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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서부지역작전(웅진-고랑포-봉일천전투 계속) 2-2
4. 개성-문산-고랑포지역 전투관련 증언 /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당시 전투 참여자들의 증언
(1) 옹진지구
육사5기 동창회장분의 증언( '16년도 가을이다)
오류동에 회장되시는 분이 연락이 왔다. "내가 죽기 전에 내동생 이춘만중위"를 찾아달라는 애원이었다.
나는 지도를 준비하고 전사책을 들고 직접 빌딩 회장실로 찾아갔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오. 요즘 유해발굴을 한다고 하는데 내 동생 소식이 궁금해서 연락을 했어요. 먼저번에 DNA감식위한 내 가글도 가져 다 의뢰했는데 아직 결과가 않나왔나요?"
"예, 형제분이 나라를 지키려 몸바치신 경우인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먼저 감식결과는 비교해야 할 유해가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동생 되시는 분이 전사한 지역은 지금 우리 땅이 아니고 북한 지역이라 발굴자체를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내 동생이 전사한 곳을 아시나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전사자카드에는 옹진지구라고만 나와 있거든요."
"그래요, 그럼 지도에서는 지금 어디쯤 되나요. 한번 보여주세요."
나는 지도를 펴놓고 전사책을 이용하여 당시의 옹진반도 전사를 말씀드리고 전사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사실 전사책만으로는 판독이 어렵다고 했다. 그 이유는 예비대인 제2대대는 원래 연대본부와 함께 있다 투입시는 좌측 대대인 제1대대지역으로 출동하게 되고 이어서 연대의 철수 명령으로 철수할 때는 강령에서 중리동 부포항으로 오게 되는데 아마도 처음 예비대 투입인 천장산과 백운봉 사이의 수대산근처가 될 것같다고 말씀드렸다.
회장님은 계속하여 아무말도 안하시고 지도만 손으로 만지고 계셨다.
우리도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할지 막막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지도를 회장님께 드리고 혹시라도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제일 먼저 이 지역을 발굴작전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자리를 일어섰다.
여운연 (제18연대 제2대대 제6중대, 1929생) : 나는 48년 111월 18일에 제3사단 제18연대에 들어가 옹진지역으로 이동하여 경계임무를 하였다. 당시는 전쟁전이지만 툭하면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와 우리지역을 공격하여 많은 피해가 나곤 했다. 그러면 바로 우리가 또 역습하여 적을 물리치고 뺏긴 고지를 탈환한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은파산인가 하는 곳에서 우리 소대원 40여 명이 전멸한 적도 있다. 그 당시는 언제 적이 다시 기습할지 모르니까 전사한 전우의 유해처리는 제대로 하지 못한 걸로 생각된다
변정희(민간인, ?) : 나는 이북 연안지역에 거주하면서 연안여고에 다니다가 6.25전쟁 중에 남한으로 넘어 왔다가, 9.28 서울수복이후에 당시 학교에 가보니 악취가 너무 심하였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연안읍 관철리의 학교 언덕너머에 백토굴 일대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방치되어 있다고 했다. 들은 이야기로 북한군이 퇴각하며 끌고 온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북으로 철수했다고 했다.
나. 옹진지구 관련 연평도와 8240부대원 들을 이용한 증언 청취
나는 이곳 옹진반도와 도서지역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려 무척이나 노력했다.
2000년 3월, 아직 겨울바람이 드세고 있을 때에 이러한 전사에 기초하여 혹시나 연평도에 우리 17연대병력들이 밀려들어 배가 없어서 못 떠나고 전사한 인원이 있을까해서 국방부 박인영 중령과 이곳을 찾았었다.
그리고 마을회관을 찾으니 모두가 어업활동을 위해 다 나가있어 만나지를 못하고 해변 방책선을 따라 걸으니 몇명의 나이드신 분들이 해변 쓰레기 수거작업을 하고 있었다.
"혹시 6.25전쟁시 이곳에 살고 계셨던 분 안계십니까?"
"왜요? 여긴 있어도 어려서 잘 모릅니다."
"권총차고 나타난 키가 쬐고마한 대장은 어려서 본적이 있는데."
"혹시 몇명이나 함께 있었나요, 국군이었어요?"
"나중에 들으니까 백인엽이라고 하던가, 한 3~4명이 이리로 해서 내려가 배타고 가는 것 알지요."
"아, 예 좋은 정보 입니다. 그럼 동네에 누구를 만나면 그 당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동네 중간에 가면 6.25당시 공덕비가 있어요. 거기 가보면 당시 이야기가 조금 있어요. 상세한 것은 바로 포구 좌측으로 들어가면 옛날 대의원집이 있는데 그 양반이 이곳에서 가장 오래 됐고 총명하니 만나 보세요."
"여관방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린 먼저 그 공덕비를 찾아가 보기로 하고 그곳으로 차를 달렸다. 오늘 우리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근무하는 해병대에서 차량과 안내 간부를 배치하였다.
공덕비를 가니 군인의 내용이 아니고 이곳의 의용군으로 6.25당시 활동한 사람들 이야기인데 전투를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들어오는 내무서원들을 사전에 국군에게 알려주어 처치하게 하였고 북으로 침투해 들어가 전사했다는 이야기였다.
다시 대의원을 찾아갔다.
물어서 가니 바로 항구 우측 가까운 곳에 사시는데 집도 한옥으로 좋았다. 집에 가려 밖에서 서성거리는데 어느 노인이 다가오며 왜들 집앞에서 계시느냐고 묻는다.바로 이 집주인, 우리가 찾는 분이 어장에 갔다 들어오는 길이였다.
그 시절 대학까지 서울에서 나왔으니 대단한 인물이셨다고 하니 뭘 잘 모르시는 소리란다. 일제시대부터 60년초까지는 이곳 연평도가 대한민국의 금고지기였다고 한다.
"이곳에 조기 성수기가 되면 배가 3천척이 몰려듦니다. 이승만때 부통령이 여길 왔어요."
"그러니 생각해봐요, 팔도에 모든 잡놈들 다 모이고, 집집마다 아가씨 2~3씩 다 있고, 그 시절에 명동보다 여기가 돈이 더 흔한 곳이요."
우린 깜짝 놀랐다. 아무리 조기값이 금값이라해도 하나의 섬이고 포구인줄 알았는데 그렇게 불야성을 이루었다니 그때 돈 벌어 대부분 떠나고 본인처럼 못난 사람만 여기 남아 있다며 겸손해 한다. 그래서 지금 이곳의 웬만한 집은 여자들이 다 한번씩 이상은 바뀌었단다. 살다 돈 많은 놈 만나면 배타고 가버리면 그만 이란다.
그러시면서 여기서 반공이니 좌경이니 하는 소리는 서로 못하고 산다고 한다.
바로 앞에 북한이고 대한민국은 군인 빼 버리면 여기 인천에서 오려면 2시간인데 북한은 20분이면 들어오는 마당에 무슨 편가르기가 있겠냐며 중립이라 한다. 6.25전쟁 때도 잠깐 내무서원이 들어왔다가 도망가고 유엔군 함정과 해군 배가 지키고 있었는데 상륙은 안하고 바다에서 대기하고 이곳에는 청년단원들이 배로부터 지시를 받아 움직이면서 치안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일부 지역주민들이 소리없이 죽어가는데 하루는 청년단원이 어디서 잡았는지 프락치라며 몇명을 끌고 항구쪽으로 가고 조그만 모타선이 다가와 그 인원을 실고 저 멀리 정박중인 배로 실고 들어가면 그 배 위에서 따콩하고 몇번 소리나면 그만이란다.
물결속에 뭐라고 소리지르는지도 모르고 바다물에 떨어져 버리는 모습을 몇 번 봤다고 한다.
"혹시 유격대원들이 이곳에 들어와서 활동하면서 북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은 없었나요?"
"그건 어쩌다 들어왔다는 소문은 있는데 사실 아무것도 몰라요. 섬의 북쪽은 일절 출입금지요."
우린 따뜻한 차을 대접받고 집을 나와 군숙소에서 하룻밤 머물고 가장 높다는 봉우리에 올랐다. 북한 지역을 바라 보았다. "저기가 강령이고 그 좌측에 용호도리, 그 밑에 부포항, 대수압도 소수압도, 용매도, 우도다. 우도는 바로 그 앞이 해상경계선으로 지금 우리 지역으로 해병대가 지키고 있고 민간인은 없다.
저 대수압, 소수압도, 용매도, 우도에는 우리 8240부대의 작전이 있어 지금 용사들이 잠들고 계신 곳이다. 언젠가는 다시 찾아와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수시로 강화에 들러 강화 유격군동지회에 가서 8240부대원들을 자주 만났다.
거의 연에 3~4회 정도는 방문하여 그분들의 하시는 이야기를 듣고 장차 어디에 들어가 이 유격군들을 발굴할 것인가를 뇌속에 저장하는 것이다.
그럼 8240부대원 출신들의 관련 증언을 들어본다
참전용사 장기락(93, 8240부대, 국1-12연대)의 증언 : 나는 연백이 나의 고향이었다. 해방이 되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집으로 간 것이 군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12연대에 들어갔다. 그때는 여기저기서 군에 들어오라고 선전하고 다녔다. 그러니 처음에는 정식 군인도 아니고 전선에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데 함께 동참하면서 자연스럽게 12연대가 되었다.당시는 매일 38도선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누가 먼저인지는 잘 모르지만 쌍방간에 한치의 땅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것이였다고 본다.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른다. 생각하기에 매일 서로간에 총질을 하곤 했다.
그러다 외박을 해도 된다고 해서 고향땅이니 집에 일을 거들려고 갔는데 포탄소리가 요란해서 일어나 보니 여기저기 야단이다. 저놈들이 또 헛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병력들이 퇴각하고 있었다. 이미 본대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 철수 병력을 따라 임진교를 건넜다. 행주나루로 왔는데 타고 갈 배가 없다. 누군가 조각배를 하나 구해서 여럿이 올라타고 깜깜한 밤에 물살이 가는데로 갔다. 그러면 우리는 영등포쪽으로 가는줄 알았다. 하지만 새벽녁에 보니 배는 영등포가 아닌 어덯게 된건지 서쪽으로 이동하여 다시 연백해안에 다다랐다.
우리는 서로 헤어지고 나는 집으로 숨어들었다. 완장을 찬 인원들이 호르라기를 불고 다니는데 방공호에 숨어서 나가지 않았다. 얼마 있으니 인검을 별로 하질않아서 그런대로 집에서 살았다. 그러다 동네 반공유격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흩어져 있는 총기를 가지고 무장을 하여 밤에 주로 행동하는데 인민군의 불신검문에 다행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다 아군이 올라오고 제12연대도 올라가는데 나는 따라가지 않고 그대로 동네에 남았다. 그런데 또 얼마있어 아군이 물밀듯이 밀려내려가는데 나는 연백에서 교동도로 내려가 계속하여 유격대를 하게 된다.
홍영표님(제8240유격군 D-11연대) : '52.1.1일에 황해도 옹진을 침투해 들어가 먼저 들어간 인원과 접선을 하고 적정을 수집하여 동행해 나오는 임무를 수행하다 도중에 용호도리에서 적에게 노출되어 적 수십명을 죽이고 탈출에 성공을 하게 되는데 그당시에 전우들이 전사하여 피아구분도 못하고 그저 보이는대로 호속에 밀어넣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 용호도리는 그리 크지 않은 섬인데 서해로 해서 이곳에 아지트를 구축하여 육지와의 연결통로로 활용하는데 그만 정보가 새어나가 구축되었던 인간정보망이 끊어지고 말았단다.
유승준님(제8240부대) : '52. 여름에 미군 전투기가 야간 폭격을 들어갔다가 적의 대공포에 맞아 연무도와 연평도 중간지점에 전투기가 떨어지는데 조종사를 찾아달라고 요청하여 대원들이 출동해 들어갔다.
미군이 알려준 근처에서 비행기의 잔해를 확인하고 조종사도 죽었는데 찾았다. 하지만 어떻게 들고 나올 수가 없어서 용매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대당산인데 103m다. 이곳에 일단 가매장하고 미군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데 1주일이 지나도 미군이 안나타나 우리들의 안전을 위해 그 지역을 이탈하여 복귀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눈에 선하다. 때가 되면 꼭 찾아주기 바란다고 당부를 하신다.
"우리를 돕기위해 참전하였다. 미군 조종사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픔니다."
이재균님(제8240부대 울백 5부대) : '51.4월부터 울팩5부대 요원으로 주로 옹진으로 침투해 들어가 공작활동을 많이하는데 이곳이 해주항으로 가는 중간지점으로 작전상 중간지휘소가 있었다고 한다
주로 야간에 이곳에 들어와서 옹진이나 해주등지로 침투해 들어가다 해변에서 적에게 기도가 탄로나 격전을 벌이다 전우가 전사하면 무동력선을 이용하여 대수압으로 와서 이곳에 가매장하게 된다고 한다. 많은 전우를 배로 옮겨도 왔지만 그럴 경우는 드물고 주로 풀속이나 바위틈에 숨겨두고 돌아오게 된다며 이곳이 중간지점이라 많이 있을 거라 한다.
문태삼님(제8240부대 동키부대) : 본인이 당숙에게 들은 바, 북한지역 창린도에서 1951년 9월에 10월 사이에 피난민이 월북하여 인민군으로 투입되었는데 당시 피난민 천여 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1950년 서울 수복 당시 지주, 군서기. 면서기를 했던 사람들을 철사로 손목을 묶고 옹진 광산으로 끌고 가서 수십명씩 광산에 몰아넣고 살해도 했다고 들었다.
우국형님(강화유격대) : 우리 부대는 연백지구 고미포에 상륙작전을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에 고미포구에서 100~150m 덜어진 지점에서 적에게 노출되어 적군의 박격포. 기관총 등의 사격으로 6명이 전사했다. 전사자 6명은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바다에 떨어져 갯벌에 묻혀 버렸다.
다. 청단-개성-고랑포-문산 전투지역이다.
임진교 폭파는 인도교는 하고 철교는 제대로 폭파되지 않아 적이 국군 제12연대 일부를 따라서 들어오다 아군의 집중사격에 뒤로 물러나 일시적 임진강선에서 머무르게 된다.
초기에 적이 열차로 개성에 진입하고 정신이 혼미해진 연대는 우왕좌왕 하면서 벌써 시간은 정오에 다가서고 연대장(전성호 대령)이 유무선 두절로 대대들의 위치 파악이 곤란한 가운데 짚차로 철수의 길에 들어섰을 때는 수많은 민간인들도 봇따리를 이고 피난길에 들어서 1번국도는 홍수처럼 인원과 차량으로 꽉 차있어 움직이기 곤란했다.
제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의 임진교 후퇴 장면을 연출해 본다
"야, 빨리 모르라오?"
"알겠습니다."
"너희들 뭐하나 저 사람들 좌우측으로 밀어내, 너는 그 사이로 차를 밀어넣고 악셀레다 밟아?"
민간인이 다 우군은 아니다.
그중에는 벌써 인민군이 변복으로 끼여들어 함께 이동하며 우리 군의 이동상황을 보고도 하고 필요한 경우는 몸속에 숨긴 총을 이용하여 살육도 하며 숨어든다.
그러니 아무리 연대장 차라 하여도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꽝", 앞차와 옆차와 2중3중 부딪치는 차량들, 그리고 연대장 이마가 터지고 피가 흐른다. 지금 임진교를 폭파 못하면 적이 따라 넘는다. 하지만 연대장이 다리를 못건너 왔으니 어쩌랴?
드디어 피를 흘리는 연대장이 다리를 넘고 사단장에게 보고가 된다. " 다리 끊을 까요?"
아침 04:00에 시작된 적의 무력남침은 07:00에야 사단장에 보고 되고 서울에 와 있던 직무대리 최경록대령 11연대장과 사단장은 사단에 들러 상황을 파악하고 문산으로 향했다. 오는 도중에 육본으로부터 별별 지시가 날아온다.
"육사교도대대, 보병학교 교도대대, 3사단 22연대(-1), 제5사단 15연대 3대대/20연대 3대대가 들어가니 임진강을 방어하라?"
"기갑연대 1대대 장갑차도 지원한다. 임진강을 방어하라?"
이미 총장은 수색에 11연대가 출동준비를 하는데 짚차를 타고 왔다 가고 또 의정부로 가고 독한 술기운을 날리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이시간 고랑포 우측 가여울로 일련의 적들이 급속도하를 하여 진출하고 3대대는 임진강을 건너와 강변을 따라 연대를 찾고 있다. 같은 시간 임진교에서는 제12연대장이 나오고 수많은 피난민이 함게 몰려들어 아수라장이다.
"빨리 폭파하라!?"
사단 공병대대장이 언성을 높이고 있지만 폭파를 책임진 제3중대장 김동일의 행방이 묘연하다.
별로 인원도 없는 제11연대가 임진강을 앞에 두고 축차적으로 방어선을 점령해 들어간다.
연대장은 임진교 앞에서 공병 작전장교 정극서 대위와 폭파를 위해 실갱이를 벌이고 있다.
폭약을 설치하고 점화를 해도 불발이다.
"폭파병 날 따르라", 정대위가 다시 철교에 폭파준비를 하는데 대안의 적이 무자비하게 총을 쏜다. 한눈에 보이는 적들이 대열을 이루어 남하한다.
이때 대안상 전초진지에 장병들이 정신을 가다듬고 맹사격을 하고 포병이 일부 사격으로 응전이다. 무방비로 내려오던 적이 놀래어 뒤돌아 갔다. "와 저 남반부 아새끼 동무나래 미쳤소?"
그들은 비록 쥐라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린 우리를 얕잡아 보다가 된통 당하여 멈칫거리게 된다. 후방에서 지원하러 올라오는 부대들이 지금 봉일천을 지나고 있다.
우측지역 13연대 3대대는 임진강 넘어 아곡동이라는 곳에 대대본부를 두고 방어임무를 수행중이다. 전날 단결활동과 모처럼 밖으로 나가는 승인이 떨어져 일부 병력이 나가고 일부는 주말을 이용하여 인근 냇가에서 고기 잡기도하고 일부는 그 당시에 있었던 간부들의 인사이동 등에 따른 회식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은 아무것도 전사 기록에 없다.
모두가 잘 싸웠다고 기록 되고 있다.
다음은 당시 연대장과 3대대장의 전후 증언 내용을 일부 알아보고자 한다.
"연대장(김익렬대령.예)중장 '68.8.17)의 증언이다.
그 당시 6.25전쟁을 만났을 때에 제13연대는 훈련중이라 실탄을 전혀 안 가지고 있었다는데 그렇습니까? 나중에 연대에서 차량으로 실탄을 싣고 와서 분배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한 기억은 없는데 ...... , 나는 그때 거짓말인지 알았다. 적이 왔다고 해서..... .
"3대대는 어떻게 배치 했습니까?"
"고랑포에서 적성이 우리 책임지역이었다. 전차는 이리로 왔다. 도섭하는데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전차 2대를 파괴한 것이 바추카포로 한 것입니까?"
"바추카포로는 끔적도 안해, 계곡위에서 휘발유통에다 기름을 채우고 굴려서 파괴를 했다."
"그때 3대대가 강 남쪽에 있었습니까, 임진강 넘어서 있었습니까?"
"넘어서 있었다."
"각하가 여기(금곡리)에 계실때 제18연대 2대대가 동두천인가 옆으로 해서 철수해 왔습니까?"
"이것은 전사상으로는 이야기가 안됐는데 대대장 하나가 공산당이다. 사관학교 교도대대에서 배속된 부대 중에 있었다."
"조암중령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때 교도대대와 연락이 끊어져 버렸다. 이 대대가 아침부터 행방불명이야. 없어진 부대가 해가 어두컴컴할 때 부대가 대열을 지어서 나타났다. 그런데 그 다음에 그 놈의 부대가 인민군을 데리고 왔다. 광탄리가 어디고...... ."
"그쪽에 있는 것은 제18연대 2대대일겁니다. 동두천으로 갔다가 이 길로 나와서 법원리로 해서 용미리로 해서 이리 왔어요."
"하여튼 오던 부대가 우리한테 맞아서 많이 죽었다......북한군도 들어올 때도 아군을 가장해서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교도대 주암중령이 빨갱이인데 그래서 적진지로 갈려고 하다가 여기서 죽었습니다."
"아니다. 내 CP에서 죽었다."
다음은 제3대대장 유재성소령(부임 3일만에 전쟁)의 인터뷰 내용이다.('68.8.23, 4H구락부 중앙 위원회. 충주시장 역임)
"6.25전쟁 당시에 어디에 계셨습니까?"
"CP에서 자고 있었다."
"전방부대에 지원화기는 무엇입니까?
"2.36"이 13문, 81mm가 4문 있었다."
"그러면 전차는 어디서 저격을 했습니까?"
"우리는 자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러니까 민간인이 와서 적의 전차가 왔다해서 알았다."
"몇 시경에 건넜습니까?"
"밤입니다. 12시인가, 그렇게 되었다. 11시나 12시경이다. 그때 비가 왔다."
"26일 내려와서 여기에서 제1대대를 저격했습니까?"
"그것은 생각안난다. 제1대대가 그 다음날까지 견뎠다는 것인가요?"
유대대장은 조금 모호한 또는 연대나 사단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는 일절 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분들의 말이 맞겠지요라 반복할 뿐...... .
전방대대는 임진강을 도하하여 금곡리 방향으로 들어서고 천애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연대(-)는 임진강 연하는 선에 방어선을 구축하고선 이어서 파평산에 진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3대대 10중대 기관총 사수를 했던 고)황대형(12중대 소속인데 1개반이 10중대에 배속됨)당시 하사의 증언은 많은 의구심을 갖게함은 물론 현재 전사가 너무 예쁘게 쓰여졌다고 판단이 된다.
나는 발간되지 못하고 이분의 유고록이 되어버린 "나를 부르는 전우의 목소리"를 원본을 가지고 있다. 유해발굴 업무로 '99년 9월부터 운명하시던 때까지 1년이면 10회 이상을 만났고 다부동 지역에서는 한달을 같이 움직이기도 했던 분이다.
'제1사단의 구국용사회 업무를 거의 도맡아 한 분이다.
고랑포 지역도 3번이나 함께 탐사를 했다. 파평산 우단 지금 소총사격장이 있는 181고지는 직접 올라섰고 가여울과 경순왕릉, 자작리 산 정상, 화석정에도 갔고 금곡리에도 갔다.
미확인 지뢰지대란 경고 간판을 무시하고 나는 그분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지금 181고지가 있나요?", '18년도에 작고하신 황대형 용사님의 질문이 기억난다.
국군 제1사단 13연대 황대형 참전용사님이 '00년에 고랑포의 최초진지를 함께 탐사하러 오셨다가 물어 보셨다.
당시 제25사단 안내 간부가 지금도 있고 지금 연대 사격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다 올라가 탐사를 하는데 당시 황용사님의 연세가 80인데 일반 구두를 신고 그대로 산을 타는 모습이 경이로웠던 기억이 살아나온다.
용사님 이야기가 그 산에 유해가 줄줄이 물려진 것처럼 죽어 있었다고 하신다. 본인의 분대원도 죽었고 인접 소대장이 죽어서 이곳 7부 능선에 가매장하고 뒤로 물러났다고 한다.
여기서 전쟁 당일 전후의 생생한 이야기를 직접 들은 이야기로 적어 보겠다.
"선배님, 6.25전쟁 전일에 외박인지 휴가인지 엄청 보내 버려 싸울 군인도 없었다면서요?"
"좋은 질문 입니다. 우리가 온양에서 올라와 용산에 있었어요. '49년도 10월에 임진강으로 올라왔는데 고랑포 뒷산 경순왕릉이 있는 우측 산에서 38도선 경계임무를 했어요.
나는 그때 CAL50 사수였는데 진지를 구축하고 얼마 있으니 북측에서 발사한 총탄이 진지에 날아와 직접 기관포로 응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북한군들은 보급품을 운반하는 우마 차나 트럭으로 보이는 차량이 1주일에 두세 번 정도 주기적으로 운행했는데 전쟁이 가까워진 '50.6.19일부터는 북쪽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어요.
우마차는 보이지 않고 차량인지 전차인지 몰라도 무언가 계속 들락 거리면서 도로가 먼지로 뽀얗게 덮혀 물체를 식별할 수조차 없었어요.
우린 이걸 수시로 보고 했으나 아무런 조치는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속 부대 간부들이 바뀌어 대대장부터 소대장까지 연대장을 제외 하고는 직속 상관이 죄다 바뀌어 버렸어요. 그 이유는 지금도 의문입니다.
긴장된 며칠이 지나 그 운명의 '50.6.24일 토요일, 아니 경계근무중인 우리들에게 모두 중대본부로 철수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오전 10시경 다 철수했어요.
"오늘은 전 중대 1/2병력을 휴가 또는 외박을 보낼 것이니 신청하라!"는 지시가 하달 되었습니다.
아니 전방에 북한군의 동향이 수상한데 그런 보고를 계속 하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않터니 경계초소에서 다 철수시켜 놓고 휴가나 외박가라니.
그걸 그때는 배고픈 간부가 많아서 부식을 남겨 먹으려니 하는 생각만 했지 별 의문이 않생겼는데 전쟁이 터지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선배는 제 13연대가 온양에서 올라온지라 외박을 신청해도 갈 곳도 없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남아 있는 소대원들과 임진강 지류인 하천에 나가 물고기를 상당히 많이 잡아 중대로 돌아와 일요일 아침에 매운탕으로 회식을 하기로 했다.
"매운탕의 꿀맛을 기대하며 밤은 깊어 갔다."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늦잠이 들었다.
그래도 내일은 일요일이니 늦게 일어나도 된다는 희망을 갔고 잠이 들었는데 얼마를 잤을까 그런데 포성이 울리고 땅이 진동했다.
그래도 누구도 잠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유는 이런 정도의 포격은 가끔 격었기 때문에 단순한 위협사격으로 생각했다.
황하사도 애써 잠을 청하며 아침에 먹어볼 매운탕의 달콤한 입맛을 그리며 눈을 다시 감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아침이 밝아올 무렵 인접 제10중대장 박형수 중위가 다급한 목소리로 "비상", "비상",이다, 전병력은 전투준비하고 진지로 투입하라!" 외치며 안절부절 하며 옷을 입는다.
황하사는 바로 위의 분대장 한시원 이등중사를 흔들어 깨웠다.
"분대장님, 전쟁이랍니다. 전쟁."
우리고 허겁지겁 진지에서 철수해온 CAL50 기관포와 탄약이 담긴 탄통 3개를 동료들과 들고 진지로 달렸다. 중대본부에서 진지까지는 30분 거리다.
산등성이를 달려 점령해야할 진지 앞에 왔는데 이미 적이 점령하고 있다.
소대장 고인식 소위는 아직 오질 못했다. 토요일 저녁 고기잡이가 끝난 후 본대인 제12중대의 행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계속된 비상계엄령이 토요일 아침에 해제되면서 중대 간부들의 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라는 누구의 지시도 없다. 그래서 황하사가 한 분대장에게 먼저 제안했다.
"분대장님, 적이 아직 점령하지 않은 가여울 위 능선을 점령하지요!" 그리고 능선 정상에 기관포를 설치하고 탄알을 장전했다.
임진강의 수심이 얕은 곳을 이용해 북한군이 건너고 있는 모습이 선명히 보인다. 원래 강은 도하가 불가능 하다.
