적상들이 대개 도매상의 역할도 겸했다.
해마다 열리는 전시장은 서적상들끼리 텍스트를 교류하는 기회가 되었다. 인쇄인, 서적상, 편집자 들은 프랑크푸
르트의 책거리로 일컬어지는 뷔허가세에서 서로 마주치곤 했다.
그곳에서 1562년부터 정기적으로 선보여온 책 카탈로그는 인쇄출판물의 귀중한 자료로서 눈길을 끌었다.
17세기 초부터 프랑크푸르트 전시장은 라이프치히로 옮아갔다.
최초의 실업인 편집자, 크리스토프 플랑탱
당대에 가장 큰 인쇄작업장을 소유하고 있던 크리스토프 플랑탱은 새로운 활로 개척에 앞장선 채 세계의 산 증인
이었다.투렌에서 태어난 그는 국제적으로 번창하던 도시 앙베르에 정착하여 1555년부터 출판일을 시작했다.
국가를 위해 일하면서 국왕 펠리페 2세의 수석 식자공 지위를 획득하는 동시에 에스파냐와 그 식민지 국가들에서
수요되는 전례서들의 출판 독점권을 따내기도 했다.
플랑탱의 활동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인쇄소에서는 24대의 인쇄기계가 쉴새없이 돌아갔고, 작업공은 100명
가까이 되었다. 그의 인쇄소 조직망은 세계적인 규모로 뻗어갔다. 가장 장엄한 출판물은 총 여덟 권의 5개어-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람어, 고대 시리아어-로 된 <다국어 성서>로서, 인쇄에만 4년이 걸린 활판술의진정한 쾌거
였다. 34년간 플랑탱은 1500권이 넘는 작품들을 출간했는데,이런 의미에서 그는 최초의 실업가 인쇄인이었던 셈
이다.
플랑탱이 손을 놓은 뒤로는 그의 사위 모레투스가 장인의 뒤를 이어 19세가 까지 그 계보를 이어왔고, 그 인쇄소
건물은 오늘날 박물관이 되어 있다.
책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출판물의 꾸준한 증가와 법규의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책을 만드는 직업들이 체계회 되었다.
그들의 구조가 십장들과 직공들, 견습공들의 특수한 단계를 형성하는 여는 전문 직종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던 것은 새로운 사상의 접촉에 적극적이었고 권리 주장이 강했던 때문이었다. 견습공은 일반적으로 젊은
이들로 충원되었고 2-5년 동안 십자이 집에서 함께 지냈다. 급료 없이 의식주만 해결되는 견습공은 가장 혹독
하고 견디기 힘든 일을 주로 밭아서 했다.
일단 직공이 된 후에는 대개가 외국인인 또 다른 십장드릐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다소 오랜 기간을 작업장에서
버내면서 훈련기간을 마쳤다.
직공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일거리를 찾았다. 인쇄감독 이른바 현장감독이나 식자공 또는 인쇄공이 되는
것이다.
숙련된 인쇄장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길고도 험한 것은 인쇄기와 활판시설을 구입할 비용이 엄청나기 때문
었다. 게다가 눈부신 성공을 거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 십장이 되는 것이 곧 부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
었다.
작업에 대한 용기와 자긍심
리옹이나 앙베르, 제네바에서 활판 직공이 되면 하루일과는 아침5-6시부터 시작되어 저녁 7-8시에 끝났다.
일이 중단되는 것은 점심식사 때문이었다. 인쇄기를 돌리는 직공들에게 요구되는 작업 할당량을, 하나의 낱장을
찍는 데 대략 20 초가 걸리는 데도 하루에 3000장에 달했다.
그뿐인가, 상당 부분 주문량에 의존해서 일하는 분야는 장기근속을 장담하기란 거의 힘들었다.
그러한 열악한 상황들, 자격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박한 급료들, 또 일반 직공들과 무보수 견습공들 사이의 대립
등은 부당한 경쟁관계를 이루었고, 수많은 사회적 충돌을 빚는 요인이 되었다. 리옹이나 파리, 앙베르, 프랑크푸
르트에서 일어난 숱한 동맹파업은 16세기 이후에 전개된 인쇄술의 역사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직업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그들은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대부분 인쇄감독들이 확인하곤
하던 쪽구성, 교정쇄 수정등은 문어에 대한 뛰어난 기량뿐만 아니라 라틴어나 그리스어에 대한 식견도 필요했다.
수적을 가장 많았던 소규모 작업장들 내에서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 일이 그리 고된편은 아니였다.
인쇄공들은 작업이 진행되는 곳마다 일일이 따라 다녀야했고 간혹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책을 출간하다.
최초의 인쇄 책자들이 대부분 고대의 텍스트들을 재판한 것이었다면, 르네상스 시기에는 단연코 새로운 작품들의
수가 늘어났다. 당대 초기부터 사상들의 검열과 경쟁관계가 발전함으로써 점차 특허개념이 부각되어 모든 출판물
들에 전제조건이 되었다. 특허 개념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위임받은 인쇄와 출판 및 텍스트의 보급에 대한 임시
독점권, 이 두가지의 동시 허용과 관련되어 있었다.
아마도 재정적인 혜택을 받게 되는 저자나 서적상, 인쇄인에게 그 특허권이 주어졌을 것이다. 저자들은 저작권만
으로는 좀처럼 먹고 살 만한 환경을 마련할 수 없었다. 때문에 많은 저자들이 또 다른 수입 원천(법률이나 교회,
교육에 관련된 일)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작품들이 문예 학술 옹호자들의 지원으로 출간 될 수 있었다.
판매 예측량의 따라 판매 부수는 달라졌다. 대형 서적상들만이 수천에 달하는 인쇄 부수를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처럼 많은 부수를 인쇄하는 일은 당대의 책들처럼 판매고가 확실한 작품에 한해서만 허용되었을 뿐,
나머지 책들의 인쇄 부수는 그에 훨씬 못 미쳤다. 충분한 학술서나 대단히 전문적인 작품의 경우에 500-1000부
정도였고, 비교적 폭넓은 대중을 겨냥한 작품의 경우에는 1000-2000부였다.
르네상스와 새로운 구조
1520-1525년 경까지 책은 외형적인 측면에서 고서적과 매우 흡사했다. 이 시기 이후부터 중세적인 체제에서 탈피
해 새로운 형태를 창안하는 경향을 보였다. 쪽 구성은 더 여유 있게 정돈되었다. 텍스트들은 더 다양한 활자들이
섞이면서 체계가 잡혔다.
독서를 훨씬 수월하게 해주는 구두점이 등장했고, 음성학적 가치를 지닌 새로운 활자들, 즉 악센트가 있는 모음,
세디유(모음a, o, u 앞의 c 를 [s]음으로 발음하게하는 기호;역주), 분음부호, 생략부호가 만들어졌다.
중세 본사본들 본떠 인쇄인들은 작품 끝의 판권에 책의 신원(저자나 번역자의 이름, 인쇄인과 인쇄 날짜와 장소)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수록해 놓았다.
이러한 정보들은 증보판 출판에 앞서 동일한 제목의 책이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하도록 점차 작품 첫머리로 옮겨져
체계적이고 정돈된 양식을 보이게 되었다.
이렇게 헤서 속표지가 탄생했는데, 주소와 특히 사명도안도 함께 들어가는 터라 서적상으로서는 선전의 한 수단
으로 한층 신경을 써야할 부분이었다.
초기에는 거의 장식이 없었던 속표지는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당대의 건축물에 목판에 풍부한 장식을 새겨 인쇄했다.
책은 속표지와 책 앞부분의 체계화라는 새로운 구조를 채택했다. 또한 쪽상단 마다 표제가 반복해 실리면서 전체
적인 가독성에 도움을 주었다. 로마 숫자로 된 쪽수 매기기(낱장들마다 번호 붙이기)는 당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목차들의 나열이 가능한 아라비아 숫자로 대체되었다.
부활된 활판술
최초로 인쇄책자들에서 사용되는 서체는 수적으로나 다양성에서 아직은 필사본을 충실히 따르려는 경향이 강한
활자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인쇄공들이 조판 시간을 벌려면 서체의 수를 줄여야 했다.
독일에서는 여전히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 곧고 정확한 서체인 고딕체를 고수했다. 또한 인문주의 완벽한
표상이 되어 그 무렵까지 서적인 텍스트들을 인쇄하는 전유물이 되다시피 했던, 일명 로마체는 균형 잡히고 둥근
모양의 서체도 사용했다.
제프루아 토리가 <샹플뢰리>를 제작했을 때 그랬듯, 활판술 완성에 고심했던 이문주의자 인쇄인들은 글자들에
적용시킬 수 있는 가장 조화로운 비율을 모색해 갔다.
로베르 에스티엔의 협력자로서 일련의 로마 활자들을 만들어냈던 클로드 가라몽은 1544년 이래 판각사 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새로운 서체들이 꽃피면서 한 작품 내에서도 엄청난 차이를 가져왔고 각기 다른 부분
들을 시각적으로 차별화하는 데도 효과를 줄 수 있었다.
바야흐로 상징의 시대가 도래하다.
책 장식은 비교적 풍부한 다양성을 계승했다. 목판술 덕분에 문자 테두리 장식들, 여백의 컷들, 꽃무늬 장식들이
일반화되었다.
텍스트의 중간에 이따금 삽화들이 들어가곤 했다. 인문주의자 인쇄인들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협조를 받았는데,
그 예로 프로벤은 한스 홀바인과 우르스 그라프에게 작품을 의뢰햇다. 그 예로 프로벤은 한스 홀바인과 우르스
그라프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1499년에 알도 마누치오는 가장 유명한 작품중의 하나인 <히프네로토 마키아>또는
<폴리필의 꿈>이라고 하는 역사서를 출간했다. 과학기술은 소개하는 책, 그리고 식물학이나 건축학, 또는 지리학과
학문도 차츰 발전 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림이 부활된 이러한 전후 맥락에서 전대미문의 장르가 꽃피게 되었다. 바로 상징적인 책들이었다.
1531년에 르네알시아가 고안한 상징적인 책들이었다.
1531년에 르네알시아가 고안한 상징적인 책은 텍스트와 그림의 긴밀한 결합을 통해 다소 난해한 명구를 이해하
는데 필요한 두가지 요소를 동시에 수용하고 있었다.
거의 뜸해진 목판은 간간이 대중문화 작품 장식에 곁들여지곤 했다. 당대 말에는 다른 유형의 작품들을 위해 동판
인쇄의 등장이 불가피했다. 끌을 시영하녀 음각으로 판 동판에 잉크칠을 한 다음 문지른다. 그리고 인쇄할 텍스트
들을 위해 사용되는 다른 인쇄기에 낱장을 올려놓고 부수들을 찍어낸다. 이러한 기법을 통해 목판보다 한층 정교
하고 훨씬 다양한 색조의 그림을 얻을 있었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충돌 후 , 출판계는 위기를 겪는 듯했다. 종교작품들로 포화상태였던 시장은 보급에
제동이 걸렸고, 내적 균형에도 차질을 빚게 되었다.
게다가 정치적 절대주의가 많은 나라들을 장악하면서 옹색한 규제를 동해 출판 관련 직업을 억압하고 모든 혁신적
사고들을 탄압했다.
제4장 검열의 시대
지속적으로 세계 정복에 나선 인쇄술을 1550년 무렵에는 러시아에 뿌리를 내렸고, 16세기 말 중국과 일본을 거쳐
1638년에는 미국(케임브리지에 스티븐과 매튜 데이의 인쇄작업장이 있었다.)에까지 도달했다.
그럼에도 유럽은 꾸준히 출판 관련 직종들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논쟁의 위력이나 사상적 동향을 확대시키는
능력을 여실히 입증해 보였다.
'좋은' 인쇄인과 '나쁜' 책
1639년에 루브르 왕립인쇄소(현재 프랑스 국립 인쇄소의 전신)를 설립하면서 이미 리슐리와는 독점 출판권을
얻으려는 소망을 품어왔다. 어찌 되었든 그는 최신 설비를 갖춘 인쇄 작업장을 신망 있는 인쇄인 세바스티앙
크라무아지의 지휘 감독 아래 맡겨놓았고, 그러한 환경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을 출판할 수 있었다.
또한 리슐리는 루이 13세 당시 재상의 권한으로 신임할 수 있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최고의 인쇄인'이라는 자격증
제도도 발전시켰다.
루이 14세가 즉위하면서 프랑스에서 승리를 거둔 정치적 절대주의는 벌써부터 골칫거리로 거론되어 오던 출판
관련 직종들을 수하에 거느리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럽 모든 국가-그것이 카톨릭 국가이건 프로테스탄트 국가이건 간에-의 권력층은 종교나 윤리
적인 문제와 정부 당국의 이념과 시책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른바 '악서'들을 퇴치할 목적으로 일련의 조처들을 취해
왔다.
