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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04
8월3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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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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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SV3b9ZiVcQo&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3&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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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웃의 어깨에 날개를>
오래전 경미한 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사고 여파로 잠깐 의식을 잃었더랬지요. 깨어보니 응급실이었습니다. 머리가 쪼개지는 듯이 아팠습니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고, 또 제 몸 이곳저곳도 살펴봤는데,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제 입에는 호스가 끼어있었는데, 식도를 통해 위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다 산소마스크가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양팔에는 링거병이 각각 하나씩 달려있었습니다.
평소 몸에 뭐든 다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해 시계나 반지도 끼지 않던 저였는데, 호스며 산소마스크며 링거병이며 주렁주렁 매달려있으니, 정말 답답해 죽을 맛이었습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간호사 선생님은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며 경고를 줬습니다.
한 이틀 그렇게 답답하게 지냈는데, 정말 생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다행히 사흘째 되는 날 상태가 호전되어 그 모든 장치들을 떼어낼 수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해방감이란 정말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억압으로 해방된다는 것, 부자유스러움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 사슬을 끊는다는 것, 종살이에서 풀려난다는 것, 감옥에서 출옥한다는 것, 그것은 곧 또 다른 천국체험입니다. 또 다른 출애굽입니다. 또 다른 탄생의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명백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 그분의 존재, 그분의 정체성, 그분의 실존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해방자’입니다.그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 가운데 정말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분은 우리 영혼이 치렁치렁 달고 다니던 죄의 사슬을 끊어주신 해방자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힘겹게 지고 다니던 멍에를 끌러주신 해방자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해방자셨습니다. 그분은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인권, 인권 부르짖는데, 인권이란 무엇입니까? 한 인간이 자유로울 권리가 인권입니다. 한 인간이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권입니다. 한 인간이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권입니다.
참된 해방감, 그것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내 마음이 편해지는 동시에 상대방도 무장해제를 하지요. 그렇게 될 때 상대방의 내면이 들여다보입니다. 그가 아픈지, 혹은 슬픈지, 그가 기쁜지 혹은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나’의 치부가 보이고 부끄러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나를 여는 작업과 더불어 내 부끄러움을 던져버릴 수 있고, 마침내 열린 마음과 창을 통해 우리는 고통과 근심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왕권은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작은 사랑의 실천들이 모여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되어 갑니다.
병고나 죄, 고통의 사슬에 묶인 이들에게 해방의 기쁨을 맛보게 해줌을 통해서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조금씩 완성되어 갑니다.
부당하게 갇혀있는 이웃, 억울하게 묶여있는 이웃, 사랑의 결핍으로 울고 있는 이웃들을 외면하는 세상은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이웃이 좀 더 성장하도록, 이웃이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록, 이웃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다는 것은 그를 놓아주는 것,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것, 그를 다양한 유형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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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왕이 '된' 사람은 모든 이를 왕으로 대한다.>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03nUoQWWJ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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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요즘 인종차별에 관한 기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5월 흑인 남성의 체포 과정 중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조지 플로이드가 질식사하였고, 며칠 전에는 세 아이가 보는 앞에서 제이컵 블레이크가 경찰이 쏜 총 7발을 맞고 하반신이 마비되었습니다. 블레이크는 비무장 상태였고 싸움을 한 것이 아니라 싸움을 말리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제가 유학할 때도 유럽인들에게 인종차별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중국 사람이라고 하면서 차별을 할 때는 기분이 더 나빴습니다. 그러며 ‘나도 중국 사람을 차별하는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월드컵에서 한국이 이탈리아를 이겼을 때는 정말 조심해야 했습니다. 독일에 갔을 때는 어떤 사람이 어깨로 일부러 치면서 하이! 히틀러!를 외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랐던 것은 한국 사람들도 인종차별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끼리 흑인을 지칭할 때는 ‘검둥이’, 혹은 ‘연탄’이라고 했습니다. 반면 백인들을 대할 때는 자세가 아주 달랐습니다. 이런 인종차별은 어떠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어떤 필리핀 사람이 부자 동네 벽에다 인종차별을 하지 말라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마을 주민 부부가 이렇게 묻습니다.
“여기가 당신 집인가요?”
필리핀 남성은 그건 왜 묻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사유 재산이거든요.”
부부는 화장품 회사의 경영자였습니다. 그리고 낙서를 하는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부촌 퍼시픽 하이츠였습니다. 한 필리핀 남성이 자신의 자랑스러운 동네 벽에다 그런 낙서를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낙서하든 뭘 하든 당신 맘인데 여기에 이렇게 하는 건 안 돼요.”