하지만 그 당시는 일정기간 비가 내리지 않아 수심이 얕아져서 도섭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아군진지는 공산군이 점령하여 있고 아군 후방으로 치단고 있는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드르륵하는 굉음과 함께 물속의 적들이 쓰러지고 혼비백산하며 흩어진다.
"군에 들어와 처음으로 황하사는 사람을 죽였다. 그 죽은 공산군은 임진강 물에 잠겼다."
얼마나 전쟁초기에 허술한 대북경계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비록 우연의 일치라 할지 몰라도 병력을 휴가 보내고 일선 지휘관들을 다 교체 시키고 경계진지에서 보고 되는 적상황을 무시해 버리는 일, 더구나 하필 하루 전날에 비상을 해제하고 경계병을 진지에서 중대본부로 불러들인 그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사실 우리가 배운 전사의 최초진지 전투는 사실 없었다."
물론 너무 과격스런 판단이고 단순히 이곳 고랑포만의 문제라할지 몰라도 그건 오해다.
단언컨데 그 많은 참전용사님들의 증언을 듣고 보면 최초전투는 해보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물러났고 심지어 총마저 정비한답시고 거둬들여 몽둥이 들고 있다가 총맞고 숨져간 안타까운 용사님도 많았다.
황대형 참전용사님은 나와 '99년 10월부터 만나 '18년 운명하실 때까지 제1사단의 전투현장에 함께 했으며 다부동 참전전우회 회원님들과 거의 매년 한번씩 자리를 같이 했다.
용사님은 솔직히 시인하셨다.
무슨 최초진지 전투야며 적이 먼저 와서 점령하고 있었다.
아군은 적이 오기도 전에 다 전장에서 물러나 있었다는 이야기가 오히려 정답이라 하셨다.
가여울 일대에서 사격하다 말고 주위를 보니 분대장도 없고 아무도 없이 다 사라지고 부사수, 탄약수와 세명이 남았는데 실탄도 다 떨어지고 재보급을 해줄 사람도 없었다.
명령을 누가 내려야 하는데 아무도 없으니 사수가 기관포를 붙들고 지휘를 했다.
"일단 중대로 철수 하자. 그곳에 가면 소대장이 있겠지."
임진강 비탈길을 달려 중대본부에 왔는데 소대장도 아무도 없다.
어제 잡아다 놓은 매운탕용 물고기만 두 눈을 뜨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대대본부로 가자"
탄통도 버리고 기관포만 3등분하여 메고 뛰었다.
임진나루에 있다는 대대본부로 가기 위해서 자장리에서 장파리를 지나 금파리에 이르렀는데 이미 적이 금파리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합지졸은 모두가 마찬가지다.
이제 살려면 파평산을 넘어서 후퇴해야 한다. 철수 병력들은 파평산을 넘어 남으로 남으로 내려 가는데 황하사팀도 그 철수 병력을 따라가다 지금 이율곡 선생 사당이 있는 금곡리에서 운좋게 대대를 만나고 중대장을 만나고 소대장 고인식 소위를 만났다.
이때가 26일 아침으로 세끼를 굶고 처음으로 밥을 먹었다.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고 , 살아도 같이 살자"고 서로 굳게 손을 잡았다.
이때 모인 병력이 대대의 1개중대 남짓 되었다.
앞으로 중요 국면마다 증언내용을 언급하게 되겠지만 제1사단은 조직적으로 전투하지 않았다.
황대형용사님의 이야기대로라면 지금 초기전투 제1사단의 전사분량은 다시 써야한다.
전쟁 당일 날 06:00에 가여울의 임시진지에서 최초사격을 시작으로 한 한시간 사격했다.
그날 오후까지 어떠한 지시도 받지 못했다.
아무런 유무선 통신이 없는데 어디로 집결하고 무슨 대전차 특공조가 출현하느냐고 반문이다.
적의 전차를 본적도 없고 전쟁사에 언급된 대전차특공조에 편성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단다. 그런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싸울 인원도 장비도 부족하여 허망하게 무너졌는데 무슨 조직적인 철수냐고 묻는다.
혼자만의 전투는 아니지만 처음 것은 너무 심하게 짜맞춰 놓았다고 한다.
그럼 여기서 당시 제3대대의 간부들 증언을 통하여 독자 여러분이 비교하기 바란다.
이신국(제3대대 제11중대 소대장. '66.8.19. 2군단)의 증언이다.
"몇 대대 몇 중대에 근무했습니까?"
"임관해서 38선 경비에 임했다. 문산에 연대CP가 있었고 5.28일 임관해서 1년간 소대장을 했다. 판문점 있는데 154고지에서 6.25전쟁을 만났다."
"대대장은 누구였습니까?"
"유재성 소령이었다. 부임한지 3일만에 전쟁이 났다. 그때 중대장은 이원근 중위로 전사했다.
"제11중대 제2소대장을 하고 있는데 우리소대는 월북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때 늘 154고지에 올라가 적과 육성으로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다른 소대는 월북자가 다수 발생했다."
"적과의 거리는 얼마나 되엇습니까?"
"한 200m되었다. 새벽 4시반쯤되어 꽝꽝 소리가 나 야간훈련 하는줄 알았다. 5시반쯤에 일어나서 고지에 올랐는데 임진강 나루터에서 기관총 소리가 들리고 장단쪽에서도 들려왔다. 12시쯤에도 우리 정면에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12시반이 되어 응응 하는 소리가 나 보니 시커먼 것이 나타났는데 처음으로 탱크를 보았다.
구장단고개에서 한참 내려다 보고 있는데 후방에서 굉장히 요란하게 꽝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가 2시경이다. 임진강 철교를 폭파한 것이다.
그래서 그 날밤에 배를 타고 도강했다. 그때가 6.25일 밤 9시쯤 되었다. 맨 마지막으로 나온 소대다"
"문산'봉일천에서 한강 도강할 때까지 상황을 말씀해 주세요?"
"26일 아침 새벽에 연대로 가니 정찰을 나가라고 해서 1개분대를 데리고 다니다 27일 봉일천에 오니 연대가 와 있다.
이곳 제방에 호를 구축하고 대기하는데 적 탱크가 우리 중대OP로 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었는데 정중사가 옆에 소대들이 다 후퇴했다하여 가보니 7시경인데 야음을 이용해 다 이탈해갔다.
금촌 일산을 지나는데 피난민들이 하양게 나오는데 물어보니 서울에 인민군이 들어왔다고 한다.
밤새 걸어 수색에 와서 대대를 만났다. 29일날 만났는데 한 400명 되었다.
"우리 대대는 대대장이 두명이 되었다. "
또 한명이 사단에서 왔는데 OAC교육을 마치고 들어와 서로 다투었다. 그런데 철수로를 서울로 할 것인가 행주나루로 할 것인가 가지고 옥신각신 하다가 오소령이 하자는대로 했는데 비는 밤새 내렸는데 그런데 아침에 보니 밤새 걸은 것이 어제 그자리였다.
그날이 30일이다. 그래서 유소령이 권총을 빼들어 쏘아버려 오소령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유소령은 "이제부터 나는 대대장이 아니다. 죽고 사는 것은 너희들 각자에 달렸다. 내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우리는 그때 18연대가 평양을 입성했다는 것을 정말로 알았다.
우리 부대는 이북출신도 많은데 이 사람들 외에 현지 입대한사람들은 해산해서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각자 흩어져 김포쪽으로 도강을 해서 6월31일 안양에서 합세했다."
다음은 제3대대 제12중대 이등중사 김일하('66.2.1, 제6관구사)증언이다.
"입대해서 고랑포 전방에 배치되었지요?"
"'48년도에 제13연대에 입대하여 고랑포에 있는 제3대대 제12중대 중기기관총 분대장을 했다."
"6.25전쟁 발발부터 얘기해 주십시오."
"제3대대는 전방에 10중대 11중대가 배치되고 예비로 제9중대 12중대가 38선에서 2km 덜어진 진동에 주둔하고 있었다.
24일이 토요일이라 중대대항 오락회를 하고 25일도 야간 오락회를 하려 준비를 했다.
25일 새벽 4시반이 되어 꽝꽝거렸고 대대장은 5시반쯤 나왔을 것이다."
"연대 CP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문산이다. 8시반쯤 되어 대대장도 우물쭈물 하고 있는데 대덕산에 배치되었던 연락병이 들어와 11중대가 전멸이라 한다.
그래서 진짜 비상을 걸고 탄약고에 탄약을 지급했다.
대대 연병장에 포탄이 떨어져 산으로 올라갔는데 산밑의 도로에 시꺼먼 물체가 일곱 대가 와 있었다. 적군의 탱크였다.
그런데 장단쪽에서 쓰리코타에 병력을 실고 산 좌측에 있는 고개를 넘어오고 있는데 적 전차가 사격을 하여 한방에 없어졌다. 장단지서에서 고랑포로 지원나오던 경찰 17명이 당한 것이다.
우리가 쏘는 기관총, 80mm박격포 등 다 필요 없었다."
"탱크가 어디로 도하했습니까?"
"고랑포쪽으로 건너지 않고 임진나룻터로 건너갔다. 평상시에는 수심이 50cm 밖에 안되었다.
우리는 밤에 도강하여 임진면 금곡리에 배치되었는데 아무 상황이 없었다. 그러다 철수를 해서 27일 금촌지구에 갔는데 기갑연대에서 온 장갑차를 처음 보았다. 그러나 탱크하고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27일 저녁에 철수를 해서 녹번리에 갔다.
이때 병력이 얼마 안되어 제11연대 병력과 통합하고 서울 후방을 찌르자는 의견에 기회를 보려 수색과 벽제 무슨 산에 몇명씩 경계를 위해 배치되었다. 해가 져서 나중에 내려가 보니 모두 철수하여 어디로 가고 아무도 없었다. 우리도 헤매다 7월 3일 서울에 들어왔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는 연대장 대대장 예하 중대의 증언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해당 3대대는 누구도 전차와 싸워본적이 없다는데 연대장은 휘발유통으로 싸웠다 하고 전차가 고랑포 우측 가여울지역으로 도섭했다는데 임진나루로 도하했다고 하고 1,2대대가 임진강변과 파평산에서잘 싸웠다고 하는데 아니 실탄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병력도 없는데 뭘 잘 싸웠다고 하는지......
또한 백선엽과 김익렬의 한강도하 증언이 다르다.
한쪽은 문교를 이용하여 짚차도 실고 가서 영등포쪽에 적이 있어 노출을 우려 버리고 갔다하고 한쪽은 조각배를 타고 손으로 노를 저어 간신히 도강했다하니 누가 진실인지......
라. 다음은 제1사단을 지원하려 올라온 부대원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단 제15연대장 최영희 대령('77.4.14. 국회 외무분과 사무실)의 증언이다.
보병학교 피교육중에 6.25전쟁을 맞았다. 서울 효제동에 집에서 쉬고 있는데 방송을 듣고서 육본으로 갔다. 육본으로부터 문산지구에 출동하라는 지시를 받고 먼저 최병순 소령이 이끄는 제3대대와 용산역에서 합류하여 제1사단으로 도착하여 백선엽 사단장으로부터 금촌 북쪽에 있는 고지를 점령하여 적의 남하를 저지격멸하는 임무였다.
먼저 죄일선에 3대대를 배치하고 다음 부대가 오면 우일선에 배치하려 했는데 26일 오후에 박히동소령이 지휘하는 제20연대 제3대대가 도착하여 우일선에 배치하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연대의 주력은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육본 명령으로 미아리지역에 투입된 것 같았고 따라서 그날 밤에 제20연대 3대대가 제15연대에 배속 된 것이다.
27일 오전부터 적과 전투가 있었으며 중과부족으로 끝내 이날 밤에 봉일천으로 철수하고 다음날 사단의 작전회의가 있은 뒤 나는 행주로 내려가서 사단의 철수를 위한 도하준비를 하게 되었고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은 이산포에서 도하준비를 한 것으로 안다.
사단은 28일부터 29일 새벽 사이에 한강을 건너게 되었다.
제5사단 제20연대 제3대대장 박희동('77.3.25. 제2군사령관실)의 증언이다.
"사령관님께서 겪으신 6.25당시의문산~봉일천전투의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요?"
"우리는 전남 백운산의 공비토벌을 위해 당일 아침 열차로 순천에 내려갔는데 도착하자마자 다시 복귀하라 하여 오후에 되돌아 온다음 26일 새벽차로 다시 송정리를 출발하여 서울에 올라와 제1사단으로 출동하라하여 능곡과 금촌 사이에서 적기의 공격을 받아 전원 하차 하였다.
나는 어느 국민학교에서 백선엽사단장으로부터 명령을 받아 대대를 문산 남방 3~4km 되는 구릉에 배치하였다.
"당시 좌우측에 배치된 인접 부대를 아십니까?"
"잘 모른다.
"봉일천 전투에 대해 말씀을 계속해 주십시오."
"여기서 아침 10:00경에 호를 파놓고 전투준비가 완료되었는데 10시 좀 지나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이날 18:00시에 최영희 대령이 와서 다른 부대들도 철수 했으니 철수하라 해서 준비하는데 적전차 20여대가 보였다.
봉일천 국민학교인지는 몰라도 도착하여 정비를 하려는데 백선엽사단장이 와서 왜 명령없이 철수하였는가하여 기합을 받고 있는데 마침 최영희 연대장이 나타나 무사했다.
다음날 새벽에 반격명령으로 문산쪽으로 2~3km올라갔다가 적의 증원에 철수하게 되는데 흩어진 병력을 집결시키려 봉일천 남쪽에 집결지를 선정하여 병력을 모았으나 너무 부대들이 혼란속에서 분산되어 얼마간 병력을 인솔하여 철수하는데 오는 도중에 이탈하는자가 많았다. 이로인해 수색 쪽으로 빠져 한강을 넘었으나 그때의 병력은 불과 몇 명 밖에는 되지 않았다.
수도사 제18연대 제2대대장 소령 장춘권(77.10.27. 자택)증언이다.
제18연대가 의정부 북쪽에 출동하였다가 제13연대 지역으로 철수한 것은 27일 박모 무렵이다.
우린 장교의 안내를 받아 연대 지휘소 부근에 집결하였는데 연대장인 김익렬 대령을 즉시 찾아가 철수 경위를 설명하고 식사를 못하였으니 식사부터 시켜달라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어 동기생인 부연대장 김진권 중령에게 물었더니 연대장 하는 말을 믿고 있느냐며 우리도 벌써 몇 끼를 먹지 못하였다 한다.
이에 어이가 없어서 즉시 중대별로 부락에서 취사를 하라했는데 대부분 피난을 가 이날 자정무렵에야 겨우 주먹밥 1개씩 급식한 기억을 안다.
그런데 이날 후반야에 동연대에서 출동해 달라고 연락이 왔으나 부대대장이 연대에 들어가 거절하고 대대를 이끌고 철수하여 구파발 북쪽에 교량상에서 때마침 의정부쪽에서 철수해 나오는 연대장 임충식 중령을 비롯한 주력과 합류하여 이날 16:00경에 행주나루로 한강을 도하하였다.
보병학교 교도대대 4중대장 대위 황규설('64.8.28. 제7사 제5연대)의 증언이다.
"6.25전쟁에 관해서 전쟁경험과 전사에 필요한 사료를 말씀해 주세요."
"그 당시 대대장은 김병화 소령이고, 중화기중대장을 겸임하고있는데 전쟁이 났다고 해서 비상소집을 하니 60%만 소집이 되고 그때 교육중인 갑종 2기생 한 40%를 병력을 받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6월26일 아침에 탄약을 분배받고서 문산행 열차에 편승하여 문산에 갔습니다.
문산가지전에 내려서 작전임무를 하는데 무명고지에 올라갔습니다. 야간입니다.
우측에서 제5연대(2사단, 25일 20시에 의정부 금오리 전개?)있었고 그외에 3개 연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측에 7사단인가는 전투를 상당히 하는데 우리 전면에는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앞에는 임진강을 중심으로 해서 과수원이 있었는데."
"그럼 문산 위 수색에도 나갔었군요?"
"수색보다도 강변까지 나가 가지고 배치를 했었습니다."
"28일 아침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미 우측 부대들은 철수를 하고 없을 때입니다."
인접부대와 협조를 위해 전령을 보내면 돌아오지않고 철수를 해서 금촌에 오는데 어느 중령이 와서 진격중이라고 편의를 봐달라고 해도 거절을 하고 금촌어디에서 아침을 먹으려 하는데 비행기가 날아와 쪽지하나를 떨어뜨리고 갔는데 내용이 전차가 남하중이니 현 위치를 이탈하라해서 나와 고양에 방어진지를 편성했습니다. 이날 제1사단에 배치 된다는 것을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1사단과 연락을 하려해도 이미 철수해 버렸고 부대는 완전포위 되어버렸습니다.
"그놈들은 소위 매장부대라는 것이 있어 언제나 전투부대가 앞을 지나간 뒤에는 소총 1개 소대쯤 되는 부대가 삽만 가지고가는 부대를 제가 발견했습니다."
"그날이 언제쯤 됩니까?"
"북한군에 잡혀가지고 수색쪽으로 연행이 되어 끌려 가는데 T33전투기가 와서 폭격을했습니다.
그날이 29일인가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확실하지는 것은 모르겠고 그 바람에 북한군의 눈을 피해 다시 피난민 대열에 내의 차림으로 섞여 김포비행장 맞은편인가 거기서 사병들과 보트로 섬까지 밖에 못가고 헤엄을 쳐서 건넜습니다.
그래서 영등포로 해서 수원으로 해서 평택까지 갔습니다."
이상의 초기전투시 증언을 분석해 보면 우리는 전사한 인원을 처리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건재도 무너지고 연락도 안되고 수많은 부대들을 마구 집어넣고 누가 통제도 안하고 부대끼리 협조도 안되고 철수를 했는지 진격을 했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러니 많은 인원은 북쪽 출신은 다시 북으로가서 아군에게 총질을 하는 격이 되었고 많은 인원이 흩어져 알아서 고향으로 가던 살던 죽던 했다는 이야기! 나중에는 높은 지휘관들은 다 사라지고 몇몇식 짝을 지어 알아서 한강을 도하하여 시흥이나 안양 수원 평책에 다시 모이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런데 지금 이곳 개성에서 고랑포-문산일대의 최초전투와 1.4후퇴시 국군 제1사단과 북한군, 그리고 중공군의 그 많았던 유해는 다 어디로 간 것이지?
마. 다음부터는 이곳 일대의 유해발굴에 대해 알아보겠다.
마지리의 181고지는 황대형 용사님이 증안한 이후 지역주민들도 제보를 많이하여 그후 '09년부터 집중적인 발굴과 '17년~'18년에는거의 50여구가 발굴 되었다.
"일월봉은 그 진실을 보고 있었을까?"
여기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 파평산과 감악산 계곡인데 파평산에서는 국군 제1사단의 12연대가 전투를 하였고 그 서북쪽 임진강 변에 두포리가 있는데 이곳이 북한군이 '50년 10월초에 북으로 물러 날 때에 많은 우익인사와 포로들을 이곳에서 강북으로 도하시킨 한 장소가 된다.
바로 강너머에 일월봉(191m)이 우뚝 솟아 있어 나는 그곳에 혹시나 많은 전투흔적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접근하였으나 주변이 모두 지뢰지대로 되어 통제구역이고 그나마 정상에는 부대가 주둔하면서 몇m는 깍아 낮아져 버렸다.
이 동파리에는 어느 곳이든 포탄이 낙하된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그 당시 참전용사가 증언한 쓰리코타의 경찰 17명이 전사한 고개를 우연한 기회에 장파리에서 실제 그날 장단 면사무소에 갔다오다 현장을 목격한 한 할아버지를 만나 현장에 대동하였다.
그러나 도로가 이미 두배로 확장되고 변하지 않은 것은 논이 그대로 있는데 그와중에 논을 파고 묻었을리는 없을 것이다.
그 논이 시작되는 맨 위에 둠벙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그때 것인지 지금 것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은데 할아버지는 못보았다고 한다.
여기 논들도 전후 몇년간은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민간인 출입이 승인되어 개간하다시피 일구어낸 논이므로 그당시에 어떻게 되었는지도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지금 미군 사격장도 일부 남아 있고 구역구역 탐사를 해보았으나 지뢰로 집중적인 탐사는 곤란하다.
그래서 일월봉 대대와 협조하여 지뢰가 없는 부분부분을 발굴해 보았으나 찾지는 못했다.
다만 부대의 한 간부가 우리에게 두 군데를 제보하였다.
수해로 도로 보수간에 유해가 목격 되어 한구는 대대 들어오기 직전에 좌측 방벽 넘어에 묻었다는 이야기와 한구는 탄통이 나오고 뼈가 상당히 큰 유해를 부대 안 사격장 밑에서 발견하여 그 유해는 지금의 테니스장 위에 크게 봉분을 해서 이장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방벽 뒤에서 1구를 제보대로 발굴하고 부대안에서 테니스장 뒤에 있는 봉분을 굴토하였으나 아무것도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옮겨질 당시에 외부로 노출 되면서 산소가 흡입되고 토양이 물이 잘 흡수 되는 곳에 묻히다 보니 쉽게 썩어서 자연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했다.
일월봉은 내가 포병 전포대장 시절에 우리 병력이 바로 그 남쪽 강북진지를 점령하고 포대 ATT를 수검받기 위해 동파리 왕촌 지역에서 위장풀을 채취하다 미확인 지뢰가 터져 11명이 부상하고 1명이 순직한 뼈아픈 상처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고 이형희 상병"에게 심심한 조의를 올립니다."
또한 일월봉 맞은편에 율곡리 208m무명고지가 있는데 이곳에 '80년도에 구파발까지 침투한 간첩을 일망타진 하기 위해 수색작전간 투입되어 아군이 구축한 함정에 빠져 그 독침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양 발을 길게 벌리는 과정에 인대가 1/3이 파열 되어 지금도 그 후휴증으로 고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당시는 아파도 아프다고 하지도 못하던 시대다.
이 일월봉은 백학산처럼 이곳에서 전투진지 공사를 했던 예비역 되시는 분들이 몇명 제보를 해 주셨는데 그 시기가 주로 '68년도 김신조 간첩 사건이후에 공사를 하던 내용들이라 그후에 모든 진지는거의 3~4배로 확장 되어 원형이 남아 있는 곳이 없다.
"두포리에 묻혀 있는 태극청년단을 구출하라."
임진강변으로 지금은 우회도로가 아주 좋게 개설되어 전곡에 이르는 시간이 무척 빠르다.
자유의 다리(임진각)에서 시원하게 뚫린 길을 따라 달리면 임진강의 파란 공기가 원없이 가슴을 적시어 전쟁터란 생각은 없다.
일월봉 바로 남쪽으로 임진강이 회돌아 흐르고 그 강변은 주상절리가 발달하여 그 아름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곳으로는 내가 '80년에 근무시는 황복이 올라오고 민물 참게가 유해하며 특히 장어가 서울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사실 나는 그 시절에 이곳이 전쟁터고 그렇게 많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누가 알려주지도 않했고 기록에 쉽게 접근도 어려웠다.
이길을 따라 가다보면 중공군과 북한군 묘지가 나온다.
서울에서 자유로를 달려 당동IC가 나온다.
이 IC에서 직진하면 자유의 다리, 임진각이 나오고 여기에 임진교(인도교)가 부서진체로 그대로 있고 파괴되지 않은 철교는 보수되어 지금 남북철도 연결 사업에 북으로 들어가는 연결 다리 역활을 하고 있다. 이곳이 마정리란 곳으로 그 당시에 강변에서 일시적으로 대치를 하며 많은 시신이 강둑에 쌓여 있다 모두 큰 장마로 다 떠내려 갔다 한다.
사목리와 운천리 사이로 1번국도, 통일로가 지나는데 부맥이에 가면 당시 11연대의 지휘소 했던 민간인 집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집이 야전병원이었다 한다.
바로 그 집 뒤에 능말을 도는 낮은 구릉의 야산이 있고 많은 개인호가 구축되어 전사자가 있을 법한데 능말 위에 산언저리밭에 실제 유해가 엄청 있었다는 제보를 받았으나 확인결과 지금 대형 창고가 들어섰는데 그속에 묻혀버렸다고 한다.
이곳이 내가 처음 부임하여 군대생활을 했던 곳이다.
사목리에서 당동에 이르는 지역은 낮은 구릉형 야산이며 길이 잘 발달 되어 개인호가 많았다.
지역주민의 제보에 의하면 이곳으로 병력들이 줄달려 내려가고 북한군이 쫒아오고 1.4후퇴시는 중공군이 쫒아 내려가는 곳이란다. 이곳은 산마다 개인호가 살아있고 당동의 군포병부대 울타리 인근에서는 '07년도에 1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마정리 임진각 자유의 다리로부터 장신리, 운천리를 거치는 구간도 산에는 당시의 전투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고 지역주민의 제보로 3구의 유해가 추가 발굴 되었다.
화석정이 있는 임진리와 율곡리 일대는 초기 전투시 연대본부가 있었던 지역으로 강변을 따라 개인호가 수없이 있다.
더구나 율곡리의 208고지는 지휘소가 있었던 곳으로 주변에 개인호가 거미줄처럼 엉커 있어 지금 것인지 6.25당시 것인지 분간이 어렵다. 왜냐하면 지금도 중요한 거점이다.
이곳에 올라서면 능선을 이용하여 방미까지 이르는 주요 기동로가 되는데 '81년도에 임진강을 이용하여 침투한 공비가 이동하는 통로로 사용되었다.
이곳의 용산골 일대에선100여구에 가까운 유해를 발굴 하는데 그 내용은 제 3장에서 알아보겠다.
율곡리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 바로전진교가 나오고 8번도로를 다라 법원리에 이르는 두포리가 있어 바로 파평산이다.
그런데 이곳에 길 안쪽으로 추모비가 서 있고 죽어간 사람의 이름이 각인 되어 있다.
우린 파주시청과 협조하여 이 실체를 확인하고 노력 하였으며 이를 위해 이곳에 나의 전화번호를 남갸 두었다. 그런 어느 날에 전화가 와서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본인이 선새님으로 재직하고 정년으로 퇴임하였다는 여자분이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본인의 아버지가 당시에 학교 선생이면서 태극단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태극단원은 모두 유공자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태극단원들이 주로 탄현면 일대에서 활동을 많이 하다보니 반대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 많아 정부가 몇번 바뀌고 이제는 무슨 원수처럼 서로 악의적인 말이 오가는데 태극단원 가족들은 조용하게 관망하고 있고 피해를 입은 그 당시에 빨갱이라 했던 가족들은 결사적으로 입을 악물고 덤벼드니 진실이 어지럽게 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내가 만나고 있는 전직 선생은 전교조 출신이란다.
그러니 본인의 아버지의 행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영웅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발굴 하지 마세요. 이유는 없어요~!"
나는 아니 다른 유가족들도 있는데 혼자서 부득불 반대하시는지 물었더니 눈빛이 살기가 있다.
그래서 그만 눈을 밑으로 내리고 알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이곳은 원래 바로 길 옆에 추모비가 있었는데 어느 전직 공무원이 이것을 이슈화 하면 좀 땅 값이 올라가 도움이 되려니 하고 이곳 일대 땅을 매입했는데 역으로 괘씸하게 되어 추모비가 국유지 위치로 옮겨져 버렸다.
그 땅 주인을 만나서 그간 진행과정을 이야기 듣고 보니 이곳 일대가 집단 매장지 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같아서 우선 우리가 할 수 있는 개인호와 교통호를 발굴 하여 나갔다.
