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춘주문학님들~~
춘주문학회에서 9월19일 금요일 손 광성 수필가를 모시고 세미나를 개최합니다.
아직은 일정만 확정되었지 세미나 주제를 아직은 잘 모르지만 ....
그분을 소개하는 작품 춘주수필/추천 시 수필방에 예전에 올린 글인데 ...
지난 번 강원수필에 2006년 6월 17(토) ~ 18일(일) 1박 2일. 손 광성 선생님의 「묘사의 정서화」세미나에 초정되신 분입니다.
가운데줄 왼쪽에서 5번째선생님
박종숙선생님 옆에 앉아 계시는 손광성선생님 ,강원수필 유연선 회장님
약력'손광성(孫光成). 수필가, 동양화가. 호는 일현(一玄). 함경남도 흥원군 보현면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월남하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하였다. 서울고등학교와 동남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시민대학 문예창작 강사와 한국수필문학진흥회장 일을 맡고 있다. 불교미술대전 현대화부 우수상과 한국현대수필문학상을 받았다. 수필집으로 『달팽이』(을유문화사), 『나도 꽃처럼 피어나고 싶다』(을유문화사)외에 편역서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을유문화사)등이 있다. 아연회, 상원회 전(前)회원이며, 2002년 4월 삼정 아트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손광성 수필가가 들려준 수필이야기
(사)한국편지가족 서울 경인지회 봄맞이 문학특강
▲ (사)한국편지가족 서울경인지회 (사)한국편지가족 서울경인지회가 마련한 문학특강에 초대된 손광성 작가는 "수필은 체험적 제재로 정제한 언어를 통해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열린 형식의 문학이다"고 정의했다.
ⓒ 최정애 손광성
(재)우정사업진흥회에서 해마다 실시하는 전국주부 편지쓰기대회에서 입상한 주부들로 구성된 (사)한국편지가족 서울∙경인지회(회장 박명자)가 새봄맞이 문학특강을 열었다. 3월 25일 서울 광화문 우체국 중회의실에서 가진 이 행사에는 손광성 수필가를 초대해 수필 작법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사)한국편지가족 서울∙경인지회 류정호 고문의 사회로 진행된 특강에서 박명자 회장은 “발아래까지 다가온 봄의 속삭이는 소리가 귀를 간질이는 계절에 귀한 시간을 가지게 되어 기쁩니다” 라며 “강사님의 말씀이 보약이 되어 편지로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 데 더욱 기여하기 바란다”고 당부하며 막을 올렸다.
이어 무대로 올라온 손광성 작가는 피천득 선생이 생전에 “손광성의 수필은 한 편 한 편이 모두 시”라고 극찬한 말을 입증하듯 수사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수필을 쓸 때 남을 감동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오늘은 수사법을 소개하겠다고 운을 뗐다.
먼저 수필은 체험적 제재로 정제한 언어를 통해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열린 형식의 문학이라고 정의했다. “수필의 장점은 독자에게 직접 자기 고백을 한다는 점이다. 자기고백을 들어 친근감을 조성하므로 소설보다 구성을 더 잘 짜야 한다. 소설처럼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며 “수필은 그 자체가 체험한 제재이므로 리얼리티를 만들 필요가 없다. 짧은 글 속에 진정성이 묻어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시는 접속부사, 조사, 어휘 등을 생략하고 비유와 은유를 통해 절규하는 언어라고 풀이했다. “소설은 복잡한 사건이 전개되므로 스토리가 장황할 수밖에 없다. 시처럼 거두절미하면 어려워서 독자들이 따라오지 못 한다”라고 전제한 뒤 “바쁜 현대인들이 앉은 자리에서 읽을 수 있는 수필이야말로 가장 무난한, 이 시대에 적합한 문장작법”이라고 꼽았다.
소설가 중 소설에 신뢰성을 주기 위해 수필작법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박완서씨가 대표적이라고 소개했다. <그 남자의 집> <엄마의 말뚝>을 보면 내가 경험한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것. 서영은씨의 <거기에 해바라기가 있었다>도 같은 경우라고 예를 들었다.
