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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는 간재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서 그리 부르며, 한자로 간치(艮峙)로 표시하고, 농암(籠岩)은 뒷산에 있는
농바위라는 바위이름을 따서 부른 이름이고, 신깃골은 새로 생긴 마을 신기(新基)골인데 심계(深溪)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통점은 옛날 통(품질이 낮은 놋쇠)을 굽던 점(놋점)이 있어 그리 불렀다고 한다.
야룡리 (野龍里)
남포군(藍浦郡) 습의면(習衣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일제 개편시 상야리(上野里)와 하야리(下野里)일부,
회룡리(회룡리)를 합하여 상야와 회룡의 이름을 따서 야룡리라 하였고, 주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1992년 2월
면사무소를 옮겨왔다.
1995년에는 야관이 마을에 농공단지를 조성하였다. 여기에는 (주)덕산GS 보령지점이 입주하여 가동중이다.
보금동은 한자로 보검동(寶劍洞)이라고 표기하는데, 보검장갑형(寶劍臧甲形)의 묘자리가 있어 그리 불렀다는
설이 있으며, 고려시대 군사들이 주둔하여 칼을 잡고 있는 곳이라서 그리 불렀다는 설도 있다.
주야리 (珠野里)
남포군(藍浦郡) 습의면(習衣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일제 개편시 상야리(上野里), 하야리(下野里),
주산리(珠山里) 일부를 합하여 주야리라고 하고 주산면에 속하게 하였다.
답박골은 닥밭골이라 발음하기도 하며, 닥나무가 많이 있던 곳이라는 말도 있다. 한편, 옥반동(玉班洞)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두란이는 들안이마을(들 안에 있는 마을), 장작골은 옛날에 장자(큰 부자)가 살아서 장자골(長者谷)이라
하였다는 말이 있다.
갓주렴산,
속주렴산은 주렴산 아래 있는 마을이라서 붙인 이름이다.
신구리 (新九里)
남포군(藍浦郡) 습의면(習衣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일제 개편시 신촌(新村)과 구산리(九山里)를 합하여
신구리라 하고 주산면에 속하게 하였다.
옛날에는 신구1리를 구산(九山), 신구2리를 죽내(竹內)라고 불렀다. 구산은 거북뫼라는 마을 이름을 구산(龜山)
으로 표기 하였던 것을 언제부터인가 쓰기 편한 구산(九山)으로 고쳐 쓰게 된 것이다.
거북뫼는
거그매라고도 발음한다. 엄동골은 음산으로 이루어져 너무 추워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죽나무골은 옛날엔
신촌(新村)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다.
구산마을에는 습의면사무소로 사용하였다는 건물이 있다. 오래된 민가인데, 민가의 사랑채 한쪽을 사용하였다고
하며 옛날에는 별도의 청사가 없이 면정업무를 면장 댁에서 보았다고 하는 말이 있다.
유곡리 (柳谷里)
남포군(藍浦郡) 습의면(習衣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일제 개편시 유곡리와 수곡리(壽谷里)를 합하여 유곡리라
하고, 주산면에 속하게 하였다.
옛날에는 유곡1리를 원유곡(元柳谷), 유곡2리를 수곡(壽谷)이라 불렀다. 버들은 버드나무가 많아 버들이라고 불렀으며,
먼 옛날에는 480여 가구가 살았던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마을의 동서남북으로 네 채의 커다란 기와집이 있었고, 그를 중심으로 수많은 집이 있어
전라도(全羅道)에서 과거 보려고 올라가던 사람이 이곳을 보고 "여기가 한양(漢陽)이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씨가 마을 앞 당산을 허물고 묘를 쓰고부터는 마을이 쇠락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1960년 이 마을에 수곡초등학교(壽谷初等學校)를 개교하여 운영하다가 1999년에 폐교하였다.
증산리 (甑山里)
남포군(藍浦郡) 습의면(習衣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일제 개편시 내증리(內甑里)와 외증리(外甑里)를
합하여 증산리라 하고 주산면에 속하게 하였다.