율곡리에서 '09년도에 2구의 유해발굴을 시작으로 이 지역 근방에서 10여구의 유해가 발굴 되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제보도 얻었다. "강가 모래바닥에 다 죽이고 묻었습니다."
임진강가에 있는 포상들이 구축되어 있는데 그 일대가 양민들을 끌어와 맞은편 일월봉쪽으로 넘으려다 시간이 없으니 대량으로 쏘아 죽이고 대충 묻고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후에 몇번의 강물 범람과 홍수로 다 떠내려 가고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데 그곳에 진지가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우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원래 추모비가 서 있었던 지역의 뒤를 파 보기로 했다.
야산 언저리라 파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우선 땅을 샀던 전직 공무원의 밭 둔덕에서 2구의 유해를 신발 , m1탄, 크립, 탄피등과 발굴 하였다.
그리고 계속 산 정상쪽으로 발굴해 올라가는데 5구의 유해를 추가로 확인하게 되었다.
"엄지 손가락을 둘씩 묶어서 끌고 다닌 모습 그대로 나온다."
아니 이런 모습도 처음 보았다. 손목을 묶은 것도 아니고 엄지 손가락을 묶었다.
펜티의 검은 고무줄도 나오고 발목에 찬 바지 고무 밴딩도 나왔다.
이것은 그 대상자가 군인임을 증명하는 것인데 태극단원들도 그런 복장을하고 있다 일부가 공산군에 붙들려 가다 전사했다고 생각되니 좀 아리송하게 된다. 물론 현재 법 테두리에서 태극단원도 발굴 대상이 된다.
하지만 유족이 반대하였으니 어떻게 하랴, 물론 다른 유족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
그래서 그 언덕백이 그대로 일렬로 다시 재 매장하여 드렸다.
약식 제례를 올리고 나는 소주 한 잔을 부어 드렸다.
"충성, 죄송 합니다. 모든 이물질을 다 제거 해 드렸으니 이제부터라도 곱게 주무시고 그 유족에게 평온함을 주고 우리를 지켜 주소서!"
"파평산에서는 지금까지 100여구의 유해를 발굴 하고 있다."
이곳은 국군 제 1사단이 전투한 곳으로 이곳은 초기 전투에서는 북한군과 전투를 실시하고 1.4후퇴 당시와 '51.4월전투에서는 인민군 제 1군단,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는 곳이다.
사단은 임진강 너머 대덕산-백학산-강정리를 연하는 선에 정찰활동을 하고 오금리-마지리간에 주저항선의 진지를 구축하였다.
강정리는 파주 도라산역 남서쪽 사천강 동안에 있으며 백학사는 파주 군내면 읍내리에 있는 229고지로써 1번도로를 따라 통일대교를 지나 판문점에 이르다 우측에 있는 민통선지역으로 일명 장단지역이다. 이곳은 지금 주변에 제한된 인원의 경작이 진행되고 있으며 바로 초지 전투시 전투가 진행 되어 장단지서 경찰들이 출동하다 전차포에 맞아서 20여명미 절명한 곳이다.
대덕산은 38도선의 237고지군으로 백학산 전방에 있으며 지금은 북한 지역이다.
대덕산 우측이 고랑포리이며 자작리로 초기전투와 1.4후퇴시는 중공군과 국군 제1사단이 전투한 곳으로 쌍방간에 많은 피해를 가져온 곳이다.
파평산은 고랑포리 임진강 남안으로 장파리 지역으로 국사봉이 횡격실 능선으로 367번 도로와 371번 도로가 그리고 임진강을 연하여 37번 도로가 잘 발달된 곳이며 문산에서 -파평산-감악산이 횡적으로 늘어져 문산 축선에 1번도로라는 가장 양호한 접근로가 있음에도 임진강이란 천연적인 장애물과 횡적인 고지군으로 방어에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나는 통일촌 마을에 들어가 6.25전쟁때부터 살았던 분을 만나 이곳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서쪽 가장 끝의 GP까지 들어가 보았다.
'10년도에 나이가 79세로 전쟁당시 20세였으며 카츄사로 전쟁동안 근무하고 나온 어르신이다.
어르신이 전쟁 종료후 최초는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파주 월롱산 밑에 피난민촌에 있다가 임진강 너머가 개방되고 군에서 통일촌을 만들 때에 최초로 이곳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럼 '50년 6월전투 때는 어디에 사셨습니까?"
"사천강 너머 지금 북측 출입국 관리사무소가 있는 평창동에 살다 전쟁이 날때 국군 제12연대를 따라서 남으로 내려왔다가 미군부대에 들어가게 되었지."
"네, 그러면 사실 지금 38선 인근의 전쟁 실태는 잘 모르시겠네요?"
"잘 모리지, 하지만 통일촌으로 들어와 처음 그렇게 통제가 심하지 않을 때에 여기저기 다니는데 특히 군 간부와 협력해서 사냥을 많이 다녀 이곳 일대의 왠만한 곳은 다 가 봤지요."
"아 예, 지금 우리는 전쟁 중에 전사했으나 유해를 찾지 못한 국군용사님이나 경찰 학도병등의 유해를 발굴하는 발굴단 입니다. 혹시 알고 계신 곳이 있나요?"
"자유의 다리 건너오면서 바로 좌우측에 산에, 그러니까 노상리 지역 산에 가면 뼈가 하얗게 있었고 덕현동 지역 야산, 노하리 지역도 상당수 유해가 보였셨지. 그런데 지금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불도 자주나서 찾기가 어려울 겁니다."
우린 지역 군부대와 협조하여 어르신을 대동하고 그 당시에 가보았던 곳을 들어 갔으며 통제 구역은 혼자서 안내를 받아 서쪽의 마지막 GP까지 들어가 보았다.
비록 평지에 가까운 곳이지만 조그만 구릉처럼 생긴 곳에는 어김없이 개인호나 교통호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육안에 관찰되는 유해는 없었다.
그런데 이때 수행하던 김상사가 본인이 부소대장 시절 보았던 전투화가 나오고 뼈가 보였다는 곳으로 안내했다.
가매복 진지를 굴토하다 나온 것으로 가 보니 조그맣게 봉분이 만들어져 있고 주변을 보니 기관총을 거치한 곳으로 판단되는 총상이었다.
그러나 비무장 지대 안이라 우리는 위치만 확인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어르신에게 무슨 사냥을 다녔느냐고 물으니 조금 난색을 표하며 궁색한 답변을 하셨다.
"뭐 노루나 멧돼지같은 것을 잡아서 나눠 가졌지요."
"국군 제1사단의 작전지역에서 18구의 유해가 발굴된 노상리"
우리는 '11년도에 노상리 일대의 발굴 작전을 개시 하였다.
사실 이곳은 미확인 지뢰지대가 많지만 이미 군부대가 한번씩 진지를 구축한 곳이 많아서 사전 지뢰 탐지기로 안전을 점검한 후에 발굴작전을 전개 하였다.
이곳은 초기 전투시 밀려 내려가는 국군 제1사단의 좌측연대인 제 12연대가 임진교를 건너기전 마지막 대안상에서 방어 작전이었으며 사실 임진교 폭파 작전이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어떻게 보면 그곳에 고립된 국군이 최후까지 저항하다 전사했다고 볼 수도 있는 곳이다.
반면에 캔사스선으로 진출하는 국군 제 1사단이 '51.5.20일에 문산으로 진출하고 이어서 '51.10월 이후에 주저항선을 임진강 북안의 사천-백학산-사미천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11연대가 진출하며 적을 사살하거나 전사 했을 가능성도 있다.
백학산으로 이동한다.
지금 이곳은 서부전선에서 가장 높은 고지군으로 바로 앞에 지금은 북한지역인 대덕산이 서 있다.
대덕산으로부터 종으로 내려오는 능선이 백학산에 이르러좌우측으로 약 3km정도 되는 횡격실 능선으로 방어하기에 유리한 곳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는 능선이 전수 개인호와 교통호로 연결 되는데 전쟁당시의 흔적이 대부분 중복되어 유해발굴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곳에 '68.1.21일날 서울 구파발까지 침투한 북한 무장간첩 김신조 일당이 침투한 곳이 있다.
또한 그 멀지않은 곳에 바로 장단 파출소 경찰 20여명이 트럭으로 진출중 적의 전차포에 맞아 전사한 장단이 있다.
이곳은 내가 처음 소위를 달고 전방에 들어간 일반전초선으로 79년도 8월에 다이 지역 책임 중대장이 월북한 사고지역이다.
이곳에서 근무한 전역병의 제보로 시작된 조사활동은 개인호를 식별했으나 현재 것과 혼재 돠어 굴토가 어렵고 특히 산이 지세가 괜찮아 이곳 일대가 민간인 묘지가 많은 곳이였다.
몇번의 진지공사간 유해 노출로 현장 조사를 실시 했으나 모두 민간인으로 판명 되었고 산 좌단부 대대본부 군수과 막사 뒷편에 있는 무명용사 묘지도 수해로 주변이 훼손되어 우리가 확인 조사 결과 민간인 묘지로 판명 하였다.
백학산 진출로상에서 남쪽 임진강 강가로 가면 초평도 맞은편에 대추포가 있고 남산동이 있다.
이곳에 고구려 덕진산성이 있는데 과거 이곳이 수내나루라 해서 삼국시대에는 많은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내가 여기를 찾아간 배경이 씁씁하다.
"문화재 발굴한다면서 6.25전쟁관련 유품이 나오는데도 신고하지 않는 현장"
나는 어느날 용인의 할미성근처를 탐사하게 된다. 용인시 포곡읍에 있는 삼성 애버랜드 안으로 해서 신원리 뒷산인 457고지를 백련사를 통과하여 올랐다.
할미성은 349m의 고지로 신라시대 그러니까 신라가 한강유역 진출시기인 6세기에서 7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유래는 마귀할멈이 하루 만에 성을 샇았다는 이야기로 인해 할미성이 되었다는 곳이다.
그런데 중원문화재 연구소에서 시굴조사인지 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사활동하는 인원을 만나 물 한모금을 마시고 여기까지 오게된 동기를 말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바로 이곳 초평도 너머에 있는 고구려성의 지표조사에 본인이 참여 했고 최초로 들어가 보니 성곽을 따라 개인호가 있고 탄피며 군화등 전투 유품이 즐비했다는 것이다.
"유해발굴 현장이나 문화재발굴 현장에서 관련된 것이 나오면 상호 연락하는 것."
이미 몇번의 공문서를 공유하였고 찾아가 협조도 직접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그 자존심인지 우월감인지 아니면 피해의식인지 한번도 연락받은 사실이 없다.
실제로 한강 강변북로 워커힐 위에 있는 아차산성(고구려 성으로 확인됨)에서 발굴작업을 할 때도 탄피며 통일화등 전투 유품이 발견 되었다고 나는 그 내부인원의 전언을 통하여 알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우린 문화재청에 찾아가고 협조공문을 보내고 매년 우리의 유해발굴 계획을 통보하곤 했다.
그런데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할미성에서 또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이곳이 바로 백학산 밑의 동파리 "덕진산성이다."
"파평산(496m)은 웅담리에서 올라서면 차량으로 어렵지 않게 올라선다."
파평산은 최초 전투에서 부터 1.후퇴간에는 그리 크게 전투가 없었다고한다.
가장 크게 전투가 벌어진 것은 '51.4월의 중공군 4월공세였다.
임진강과 367번 도로 사이에 거의 종으로 10km에 달하는 이곳은 현재 꼭대기에 군부대가 있다.
산 자체가 수려하여 아름답게 생겼지만 전쟁시 모든 나무들이 다 타버려 지금은 잡목이 우거져 있는데 주로 갈참나무가 많다.
좌로는 임진가을 따라 선유리, 문산, 파주에 이르게 되고 우측은 367번도로를 따라 웅담리, 금곡리, 법원리, 광탄에이르는 주요 축선이 되고 된다.
원래는 가여울에서 올라서면 감악산(675m)이 더 높고 가깝게 되지만 사실 산이 글짜대로 험하여 방어든 공격이든 모두에게 불리한 여건이라 실제 전투는 크게 없다.
이곳도 지금은 산을 밀어서 꼭대기에 군부대가 있어서 사전 협조를 하고들어가던지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우회해야 한다.
파평산은 두포리나 금파리, 늘노리에서 오르기가 거의 비슷하다.
우린 마지리에서 어느 식당에 들어갔다.
백반으로 식사를 하며 우리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아저씨가 말을 하신다.
"아니 우리집 뒤에도 철모도 있었고 죽운 군인들이 있어서 동네사람들이 묻어주었다는데 그런 것 찾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식사 마치고 함께 한번 가 주시겠어요?"
"그렇게 하지요. 내가 트렉터를 갔고 나왔는데 저기 조금만 하면 되니까 한 3시에 만나지요."
"알겠습니다. 우리가 이 어르신과 구읍에 갔다가 가월리에 모셔다 드리고 파평산 휴게소에서 3시에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는 구읍리로 향했다. "여기에 중성산, 칠중성이 있고, 20여구를 발굴했다"
"어르신 저기 언덕에 학교가 있었다면서요?"
"맞아요, 저기 지금 포크레인이 돌아가는데가 전쟁 당시에도 학교자리였지요. 문 닫은지 한 10년 되느가, 무슨 업체에서 건물을 짓는다고 매입하여 복토하고 있다던데... ."
"어르신, 그곳에 '51.4월에 영국군이 이곳 일대에서 다 죽어갈 때에 한 명이 학교 들어오자 마자 바로 우측에 화단이 있는데 그곳 물골에 전사해 있었다고 누가 제보를 했어요. 그때 화단 자리 기억 나세요?"
"아마 지금 트럭이 돌고 있는 곳인데 한 3m는 복토가 된 것 같아요."
우리는 그곳 공사관계자를 만나 온 목적을 이야기하고 혹시라도 군관련 유품들이 나온적 없는냐고 물었는데 아무것도 나온 것이 없다고한다.
"소장님, 혹시 뭐가 나오면 연락좀 주세요."
우린 명함을 주고 자리를 떠나 중성산에 올랐다. 비포장이지만 4륜구동은 충분히 오를 수있는 곳인데 비가 내리면 못 올라간다.
여기는 "칠중성'이란 삼국시대 성이 있는데 범위는 약 2km정도 된다.
이곳에 올라서면 바로 앞에 임진강이 훤하게 보이는데 신라가 점령하고 있었고고구려가 638년에 공격하여 점령하고 다음에는 신라가 평양성을 공격하기 전에 이곳을 공격하여 점령했다는 기록이 나올만큼 저명한 지형이다.
하지만 지금은 6.25전쟁때 영국군이점령하면서 주변에 개인호를 굴토하였고 전후에도 군부대의 주요 지휘소로 활용되어 많이 훼손 되어 있지만 윤곽만큼은 명확하게 남아 있다.
'51.4월22일 중공군 춘계 1차공세시 영국군 1개중대가 점령하고 있다 기습을 받아 대량 피해를 입었고 이곳에 무시무시한 화력이 집중되었음은 당연하다.
발굴된 유해는 20여구 되는데 개인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의 5부, 그러니까 무너져 내린 성의 잔해를 치우면서 부분 유해로 나오는 것인데 아마도 포격으로 시신이 파쇄된 것으로 판단 되었다.
이걸 발굴 하는데도 문화재청과 실강이를 벌이고 전문문화재 위원들이 직접 현장에서 문화재인데 발굴해도 되는지 우리와 토론도 했던 복잡한 곳이다. 어느 신문에서는 약간 오버하여 무지한 국방부 유해발굴단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언론 플레이를 한적도 있는 골치 아팠던 곳인데 지금도 그 문제는 진행형이다.
"문화재 보호가 우선인지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이 우선인지~!"
이곳에서 어르신과 바로 가매장한 것으로 의중이 되는 봉분이 있는 아래쪽으로 내려서 가월리까지 걸었다. 여기저기 불규칙하게 봉분들이 난립하고 있는데 사실 너무 크다.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이야기로 들리는 것 가지고 발굴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이 되어 발굴이 제한 된다고 해당부대에 강력하게 통보해 주었다.
할아버지 말씀도 여기가 원씨들인가 문중 땅인데 군에서 계속 통제하다가 겨우 풀린지 얼마 안되는데 전쟁 하면서 무슨 묘를 쓰고 있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하셨다.
누군지는 몰라도 제보한 사람이 뭔가 꿍꿍이 속이 있는거 아니냐고 묻는다.
혹시라도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을 때는 몰라도 이 주변이 옛날부터 묘지지역이라 하며 바로 강건너가 북한군이 바라보고 있는데 묘를 쓰고 있다는 것은 우리 상식에도 맞지 않았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 어느 영웅심이 강한 팀장이나 조사관이 의견일치로 발굴된 유해숫자를 늘리려 발굴했거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차를 몰아 파평산 휴게소로 가서 점심식사 시간에 약속한 아저씨를 만나 집으로 가서 커피 한잔을 대접받고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아저씨 나이는 78세로 6살때 전쟁이 나서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부모님따라 고생한 기억만 있다고 하시며 언젠가 국민학교 다니며 탄피를 주어 엿을 바꿔 먹을려고 산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올라 갔다가 중간쯤 올라갔는데 교통호가 길게 파있고 그 곳에 별것이 다 있었다 한다.
아저씨는 얼마전 왼쪽 다리에 풍이 와서 걷기가 조금 불편하신데 그래도 본인이 말했으니 책임을 진다며 함께 산에 오르셨다.
집에서 바로 뒤로 과거에 군부대가 있었는지 산악도로가 일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어 접근하는데는 무리가 없이 올라갔다.
중간쯤 올라가니 길이 없어지 그래도 아저씨기 걷는데는 우리보다 잘 걷는다.
얼마를 여기저기 찾아보는데 아저씨기 여기다라며 소리를 지른다.
"여기가 맞아요. 그때는 벙커가 없었는데 벙커가 튼튼하게 만들어졌네."
위치를 보니 임진강을 도하하여 늘노리 벌판을 기동하는 적을 향해 기관총을 사격하기에 안성맞춤 자리다. 옆으로 교통호가 길게 좌우로 이어진다.
아저씨가 지목한 부분일대를 탐지기로 확인하며 주변을 살펴보니 많은 개인호가 남아 있다.
교통호도 6.25당시 것도 있고 그 후에 굴토하여 연결된 곳도 있다.
여기저기 삐삐 소리는 울리는데 탄피와 파편 몇개를 찾아냈다.
그러나 아마도 이곳이 단계별 진지선으로 과거에 공사를 하면서 원형은 많이 훼손 되었고 본인이 묻어 놓았다는 철모도 찾지 못했다.
우린 아저씨를 모시고 하산하여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이곳처럼 산의 중간 지점에 전투진지가 있는 곳은 드물다.
홍천에 말고개에 가면 국군 제6사단이 말고개 전투시 바로 유효사거리를 고려하여 화양강변에 화집점을 정하여 북한군과 전투한 곳이 내가 지금까지 보기로는 가장 완벽한 5부능선 전투진지다.
나는 '07년도에 나의 영원한 친구인 운전병 수환이와 이곳 정상의 부대를 들어갔다.
지금도 수환이는 때만 되면 안부 전화를 하는 친구다.
지난 '09년 7월6일에 국방일보에 전역한 이 친구를 생각하며 글을 하나 띄웠다.
그 전문을 소개함으로써 왜 친구인가를 말하고 싶다.
"우리는 피보다 더 진한 2050"
지금은 전역하고 없는 김수한이라는 조금 부족한 병사가 있었습니다. 입대전 김 병장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하루하루를 지내던 친구였습니다.
군 입대도 면제였지만 사람 한번 돼 보겠다며 지원 입대한, 마치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같은 녀석입니다. 군에 입대해 나를 만났고 운전병임에도 6.25전쟁 당시의 전사를 찾아 오대산,설악산,백마고지,함안의 전투산을 함께 오르며 잠들어 계신 호국영웅을 리으켜세우려 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쉬 오르기 힘든 광양의 밥봉이라느 높은 바위에 올라 능선을 내려다 보녀 손짓하기도 했고, 때로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눈물로 보일정도로 범벅이 되면서 사늘 오른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저 남자라는 이유 하나로 같은 유니폼을 입고 국망봉, 태을봉에 올랐고 서로의 허리춤을 잡아 주면서 6.25전사자 유해소재를 찾는 과정에서 가슴으로 한 발짝씩 가까워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60년의 기다림 동안 아무도 와 주지않는다는 노여움에 눈물마저 잃어 체념한 호국용사님을 찾기위해 을수재(방아다리), 약동산,진격산에 오르며 넘어지고 뒹굴고 경사 높은 산을 네 발로 기어오르며 전투 흔적을 찾는 것만으로도 호국용사님을 찾은 양 벅찬 감격의 느낌을 함께 나누기도 했습니다.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 벅찬 감격으로 그 길을 따르며 내딛는 걸음 걸음마다 영혼을 실어 살아가려 합니다. 때로는 호국용사님을 찾지못해 눈물 짓더라도 아픔으로 남지않도록 굳건한 믿음을 저 바다와같이 우리 가슴에 철썩거려 주십시오"라는 마음으로 호국영령에 깊이 묵념한 후 그 슬픔에 서로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20대의 김병장과 50대의 나는 1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하며 피보다 더 진한 정으로 믿음을 쌓아 왔기에 우리는 2050이었습니다.
나와 함께 하면서 인간이 되려했던 단군신화의 곰처럼 숙 냄새, 마늘 냄새가 이렇게 입가에 남아 '유해발굴단 모자 속에 머금은 미소'는 철썩대는 파도에 밀려나가듯 전역하는 순간 가져가게 되엇습니다. 그렇게 김수환 병장은 잔꾀를 모르고 우직스레 산 위에 올라 잠든 영웅들을 깨우는 '충성'으로 님들과 나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2050세대를 함께 하면서 피보다 더한 사내 내음이 베어버린 수환이와 나의 마음!
나의 더운 가슴을 차라리 그 친구에게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군문을 떠나는 그를 보며 조그만 소망으로 항상 기도합니다.
"고마웠다고, 잘 지내라고... ."
나는 지금도 이 글을 읽으며 운전이나 하라고 말하면 "운전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국용사님이 계시는 그곳은 아무나 가지 못합니다. 그곳을 가는 과장님과 함께하는 것이 대한민국 사나이의 의리입니다."라는 미치도록 고마운 말이 떠 오른다.
수환이는 이곳 파평산을 오를 때에 비디오를 들고 따라와 주변을 녹화 했다.
주변 시설물을 찍으면 안된다는 것은이미 교육을 받아서 알고 있지만 내가 어디를 가든 그곳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알아서 자동으로 한다.
사진 또한 개인호나 교통호, 기타 전투 유품이 나오면 채칵 찍어서 저장한다.
사실 격전지를 탐사해도 이런 것을 남기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버리면 잊어버리게 된다.
더욱이 지역주민 간단회를 하면 비디오 카메라를 돌려 중요 증언 내용을 녹화하는 것을 잊지않는 소중한 나의 전우였다.
아마도 수환이가 다닌 산이 적어도 발굴단 누구보다 전국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팀장이나 조사관은 본인 책임 지역만 가지만 수환이는 나를 따라 전국을 다녔기 때문이다.
나는 두포리에서 두번 올라 늘로리와 금파리로 내리고 한번은 금파리에서 올라 웅담리로 내렸다.
또 한번은 차량으로 정상을 두번 올라 울타리 선을 탐사했다.
한번은 이곳 파평산에서 군대생활을 한 전역하신 분이 제보를 하였기 때문이다.
제보 내용은 본인이 90년대에 군대생활을 했는데 울타리선을 타라 교통호 작업과 보수 공사를 하면서 유해가 나와 근처에 가매장 했다는 내용으로 탄피나 박격포탄이 수없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벌써 10여년의 시간이 흘러 그동안 수해가 두번이나 발생해 철조망이 전도 되어서 보수 공사를 대대적으로 했다고 하니 그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이럴 때마다 아쉬움이 좀더 이 사업을 빨리했더라면 지금의 두배 세배는 찾았으리라 보는데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이 철조망 울타리를 돌다 미끄러져 그만 마눌님이 새로 사 준 비싼 K2등산복을 처음 입고 나와서 그만 찢어지고 말았다.
찢어진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낭심 옆으로 철항을 지지하고 있던 쇠고챙이가 파고들어 아차하면파상풍으로 끝날뻔 했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용사님이 보우하사 옷만 찢어지고 큰 상처는 입지않아 무사히 탐사는 마쳤다.
"웅담리 남산(211m)에 유해가 빙빙 산을 돌며 있었다."
웅담리로 한번은 내려 왔더니 철규가 발굴팀장을 하면서 이곳 일대에서 발굴을 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는 영평산 일대를 하라했는데 제보자가 있어 이곳에 하루 들어왔다고 하며 제보자를 대동하고 기다리고 있어 만나 보았다.
연세가 꽤나 되어 보이는 분인데 90이란다.
아마 '10년도에 만났으니 지금은 작고했으리라 본다. 할아버지는 군대를 가지 않았다.
일본시대때 징용으로 끌려갔다 왔다.
그때에 병들어 와서 군대를 가고 싶어도 못가고 집에 머물고 있었다.
전쟁이 났다고 하는데 왠 사관학교생(육사교도대)들이 남산 위로 올라가고 벌써 파평산 정상에는 포탄이 터지고 북한군 일부는 산을 넘고 있는데 국군은 금곡리로 내려와 진을 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게 돌아간다.
올라간 육사교도대들이 황급히 내려와 남쪽으로 빠져 나갔다. 사실 전쟁이라는데 포격도 별로 없고 군인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최초전투의 목격담이다.
김익렬 당시 제13연대장의 증언을 보면 이곳으로 들어온 육사교도대대의 대대장이 빨갱이로 본인의 CP에서 죽어갔다고 하였다.
그러니 할아버지의 말대로 제대로 점령도 안하고 오히려 북한군을 뒤에 달고 거꾸로 내려오던 교도대라는 연대장의 증언은 일리가 있다.
물론 남산 바로 위에 있는 마지리의 180고지에서 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황대형 참전용사의 증언이 있긴하다.
그러나 이미 개전초에 병력이 휴가가고 외박가고 뭐 1/3수준인데 희생자가 많았다고는 볼 수 없다. 실제 전사자 명부나 위패카드에도 제1사단의 적성지역에서의 전사자 수는 위패카드로는 식별이 어렵고 전사자 묘비로는 27명이다.
반면 연천은 묘비로 508명, 장단 643명, 파주 151명이고 위패 카드로는 의정부가 517위, 연천이 64위 나타나 있다.
도대체 그렇게 많은 인원이 전사했다면서 실제 기록은 이렇다.
할아버지의 증언과 실상은 일치 한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용산골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먼저 법원리에 들러 그 화장했다는 지역을 알아보고 용산골로 들어가는 여정을 세웠다.
천현초등학교 앞에서 한 노인정을 찾았고 온양동에서도 노인정을 찾았다.
"저기 앞산 자웅산(250m)에 옛날에 시체가 있었지."
"저기 20포에서는 총맞고 죽기도 했지"
법원노인정에 갔더니 화장터를 알고 계신분이 없다. 이일대에 미군과 국군이 모여들어 밤마다 싸운 이야기는 다 하신다. 심지어 총을 쏘면서 싸운적도 있다고 한다.