출판을 다루는 기술: 특허권에서 '판권 조례'로
콜베를는 빈틈없는 사람이었고, 출판에 관련된 직종들을 수하에 거느리는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1667년부터 파리는 감시의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사실 그 동안 인가를 받은 발행인들이나 인쇄인들의 수가 너무 많았던 게 사실이었다. 인쇄 장비들의 판매가 규제
되었고, 책 수하물들은 감시되었고, 인쇄소들은 철저히 수색당했다. 위반사항이 드러나면 바로 바스티유 행이었다.
이 출핀 정책은 '훌륭한' 발행인 들에게만 관대했고, 곡 필요한 특허권 부여라는 점에서도 감시가 훨씬 수월한 파리
인들에게 명백히 편의를 제공해 줌으로써 지방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안겨주었다. 신간이 부족했던
지방 발행인들을 금서를 제작하거나 위본을 제작하는 부정한 절차들로 이에 대처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밖에
없었다.
1701년 출판국의 신설로 규제가 점차 엄격해졌는데, 특히 네덜란드 같은 외국과의 경쟁관계를 이용해 프랑스
인쇄인의 목을 조였다.
영국의 출판 정책도 프랑스와 같은 편중된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스튜어트 왕가는 이미 검열제도(특허법안)를
강요하여 왔으나, 이 검열제도는 1709년 저작권 보호를 위해 최초로 실시된 '판권조례'의 등장과 함께 사라졌다.
당대 초기부터 이탈리아의 출판은 쇄국정책을 쓰면서 수출을 거의 하지 않고 몇 년간 리옹 출판물을 중계하다가
이후 제네바 출판물과 거래했다. 차츰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유럽의 책 상권을 장악해 나갔다.
네덜란드 출판의 성공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자유가 꿈틀대고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둔 서적상 가문으로는 대학
중심가였던 라이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엘체비에가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유럽 시장 공략을 출발점으로
삼았고, 이를 위해 작은 판형(12절판)을 제작해 매우 저렴한 가격을 책정했다. 종이가 무척 비싸던 시절에 질적
으로 우수하면서도 당대로서는 매우 생소한 책들이 처음으로 시판된 것이었다.
엘체비가에는 대학인들이 교정한 고전 텍스트를 간행했고,1626년에는 오늘날 여행 지침서의 원조인 <레퓌블리크>
시리즈를 내놓았다.
30년 전쟁으로 출판계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그들은 전유럽의 우수한 연락망들을 활용해 프랑스와 영국에서
성공을 거둔 작품들의 고질적인 위본 제작에 대처했는데, 그 예가 1638년에 출판된 <르시드>였다.
네덜란드는 낭트 칙령의 폐지(1685)로 프랑스 왕국 밖으로 내몰린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환대받는 당이기도 했다.
20만이 넘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자국을 떠나오면서 프랑스어로 된 서적을 출판하는 다수의 출판사 시설이 네덜란드,
영국, 제네바, 베를린 등지의 인접 국가에 들어서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서적업을 꽃피운 도 다른 분야로는 암스테르담의 지리학자이자 편집자였던 블라외의 지도들과 기념비
적인 지도서들은 꼽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플랑탱이 출간했던 이전 세기의 오르텔리우스나 메르카토르를 압도
하는 플랑드르 지도제작과 학파를 계승했다.
위본과 해적판
당대 중반기부터 오랫동안 관행이 되어온 위본이 다시금 활개치기 시작했다. 위조본 제작은 수익성 있는 사업이었다.
성공한 작품을 위조해도 작가에게 지급 되는 보수는 전혀 없었을 뿐더러(허술한 경제구조였다!), 종이나 활판활자
들의 질도 형편없이 떨어졌다. 이런 시도에는 여러 방법들이 있었다. 속표지에서 서적상의 주소를 허가받지 않고
동일하게 불벌 복재하거나, 원본과 일치하지도 않는 사본을 구해 가짜 주소를 실어서 재 인쇄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출판 규제로 허덕이던 지방 서적상들이 파산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편으로 위본을 택했다.
1660-1670년까지 남프랑스와 이탈리아, 에스파냐 등지에서 줄곧 번창했던 라옹의 서적상들마저도 그런 일에 몰두
하게 되었다. 프랑스 왕국에서 교황으로 둘러싸여 있던 아비뇽 역시 런던이나 제네바, 리에주, 쾰른, 암스테르담 같은
외국의 수많은 도시들과 공조하여 이 분야에서 전문성을 띤 도시가 되었다.
전적으로 불법인 또 다른 행위는 금서 출판, 즉 특허를 받지 못한 해적판들의 출간이었다.
검열의 눈길을 피하여 많은 신간들이 어디서나 비밀리에 인쇄되고 있었다.
저자의 이름은 당연히 누락되었고 서적상의 주소도 대부분 조작되었다.
위본과 다를 바 없이 불법 인쇄된 이 책들 역시 대단한 상상력을 입증해 보였다.
특히 쾰른, 피에르 마르토 인쇄소에서 그렁 경우를 심심찮게 몰 수 있었다.
정기간행물의 탄생
최초로 시도된 정기간행물은 1605년에 플랑드르에서 아브라함 베르벤호이 격주로 발간한 <니우베 티딩게>였다.
이어 바젤, 프랑크푸르트, 런던(1622년의 <위클리 뉴스>)등지에서 발기인들의 수가 늘었다.
프랑스는 리슐리외가 1631년 3월 30일에 <라 가제트>라는 정기 간행물을 세상에 선보이게 되었는데, <라 가제트>
의 편집 지휘는 그보다 몇 개월 일찍 창간된 <누벨 오르디네르 드 디베르 앙드루아(각 지역 일간 뉴스)에 심혈을
기울였던 테오프라스트 르노도가 맡았다. 4페이지로 된 <가제트>는 책과 유사한 와 형을 취했고, 특히 외국에 관한
기사들을 실었다. 이처럼 최초의 신문으 프랑스 국정의 공식 기관지 성격을 띠었다.
몇 년 후, 당국의 엄중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정기간행물의 수는 증가했으며, 이젠 짤막한 단신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논평도 함께 실었다. 몇몇 신문들은 전문화 되었고, 1665년에 콜베르가 창간한<즈르날 드 사방(지식인들의
신문)> 처럼 간행 도서목록에 대한 정보를 다루어 높은 인기를 얻은 신문도 있었다.
18세기, 특히 영국에서 신문은 정치적이고 지적인 논쟁을 다루는 매개체가 되었다. 1702년에는 영국 최초의
일간지<데일리 쿠란트>가 창간되었고, 프랑스에서는 훨씬 뒤늦은 1777년에 <주르날 드 파리>가 등장했다.
도부상들의 '카나르"
책을 소유하지 않아도 인쇄 책자를 접할 기회는 았었다. 시골 거주민과 도시거주민의 경우 각기 양상은 달랐지만,
굳이 사람들을 끌어모으지 않더라도 교회나 철야 모임 같은 기회를 이용할 수 있었다. 처음엔 그림으로 사람들을
유인했는데, 정치선전 도구나 기독교적 전파물, 오락거리가 될 전단들을 상황에 따라 교회나 집담벼락, 작업장 등에
붙이곤 했다.
16세기부터 도시는 하루 기한의 <오카지오넬>또는 <카나르>라는 소책자 자료물들의 유통 장소가 되었다.
카나르는 보기 좋게 삽화를 넣어서 단순한 낱장이나 크기가 작은 브로슈어(가제본) 형태로 거리에서 판매되었으며,
거기에는 여론을 알리는 사건들이 기술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왕의 도시 입성이라든가 황태자의 탄생, 고가의 무기들, 기적사건 자연재해나 '다양한 진상들'이라는 제목
하에 세상의 이목을 끈 사건들이 실려 있곤 했다,
이 소책자들을 배포했던 도부상들은 시골뿐 아니라 도기 당국의 추격을 당했고 점차 통제하는 데 애를 먹이는 요주의
인물들이 되었다. 도부상은 도시의 부유한 서적상 유통망이 없었기 때문에 도부상은 종종 아주 외딴 지역에까지 물건
을 나르느라 정기적으로 동일한 코스를 다녀야 했다.
푸른 소책자의 연감 달력들
도부상이 짊어지고 다닌 봇짐 안에는, 다양한 잡화용품이나 그림 외에도 오카지오넬의 뒤를 이어 17세기에 대단한
발전을 이룬 매우 특이한 문학작품들이 들어 있었다. 바로 판형이 작은 소책자들로 표지에 장식이 없고 대개 푸른
색을 띤다고 해서 푸른 소책자라고 불렸다. 이소책자는 1수나 2수를 주고 사볼 수 있었다.
작자 미상의 텍스트들-대개 인쇄인들이 직접 글을 썼을 것이다-의 숫자는 대략 1200권쯤 되었고, 부수에 차이가
있기는 해도 꾸준히 재판되었다. 내용은 감화를 주거나 재미있거나 유익해야 했다.
개중에는 특히 성인의생애를 다룬 종교적인 문학작품도 많이 있었다. 대부분이 전적으로 중세 문학작품들릐 원전에
의존해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온 전설들을 각색했다.
시대상황에 맞게 각색하거나, <아이몽의 네 딸>이야기나 <가르강튀아>의 모험담처럼 세대를 거치면서 호소력을
더해간 작품들은 제목만으로도 확고한 자리매김을 했다. 또한 다수의 서들, 예를 들어 원예관리법이나 의학조치법도
찾아 볼 수 있었다.
연간 달력은 예언서들을 포함해 가장 널리 읽히는 장르가 되었다. 라블레는 1533년 이미 자신의 작품 <팡타 그뤼엘>
에서 예언서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한 바 있었고,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는 가장 빈번하게 재판되곤 했다.
대개의 연감 달력은 읽을 줄 몰라도 이용에는 별 불편이 없었다. 1635년부터 리에주에서 출간된 <마티외 라앙스베르>,
당대 말 바젤에서 제작된 <절름발이 사자>는 유익한 정보들과 점성술이 가미되어 가장 널리 유행했던 연감 달력이
었다.
프랑스의 트로이 지역은 오랜 세월 농촌사회에서 유일하게 현존했던 인쇄불, '푸른 소책자 문학'의 출판 특허 장소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내용이나 보급 경로면에서 푸른 소책자들과 매우 유사한 챕북(가두판매용 책들)들이 유통되었다.
새로운 장르들
책은 인문주의 시대의 개혁적 능력을 다소 상실하는 듯했다. 이제 서점과 인쇄소는 저자와의 생산적인 의사교류의
장이 되지 못했고, 저자들은 오히려 문학계의 화려한 사교장이나 문학적 영광을 안겨줄 몇몇 통로들을 찾았다.
즉, 살롱 처럼 고급스런 대화와 유행이 만들어지던 장소나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한창 성행하였던 아카데미들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런 경향이 참신한 장르의 발전을 저해시킨 것은 아니었다. 종교서들이 아직도
출판물들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화려하게 삽화가 그려진 역사서는 '장엄한 입성'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면서 권력층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또 소설이나 희곡같은 문학적 장르들이 급부상하여 작가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새로운 사회단체가 확립되었는데, 그 상징성을 띤 단체로 아카데미 프랑세즈(1635)가 창설되었다.
오래 전부터 속어로 쓰여 외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풍부한 어휘력을 지닌 희곡문학 작품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셰익스피어)에서 황금시대의 에스파냐(로페 데베가,카렏론)까지 유럽 도처에서 빛을 발했다.
아동문학 작품에서는 몇몇 뛰어난 우화작가(라퐁덴)들의 작품이 두각을 나타냈다.
페로 같은 동화작가의 작품들은 오래된 구전들을 각색했고, 종종 푸른 책자로 출판되어 인기를 끌었다.
인쇄부수와 판형
총인쇄부수는 아직까지 보잘것없이 몇백 부 정도가 고작이었으며, 2000-3000 부를 찍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몇몇 작품의 부수를 살펴보자.
데카르트의 <<방법서설>>(라이덴,1637)의 초판부수가 3000부였고,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편찬한 <<사전>>(파리,
1685)은1500부였다. 종교서 중 특히 전례서와 교과서, 대중문학 작품은 전통적으로 총인쇄부수가 훨씬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방시기 변하지 않았다면 책 외형에 조금은 변화가 있었을지 모른다. 큰 판형(2절판)은 특정 종교서나 법류서,
역사서, 사치스런 출판물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활판활자들은 갱시노디기 시작했고 장중한 분위기를 띠게 되어
필리프, 그랑장이 으뜸 로마체 활자를 창안했을 때는 루이 16세 통치기(1702)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훈장용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당시에 작품의 제목들이 매우 길어지고 있던 점도 주목할 만하다.