편지가족의 행사에 초대된 만큼 편지와 수필의 관계도 확실히 짚었다. “편지는 실용적인 글의 형태이지만 소설, 평론, 우화, 일기 등 글 쓰는 방법상 모든 형식을 빌려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양하의 수필 <나무>가 시 형식을, 역시 피천득의 수필 <은전 한 닢>이 희곡형식을 빌려오듯 편지는 여러 형식을 차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단 문학의 본령인 정서전달 즉 문학으로 승화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고 귀띔했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안네의 일기>의 경우 세계적인 문학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이유는 실제 경험을 일기형식으로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수사법에서는 원관념에 얼마나 참신한 보조관념을 동원하느냐가 글의 생명이라고 강조했다.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이광수의 <사랑>처럼 시대가 바뀌어도 원관념인 사랑은 변함이 없지만 보조관념만 바뀐다는 것.
백척간두의 각오, 치열한 작가정신만이 비유에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하며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이질성이 크면 클수록 효과가 크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질성이 너무 크거나 유사성이 전혀 없으면 성립이 안 되며, 유사성이 크고 이질성이 적으면 감동이 없다는 점, 평행선이면 비유가 이루어지지 않음도 부연 설명했다. 따라서 유사성이 있고 이질성이 클 때 비유가 주는 감동은 비례한다고 정리했다.
그 예로 “나는 굉장히 시장해”라는 심정을 “내 허기는 시골역 플랫폼”이라고 표현한다면 시골역의 플랫폼처럼 한산함을 떠올리기에 배고픔의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
손 작가는 자신의 수필집 <달팽이> 작법도 예로 들었다. 오순탁씨의 작품 중 달팽이를 성냥개비로 비유한 것을 보고 무릎을 쳤다는 것. 작가는 달팽이에 생명을 부여해 꽃의 수술과 같다는 표현을 썼다고 공개했다. 달팽이와 꽃의 수술은 전혀 다르지만 형태상 유사성을 매개로 둘의 결합시켰다고 귀띔했다.
그는 “시는 비유법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시는 은유가 많아 애매하고 산문은 직유가 많아 명료하다”며 “은유는 직유보다 애매하고 상징은 은유보다 애매하다. 생명력과 향기가 나는 보조관념 찾기에 노력해야 한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이어 가진 질의 응답시간에는 “편지글의 심사하는 경우가 많다. 편지글 심사 기준을 말해 달라”는 이말영씨의 질문에 “사적 비밀인 편지를 심사한다는 일이 우스운 일이다. 굳이 기준을 정한다면 수식과 수사를 많이 하지 않은 곡진한 글이 좋다. 가식적인 글은 금방 들통이 난다. 장식이 많으면 본령이 죽는다”고 답했다.
한편 편지쓰기 운동을 통한 편지문화계승에 힘쓰고 있는 편지가족 서울∙ 경인지회는 제2회 서울 경인지역어머니 편지쓰기 대회를 개최한다. 따뜻하고 정겨운 마음을 한 통의 편지에 담아 4월 18일까지 서울 중구 반포로 서울체신청 우편영업팀 편지쓰기 담당자 앞으로 보내면 된다. 대상1명, 금상1명, 은상 3명, 동상 5명, 장려상 20명에게는 상장과 부상을 수여한다.
*이 글은 2007년 4월 13일 대구수필문예대학에서
강의한 노트입니다.
수필창작의 실제(1) - 한 발로 걷기/
(1) 수필쓰기 방법으로 <한 발로 걷기, 두 발로 걷기, 세 발로 걷기, 문어발로 걷기>를 제시했다. 여기서 발은 화소의 개수를 말한다. 화소의 단위를 나누는 일은 때로 모호할 수가 있다. 글 전체를 구성하는, 경계가 뚜렷한 이야깃거리를 하나의 ‘화소’라고 정한다.