미군이 전재이 끝난 다음에도 한참을 이 지역에 주둔한 내력을 이야기하며 사거리에서 방미쪽으로 한 500m이동하면 가다 좌측으로 똑같은 집이 거의 30여채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곳의 소유권 쟁탈전이 벌어져 한국군은 한때 해병대가 들어왔는데 미군에게 그 일대를 사수하려 매일 옥신각신하면서 패싸움이 벌어져 한번은 미군이 쏜 총에 국군이 죽기도 했단다.
"어르신 우리는 그런 이야기말고 6.25전쟁때 전사한 군인의 유해를 찾으러 왔습니다."
그러자 한분이 "김신조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라고 묻는다. 잘 모른다고 답했다.
오늘 무슨 모임이 있어 약주를 한잔씩 하셔서 그런다고 총무되시는 분이 이해하라고 한다.
"어르신, 저 여기서 소위 달고 '79년도에 와서 '83년 5월까지 근무했어요. 포병으로."
그러면서 1사단 헌병이 무장탈영한 것도 우리 부대에서 잡았다는 이야기도 서울 구파발에 내려왔던 간첩을 잡기위해 거의 한달여를 수색정찰하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저기 20포도 조금 안다고 했더니 "그래 한번 들어가 봤소?"물어 본다.
나이가 드셔도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잠은 못자보고 그곳에 술취해서 골아 떨어진 동기를 여자들 품에서 구출해서 부대로 데리고 갔다고 하자 싱겁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전쟁 끝나고 자웅산에 올라가 보니 많지는 않아도 군데군데 시체들이 백골로 그대로 있고 옆에 따발총도 있고 수류탄도 있었다고 한 분이 이야기 한다.
또 한분은 현재 야포단(지금은 연대라 함)앞으로 개울을 건너서 바로 야산인데 그곳으로 군인들이 많이 지나갔는데 언제 보니 군의관이 죽어 있는 것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청진기를 가져왔는데 지금은 어디에 버렸는지 보이질 않고 한 30년전에 다시 가보니 아무것도 없더라고 한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서 주유소 밑의 개천가를 확인하려 했으나 이미 복개공사가 이루어지고 주택들이 들어서 아무런 흔적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혹시 어디사시는지 물으니 이곳에 사신다고 해서 사연을 이야기하고 혹시나 귀신나온다는 소문은 없는지 물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가 귀신나온다는 이야기와 연관이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 강가로 시장처럼 노점상들이 많았으나 주변정리로 다 없어졌다며 파평산에서 군인은 많이 죽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고맙다고 말하고 우린 온양동 노인정에 갔다.
그런데 여긴 주로 전쟁 후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한다.
문앞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떠나려는데 어느분이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면서 우리 동네에 온 손님인데 그냥가면 되느냐며 들어가자고 한다. 연락을 받고 들어 오시는 회장님이셨다.
찾아온 이유를 말하고 앞쪽에 노인정에서 들었던 자웅산 이야기도 해주고 이곳에서 한 5년 근무한 경험이 있다고 하니 한두분이 쳐다보신다.
"저 통이 뭐요?' 우리가 들고 다니는 지도통을 가리키며 궁금해 한다.
지도를 꺼내어 보여드리니 이곳 법원리를좀 보자고 해서 알려 드렸더니 정말 상세하게 나와 있다고 하며 파주에 안보공원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잘 알고 있고 바로 그 옆에 산에 공수부대가 낙하하여 떨어진 곳이고 전투가 있어서 그곳에 들어가 탐사를 해봤다고 하니 본인이 바로 봉서산 밑에 새말에 살았다고 하시며 그곳이 해병대 시체처리장소였다고 한다.
"그 안보공원자리가 해병대 시체 화장하던 장소요."
할아버지는 나이가 어려서 가보지는 못하고 연기가 나면 화장하는 걸로 아는데 저 북쪽에서 우당퉁탕하고 비행기 날아가고 불꽃놀이가 있고나면 군대 차량들이 죽 실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한때는 그곳에 해병대 무덤이 있다가 언제인가 다 파가고 없어졌다고 한다.
한번 들어와 보았는데 그래도 많은 정보를 얻었다.
"유골을 하나씩 팔고 있는 화장장"
그러니까 생각나는 것이 파주리 전골지역에 탐문을 다갔다가 기막힌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는 전쟁때 8살이었고 집이 피난을 가지 못하고 여기서 그냥 살았다.
그러니 북한군하고도 중공군하고도 잘 지내며 얻어먹기도 하고 별 탈없이 지냈다.
"북한군이나 중공군은 군기가 엄해요, 절대로 민간인에게 손대는 법이 없어요."
"아니 어르신, 저기 지평리라고 아세요?"
"알지 양평인가에 있잖소?"
"그렇습니다. 그곳에 지평리 동쪽에 양동이란 동네에 가면 중공군이 들어와 잠깐 있었는데 동네 할머니들 모두 데려다 못된짓을 했다는데요. 그 할아버지가 우시며 말해주었어요?"
"아녀, 그동네는 별나고만. 여기 어디가서 물어보쇼, 나쁜놈이 누구였는지?"
"할아버지는 그러면 유해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시겠네요?"
"알지, 그런데 지금은 없어졌어요."
"어디였는데 없어지나요?"
"저기 안보공원을 아시나요?"
"네. 잘 알고 잇습니다. 다른 곳에서 한분이 그곳에서 해병대 죽은 사람이 화장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내가 그 화장하는데 쪼그리고 앉아서 그 일등중사인가 요즘 하사라던데 그 사람이 화장터를 통제하고 있는데 잔 심부름도 하고 밥 얻어 먹고 살았소."
"네, 그럼 혹시 태우지않고 묻어버린 시신을 본적이 없습니까?"
"여기 앉아봐요, 성실 급하게 묻지말고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고 인면수심인지 그 시대를 모르니 잘 듣고 장병들 교육을 잘해야 합니다."
그러시면서 무려 1시간 이상을 우릴 붙잡고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하셨다.
그 내용의 핵심은 우선 화장을 하는데 저 북쪽에서 하늘에 조명탄 터지고 포소리가 요란한 날아침에는 여지없이 트럭에 시신이 오는데 미군이 실고 온다고 한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사전에 노무자 되는 사람들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많은 나무를 모아놓고 있고 한쪽에는 땅을 조금 깊게 파고선 그 안에 나무를 깔고 시신을 올려 놓으면 이 김하사가 불을 붙이게 된다고 한다. 그러다 얼마만큼 타고나면 벌써 나무로 된 유골함이 죽 늘어져 있고 이곳에 재를 얼마씩 넣게 되는데 노무자들이 다 한다고 한다.
그렇게 다 넣고 나면 흰 광목천으로 싸서 그 다음에 한쪽 텐트 안에 갔다 놓는다.
그런데 죽은 시신이 차에 실려올 때에 팔이나 다리가 별도로 실려오기도 하고 머리가 없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다 나무더미에 올려놓고 화장을 했는데 얼마 있으니 어디서 찾아왔는지 유족이라는 사람들이 울며불며 내자식 내형님 내동생 찾아내라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해병대로 갔는데 죽었다고 하는데 소식이 없는 사람도 있지만 일부는 가만히 보니 김하사와 뒤에서 뭐라고 밀담을 나누고 그 팔이며 다리만 있는 것을 가지고 떠난다는 것이다.
"유해를 팔아 먹는 김하사", 그는 부산사람이었다 한다.
우리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안다. 전쟁터에 갔는지 아니면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이 두절되어 버리면 전사자라도 되면 집안에 큰 도움이 되는데 아니면 개죽음에 불과한 것이 전쟁이다.
그러니 조금 머리가 트인 사람들이 편법으로 어디 전쟁이 심하게 벌어졌다고 한는 곳에 가서 유해를 발굴해 왔다며 아들이고 형님이고 동생이라고 생 떼를 써서 그게 징표로 되어 전사자 처리를 하게 되는 것이 전쟁의 소용돌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우리는 유해발굴을 하지 못하고 후퇴만 하다보니 유족측에서 실제 유해발굴을 하러 다닌 것이 서글픈 그 당시의 현실이었다.
"색시, 색시하며 희죽희죽 웃고 다니는 군인"
할아버지는 총명하신건지 아니면 비판적인지 몰라도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했다.
북한군이 내려왔는데 처음에 그들은 아주 신사였다.
날뛰는 놈은 전부 지역 빨갱이들이다. 머슴이나 조금 배웠다고 하는 청년은 다 그렇게 보였다.
민족해방이 되었다느니 김일성 수령의 하례같은 은혜를 입었다느니 해방군을 위해 동네에서 뭘 해야 된다고 떠들고 다녔다.
얼마 있으니 집에 있는 식량은 다 뺏어가고 어디 동네에서는 의용군으로 몇명이 갔느니 '조국 해방전선에 다 같이 동참해야 한다'며 떠들고 다녔다.
해방전선이 뭐냐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고다 했다.
집에 먹을 것이 없서 어머니가 할 수 없이 내무서에 가서 먹을 것이 없다고 애원하니 묵은 보리쌀을 한 양푼 주었다. "동무, 김일성 장군님께 감사하오."
할아버지는 어렸지만 아니 집에 들어와 다 뺏어가 놓고 뭘 감사하라는지 돌아오며 어머니에게 물었지만 입을 손으로 막으며 큰일 난다고 말하지 말라 하였단다.
동네에 전쟁전에 북에서 내려와 살고 있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계셨다.
어느날엔가 이제 식량배급을 준다고 완장찬 사람이 떠들고 다니는데 집에 찾아오셨단다.
"식량배급은 물 건너간 것이요. 우리가 북에서 살았지만 한두 번 속았을 아십니까. 저 선전은 다 개수작이요. 믿지 마시요 오죽 했으면 고향을 버리고 이리로 내려 왔겠소."라고 한다.
아버지는 밖에 못나가게 하고 밖에서는 해방전선에 나가자고 야단이다.
나중에 그것도 전쟁이 끝난 한참 후에야 알았지만 머슴들이 더 진짜 빨갱이보다 더 날 뛰었다. 왜냐면 옆집에 머슴살이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훤히 집안사정을 알고 있으니 있는 것 없는 것 다 빼앗아 가는데 앞잡이였다.
동네에서 무슨 사람들을 모아놓고 윽박지르고 돌맹이 던지게 하고 침뱉도록 하는 사람이 그 아저씨였는데 나중에 국군이 올라왔을 때에는 인민군따라 가버렸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국군이 올라왔다.
모두가 좋아서 나가서 손을 흔들고 좋아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찰이 집집마다 다니며 뭘 조사한다고 한다. 부역자를 그리고 빨갱이를 찾는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아버지 어머니도 집에 있던 누나까지도 불러다 조사를 했다.
밥도 못 먹고 있는데 배급은 커녕 동네에서 밥을 해오라고 한단다.
북한군은 처음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국군이 왔는데 밥을 해가야 하는데 밥을 할 양식이 없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마침 벼가 익어가고 있어 익지도 않은 벼들을 타작하여 밥을 한다.
그러다 또 국군이 밑으로 내려갔다.
그때도 할아버지 집은 그대로 동네에 살았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데 고생하지 말자는 아버지의 말에 집은 그대로 있는데 하늘에서는 연일 비행기가 쌔까맣게 북쪽으로 날아갔다.
소문에 중공군이 쳐들어 왔다고 모두 피난을 가야한다는데 그대로 남기로 했다.
정말 누비옷같은 것을 입은 중공군이 왔다.
할아버지 집에도 들어와 안방에서 잠을 잤다. 하지만 아무런 통제는 없이 아침이면 어디로 가고 밤이면 찾아오곤 했다. 집에서는 누나 때문에 어떻게 될까봐 어머니가 제일 걱정이었다. 계속하여 누나에게 뭐라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도 뭐라 했는지 잘 기억은 없단다.
"동무들 걱정 말기오, 우린 동무들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질 않으니 안심하오."
아니 중공군이 한국말로 아버지한테 말하였다.
집에서는 혹시나 그 머슴이 다시 오지나않나 무척 근심했는데 그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할아버지는 자연스레 나쁘지않은 아저씨들 틈에서 총도 만져보고 옆그리에 차고 있는 방망이 수류탄도 만져보며 친하게 지내게 되었단다.
겨울이라 몹시 추었는데 그때처럼 추운적도 없다고 하며 나라가 시끄러우면 하늘도 가만히 있지않는 다는 이야기가 맞다고 한다. 북한군이 왔을 때보다 훨씬 부드러운 중공군이었다.
그러다 또 중공군이 떠나갔다. 자고 일어나니 함께 있던 중공군이 아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께 물어보니 유엔군이 다시 밀고 올라온다고 한다. 좋다고 박수를 치니 얼른 손을 붙잡았다.
세상이 어떻게 또 변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인데 어린 마음에는 유엔군이 온다니 얼마나 좋았는지 연신 밖을 내다보았다고 한다.
정말 유엔군이 오는줄 알았더니 이번에도 국군이 왔다. 그런데 키가 큰 노랑머리 군인들도 함께 와서 동네를 어스렁거렸다.
신기해서 따라가면 국군 아저씨가 저리 가라고하여 도망치기도 했다.
하루는 동네 입구에서 노랑머리 군인이 '색시 색시'하며 국군 아저씨와 이집으로 저집으로 다니고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그걸 아느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식이집에 갔더니 그 어머니가 울고 있고 아버지는 마당에 주저 앉아 하늘을 보고 계셨다. 들어가기가 민망하여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한테 이야기를 하니 입을 막으시고 방으로 데리고 가신다.
어디가서 절대로 입밖에 그런 모습 말하지 말라고 다짐을 받아 대답을 하고 고개만 갸우뚱했는데 어찌 그게 할아버지 혼자의 입만 가려져서야 비밀이 지켜지겠는가.
온통 동네가 난리다. 여자는 모두 어디로 숨어야 한다고 누나도 꽁공 숨었다. 어머니도 숨었다.
언제는 밥 지어오라 난리고 이제는 여자를 찾으려 난리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철없는 아이들이야 유엔군이 나타나면 따라다니고 껌하나 던지면 우르르 달려들어 서로 차지하려 난투극이 벌어지고 그들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참 이상하게 잠자고 나면 군인 색깔이 바뀌어졌다. 이번에는 중공군이다.
그런데 중공군은 이번에도 집에 들어와 잠을 자는데 아주 양반이다. 비행기들은 계속하여 밤하늘에 수없이 불빛을 반짝이며 북으로 날아가고 아이들은 그걸 손으로 가리키며 한대, 두대 ,세대하며 숫자를 세고 있던 모습이 지금도 뚜렸하단다.
할아버지는 열을 내며 군인들 교육을 잘해야 한다고 한다.
누구의 자식인데 어찌 전쟁이라지만 인면수심의 짓을 하느가 말이다. 딸을 세워놓고 어머니를 어머니를 세워놓고 딸을 겁탈하는 그 모습이 선하다며 참 할머니들은 불쌍하게 살았다고 한다.
국가에서는 군인들에게 월급도 많이 주어야 하고 배고프지 않도록 병사들을 잘해주라 한다.
절대로 전쟁은 있어서는 안된다며 나라가 힘을 길러 억울하게 죽어가는 국민이 없도록 하고 지금 북한의 위장전술에 속지말아야 한다고 한다.
동네에 북에서 내려와 사는 사람의 이야기는 쏘련놈은 미국군인보다 더 하다고 했단다. 아예 동네에 오면 북한군이 나서서 그들의 입맛에 맞게 준비를 하여 대접을 한다고 한다.
새빨갛게 거짓으로 해방이 된다며 집집마다 있는 것을 다 수탈하여 가고 재산을 강탈하여 나누어 준다면서 공산당이 다 차지해 버린다고 한다. 진짜 중공군은 좋다고 하다.
나는 그래서 이런 저런 모순된 중공군의 행동을 이야기해 드렸다.
"할아버지, 고양에서는 그리 좋다던 중공군이 떠나가면서 집에 있던 옷가지뿐만 아니라 부엌이나 장독대에 숨겨논 먹을 것들을 다 뒤져서 가지고 가면서 집에다 불을 질렀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또 열을 올리신다.
"그럼 우리 밑에 동네는 미군 비행기 폭격으로 모두 불타버렸고 방공호에 숨어 있던 민간인들도 다 죽었는데 그건 뭐요?"
"할아버지, 그건 쳐 내려온 공산군을 쳐부스려는 행동중에 벌어진 것이지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잖아요. 아니 지금 누가 잘 살아요. 중공이에요, 북한이에요?, 어디가 더 자유스러운 나라 입니까. 그 당시는 어르신도 아시지만 우리가 북한보다 못 살았어요. 3배나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전쟁을 북한이 일으켰으니 생긴 문제잖아요. 용서하면 안됩니다. 원인을 제공한 놈들입니다."
할아버지는 괜스레 목소리를 높인 것이 겸면적으셨는지 "아니 지금 이과장과 논쟁하자는 것은 아니고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분통스럽고 억울해서 그러는거요."
나는 "저도 할아버지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요. 하지만 이제 군도 많이 변해서 이런 찾지못한 유해를 찾으려 하잖아요. 그런 군대는 앞으로 없을 겁니다. 믿어 주십시요. 충성!"
월롱의 다락고개와 덕은리에 가보라고 하신다. "그곳에 가면 유해를 찾을 수 있을거요."
"감사 합니다. 할아버지 . 건강하십시요."
이곳 문산일대, 법원리, 방미에서의 초급장교 시절은 몇일을 밤새고 이야기 해도 부족하다.
간첩잡으러 다니다 함정에 빠져 죽다가 살아나 무릎인데 몇가닥이 파열하고 선유리, 용주골일대의 술집 문화며 당시 술집 누나들의 그시절 애환을 함께나누던 추억이 있다.
포병 사격지휘장교로 군단 포술경연대회 사격지휘분야를 우승, 1달 휴가를 보내던 기쁨도 있다.
하지만 또한 전포대장 시절에는 지뢰 폭파사고로 한명의 전우가 절명했던 쓰라림도 있는 곳이다.
용산골은 마산리에서도 들어가지만 방미로 해서 들어가도 율곡선생과 신사임당 묘소가 있는 자운서원 옆으로 해서 들어가도 된다.
우리는 새로운 길을 가기로 하고 방미로 돌아서 가기로 했다.
"자운서원에 들어가 산을 탐사했다."
이곳이라고 전쟁의 화마를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안내소에 방문 목적을 이야기하고 들어가 우린 누가 말하는 명당이라는 이곳을 조사하는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는 않했다.
산 능선을 조사하는데 그렇게 높지않아서 쉽게 올라서서 하향식으로 확인하는데 그렇게 갱니호의 흔적이 많지는 않다. 이곳에서 보이는 산들은 다 언덕처럼 낮아 보인다.
묘비를 살펴보니 많은 묘비에 총알 맞은 자국이 있다.
하지만 안내소에서는 그 흔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고 전쟁이 있었는지조차 관심이 없어보였다.
아니 율곡선생은 임진왜란시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던 부국강병론을 펴오신 분이었는데 여기 있는 실무자들도 그런 심성을 가진 분들이 근무해야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좀더 현실감 있는 교육을 할 수 있지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용산골이다. 산마다 다 개인호가 많다."
이곳에 처음 들어온 것은 아니다. '00년도에 지금의 자유의 다리일대를 조사하러 왔을 때에 마정리에 사시는 분이 이곳 이야기를 하여 혼자서 1사단 사제장교의 안내로 이곳에 왓으나 대부분 중공군이란 소리에 서둘러 돌아간 기억이 났다.
처음 사업을 시작하여 '07년도까지는 거의 아군이 아니면 아예 제보도 안받고 발굴은 생각도 못했는데 요즈음은 중공과의 관계 개선을 고려하여 중공군을 보낸다는 핑계로 발굴 범위가 넓다.
바로 이곳은 '12년도에는 서울의 인간성회복운동본부 추진위원회 임원진을 모시고 발굴 현장을 보여주기도 했던 곳으로 당시는 계곡에서 정말 요행히 발굴된 국군 용사 모습을 보여드렸는데 박병하 팀장이 발굴을 책임지고 하던 곳이다. 나는 이미 발굴에서 벗어나 조사팀에 있을 때였다.
"이곳은 마을에서 산능선까지가 겨우 걸어서 5분이면 다다르고 주변을 걸어 다니는데도 평지를 걸어다니는 수준이다."
이곳 전투는 초기전투시 국군 제1사단이 임진강을 끼고 방어임무를 하면서 바로 주봉인 208고지에 지휘소가 위치하여 현장을 통제하며 전투를 하다 문산천이 있는 월롱-도내리-광탄선으로 주저항선을 형성하게 된다.
9.28서울 수복후에도 반대로 이곳 문산천을 두고 격전을 벌이다 적은 임진강 너머로 후퇴하게 된다.
또한 1.4후퇴 당시도 처음 전투와 거의 비슷한 형태로 철수해 내려가고 다시 3.15일 서울 수복후에도 진격시 고양과 벽제, 광탄일대의 산에서 전투를 하며 올라오게 되는데 사실 주도권을 아군이 쥐고 있었다. 따라서 국군이 집단적으로 전사하는 경우는 처음 전투와 1.4후퇴 당시였다고 봐야 한다.
지역주민 이야기들도 나의 판단과 거의 비슷하다.
국군이 가장 많이 죽어서 눈에 띄었던 곳은 월롱면소재지가 있는 곳과 벽제일원이고 나머지는 중공군이 대부분 죽어서 널려 있었다 한다.
그렇다면 중공군이 죽어서 널려 있어야 하는 시기는 '51.1.4후퇴 당시와 '51년도 4월과 5월어간인데 주로 미군의 비행기 폭격으로 그 불폭탄이라 하는 네이팜탄에 끄슬리다시피 죽어간 모습이 많다.
그리고 이때는 땅도 얼지않아 파지기 때문에 주민들이 부역으로 나와서 비참하게 죽은 시체를 모아서 한 곳에 묻어버리는것이 통상적이었다.
"누군지는 몰라요, 말로들었는데 저 산과 이곳 밭에도 중공군이 수 없이 죽었데요. 국군은 여기서 파평산으로 밀고 올라가는데 중공군은 총도 없이 어린 소년같은 군인들이 누비옷 입고 와서는 우왕좌왕 하다 비행기 기총사격에 많이 죽었다 합니다."
마을에 들어서 마을회관에 들어가 여러 사람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벌써 10년은 되었다.
그런데 한 10년지나 '11년도 오늘, 우리가 와서 보니 마을회관에 어른들이 없다.
할머니들 몇이 앉아서 화투놀이를 하고 있다. 동네 할아버지를 찾으니 할아버지는 없다고 하며 할머니도 쓸모가 있으니 물어보라 하신다.
웃으면서 말씀을 들였더니 저기 모퉁이돌아가면 가장 나이많은 분이 한명 있다고 한다. 연세가 얼마인지 물어보니 81살인가 되었다며 그래도 그 분 밖에는 말 할 사람이 없단다.
찾아가 보니 명패가 붙어 있는데 정씨 어른이다
마침 밖에서 채를 이용하여 콩인지 고르고 계시는걸 인사를 들이고 목적을 이야기 하니 짬짬 하시더니 집으로 들어가자고 하신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본 것은 없고 이야기로 들은 것인데 저쪽 밤나무숲 밑에 이 일대 죽은 사람을 다 같다 묻었다. 대부분 중공군이 죽었고 아군은 그렇게 본적이 없다."
우린 걸어서 현장을 가 보았다. 흔적은 없지만 동네사람들이 땅을 파서 묻었고 지금 그걸 묻은 세대는 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우리는 중공군이라 판단하고 좀더 주변을 알아보기 위해 산을 올라가 개인호를 보니 상상외로 많이 있었다. 나오다 마을 입구에서 한 할머니를 만나 물었더니 본인 할아버지가 직접 참여한 장본인인데 3년전에 돌아가셔 본인은 그냥 저기 밤나무 숲 어디라고만 들었다 한다.
그런데 '12년도에 발굴팀에서 유해를 이곳에서 발굴한다고 하여 찾아왔더니 밤나무 숲이 아니고 그보다 더 올라가 계곡에서 유해를 주민 제보로 발굴하는데 모든 유품이 아군 것이었다.
이곳에 인간성 회복운동본부 추진협의회 임원진을 나에게 안내하라 해서 안내를 했다.
"대규모 유해 매장지를 찾았다."
그러다 '15년도에 이곳 용산골에서 대규모 유해를 발굴했다고 발굴팀의 자랑이 하늘을 찌르고 있어 그곳을 찾아가 보니 아이쿠 우리가 중공군으로 추정하여 발굴을 못하게 미루고 있는 그곳을 발굴하여 40여구의 유해를 수습한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그 찾아가 뵈었던 어른을 찾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본인한테는 와서 물어보지 않았고 우리가 만났던 그할머니 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발굴 했다고 하며 본인도 살짝 한번 가보았다고 하신다.
"아니 중공군이라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에이, 직접 본 것도 아니였고 그 사람 체면도 있는데 말하기가 좀 곤란해서 돌아왔어요."
그러시면서 난처하니 본인을 만나 들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당부 하신다.
"동네 사람끼리 싸움나요?"
우린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다. 이렇게 제보라는 것이 그 신뢰도가 무너지면 큰일인데 현장을 통제하는 인원들이 가감없이 여러 사람으로부터 받은 제보내용을 그대로 지면에 옮겨야 하는데 아군이라 판단되는 내용위주로 유리한 것만 기록을 남기는 잘못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16년도에도 또 대규모 집단 매장지에서 유해를 발굴했다.
유품을 살펴보니 별로 없다. 중공군이라든지 아군이라든지 핵심적으로 대변할 유품이 뚜렷하게 없는 가운데 주로 신발과 펜티고무줄, 일부 플라시틱 숟가락등 누가 봐도 국군이라 단정할 것이 없는데도 대부분 국군으로 판명을 했다.
그 이유의 핵심은 제보자의 제보내용과 전투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 동네의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은 나와의 인터뷰에서 이미 중공군이 태반이란 사실을 말했고 그 이후에는 참 곤란하다며 동네사람일이라고 회피하는 모습속에 무엇이 정답인지는 나타나 있다.
우리가 전쟁을 여기서 직접하지 못한 상황에서 전사내용만을 가지고 어느 사안을 결정적으로 결론내기는 어렵다고 본다
따라서 모든 것은 상식선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아니 아군이 주도권을 가지고 너구나 노무자를 지역마다 동원하여 현장의 유해나 부상자를 처리하는 마당에 감히 아군을 누가 집단으로 매장하겠는가.
통상 중공군은 가매장지역을 선정하여 가매장하게 되는데 일렬로 매장하게 되고 미군이나 우리가 어느 유해를 집단으로 가매장했다는 기록이나 제보를 듣지는 못했다.
다만 화장을 하러 차량으로 실고 나오던지 아니면 들것으로 들고 나았을 때에 적의 기습으로 그냥 놓고 도망쳤다던지 지금 DMZ안에 있는 주여 격전지에 교통호에 밀어넣었다는 제보는 있다.
그러나 내가 거의 20여년을 발굴관련 업무를 해 오면서 국군을 집단으로 매장했다는 소문을 못 들었서도 중공군은 집단 매장도 하고 또한 그들이 스스로 본인들의 전우를 이렬로 쭉 매장하고 푯말을 붙여 놓은 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래서 전투양상이 중요하다. 아군이 주도권을 갖고 있었는지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여긴 아니다. 적성지역도 아니고 '50.6월의 초기 전투시도 아니고 비록 방어를 하다 내려가는 1.4후퇴시도 우리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려 내려가지 않았다.