판화예술
이때에 출간된 책들이 대부분 유실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삽화와 관련하여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거의 전부 동판으로 교체되었는데, 목판은 매우 투박하기로 유명해 책의 장식요소들(테두리선, 글자, 여백의 장식
삽화, 사명도안)에서만 사용되었다.
현대 출판에서 삽화는 대부분 내지 그림에 속하며, 속표지와 나란히 놓인 위치에 흔히 저자의 모습이 실리곤 한다.
실상 당시의 판화예술은 책과는 별도로 고유의 상거래 조직과 더불어 발전했다. 또한 특정 작품들을 진정한 예술가
들에게 의뢰하는 일도 있었는데, 앙베르에서 루벤스는 모레투스르 위해서 작업했고, 프랑스의 자크 카요나 아브라함
보스, 클로드 멜랑, 그리고 라퐁텐의 우화집에 삽화를 그려넣은 프랑수아 쇼보가 그런 경우에 속했다.
18세기, 군주제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사상을 통해서도 재검토 되고 있었다.
인쇄 책자는 인쇄기의 놀라운 발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경쟁상대 없이 계몽주의 철학의 주요 매개체가 되어 유럽의
모든 지적, 과학적 생활의 중심에서 숱한 혁명적 토양을 준비했다.
제5장 최고의 책
계몽주의와 출판의 자유화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프랑스에서 책과 출판계에 가해졌던 속박은 완화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위본의 발전은 독재정치의 무능을 일깨우고 다양한 권한을 이양하는 데 위력을 발휘했다.
1781년 마침내 책에 대해 어떠한 금지조치나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암묵적 승인'이 이루어졌다.
1777년에는 이른바 ;단순한 승인제도'라는 출판 법규가 생겨나 고서들을 공공 재산에 포함시켰고, 마찬가지로
지방 서적상들의 활동에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위본이 전유럽에서 여전히 대규모로 불법 제작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 책들은 외국에서의 출판이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당대 중반기, 에스파냐에서 상업적 출판 자우화 조처들이 생겨나 책 만드는 이들을 고무시켰다. 이탈리아는 '금서
목록'의 탄압이 비교젇 가벼워진 반면(그럼에도 1766년의 금서목록에는 출판물 중 4942부가 금서에 올랐다)오히려
정치적인 면에 치중해 검열이 실시되었다.
검열관들과 철학자들에 대항한 논쟁에서, 암스테르담에 인쇄소를 설립했던 제네바 출신의 마르크 미셀 레(루소와
디드로의 친구이자 편집자였다)나 제네바의 크라메 수사(볼테르의 편집자)처럼 편집인들은 다시금 선택받은 행동
가가 되었다.
새로운 경향들과 번역물들
출판물의 증가는 당대 후반기 20년동안 두드러졌다. 영국은 몇 년간 미국의 식민지 국가들과 인도를 겨냥한 대량
출판 수출국으로 선두를 달렸다.
프랑스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출판량이 세 배로 늘어나 대혁명 시대에는 한해 총계가 약2000권에 달했던
반면, 네덜란드는 여전히 프랑스어로 된 작품들의 출판이 강세를 보이면서 본토 발행인들과의 경쟁 속에서 유럽
전역으로 책을 공급하였다.
당대 중반기까지 침체되어 있던 에스파냐의 인쇄소는 페르디난도 6세에 이어 카를로스 3세의 보호 정책에 힘입어
진정한 쇄신을 이루었다.
통계에 따르면 마드리드에 1770년 113대였던 인쇄기가 1792년에는 209대에 이르렀다. 이탈리아는 독자층이
두터운 나라였고, 프랑스에 비해 덜 편중되어 있기는 해도 나폴리부터 베네치아까지 여전히 막대한 생산량을 보였다.
실제로 유럽 전반의 출판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점차 팽창해 갔던 게 사실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일어난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먕전쟁, 에스파냐 계승전쟁,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1756~1763년 사이의 7년전쟁 들이 종결되고 나서부터 상업도 이득을 보게 되었다.
종교 관련 서적의 출판은 전반적으로 많은 출판 부수를 기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침체되고 있었다.
대신 새로운 범주에 속하는 책들이 부상했다. 일례로 과학서가 전보다 흔해지고 이해가 쉬워진데다 삽화도 더욱
풍부해졌다. 출판의 모든 영역에서 라틴어가 퇴보하고 속어가 훨씬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1749년부터 왕실인쇄소에서 출간된 조르주 뷔퐁의 (자연사) 전38권은 재판본인쇄와 함께 위본들의 등장이 입증
해 주듯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책은 대다수의 대중화된 출판물들의 표본이 되었다. 과학적인 진보와
발견의 경향, 새로운 문학 장르들의 출현이 출판에 박차를 가하면서 번역자들이 수행해야 할 역할이 커졌다.
머나먼 대지에의 유혹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점은 머나먼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영역에 대한 탐색에 출판계가 부응하면서 여행서와
다양한 과학적 탐험 이양기들을 다룬 서적의 출판이 확고한 위치를 굳히며 급증하였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 이국정서였다.
한편 이 시기를 특징짓는 경향으로는 각궁게서 위대한 소설문학들이 탄생되고 출판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7세기초, (돈키호테)의 출간은 훗날 근대 소설 탄생의 상징적 작품으록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세르반테스이 작품
들은 유럽 전역에서 번역되었다. 독일의 그림멜스하우젠의 (짐플리치시무스)(1669)처럼 몇 년간 각 나라들은 전통
적인 악당소설이나 희극을 각색해서 연재했다.
17세기에 이미 프랑스에서는 약 1400권의 소설들이 출간되면서 소설은 계몽주의 시대에 이례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볼테르의 (캉디드)는 위본들이 17가지나 제작되어 단연 그해(1759) 화제이 출판물이 되었다.
새뮤얼 리처드슨의 (파멜라), 루소의(신엘로이즈), 괴테의(젊은 베르테릐의 슬픔)등이 대성공을 거둔 작품들에 속했고,
거의가 여성층인 새로운 독자들의 확보에 기여했다. 영국의 소설은 당대 말기에 와서 유행해 전유럽에서 번역되었다.
'백과전서'
계몽주의 시대의 위대한 작품은 단연 디드로와 달랑베를가 편찬한 사상사의 결정판(백과전서)였다.
이 작품은 제목이 주는 강렬한 인상말고도 중요한 선례를 남겼는데, 이는 오로지 편집자들의 매우 적극적인 역할
분담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
백과전서)를 영어로 번역할 야심 찬 계획을 세웠던 이는 파리의 서적상 르브레통이었다.
이것이 1728년에 영국에서 출간된 백과사전인 체임버스의 (사이클로피디아)이다. 각국에서 출판된 총부수가
(백과전서)가 불러일으킨 반향을 여실히 입증한다.
초판이후(1751~1772) 4235부를 찍었는데, 스위스어 판과 1771년과 1782년 사이에 가격을 조금 하락시켜 소책자
로 출가된 이탈리아 판까지 합하면 통틀어 대략 2만 5천 부 정도가 되었다. 그 절반 이상이 프랑스가 아닌 외국에서
팔렸다.
(백과전서)는 상업적 선전 방식들로 제작되었다. 즉, 막대한 계획에 필요한 자금모금을 위한 구독신청금 예탁, 선전용
전단 배포, 벽보 활용, 신문광고, 외무사원 파견, 구독신청자들에 대한 선물 증여, 백과사전들이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앞장서서 선처를 베풀었던 서적상들의 대거 참여 등. 이런 방식의 도입은 프랑스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영국은
이미 출판에 이용해 오고 있었다.
언론의 발전과 여론의 탄생 : 보다 폭넓어진 대중
인쇄 부수가 점차 증가하는 예외적인 책들도 있었지만, 원가면에서 종이값 부담이 상당히 컸기 때문에 아직은 최저
부수를 감안해 신중을 기해야 했다. 아마도 문자교육의 향상으로 잠재적인 독자수는 꾸준히 증가했을 것이다.
계몽주의의 전달자이자 잦은 논쟁의 자으로서 언론의 발전은 여론의 탄생과 강렬한 지적 호기심의 증대에 크게
기여했다. 프랑스어-당시 유럽의 교양어였다 -제목을 단1267권 중에서, 구체제(앙시앙레짐, 프랑스대혁명 전의
체제:역주)에 대해 논한 1127권은 18세기의 출판량 가속화에 밑거름이 되었다.
전문성을 띤 신문들(문학, 의학, 법학,경제 등)의 다양화는 지적 생활의 풍요로움을 시사했고, 발행 부수의 증가는
저널리스트들의 영향력이 커졌음을 의미 했다.
1770년경 프랑스에서 발행되던 심문 중 가장 중여한 세신문(메르퀴르, 랑네리테레르, 라 가제트 드 프랑스)의 인쇄
부수는 1만 부를 상회하였다. 분명 프랑스 대혁명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색채를 띠는 제호들이 이례적으로 증가하는
계기를 제공했을 것이다. 한편 독일의 (함부르크통신)이라는 신문은 19세기가 막 시작될 무렵 그 발행 부수가 5만
부에까지 이르렀다.
도서관 시설의 확충 : 독서의 새로운 장
18세기는 열광적인 독서에 휩싸인 시기였다. 집에서 독서하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앗지만 대중 독자들이 늘어나면서
도서관들도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이 방면의 선구자 격이었던 영국 같은 몇몇 나라의 도서관은 대단히 앞서가고
있었다. 18세기에만 해도 수백 개의 도서관들이 도서 대출 전문기능을 수행했고, 커피 하우스들은 보다 다양한 문학
장을들을 접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했다.
독일 역시 대출 도서관들이 증가해서 대중의 독서 취미를 한층 유발시켰는데, 소도시들에도 도서관이 생겨나면서
사람들은 저가로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비영리 목적으로 자체적으로 관리했던 '독서단체'들은 독서뿐 아니라 사교의
장소도 되었다.
대혁명 직전의 파리는 대부분 수도사들이 이용했던 18개의 도서관을 점차 개방해 사용했고, 16개의 지방 도시들은
도서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도시마다 뿌리내리기 시작한 '책 대여점들'과 '독서실들' 덕분에 책을 접하기가 보다
쉬워 졌다.
개인들이 운영했던 시설들이 즉석에서 독서할 수 있게 하거나 책과 신문들을 하루 동안 대여해 주는 일을 했기 때문
이다. "작가라는 직업은 그것이 생업이 되지 않고서는 존경받을 수도 명성을 얻을 수도 없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장 자크 루소) 유럽이 빛나는 정신공동체인 문단에 소속된 박가들의 지위는 오랫동안 대단히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특허제도와 마찬가지로 위본의 발달로 그들은 출판과 재판에 관련된 주요 부분에서 실질적인 권리를 행사
하지 못했다.
충분한 물질적 보상도 없는 상태에서, 많은 작가들은 정부가 될법한 문예학술 옹호자와의 1대 1의 종속관계,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비서나 가정교사로 채용되어 제공해 주는 후원자에게 예속된 채 생활해 갔다.
이런 경향은 특히 루이 14 세의 치세 동안 비일비재했지만, 일부 유명한 희곡 작가들은 상연에 따른 과세를 지불
하기도 했다.
시대적 흐름에 맞춰 작가활동의 전문성과 작업에 대한 보상 원칙을 인식시키려는 경향이 구체화되었다.
1710년부터 영국에서는 저작권 개념을 편집자가 아닌 작가에게 적용하여 문학작품의 소유권을 인정했다.
프랑스의 볼테르나 루소처럼 이름있는 작가나 철학자들은 모든 종류의 상업적 활동을 기피하고 서적상들에게 자신
들의 육필 원고를 직접 팔아서 집필로만 생계를 꾸려가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문학작품의 소유권 개념이 공공연
해진 것이었다.
1777년의 프랑스 입법은 특허권의 유효기간을 제한하면서 작가의 저작권을 최초로 공식화하는 법안을 구성했고,
이는 1793년의 법령으로 이어져 19세기 입법의 기초를 이루었다.
언론이 크게 발전하고 사전류의 출판이 성공을 거두자 작가에게 원고료가 지급되었고, 그로써 저술과 생계수단을
결부시키는 작가들이 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매력 있는 책
18세기는 대형 총서들에 대한 선호와 애서 취미가 발전했는데, 이는 우아함을 강조한 서적 예술이 꽃피는 근간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부세나 우드리, 코친 같은 위대한 화가들이 서로 경합을 벌였다.
인쇄인들은 카를로스 3세의 궁정을 장식한 에스파냐인 호아킨이바라처럼 완벽하게 평가된 작품들을 구현하는 데
열의를 다했다.
작은 판형과 얇은 책들의 출판이 증가해 드디어 소책자 제작에 이르렀다. 또한 당시 장서들 또는 전집이나 선집으로
불렸던 8절 판형의 총서들의 시대가 도래했다.