필리핀 남성이 말합니다.
“만약 내가 여기에 살거나, 이것이 나의 사유 재산이라면 문제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내가 여기 살거나 여기가 내 사유 재산인지 당신은 모르고요. 당신들이 여기에 살고 있군요, 그렇죠?”
여자가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렇진 않지만, 여기에 누가 사는지 알기 때문이에요.”
상당히 부잣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필리핀 남성이 말합니다.
“그럼, 여기 사는 사람한테 전화하든가 경찰한테 신고하세요. 당신이 나를 범죄자 취급하니까요.”
그러자 여자는 진짜로 경찰에 신고하였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왔다가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그냥 갑니다. 벽에 글씨를 쓰고 있던 남자는 그 집에서 18년째 살고 있던 필리핀 출신 제임스 후아닐로 씨였습니다. 그리고 인종차별 반대 움직임에 동참하고자 자신의 집 담벼락에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글을 쓴 것입니다.
백인 부자 동네에 아시아계 황인종이 살지 않을 것이란 선입견 때문에 이런 해프닝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라페이스라는 소규모 화장품 회사 CEO였던 리사 알렉산더는 ‘인종차별’이라는 거센 비난에 회사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도 닫아야 했습니다.
차별의 원인은 ‘선입견’입니다. 그런데 그 선입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교만함’에서 옵니다. 자신이 그러한 위치에 있는 것은 그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백인으로 태어난 것이, 한국에 태어난 것이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일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 나자렛에서 박해를 받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30년 동안 보아오던 예수님께서 메시아일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 선입견은 그들의 생각이 옳다는 교만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에겐 이 교만을 꺾을 수 있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교만은 자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에서 나오기에 믿음만이 치료약입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에서 광해는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광대를 왕으로 앉힙니다. 광해는 그동안 사람들을 깔보는 권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양귀비에 중독되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천민인 하선은 오랜 시간 왕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하다 보니 자신이 정말 왕처럼 느껴졌습니다. 왕이 된 천민 출신 하선은 억울하게 갇혀 있는 사람이나 빚에 팔려서 무수리가 된 사람들에게 다정히 대해줍니다. 그런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 같은 사람도 왕이 될 수 있다면, 당신들도 왕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왕이었던 사람은 자신이 그럴 자격이나 있어서 그렇게 된 줄 압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가질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사람도 귀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유는 잘나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차별과 편견은 교만에서 오는 것이고 그 교만은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열등감에서 옵니다. 열등감이 자존심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교만입니다. 참다운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모든 사람 안에서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을 보고 존중합니다.
마더 데레사는 “목마르다”라고 말하는 한 노숙자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도 믿기만 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상 누구도 믿기만 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왕이 되었다면 누구에게 자랑하거나 누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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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4,16-30 :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구원 시대가 지금 당신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명시한 이사 61,1을 읽기 위해 나자렛 회당에 오셨다. 예수님께서 전도를 시작하시며 하신 첫 발언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한, 삼위일체적 구원 계획에 대한 언급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 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8-19절)
이 말씀은 이사 61,1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또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예수님의 생애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성서 말씀을 읽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고 하셨다. 그 순간 그분의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그들을 가장 먼저 축복하셨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 하면서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글을 읽는 것을 보고 신기해 주시하지만, 은총의 말씀에 놀라면서도 그 말씀을 하찮게 여겼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왜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는지 엘리야가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준 이야기를 들어 설명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여 치유받을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나자렛 사람들은 이 말씀에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그들은 주님을 고을 밖으로 내 몰았다. 그들의 난폭함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질투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주님을 산 위 벼랑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밀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아직 수난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했는데 신앙의 눈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눈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예수께서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일생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가? 우리의 정신, 주어진 시간, 가진 능력을 무엇을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가 예수님처럼은 다 못하더라도 우리의 처지에서 내 능력껏 찾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이들 앞에 작은 구세주, 제2의 구원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항상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을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도록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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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바빌론 유배 이후 예루살렘 성전을 잃은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제사를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소의 거룩함 대신 시간의 거룩함을 선택하여 ‘안식일’을 중요시하였고, 하느님 말씀을 바탕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회당’을 세웁니다. 간소하였던 회당 전례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회중 모두 일어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한 뒤 율법서를 봉독합니다. 유다인들의 신앙 고백인 ‘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5 참조)를 낭송한 뒤 시편과 ‘18조 기도문’(2마카 1,24-25 참조)을 바칩니다. 이어서 독서자(히브리어로 ‘마기드’)가 율법서를 봉독하고 설교한 다음, 또 다른 독서자(히브리어로 ‘마프티르’)가 예언서를 읽고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회당 전례는 회당장의 축복문(민수 6,24-26 참조) 낭송으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회당 전례에 참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독서자(마프티르)가 되시어 이사야 예언서를 봉독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어서 설교를 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문제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이 누구의 아들이신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특히 오직 메시아에게만 주어진 ‘눈먼 이들이 다시 보게 되는 일’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다는 말에 화가 잔뜩 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고 맙니다.