그 다음에 3.15일 서울 수복후에 다시 임진강상으로 진출시에는 공격을 하던 상황이고 중공군의 4월공세시는 주 전투 장소가 파평산에서 이루어지고 우측방 영국군이 밀리면서 중공군을 지금의 고양일대로 끌여들여 박살을 내기 위해 접촉을 유지하며 공세적 방어를 하면서 철수해 골든선, 행주나루에서 북한산 전방-구리에 연하는 선으로 철수한 것이다.
지역주민이 다 알고 있는데 유리한 제보 내용만 편집하여 기록하고 그 사람에게 포상금을 지급하는 엉뚱한 일은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지내울에 대량의 매장지가 있다는 제보가 날라 들었다."
지내울도 바로 용산골 인접이다.
이 지역은 북쪽에 임진나루에서 올라서면 화석정이고 선유리로 빠지는 길목의 좌측에 위치한다.
200고지군이 37번도로, 364번도로, 8번도로, 367번도로 사이에 들어가 있는 구릉으로 서쪽이라 비록 낮은 지형이지만 밖에서 쉽게 노출이 안되는 곳이다.
임진리, 율곡리, 마산리, 이천리에 중앙지역으로 지역 주민이 많이 거주하지도 않는 곳이다.
찾아가서 마을회관에 들어가 지역주민 이야기를 듣고 제보자분을 만나서 현장에 가보니 바로 건물 뒤에 나즈막한 밭언저리 땅이다.
사연은 아는 분이 아무도 없고 오직 제보하신분만 아는 내용으로 그 밭 끝에 아주 낮게 구릉처럼 된 곳이 3군데정도 있어 아마도 전쟁때 만들어진 무덤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문중산이고 밭인데 본인이 이곳에서 살다 전쟁 때에 피난 나가서 다시 이곳에 들어온 것이 얼마 안된다면서 옛날에 없던 것이 보이니 의심이 된다는 것이다.
"옛날에 없던 것이라 전사자 무덤이다?"
이런 경우에 참 답답하게 된다.ㅁㅂ
그렇다고 그 제보 내용만으로 파기에는 그렇고 또 한편으로는 제보자의 질문에 머라 답변을 해야 되는데 할 말이 부족할 때가 막막한 것이다.
주변을 둘로보고 또한 바로 그 우측의 용산골 동네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신통한 답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도대체 저 나즈막한 무덤군은 무엇일까?"
아예 속 시원하게 이곳 일대가 민간인 집단 학살 장소였다고 누가 마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바로 결론을 내지않고 다음에 다시와서 더 탐사 및 탐문을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일단 자리를 나왔다. 그렇다면 저 좌측의 임진리에서는 뭐라고 할까?"
나는 임진리로 들어갔다.
선유리 뒤에서 한 100~150m되는 야산이 남북으로 한 5km되게 발달되고 바로 임진나루에 연결되는 동네의 중앙에 들어갔다.
들어와 보니 언제인가 내가 발굴팀을 이끌고 있을 때에 성수가 이곳에 들어가 유해를 밭에서 한구 발굴했던 곳이다. 하지만 그 유해는 민간인 유해로 판명하여 재 매장한 경험이 있는 동네다.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제 간 곳도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 당시의 상황은 동네 아저씨가 우리 발굴팀 차량을 보고 세워서 본인 밭에 유해가 한구 나와서 재매장한 곳을 알려주어 시작 되었다.
성수가 들어가 보니 민간인 유해라 할 수 있는 유품은 하나도 없고 아저씨 이야기로 신발이 나왔다는데 버려서 찾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별다른 느낌없이 유해를 발굴하면서 감식관을 불렀는데 감식관이 아마도 민간인 유해일 것 같다고 하는 바람에 그만 재대로 약시관에 수습하여 잘 매장해 드렸다는 곳이다.
마침 어르신 한분이 달팽이에게 밥을 준다며 싱싱한 배추를 한아름 안고 마을 앞을 지나고 있다.
"어르신, 잠깐만요. 혹시 이곳에 오래사셨습니까?"
"그렇게 오래는 안살았어도 이동네에서는 가장 오래 살았지요."
아저씨는 나이가 78인데 전쟁은 잘 기억에 없다고 하신다.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들이 이 동네를 지나서 산을 타고 임진나루로 엄청 갔다고 한다.
"피난은 남쪽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고 북으로도 갔다."
"선조 임금님이 걸어간 동네"
말을 붙이고 있는 사이에 동네 아주머니 둘이 가담했다. "뭘 찾는데 그러세요?"
"아예, 우리는 발굴단인데 저 앞쪽 용산골에 가니 군인들이 만히 죽었다고 집단 매장지도 있고 어떤 분은 본인 밭언저리에 도 다른 무덤도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국군이 아닌 것 같아서 지금 탐문을 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걸 아는 분들이야 다 죽었지요, 우리가 8학년 4반인데 그때 동네 사람들이 다 불려나가 저 밭과 산사이에 죽은 사람이 많아서 다 치워버렸지"
"동네가 썩는 냄새나지, 미친개들 날뛰지. 개에 물려 미친 사람도 생겼어요."
"그럼 그 개들은 다 어떻게 했어요?"
"뭘 어떻게 해요, 몽둥이 들고 남정네들이 모조리 패 죽여 저 냇가 옆에 묻어버렸지."
"두 할머니가, 아니 두 아주머니께서 더 잘 아네요?"
이곳이 길로 가면 보이기 때문에 산길로 임진나루에 가는 지름길이라 임진왜란 때도 이곳으로 임금이 갔다고 한다. 정말 동네를 다니다 보면 많은 역사를 알 수가 있다.
두 할머니가 말하는데 얼마나 말을 빨리 하는지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잠깐, 할머니 제가 질문하고 답변하는 식으로 말씀을 듣겠습니다?"
"먼저 좌측의 머리가 좀더 까만 할머니께 물어보겠습니다?"
"여기는 언제부터 살으셨고 조금전에 임금님이 이 동네로 지나서 임진나루로 간 것을 말씀하시던데 언제 들으셨는지요?"
"아니, 무슨 재판장이요? 하하하, 나는 19에 시집와서 여기서 쭉 살았어요. 우리 동네는 여기가 아니고 동파리에서 왔는데 시집오니 부자라는 집이 찢어지게 가난하여 오자마자 밭에 나가 일을 했어요. 그때는 전쟁이 나기 바로 한 3개월전인가 봄인데 처음 오니까 지금 이 길이 가장 큰길인데 이제 쪼그만 길로 되어버렸어요. 밭에서 아낙들이 품앗이로 모이면 별별 이야기를 다 해요. 그런데 한사람이 해방군이 어쩌고 해서 그게 뭔고 물어보기도 그렇고 너무 아직 새댁이라 궁금해서 집에와 남편에게 물어 봤어요. "서방님, 해방군이 뭔가요?" 했더니 쓰잘데기 없는 것 물어보지말라며 휭 나가버리던 기억이 뚜렸합니다. 나는 어려서 역사이야기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우리동네에 고구려성이 있어요, 그거 아시나요?"
"네, 벌써 3번이나 조사하러 갔었습니다. 거기가 전투 장소였거든요."
"그러세요, 화석정 이야기도 잘 알겠네요?'
"네, 잘은 모르지만 율곡 선생이 지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많이 아네요, 하하, 그런데 시집오니까 지금은 없어졌지만 저기 입구에 조그맣게 '임금이 걸어간 길'이라고 안내판이 있었어요. 그래서 알아보니 임진왜란 때에 선조 임금이 이곳으로 가마를 타고 지나서 임진나루에서 배로 강을 건너 의주로 가게 되는데 뒤에서는 일본군이 쫒아오고 어떻게 하겠어요. 따르던 많은 궁녀들과 신하들이 죽어갔다고 합니다. 그 죽은 사람들을 묻은 곳이 바로 맞은 편 저기 편편한 계곡같은 곳이라고 하데요."
"전쟁이 나가지고 북한군이 몰려 올라가는데 일반 국민들도 보따리 이고 지게지고 어린애 업고 북한군 가는 길로 엄청나게 올라 갔어요."
"그 사람들은 무슨 포승줄에 묶여서 가느 것이 아니고 앞다퉈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저 산을 넘어갔지요. 왜 가는 지는 이미 동네도 완장차고 다니던 놈들이 양키가 온다고 오면 다 죽이고 요절을 낸다며 북을로 떠났다가 다시 해방군과 함께 들어와야 한다고 다그쳤거든요."
"와, 니 언제부터 그렇게 유식했나?" 옆에 할머니가 거드신다.
"할머니는 언제부터 여기 사셨서요?"
"나는 저 할머니보다 3살이 적어요. 줄곧 여기 살았어요. 그래도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전쟁이 난 날도 모르고 실컷 잠자고 나니 전쟁이 났다고 해 밖을 보니 공산군들이 걸어가고 있어요.
"그럼 이 길로 북한군이 저쪽 임진나루에서 건너와 가지고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이군요."
"그런가 바요, 시댁에서 여자들은 나오면 안된다고 집에 꼭꼭 숨어 있는데 몇일 지나니 다 나오라고 하더니 남녀할것없이 모두 죽은 사람 치우는 일인데 그때도 저 앞에 죽은 군인이 몇 있어서 한곳에 묻었는데 그것은 국군이 9월에 올라와서 다 신고를 하라해서 했더니 군인들인지 노무자인지 다 파서 갔어요. 그리고 추운 겨울이 오는데 중공군이 온다고 해 안성으로 피난가버렸다가 이듬해에 들어왔으니 잘 몰라요."
"아니 그래도 소문이라도 들었을것 같은데요, 어디에 묻혀 있다느니 누가 죽었다느니."
아저씨가 이번에는 나섰다.
"나도 어려서 잘은 모르지만 중공군도 보고 미군도 보고 국군도 보고 다 보았어요. 우리 어릴 때에 가장 많이 죽어 있던 곳이 바로 아주머니들이 이야기한 저 앞산 일대인데 다 중공군이라 했어요. 마을 사람들이 전재이 끝나고 삽 괭이들고 다 긁어서 묻었고 우리는 그 호를 가지고 전쟁놀이 하고 탄피나 총알을 주어서 엿도 바궈먹고 총알을 불에 달구면 납이 흘러 나와요. 그걸 목걸이도 한 형도 있었어요. 그런데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보타리며 등에 뭘 메고 수없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해서 산너머로 가고 옛날 두루마기입은 나이 먹은 아버지같은 분들이 쭉 줄로 엮이어 가는 것도 보았어요."
그러니 이동네는 국군 전사자관련 정보는 획득하기가 어려웠다.
주변이 대부분 군부대라 원형도 많이 부대신축 및 진지공사로 훼손이 되어 버렸고 배수로 공사간 유해를 발견하여 가매장했다는 군부대 간부의 제보로 인근지역 부대 울타리선을 조사하게 되었다.
벌써 해가 저물어 다음날 아침에 만나는 장소로 갔더니 아직 오질 않는다.
부대에 훈련 비상이 발령되어 출동준비 연습이란다.
기다리는 시간에 그 인근에 넓은 공터같은 곳이 있어 걸어서 올라가니 한 아저씨가 혼자서 밭농사를 짓고 있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거 직접 이렇게 농사짓는데 힘이 들지 않으세요?"
"공직자를 하다 정년 퇴임해서 집에서 한 6개월 쉬었더니 답답해서 이곳에 땅 200평을 구입해서 주말농장처럼 왔다갔다 하는데 웬 풀이 이렇게 많이 나는지 요즘은 주일에 거의 와요."
고추도 있고 배추도 있고 고구마도 있고 토란도 있고 땅콩도 있고 별거를 다 심으셨다.
서울 불광동에 사시는데 이제 65세다.
그러면서 옛날 서대문교도소에서 많이 죽어 그 인근에 매장했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 대상이 군인이나 경찰인지 아니면 큰죄를 지어 사형수들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다 군대 안내자가 나와서 함께 이동하여 발굴가능장소라고 경시한 곳을 보니 흙이 많이 복토가 되어 보여 간부에게 물었다.
"이곳을 언제 흙으로 덮은 것 같은데 아시나요?"
그랬더니 부대 들어오는 진입로가 좁아서 길을 두배로 넓힌 상황이고 그때 나오는 흙들이 주변에 복토되었을 거라 한다. 이러면 또 찾지 못한다.
우린 다시 금파리로 향했다. "이 일대 죽은 사람을 모아서 묻은 곳이다."
하루하루 이동거리가 그래도 별거 아니다. 어떤 때는 울산에 갔다가 서울에 올라와서 디시 인제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지난 20여년의 기간중에 가장 많이 달려본 거리가 하루에 1,031km였다.
금파리에 온 이유는 파평면사무소 뒤, 그러니까 지금 신도로 37번도로가 지나는데 늘노천이 임진강과 만나는 곳에 다리가 있는데 이 곳에 정수장인지 조금 큰 건물이 있고 그 건물을 좌측에 끼고 조금 들어가면 밖에서 보기에도 으슥한 곳이 있다.
산으로 다른 곳보다 좀 넓게 공간이 있고 접근이 가능한 곳인데 6.25당시 이지역 일대의 사람들을 죽여서 묻었다고 한다.
보도연맹이나 빨갱이같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니면 이 일대에 죽어있는 사람을 거두어 묻었는지 아니면 우익인사 처형인지는 모른다고 몇해전에 만났던 익명의 제보자가 말했다.
그러니 어떻게 발굴해보라 할 수도 없는 문제고... .
다시 감악산에 대해 알아본다. "감악산 설마치 고개의 비극, 신암리는 알고 있다."
반복되는 내용이지만 참 영국군은 열심히 싸웠다. '51.4.22일 중공군의 춘계1차공세에 와이오밍선 확보를 위해 그좌측 보급로를 확보하려던 영 제29여단은 황실대대인 최정예 글로스터 대대를 이곳 감악산 일대에 배치하게 된다.
국군 제1사단은 마질리일대와 파평산, 두포리에서 영평산에 이르는 돌파구에서 전투하고 영국군은 중성산으로부터 우측으로 금굴산(벨기에 대대 방어)에 이르는 구간에 중요고지군에 중대단위로 병력을 운용하여 급편방어 하게 된다.
중성산에 1개 중대 그리고 적성에서 371번 도로를 타고 남동쪽으로 내려서며 좌우측 고지군에 1개 중대씩 그리고 대대는 지금 영국군 참전비가 있는 비룡교 근처 고지군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이미 중공군이 내륙으로 깊숙이 은밀기동하여 감악산과 사기막 일대를 틀어 막고 앞뒤에서 인해전술과 성동격서 전술로 몰아붙이니 혼비백산한 영국군은 전의를 상실하게 되는데 그래도 완전 무력화 되어 대대장이 포로되는데 까지 3일이란 시간을 확보해 줌으로써 좌측의 국군 제1사와 우측의 미 제3사단및 미 제25사단과 터어키여단이 축차적으로 후퇴하는 시간적 공간적 위치를 확보해 주었다고 칭찬하는 전투가 되었다. 무려 1/3이 전사하고 나머지 병력은 다 포로나 부상자가 되었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00년도에 이곳을 탐사및 탐문하는 가운데 25사단으로부터 진지 공사간 유해가 나와 산중턱에 묻었는데 뼈가 상당히 크다는 제보를 받았고 영국 대사관에 연락 했지만 시큰둥하여 발굴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사실 나는 휴전회담간 영국수상 애틀리와 인도, 중공의 삼각관계를 무척 안좋게 보고 있는 사람중에 하나다. 영국이야 제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계속 전쟁이니 그만하고 싶었을 게다.
미국 트루먼이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상대로한 전쟁확전의 반대의사는 미국 여론과도 맞아 떨어져 맥아더나 그 후에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모든 사령관들의 북진계획에 브레이크를 걸게 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스탈린의 동구유럽에 대한 철의 장막도 아니고 바로 그들이 갔고 있는 마카오나 홍콩에 대한 기득권유지가 더 크기에 중공의 로비에 두 손들고 찬성하고 휴전을 진행하고 자국의 영향력이 큰 인도를 얼굴마담으로 활용했다고 본다.
그래서 휴전회담은 애초부터 우리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었다. -나의 독설이니 믿지는 마세요(?)-
그런 어느날 다시 이곳을 탐문하며 혹시나 국군 제1사단의 전사자를 목격한 지역 주민을 찾는데 광수원 지역에서 한 어르신을 만나게 되었다.
분인이 국민학교 5학년때 광수원 맞은 편에 연대본부가 지금 있는데 그 자리에 1.4후퇴시 국군이 들어와 의무대가 있었으며 많이 전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파평산 동쪽 웅담리에서도 많이 죽었는데 4월에 국군이 들어오면서 시신을 다 수습하여 웅담리에서 화장해 갔다고 한다.
동네마다 신고도 하라해서 이곳 광수원에서도 몇구가 그 곳으로 갔다는 제보였다.
실제 전사를 검토해 봐도 감악산에서 우리 1사단이 죽도록 싸웠다는 기록이 미약하다.
지금까지 언급 되었던 가월리와 주월리, 마지리, 두포리일대에서 그리고 파평산에서 전투하고 밀려 내려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우린 주로 180고지군과 파평산일대, 두포리, 고랑포리에서 발굴작전을 해 왔다.
그러다 내가 발굴과를 떠나 조사과로 보직을 옮기면서 많은 변화가 우리 단에도 찾아왔다.
너무 열성적으로 유해를 찾으려 하는데 이미 주요한 국군의 전사지역은 대부분 1차 발굴이 진행 되다보니 앞의 성과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통적인 성향인지라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성과를 내야 했다.
그러니 발굴 팀장들이 죽을 노릇인데어떻게 하랴, 지휘권을 갔고 있는 자가 요구하니 군은 만들어야 신상에 해가 없는 조직의 특성이다. 살기 위해 충성을 해야한다.
그래서 시작 된 것이 발굴지역을 재 발굴하여 조각 유해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시대는 개인호가 아니면 일반적으로 발굴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유해는 두개골이 있어야 하고 신체의 반 이상이 나와야 한구로 개체분류를 하는 것이 일반적 이었는데 모든 것이 다 바뀌었다.
"조각 유해도 한 구다", "피아 판단이 곤란할 때는 아군이다."
들어보면 다 맞는 이야기다.
적군이 아군이 되어 우리곁에 있다면 그래도 좀 괜찮다고 본다.
왜냐하면 다수가 우리이니 큰소리 낼리 없고 오히려 우리 아군들이 어여삐 봐줄 수도 있지않은가.
하지만 만약에 우리 아군이 적군이 되어 적군묘지애 묻히게 되거나 중공군으로 되어 중국에 보내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래서 우린 1%의 가능성만 있으면 아군으로 판단하자고 한다.
물론 우리가 결론이야 내는 것이 아니고 밖의 전문위원들이 피아 판단을 하게 되지만 자료는 우리가 제공한다.
문제는 이거다. 이러다 보니 조그만 구실만 있으면 이것을 확대 생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상식선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아예 처음부터 답을 정해 놓고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여러번 언급 되지만 상식이라는 것은 이렇다.
첫째, 이곳의 전투는 언제 누가 누구와 했는가?
둘째, 전투를 했다면 공격인지 방어인지?
셋째, 공격이나 방어의 주도권은 누가 갔고 있었는지?
넷째, 전쟁의 시기에 노무자가 있었는지, 유엔군의 경우 카츄사 도는 노무자의 지원여부는?
다섯째, 전쟁중 혹은 전후에 유해수습은 이루어졌는지?
여섯째, 위패카드, 묘비로 세워진 전사자의 전투지역과 연관성은 있는지?
일곱째, 나온 유품이 어떤 종류인지?
여덟째, 지역 주민의 증언 정도는?
이런 일련의 분석자료를 이용하여 정말 옳바르게 판단해야지 감성적 판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국군이 전투하지 않았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하지도 않는 곳에서 나온 동양계 유해를 m1탄피 하나 나왔다 하여 국군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다. 더구나 대부분의 지역주민이 중공군이 대다수 죽어서 있었고 국군은 들어와 유해를 수습하여 웅담리일대에서 화장하여 갔다고 하는데 거꾸로 73구의 유해를 발굴하여 1구만 중공군이고 다 국군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도 끄덕하지않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이곳 신암리의 유해는 '17년도에 발굴 되는데 바로 길가 집 정원에 있는 작은 소나무 밑에서 발굴되고 중국 은화로부터 많은 유품이 중국군용이고 지역주민이 중공군을 모아다 묻었다고 열이면 아홉이 말하고 1명이 국군도 있었다는 이야기에 그런 결과로 판명 하였다.
물론 그 유품에 아군 인식표도 하나 나오고 여러 유품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의 고려요소에 2가지 외에는 다 적군에 가까운 정황이다.
'00년도에 제보 받았던 영국군 추정 유해도 발굴 했으나 골격이 유럽인종이 아닌 것으로 분류되고 중성산에서 나온 유해는 대부분 조각 유해임에도 아군으로 대부분 처리되었다.
아니 1사단 전사에 중성산에서 전투한 기록이나 황대형 참전용사님처럼 이곳에서 전투한 분들이 그곳에서 아군이 전투를 한적이 없다고 하고 오히려 영국군이 점령하여 전투시에 인해전술로 몰려드는 중공군을 화력으로 무력화 시키면서 시신이 파쇄 되었다고 봐야 함이 타당할진데 우린 그 아군의 많은 숫자를 발굴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그저 그 1%의 구실을 붙여 아군으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 노무자도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다시 피아 판단을 하여 제대로 된 내용으로 알림판을 다시 만들어 설마치계곡에 세우기를 간곡히 빌어본다.
"우리의 의식구조에서는 군은 이제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고 국가적 차원에서 독립적인 발굴단을 운영하여 미래지향적인 유해발굴을 하고 그 뜻을 흠향하며 비무장 지대에 평화공원을 만들어 우리도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처럼 남군이든 북군이든 국가에 명령에 따른 군인은 다 모셔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통일 대한민국의 화합이며 하나로 되는 지름길이다.
"방앗간의 첫사랑, 자작리는 알고 있다."
고랑포리지역은 임진강을 가장 쉽게 도보로도 도섭이 가능한 곳이다.
또한 이곳에는 신라시대 왕중 유일하게 묘하나가 이곳에 있는데 경순왕릉이다.
이런저런 사유로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육로와 수로의 교통요지였던 것 같다.
바로 위가 38도선이 지나고 강 아래쪽은 파주시 적성면 장좌리로 넓은 평면 개활지다.
그러니 당시 이곳에 근무하던 제13연대 병사들도 이곳 일대 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고 때로는 인생사업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 충족 방법은 어느 형태로든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이걸 지금의 미투운동이니 여권신장측면에서 바라 보면 뭐라 나무라고 심지어 또 다른 폭력이라고 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 시대를 살은 사람도 아니고 전쟁의 주체도 아니였기에 지난 20여년의 몸부림친 유해발굴 관련 지역탐사 와 탐문의 결과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 다시금 반복되는 역사를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보며 최대한 가감없이 전하려 한다.
"그건 시대를 조금 이해하여야 한다."
일요일은 조용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이미 서울에서 육군회관 개관식이 있다고 주요 지휘관은 서울에 갔다.
부대들은 농번기라고 거의 1/3수준으로 휴가 또는 외박을 보내고 부대는 바로 어제 경계태세가 해제 되었다.
일부 지역은 차량도 정비목적으로 후방으로 내려가고 심지어 m1소총도 정비 목적으로 많은 총들이 사단 병기대로 들어갔다.
그러니 경계근무인들 제대로 돌아갔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외박나간 인원들중 돈이 없는 사람은 멀리도 못간다.
사실 배 고파서 군대에 들어온 인원이 많고 간부들도 그렇기에 외박을 많이 나가야 남는 배급량이 많을 것이다.
고랑포에는 당시에 방앗간도 있고 학교도 있고 술집도 있고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전선의 종로거리였다고 한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돈이 돌아가는 곳은 그때만 해도 쌀이 귀한 시대였으니 방앗간이 하나의 아지트처럼 군인들의 안식처같은 창구역활을 했다고 한다.
돈을 갔다 맡기기도 하고 빌리기도 하고 의복을 교환하기도 하고 얻어 입기도 하고 바로 그 옆에는 술집이 있어 때로는 거하게 마시고 그 곳 뒷방에서 잠들기도 했다.
간부도 병사도 그 당시는 그렇게 나이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친구도 고향 선후배도 많았다.
"방도가 없다. 이미 적이 고랑포를 도섭하여 장좌리로 내려가고 있다."
이미 일제시대부터 방앗간 주변에는 방공호가 있었고 전쟁전에 북한군이 한두번 월경하여 비상이 걸려 점령을 해본 군인도 있다.
그런데 전쟁이 났으니 그리고 기습을 받아 최전방이 급작스레 무너졌으니 이곳 고랑포리는 난리가 난 것이다.
하지만 정일병은 떠날 수가 없다.
이곳에 첫사랑 여인이 잠들고 있다.
앞에 방공호에 정일병이 들어가고 같은 분대 황하사는 우측으로 남이병은 좌측에 들어가 총을 겨누고 적을 기다린다.
방에서는 짐보따리를 꾸리느라 소란스럽고 드디어 길을 나선다.
"사장님, 우리 점순이를 꼭 보호해 주세요. 우리 집은 군산입니다. 점순아 가서 기다려라.!"
점점 적군이 다가오고 박격포가 근접에 떨어진다.
방앗간 사장은 강바닥에 준비해 있는 본인의 고기잡이 배를 이용하여 강을 건넜다.
3인의 용사들이 뒤를 따라 강으로 뛰어든다.
황대형일병은 기관총을 들고 강을 건넜다. 그리고 살아서 다부동에서 정일병을 만났다.
"혹시 연락이 되었냐?"
"아니요, 알 수 없어요."
그러다 진격 작전이 있고 1사단은 고랑포리로 도하하여 평양으로 간다.
정일병은 제일 먼저 강을 건너 방앗간에 가 보았다.
아직 본대는 강을 건너고 있는데 용맹한 전진이었다. 뒤를 따르는 황하사는 기관총을 어깨에 메고 임진강 물속에 접어 들었다.
이때였다. 강 대안상 방앗간 근처에서 화염이 오르고 포탄이 작열 하였다.
"이렇게 정일병은 전사하였다."
"이곳 고랑포 지역은 쉽게 공산군이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뻥뻥 터지는 두개골, 피터지는 땅에는 하얀 눈위에 빨간 물이 들었다."
최초 철수해 내려갈 때는 너무 쉽게 내려갔는데 아군이 굴토해 놓았던 경계호를 이용하여 완강하게 저항하여 진출하는데 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러다 다시 북한지역 운산에서중공군에게 포위되어 건재마저 무너진체 후퇴하던 제1사단이 평양근처에서 겨우 일부인원을 수습하여 이곳으로 내려오는데 또 다시 적이 강을 건너 일부 가월리지역은 포위되고 있다.
유엔군의 무자비한 포병 및 비행기 폭격이 밤까지 이어졌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정말 지역 주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가을날 태풍으로 목화송이가 땅바닥에 떨어진 것처럼 중공군이 하얀 도포같은 것을 쓰고서 죽어 갔다.
차량들이 하얀 눈내린 그 벌판을 지나는데 죽은 사람 위로 미친듯이 달려 나간다.
모두가 살아야 하는데 지금 내려서서 뭘 어떻게 할 겨를이 없다.
죽은 자의 머리는 뻥뻥 터지고 그 하얀 골수가 눈 위에 뿌려지는 순간 다시금 가슴에서 치솟는 빨간 피로 주변은 붉게 물들었다.
눈이 내린다.