‘걷는다’는 것은 한 편을 작품을 통일성의 원리에 따라 전개시키는 일을 말한다. 글의 전개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물 흐르듯이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화소들을 배치하는 작업이다. 이를 보통 구성이라고 하는데, 글쓰기는 따지고 보면 한 편의 글을 이루고 있는 작은 이야기들을 얽어 구성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앞으로 ‘수필 쓰기의 실제’에서 제시하는 것은 작품의 구성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2) 수필 창작을 포함하여 모든 글쓰기는 사실 ‘한 발로 걷기’다. 길든 짧든, 한 개의 화소로 진행하든 여러 개의 화소로 진행하든, 모든 이야기들은 글 전체 하나에 수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한 편의 글에 사용되는 모든 언어적 운용은 단일한 주제를 형상화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글을 읽을 때도 그 작품에는 하나의 중심 주제가 있다가 전제한다.
그래서 좋은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통일성을 유지한다. 글을 쓰는 일은 시간의 경과를 요구한다. 순간적으로 이뤄지는 작업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글은 처음 의도하지 않았던 엉뚱한 길로 갈 때가 많다. 집필 전에 개요 짜기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방향틀로서 개요는 글의 통일성을 유지하게 하고 여러 화소의 균형적인 배치를 도와준다.
(3) 필자가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관해 알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글의 내용을 이룬다. 여기서 필자가 알고, 느끼고, 생각한 대상으로서 사건과 사물을 우리는 소재라고 한다. 역으로 소재를 통해 필자가 알고, 느끼고, 생각한 것이 바로 주제다. 그러니 글의 내용은 크게 소재와 주제 두 가지 측면에서 살필 수 있는데, 주제는 소재에 관한 필자의 관점에서 생성된다. 필자가 어떤 상황과 관점에서 소제를 관찰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주제를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소제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건일 수도 있고, 추상적인 개념이나 심리적인 정서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필자의 바깥에 있을 수도 있고 안에 있을 수도 있다. 장르의 특성상 수필의 소재는 수필가 자신이 어떤 통로로든 체험한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때 체험한 것은 그 내용이 작고 독립된 사물일 될 수도 있지만, 사건 즉 하나의 서사일 수도 있다. 후자가 수필의 소재로 많이 채택된다. 수필이 수필가 자신의 일상적인 삶의 체험에서 출발한다고 했을 때, 체험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여러 가지 요소의 결합에 의해 이뤄진다. 하나의 독립된 시간과 공간이라는 맥락이 배제된 채 사물로 존재하는 체험은 없다.
(4) 이런 점에서 볼 때, 수필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화제(사건, 체험, 서사) - 화제에 대한 해석(의미)>라 할 수 있다. 객관적인 성격의 화제와 그 화제에 대한 주관적인 필자의 해석은 따로 분리되기보다는 하나의 통합되어 제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건 속에 녹아 있는 해석이 최선이다. 문학 창작방법에서 말하는 ‘형상화’는 이를 가리킨다. 말하기보다는 보여주기가 문학적인 형상화에 가깝다. 그런데 ‘시’의 경우는 이런 생각이 매우 합당하지만, 산문의 경우, 즉 수필이나 소설의 경우는 설명적인 말하기 방식이 때에 따라 자주 요구된다. 여기서 수필창작방법으로 제시되는 <한 발로 걷기, 두 발로 걷기 ……> 는 바로 <화제- 의미>의 구조를 기본으로 전제하고 출발한다.
의미부여 부분에서는 화제의 의미를 직접 서술하는 것이 적절하다. 가끔 에둘러 설명하는 글도 있는데 그러면 오히려 의미가 모호하게 될 우려가 있다.
(5) 여기서 말하는 <한 발로 걷기>는 한 편의 작품에서 하나의 화제를 사용하는 경우를 지칭한 것이다. 대부분의 글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하지만 <한 발로 걷기>에도 여러 가지 구성 방법이 있을 수 있다.