시루뫼
성(城)이 있는 마을이라서 시루뫼라고도 하였다. 실제로 시루뫼와 성너머 사이에 토성의 흔적이 있다.
돌고개도 돛곶이 변한 이름이다.
본디 마을 앞까지 푸른 바닷물이 출렁이던 곳이었으나
1960년대와 1990년대 두 차례에 걸친 간척공사로 넓은 간척평야가 마을 앞에 펼쳐져 바다의 정취는 사라져
버렸다.
창암리 (倉岩里)
남포군(藍浦郡) 불은면(佛恩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일제 개편시 옥상리(玉上里), 창촌(倉村), 연암리(燕岩里), 평촌(坪村) 일부를 합하여 창촌과
연암의 이름을 따서 창암리라 하고, 주산면에 속하게 하였다.
이곳에 있는 간치역은 1931년 현 위치보다 300여M 남쪽 황율리 지역에 세워졌으나 1982년 이 마을로 옮겼다.
제배
마을 앞에 있는 제비바위로 인하여 제배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이를 한자로 연암(燕岩)이라고 하였으며,
남전은 조선시대에 남전역(藍田驛)이 있었고, 창촌은 창고(倉庫)가 있어 창말 또는 창촌이라 하였던 것이다.
갓너머
갓너머는 창촌에서 볼 때 갓 너머 즉, 바로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비선거리'는 조선시대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송정명이라는 사람의 비석이 있어 비선거리라고 한다.
남포군(藍浦郡) 불은면(佛恩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일제 개편시 화산리(花山里)와 평촌(坪村) 천곡리(泉谷里),
정곡리(井谷里)의 각 일부를 합하여 화산과 평촌의 이름을 따서 화평리라 하고, 주산면에 속하게 하였다.
약현(蒻峴),
화평1리를 약현(蒻峴)이라 부르고
화산
화평2리를 화산(花山)으로 부르기도 한다.
삿갓재를 큰삿갓재, 안태를 작은삿갓재로 부르기도 한다.
동오리 (東五里)
남포군(藍浦郡) 불은면(佛恩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일제 개편시 동막리(東幕里), 내동(內洞), 오상리
(五常里)와 심전면(深田面)의 평장리(平章里) 일부를 합하여 동오리라 하고, 주산면에 속하게 하였다.
오상태는 옛날 다섯 사람의 재상이 살았기 때문에 오상태라고 하였다는 말이 있다.
선들 마을 앞에 높이 2.26M, 폭 1M에 이르는 선돌이 있어 그리 부른다.
선돌뿐이 아니라 5기의 고인돌도 흩어져 있어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았음을 짐작케 한다.
동오리 안골에는 불은면사무소 터라는 곳이 전한다.
삼곡리 (三谷里)
조선말엽(朝鮮末葉) 불은면(佛恩面)(佛恩寺址가 있음) 지역인데 1914년 개혁 때 동곡리(東谷里) 천곡리(泉谷里)
정곡리(井谷里) 월현리(月峴里) 일부를 병합 삼곡(三谷)이라 하여 주산면에 편입하였다.
황율리 (篁栗里)
남포군(藍浦郡) 불은면(佛恩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일제 개편시 황성리(篁城里), 율동(栗洞), 월현리(月峴里)
일부와 습의면 회룡리 일부를 합하여 황성(篁城)과 율동(栗洞)의 이름을 따서 황율리라 하고 주산면에 속하게 하였다.
황성은 테뫼식 산성이 있는 산 아랫마을이다. 월현(月峴)으로 가는 사이에 백제시대로 추정할 수 있는 토성의 흔적이
있고, 마을 사람들은 테뫼라고 부른다.
역전은 간치역 앞에 있는 마을로서
1931년 황율리에 생긴 기차역을 1982년에 북쪽 300M 떨어진 창암리(倉岩里) 지역으로 이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