하얀 눈이 내려 그 빨간 현장이 덮혀지고 꽁꽁 얼어붙은 곳으로 중공군이 밀어 닥치고 있었다.
죽음을 아랑곳하지않는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국군을 따라 남쪽으로 가고 1사단 병력은 다시금 파평산으로 오르고 있다.
"아씨를 사랑한 중공군 소좌, 그리고 This Man"
미 제2사단에 가면 한국전 박물관이 있고 두명의 영웅관이 있다.
한명은 백선엽 장군관련 내용이고 한명은 얼마전 타계한 고 예)김동석관이다.
한국 전사에 밝혀지지 않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겠지만 나는 이것을 직접 김동석HID대장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생전에 이분을 몇번에 걸쳐 만났고 제67사단 포병연대장 시절에는 우리연대에 초빙하여 안보강연도 들었다.
그러면서 서울에서도 만나고 직접 집에도 갔고 북한군 105전차여단 맨 선봉장이었던 대대장(서대문구치소에 제일 먼저 들어가 죄수들 풀어준 장본인, 그러다 대전지구 전투당시 아군에 귀순하였음)김웅(개명한 이름)을 함께 서너번 만나 식사도 하고 별별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여기에 필요한 이야기가 있다.
"1.4후퇴시 서울 북방을 비우고 신속히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면서 적을 끌여들여 초토화시킴"
무시무시한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김동석대장(육8기,중국 말을 한국어보다 잘함) 국군 제1사단 소대장으로 음성의 무극리 전투에 참여한 이후 북한군 전차 대대장의 귀순과 관련하여 미8군 정보부대원이 되었다.
한국군 장교로, 귀순장교 신문에 참여하고 유격대원을 조직하여 적진에 침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북진 작전간에도 제1사단 5816부대장으로 교동과 강화도 일대, 그리고 이곳 고랑포에도 첩보원을 운용하였다.
"대장님, 중공군 소좌가 고랑포 이 마담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한참 중공군이 우리와 유엔군을 밀어붙이고 있던 '50.12월 말부터 '51.1월 초사이에 일어나는 일인데 수수께끼같은 드라마다.
이미 북으로 진출할 때부터 첩보원들이 이곳에 은거하며 이곳에서 가장 미인이고 남자들이 한번 만나고 나면 정신이 혼미해진다는 이 마담을 포섭하였다.
"이마담, 나라를 위해 큰일 한 번 하시요."
"제가 할 일이 뭐 있나요, 술 파는 여인인데... ."
"아니요, 할 일이 있어요. 중공군 장교를 만나거든 떠나지 못하도록 확실히 사랑해주면 됩니다."
중공군 선발대로 들어온 팀들이 이곳 일대를 정찰하고 이 마담 집을 찾았다.
그들은 교육을 잘받아 절대로 공짜로 먹는 법은 없다.
훤칠한 여인의 하얀 얼굴이 중공군 소좌의 눈에 들어왔다.
유창한 중국말에 나근나근한 목소리로 주변의 시선을 사로 잡는 미모의 여인.
그의 머리속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논개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주 남강에 적장을 껴앉고 뛰어내린 그 빨간 절개, 회돌이 치는 물결속으로 잠기어간 그 하얀 미소로 조선인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논개!
여인은 고향이 서을이었다.
유명한 대학을 다니다 일본놈들의 찜적거림을 피하여 만주로 갔다.
하지만 그곳도 일본 만주군들의 횡포, 마적단들의 연일 계속되는 약탈, 숨어서 움직이는 독립군들의 애환을 보며 황진이같은 삶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타국에서 죽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조선땅으로 들어와 평양에 눌러 앉았다. 서울은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
하지만 고향에 그리움이 쌓여갔다.
마음주었던 남자들은 죄다 일본군에 잡혀가고 아니면 강제 징용되었다.
마음이 울쩍도 하고 그러다 허성세월을 보내다 보니 이곳 고랑포에 고급 요정집이 있어 왔다.
돈도 많이 받았다. 유명세가 따라다녀 어떻게 알고 오는지 하나 둘 남자들이 들락달락 거렸다.
입으로 입으로 소문이 돌아 서울집 사장도 돈을 벌고 괜찮았는데 해방이 되었다.
모두가 좋다고 고향을 찾는다며 떠나는 동료들도 있다.
하지만 이여인은 남았다. 앞에 강물이 흐르고 넓다란 평야가 펼쳐지는 고랑포가 좋았다.
처음에는 미군이 찾아왔다. 미군은 돈을 많이 뿌리고 간다.
그러다 국군이 찾아와 가끔씩 서울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어느덧 나이도 이제 30이 넘어 중년이 되어가는 완숙미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혼줄 놓게 한다.
그런데 전쟁이란다.
북한군이 처 내려오고 국군이 도망쳐 내려갔다.
북한군 군관동무라는 놈들이 왔지만 체면치레 한답시고 폼만 잡고 떠났다.
유니폼이 국군보다는 훻씬 멋져 보인다.
그러나 껄덕대는 놈들은 없었다. 어쩌다 찾아와 술 한잔에 분위기만 연출하고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가고 다시 온다며 잘 있어라 인사는 꼭 한다.
찾아오는 북한군중에는 연세대 출신 장교도 경성대출신 장교도 있다.
이러다 보니 서울 이야기로 어떤 경우에는 한참을 머물고 가기도 했다.
술파는 여자가 어디 이념이 있고 사상이 있겠는가. 조선사람이면 다 좋았다.
이번에는 다시 북한군이 북으로 올라가고 국군이 왔다.
북한군이 떠나면서 조금 기다리면 다시 온다고 약속을 하고 떠난 고향 사람도 있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중공군이 온다고 국군이 다시 남으로 간다
도대체 뭔일인지 모르겠다.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정신이 없다. 하지만 여인은 옷을 가다듬어 입어야 한다며 주위의 어린 애들을 길들이고 태연하게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기다리던 북한군이 온 것이 아니라 웬 중공군이 와서 쏼라쏼라 한다.
만주에서 배웠던 중국어로 대꾸를 해본다.
벌써 국군은 강너머로 사라지고 하얀 눈이 고랑포일대에 내리고 있다.
임진강은 꽁꽁 얼어붙어 차량들이 줄줄이 넘어가도 끄덕도 않는다.
그런가 했는데 오늘 밤도 어제 온 중공군이 몇몇과 함께 나타난다.
몇잔 술을 마시더니 모택동이 그려진 돈을 주기도 하고 은화를 한개 주기도 했다.
한번 들르고 두번 들르고 세잔술에 취하고 네잔 술에 정이 들어 버렸다.
아예 이곳에 본인의 잠자리를 만들고 눌러앉아 버렸다.
당연히 열심히 보필한 이 마담의 노력이 지대했음은 두 말할 나위없다.
정신이 혼미해진 소좌는 꿈속에서 헤매이며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북으로 국군이 올라갈 때에 아군이 들어와 남긴 "나라를 위해 큰 일 한번 하세요."라는 말이 머리속을 휘젓고 있었다. "그래,나도 논개가 되어보는거야!"
"소좌님, 오늘 밤은 별들이 유난히도 아름답네요."
"저기 옆 방에 있는 아저씨들 꼭 있어야 하나요, 난 싫은데."
중공군 소좌는 침대 위에서 땀으로 흠뻑 젖어가며 호흡이 빨라졌다.
"음~음, 그래 알았어. 내일 부터는 나혼자 있지."
그리고 첩보원들이 숨어들고 드디어 칡흙같이 어둡고 눈내리는 날에 쥐도새도 모르게 중공군 소좌는 아군 첩보부대로 넘어왔다.
[1.4후퇴시 정야전술을 하게 알려준 중공군 소좌의 진슬, 그리고 그 소좌를 낚아채도록 도운 이 마담]
"재갈이 풀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중공군을 김동석대장이 유창한 중국말로 쉽게 말하여 꼬시기를 해서 말문을 열게 했다.
그 답은 이렇다. "중공군은 서울에서 유엔군과 국군을 한강 이북에서 소멸하려 신속히 진출한다."
맥아더는 이러한 정보를 접하고 모든 부대에 신속히 한강 이남으로 철수토록 하고 일산과 고양 일대에 최대한의 화력을 집중할 수있도록 조치하게 된다. 비록 후퇴간에 영국군 제29여단이 많은 피해를 보면서 일영일대에서 중공군의 남진을 지연하는 사이에 주요부대는 다 한강을 넘을 수 있었다.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회고록에는 이렇게 그 당시를 기록하고 있다.
"'50.12.31일, 미군 전투기가 정신없이 폭격을 해대기 때문에 날이 맑기전 동두천 북쪽산에 숨어들었다. 낡이 밝자 적기가 날아와서는 저공 비행을 하며 아군에게 기관총소사를 해대며 미지상군부대가 포위망을 뚫는 것을 도와 주었다. 이 순간 포위된 적 탱크가 잽싸게 움직이고 차량들이 움직였다.
우리는 눈을 빤히 뜨고서도 적이 도망가는 것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포위된 미군 대부분은 도망쳐 버리고 일부의 적에게 타격을 입혔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작전을 가능케 했던 것이 중공군 소좌의 진술이었으며 맥아더 장군은 어느날 우리 정부고위층및 군 관계자와 대담시 이번 철수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바로 재반격의 여건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이 사람(This Man)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미 제2사단에 가면 한국전의 영웅으로 김동석대장을 모시는데 인색함이 없이 영웅관을 만들어 그의 유격전사 기록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 장남면 자작리 일대에서 10여구의 유해가 발굴 되고 고랑포 그 방앗간 지역은 지금 논으로 변하여 흔적도 없다.
고랑포 맞은편 장좌리에는 바로 임진강에서 도섭을 하면 모래톱처럼 젊은 평지가 펼쳐지는데 과거에는 미군 사격자이 이곳에도 있었다 한다. 지금도 그 통제 탑등이 남아 있다.
그런 어느날 제25사 주임원사까지 한분이 제보가 왔다. "20여명이 묻혀 있습니다."
이곳 장좌리에 대규모 무명용사 묘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사람과 들어가 실태를 분석해 보았다.
통상 일반 묘라면 묘자리가 규칙이 있다.
가족 묘인 경우는 가장 어른 되는 분이 윗쪽에 모셔지고 순서대로 위에서 아래로 우에서 좌로 자리를 잡고 동네 공동 묘지라면 순성없이 일렬로 줄을 맞추어 자리를 잡게 된다.
이곳은 그런 일반적 형태와는 달라 보였다.
하지만 봉분이 50년이란 세월을 고려할 때에 크기가 좀 커보였다.
전시에 도섭을 하다가 전사한 용사님의 묘라면 시간적 여건을 고려할 때에 이렇게 크게 만들어질 수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이곳은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피난길로 사용했다는 지역주민의 증언에서 쉽게 발굴지역으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이일대가 과거 삼국시대에도 요충지로써 바로 위에 고구려의 호로고루성이 있다는 점은 그 옛날의 무덤군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1년 어느날 발굴 팀들이 이곳에 들어가 지역주민의 제보 지점에서 4구의 유해를 발굴했는데 한곳에서 발굴된 유해로 무덤군은 아니라는 해명을 들었다.
"연천 백학면 두일리에서 숨져간 영국군"
나는 한참 파평산의 발굴작전을 진행하기 위해 두포리의 연대본부에서 있었던 개토식에 참가하였다. 마침 지역주민 몇분이 참석하여 식이 끝난 후에 한 분이 별도로 만나자고 하셨다.
두일리에 사시는 이영석 어르신으로 전쟁당시에 12살 이었다 한다.
"내가 국민학교 시절에 우리 동네가 중공군이 운용한 영국군 포로 수용소 였습니다."
"설마리전투에서 중공군에 붙잡힌 군인들이라 하는데 각 집에서 잠을 잤어요."
탐사 탐문을 다니면서 이런 이야기는 네번째다.
한번은 대성산 밑의 마현리에 미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다는 이야기와 한번은 오성산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유곡리에 국군과 미군이 함께 있었는데 주로 '51.2월의 횡성전투에서 포로가 된 용사들이 모여 있었다.
세번째는 춘천으로 춘천 동면 월곡리지역에 국군 제8사단 병력이 대규모로 포로가 되어 들어와 자체적으로 중대편성까지 해서 통제를 했다는 제보로써 '51.2월의 횡성전투관련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금 두일리 염수골에 영국군의 포로 수용소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어르신을 차에 모시고 직접 현장으로 들어가서 보니 정말 밖에서 잘 눈에 띠지않는 곳이였다.
어르신의 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중공군이 영국군을 많이 끌고 와서는 집집마다 몇명씩 할당을 해주고 몇집을 묶어서 책임자를 임명해 주었다."
"그럼 식사같은 것은 어떻게 했나요?"
"중공군이 죽같은 것을 끓이고 밥 먹는 시간이면 모여서 배급되는데 잘 먹질 못하고 부상자들이 일부 있어서 동네에 한 집이 치료소로 운용되었어요."
"그럼 포로들은 주로 어떻게 생활을 해요?"
"미군 미행기 폭격이 수시로 이어지기 때문에 낮에는 산에 들어가 나무 밑에 숨어서 있으면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같은 색의 군인이 모아놓고 뭐라고 말을 한다.
그러면 포로들은 가만히 듣고 있고 있고 어둠이 내리면 다시 마을로 내려와 각자 집으로 보내져 잠을 자게 하는 것 같아요."
"도망치는 군인을 본 적은 없나요?"
"내가 본 것은 없고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하며 먹을 것을 빼고는 잘 지내는 것 같았어요."
"어쩌다 동네에서 김치를 얻어서 먹어 보다가 호호불며 소리지르는 것이 생각이 납니다."
"부상당한 군인이 죽어서 동네사람 불러다 들것에 실어 저기 산 밑에 묻었어요."
부상당한 군인들은 발이 하나 없다던가 머리에 붕대를 하고 있다던가 손이 하나 없다던가 그런데 중공군 야전병원이 있어 치료를 해준다고 한다.
얼마나 치료를 잘 하는지는 모르고 여기에 북한군인도 있고 여자군인도 있었다.
어린 나이다 보니 이곳저곳을 다녀도 그들이 뭐라고 나무라지는 안했고 밥도얻어 먹기도 하고 그들이 갔고 있는 총을 만져보기도 하였다.
그런 어느날 군인이 한명 죽어서 나왔다. 동네에서 밤을 보내니 대부분 아침 일찍이면 해가 올라와 모두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중공군인지 북한군인지 한명이 마을 사람을 불러다 들것에 실고 야산 입구로 가서 묻는데 본인이 본 것만도 몇명이 된다고 한다.
우린 이 어르신이 알려준 곳을 굴토하기 시작했다. 넓이는 대략 100mx10m 규모로 1개분대를 투입하여 2주를 발굴한 결과 정말 1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설마리에 산 중턱에 있는 영국군 추정 유해가 있었으나 영국의 반응이 시큰둥하여 우리는 발굴을 하지않았던 사례가 있다.
2000년도에 처음 발굴사업을 하고 있을 때에 25사단 지역에서 제보가 되어 탐사를 나가기전 설마리 전투에서 전사한 영국군의 실체를 파악해 보았다.
먼저 중공군 홍학지부사령관의 기록에는 이 전투의 기록이 미흡하다. 아마도 영국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일부러 그러했다고 추측해 본다.
전쟁간에 사실 중공군은 인도를 통해 아니면 직접적으로 영국 애틀리정부와 교감을 갖고 있었다고 나는 의심을 하고 있다.
우리 전사에는 글로스터 대대장과 50여명이 그대로 포로가 되고 나머지는 후퇴과정에 대부분 전사 도는 포로가 되며 D중대만 일부 살아 돌아온 것으로 되어 얼마가 정확하게 피해를 받았는지 알수 없고 영국군 제29여단이 이곳 일대에서 전체 병력의 1/3에 해당하는 손실을 입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 이어르신의 말처럼 몇 백명은 포로가 된 것 같다.
전쟁기간중 영국군은 총 전사자가 1,078명 부상이 2,674명 포로가 979명으로 미국 다음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우리는 발굴된 유해의 성격을 규명하려 영국대사관 무관에게 알리고 인종 DNA감식을 준비하고 영국의 통보를 기다렸다. 그런데 영국은 영웅은 전투한 장소에 잠드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라며 본국으로의 봉송을 반기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국방부가 생색내기를 하려한다는 오해를 갔고 있었다.
영국 BBC방송에서도 취재를 나왔으나 유해의 성격이 확실히 육안으로 유럽인종같은 느낌이 들지 않아 많은 의문점을 갔게 되고 따라서 영국의 실종자 자료를 알려달라해도 묵묵부답이었다.
이 염수골 주변의 야산은 100m 내외의 낮은 구릉성 산들인데 산마다 개인호나 포탄이 떨어진 탄흔이 수없이 많다.
'51.6월부터 유엔군이 캔사스선으로 진출하는 과정에 영연방 1사단이 이 지역으로 진출을 하고 '51.10월의 특공작전시에 임진강 서안의 고지군인 고왕산과 마량산을 점령하고 장기간 점령에 들어가 이 지역은 영국군과 캐나다 군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다.
따라서 내가 판단컨대는 원래 더 많은 인원이 묻혀져 있었으나 이 기간에 거의 발굴이 이루어져 금굴산 밑에 있는 영국군 화장장소로 보내졌다고 본다.
이어르신도 중공군이 남쪽으로 몰려 내려갈 때에 부모님을 따라 피난을 갔다가 다시 들어온 것은 '53년 10월에 들어 왔다고 한다.
그러니 그 기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시는 것이다.
"백학초교에 캐나다군 지휘소가 있었다."
나는 이곳 일대 두일1리 마을회관, 아미2리 마을회관, 왕징리 노인정, 군남 노인정등 모든 노인정을 찾아 6.25전쟁관련 증언을 청취하고 간담회를 가졌다.
염수골 뒤산일대와 백석리와 동중리 사이의 야산에도 다 올랐다.
이곳 일대는 어디나 개인호는 일정한 간격으로 굴토되어 있으며 전사면에 많은 형태로 남아 있다.
이런 모양은 아군이 굴토하여 점령한 곳이라는 의미가 더 크며 실제 개활지에 가까워 중공군은 유엔군의 화력전투에 바로 고왕산 마량산 넘어 고지군으로 철수해 갔다고 판단된다.
나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백학저수지 우측 산에 전투흔적이 많았고 저수지 안에 작은 야산이 있었는데 그곳에 많은 유해가 있었다는 제보를 받았다.
그러나지금 저수지안은 우리가 찾아볼 수 없어서 저수지 주변의 산은 다 올라가 그 흔적을 찾으려 노력 했다. 그러나 결정ㅈ적인 흔적은 찾지 못했고 학교 뒤 맹골 야산에 시신이 많았다는 지역 주민을 따라 들어가 보았으나 호는 크게 구축되어 흔적은 좀 길게 남아 있었지만 발굴을 하지는 안했다.
이유는 대부분 사람들이 죽어간 모습이 유엔군도 아니고 허름한 빛바랜 옷을 입고신발도 통일화같은 것을 신고 있었으며 양은으로 된 종기를 갔고 있었다는 말로 중공군으로 판단했다.
이곳일대에 아군이 있다면 노무자나 카츄사일뿐이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의 제보로 10여구의 유해를 발굴은 했다.
"캐나다 군인이 사랑한 여인"
이렇게 전쟁의 소용돌이가 반복되는 동안 휴전은 찾아오고 계속해서 당분간 이 지역 일대에 영국군이 주둔한다.
그 당시에 대부분의 지역이 그렇듯이 군대가 있는 곳에는 장사군이 들어오고 술집이 생기고 다양한 사건들이 넘쳐나는 곳이 군 주둔지였다.
지금의 동두촌 전곡 법원리 용주골 금촌등 많은 지역이 전쟁의 트라우마를 이기려는 정말 피눈물나는 살기위한 몸부림이 있었다.
그걸 지금의 잣대로 양심이니 도덕이니 윤리라는 것을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전쟁이 만든 인화다.
두일리일대도 그런 곳의 하나였다.
많은 술집과 아가씨들이 들어와 본인의 생계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사는 경우도 있다.
그런 어느날 노랑색깔의 어린 군인이 한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거의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와 서로 정을 나누고 헤어지는 반복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한 남자를 사랑해서는 이 바닥에 생존하기가 곤란하다.
얼마의 공백이 있은 후에 다시 그 군인은 이곳에 나타났고 하지만 여인은 다른 곳으로 떠났다.
"술에 취한 군인이 총을 들고 나타났다."
너무도 사랑했기에좌절감에 빠진 병사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미스양을 불렀고 누구도 뭐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이국 땅에 들어와 그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오직 그녀를 위해 기도하고 살아서 만나야 한다는 기대감으로 살았던 병사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사랑이란 젊은이에게는 불꽃이다.
그 불꽃은 잘못 바람이 불면 엄청난 재앙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세월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정열로 마음을 준 첫사랑인데 그 사랑이 없다.
물론 여자야 그렇게 마음을 받아야만이 이집에 손님이 들어오니 상술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울며불며 외쳐대던 그 용사가 정신을 잃어버려 마구 총을 쏘아대며 동네를 헤매이고 있다.
"내 여인을 데려다 주세요~!"
헌병이 출동하고 K병사는 붙잡혀 본국으로 송환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밤 그 총에 맞아 죽은 인원이 몇이 되었는데 쉬쉬 어떻게 무마되고 말았다 한다.
동중리에서는 많은 인원이 북으로 넘어가 버려 수복되었을 때는 텅빈 마을처럼 되었고 주변이 다 타버려 정말 황무지처럼 변해버렸다고 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저기 고왕산과 마량산지역에 조명탄이 낮과같이 매일 밤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단다. 왕징리와 북삼리에 노인정에 찾아가니 이곳 자체가 처음에는 북한지역이었다 수복된 곳이라 그런지 그렇게 많은 나이드신 분이 없다.
전쟁통에 죽거나 북한군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북으로 가고 종전후에 남쪽 지방 사람들이 이곳으로 많이 이주해 왔다고 한다.
태풍전망대를 들어가는 연천 중면 삼곶리와 합수리 옥계리에 가보았다.
임진강과 마거천이 만나는 곳으로 합수리가 인접이다. 이곳은 농토가 비옥하여 조선시대부터 부자마을 이었다 한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어수선한 가운데 전쟁이 뭔지도 모르는데 조국해방이 곧 된다고 학교에서 선생들이 알려주고 요란하더니 갑짜기 군인들이 올라와 보니 이미 '50.10월초에 국군이 들어와서 전쟁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니 참 좁은 땅이지만 너무도 어색한 인상이 들었다.
반면에 옥계리사람들은 3번도로를 따라 탱크들이 연일 내려가 뭔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며 10월경에 엄청난 군인들이 반대로 북으로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중공군이 내려 올 때는 많은 사람들이 남으로 피난을 가고 일부는 동막리 지역으로 숨기도 했단다.
그러니 사실 전쟁이 정확하게 무슨 성격인지도 모르고 눈만 뱅글뱅글 돌리는데 치안대들은 계속해서 전쟁 참여를 위해 젊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나이든 남자들은 불려나가 철로를 보수하는 일에 동원되기도 하고 노무자를 하기도 했다.
어느날 우리 발굴팀이 상리 뒷산에서 발굴작전을 개시했다.
팀장인 이00이가 누구로부터 제보를 받았다며 산에 오르니 가매장 묘들이 20여기 있다고 보고가 들어왔다. 부대에서는 감식과장이 현장을 조사하러 가고 나는 다른 곳에서 발굴 업무를 통제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의구심이 생겨 이곳으로 달려갔다.
현장 입구에 도착하여 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저쪽 고추밭에서 할아버지가 손짓으로 날 불렀다.
그곳에 가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 저를 불렀습니까?"
"맞아요, 아니 저기 산으로 군인들이 삽을 들고 올라가는데 왜 가는건지 알고 있나요?"
"네, 그곳에 동네 사람 누군가 6.25전쟁 때에 죽은 군인의 묘가 있다고 하여 발굴하러 가는 겁니다."
"무슨 전사자야, 전쟁 이후에 사고로 죽은 군인도 발굴 하나요?"
할아버지가 다짜고짜로 나에게 언성을 높였다.
옆에 있는 운전병 수환이는 깜짝 놀랐다. "아니 할아버지가 화내는 모습 처음 봅니다."
나는 사업의 취지를 알리고 그런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산에 올라가 확인해 보고 다시 오겠다 약속하며 현장을 떠났다.
더운 여름이라 땀이 비오듯 한다.특히 산속은 후덥지근하기까지 했다. 아니 내마음이 급해서 그러는지도 모른다.
올라서니 감식과장도 와 있고 감식관도 있고 발굴 팀장도 있다.
몇개의 가봉분을 굴토한 현장을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비닐에 시신들이 가지런하게 일반적인 매장 형태로 완전 유해로 그대로 다 있다.
나는 조용히 우리 팀장을 불러 발굴하게 된 배경과 제보내용 등을 물어 보았다.
현장에서 바로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냐면 현장 책임자로써 뭔가 확고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며 권위 문제도 있다.
나는 서울로 돌아와 윗선에 그날 이야기를 들려주고 결정을 하는 방향으로 밀고 나가겠다고 했다.
감식팀이 들어와 완전 유해가 나온다고 자랑하듯 보고를 했다.
사실 나는 그당시에 약간 왕따를 당하고 있던 시기다. 지금이야 솔직히 나의 감정을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업무에 정통하려 들지않고 생색 내기에 질려 있었다.
내가 뭔가 이슈를 만들어 내면 그저 헐뜻고 혼자 다 독차지 한다고 여기저기 나쁜 이미지만 선전하고 다니는 무리들이 많았다.
아랑곳 없이 나는 한 구의 용사님이라도 더 찾으려 동분서주했지만 마음은 편치 못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함께 어울리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현명한 지휘관은 나의 말을 들어주고 발굴을 중단 시켰다.
나는 할아버지께도 이 사실을 알렸다.
물론 개인적 판단은 어떠한 연유로 잘못을 하여 총살형에 처해졌다 하여도 마지막 모습은 양지바른 곳에 잘 매장하여 주는 것이 도리라 본다.
물론 그 잘못한 일은 열거하지 않으려 한다. 각자 알아서 판단하기 바란다.
"우리 동네에 국군의 여자 첩보원과 남자 대원이 들어와 숨어서 활동했다."
상리 회관에 가니 비록 전쟁에 참여는 안했지만 15살의 나이로 계속해서 살아온 어르신이 계셨다."
본인은 전쟁 나기전에 연천역에 가득한 탱크들을 6월초에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전곡쪽으로 계속 내려가고 있으며 군인들도 몇일간 계속하여 남쪽으로 걸어서 갔다 한다.
그런데 전쟁이 나고 얼마 있어 북한군이 다시 북으로 올라가며 '양키놈들이 들어오면 다 죽인다'고 하며 빨리 북으로 피난을 가라해서 동네에 일부는 따라서 가기도 했단다.
그러다 정말 유엔군이 나타나고 얼마 안있어 국군이 들어왔는데 제2사단 17연대였다고 한다.
"우리 집에 여자분이 들어오고 좀 떨어진 집에 남자가 들어왔다."
1.4후퇴가 있기 몇일 전에 동네에서 그동안 보지못했던 사람이 나타나 방을 구했다.
대부분 집이 불에 타고 몇채 남지도 안했는데 갈 곳이 없다며 살려달라 애원해 골방을 주었다.
도대체 움직이지도 않고 안에서만 있기에 어쩌다 밥을 같이 먹기도하고 그저 방에 있었다.
