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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은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이자 대중가수로 1920년대 신여성의 대표인물이다. 김우진은 신극운동을 하던 전라도 거부의 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1897년생 동갑내기였지만 윤심덕은 미혼이었고 김우진은 유부남이었다.
임성민(林成敏, 본명: 임관배, 1956년 2월 25일 ~ 1995년 8월 20일)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임성민 본명 임관배
출생
1956년 2월 25일
대한민국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사망
1995년 8월 20일(39세)
장미희(한국 한자: 張美姬, 본명: 장미정, 한국 한자: 張美貞, 1957년 12월 8일 ~ )
1926년 8월,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이 관부연락선(도쿠주마루)에서 현해탄으로 동반 투신한 사건은 일제강점기 최대의 스캔들이자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 유부남이었던 김우진과 신여성 윤심덕의 불가능한 사랑과 시대적 절망이 맞물린 정사(情死)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요 내용 및 인물
윤심덕 (1897~1926): 한국 최초의 여성 성악가(소프라노)로,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하고 활발히 활동했으나 경제적 어려움과 스캔들에 시달렸습니다.
김우진 (1897~1926): 전남 장성 출신의 극작가이자 평론가로, 도쿄 유학 중 윤심덕과 교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의 찬미: 윤심덕이 투신 직전인 1926년 8월 오사카에서 취입한 곡으로, 이후 5만 장 이상 판매되는 대박을 터뜨리며 그들의 비극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사건의 배경과 의혹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김우진은 이미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었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당대 사회에서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현해탄 투신: 1926년 8월 4일 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에서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생존설과 위장설: 당시 일각에서는 두 사람이 레코드사 홍보를 위해 자살을 위장하고 이탈리아에서 생존해 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신여성의 고뇌와 시대적 퇴폐 분위기를 반영하며, 이후 영화와 연극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1926년 8월 5일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년 남녀의 정사(情死).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 지난 3일 밤 11시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선객 명부에는 남자는 김수산, 여자는 윤수선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본명이 아니라 남자는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으로 밝혀졌다.
관부연락선에서 조선사람이 정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사건은 즉각 장안의 화제가 됐다.
극작가 김우진은 유부남이었고, 소프라노 윤심덕은 처녀였기에 불륜에 쏠린 대중들의 관심이 더해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윤심덕은 배를 타기 직전 오사카의 닛토레코드사에서 <사의 찬미>를 취입했으며, 레코드가 발매되자마자 5만 장 이상 팔려나가는 대박을 터뜨렸다.
이쯤 되자 대중들 사이에서 음모론이 돌았다.
레코드사에서 이들 두 사람을 자살로 위장하여 빼돌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년 뒤에 김우진의 가족들은 두 사람이 이탈리아에 살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조선총독부에 요청하여 공식 수사까지 하기에 이르렀으나 허위로 밝혀지기도 했다.
김우진 필명
정로생
자 원강 (元剛)
호 수산 (水山), 초성(焦星)
출생 1897년 9월 19일
전라남도 장성군 읍서면 성산리 관아
(現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성산리)
실종
1926년 8월 4일 (당시 28세)
대한해협 실종
본관 신 안동 김씨
직업 작가, 사업가
활동 1914년 ~ 1926년
윤심덕과 김우진은 누구인가? 윤심덕은 가난한 집안의 4남매의 차녀로 태어났다. 그러나 선교사의 영향으로 공부하여 경성 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졸업했으며, 춘천 공립보통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그녀는 22세 때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 자격시험에 1등으로 붙어서, 동경 고등음악학원 음악교육학과에서 성악 전공하여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가 된다.