◆ 1. 화제와 의미의 융합형
달팽이를 보고 있으면 걱정이 앞선다. 험한 세상 어찌 살까 싶어서다.
개미의 억센 턱도 없고 벌의 무서운 독침도 없다. 그렇다고 메뚜기나 방아깨비처럼 힘센 다리를 가진 것도 아니다. 집이라도 한 칸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다. 시늉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은 투명한 껍데기, 속까지 비치는 실핏줄이 소년의 목처럼 애처롭다.
달팽이는 뼈도 없다. 뼈가 없으니 힘이 없고 힘이 없으니 아무에게도 위협이 되지 못한다. 하물며 무슨 고집이 있으며 무슨 주장 같은 것이 있으랴. 그대로 ‘무골호인(無骨好人)’이다. 여리디여린 살 대신에 굳게 쥔 주먹을 기대해보지만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다.
그렇다고 감정마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민감하기로는 미모사보다 더하다. 사소한 자극에도 몸을 움츠리고 이마를 스치는 바람에도 고개를 숙인다. 비겁해서가 아니다. 예민해서요 수줍어서이다. 동물이라기보다 식물에 가깝다.
누구를 찾고 있는 것일까?
달팽이는 늘 긴 목을 받쳐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그의 이웃은 아무데도 없다. 소라, 고동, 우렁, 그리고 다슬기 같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이미 그의 이웃이 아니다. 아득히 먼 물나라의 시민들이다.
모든 생물이 다 그러하듯 달팽이의 고향도 바다였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먼 조상들 중 호기심이 많은 한 마리가 어느 날 처음 뭍으로 올라왔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물달팽이가 육지달팽이로 바뀌는 기구한 역사가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육지에 사는 달팽이의 목과 눈은 물달팽이의 그것보다 훨씬 가늘고 길다. 슬픔도 내림이라,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조상의 슬픔으로부터 그들은 자유로울 수가 없는 모양이다. 실향민의 후예, 달팽이는 늘 외로움을 탄다.
어디 좋은 친구 하나 없을까?
달팽이는 개구리에 다가가 본다. 개구리도 습지를 좋아하니 벗이 되어줄 법도 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크고 너무 빠르다.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다. 벌이나 개미는 어떨까? 부지런한 것은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배타적인 것이 좀 마음에 걸린다. 제 동족이 아니면 자기들이 먹이로 밖에 생각하지 않으니 말이다.
시인이 죽으면 나비가 된다는 말이 있다. 나비가 죽으면 무엇이 될까. 아니, 달팽이가 죽으면 무엇이 될까.
달팽이는 나비 곁으로 다가간다. 그냥 사귀기만이라도 했으면 싶다. 그러나 나비는 잠시도 한곳에 머물러 주지 않는다. 설사 머문다 해도 걱정이다. 어떤 때는 환희에 넘쳐 춤을 추다가도 금세 침울해져서는 두 날개를 접은 채 마른 나뭇잎처럼 조용하다. 그 엄청난 감정의 기복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아, 배추벌레하고 놀아야지.
달팽이는 그들 옆에서 잠시 외로움을 달래본다. 외모는 좀 그렇지만 벌처럼 시끄럽지도 않고 나비처럼 팔랑대지도 않아서 좋다. 한데 한 가지 안 된 것은 그들이 탐식가라는 사실이다. 옆에 가서 등을 대고 누워도 눈 한 번 거들떠보는 일이 없다. “나는 먹는다. 고로 존재한다.”는 식이다. 달팽이는 풀이 죽어서 돌아온다.
달팽이는 이빨도 없다. 그의 입은 먹기 위한 기관이라기보다 차라리 이목구비를 갖추기 위한 필요에서 생긴 것 같다.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뭐든 먹기는 먹는 모양인데 그런 순간을 거의 볼 수가 없다. 게다가 짝짓기를 하는 장면들도 들키지 않으니 말이다. 귀여운 금욕주의자, 이 모든 쾌락보다 더 절실한 어떤 문제가 있다는 말일까.