책의 외형에서도 변화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전세기의 간헐적으로 등장했던 속표지 앞장에 실린 자긍ㄴ
글자의 표제가 일반화되었다. 그와 더불어 제목의 길이는 점차 짧아졌고 흔히 빨강과 검정색으로 인쇄되었으며,
사명 도안이 차지하는 공간은 갈수록 좁아지면서 나중에는 없어지거나 단순한 꽃무늬로 대체되었다.
텍스트의 전개에서 사용했던 여백의 방주는 쪽 하단의 각주들로 자 리를 옮겼다.
그리고 여기 색이 가미되다
일부 대중적인 출판물들의 인쇄에서는 아직도 목판술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 전 세기 후반에 널리 유행했던 뷔렝
기법(동판화의 한 기법 : 역주)이나 동판술이 있었음에도 삽화는 거의 전적으로 오목판화로 제작되었다.
당대 말에 와서 삽화에 색을 가미한 책이 등장했다. 그때까지 우표나 책을 제작하는 데 쓰였던 채색화는 견본마다
일일이 직접 색을 칠하거나 형판에 채색하는 방법으로 얻어졌다.
16세기에는 두 가지 색 이상을 이용하여 목판인쇄를 하려는 시도들이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행해졌는데, 한 가지
도안에 여러 가지 색판들을 사용했던 것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18세기 초에 와서 독일인 야콥 크리스토프 레플론은 파랑, 빨강, 노랑의 기본 3색에서 비롯된 3색에서 비롯된 3색
판법으로 인쇄 체계를 수정했다. 이로써 세개의 연속판을 이용한 다양한 색들의 응용으로 모든 색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 다.
무엇보다도 고티에 다고티가 이 기법을 서적 인쇄에 응용해 3색판법 인쇄의 서막을 알린 것은 인쇄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진보였다.
다양한 활자 총목록
세기말 이전까지는 제작 여건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당시는 앞으로 추구 해갈 역동성을 탐색하고 있었고,
그런 시도는 다음 세기에야 결실을 맺었다.
활판술 분야에서 진보적인 사고를 지닌 인사들이 매우 많이 등장했다. 영국의 인쇄인인 존 바스커빌이 새로운
활자를 창안했다면 이탈리아의 보도니는 로마체 활자들로 책의 미학을 발견했다.
디도 일가는 18세기 초 활동을 시작해 당대 말까지 가업을 이어갔고, 인쇄와 발행에서 enFUT한 발자취를 남겼다.
디도 일가의 프랑수아는 화려하게 삽화를 넣어 프레보 사제의(여행의 역사)를 출간했고, 그의 아들 프랑수아
앙브루아즈 (형 디도)는 신고전주의(이것이 곧 활자체의 명칭이 되었다) 양식으로 주목되는 탁월한 활자들을 만들
었을 뿐 아니라 인쇄기계를 개선하려는 연구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피에르 프랑수아(동생 디도)는 제지공장과 제련소 등을 설립했다. 프랑수아 앙브루아즈의 아들 피르맹은 연판
(활판에서 뜬 지형에 납, 주석, 알루미늄의 합금을 녹여 부어서 만든 인쇄판, 스테로판이라고도함 : 역주)을 최초로
사용했다. 디도 일가의 인쇄소에서는 베르길리우스, 라신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주목할 만한 고전과 성서가 출판
되었다.
편집자의 제국
릴루아 샤를 조세프 팡쿡크의 파리 상경은 전혀 새로운 유형의 편집자의 전혀 새로운 유형의 편집자의 등장을
의미했다. 그것은 언론과의 결합을 꾀하고, 수백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막대한 부를 추구하는 편집자였다.
세속적으로 유능한 인물이었던 그는 사업상 절호의 기회를 포착해 자신에게 이득을 가져올 후 원자들과 관계
있는 최고의 지식인들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았다. 그는(메르퀴르 드 프랑스)(발행 부수 2만 부)나 (주르날 드
제네바)(발행 부수 8300부) 같은 유력한 신문들을 수하에 넣어 프랑스 최초의 언론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광고의 힘을 빌려 신문에 자신이 출간해낸 간행물들을 선전했다. 또한 많은 출판물을 효율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서적상들이나 스위스 같은 외국의 인쇄인들과 협력하여 기업연합(컨소시엄)을 설립하였다.
그는 또 중요한 '소속' 작가들과 연계하여 신간서와 대형 기획편집물들에 투자했으며, 계몽주의 철학자들과는 친분이
두터워서 (백과전서)를 출판할 때는 원고 청탁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추 그는(주제별로 정리한 체계적 백과전서) 출판에 착수했고, 디드로에게 원고를 의뢰하여 이전 작품을 훨씬 능가
하는 사전들을 만들려고 했다.
권리를 되찾은 책
프랑스 대혁명은 동업조합과 책에 대한 특허권, 인허가 제도들을 폐지하면서 미흡하나마 출판에 자유를 되돌려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인권선언 제 11조에는 이렇게 명시되어 있었다. "사사오가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의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출판 할 수 있다.
다만, 법의 규정에 따라 이 자유를 남용할 때에는 책임을 져야한 다."
어렵게 획득한 이 새로운 여건은 책의 수효를 증가시켜온 기술적인 진보로 유지될 수 있었다. 3세기 동안 인쇄술의
보급이나 제작방식에는 변화가 없었고 줄곧 구텐베르크가 전수한 방식에 의존해 오고 있었다. 권지, 연판(스테로판),
금속인쇄기나 석판 제작도구 같은 생산 발명품들은 1830년 이후 출판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책은 이미 또 다른 결정적인 발명품의 교체를 초래했다. 책의 사회적 위상도 변하고 있었다. 검열로부터
자유를 획득하고, 새로운 대중들로 유통되고, 지구 전체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형식과 내용의 놀라운 다양 서을 입증
해 오면서 책은 이제 경쟁 상대 없는 매스커뮤니게이션의 필수적인 수단이 되었다.
총체적 지깃을 제공했던(백과전서)의 맥락에서, 책은 사회개혁에 없어서는 안 될 탄약고들처럼 이제 세상을 이해
하는 일뿐 아니라 변형시키려는 의도를 아울러 제시할 것이다.
기록과 증언
인류의 공동 유산을 전하려는 책에 얽힌 노동과 고통, 낭만과 추억, 그리고 미움과 사랑의 모든 것.
스크립토리움
6세기부터 인쇄술의 발명이 있기까지 필경 수도사들은 책을 만들었던 중요한 장인들이었다.
브누아 성인의 계율서는 필사본 제작방식에 따른 지침을 들려주나 어느 장소에서 필사가 행해졌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도원에서는 필경사에게 작업할 방을 필히 내주었을 것이다. 다름아닌 스크립토리움
이었다.
필경사들에 대한 묘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텍스트를 베껴 쓰는 장소인 스크립토리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생갈 수도원의 건축 도면들
1830년경 건립된 생갈 수도원의 유명한 건축 도면을 통해 스크립토리움이 수도원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장방형이 이 방은 도서관으로 쓰이는 층계가 동쪽 성가대의 북쪽으로 통하는 1층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국 교회 건물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반면 같은 동쪽 성가대의 남쪽에 자리한 제의실 반대편으로
일련이 건축물들이 정확히 평행으로 늘어서 있었고,
서쪽의 외벽으로 통하는 문을 나서면 교회 죄우 익부로 곧장 통했다. 따라서 신성한 문자를 대조하는 일에 전력하는
방에서 일곱 명의 필경사는 모두 바깥이 내다보이는 북쪽과 동쪽 벽을 등지고 중아에 모여 앉아 침묵을 고수하며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무어인의 침략에 직면한 에스파냐 필경사들
10세기 자모라 북쪽, 타바라에 위치한 산살바도르 수도원 스크립토리움에서도(베아투스의 묵시록)의 가장 풀륭한
필사본들의 일부가 필사되어 나오T다.
당시 나라의 많은 지역들을 앏인에게 점령당한터라 아직 피해가 미치지 않은 영토들도 언제 적들이 침입할지
몰랐고, 타바라의 수도원 건물 역시 이런 위기에 처해 있었다. 970년 날짜로 된 (베아투스의 묵시록) 필사본의
세밀화는, 수도원은 방어용 탑루로 둘러싸여 있었고, 제의시간말고도 급박한 위험을 알리는 두 개의 종을 갖추고
있었다. 네 개의 층계 끝에는 망을 보는 울타리가 있었는데 이곳은 이동용 사다리로만 연결되어 있어서 공격이 있을
때에는 사다리를 철수시켜 탑루들을 분리시켰다. 1층 꼭대기에서 양 2층을 연결하는 붉은 기와 건물이 필경사들의
작업장을 가려주었다. 2층에 위치한 스크립토리움 역시 사다리를 통해서만 1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다.
방의 칸막이 반대편으로 높은 단상이 배치된 곳에 두 명의 필경사와 세밀화가가 마주보고 앉아 일했고, 그들 사이에
놓은 낮은 서안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북쪽 수도원에서는
11세기, 투르네의 생마르탱 스크립토리움은 수도원 회랑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열두 명의 필경사들은 거기서 직무
에 적합하게 짜여진 서안을 놓고 정교하게 만든 의자에 앉아 정숙한 가운데 작업에 임했다. 리에주 성당의 스크립토
이움은 생갈 수도원처럼 성당 건물과 직접 통했다. 그 사실은 우연한 사건을 통해 알게 되었다.
1117년아주 찌는 듯한 여름, 천둥이 도시를 울리고 성당 건물 위로 번개가 꽂혀 코슴과 다미앵 성인의 제단 뒤에
있던 성직자가 즉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또 다른 성직자가 십자가상 앞에 무릎을 꿇었고, 이어서 같은 성전 의 입구
를 통해 누군가 스크립토리움에서 뛰쳐나왔다.
은둔자의 작업
성직단체에서 행해온 필사본은 오늘날도 성직자들의 공동체 활동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특정 수도회 단체들은 그들의 이념에 맞게 각각의 특성을 수용하고 있었다.
은둔주의와 고행을 결합한 샤르트르 수도회는 스크립토리움을 인정하지 않았다.
12세기 초에 귀그가 쓴 (관습)에서는 필경 수도사들에게 각각 독방을 주고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필요한 물품을
전부 넣어주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스크립토리움은 2층짜리 작은 집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수도사의 침대와 기도소가 있는 퀴비퀼룸이라는 침실방과 복도로 면한 한갓진 곳 사이에 작은 방을 마련해 그곳에서
작업했다는 것이다.
시토 수도회 경우는 스크립토리움이 공동작업실이 아니었다.
침묵의 계율에 매우 엄격했던 성베르나르두스와 로베스 드 몰레슴 사도회에서는 개별적인 글쓰기 작업실을 따로
두기도 했다.
12세기의 클레르보 수도원에서는 필경사들을 위한 독방 여덟 개가 교회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외벽은 교회의 남쪽 끝 둥근 후진에서 시작되었다.
이 여덟 개의 독방들은 좁은 수도원 경내로 갈라지는 통로에 면하고 있어서 수도원 부속 건 물고 소성당 사이를
포함한 공간을 이어주고 있었다. 자크 스티앙농 (중세의 고문서학),1991년
베난티우스의 책상
중세의 추리소설(장미의 이름)에서 움베르토에코는 대수도원의 스크립토리움과 그들의 열정적인 활동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날이 무척 추웠지만 스크립토리움 안은 꽤 훈훈했다. 스크립토리움이 주방에서 충분한 열기가 올라오는 곳에 자리
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에 대한 보충설명을 하자면, 아래의 네 개의 가마 굴뚝들이 서쪽과 남쪽 탑루에
배치된 두 개의 나선형 계단층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 내부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프립토리움의 큰 거실 반대편 북쪽 탑루에는 계단은 없었지만 벽난로에서 연기가 올라와 적당한 온기를 퍼뜨렸다.
밖의 포장길은 짚더미로 덮여 있어 전혀 소음이 일지 않았다.
가엾은 베난티우스의 서안은 커다랑 벽난로 반대쪽으로 놓여 있어서 누구에게나 제일 탐나는 자리였음직했다.
그 당시 나는 스크립토리움에서 보낸 기간이 짧았지만, 이후 더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지내면서 긴긴 겨울 동안
손가락이 마비될 정도로 뽀족한 편을 쥐고서 서안에 앉아 필경하고, 주서하고, 연구하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를 잘
알게 되었다(보통때도 여섯 시간 글을 쓰고 나면 물집이 생긴 손가락은 참기 힘든 경련이 일었고 엄지손가락은
으스러질 듯 아팠다). 그런 이유로 해서 왜 흔히들 필경사가 옮긴 필사본의 여백에서 고통의 흔적(인내심의 한계
일지도 모른다) 같은 낙서를 찾으려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다행히 날이 어두워지고 있군." "아! 포도주라도 마셨
으면!" 혹은 "오늘은 날은 춥고 햇빛은 약해서 가죽이 온통 뻑뻑하니 도무지 펜이 나가질 않는구나."