국군이 빠르게 남쪽으로 내려가도 그대로 있어 피난민인데 여성이라 몸을 숨기는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저 가까운 거리에 이웃집에는 40대되는 남자가 들어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중공군이 북한군이 내려와 다시 치안대들이 날 뛰고 있는데 어떻게 그 감시망 속에서 잘 버텨내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워낙 여러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들어 움막도 치고 땅을 파서 겨울을 나기도 하니 감시하는 완장 찬 인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겨울이 지나고 3월이 다 가는 싯점에 연천역에 대규모 폭발음이 들려 왔다.
미군 비행기가 나타나 보급열차를 폭파해 버려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이때 많은 객차와 트럭들 그리고 하역등 일하는 군인이며 노무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하필이면 이날 할아버지는 역전에 볼 일이 있어 가다가 이 모습을 실제로 다 목격 하였다.
그리고 유엔군이 올라 오는데 앞에 보니 바로 집에 있던 그 여자와 옆집에 있던 남자가 있더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사전 침투한 공작대원으로 연천역 기차 폭파의 정보를 주었던 것이다.
전쟁이 정료된 후에 한번은 그 남자가 찾아 온적도 있는데 그 한번으로 소식은 끊겼다 한다.
"용담지역에서 국군이 엄청 죽었다."
하지만 그당시에 뒤로 도망가던 북한군 일부가 천덕산과 야월산 아래 계곡에 은거하고 일부는 동막리 계곡으로 숨어들어 있다가 열차로 철원쪽에서 내려오던 17연대를 용담에서 기습하여 당시 함께 동승한 경찰과 군인들이 용담일대에서 많이도 희생 되었다 한다.
그러나 누가 처리할 사람이 없어 일정기간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나중에 국군이 수습하여금곡리 어디선가 화장처리 하였다고한다.
"내가 그곳에 따라가서 보았지. 나무를 군복도 입지않은 사람들이 해놓고 기다리고 있더라고."
"직접 태우는 장면도 다 보셧습니까?"
"그럼, 옆에는 차가 한대 서있고 나무로 된 상자가 화장하는 옆에 쭉 놓여 있더니 끝나고 끈나고 나니까 상자마다 재를 넣고 흰 천으로 묶어서 차에 싣고 떠나는 것도 보았어요."
"갈대골에는 미군 비행기도 떨어졌는데 불이 붙어가지고 빙글빙글 돌면서 산에 떨어졌는데 나중에 비행기 잔해는 중공군이 다 가져 갔다고 들었지."
비행기 건은 이미 우리가 몇해전 미군측에서 자료를 가지고 와서 합동으로 조사도 하고 기초굴토까지 하였던 곳으로 아주 작은 잔해 몇점 발굴하고 종료한 곳이였다.
우린 함께 화장터도 가보았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 농경지로 변하여 그 원형은 보이질 않는다.
"용담에 온 제17연대 참전용사 김하사!"
어느날 서울에 거주하는 한 참전용사님이 신탄리 역에서 만나자고 하신다.
나는 만나자는 그날에 역 앞에 기다리다 용사님을 만나 모시고 용담으로 갔다.
"야, 저기 논둑이 그대로 있네. 저 집도 모양은 바뀌었는데 저 위치야!"
용사님이 달려나간다. 그 나이에 구두를 싣고 미끄러지지도 않고 논으로 간다.
나는 놀람과 경이로움으로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이 나이에 이렇게 뛰어 다닌다는게 쉽지않다.
"어이, 이과장 이곳에 정일병을 묻었어.'
"아니 어떻게 논둑에 묻었습니까. 적에게 쫒기고 있는데... ."
"제대로 묻었나, 겨울인데 대충 묻고 떠났지."
"군대에서 각개전투를 배우잖아. 그거 잘 하면 전쟁에서 절대 총 맞지 않아."
'네?, 어떻게 총을 안맞아요?"
"총이 총구안에 강선이 있잖아. 다 우측으로 돌아가는데 총을 쏘게 되면 총은 좌측으로 총이올라가게 돼 있어요. 그러니 뒤면서 좌측으로 굴르면 맞을 확률이 많아요. 좌측으로 접근하다 우측으로 구르기를 반복하고 하면 맞추기가 힘들어."
"여기 전사한 정일병도 그런 요령이 학도병으로 들어오다 보니 제대로 교육이 없어서 맞은 거야."
"난 월남전에 가서도 이걸 동료들에게 강조하여 내 밑에 부대원은 한명도 죽지 않았지."
우린 야전삽을 이용하여 논둑을 일부 파내려 갔다.
그런데 얼마 있으니 삽을 들고 한 사람이 나타나 본인의 논이라 한다.
우리가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논의 위치는 맞지만 개간작업으로 2m정도 낮춰졌다고 한다.
용사님은 계속 철로길을 따라 걸었다.
터널이 있는데 그곳에 북한군 아지트가 있다가 철원쪽에서 오는 기차를 기습했다는 것이다.
용사님은 낙담하며 세워를 탓하면서 서울로 떠나는 기차에 올랐다.
상리 일대는 필리핀 군대가 캔사스선 진출 작전간 미 제3사단에 배속되어 들어왔다가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고 철수해 내려간 곳으로 이곳에 참전비가 서 있다.
고지는 모두 200m가 넘지않는 저지대로써 개인호가 많이 있긴 하지만 전투흔적은 그리 많아 보이질 않았다. 78번도로 남쪽으로는 군자산(328m)이 종격실이 길게 남북으로 3km길이로 발달하고 좌우측으로 78번도로와 3번도로, 경원선 철도를 통제하는 요충지로 군사시설이 많이 되어 있다.
나는 이곳에서 소령 시절에 포병인원 500여명을 이끌고 보병 전투진지 공사를 한달이상 지원했던 곳으로 안 가본 곳이 없이 다 다녔던 곳인데 막상 전투지역으로 유해를 찾으러 올라가니 감회가 새롭고 우리가 주로 만들었던 토우진지호와 차량호등을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이곳에는 전투흔적이 많지가 않았다.
"내가 둔덕을 뛰어내렸는데 시신 구덩에 빠졌지 뭐야... ."
원래 이곳을 탐사하게 된 배경은 어느 참전용사님이 미군부대에서 카츄사로 전쟁에 참여 했는데 야간에 진출하다 갑작스레 중공군이 나타나 부령골에서 후퇴하면서 연천쪽이 막히어 옥계리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산을 따라 계속 내려 가는데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데 둔덕이 있어 뛰어 내렸는데 나무토막같은 것이 걸리었다고 한다.
"아이고 나 이런 고생하며 살아 났어요. 글쎄 둔덕아래가 모두 시체더미로 썩어가는 그 속에 여러명이 뛰어들어서 헤집고 나오는데 물렁물렁하는 그 속을 나온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나 참... ."
이런 제보에 따라 정밀 탐사를 하게 되었던 곳이다.
하지만 그 후에 수해도 나고 일부 지역은 개간이 이루어 지고 그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옥계리 마을 사람들, 상리 마을 사람들 중에는 이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 죽어있는 숫자가 얼마인지도 모른다. 제보 내용대로라면 사실 100여구 이상 되는 곳인데 혹시라도 인민재판이나 북한군이 유력인사들을 끌고 가다 이곳에서 사살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중면 삼곶리에서 만난 이지역 토박이라는 여성분이 나에게 남겨준 이야기가 떠 오른다.
"저기 놀음고개라고 아슈, 구대동?"
"그 앞이 구대동이 있는데 그곳에 임진강을 바라보고 큰 토굴이 있어요. 그곳이 전쟁때 연천군 인민위원회가 그속에 있었어요."
"네, 할머니 그러면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우리 영감이 나이 30인데 붙잡혀 갔는데 누가 연락이 왔어. 그리고 같이 그곳을 갔지."
"우리가 이곳에서 대대로 살아 오면서 뭐 경주에 최부자집이 있다고 하잖아요."
"아 예, 고을 사람이나 지나는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었다고 하는 집 말이지요."
"그래요. 우리도 그 집처럼 선친들이 잘하고 살았어요. 원수맺은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왜 거기에 붙잡혀 갔나요?"
"글셰, 누군가 고자질을 한 모양이야. 그런데 그때 위원장이란 자가 알고 사람이라 풀어주려고 날 오라 한거지. 하지만 고문을 당하여 얼굴이 상했어요."
"그럼 다른 것은 못보셨나요?"
"아니지. 많은 사람이 그 굴속에 붙들려 와 있는데 나이 먹은 할아버지부터 젊은 청년도 있고 군복입은 군인도 보았지. 경찰도 있고."
"그럼 할아버지가 돌아 오신후에 언제 그곳에 가 본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가요. 군인이 지키고있는데. 내가 물어 보려고 했던거요. 그 굴을 알고 있느냐고."
나는 이런 내용을 가지고 해당지역 군인들에게 사실 관계를 물어보니 잘 모른다는 답변이다.
워낙 은폐가 잘 되어있고 임진강에 붙어 있어 위험해서 접근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후에도 나는 수색정찰을 하던 군인들이 실제 철책안에서 두개골을 발견하여 신고를 받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동하는 동안 방탄조끼를 입은 나의 몸안에 식은 땀이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바로 눈앞에 베티고지도 보이고 밥플고지라고 불렸던 버블고지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혹시라도 강가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북한군의 위협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동굴이 있다는 곳은 정확히 아무도 모르기에 접근자체가 어렵고 신고된 유해를 바라보니 정말 하얗게 된 두개골이었다.
갈대숲에 노출 되어 있는데 주변이 전투한 장소가 아니고 아마도 북측에서 어떤 사고로 숨지고 은폐되었다가 수해로 물에 실리어 이곳까지 와서 멈춰선 모습이었다.
나는 수습하여 모시고 나와 양지 바른 곳에 묻어드리도록 하고 현장을 떠났었다.
동막리에는 관산이 있고 포병훈련장이 많다.
이곳은 동막골 유원지가 있는 아마도 어느 지역보다 깨긋한 자연환경이 살아있다.
이곳은 종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좌측은 200에서 500고지군에 이르는 종격실 능선이 발달하고 우측은 '51.4월의 중공군 공세시 터어키여단이 중공군의공세로 밀리던 곳이며 그후 중공군 5월공세를 거쳐 재반격 작전으로 이어지면서 '51.6월초에 와이오밍선 진출간 국군 제9사단이 종자산-향로봉-지장봉-고대산으로 이어지는 주요 격전지였다.
이곳은 3번도로와 경원선이 맞물려 달리는 곳으로 도로의 바로 북쪽이 철원평야로 북한의 김일성이 어떻게든 확보하라고 언명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면에 기동로가 발달하여 상대적으로 유엔군의 화력전투에 취약하기에 우리가 탐사한 결과는 그렇게 많은 전투 흔적은 없었다.
오히려 '51.10월에 특공작전간 역곡천 남안까지 진출하는 과정에 미 제1기병사단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따라서 우린 지역주민 탐문활동을 하였으나 동막리 신산리 계곡에는 그리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도 않아 제보를 받는데도 어려웠다.
지도를 보면 남에 영평천이 횡으로 흐르고 이어서 한탄강이 남서 방향으로 길게 서쪽은 5km 거리 동쪽은 몇십km의 간격으로 흐르고 다시 그 위에 역곡천이 흘러 임진강에 모여드는 곳으로 중요한 장애물 역활을 한다. 한탄강과 역곡천 사이에는 아미천 차탄천 장승천이 흐르고 있다.
연천 옥산리에 들어가니 월남참전용사님이 아주 근사한 집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어 들어가 차를 얻어 먹으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 용사님은 이곳이 처가집으로 자식이 없어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으며 지금은 장모님만 살아계신데 장인이 살아 있을 때 들려준 이야기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동막리입구 야산에서 차탄천에 흘러내리는 곳이 유해가 많았다." 그리고 10여구가 발굴 되다.
군자산보다도 더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대부분 중공군이 수없이 죽어 산 정상에도 올라가 보면 개인호마다 시신이 널려 있었다고 했다한다.
또한 동막리 관산 맞은 편 포병훈련장 위 산이 전투현장으로 실제 종전후에 올라가 탄피를 주어 엿으로 바꿔 먹었다고 하였다.
지금 신도로를 개확장하고 있는데 바로 그곳이 중심이라 하며 오랫동안 현장이 있었으나 불이 나서 대부분 타버리고 말았다고 부연 설명한다.
우린 산에 올라 흔적을 찾으려 했고 추가적인 증언을 구하려 했다.
종격실 능선을 따라 개인호는 구축되어 있고 탄피나 파편등 유품도 종종 확인되었다.
얼마를 진출하는데 참나무 밑에 빛바랜 군복이 뭉쳐있다. 와 하고 접근하여 옷을 관찰하고 혹시나 6.25전쟁 당시 것인지 꼼꼼히 확인해보니 70년대의 전투복 상의로 판명되었다.
우리는 탐사 결과를 발굴과에 넘겼다.
연천 청산면 초성리와 포천 창수면 백의리 주원리 일대도 전쟁의 격전지였다.
초성리역이 전쟁 최초에는 38선 바로 근접이다.
초성리에서 법수동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지금은 그 언덕길이 사라졌지만 언덕이 있고 여길 넘어 서면 바로 대전리로 돌파하여 들어오는 양호한 개활지가 나온다. 수동천이 흐르고 368번 지방도로가 지나는데 그 개활지를 통제하기 위해 분대규모의 아군 상주 진지가 있었다.
"분대원이 다 죽었다."
그런데 우린 '07년 여름 어느날 초성리 학담동에 기차 건널목이 있는데 이곳을 지나다가 중요한 제보를 들었다.
바로 이 건널목에 아군 3명이 죽었어 바로 옆으로 밀어서 철로변에 가매장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위치는 변함이 없지만 철로 건널목이고 바로 옆에 민가가 자리 잡고 있어 굴토를 하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점이 있어 엄두를 못내고 있는 곳이다.
지금 그 위치에는 맨드라미가 여름철에는 왕성하게 빨간 빛을 내고 자라고 족두리 꽃도 피었다.
그곳을 두리번 거리고 있으니 한 어르신이 이유를 물어 보더니 바로 이 법수동을 이야기 해 주시고현장을 동행 했다. 본인이 그곳에서 탄피도 줍고 전쟁 놀이도 했으며 분대원 모두가 죽었다고 한다.
그 진지 위치는 낮은 야산에 그대로 있는데 바로 언덕이 있다는 곳이 길을 확장하면서 가내려 많은 부분이 훼손 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분대진지 위치 일대를 탐사 했으나 별 징후를 찾지 못하고 도로공사를 아직 진행하고 있어 업자를 만나 설명했더니 아무런 유품이나 유해를 보지못했다 한다.
그곳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난 우리는 초성리역 뒷산(무명400여m)을 올랐다.
탄약부대가 후사면에 자리잡고 있어 통제를 받아 부대로 들어가 울타리 경계선을 따라 올라가 정상까지 가며 주변을 탐사했으나 부대에서 구축한 진지가 잘 되어 있어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이렇듯 군부대가 들어간 위치가 대부분 그 일대에서 저명한 산이 많은데 그 옛날에 부대시설공사를 하면서 누가 관심을 갔고 이 문제를 처리할 이유가 솔직히 그 당시는 없었다.
우리는 다시 차를 몰아 대진리 마을회관을 찾았다.
여기 사람 대부분은 전후에 들어온 사람이고 원래 이곳에 사는 사람은 별로 안되었다.
그러니 소문으로 들은 잉야기만 하는데 주로 오전에 우리가 갔던 그곳 이야기와 중공군이 들어와 있다가 유엔군이 올라 오는데 궁평리 오르는 언덕길에 미군 폭격으로 많이 죽어서 길 밑으로 묻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곳도 도로 확포장공사로 원형이 변하여 찾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그러면서 종현산에 중공군 유해가 많아서 그곳에 올라가 신발도 줍고 때로는 철모도 주었다고 한다.
"종현산 이야기, 추동리 미군 이야기"
나는 백의리 마을회관을 찾고 군자동, 주원리 마을회관을 찾았다.
지금 생각에도 나는 발굴울 전담하던 '00년부터 '10년까지도 발굴은 팀장에게 맡기고 전국의 전쟁터를 찾아 다녔는지 궁굼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다.
조사팀이 있었지만 이 조사팀은 '07년부터 정상적으로 편제되어 움직인 것이니 자연스레 나는 나의 영역에 발굴과 조사를 병행하게 되었다.
그러니 전쟁터는 1년주기로 한번 돌아다녔고 주요 전투고지는 3번정도는 올라가게 되는데 칠곡의 유학산 지역은 20번은 올라가게 되었다.
특히 이곳 328고지와 창녕, 서울 강서구의 개화산, 포천의 만세교리지역은 아예 한달동안 상주하고 있기도 했으니 눈 감고도 그 지역은 그릴 수가 있다. 또한 마현리의 735고지, 양구의 피의 능선인 수리봉, 백석산, 화천 북방의 흑운토령, 철원의 광덕산 일원, 진천의 봉화산, 문경의 조봉. 틀모산일원, 춘천의 서오지리, 함안의 전투산(서북산등), 하동의 화계장터 전투지역등은 적어도 10회 이상은 현장을 탐사 탐문 하였다.
이곳 종현산 지역은 중공군이 들어와 추동리에 연대급 지휘소와 병원이 들어와 마을 가운데 민가에 머물게 되면서 사건이 시작 된다.
조용하던 마을은 사실 처음 전투는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북한군이 산넘어 들어왔다고 한다.
바로 산아래가 38도선이라 그당시에 허술한 경계근무 시절에는 청소년들이 초소에 들어가 군인들과 함께 머물기도 하고 일부는 북한군과 접촉도 있었다고 한다.
해방은 되었다는데 갑작스레 동네가 두 동강이 나서 북한과 남한이 되고 쏘련군이 들어 오더니 미군이 나타나고 여느 지역의 이야기처럼 밤에 북쪽으로 넘어가 누굴 만나기도 하고 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기도 했단다.
잠자고 나니 국군은 한명도 보이질 않고 북한군이 서성거리며 있고 완장을 찬 엉뚱한 사람이 호르라기 불며 자기가 리장이라고 나타나고 웬 여자자 군복을 입고 들어와 여성동맹인지 뭔가 만들어 여성들을 모아놓고 교육도 하더라는 거다.
별로 통제도 없고 김일성 수령동지의 영도력으로 곧 통일이 된다며 학교도 그대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배우는 것이 달라졌다.
장백산가 배우고 김일성 찬양하는 노래위주로 군가를 가르치고 동네 사람들을 밤이면 한 곳에 모아놓고 사상교육이 진행 되었다고 한다.
얼마 지나더니 어디서 잡아 왔는지 반동분자라며 자아비판을 하게 하고 일부 인원이 들고 일어나 쳐죽여라고 목소리를 내면 올소 올소 하는 모습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더란다.
지금 화력발전소가 세워진 곳이 바로 그당시에 죽어간 많은 사람들이 묻혀진 곳이라고 한다.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주변을 다 밀어버려 그 흔적조차도 남아 있지가 않다.
누가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때 그곳에 관여했던 사람은 다 죽었고 아니면 북으로 다 넘어갔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세포위원장이란 놈이 동네에 살던 놈이었고 사실 그놈 덕에 동네 사람은 크게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추동리 마을 회관입구 정자에서 만난 자건거 타고 가던 할아버지가 최고의 걸작이셨다.
성은 마씨였는데 이름은 묻지 말라했다.
할아버지 집이 나중에 중공군 지휘관 용으로 사용되고 본인들은 함께 기거하였다.
중공군 덕에 밥은 굶지않았다고 자백하셨다.
문제는 우리가 찾고자 하는 군인이 어디에 묻혀있느냐의 문제인데 미군은 알아도 국군은 모른다고 하며 무슨 군대가 저기 능선 위로 북한군이 올라섰는데 아군은 한 명도 없시 다 어디로 가버렸단다.
함께 진지에 올라가 놀던 형들이 도대체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동네 사람들은 피난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고 전쟁 당일을 맞이했단다.
그러더니 무슨 해방군이라느니 별별 노래를 가르키고 요란을 떨더니 추수절에는 논과 밭에 들어거 무슨 곡식 낱알을 세어서 세금을 거둬 간다고 또 요란을 떨었다.
"추수하기 전에 유엔군이 올라와 북으로 도망치는데 아군이 뒤에서 쫒아가는 거야"
할아버지는 밤이면 북한군 안내병을 따라 창수면 위치에 가면 무슨 물건들이 있는데 이걸 지게에 지고 지금 포천 밑에 송우리까지 걸어갔다 돌아오기를 몇번 했다고 한다.
"어르신 부역하신거고만... ."
분위기가 서로 교감이 되어 농담도 하게 되었을 때에 그런 질문을 웃으면서 던졌더니 순간 얼굴 색이 이그러지셨다가 이내 큰소리로 껄껄 거리며 답을 하신다.
"어이, 뭐 알았겠어. 그때는 북쪽이 뭐고 남쪽이 뭐고 개념도 없었어. 배고픈 시절에 무슨 사상이야 그저 배불리 먹고 사는 곳이 천국인데 여긴 농사꾼만 있으니 그런가 했지 뭐야."
솔직한 말씀이다. 정말 그때는 군인들도 하급자들은 배고파서 밥 먹으러 들어온 사람이 많아 민주주의가 공산주의가 뭔지 솔직히 몰랐다고 한다.
많은 인원이 정말 명령에 복종하고 총을 쏘라해서 쏘았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그런데 해방군이 왔다고 하는데 조금 지나니 동네 돼지를 다 잡아가고 조금 있다가는 소를 하나 둘 가져가며 무슨 붉은 색 나는 돈을 주었다."
"또 조금 있으니 사람을 잡아다 죽이고 마을에서 사람들이 단가에 실어다 저 앞산에 묻게 하고 세포대장이 있는 집에 곡소리가 끊이지 않아 공포 분위가 조성 되었다."
살벌해지는 가운데 해방군을 위해 위문품을 보내야 한다며 집집마다 뒤져서 먹는 양식가지 다 각출하는등 심화되는 강제수단에 마을 사람들은 벌벌 떨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9월이 되어가는데 이제 매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밤에 모이라고 해서 짐을 지고 보따리 이고 포천까지 갔다가 왔다.
어느날 세포위원장이 할아버지 아버지를 만나고 갔는데 그 이후로 모습을 보질 못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얼마 있어 국군이 올라온다면 오면은 다 죽인다고 짐싸들고 북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할아버지 집은 그러나 북으로 피난가지 않았다.
"나는 그것은 바로 세포 위원장이 사전에 정보를 알려준거라고 생각해. 할아버지와 잘 지냈거든."
북한군이 앞산을 넘어갈 때에도 뭔지 모르고 사실 북한군을 따라서 함께 이동했다고 한다.
"단지를 하나 주면서 이걸 들고 따라 오라는 거야."
그런데 바로 앞에 영평천이 보이는데 뒤에서는 따콩거리며 군인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 잠시 머뭇거리는데 북한군이 벌써 강을 건너 도망쳤다.
어린 나이지만 바로 나가면 죽을 것 같아서 산속에 숨어서 있는데 도대체 단지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배도 고픈데 혹시 꿀단지아냐, 고추장 단지던가?"
호기심에 포장된 뚜껑을 뜯어본 순간 질겁하고 말았다.
"왠 엄지손가락만 짤라서 가득 채운 단지였다."
너무 놀라서 그걸 숲속에 숨기고 밤이 되길 기다려 집으로 왔다. 할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는 없다.
어디가셨는지 물어보니 경찰지서에 갔다고 한다.
벌써 흔한 말로 부역자를 색출하는 과정이었다.
밤 늦게 되어서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얼굴을 본 피곤은 하지만 상처는 없는 것을 보니 잘 마무리가 된 것 같았다. "아버지, 무슨 일 없었나요?'
"음, 아무 일 없다." 짤막한 대답에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그 현장에 한 두번 올라가 그 모습을 보여주고 지서에 신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에도 올라 가니 그대로 있었다며 정말 잔인한 놈들이란다.
아마도 전공을 확인받아야 하는데 처음에는 두개골로 했다는 풍문이 있다.
그러다 귀를 잘라 하기도 하고 일본이 임진왜란 당시 저지른 코무덤이 생각이 난다.
그러다 한 3개월 지나 겨울 초입인데 우르르 군인들이 산을 넘어서 남으로 가고 중공군이 온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할지 어리둥절한 가운데 경찰이나 군인 가족들은 피난을 떠났다.
농사꾼들과 머슴출신들은 그대로 있는데 기와집이 근사하게 있으니 중공군 놈이 말을 타고 들어와 안방을 차지하고 할아버지집 사람들은 골방으로 밀려 났는데 이때는 또 이 덕분에 누가 건들지 않해서 피해를 면했다 한다.
중공군 속에는 북한군인이 일부 있는데 아마도 통역관 비슷하게 임무를 수행한다.
집 뒤에 산 밑에는 중공군 병원이 만들어지고 부상병들이 꽤나 있었다.
"그럼 그 속에 국군이나 미군들 모습은 못 보셨나요?"
"미군은 보았지. 하지만 국군은 잘 모르겠어."
중공군은 신사들이었다.
중공군이 이곳에 있는 동안 미군 비행기가 날아와 불폭탄을 퍼 부었는데 중공군이 마을 집집에 분산하여 은거한 이유로 위치가 노출되지 않아 피해가 없는 가운데 봄이 오고 나무에 파릇파릇 물이 오르는데 중공군이 한밤 중에 짐을 꾸려 말등에 싣고 북쪽으로 넘어갔다.
그러더니 미군이 들어오고 마을 입구에는 미군 초소도 생겼다.
그렇다고 지난해 북한군이 주둔하며 죽어간 신들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부분 그당시에 완장을 차고 다녔던 사람들은 다 북으로 도망치고 얼치들만 남았다가 경찰에 잡혀가서 일부는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너무도 무서운 세상이 되어 말한 잘못하면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세상에 그래도 중공군이 와 있을 때는 양반이었다.
그런데 이제 미군이 들어왔다. 미군은 민가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한국 사람들이 달려들어 텐트도 치고 안에다 무슨 벌집처럼 생긴 통을 놓고 불이 그 안에서 타 오른다.
나중에 알았지만 노무자들이다.
미군들이 종현산에 오르기도 하고 대포들이 들어와 마을 입구 밭이며 논에 온통 미군 장비들이다.
비행기들이 훨씬 많이 하늘을 날아 다니고 있다.
마을은 반이 비어있고 대부분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나이 먹은 부녀자들이 태반인데 이미 미군들이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여 모두가 숨어서 보이질 않았다. 어느 때는 국군이 앞장서서 미군을 데리고 마을에 들어와 섹시를 찾는다며 '섹시 섹시'하고 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강압적인 모습은 보질 못했다.
미군차들이 뻔질나게 나가고 들어오고 하는데 혹시 있을지 모르는 잔당을 찾는 일이 경찰과 군인이 나타나 집집마다 조사하고 다닌다.
산 위에는 계속하여 군인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그 많이 있던 나무들은 다 타버리고 까맣게 되어 사람보기도 쉽다.
논밭에 들어온 대포들은 연일 계속하여 어딘지는 모르지만 포탄을 쏘아대고 있다.
그런 어느 날에 갑짜기 차들이 움직이고 군인들이 사라지는데 노무자들도 보이질 않는다. 텐트도 대부분 놓고 떠나간 것이다.
그런데 이에 웬일 또 다시 중공군이 내려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중공군이 이 지역을 포위하여 기습을 했다고 한다.