달팽이는 언제나 긴 목을 치켜들고 길을 떠난다. 현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어떤 비밀의 문이라도 찾고 있는 것일까. 방황하는 영혼, 고독한 산책자.
그러나 달팽이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쁨을 노래하지도 않고 슬픔을 울지도 않는다. 매미에게는 일곱 해 동안 침묵과 극기를 보상하고도 남을 이레 동안의 찬란한 절정의 순간이 주어지지만 달팽이에게는 그런 눈부신 순간이 없다. 그렇다고 종달새 같은 황홀한 비상의 기회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가시며 그루터기며 사금파리 같은 현실, 맨살로 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이 그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육체의 고통이 때로는 영혼의 해방을 가져온다고 믿는 어느 고행승과도 같은 그런 표정으로 그저 묵묵히 몸을 움직일 뿐이다.
오체투지(五體投地)의 말없는 순례, 지나간 자리마다 묻어나는 희고 끈끈한 자국들, 배설물일까. 낙서일까. 아니면 그들끼리만 통하는 상형문자일까. 끝내 판독되기를 거부하는 암호들.
여름도 다 끝나려는 어느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달팽이의 이상한 몸짓을 보았다. 억새풀의 제일 높은 끝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위태롭게 맺혀 있었다.
목은 길게 솟아올랐고, 조그만 입은 약간 벌어졌으며, 꽃의 수술 같은 두 개의 눈은 긴장되어 있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의 어떤 가수처럼, 나뭇가지를 떠나려는 순간의 새의 자세처럼 보였다. 가늘고 긴 목에서 벌레 소리 같은 어떤 슬픈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달팽이는 끝내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투명한 달빛이 조그만 몸을 비추고 있었다.
밀폐된 유리벽의 저편에서 키가 작은 남자가 울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손광성의 <달팽이>)
◆ 2. 화제와 의미의 분리형
① 나는 내 간이 큰 줄 알았다. 7년 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오지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지금 세계 곳곳의 긴급구호 현장을 다니면서 간이 많이 커진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얼마 전 금요일에 받은 전화 한 통에 간이 콩알 만 해졌다. 사연인즉, 정기종합건강진단 결과를 통보해 준다고 해서 전해했더니 담당이사가 면담을 해야겠다는 거였다. “일부러 보자는 것ㄹ 보니, 큰 탈이 났음이 분명해.”
② 그 순간부터 나는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펴고 온갖 나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요즘 암에 걸렸다는 사람들 얘기가 유난히 많이 들리던데 그게 무슨 진조인 것 같아 불기했다. 지난주에도 후두암으로 죽은 친구 오빠 문상을 다녀왔다.
③ 기가 막혔다. 이럴 때마다 나오는 오래된 버릇, 혼자서 또 다른 나와 말을 주고받는다. ‘만약 얼마 못 산다고 하면 억울해서 어쩌지.’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여태것 건강하고 재미있게 산 것에 감사해야지.’ ‘억울하지. 못 다 핀 꽃 한 송이지.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나 할 수 없네. 이제는 사는 날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다 가는 수밖에.’
④ 그러고는 아예 수첩을 꺼내 본격적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년 남았다면 직장은 그만두고 꼭 하고 싶었던 백두대간과 전 세계 6천m급 산들을 올라야지. 종횡무진 다닐 거다. 누워서 죽음을 맞을 수는 절대 없지. 6개월 남았다면 어떻게 할까. 긴급구호 현장으로 가야지. 될수록 최전선에. 3개월 남았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장근무 아이디어는 정말 좋다. 산사나이가 고스톱 하다가 죽고 싶을까? 산에서 죽고 싶을 거다. 전투기 조종사가 사우나 하다가 죽고 싶을까> 전투기 조종하다가 죽고 싶을 거자. 나도 마찬가지다. 죽기는 싫지만 죽어야 한다면 나 역시 현장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자가 죽고 싶다.