속담에도 있듯이, 그들은 세 손가락으로 펜을 쥐고 있지만 온몸으로 고통스럽게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내하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베난티우스의 서안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8각의 안뜰 가장자리에 빙 둘러져 있어 여분으로 보이는
학승 전용의 다른 서안들처럼 비교적 작은 서안이었다. 채식사와 필경사들 전용으로 된 조금 더 널찍한 서안들은
외벽으로 면한 창 아래 배치되어 있었다. 물론 베난티우스도 수도원에서 필사 준비 중인 필사본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던지 독경대를 놓고 작업했던 모양이었다. 서안 아래 낮은 선반에는 제본 안 된 묶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전부 라틴어가 씌인 걸로 보아 취근에 번역한 작품들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모양새를 보아 서둘러 쓰인 듯했고 필경사나 채식가들에게 넘어가 작업을 거치지 않았던게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원고들을 읽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묶음들 사이에는 그리스어로 된 책도 몇 권 있었다. 베난티우스는
독경대에 있는 또 다른 그리스어 책 번역을 이튿날 마무리짓기로 되어 있었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1982년
고귀한 임무
베껴 쓰기 작업은 고행이었다. 수도사는 언제든 범할 가능성이 있는 오류를 경계해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만 했다.
여기 기재된 텍스트는 투르의 생마르탱 수도원 스크립토리움에 소장되어 있다.
교황들의 거룩한 교시들고 더불어 신성한 말씀의 법칙을 옮기려는 자들이 이 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다.
그들은 이 말씀에 그들의 경박한 표현이 섞이는 것을 경계해 손길이 이끄는 대로 쓰는 일을 삼갔다. 작품을 세심하게
수정하는 데 온갖 정성을 다 했고 순간적인 글쓰기이나 정도의 길로 알고 걸어갔던 것이다.
또 휴지부와 각운을 통해 문장의 명확한 의미를 전했으며, 구두점들을 정확한 자리에 표시해서 신심 깊은 수도자들에
앞서 교회의 독자들이 오독하거나 중간에 갑자기 독서가 끊기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거룩한 책을 베껴 쓰는 일은
곧 숭고한 임무였고, 필경사는 그에 대한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았다.
포도나무를 심는 일보다 책 베껴 쓰는 일을 더 원했던 것은 전자는 위를 배부르게 하는 일이요, 후자는 영혼을 채우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대가들은 수많은 고서들과 신간을 알려야 했지만 그들이 개인적으로 읽는 책은 하느님의 신성한
말씀인 성서였다. 자크 스티앙농 (중세의 고문서학), 1991년
완벽하게 평가되어야 할 작업
성 안셀무스는 필경사에게 몇 가지 소중한 충고들을 아끼지 않았다.
그대가 아포리즘 주석들 전부를 전사할 수 있다면 대만족이오. 그러기 힘들다면, 그일이 그냥 간과해도 좋을 그리스어
용어나 희귀한 단어를 해석하는 정도가 아니란 점을 미리 말해 두겠소. 아무튼 그대가 일정 기간 백박에 관한 소논문에
몰두할 결심을 굳힌 듯하니 아펴리즘에 대해 논한 바를 완수할 각오로 매사에 임해 주길 가장 바라오. 실제로 과학적인
장르를 포함해서 매우 평이하고 열의를 갖고 임해야 하는 이런 장르는 다른 작품과 다른 지침사항을 필요로 할지 모르
겠소. 하지만 아포리즘들을 필사하고 나서 소논문에 좀더 시간을 투자하겠다면 나는 그 일을 흔쾌히 수락하겠소.
다른 작품들을 맡았을 때처럼 이 필사본들에서도 특히 교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주시오. 그대가 어떤 작품을 맡아
하건 그 작업이 완벽하게 평가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소? 나로서는 오류투성이 텍스트보다는 텍스트 전체에 충실한 단
한 부를 소유하고 싶소. 자크 스티앙농 (중세의 고문서학), 1991년
구텐베르크라는 인물
"당대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라고 불리는 마인츠 시민이 인쇄 기술과 책의 활자 제조 기술을 발명했다.
당시 그는 전재산을 투자해 새로운 발명품을 수정하느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요한 푸스트를 비롯한 은인
들의 도움으로 이 작업을 무사히 와성할 수 있었다." 스판하임 데 트리테미우스의 연대기, 1495~1509년 간절히
기대하는 성서 가장 흥미로운 자료 하나가 1455년 3월 12일 카르바잘의 추기경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가 보낸
편지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구텐베르크란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이 놀라운 인물에 대해서 저는 있는 그대로를 옮기고자 합니다. 저는 이렇게 완벽한 성서를
보질 못했습니다. 수많은 묶음들을 다섯권의 책으로 나누었는데, 어느 한 군데 흠잡을데 없이 매우 깔끔하고 정확한
서체로 되어 있더군요. 아마 존엄하신 귀하가 돋보기를 끼지 않으시고 별 수고 없이 독서하실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누군가 황제께는 이 다섯 권으로 된 책의 견본을 다량 보내드렸더군요. 가능하다면 귀하께도 보낼 판매용
성서 한 권을 사보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지 몰라 염려가 되는군요. 먼 곳이기도 하고, 다섯권이 채 완성되기
전에 예약 신청이 모두 끝났다는 소문도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귀하께서 페가수스(날개 달린 천마 : 역주)보다 빠른 속달편지로 알려오신대로 그 성서를 받을시길 간절히
원하고 계신 걸로 믿고 그 일에 힘써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마십시오. 귀 베흐텔의 글에서 (구텐베 르크),
1992년
구덴부르흐란 인물
초기부터 발명가의 이름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이 문제에 대해 쾰른(1449)의 연대기가 가장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이 뛰어난 기술은 독일 라인강 유역의 마인츠란 도시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주후 1440년에 일어난 일이었고,
그때부터 1450년까지 그 기술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1450년은 황금의 해로 기술된다. 이 시기부터
인쇄가 시작되었고 최초의 인쇄 책자는 라틴어 성서였다........ 최초의 인쇄술 발명가는 마인츠 시민이자 스트라스
부르 출신인 기술은 마인츠에서 맨 처음 쾰른으로 건너 갔고, 다음에는 스트라스부르와 베네치아로 전해졌다.
나는 이 기술의 발생과 발전에 관한 이야기를 울리히 첼데 하나우라는 존경스런 대가의 생생한 육성으로 전해 들었
는데, 그는 퀼른으로 건너온 기술로 1499년에 책을 인쇄했다. 귀 베흐텔의 글에서 (구텐베르크), 1992년 한 사람만
으로는 불충분했던 발명 귀 베흐텔은 구텐베르크에 관해 쓴 작품에서 발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공동작업의 결심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구텐베르크는 서구에서도 인쇄술을 발명한 장본인은 아니었다. 그가 알려지기 전부터 이미 판화나 삽화문들,
소책자들도 인쇄되어 왔지만 질 나쁜 잉크와 불규칙한 활자들을 사용하고 효율적인 인쇄기계도 없이 단면 인쇄만
가능했기 때문에......... 상태가 나빴을뿐더러 속도도 느리고 많은 양을 인홰할 수도 없었다.
그런 방식은 새로운 발상의 전환으로 금속 기계를 도입해 전면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또 종이에 흡수되지도
않으면서 질 좋고 광택이 나는 잉크고 생산 해야 했다....... 이런 작업은.........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불충분했다.
때문에 그이 성공은 주조공, 금은세공사, 재정후원가, 필경사, 화가, 책 전문가뿐 아니라 라틴어 학자나 종교학자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귀 베흐텔의 글에서 (구텐베 르크), 1992년
"이 점을 고려한다면......."
뤼시앙 페브르와 앙리 장 마르탱은 급속한 인쇄술의 전파를 강조하고 있다.
기술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는 20세기 사람들의 눈에는 인쇄술이 느리게 전파된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15세기-아직은 의사전달이 느리고 기술도 초보적이던 당대를 감안하면-사람들이 풀어야 했던 당대를 감안
하면-사람들이 풀어야 했던 다각적인 고충들을 고려해야 한다. 즉, 1450~1460년 사이에는 소수의 인쇄인들만이
마인츠의 몇몇 작업장에 모여 활판기술-당시로서는 섬세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던-의 비법을 익혔던 점을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는 새로 인쇄작업장을 설립한 자들이 해결해야 했던 여러 어려움-일례로 최초의 필수 재료들, 곧 강철로 된
자혀이나 구리로 된 원형, 활자 제조를 위해 납고 주석을 합금해 넣은 주형 등의 수집-도 포함시켜야 한다.
그리고 인쇄기술자, 글자 모형 세공사, 활자주조공, 식자공들의 수적 열세라는 문제도 있다. 한마디로, 세부적인 모든
부분들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산업체계와, 책을 유통시키는 데 따른 상거래 조직망 형성이라는, 전체적인 어려움을
고려한다면, 사실 인쇄술의 전파는 매우 빠른 것이었으며, 15세기 당대인들의 혁신에 대한 갈망이 유독 컸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뤼시앙 페브르와 앙리 장 마르탱 (책의 출현), 1958년
지식인과 인쇄인
16세기에 인문주의가 인간 본연의 순수성 회복을 목표로 고전 텍스트에 열중하고 있을 때, 인쇄인들은 그같은 막중한
책임을 깨닫지 못했다. 따라서 인쇄인 거의 대부분이 학자였고 다수의 지깃인들이 편집자 역할을 겸했다.
에라스무스와 아메르바흐
인문주의 지식인과 편집자 사이의 협력은 인쇄작업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에라스무스가 발루아의 두 인쇄인 아메르
바흐와 플벤과 힘을 합친 것처럼 양측의 협력은 종종 깊은 우호관계로 발전했다. 1529년에 에라스무스가 프로벤의
인쇄소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출간할 때, 이미 전에 장 아메르바흐가 출판에 사용했던 진지한 초상화를
책 서문에 싣고 있었다.
수작업이 더없이 중요한 시점에서, 나는 교회가 소장한 이 엄청난 보고들이 그토록 뒤늦게 출판된 것이 얼마나 큰
유감인지를 알리고 싶을 뿐이다. 아마도 막대한 경비 때문에 편집자들은 그런 일을 외면해 왔으리라.
이 고귀하고 위대한 일에 선봉장이 된 이는 흔치 않은 신앙인 장 아메르바흐였다.
그는 부유한이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타고난 정신면에서 훨씬 더 부자였다. 과도한 경비 지출이나 모든 영역의 필사본
들을 찾는 데 쏟아야만 했던 악착스러움, 지칠 정도의 원본 대조나 직무에 따른 어려움, 판매와 관련된 불안감,
아우구스티누스 완간에 따른 모든 소임을 그는 하나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이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책의 서문마다
숨쉬고 있는 진실한 신앙과 교회의 훌륭했던 고대 학자들을 부활시키려는 열망으로 일에 임했기 때문에 거의 자신을
돌보지 않은채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통해 신앙의 도정으로 나간
모든 이들이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느님은 더 많은 열의를 갖고 제롬 성인의 전작품도 그와 같이 준비토록 그때 그를 하늘나라로 부르셨는지 모른다.
그는 죽었지만 생을 마치기 전까지 각별히 신경을 써서 3개 국어를 교육시켰던 세 아들, 특히 브루노와 바질, 보니파스
에게 그의 마지막 사명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세 아들은 훌륭한 아버지 못지않은 집념과 성실로써 그의 유언을
실현했다. <<에라스무스 의 서한문>>
끈질긴 인쇄업자 프로벤
에라스무스는 장 프로벤의 신념에 어쩔 수 없는 경탄을 보내고 말았다. 장 프로벤 행복한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인물
이다. 그는 연구에 놀라운 헌신을 보여 학자들 모두가 한결같은 애정을 품게 만들었는데, 결국 나까지 그의 신앙의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 나는 그가 다음 전시회에서 작업 견본으로 제작할 수 있도록 <<에피스툴라에>>에 들어갈 한
편의 독특한 격문을 교정 보고 있었다. 그 일에 관여하긴 했지만 그 이상은 청탁받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그도 그러마고 수락했다. 하지만 그는 서한문을 책으로 완성하려는 확고한 계획을 진고 있었고, 그 일을 할 능력이나
교정을 흔쾌히 맡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걸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 비범한 친구의 집요한 의지, 무엇보다도
그의 신앙심에 한 발 물러설 결심을 굳히고 말았다. 그는 지칮도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그의 소망대로 이 작품 전체를 맡기로 수락했던 것이다.
만일 그가 다른 교정자를 찾아내고자 했다면, 그의 넉넉치 않은 주머니 사정과 내 연구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더
중대한 관심사에 등을 돌렸을 것이다.