주님의 영이 내린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그분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도 성령의 힘이 내려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기에 앞서, 그 말씀의 신비를 깨우칠 수 있는 성령의 힘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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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만으로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바람과 파도를 고요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라고 말씀하시면(루카 5,20), 그 사람은 곧바로 용서를 받은 상태가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루카 23,43), 그 사람은 그날 중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먼 훗날에나 이루어질 일에 관한 소식도 아니고, 어디 먼 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관한 소식도 아니고, ‘지금, 이곳에서 시작된’ 일에 관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신 순간, 하느님 나라와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예언을 읽으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신 일이고, 메시아로서 온 세상에 해방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 그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기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선포는 말로만 그치는 선포가 아니라, 선포하는 순간 인간 세상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말씀을 전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시작되었고, 또 예수님께서 해방을 선포하심으로써 우리의 해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시작되었고,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선포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구원(해방)되었다.<내가 너희를 구원(해방)하였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분이고, 온갖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과 해방은 이미 시작되었는데, 그 구원과 해방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자동적으로 우리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과 해방을 받아서 우리 것으로 만드는 노력입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만 생각하고서 예수님을 안 믿었고, 예수님의 복음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자렛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구원과 해방의 열쇠를 주셨는데도, 받아야 할 열쇠는 보지 않고, 그 열쇠를 주신 분의 옷차림과 외모만 보고 의심하면서 안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구원과 해방을 거부한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로마제국 황제의 아들로 오셨다면, 또는 예루살렘 대사제의 아들로 오셨다면,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제국 황제라는, 또는 예루살렘 대사제라는 배경을 믿은 것일 뿐이고, 진정한 믿음은 아닙니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루카 4,23)
아마도 나자렛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 기적을 일으켜 보라고 요구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는 마음 없이, 기적을 통해서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일으키면 믿겠다고 말했을 텐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셔도 트집을 잡으면서 다른 요구를 또 했을 것입니다. (기적은 믿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은총이지,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이 말씀은, “하느님을 안 믿던 이방인들도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나를 믿기 시작했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가?”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환영’이라는 말은,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신 것은 환영받기를 바라셔서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언급하신 것은(26-27절),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특권의식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자만심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특권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선택된 민족이라면 선택된 민족답게 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29절) 예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부정하는 말씀도 아니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충실한 신앙인들은 회개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더욱더 겸손하게 회개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나에게는 죄가 없다.” 라고 주장하면서 화를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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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 12월에 LA엘 다녀왔습니다. 여행사와 함께 ‘멕시코 청년 봉사활동’을 추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여행사는 구체적인 일정을 기획하고, 신문사는 홍보를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멕시코에서 선교하는 신부님과도 협의를 하였습니다. 청년들은 노력봉사도 하고, 영어도 가르치기로 했었습니다. 아쉽게도 코로나19로 모든 일정은 취소가 되었습니다. 당시 오랫동안 한국학교에서 봉사하셨던 형제님을 만났고, 형제님께서는 순례 중에 쓰신 ‘산티아고 순례길 따라 2,000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행을 좋아하시고, 통일에 대한 관심도 많으시고, 시인이신 형제님이십니다. 산티아고 순례를 가지는 못했지만 형제님의 글을 통해서 순례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형제님께서 문단에 내신 시(詩)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산이 좋아, 나는 길 따라 올라가는데
물은 산을 버리고 떠나는구나.
한세월 더불어 살다보면 싫증날 때도 있겠지
버리고 떠나는 저 길이 그리움의 시작인 줄을
세상 내려가 살다보면
산 만한 친구도 없다는 것을
촐랑거리며 흐르는 저 물이 알기나 할까?