목포 갑부집의 아들로 태어난 김우진은 청소년기부터 문재가 뛰어났다. 1918년에 일본 구마모토 농업학교를 거쳐 1924년 3월에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해 6월에 목포로 귀향해 ‘상성 합명회사’ 사장에 취임했지만 정작 회사 운영보다 문학적 포부가 컸기에 부친과 갈등을 빚었다. 1925년에 유달산 밑 사창가의 처참한 생활을 그린 희곡 「이영녀」를 발표했고, 대표작으로 「난파(難破)」와 「산돼지」 등의 희곡이 있다. 신파극만 존재했던 1920년대로서는 대단히 전위적인 실험극이었다. 그는 또 연극평론과 문학평론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를 통해 계몽적 민족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921년 7월 ‘동우회 순회연극단’에서였다. 동경 유학생들의 연극연구단체인 동우회가 극예술협회와 제휴해 1921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국내 순회극단공연에 나섰다. 김우진이 연출을 맡았고, 연극 막간에 홍난파의 연주와 윤심덕의 독창도 있었다. 윤심덕은 1923년 귀국 후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성황리에 첫 독창회를 열었지만 생계를 꾸려가기 힘들었다. 윤심덕은 김우진이 유부남이었음에도,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그에게 기댔던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사의 찬미>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다. 한국어로 일본에서 녹음한 최초의 앨범이고,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최초의 앨범이 됐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곡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윤심덕이 가사를 붙인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김우진이 가사를 붙여줬다는 추측도 있다. 당시 레코드사는 두 사람의 동반 자살을 계기로 이 노래를 집중적으로 홍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들은 유명인의 죽음에 관심을 둔다. 그 심리적 측면은 한편은 측은지심이고 또 한편은 호기심이다. 두 사람의 동반 자살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주는 요소를 갖고 있었기에 레코드사가 절호의 마케팅 기회를 날려버렸을 리가 없다.
그 당시 한반도에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축음기가 채 2,000대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윤심덕의 음반이 5만 장이 넘게 팔린 것이다. 당시 레코드판 한 장을 사려면 쌀 한 가마니 이상의 고가였으니, 축음기는 웬만한 재산가가 아니면 사기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결과적으로 윤심덕은 축음기 보급에 획기적인 역할을 했던 셈이다.
여하튼 우리 대중음악의 여명기를 열어젖힌 노래가 죽음을 찬미하는 노래이고, 그 노래를 부른 당사자는 자살로 막을 내린 비운의 여성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쩌면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던 많은 지식인이 허무주의적인 감성을 담은 이 노래를 듣고 위로받았을지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문화의 생산물은 대중을 위로하거나 행복하게 해주는 매개체였다. 그 매개체가 갖는 매력이 클수록 상업적인 성공을 불러오는 것이다.
출처 : 쿨투라(http://www.cultura.co.kr)
1920년대 중반, 목포에서 활동한 작가로,[22]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유일한 극작가이자[23] 우리나라 최초로 신극운동을 일으킨 근대예술의 선구자이다.[24]
희곡을 비롯해 시, 소설, 평론, 공연 연출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재능을 발휘하며 48편의 시와 5편의 희곡, 20여편의 평론을 남겼고,[25] '시대를 앞서간 천재 작가'로 당대 문단에 파란과 충격을 던져주었다. 고대 한국어에 대한 비교언어학 연구로 유명한 언어학자 김방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2025년 친필 희곡 원고 4편이 대한민국의 국가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희곡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는 건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이다.
생애
"창공은 내 위에, 살려는 힘은 내 안에".[26]
1897년 9월 19일 전라남도 장성군 읍서면 성산리(현 장성군 장성읍 성산리)의 관아에서 당시 장성군수였던 아버지 김성규(金星圭, 1863. 12. 6 ~ 1936. 10. 29)[27]와 어머니 순천 박씨(1864 ~ 1901. 8. 4) 박명화(朴明華)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렵게 얻은 아들이어서 부친의 유별난 애정을 받았는데[28] 그것이 훗날 김우진을 고통스럽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1903년 5세에 모친을 여의고 엄부와 계모 밑에서 자라며 모성결핍과 복잡한 가정환경[29]에 의해 어린시절, 김우진은 말수가 적었으며 내성적이고 고독한 성격을 지니었다고 한다. 1909년까지 부친이 설립한 장성 호남선우의숙을 다녔다.
1910년 목포로 이주하여[30] 목포공립보통학교, 목포공립고등소학교를 수료한 후, 1913년 구마모토현립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재산관리를 위해 농림을 알아야 한다는 부친의 엄명에 따라 일본으로 가서 농업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다.[31] 김우진은 가정에서 철저하게 유교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이는 바로 부친이었다. 농업학교 재학중이던 1915년 18세에 부친의 뜻에 따라 곡성 출신의 유학자 집안 하동 정씨 정봉현(鄭鳳鉉)의 딸인 정점효와 혼인하게 된다. 구마모토농업학교는 당시 새로운 일본 건설을 위한 첨단농업학교로 그는 재학 중 여러 과목을 수학했으며 성적도 뛰어났다. 특히 영어 성적이 뛰어났으며 이 기간 빅토르 위고, 셰익스피어, 다눈치오 등을 사숙하였다.「조선에서의 삼림사업 일반」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농업학교를 졸업했고 뛰어난 논문으로 인정받아 영친왕에게 우등상금을 받기도 하였다.