그는 한동안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작을 인쇄하려는 확고한 구상을 해온상태였고, 나는 다른 작품을 추천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청을 거절하지 못했던 친구의 부탁인 탓도 있었으나 더 큰 이유는 다른 데가 있었다.
그처럼 탁월한 교회학자가 왜 커다란 대가를 치르면서 도덕적 과오로 가득 찬 연극세계에 다시 뛰어들었고, 고결한
외모나 위엄 있는 저서들로 모든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것 이상으로 추악한 행동으로 더 큰 유명세를 치렀는지,
그러한 행동이 속죄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요컨대 자청하여 무거운 짐을 짊어
지려는 사람이 없듯이 엄밀히 말해서 누구나 추한 오점들로 얼룩진 붉은 십자가를 드러내 보일 수 밖에 없다면,
당시의 나로서도 그가 떠맡기는 짐을 그냥 짊어질 수 밖에 없었다.<<에라스무스의 서한문>>
무력감
1530년 3월에 안문주의자 자크 사돌레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로서도 한계를 뛰어넘는 자신을 발견
하는 것이다.
<<격언집>>의 개정판과 증보판을 위해 제가 얼마만한 대가를 치렀는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을 겁니다.
일전에 제가 없는 동안 부주의한 친구들이 출간해서 결국 제 이름에 가장 큰 불명예를 남긴 <<세네카>>의 일부를
삭제하는 일이 어떤 건지 누구도 짐작 못하겠지요. 아우구스티누스와 지금 작업중인 크로소스토무스에게 바치는
노고는 또 어떤지요. 그리스어를 번역하고 그것을 다시 원문 대조하는 일이란 얼마나 고된 일이던가요.
이따금 재인쇄할 것을 요청받는 제 작품들 재검토하면서 심한 무력감에 젖어들곤 합니다. 친구들로부터 끊임없이
들볶이는 사소한 일거리들은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프로벤의 인쇄소에서 절 찾는 일은 다반사가
되었답니다. 그는 거절 못하는 제게 무람없이 부탁해 오곤 하니까요. 저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가장 큰 결점이
바로 그거랍니다.제 작품에 전혀 손도대지 못하고 있는데다 채 발육도 못한 정신의 태아를 밖으로 쏟아내고 있군요.
당신이 무척 일고 싶어하는 이 주석에 저 7일 밖에 할애하지 못했고 아직도 다 마치지 않고 피곤만 느껴집니다.
예닐곱 출판사들에서 한창 일거리가 밀려들 때면 단 한 작품에도 몰두하기가 힘듭니다. 또 제게 책을 부탁해올 때는
일반적으로 전시회 시기를 겨냥하고 있어서 인쇄소는 어디나 혼잡스럽지요. 오류투성이 작품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사실 그래서 바젤에서 도망쳤던 건데 육신이 거느린 그림자처럼 작업에 대한 근심이 줄곧 떠나지 않는군요.
친구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게 저의 본모습인가 봅니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제 영혼은 휴식을 갈망하고 있습
니다. 도 나이와 건강도 제게 평온을 호소하고 있군요. <<에라스무스의 서한문>>
성서를 인쇄하다
펠리페 2세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대역성서>>또는 플랑탱의<<다국어 성서>>의 출판은 16세기 활판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 성서는 1572년에 완성되었다. 앙베르 인쇄인이 펠리페2세의 비소관이던 가브리엘 데 카야스에
게 보낸 2세의 비서관이던 가브리엘 데 카야스에게 보낸 편지는 성서 작업의 진행과정을 엿보게 해준다.
각하, 히브리어, 칼데아어, 그리스어, 그리고 라틴어 등 각각 4개 국어로 성서를 인쇄하기로 항 데 대해 답신을 드리며,
폐하께 총 여섯 권이 될 거라는 말씀을 드리면 기뻐하시리라 여겨집니다. 저로선 인쇄를 시작한 날부터 3년 안에 마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제지용 헌 조각은 샹파뉴에 있느 트루아나 로셸에서 들여오기로 했습니다. 이 장소에서 물건을 구입하기가 저희에겐
훨씬 편리한 때문입니다만, 대략 3000련(1련에 500장:역주)정도가 필요할 것 같고 적어도 1만 2천 플로린가량을
여기서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작업에 드는 비용을 대략 따져보니 직공의 노임과 인쇄비 지출에 1만 2천 플로린이 더
들겠는데, 이 비용에는 종이와 직공들의 평균 급료와 또 다른 지출에 필요한 약 1만 2천 에퀴스가 모두 포함되었으며,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정확한 계산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제가 쓴 비용과 차후에 더 쓰게 될 별도의 비용에 대해서는 작품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계산서 작성이
곤란할 것 같습니다. 히브리어와 다른 언어들을 맡아보실 학자 분들이 저희 숙소에서 머물면서 든 비용과. 제가 지출
한 것, 제 담보물들과 관련해서 꽤 많은 돈을 벌써 썼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들니 성서의 히브리어 용어 사전을 교정
보기 위해 정통하신 분들을 방문토록 했고 에스파냐 국왕께서 파견하신 분들도 이곳을 내방하시어 인쇄작업에 들어
가게 될 작품들을 보셨습니다. 그 사전 작업은 기품 있게 장식할 생각입니다.
얼마 동안은 이 일에 몇 분과 힘을 합하면 충분하다고 여겨서 다른 능력있는 교정자를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적으로 이 작업에만 매달려서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히브리어와 칼데아어,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두루 정통한 젊은이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와 일 하면서 가장 일하기가 좋고 편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무언가 공적으로 도와줘야겠다는 바람까지 들더군요. 그러다 보니 그가 지닌 학식이나
미덕에 끌려서 결국 제 맏딸과 결혼까지 시키게 되었습니다.
제가 손수 다듬고 오랜 수작업을 거쳐 만든 활자들로 말할 것 같으면 솔직히 그 작업에 들어간 비용이 정확히 얼마
라고 말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유럽 어디에서도 그보다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활자를 찾아볼 수는 없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몇몇 주요 인쇄인들과 식견 있는 분들이 저 모르게 몇 번인가 그 활자를 사용한 적이
있다고 시인한 바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전시회에 참석했을 때 우연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전시회 마지막 날인가, 권력 높으신 분들게 한 장도 드리지 앟았지만 심사위원인 오귀스트 공작에게만 한 부 보여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이런 활자 작업을 전부터 준비해 오셨던 모양이었습니다.
한데 그분이 저희가 있는곳을 찾아 주셔선 저희 교정쇄 몇 부와 그분이 착수시켯다는 교정쇄를 대조해 보시더니
완성도에서 저희 거셍 못미친다고 고백하시더군요.
그분은 계획을 취소시 키셨습니다. 9월에 프랑크푸르트 전시회 마지막날, 그 사실을 제게 알려오셨고 그분은 인쇄인을
통해 제가 진행하고 있는 이 계획을 계속 추진하라는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답니다.
1566년 12월 19일 <<크리스토프 플랑탱의 서한문 >>,1883년
플랑탱은 인문주의적 전통안에서 가장 정확한 텍스트 작서에 주력했던 전문인들과 협력해서 일했다. 마침내 4년간의
철저한 작업 끔에 성서가 완성되었다.
그때 이 계획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던 이들 모두에게 양피지가 커다란 종이에 인쇄한 견본을 나누어줄 기회가 있었다.
<<대역성서>>에 관해 말씀드리면 다섯 권 분량의 본문을 1200부 인쇄했고, 호화본으로는 자금과 재료 부족으로
600부만 찍었는데, 이 경우에는 성서의 많은 본문을 담기 위해서 2차 경비를 들여 한 차례 더 인쇄해야 했습니다.
전부 합해 여덟 권이 되는 성서는 용어사전을 포함해서 세 권으로 된 알칼리 성서보다 더 두껍고 크고 무겁도록 제작
했습니다.1572년 11월 14일 <<크리스토프 플랑탱의 서한문>>1883년
프랑크푸르트 전시회
매년 열리는 프랑크푸르트 전시회에서는 편집자의 화려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고 한편으로 상업적이고 지적인 교류가
이루어졌다. 인쇄인 앙리 에스티엔은 1574년 그곳에 관한 열정 어린 기술을 남겼다.
메르크리우스(상업을 관장하는 이신이 존재한다면)의 사정에서 뮤즈(문예와 미술을 다스리는 아홉 여신:역주)의
시장으로 옮아갔는데 할 수만 있다면 그곳을 뮤즈의 아카데미 또는 뮤즈의 국제박람회라고 묭묭하고 싶다.
실상 전시회 동안 뮤즈들은 프랑크푸르트에 자신들의 식자공과 서적상을 불러들인다. 또 시인, 산문작가. 역사가,
철학자에게는 그들이 쓴 작품을 가져오라 주문한다. 아주 먼 옛날 그리스나 이탈리아가 산출한 작품뿐만 아니라
뮤즈의 아홉 자매들이 여러나라에서 얻어낸 작품도 두루 망라하는 것이다. 작품들이 모이면 그때부터 당신은 프랑크
푸르트가 아니라 그리스 전역에서 한창 융성했던 교양이 흘러넘치는 또 다른 도시에 와 있다는 착가이 들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아테네 프랑크포르투아즈라고 명명한 이 구역을 찾는 건 단지 작품들을 보려 함이지 작가들을
만나려고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후세에 길이 이름을 남긴 작가들의 작품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 도서관에서도 얻을 수 없는 문자들의 아카데미 또는 문자들의 국제 박람회만이 지닌 고유한 이점이 바로 거기
있기에 나는 그 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전세계는 각지의 아카데미에서 달려온 수많은 대가들의 생생한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서적상들의 매장에서도 그 예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철학학교에서 펼쳐졌던 철학적 논쟁 만큼이나 심각하게
철학을 논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논쟁은 비비텐베르크, 라이프치히, 하이델베르크, 스트라스부르의 아카
데미에서 파견된 펄학자들만이 아니라 루뱅이나 파두아,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등지에서 온 철학자들도 합세해 국경을
뛰어넘는 논쟁으로 돌변한다. 펄학자뿐 아니라 시인, 산문작가, 역사가, 수학자도 참여하는 것이다.
단언컨대 당신은 이곳에서 고대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나 폴리클레이토스, 피시스트라토스, 그외 다른 왕조의 유명한
도서관들에서나 볼 수 있는 풍부한 장서를 손에 넣을 수가 있다. 분명 당신은 많은 돈을 쓰게 될 것이다.
이처럼 문우나 자유로운 예술가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특전이 베풀어지는 어마어마한 책들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임
으로써, 독일은 고대의 혜택에 또 다른 혜택을 보태는 셈이다.
무엇에 대한 혜택이냐고? 그리스도의 속죄 이후 일찍이 어떤 나라도 문자에 대하여 그 같은 위대한 혜택을 부여한
나라는 없었다. 활판 기술을 고안한 나라도 바로 독일이기 때문이다. 독일에 그 기술을 국항 시키지 않고 전파시켜
전세계의 천재들에게 많은 이득을 안겨주고자 하는 것이다. 앙리에스티엔 <프랑트푸르트 전시회>1574년 프랑크
푸르트책 전시회를 게기로 4개 국어로 출간된 텍스트에서. 1968년
엄격한 감시
인쇄술은 위기에 처했다, 책-이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었다.-을 통해 종교와 권력, 그리고 도덕을 재검토할 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시는 철두철미했다.
16세기부터 왕이 작품의 출판을 허용하는 특허권 제도가 수립되고 다음 세기에는 출판 전체를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통제 또는 보호의 수단?
출판에서 특허권 허용은 불가피 했다 여기 그예로 1614년에 예수회 신부 리숍의 작품 츨간과 관련하여 리옹의 서적상
피에르 리고가 얻은 특허 증명서를 싣는다.이 텍스트는 작품 서두에 있는 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프랑스와 나바르 왕국의 올 루이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친애한느 리오의 서적상 피에를 리고 씨 우리는 교만한
행보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아들이 세운 교회 왕국에서 겸허하게 단계를 밟아간 아카데니의 명성>>이러는 부제가
붙은 채그이 출판을 그에게 맡기게 되었음을 공표한다. 프로방스 출신 예수회 신부 루이 리숍, 그는 자신이 완성한
글이 출판되기를 희망하여 막대한 경비와 지출을 들여 일을 착수시켰으나 이후 어느 출판사도 인쇄를 원치 않았고
투자한 노고와 자금마저 잃게 될 처지라고 근심에 싸여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고 자신의 요구와 필요
사항들을 알리면서 지면의 허용을 간절히 호소해 왔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에게 앞서 말한 책에 대한 특허권을 허용 부여하여 현행법에 의거해서 전체 교회 왕국과 나라
영지 장원에서의 인쇄와 출판 ,판매, 보급을 허용하고 특허를 부여했다. 도 책의 질적인 문제나 상황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즉, 인쇄의 완성날짜나 인쇄 기한을 계산하여 일정 기간 또는 6년의
공백을 두고 책의 일부를 부분적으로 수정, 증보하다는 전제하에서 인쇄, 출판, 판매, 보급하고 문제가발생할 때 약
1000 권에 해당되는 범칙금으로 반은 우리가 나머지 반은 리고 씨에게 부과하여 인쇄 견본들을 압수할 것을 알리는
바이다. 주후 1614년 4월 17일, 루이 치하 14년에 파리에서 왕국 이사회를 거쳐 페로셰(서명)
라슐리외와 왕립 인쇄제작소
이전 세기에 비해 17세가의 프랑스 인쇄술은 활기나 창의성이 뒤떨어졌다. 리슐리외는 이에 대처하기로 결심했다.