"마을 입구 미군초소 자리에 죽어있는 미군 3명을 보다."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평온이 찾아오고 할아버지는 마을 입구에 나가 보았다.
미군초소가 있던 자리는 초소는 흔적조차 없고 시레이셔농지들이 바람에 구르는 모습만 보였다.
그래서 혹시나 먹을 것이 있나 그 자리에 올라가니 바로 뒤에 흑인병사 3명이 죽어서 엎드려 있다.
중공군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어다니며 뭐라고 말을 하는데 알 수는 없다.
벌써 동네 가운데에는 그들의 커다란 양은 솥이 거치되고 밥을 하고 있다.
중공군은 이때도 민가에서 뭘 달라고 하는 일이 없었다.
검은 산에는 아침에 보니 무슨 솜뭉치가 군데 군데 떨어져 있어 보였다.
조금 있으니 북한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돌아다니며 동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모이게 하더니 삽 괭이 들고 논 밭으로 가고 산으로도 간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바로 죽은 시체를 묻는 일인데 여기저기 죽어 있는 시신을 가까운 방공호나 구덩이같은 곳에 밀어넣고 흙을 덮는다.
산에 오른 사람들 이야기는 중공군이 그렇게 흰도포를 쓰고 죽어있어 일부는 그곳에 묻어 버리고 일부는 들고 나와 중공군이 원하는 장소에 묻었다고 한다. 그게 바로 신발 코부분이 나오게 묻으면 중공군이 푯말을 세우기도 하고 시신중에 일부는 어디론지 가져갔다고 한다.
다시 여름이 오고 비는 그리도 많이 내린다.
소문에 중공군이 서울 근처까지 내려가다가 유엔군이 다시 올라온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중공군이 허겁지겁 떠나갔다.
그리고 미군이 다시 들어와 동네가 시끄럽다.
전사한 미군을 찾는다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모아 중공군이 묻은 시신의 위치를 알리라고 난리다.
신고하여 주면 포상금도 준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중공군이 와 있을 때에 치안대에서 교육이 되어 미군이 다시오면 여자는 모조리 다 몸종으로 되고 여차하면 다 죽인다고 교육이 되어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여기저기서 시신이 발굴 되는데 미군은 안보이고 중공군만 나타나는데 매일 발굴이 진행 되고 이제그 중공군 시체가 한쪽으로 몰아서 집단으로 매장 되었다.
그러니 종현산에는 미군이 있을 수 있지만 잘 모른다.
"그러면 그 초소 자리에 죽은 유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글쎄 우리가 그곳을 가보니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누가 묻었는지를 몰라."
"그럼 그 후에 미군이 여기에 오지 않았나요?"
"전쟁이 끝나고 내가 군에 갔다 왔는데 소문에 가금 미군이 와서 수소문을 한다는 거야. 저 너머에 군자동 어느 집 뒤에서는 3구를 찾아간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렇습니까. 우린 영평천가에 있는 추동리로 향했다."
저 눈앞에 발전소의 건설 모습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미군이 '95년도에 와서 물어봐 저기 집뒤라 했더니 3구를 발굴 해 갔어요."
군자동 마을 회관에 들어 갔더니 어른 들이 화투놀이를 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할머닌 할머니대로 화투놀이를 하는데 노인회장 되는 분이 모두 모이게 하여 우리가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 하고 증언을 들어 보았다.
그런데 한 어르신이 미군 이야기를 꺼내며 본인 집 뒤에 야산계곡이 있는데 본인은 그 당시에 어려서 잘 모르고 지내다 '68년도에 군대에서 제대하고 오니까 당시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살아 계셨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서 그저 지나쳤다고 한다.
그걸 기억하는 것은 김신조 간첩이 들어와 군대 생활을 6개월이나 더 하는 바람에 불만도 생겼던 시절이라 생생하게 기억 하단고 한다.
그러나 서울에 나가 직장생활 하고 60이 넘어서 들어오니 모두들 동네 어른들은 다 돌아가시고 없고 누가 그걸 물어보는 사람도 없는데 '95년도에 미군이 한국인 통역관을 데리고 와서 수소문하길래 알려 주었더니 바로 한 10여명이 와서 파 보더니 유해를 찾았다고 한다.
"그럼 다른 유해는 없나요,국군이나 경찰 또는 학도병등... ."
"중공군은 찾지 않나요?"
다른 분이 말을 이어 받았다. "공개적인 발굴은 안하지만 그런 사항도 받아서 자료로 남기고 언젠가는 중공과의 인도적 교류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많은 분들이 말을 꺼내 놓은 것이 영평천 건너 고소성리에서 오가리 가는 길에 중공군이 얼마나 죽었는지 차가 들어가질 못했다 한다.
"아니 그 때가 언제쯤 되는지 혹시 아시나요?"
"전쟁나고 다음해 여름쯤 되지, 길바닥에 전수 시체야."
"그걸 어덯게 보셨어요?"
"뭘 어떻게 봐, 미군들이 불도저같은 것을 가지고 와 신기해서 따라 다녔지."
"아 글쎄 그 길로 들어서더니 밀어서 강물속으로 다 집어넣어버렸서. 비는 억수같이 내리는데 다 어디로 떠내려 가고 지금은 보이질 않아요."
"안으로 들어가면 무슨 죤대대인지 포병부대 있잖아요. 그 앞이 방아다리라는 곳인데 그곳에 미군이 들어왔는데 두개 부대가 길을 잘못 들어 뭉쳐져서 중공군이 기습해 많이 죽었다고 하던데."
이곳 전투는 '51.4월중순에 3.15일 서울수복 후에 유엔군의 재반격으로 캔사스선 그러니까 38도선으로 진출하는 공격으로 영평천으로 진출하는 부대가 미 제1군단 예하 미 제3사단과 그 우측에 미 제25사단에 배속된 터어키여단, 그리고 제25사단이 진출하고 있었다.
그러다 중공군의 4월공세로 행주산성에서 구파발-북한산-불암산 퇴계원-덕소로 이어지는 골든선 방어를 하게 되는데 미 제1군단은 행주산성 일대에 국군 제1사단, 북한산과 불암산사이에 미 제1기병사단, 불암산에서 덕소까지는 미 제25사단 방어를 하고 터어키 여단은 광진교 밑에 필리핀 군대는 덕소밑에 한강변까지 철수하였다.
그러자 중공군은 유엔군을 양익 포위하려 주력을 악천후를 이용하여 동쪽으로 은밀 기동시켜 바로 그 유명한 '51.5.16일부터 5월공세를 주로 국군이 있던 중동부전선에 집중하여 현리지구의 국군 제 3군단지역, 그리고중부전선의 미 제9군단이 방어중인 덕소에서 홍천에 이르선 선에 공격을 개시하여 국군 제6사단이 용문산에서 대승을 거두고 현리지역에서는 3군단이 무력화 되는 악순환을 격게 된다. 이 당시에 메 1군단의 서부전선은 크게 용동치지 않았다. 이유는 미군이 있어서다.
그 후 유엔군이 다시 재반격 작전으로 캔사스선과 와이오밍선으로 진출 하면서 의정부-전곡을 축선으로 좌측은 미 제1기병사단이 적성-전곡으로 우측은 미 제25사단이 영평천으로 진출하는데 지역주민의 제보대로라면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5사단의 부대가 이곳 고소성리일대에서 혼재되었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바로 포병부대 앞 야산과 353고지 일대를 보장산을 탐사 하였다.
이지역을 탐사하면서 신흥리에서 고문리로 넘어가는 어간에서도 누군지는 모르지만 대규모로 죽었다는 제보를 접하였다.
이에 따라 고소성리에서 고문리에 이르는 우측의 야산을 올랐는데 정말 방아다리골 안에 고지군에 많은 개인호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길 옆에도 방공호처럼 대단히 큰 호들이 굴토 되어 있어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탐지해보니 모두 반응이 나타났다.
이곳 방아다리는 실제 미군 발굴 팀이 들어와 함께 들어와 탐사를 했다.
그리고 발굴작전을 해보았지만 유해는 찾지 못했다.
미군측 자료에는 전사 기록이 이 일대에 3명이 있는데 정확한 좌표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동네에서 한명의 제보자가 현장에 동행 했다.
이유는 군부대가 들어오기전에 이곳에 살았다며 미군이 묻힌 곳을 안다고 우리에게 연락이 와서다.
열심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그 당시에 병력이 배치된 모습과 본인이 호에 찾아와 시레이션의 일부를 얻어먹던 곳도 찾아냈다.
그러나 이미 그 호는 굴토된 흔적이 보인다.
우린 놀라운 제보 하나를 들었다. "중공군이 미군 시신을 가져 갔다."
어떤 형태로 가져가는지는 몰라도 미군이 죽었는데 중공군인들이 달려들어 처음에는 시계라든지 호주머니에 있는 것들을 서로 먼저 가져가니라 난리라고 한다.
그러고 나면 당분간 시신이 발가벗겨진 체로 그 자리에 남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있어 가보면 유해가 없어지고 그렇다고 묻힌 흔적도 없다고 한다.
우린 휴전회담시 상호 유해 교환을 한 것으로 알고있다.
비공식이지만 우리측이 개성까지 들어가 주로 미군 유해를 가지고 나왔고 우리측에서는 중공군 유해를 발굴하여 개성에석 가져오는 숫자에 몇배로 상응하는 유해를 넘겼다.
실제 그 당시에 이 업무를 한 참전용사님이 종로 이화동 참전전우회에 살아 계시는 조병천 용사다.
조 용사님은 트럭을 인솔하여 발굴팀을 데리고 북한과 중공군이 넘긴 그들의 매화잔 보고서를 가지고 평택이북에서 휴전선에 이르는 구역을 담당하여 발굴을 진행했다고 한다.
유해를 발굴하여 개성으로 들어가면 공산군측에서 확인을 하고 그들이 즐비하게 정렬시켜놓은 유해를 확인하여 차에 실고 내려오곤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을 포로교환 숫자에 포함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어디에도 관련근거가 남아 있지않다.
"나는 여기에 관련하여 놀란만한 사실을 실제 확인하였다."
홍천에서 언제인가 발굴 작전을 하는데 그곳에서 독이 하나 나왔다.
조금 길게 되어 있는데 그속에 유해가 한구 정확히 들어가 있는데 살짝 화장하여 살은 하나도 없고 뼈만 들어 있었다. 그을린 형태로 뼈가 들어가 있는 모습에서 간이 화장을 했다는 것은 명확하다.
독을 들고 다니며 전사자들을 처리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고 짐작하건데 지위가 높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중요한 의미가 있는 유해가 아니겠는가!
중공군이 유해를 화장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은 주로 후사면에 개활지를 고려하여 유해를 가매장하고 푯말을 세워놓는 것이 일반적 형태다.
그리고 기록에 남기어 그것이 휴전회담시 우리에게 전달되고 그걸 들고 그 자리에 가면 정확히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경우는 그들이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있을 때에만 가능했다는 것은 상식이다.
유해교환시 그들은 뼈대와 미군의 인식표가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우리 국군은 없었다고 한다. 유해는 미군측이 제공한 유해낭에 들어가 있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나무 사과박스에 담아서 발굴 당시에 있었던 유품 담고 쓰여진 기록이 있으면 그걸 적어서 위치와 함께 요도를 그려 보냈지."
"그런데 사실 유해처리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전쟁 지역, 그중에서도 중공군이 전투한 지역은 죽은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러니 이렇게 그들이 기록지를 주어서 발굴 되는 숫자는 그리 많지가 않았다.
대부분 공격이나 후퇴하면서 미군의 비행기나 포병에 의해 죽어가다보니 거멓게 그을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동네 사람들은 그래서 미국 흑인병사가 엄청 죽어있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시체가 썩으면 그냄새가 10리를 간다고 한다.
시신에 붙어있는 파리로부터 기 어나오는 벌레들, 그리고 이걸 듣어먹으러 달려드는 미친 개와 여우 늑대들이 판을 치고 심지어는 멧돼지도 덤져 든단다. 아군이 점령하고 있을 때나 적군이 점령하고 있을 때나 시체처리는 똑같이 이루어졌다.
동계는 그래도 참을 만 하다. 하지만 봄부터 여름 가을은 어느 참전 용사님 증언은 총맞고 고통스러운 것 보다 시체 썩는 냄새가 더 참기에 힘들다고 하였다.
"시체에 휘발유 뿌리고 불질러 다 태워 버렸다."
내가 대대장과 인사참모를 했던 춘천의 오월리와 신포리, 원천리, 계성리 지역은 더 그렇다.
이곳은 중공군이 5월공세가 실패로 돌아서면서 후퇴 간에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 미 제25사단등에 의해서 중공군 1개 사단이 완전히 괴멸되어 버린 곳이다.
또한 38도선이 이곳 원평리에 있고 북한군이 처음으로 건넜던 모진교가 있었던 지역(지금은 춘천댐에 수몰 되어 있음)으로 서북쪽에 이지역에서 가장 높은 고지군인 매봉과 화악산이 있다.
그러니 도로망도 단차로로써 대부대가 기동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가평에서 홍적령으로 올라서 퇴로를 차단하면은 실제 도망가기가 어렵고 산을 타야만 한다.
반대로는 목동지역을 차단하면 그 안에 들어온 병력이 또한 탈출하기가 힘들어 몯덕산에서 가덕산 북배산 계관산을 타고 내려와 북한강을 건너야만 된다.
나는 대대장 시절이야 이런 것에 대한 개념이 없어 전혀 알지 못하고 지형정찰만 하고 그저 산 능선에 개인호가 왜 이렇게 많이 있느냐고 혼자 반문했을 뿐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곳이 '51.5월 말에 중공군이 길바닥에 다 죽어 차량이 그냥 깔고 지나가도 너무 징그럽게 피투성이로 길이 덮히니 도쟈가 와서 한쪽으로 밀어 붙이고 휘발류를 붓고 태워 버렸다고 한다. 타버린 재는 바로 길 옆에 뚝에 묻어버렸는데 70번도로 상은 그후 길이 당시보다 두배 넓이로 확장 되면서 그 흔적은 없어졌다.
하지만 계성리로 들어가 전차 사격장 들어가기 직전에 좌측으로 돌아 올라가면 시골 음식식점이 있는데 그 주변 뚝방은 대부분 시체 화장재가 묻혀 있다. 2000년도에 나는 이곳 터골에서 6.25전쟁을 실제로 격고 또한 부역에 끌려가 시신을 묻기도 한 어른을 만났다.
"어르신, 우린 국군 전사자를 찾으러 다니는 육군 발굴단입니다."
"아니 이곳에는 동네사람이 미군비행기 폭격으로 죽었는데 그걸 조사 하나요?"
"얼마 전에도 조사하러 와서 다 확인하고 갔는데 또 무얼 조사하나요?"
"그게 아니고 전투하다 죽은 군인이나 경찰의 시신을 찾고 있습니다."
"아이고 그게 언제인데 지금도 뼈가 남아 있을까요?"
"그래서 정부에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하루빨리 찾으려 예산을 들여 발굴하려 하는데 어디서 죽어 묻혀있는지를 알아야 발굴 하지요."
"혹시 그런 것 모르시나요?"
"저기 사격장안에 있어도 거길 들어가나요?"
"예, 참모총장님 지시로 사격을 중단하고 있다면 들어가 발굴 합니다."
"와, 센분들이 왔네. 글면 저 안에 들어가면 계산골이 있고 절이 있었는데 석등이 보물이에요. 그걸 일본놈들이 가져 갈려고 들고 나오다 태평양 전쟁이 나서 미국한테 원지폭탄 맞고 망하는 바람에 가져가지 못한 곳입니다. 그 위로 올라가면 북쪽은 장군산이라 하고 서쪽은 두류산인데 국군 6사단이 녹아 날때가 언제 인지 아나요?"
"네, '51년 4월 말입니다."
"그때 국군이 중공군에 포위되어 도망다니다 많이 죽었다고 해요. 우리가 한 열서너살 되었을 때에 탄피같은 것 주으러 올라가 보니 여기저기 시체가 백골이 되어 그냥 있어서 일부는 보기 싫어서 발로 호 구덩이에 밀어 넣기도 했지요."
"그 앞에 백적산이 있는데 그 곳에는 중공군이 수없이 죽어 있어 우리들은 거기서 중국 은화도 재수 좋으면 발굴하여 돈으로 나중에 바꿔가졌어요."
"그런데 중공군도 발굴 하나요?"
"꼭 발굴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국군과 함께 매장 되었다하면 발굴하여 국군을 식별해 냅니다."
"무슨 방법이 있나요, 중공군인지 아군인지 어떻게 구별해요?"
어르신은 궁금증도 많았다.
키가 너무 아주 작아서 군대도 못같다. 본인은 학도 의용군이라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이곳의 학교는 원천리에 국민학교가 있었다는데 그 당시에 학교에 다니는 것 조차도 어렵던 시절인데 어떻게 학도병이 되겠는가.
그런데 군인이 들어오니 노무자 일을 하기는 한 것같은데 이곳은 군인이 그렇게 오래 주둔한 곳이 못 된다. 그리고 주로 중공군 일을 도와 주었으리라 보는데 말할 수는 없다.
어떻게 피아를 구별하느냐, 중공군 유해는 발굴 되면 돈을 주느냐, 미군은 와서 돈준다고 하던데 우리는 돈 안주느냐등 많이도 묻는다.
'00년도에는 제보비가 없었다. 제보비는 '07년도부터 생긴 제도다.
참전용사 명예수당도 본인이 받아야 하는데 못 받고 있다며 어떻게 안되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다 식당주인이 춘천에 갔다 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이 주인이 중공군 장교 묘를 알고 있다고 한다.
"그걸 어덯게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왜 몰라라요, 내가 12살인데 아버지가 직접 묻었는데 따라가서 보았지."
아저씨는 군대도 갔다 왔다. 그것도 해병대로 갔다왔다.
이래저래 식사시간이 되어 그 집에서 점심을 먹고 함께 동해을 했다.
집 뒤로 돌아 가니 밭언저리에 둑방처럼 생겼는데 그곳도 과거에 시체를 불살라서 재를 군데 군데 묻었다 한다. 워낙 죽어있어 미군이 왔는데 그 시체더미에서 미군을 찾아내는데 몇구가 나왔다.
나온 미군은 그들이 아주 좋은 관에다 넣어서 가지고 가고 나머지는 그냥 포크레인이라는 장비가 들어와 한쪽을 파고 묻어버렸다 한다.
그런데 미군이 떠나고 혹시라도 중공군의 은화를 찾을까하고 밭언저리를 살피나 보니 어떻게 중공군 장교가 있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모른다고 그때 함께한 사람들이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하면서 그곳을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풍상의 세월에 봉분은 가라앉고 아기무덤처럼 되어 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우리는 증명해야 할 이유가 없기에 감사하다는 말만 드렸다.
"비행기가 어떻게 알고 폭탄을 쏘는데 반은 죽었지."
중공군 묘지에서 내려와 우리는 가게 평상에 앉았다. 7월의 따가운 햇볕을 발보며 시원한 사이다를 한컵씩 마셨다.
그리고 이곳의 전쟁나기 이야기가 시작 된다.
원래 이곳은 38선 이북 지역으로 북한이었다. 산골이지만 장군산아래 큰절이 있고 광산이 있어 일제시대에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러다 해방이 되니 뿔뿔이 모두 떠나고 원 토박이 분들만 남게 되었는데 어느 날 북한군이 내무서원과 같이 들어와 호구조사를 하고 갔다.
그게 전부란다. 그러니 전쟁 나는지도 몰랐는데 1.4후퇴 때에 중공군이 들어오면서 전쟁이란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미 이곳은 일제시대에 방공호를 집집마다 다 파 놓았는데 몇몇 집은 바로 집 뒤에다 파기도 하고 어떤 집은 집과 떨어져 산 밑에 파기도 했다.
그래서 제대로 방공호를 팠는지 점검도 다녔다고 한다.
중공군이 와 있는 기간은 절대로 불빛을 보여서는 안된다. 미군 비행기가 하늘을 빙빙 돌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비행기의 공습이 시작 되었다.
하루는 미쳐 반공호에 숨지를 못 했는데 비행기가 나타나 폭탄을 퍼부었는데 불이 나는 폭탄 이었다. 누구는 원자폭탄이라고 한다.
아저씨는 그래도 용케 피신했는데 할머니와 아버지가 안 보인다.
나중에 보니 할머니는 완전히 시신이 분해되어 버렸고 아버지는 다리가 절단 되었다.
동네가 완전히 쑥밭이 되어 많은 집이 다 타버리고 사람이 죽었다.
옆집은 3살짜리 남자 아이만 남고 다 죽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 것으로 보이는 살짐을 모아서 장사를 지냈다.
"미군이 들어 온다. 그리고 국군도 왔다."
3살짜리 아이는 미국에 입양되어 얼마전 동네를 찾아와서 내력을 듣고 다시 미국으로 갔다.
중공군이 얼마나 죽었는지 말도 못하게 다 죽었다.
사람이 죽었으니 마음이 아플 것같은데 가족이 죽고 옆집이 다 죽고 하다보니 담담해져 버린다.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어리지만 들었다.
미군이 들어와 반공호마다 혹시나 미군이 죽어 있는지 다 파헤쳐 보았다.
그런데 다 죽은줄 알았던 3살짜리 엄마가 흙속에서 3일만에 살아서 나왔다. 얼굴에 피투성이로 살아서 나와 정말 기적이 생긴 것이다.
미군들은 엠브런스가 있었는데 환자들을 치료하고 아버지도 여기서 응급 치료를 받고 살아서 70까지는 살았다고 한다.
질긴 것이 운명이라 그 남자아이는 미군이 데려가고 아주머니는 어떻게 된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런 아이가 미국에 가서 장성하여 몇년전에는 동네에 찾아와 어른들을 만나고 집안의 내력을 듣고 떠났다고 하니 참 전쟁의 아픔은 너무 크다.
남겨진 유해를 휘발류로 뿌리고 태워 버린다는것은 가평 작은멱골 입구에서 들었는데 인간이 너무 야속하기만 하다.
멱골 지역은 휴전후에 지역으로 다시 들어온 사람들이 밭이나 화전을 일구 면서 유해가 나왔다고 신고하면 처음에는 조사팀이 나와 수습도 해 가더니 그 후론 아예 오지 않고 기름통을 주면서 일대에 남아 있어 보이는 시신을 다 모아서 태워라고 했단다.
우리는 그 장군산 일대에서 '02년도에 4구 그리고 두류산과 2구를 발굴 했다.
백적산은 이미 언급 했듯이 '02년도에 31구를 발굴했다.
미군 비행기의 폭격은 전시상황에서 제대로 연락이나 방어수단이 없는 관계로 필연적이라 하여 지금도 그에 대한 어떠한 보상이나 원인 규명은 없다.
왜냐하면 적지역은 모두 피난을 하거나 떠나도록 이미 통제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슨 그 당시에 테레비나 라디오 또는 반상회같은 것이 활성화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떠나면 먹고 살 것이 없는데 어디로 피난가라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이걸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우린 늦었지만 범 국가적인 차원에서 공론화가 요구된다고 본다.
바로 그 우측 북한강 넘어 407번 지방도에 있는 부다리고개 정상에서도 1.4후퇴시 국군 제5사단 1개중대가 올라가 점령하고 있는데 중공군으로 오인되어 그만 폭격을 받아 거의 죽다시피 했다는 고탄리 마을회관 노인회장님의 제보로 발굴을 개시하여 '12년도에 무려 58구를 발굴하지 않았던가.
"5중대가 오폭으로 다죽고 1개소대만 생존했다."
이미 알아 보았듯이 실제 참전 용사님인 국군 제5사단 제27연대 2대대 위생병이었던 황창규님의 증언에 의하면 대공포판 미식별로 오폭이 이루어지고 전사자는 방치하고 퇴각하였다는 내용에서 우리는 전쟁중 얼마나 많은 이러한 일들이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중동부 전선의 양구 북방 백석산 전투에서도 국군 제8사단이 '51.10월에 목표 점령 직전 우리 전차의 오폭으로 점령하지 못한 전례가 있지 않은가.
"아우라지 매운탕 집 사장님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
나는 '89년도에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지하침투탄이란 비밀 무기를 시험사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철원의 신술리라는 곳에서 그당시 최신형 155밀리자주포를 이끌고 다락대 사격장으로 이동하여 시험사격준비를 했다.
포탄의 특징은 사격하면 포탄이 땅속으로 1~2m 파고 들어가 터진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이곳 포병진지인 연천 청산 신답리에 왔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어느날 유해발굴 업무를 위해 이곳에 와서 기억을 살려 아우리지매운탕 집을 찾았다.
"사장님 계십니까?"
"사장님은 지금 고기 잡으러 가서 없고 조금 있어야 옵니다."
집에서 식당일을 거들고 있는 아들이 답변을 하며 잠시 들어와 앉아서 기다리라 한다.
얼마를 기다리니 사장님이 들어왔다.
"사장님 저 아시겠습니까?"
"아~, 소령 때에 오지않았나요?"
정말 유명한 식당을 하시는 분들은 눈썰미도 대단한 것같다.
아우라지 사장님이야기
사장님은 어렷을 적에 사제 지탐기를 가지고 탄피를 캐러 다니다 불발탄 사고로 한쪽 손을 잃었다.
하지만 이 일대의 웬만한 곳은 다 헤집고 다녀 모르는게 없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바로 알아보시고 찾아와 주어 고맙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이야기하니 너무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며 칭찬이 대단하다.
그러면서 과거에는 한탄강을 따라 몇개의 토굴이 있는데 그곳에 탄통도 있고 총도 있어 그걸 지서에 갔다 주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몇번의 홍수가 지면서 그 굴들이 대부분 위치를 모르게 되었다고 하며 신흥리에 아우라지 나루가 있는데 영평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일대에 유해가 많이 있었는데 중공군이라하여 사람들이 다 강물에 흘려보내거나 강가에 묻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아, 거기 다락대 사격장 관측소 올라가는 길에 탄피나 파편이 옛날에 많이 있었는데 거긴 변하지 않아서 있을 것같은데... ."
"아니 그곳은 우리가 관측 훈련하면서 많이 파서 개인호로 사용한 곳인데 거기에 있단 말입니까?"
우린 지뢰탐지기를 이용하여 실제 소리나는 몇군데를 시굴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 제6군단장님이 현장에 오신다고 연락이 와서 이내 달려갔다.
정말 유해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수상한 유해다. 굴토하고 보니 어색한 기분이 들엇다.
마사토인데 어느정도 흔적이 과거에 땅을 파고 묻은 느낌이다.
제6군단장님 이야기다. " 아니 지금도 저렇게 온전하게 남아 있단 말인가?"
"네, 어떤 유해는 바로 지금 묻힌 것처럼 완벽하게 발굴되는 유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유해는 확률이 겨우 0.0001%정도 입니다."
그리고 지휘관님은 떠났다. 우린 현장 토의 결과로 군인이 아닌 민간인 매장 장소로 결정하고 다시 고이 묻어 들였다.
제 6 절 . 경기 도서 및 북부지역 일대 민간인 피해 현황
가. 인천 영흥도 학살 : '50. 8.19~9.12일 사이에 해군유격대와 대한청년방위대가 부역자들을 찾아내 다수를 학살했다는 제보다. 또한 일부는 뗏목에 실려서 바다로 실려가 발에 돌이 매달린 채 수장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당시에 이북에서 들어온 사람들(피난민)이 많이 죽었다 한다.
* 뒷 부분에 기록되어 생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