부친의 강권에 의해 농업학교에 다녔지만, 1913년 16세에 정로생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공상문학>을 탈고하고 자유시를 창작하며 문학에 심취해 있던 그는 졸업 후 귀국하라는 부친의 의사를 무시하고, 1919년 와세다 대학 예과[32]를 수료했다. 이후 본과를 문학과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한다. 일어와 영어에 능통한 그는 서구권 사상을 자유롭게 탐닉했다.[33] 어린 시절 익힌 한문 실력 역시 뛰어나 고서를 탐독하고 시를 지으며 부친과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였다. 대학에 다니면서「마음의 자취」라는 제목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일기 속에는 국가 주권의 상실을 통한하면서 일본의 통치에 대한 과감한 저항과 민족자결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유학생들의 정치적 집회에 참여하고 2·8 사건에 관련하여 수감된 유학생들을 수차 면회한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와세다대학 본과로 진학하며 연극에 몰두하게 되며 1920년에 조명희, 홍해성, 김영팔, 유춘섭, 진장섭, 고한승, 조춘광, 손봉원 등 20여명과 함께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를 결성하였고, 『학지광』에 「소위 근대극에 대하야」라는 연극 비평을 발표했다. 기존의 낡은 신파극을 타파하고 새로운 근대극을 연구하여 조선의 예술적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겠다는 선각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양의 사실주의 연극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극예술활동을 주도했다. 또한 연극·문학 비평 활동을 하면서 창의적이고 근대적인 문학 창작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1921년에는 재일 도쿄 고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와 손을 잡고 〈동우회고국순회단〉(同友會巡廻演劇團)을 조직하여 국내순회 공연을 결행하였다. 이 순회 공연은 김우진이 자금과 총연출을 맡았으며[34] 막간에 홍난파와 한기주의 연주 그리고 윤심덕의 독창이 공연되었다.[35] 부산을 시작으로 40일 동안 25개 지역을 순회하였고 가는 곳마다 대성황을 이뤘다.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극운동이며 근대극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의의를 갖는다.
아버지 김성규가 영농사업을 이어받기를 권하였으므로 1924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36] 6월 귀향하여 부친이 재산관리를 위해 설립한 영농사업체인 상성합명회사(祥星合名會社)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완고한 부친의 엄명에 따라 연극 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회사의 대표로 재직하면서 문학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목포 최초의 문학동인 오월회(Societe Mai)를 조직하여 동인지 『오월회』를 발간하고 지역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독려하며 문학 습작과 비평 활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였다. 오월회는 목포문학의 시초로, 현재 목포에는 김우진을 포함 목포 작가를 기리는 목포문학관이 설립되어 있다. 1915년부터 시를 써왔으나 그간 시를 전혀 발표하지 않았던 그는 동인지『오월회』제1집을 내며 시「아버지께」를 싣었고[37] 제4집까지 발간했다. 그는 목포에서 머물은 2년 동안 희곡 3편을 비롯하여[38] 시, 소설, 연극 및 문학 평론 등 문학 전반에 걸쳐 집중적인 성과를 남겼다.