리슐리외가 왕립인쇄소 설립 계획을 품었던 것은 1640년 무렵인데, 정부 과시용 기구인 왕립인쇄소는 왕의 영광과
종교 발전, 문자적 진보에 필요항 양서 출판물들을 늘리기 위한 방편인 동시에 지속적으로 항거해온 소규모 출판계에
대한 일종의 대응수단일 수도 있었다.
최고의 인쇄활자들을 갖추고 1640년 루브르 박물관에 설립된 왕립인쇄소는 1640년 리슐리외가 처음 창설했다.
1640년 이곳 인쇄기술로 처음 출간된 책이 호화롭게 장식된 2절판형 <<그리스도의 모방에 대하여>>(독일의 선학자
아 캄파스의 저서 :역주)였음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 후속으로<<그리스어 신약성서>>베리길리우스와 테렌티우스
의 기념비적인 출판물들 또한 유베날리우스와 페르시우스의 풍자시들이 나왔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성 프랑수아 드 살 ,성 베르나르두스 등이 인정받는 작가로 등장하면서 리슐리외 휘하에서
세상의 이복을 끈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이러한 작품 선택은 당시의 기독교적 인문주의와 프랑스적 문화 풍토를 상당부분 대변해 주었다. 왕립인쇄소에서
초판된 책의 독창성과 흥미로움은 그 본문 장식에 있다.
1642년에 출가노딘 <성서>의 테두리 장식과 여백의 삽화, 루브르인쇄소의 회색 알파벳의 최초 사용도 이런 견지에서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그 모든 노력이 성공을 거둬 유연한 글자로 된 삽화와 호라판술이 조화를 이루었고 확실히 이
시기부터 부활하기 시작한 책 장식이 프랑스에 알려지게 되었다.
앙리장 마르탱 <정부 산항 인쇄소의 탄생> <국립 인쇄소에서의 책 예술>
1973년
최초의 읽을 거리들
1745년, 최초의 아동용 서적상을 개점한 곳은 런던이었다. 그러나 교과서, 교리문답서, 그리고 몇몇 이야기책과
우화집을 제외하면 엄밀히 말해 18세기 말이전까지 아동문학이라 할 만한 즉품은 없었다. 때문에 어린이들은 부모가
읽는 작품을 읽었을 것이다. 루소, 마담 롤랑, 그리고 샤토브리앙의 작품들이 그들이 읽은 최초의 도서였다.
루소, 조숙한 나이에 열정을 품었던 지성
서민 계층의 아이들은 '(푸른 표지의)기사 이야기'나 성인용 작품을 각색한 소책자들을 찾곤 했다.
장 쟈크 루소가 속한 특권 계층에서는 아동용으로는 매우 수준 높은 작품들을 감상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읽기를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처음 읽었던 책들과 그 독서가 내게 미친 영향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자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어머니는 내손에 소설들을 쥐어주셨다. 반에 간식을 들고 나면 나는
아버지 곁에서 소설들을 뒤적거리는 시늉을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재미있는 책들로 독서에 맛을 들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권씩 떼어갔고 밤만 되면 책읽기에 흠뻑 빠져들곤 했다. 한권을 다 읽을 때까지는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이런 위험한 방식으로 책을 접하고 나자 읽고 이해하는 일이 극도로 쉬워졌을 뿐만 아니라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열정에 대한 남다른 감성도 지니게 되었다.
소설읽기는 1719년 여름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듬해 겨울, 다른 읽을 거리가 생겼던 것이다 <피와 땀으로 쟁취한
제국과 교회의 역사>, 보쉬에의 <세계사><플루타르크 영웅전>, 나니의<베네치아 역사>, 오비디우스의<변신>,
라브뤼에르의 작품, 퐁트넬의<세상 사람글>과 <죽은 자들의 대화>그리고 몰리에르 몇 권이 서재로 옮겨졌고,
나는 일하는 아버지의 곁에서 날마다 그 책들을 읽곤 했다. 장 자크 루소 <고백론> 1781년
마담 롤랑의 불타는 학구열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까지 파리에서 유명한 살롱을 열었던 마담 롤랑은 젊음을 대변하는 열렬한 독서 취향을 길렀다.
매일 독서 훈련으로 빡빡한 하루를 보냈던 나는 마음 먹은 책들을 마친 적이 없어서 그 하루가 짧게만 여겨지곤 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기본적으로 읽어야 할 것들이라며 사려 깊게 골라 준 책들을 비롯해서 우리 집 작은 서가에
곶혀 있는 책들을 모조리 읽어 치웠다. 책들을 남김없이 탐독했고 읽을게 없으면 같은 책을 다시 읽었다.
2절 판형인 두 권짜리<성인전>과 구어로 쓰인 <성서>,내란에 관한 오래된 번역서인 <아피앙>,문체는 조야했지만
몇 번이고 반복 해 일었던 <터키의 희곡> 따위가 생각난다. 또 스카론의 <로마의 희극>과 좋은 말들만 수록해 놓은
격언집도 생각나는데 그런 종류의 책은 한 번 읽는 것 으로 족했다.
용감한 퐁티의 <회상기>는 읽는 즐거움을 주었고, 몽팡시에 양의 작품은 그 대담성이 매우 좋았으며 일부 예날 작품
에서는 형식과 내용과 결점들을 엿보곤 했다. <문장 기술론>이란 책은 그 이론을 공부하고 싶을 정도로 나의 학구열
을 자극했다. 그 책에는 내 흥미를 끄는 색도판들이 있었는데 나는 작은 그림들에 붙은 이름들을 모두 알고싶어했다.
얼마 후에는 복잡한 특성을 지닌 예술 규칙을 비판하자 내 박식함에 아버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셨다.
이 방면에는 제법 도통하게 되었고 그런 내 판단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어느 날 엔가는 <계약론>이라는 소책자를
만날 수 있었으나 재미를 붙이지 못했고 도중에 책자를 덮고 말았다.
<성서>는 나를 사로잡았다. 오래된 번역본으로<성서>를 읽으며 나는 쓴약을 삼키는 듯한 고통을 느끼곤 했다.
나를 깊이 감동시킨 표형들은 결코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어느 누구도 어린 소녀에게 해준 적이 없는 그런 말
들이 날 참된 교육의 길로 이끌었다. 어느 날엔가는 그런 표현들이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모든
물질세계에 호의를 느낄 수도 없었고 스스로 물질적인 것과 단절하고 지내고 싶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들었다.
그 무렵 할머니가 양배추 잎사귀를 들추고 찾아낸 업동이들의 얘기를 잠시 웃음을 터트렸지만,
나는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 오게 되었는지도 묻지 않은채 거기서 아이들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베마리아(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기도 )를 욾조렸다.
<텔레마크>와 <해방된 예루살렘>이 이런 다소 무거운 인상을 떨쳐버리게 만들었다.
감미로운 페늘롱이 마음을 뒤흔들었고 타스는 상상력에 불을 붙였다.
이따금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책을 소리내어 읽었지만 나로선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집중도
안되고 음미하는 기쁨도 누리지 못했으며 속도를 내서 일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립소섬의 에피소드나
타스의 수많은 문장들처럼 오히려 조용히 뇌까리며 읽는게 나은 것도 있었다. 그럴때 나는 호흡이 가빠졌고 갑자기 얼
굴이 달아오르는 열기를 느꼈으며 내 동요하는 마음은 격앙된 목소리에 그대로 담겼다. <텔레마크>에서는 유카리스가
되었고 <탕크레드>에서는 에르미니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은근히 그녀들로 변신하여 나 자신에 대한 어떤 개인
적인 잡념도 들지 않았다. 결코 나 자신으로 되돌아오지도 않았고 내 주변의 그 무엇도 갈구 하지않았다.
나는 곧 그녀들 이었고 그녀들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들만을 느낄 따름이었다. 그건 결코 깨어나지 않을 꿈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씩 아버지 화실로 찾아오는 타보랄이라는 젊은 화가를 매우 설레이는 감정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는 스무살 쯤 된듯했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소녀처럼 볼이 발그스레한 감성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 작업실에서 그의 음성이 들려올때면 언제나 나는 크레용이나 뭔가를 찾으로 온 양 들어가곤 했다. 하지만 막상
그와 맞딱뜨리면 들뜬 내 마음은 그만큼 당황했고 들어갈 때보다도 더 빨리 작업실에서 뛰어나와 두근거리는 심장과
후들거리는 다리를 어쩌지 못하고 내 작은 방으로 숨어들곤 했다.
이제야 나는 그 같은 감정을 이해하겠다. 자신이 무화되어 버린 기분 또는 작품속 인물과ml 어떤 일체감 그것들로 한
개인과 그의 상상력은 훨씬 더 많이 성숙할 수 있다.
이제 말하려는 이 작품으로 옮아가니 조금은 차분해진다. 볼테르의 어떤 저서들을 읽으면 기분전환이 되는 까닭이다.
어느 날 나는<캉디드>를 읽고 있었는데. 카드게임을 하고 있던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머니의 게임 파트너
였던 부인이 방 한구석으로 날 불러 들고 있는 책을 좀 보여주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계신 거실로 들어가더니 내가 열중하고 있는 독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는 표정을 역력히 드러
냈다. 어머니는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 대구도 하지 않으셨고 나에게 책을 제자리에 갖다 두라고 말씀하셨다.
이상한 일이지만 인자한 어머니의 태도에서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찾아낸 책을 훤히 알고 계신 것처럼 내가
그 책을 일게 내버려 두셨다. 물론 이후로는 풍기문란한 책이 또 다시 내손에 들린 일은 없었다. 오늘에 와서야 나는
그런 책들을 어떻게 하면 수중에 넣을 까 고심하면서 유치한 성향을 들키지 않으려 했던 책의 두세가지 제목과 내게
그런 취향이 있었다는걸 기억할 뿐이다.
이따금 몇 권의 책들을 선뜻 선물하시던 아버지를 나는 누구보다도 좋아했다. 아버지는 스스로 책을 고르는 내 취향에
조언자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셨지만 아버지는 꽤 별난 책들을 추천하셨다. 예를 들면 따릐 교육과 관련해서는 페늘롱의
,<개론서>를 추천하셨고 취학아동들의 예절교육에 관해서는 로크의 작품을 권해주셨는데 그런 책은 교사지도용으로
제작된 것기었다. 하미잔 그런 선택은 썩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런 우연한 독서가 나를 평범하니 않은 사고를
지닌 인격체로 성장 시켜 주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롤랑 드 라 플라티에르의 <회고록>에서 <18세기 부르주아 계층의 교육 >1964년
혼돈으로 가득찬 영혼
1780년경 샤토브리앙은 유년시절을 회상했다. 그해에는 우리가족만이 아니라 내안에서도 자아혁명이 시작되었다.
우연히 내 손에는 전햐 성격이 다른 책 두 권이 쥐어졌다. 세련되지 않은 문장의 <호라티우스>와 <미오나의 참회록>
이었다.
그 책들 때문에 내가 겪은 사고의 혼란이란 믿기 어려울 정도 였다. 이를테면 낯선 세계가 내 주위에 들이 닥친 기분
이었다. 나와 달느 존재 내가 즐기던 놀이를 뛰어넘는 어떤 쾌락, 어머니와 여자형제들 사이에서 자란 탓에 자연스레
품게되는 미지의 성에 대한 육체적 호기심, 그 때 내 나이로는 이해 불가능한 비밀스런 부분들에 궁금증을 품게 된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사슬에 끌려다니면서 불꽃을 토해내는 유령들의 형상이 있었다. 그 형상은 유일하게 내
속에 감추어진 죄의식에 대한 영원한 고통을 경고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내 삶을 변화시키는 이 뜨거운 열기로부터 쉴새없이 불동이 튀는 걸 깨달았다. <아이네이아드>와 <텔레마크>
도 읽었다. 갑작스레 나는 그 작품들에 나오는 디동과 유카리스에게서 황홀한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며 경탄할 만한
시구와 고대 문장의 조화에 심취했다. 설교서<죄지은 여자>와 <방탕아>를 포함한 마시용의 전집들은 거의 끼고
살다시피 했다. 부모님은 내가 그런 책들을 훑어보는데 무심한 편이었는데 거기서 내가 무얼 찾고자 하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때문이었다.