⑤ 딱 한 달 남았다면 책을 서야겠다. 전부터 꼭 쓰고 싶었던 ‘어린이 바람의 딸’, 한국이라는 새장에서 나와 세상이라는 넓은 창공으로 말아보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세상을 처음 만나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경쟁이나 학습의 대상이 아니라 어울려 살아야 할 친구이자 이웃이라는 사실을 일러주고 싶다. 더불어 이런 세상에서 살려면 마땅히 져야 활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도
⑥ 온갖 시나리오를 썼다 지우면서 기나긴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 담당의사는 위산과다에 간 기능이 약하니 조심하라며, 전화로 말하면 그냥 흘러들을 것 같아 직접 만나 당부하는 거란다.
⑦ 시한부 인생 해프닝은 이렇게 싱겁게 끝났지만 덕분에 예상치 않은 수확이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긴급구호활동, 산 , 그리고 책을 쓰고 권하는 일. 이게 현재의 내게는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그동안 머리로 생각하는 우선순위와 저 깊은 부의식 속의 우선순위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신기하다. 이 일들을 할 때 내가 가진 어떤 힘도 아끼지 않을 자신이 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질 자신도 있다. 나 좋아서 하는 일인데 세상에도 도움이 되니 다행이다. 이 일마고도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세사에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 살고 싶다.
⑧ 마음 졸이던 그 주말의 긴장이 가시지 않았는지. 어제 저녁 일기를 쓰면서 또 엉뚱한 상상을 했다. 만약 내게 남은 시간이 딱 하루라면 어떻게 할까.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산에 가서 아름다운 봄 산을 마음 가득 담아 올 거다. 저녁에는 일기장을 정리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동안 즐거웠다고 전화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아침 일찍 투표하러 갈 것이다. 거미줄도 모이면 사자를 묶는다고 했다. 거미줄보다 힘없는 내 한 표지만 새로운 역사와 세상을 펴는 데 그 힘을 보태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살았던 그런 세상을 그대로 넘겨 줄 수는 없지 않는가.
○ 건강진단 검사 후의 의심과 걱정 (1-3단락)
○ 미래에 대한 상상과 설계(4-5단락)
○ 의사의 통보 (6단락)
○ 건강진단 검사의 해프닝에 대한 의미(7-8단락)
1-6은 이야기의 서사적 흐름을 그대로 다르고 있는 화제고, 7-8은 의미다.
◆ 3. 액자형
부모들은 자식에게 매를 들거나 크게 야단을 치고 난 다음, 자신의 언행에 대해 대개 후회할 때가 많은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인 딸과 중학교 1학년의 아들을 두고 있는 나도 예외는 아니다. 아이들을 야단칠 때마다 성격이 급해서 그런지 늘 감정이 앞선다. 그러고 나서는 자라는 아이에게 왜 그런 말을 함부로 했을까, 그만 참을 걸, 아이가 마음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까,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가 많았다.
초등학교 육 학년 때의 일이다. 그 때 내 고집은 나 자신도 놀라울 정도였다. 나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부모님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며칠 전부터 열네 살짜리 막내아들을 설득했다.