김우진은 갑오경장 직후에 태어나서 유년기에 동학혁명을 겪고 소년기에 경술국치를 겪었다. 그의 대표작 <산돼지>의 주인공 원봉은 동학군의 아들로 나오고 있다. 20대에 접어들면서 부터는 3.1 운동과 와해되는 봉건체제와 왕조붕괴를 지켜보았으며, 1918년 이후의 사회주의 사상의 혼돈 속에서는 의식의 파열과 재구성의 진통을 겪어야 했다. 거부이자 양반 사대가 장남으로 태어나 식민지 시절 일본 와세다대를 다닌, 부르주아 출신에 피식민지인이었던 그는 이런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많은 내적 갈등을 겪으며 고뇌했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사회적 상황과 가업 계승이라는 가정적 상황의 압박 속에서 번민하며 1926년 5월,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난파>의 발표하였고 6월이 되자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직업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출분(出奔)하여 동경으로 향했다. 아들이라는 울타리를 뛰어 넘었다며[39] 집을 나와 동경에서 희곡을 쓰며 꿈에 그리던 독일 유학을 준비한다.[40]
목포에서 보내오는 귀가 권고를 거절하면서 창작에 몰두하여 7월 <산돼지>를 발표했고 문학적 정점에 이르게 된다. 탈고후 실종 3일전인 1926년 8월 1일, 『조선지광』에 자신의 희곡 <산돼지>를 보내며 "앞으로 나의 작품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원고를 받으면 회답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며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그리고 그 무렵 김우진은 뜻밖의 전보를 받았다고 전해진다.[41] 앞으로 더는 문학을 할 수 없다는 불안과 절망은 갇혀있는 삶에 대한 자유 의지를 충동질했고 그는 결국, 그 해 8월 4일 조선으로 오는 배에서 실종되었다. 목격자도 없었으며 집으로 부치려는 가방만 남기고 사라져 탑승자 명부로 실종 확인이 되었다.[42] 실종 후 온갖 억측이 난무하자 김우진의 죽마고우였던, 조명희를 비롯 두 사람의 가족, 그의 부인, 그를 아는 모든 지인들은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일축했다. 김우진은 출가하기 전에 아들 김방한(金芳漢)[43]을 굉장히 아꼈다고 전해진다.[44] 이 한 살배기 아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집을 나오고 나서 쓴 수상록 <출가>에도 잘 나타나 있다. 목포 문학관 연보에는 김우진이 아들 김방한과 함께 찍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문학계에서는 김우진에 대한 작가 연구가 이루어지며[45] 김우진의 '문학세계가 재조명' 되었다. 1920년대는 저널리즘이라는 개념도 없던 무지한 시대로[46] 편견에 의해 작가로서의 면모가 가려지게 되었으나, 시간이 흘러 문학적 영향력으로 인해[47] 다시 그의 작품세계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40년이 흐른 1966년 이규현 교수가 김우진이 문학사에 끼친 영향을 이야기 하면서 그의 문학을 빼놓고는 한국 문학사를 논할 수 없다는 점이 인정되었고[48] 이후 30년간 여러 연구 논문들에 의해 그의 생애와 작품이 연구되었다. 시대를 앞서갔던 작가인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예술적 선구자로 인정받게 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학사적 업적을 완전히 인정받게 되었다.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는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중 한명으로 수산(水山) 김우진(1897∼1926)을 선정했고 2025년 김우진의 친필 원고 4편이 대한민국의 국가유산으로 등록되었다.
3. 작품 세계[편집]
한국 문학사에서 김우진은 '한국 근대 문학의 개척자'이다. 그의 진정한 가치는 암울했던 시대 속에서 현실을 날카롭게 통찰하며 새로운 시대를 모색했던 선각자적인 정신에 있다. 모든 천재 작가들이 그러하듯, 김우진 또한 어둡고 무지했던 당대에는 제대로 된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나 시대를 앞서가는 작가였던 만큼 시간이 흐를 수록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가 쓴 희곡들은 5편 뿐이지만, 시대를 앞지를 뿐만 아니라 산문문학 전반에 걸쳐서 충격을 줄만한 현대성까지 지님으로써 그를 제외시키고는 연극 문학사, 더 나아가 한국 문학사도 제대로 정리되기가 어렵다. 그는 분명 문예사조의 두 단계를 뛰어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으며[49] 그 자신의 내면적 문제를 희곡에 담아낸 최초의 극작가이자 한국 산문문학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선구자였다.
신파극이 주류였던 당시 신파극단들은 민중계몽을 내세우면서 뻔한 레파토리로 공연을 하고 있었고, 동시대 작가들이 사회현상 등 외면적 문제를 피상적으로 묘사하는 수준으로 머물고 있을 때, 그는 놀랍게도 저 멀리 앞서가 이미 인간 내면세계를 탐구하고 있었다. 그의 신극운동은 조선의 문단과 공연계에 파장을 일으켰다고 평가 받으며, 김우진은 한국 현대희곡을 태동시킨 고뇌하는 지식인의 초상이 되었다.
김우진의 시는 당시 주류 시단의 경향성과는[50] 결을 달리하며 '표현적 자유와 표현의 창조' 속에 한 개인의 삶 속 절망적인 내면적 상황을 낭만적이게 노래하는 듯이 표현하고 있다.
또한 김우진은 한국 근대문학의 선도자로 해박한 식견과 외국어 실력, 선구적 비평 등으로 당대 문단과 공연계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를 요절한 천재로만 기억하지만 그는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 실천가였고 1세대 철학자로 따라오지 못한 당대 사회에서 자신을 들볶다가 스스로 타버린 선구자였다.