샤토브리앙 <무덤 저편에서의 회상> <에밀>에서<로빈 크루소>까지
루소는 <에밀>에서 유년기의 모든 독서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우리에게 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상 그중
꼭 갖추어야할 책이 절대적으로 있다면, 내 견해로는 자연 교육의 가장 행복한 개론서가 될 것이다.
이책은 나의 에밀이 맨 처음 읽게 될 것이다.에밀은 혼자 힘으로 오랜 세월 자신의 서가 전체를 꾸밀 것이며 그 책은
언제나 각별한 공간을 차지할 것이다. 오직 그 책의 텍스트만이 박물학에 관한 모든 대화에서 주석의 역할을 할 것이다.
또 우리가 진보해가는 과정에서의 정당한 판단에 시금석이 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진니 감식안도 변색되지
않을 것이며 그 책을 읽는 내내 즐거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위대한 책은 누구의 작품이란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 ?아니면 포리니우스나 뷔퐁인가?모두 아니다.그는 바로 로빈슨 크루소이다.
책은 불태워져야 했나?
인화성 강한 물질로 만들어진 책은 불의 좋은 먹이감이었다. 책들의 화형식이 있기 전부터 물태워진 장서들리
있었고, 우연이든 아니든 간에 그들이 출판한 책들과 함께 화형당한 출판업자와 인쇄인도 있었다.
루터와 그의 이단자 친구들
믿을 만한 파리의 부르주아 신문은 16세기에 거리에 벌어진 구경거리를 전한다.
다음 토요일 8월 8일, 자칭 은자라는 가엾은 자가 금기시된 표현을 했다는 죄명으로 별안간 체포되었고 일르 보기
위해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다.지난주에 책들이 불태워졌던 노트르담 광장앞에서 이제 그가 불길에 던져질 판이
었다. 이러한 처벌을 받게된 이유는 그가 루터의 이단 종파를 지지하는 불온한 선동자요,사악한 생각을 지닌 자로서,
특히 파리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군중을 규합해 공공연하게 마리아가 무임 수태한 어머니이자 성모라는 사실이
그녀의 남편 요셉에 의해 잘못알려지고 왜곡되었으며 마리아 역시 다른 여자들 처럼 남편과의 육체적 접촉으로
예수를 수태했다는 주장을 펴고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주지해야할 사실은 기소된 그 은자가 루터의 책을 읽고 그 사상에 기울었으며, 이러한 설교를 하게 된 것도 루터의
책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루터의 책은 모두 불태워졌고, 그때 이후로는 단지 읽기 위해 소지한 책에 대해서도 똑같은 처벌이 가해졌다.
화형 직전, 은자는 자신의 죄가를 인정했다. 그 은자와 같은 견해를 갖고있었던 바르캥이라는 신사도 불시에 체포
되었다.
그에 대한 소송은 기정 사실이 되어 신상에 큰 위험이 닥쳤지만 막강한 지위와 세력을 지닌 부인들 간에 신망을 얻고
권력을 쥐고 있던 몇몇 친구들이 법정에 출두해 대법관으로부터 구형을 받고 결국 대법정까지 소환될 수 있었다........
인문주의 예술에 상당한 학식을 진니 교양인 바르캥은 이미 왕명에 의거해서 이단자라는 죄명으로 한차례 기소되어
결국 죄가 입증된 바 있었다. 그는 4월 어느 토요일에 도시의 제단 앞으로 끌려가는 형을 다시 선고 받았고, 엄청난
벌금을 문 후 그의 면전에서 책이 불태워졌고, 감옥으로 끌려가 빵과 물을 급식받는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16세기 그의 형 집행이 있기 전날인 금요일, 재판관들은 그에 대한 판결과 체포로써 목숨만은 보존할 수 있게 하는
어떠한 소송이나 항소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이튿날 그이 형집행이 이루어졌다. 그는 도시의 그레브 광장(센
강변에 있는 옛날 처형장 : 역주) 제단 앞에서 우죄선고를 받고는 책과 함께 불태워졌다.
하느님 그의 죄를 사하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그러나 그는 아무런 동정도 받지 못했다. 아마도 문예에 조예가 깊었던
그가, 우리의 믿음과 교회의 의식에 이러쿵저러쿵 비방을 하는 데 몰두하면서 자신의 학식을 악용한 탓이리라.
프랑수아 1세 치세에 발행된 파리의 부르주아 신문, 1962년
상상력 풍부한 돈키호테
세르반테스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지나치게 많이 읽었다. 매일 그는 밤을 꼴딱 새우곤 다시 아침부터
저녁까지 독서에 몹시 심취해 있었다. 그처럼 잠도 설쳐가며 책을 읽어대는 바람에 그의 머리는 피폐해져 판단력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이를테면 전쟁, 결투, 부상, 정열, 사랑, 현실에서 불가능한 기상천외한 행동 같은 공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던 것이었다. 책에서 읽은 온갖 몽상과 속임수의 장치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그에게는 이 세상
에서 무엇보다 확실한 현실 세계가 될 정도로 그를 상상의 세계로 밀어넣고 있었다. 신부는 그이 질녀에게 그가 병을
얻게 된 주범들이 있는 서가의 열쇠를 달라고 요구했고 그녀는 두말하지 않고 열쇠들을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서가에 들어갔고 가정부와 함께 그곳에서 두툼하고 썩 근사하게 장정된 100권도 넘는 책들과 다른 소책자
들을 찾아냈다......... 학사는........ 이발사에게 이 책들을 한 권씩 읽어 보고 어떤 내용인지 알아보라고 명했다.
그 책들을 읽고 고통에 찬 열정을 일으키지 않을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러자 조카딸이 잘라 말했다. "최선의 방법은 책들을 창밖으로 내던져 안뜰에 쌓아놓고 불을 지르던가, 다니면 아래층
뜰로 가져가서 모두 태워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다 태우면 아무에게도 화를 미치지 않을 거예요."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의 손 안에 영혼들이 깃들여 있으니, 선조들의 해로운 예술과 지식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18세기에 루소는 인쇄술의 악영향을 우려했다.
오, 위대한 사상가들이여! 이런 충고가 그대 친구들고 자손들에게 얼마만큼 유익함을 가져다 줄지 모르겠다.
만일 그대들이 이런 가르침에서 어떤 가치를 재빨리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대 신봉자들 중 누군가의 사상을 추종할
터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동시대인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자들은 생존해 있는 동안 자신을 아낌없이 투여한 자들이며, 사후에도
불멸의 작품을 남긴 자들이 아니겠는가! 바로 여기에 우리가 후손들에게 세세년년 전해야 할 지혜이 준칙들이 있는
것이다. 온갖 인간 이성의 미망에 빠져든 이교도는 복음이 지배하던 시대에 인쇄술로 만든 불명예스런 저작물들로나
평가될 뿐 후세에 남긴 것은 전무하지 않던가?
레우키포스와 디아고라스의 반종교적 저술들은 그들고 더불어 사라졌다.
당대이 궤도를 벗어난 인간 정신으로 길이 남은 예술을 아직껏 찾아볼 수 없다. 하나 다행히 활자들과 그걸 이용한
덕분에 홉스나 스피노자가 꿈꾼 위험천만한 사고는 영구히 보존하게 되었다. 아무튼 우리는 선조들의 시행착오와
투박함이 깃들인 명저들을 거의 보존해올 수 없었다. 아마도 그런 작품들은 우리 시대의 타락한 풍속들을 까발림
으로써 후손들에게는 악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모르고,
또 세기들을 통틀어 학문과 예술이 진보와 우월성을 낱낱이 기록한 역사를 도래하게 했을지도 모르는 일디다.
만일 선조들이 그대의 작품들을 읽는다면, 오늘날 우리를 동요시키는 문제에 대해 조금도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우리보다 더 어리석지 않는 한, 그들은 고ㅈ뇌에 찬 심정으로 하늘을 향해 이렇게 고할 것이다. "전능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의 손 안에 영혼들이 깃들여 있으니 선조들의 해로운 예술과 지식에서 저희를 구하시고, 오직 우리를
무지돠 순수와 청빈과ㅡ 우리가 행복할 수 있고 당신 앞에서 값진 존재가 되는 선행으로 이끄 소서."..........
이미 유럽에서 인쇄술이 야기한 끔찍한 혼란을 감안하고 그 과정에서 갈수록 악이 빚어지게 될 앞날을 고려한다면,
주권자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그들이 국가 수립을 위해 취해 왔던 이 가공할 국가적 차원의 예술을 말소하는
일에 반드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술탄 아희메트는 소위 고매자연한 학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콘스탄티노플에
인쇄소를 설립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막 인쇄기를 가동중인 상황이었는데 얼마되지도 않아 건물을 부수고 기계
들을 우물 속에 처박아넣었다. 아마도 알렉산드리다 도서관을 설립할 필요성에 대해 고심 했던 칼리프 오마르의 말이
이 상황에 대한 답변이 될지 모르겠다. "만일 이 도서관의 서책들이 (코란)을 거역하는 내용들이라면 당연히 불태워
져야 한다. 또 그것들이 (코란)의 교리만을 담고 있는 책들이라 해도 그 역시 불태워져야 한다." 그런 책은 넘치도록
많다는 게 그 이유였다. 우리 시대의 학자들 역시 이 불합리의 극치와도 같은 논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오마르 대신 그레고리우스 대왕을, (코란) 대신 복음서를 가정한다 해도, 사정은 별반 달라질 것이 없다.
도서관은 여전히 불태워져 왔으며, 그건 아마도 고매하신 이 대가의 생애에서 가장 훌륭한 궤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장 자크 루소 (학문과 예술에 관한 담론들)
잿더미가 된 도서관
도서관에 바쳐진 백과사전이 항목이 환기하듯, 가장 규모가 큰 도서관들고 쉽사리 소실되었다.
전세계에서 가장 웅대했을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도서관이었을 것이다.
그 도서관 건립은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에서 시작 되었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모든 나라들로부터 서책을 수집
했던 팔레르의 데미트리우스의 각별한 관신하에서 이루어졌다. 그 장서의 규모를 보면, 54800권이다, 20만 권이다.
50반 권에 육박한다는 등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필라델프가 죽고 그 계승자 소테르는 이
도서관에 단 10만 권만을 갖추도록 명했다고 한다. 계승자들이 치세 동안 도서관이 서책 수가 날로 증가 해 70만
권에 이르럿다. 그러나 당시이 서책은 두루마리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냉혹했던 프톨레마이오스 피스콘왕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을 호화롭게 장식하는 데 열정을 기울였다.
그는 기근에 허덕이던 시기에 관례적으로 이집트에서 밀을 반입하던 아테네인에게 밀 수출을 거부하면서,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원전들을 양도하게하여, 자신이 그 원본들을 소장하고 그들에게는
충실히 베껴 쓴 복사본들만을 보내면서, 원전을 담보로 한 위탁금으로 15탤런트(고대 그리스의 화폐단위 : 역주)를
내준다는 조건을 걸었다는 애기가 전해진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지역에서 포위당했을 때, 항구에 정박해 있던 선함에 불을 질렀던 사실은 누구나 아는 바
이다. 불행시도 바람에 불길은 그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번져갔다. 불길은 항구에 인접해 있던 가옥들에 옮겨
붙으면서 브루키온 지역의 밀창고들과 이 유명한 도서관에 크나큰 손실을 입혔다. 어떤 저자들은 그때 불탄 장서는
40만 권뿐이며 다른 많은 서책들은 화재에서 무사히 건져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나머지 페르가몬 도서관의 서책 20만 권이 안토니우스를 통해 클레오파트라에게 건네졌고, 그로써 새로운 세라피스
도서관이 건립될 수 있었으며, 얼마 후 그곳에는 많은 서책들이 들어차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 황제들의 치하에서 일어난 계속되는 혁명의 와중에 도서관의 책들이 약탈되다가 복구되어지곤 했다.
결국 그 도서관이 건물은 주후 650년에 파괴되었다.
사라센이 장군 아므리는 칼리프 오마르의 명에 따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장서들을 이 도시에 있는 대중 목욕탕에
채워 넣으라는 지시를 내렸고, 6개월 동나 장서들은 욕탕의 땔감으로 사용되었다. (백과사전)의 '도서관' 항목에서
Bruno Blasselle, Histoire du livre, Vol. I. A pleines pages, Vol. II. Le triomphe de l’édition, Paris, Gallimard, coll. «
Découvertes Gallimard Histoire », 1997.
브뤼노 블라셀, <책의 역사 : 문자에서 텍스트로>, 권명희 역, 시공사, 1999(160쪽).
(타이핑 : 오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