나는 당시 고향에서 백 리나 떨어진 안동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 원서를 내어놓고 있었다.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모님 중에 한 분도 내가 시험 보러 가는 데 동행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같은 중학교에 원서를 낸 친구의 아버지를 따라가, 시험 볼 동안 친구의 친척집에 묵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시험 보는 곳에 함께 따라가 주지 않는 부모님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집을 떠나 며칠 동안 낯선 곳에서 보내야 한다는 점이 두렵고 불안했다. 버스도 타보고 도시 구경도 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부모님이 곁에 없다는 생각을 하니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시험 날짜가 다가올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을 넌지시 드러냈다. 시험 날이 임박해지면서 울면서 만약 부모님이 함께 가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설득을 거듭하면서 부모님의 인내심도 드디어 한계에 도달했다. 시험 보러 떠나기 바로 전 날 아버지는 들고 있던 소쿠리를 마당 한가운데로 냅다 던지며, ‘시험이고 뭐고 다 때려치워라’는 마지막 선언을 하고 말았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나는 아버지의 화난 목소리에 덜컥 겁이 났다. 정말로 시험 보러 보내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닥의 걱정과 아버지에 대한 야속함이 교차되는 가운데 서럽게 한참이나 울먹였다. 마당 끝에 웅크리고 앉아 나에게 등을 보인 채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던 아버지는 화난 모습으로 곧장 집 밖으로 나갔다. 사립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이제는 내 고집을 꺾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 날 아버지는 밤이 깊어서야 돌아오셨다. 잠결에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푸념과 아버지의 긴 한숨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자고 일어나니 아버지는 이른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마루 끝에는 내가 가지고 가야 할 짐 꾸러미 하나가 아주 단단하게 꾸려져 있었다. 그 짐 꾸러미에는 등에 질 수 있도록 칡덩굴을 반으로 쪼개어 만든 멜빵이 보였다. 아버지의 솜씨임을 금방 알았다. 쪼개진 칡덩굴의 하얀 속살이 아침 햇살에 더욱 선명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짐을 지고 갈 수 있도록 공들여 짐을 꾸린 아버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짐을 등에 지니 칡 멜빵이 내 어깨에 자로 잰 듯이 딱 들어맞았다. 아버지가 아니면 누구도 그런 멜빵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친구의 아버지를 따라 친구와 함께 안동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우리 집에서 풍산까지 오십 리 길을 걸었다. 12월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얼얼하도록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걸었다. 등 뒤에는 석 되의 쌀과 나의 일용품들을 싼 짐 꾸러미가 제법 무겁게 매달려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등짐의 무게가 더해 갔고 어깨가 조여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너무나 편했다. 등짐의 무게를 통해 아버지의 진정한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때려치워라’는 아버지의 화난 모습은 나로 하여금 그 먼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힘을 보태어 주었다.
나는 서럽게 울었다.
아니 울지 않았다. 아버지가 계속 내 등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때려치워라’는 아버지의 말이 본인 자신을 향한 분노였음을, 나도 자식을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칡 멜빵을 메면서 자신이 뱉은 그 말로 무척이나 가슴 아파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아마 자신의 가슴을 가르듯이 그 칡을 반으로 잘랐을 것이다.
부모는 언제나 자식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그로 인한 멍든 상처를 안고 사는 듯싶다.
오늘 따라 육십을 못 넘기고 삼십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무척 그리워진다.
(신재기의 <칡 멜빵>)
◆ 4. 기승전결형
① 내일은 절기로 일년 중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동짓날이다. 동지는 대설과 소한을 이어주는 중간에 위치한다. 겨울의 한복판에 기나긴 밤으로 표상되는 동지가 있으니, 겨울은 자연스럽게 밤의 이미지로 상상되곤 한다. 밤은 침묵과 잠의 시간이요 공간이다. 겨울은 침묵, 즉 소리의 부재 속에 흐르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소리 없음'은 있는 그대로의 현상만은 아니다. '소리 없음'은 '소리 있음'을 통해서만 감지될 수 있다. 침묵 너머에는 겨울만의 고유한 소리가 있다. 침묵이 겨울의 현상이라면, 침묵의 소리는 겨울의 의미이고 가치다.