- 유민영(김우진 연구가) -
김우진의 시는 모두 48편이 남아있다. 1920년대 시단의 경향과 결을 달리하는 김우진은 시는 개인의 체험에 기반하여 독특한 자신만의 성향으로 시를 썼다. 그의 시는 그의 글쓰기 방식인 개인의 삶을 중심으로 한 내면적 갈등을 바탕으로 낭만적, 주지적으로 노래한 점이 그 특징이다. 김우진은 장르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하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욕망에 충실한 창작 행위를 해왔다. 그런 실천적인 문학 활동은 시 속 화자의 강한 어조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 온갖 구습을 타파하려는 갈망과 새로운 세계를 재건하고자 하는 지향점이 공존하는 가운데, 시인이 현실의 한계에 부딪히는 부분들을 부각하고 있다.
김우진이 창작한 소설은 3편으로 각자의 성격과 사고의 차이로 생기는 갈등을 그리며 내면의 심리 묘사에 치중하였다. 수상록(에세이)들에서 김우진이 보인 사상가로서의 기질은 다분히 진보적이며 생명력의 추구를 강조하고 있다.「곡선의 생활」,「생명력의 고갈」,「신청권」등을 통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고찰하고 있으며 자유의지를 가지고 부단히 추구할 것을 강조했다. 여기서 자유의지란「자유의지의 문제」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는데 벗어날 수 없는 우주의 인과율 속에서 '살려는 의지'를 말한다. 또 그러한 자유의지는「기록의 마력」에서 선인에 의한 기록만을 맹신하는 인습에서 벗어나는 데에도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출가」,「A Protesto」에서는 출가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집을 나오기까지 겪었던 심적 고뇌를 또 다른 자신을 화자로 설정하여 그와의 대화 형식으로 풀어쓴 것이 특징이다.
死[사]와 生[생]의 理論[이론] - 김우진
- 왜 살고 잇소.
- 죽을녀고.
- 그러면 남이 죽이거나 當身[당신]이 스스로 죽이기를 願[원]하오?
- 아니요.
- 왜?
- 사는 것이 죽음이 되는 일도 잇지만, 쥭음이 사는 수가 잇는 理致[이치]가 잇는 것을 아오?
- 그럴 道理[도리]도 잇겟지.
- 道理[도리]로 生覺[생각]해서는 안되오.
- 그러면?
- 삶이나 쥭음이나 道理[도리]가 아니요. 둘이 다 實狀[실상]은 生[생]의 兩面[양면]에 不過[불과]하오. 그러닛가 道理[도리]를 넘어서 生[생]의 核心[핵심]을 잡으러는 이에게는, 삶이나 쥭음이나 問題[문제]가 되지 안소.
- 當身[당신]은 只今[지금] 살고 잇소?
- 아니요. 그러나 死[사]를 바래고 잇소. 참으로 살녀고.
4. 사상[편집]
김우진의 사상은 자유주의로 구별될 수 있다. 특히 표현의 자유를 계속해서 주장하고 작품 내부에 포함시킴으로서, 문화적 자유주의에 대하여 강력한 신념을 가졌으며, 이로 인하여 작품내에서 보수적인 유교 가족관에 대하여 거부감을 표했으며[56], 실제로 부친과 갈등하며 깊이 충돌하기도 했다.
김우진이 살았던 시기는 봉건적 규율과 근대 문물이 교차하던 혼란한 시대였다. 문학 청년이자 지식인으로서 김우진은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 일제의 핍박이 만연한 시대상과 대립하여 자신의 이상이 좌절되는 내적 고뇌에 놓이게 되었고 그가 품었던 자유에 대한 열망을 문학 행위를 통해 표출하였다.
러시아 혁명이후에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사상에도 어느 정도 공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의 주류적인 사상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니체는 그의 근대의식 형성에 정신적 기둥이 되었고 그가 유교적 전통의 견고한 구각을 깨고 근대적 신세계에 접하는데 있어 용기를 주고 무기가 되어주었다. 김우진은 니체와 마르크스의 사상에 근간을 두고 스웨덴 극작가인 스트린드베리의 표현주의, 버나드 쇼의 개혁 사상을 실험했으며 구시대의 인습을 부정하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선각자적 정신을 보여주었다.
동시대 다른 이론가나 작가와 명확히 구분되는 지점은 그의 사상은 서구지향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이 아니라, 김우진 자신이 직접 체험한 구체적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으로, 그의 사상은 그가 살았던 시대를 현실적으로 반영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앞으로 나아가야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