② 겨울의 맛을 가장 잘 드러내는 소리는 아마 밤바람 소리일 것이다. 시인 정지용은 <향수>라는 시에서 "질화로의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라고 하였다. 깊은 겨울밤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마을 주위의 빈 밭을 지나는 바람 소리를 말들이 광야를 질주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지축을 흔드는 소리와 대지를 거침없이 쓸고 지나가는 모습이 함께 표현되고 있다. 바람은 원래 소리보다 시각적인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겨울 밤바람은 소리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 제 맛이다. 깊은 겨울밤 외부와 차단된 방안에서 잠의 문턱을 넘기 바로 직전에 대지를 질주하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그 바람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뒷산을 넘어 소나무 숲을 지나온 바람소리는 솔잎처럼 날카롭고 푸르다. 텅 빈 들판을 지나면서 땅 속에 묻혀 있는 무수한 신비의 꿈과 전설을 실어온다. 거기에는 굶주린 짐승들의 울부짖음과 천사의 노래가 공존한다. 겨울의 밤바람 소리는 어둠과 침묵의 자식이면서 배반자다. 그래서 그 소리는 '소리 있음'인 동시에 침묵이다. 바로 침묵의 소리다. 그것은 신비이고 꿈이고 영혼의 시원에 이르는 주술과 같은 것이다.
③ 겨울의 소리가 침묵의 소리라면, 그것은 뭐니뭐니해도 눈 오는 소리로 대표될 수 있다. 여름의 비오는 소리가 삶의 현실적인 모습을 확인시켜 준다면, 겨울의 눈 내리는 소리는 우리를 태고의 원시 속으로 회귀하도록 한다. 김광균은 그의 시 <설야>에서 한밤에 소리 없이 흩날리는 눈을 두고 "머언 곳의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고 하였다. 그리움과 관능의 결합이 절묘하다. 눈은 우리의 의식을 추억으로 향하게 한다. 추억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시키며 현재의 슬픔에 젖도록 한다. 그리움과 슬픔이 묻어 있기 때문에 눈 오는 소리는 은밀하다. 희미하게 들리면서도 언제나 나를 향해 다가오는 소리이기에 달콤하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내 앞에 이르러서는 아슬아슬하게 사라지고 만다. 그 뒤에는 작은 허무가 여운으로 남는다. 눈 내리는 소리는 침묵의 소리다. 그것은 그리움과 슬픔과 관능과 허무와 같은 몸의 근원적인 소리로 들린다.
④ 사람은 소리를 이용하여 말을 만들었고 음악을 창조했다. 소리를 인공적으로 의미화하고 아름답게 꾸민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위대한 창조물임에 틀림없으나, 삶의 근원적인 부분에 미치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서 금방 잦아지고 마는 경우도 허다하다. 마음을 울리지 못하는 소리는 소음일 수 있다. 무수한 말과 음악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지만, 내 영혼에 와 닿는 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다. 밤바람 소리와 눈 오는 소리와 같이, 침묵의 소리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시작하여 내 의식의 깊은 곳에 와 닿는다. 특히 원석(原石)에서 울리는 자연의 소리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우리의 영혼을 절대 자유의 공간으로 인도한다. 그러한 소리에서 영적이고 계시적인 힘을 느낀다.
⑤ 모든 존재는 자기만의 고유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저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존재의 근원적인 소리다. 바로 침묵의 소리다. 이를 듣는 것은 존재와 생명의 시원으로 찾아가는 상상의 여행이다. 침묵의 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의 울림이다. 그것을 듣기 위해서는 정신과 영혼의 귀를 열어야 한다. 이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면서 겨울이 들려주는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초라한 내 존재의 아득한 고향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신재기의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 기승전결
기 : 화제를 시작하는 부분
승 : 그것을 전개하는 부분
전 : 내용을 전환하는 부분
결 : 결론적 주제로 글을 맺는 부분
*이 글은 2007년 4월 13일 대구수필문예대학 에서 강의한 노트입니다.
|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개강때 수업시간에 다시 자세히 알려 주세요. 그래야 잊지않고 잘 입력이 ...ㅎㅎㅎ 항상 수고 많으십니다.
아래 그분 .. 초청강사분 글이 많으네요. 시간 많을때 자세히 읽어 볼게요. 올려 주셔서 감사감사.
훌륭하신 분의 강의는 듣고 또 들어도 유익하지요. 자세한 자료를 읽으면 한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수고했어요. 잘 보고 가요.
맞아요. 듣고 듣고 또 들어도 유익한 것을 놓치면 안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