산이 좋아 오늘도
나는 산길을 올라가는데”
형제님의 글은 신문에 나왔다고 합니다. 어느 날, 형제님에게 메일이 한 통 왔다고 합니다. 감사의 글이었다고 합니다. 남편과 갈등이 심해서 헤어지려고 했는데 신문에 나온 시를 읽었고, 남편과 계속 살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말썽을 부리고, 불평과 불만이 많은 자녀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도 나중에 너 같은 자식을 낳아 보면 지금 내 심정을 이해할거다.’ 물의 속성이 늘 어딘가로 흐르는 것이듯이,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도 늘 어딘가를 향하여 나가려고 합니다. 영어의 ‘Animal’을 우리는 동물(動物)이라고 부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고,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물이 산에서 흘러나왔듯이,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알고, 언젠가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도 흘러간다고 표현합니다. 과거의 나는 오늘의 내가 되었고, 지금 내가 걸어가는 길이 미래 나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채워 넣은 것이 국가이면 역사가 됩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채워 넣은 것이 신앙이면 교회사가 됩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채워 넣은 것이 나의 삶이면 그것이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서산대사는 이렇게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눈 덮인 길을 걸어가거든,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말라. 지금 너의 발걸음이 뒷사람들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흐르는 시간 속에 ‘성공, 명예, 재물, 권력’을 채우려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흐르는 시간 속에 ‘나눔, 희생, 겸손, 친절’을 채우려고 할 것입니다. 2020년 8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저도 한국을 떠나온 지 1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채우려고 하기보다는 제가 원하는 것을 채우려 한 적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이지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새롭게 신발 끈을 매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순교자의 달, 9월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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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가리라>
루카 4,16-30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대신 가야할 이를 찾는
불안하고 초조한
눈빛을 거두고
다부진 각오로
보잘것없는 나를 채워
힘차게 당당하게
나는 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부르심을 받아
떨리는 굳센 응답으로
내딛는 벅찬 첫걸음에
부르시어
보내시는 분의 뜻이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하니
나는 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가다가
이내 쓰러질지라도
다시 일어나
가로막는 이들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두려움 없이 거침없이
나는 가리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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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예수께서는 “너희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하는 속담을 들어 나더러 카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하시고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3-24) 사랑하는 예수님, 당신은 고향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권력자가 되거나 재벌이 되어서 금의환향 하지 않았습니다.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운 하느님의 말씀(히브리 4,12)을 가슴에 품고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당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되고,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이 되며,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는’(이사야 61,1-2)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가장 잘 알고, 가장 가깝게 지내던 이웃들이 당신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환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사람들에게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예언자 엘리야의 말씀에 순종했던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삼 년 반 동안이나 계속된 기근 속에서도 살아남았습니다.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도 예언자 엘리사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고 나병으로부터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습니다.
요르단 강물이 영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나아만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나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사렙다 마을의 과부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방인들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따위의 인연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은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열린 가슴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구원과 행복을 보장해줍니다.
예수님, 성직자나 수도자 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말씀이신(요한1,1) 당신께 온전히 귀의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구원을 보장합니다.
오늘도 마리아처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하고 응답하는 하루가 되도록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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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모든 복음서가 다 전해져야 할 복음서이고 또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있지만 특히 루카 복음서 전체는 복음 선포자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즉 복음을 어떻게 전하는지, 무엇을 전하는 것인지, 누구에게 전하는 것인지 등 복음 선포자의 자세와 사명을 중점적으로 전해주는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이사야 두루마리를 펴시고 거기에 적혀있는 말씀을 읽고 자리에 앉으시자 사람들이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성서를 펴서 읽을 때마다 어떤 마음으로 읽는가? 나에게도 성서의 말씀이 "은총의 말씀"으로 다가오는가? 나도 성서를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은 "은총의 말씀"이라고 하며 놀라워하는가? 그렇다. 성서의 말씀은 매번 읽을 때마다 은총의 말씀이요, 은혜를 주는 말씀이요, 하느님이 나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다.
왜 은총의 말씀이라고 하는가? 성서를 읽을 때마다 내 마음이 기뻐지고, 묶여 있던 것들에게서 해방되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는 눈이 뜨이고, 억압받고 있던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보내어 자유로움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성서를 읽을 때마다 이런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다. 아니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마다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한다.
언제 이 은혜를 받는가?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 은혜는 내일도 아니고 앞으로 받을 것도 아니고 바로 오늘 말씀을 듣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기는 바로 이런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처럼 말씀이 이루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대가 아니라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듣는 이 가운데에서 이루워지는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1, 15)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나라가 와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2000년전 나자렛에서 완성된 말씀은 그 때부터 완성된 말씀으로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곳에서 어디에서든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면, 듣고 받아들인 그 사람에게 말씀이 가져다 주는 은총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선포되는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다. 즉 성모님처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워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받아들이고 생활하는 것이다.
보라, 성모님은 당신이 말씀하신대로 받아들이고 순명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고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으며 "여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이라고 부르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 은총의 어머니가 되시지 않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점은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이다.
성서는 바로 오늘의 이야기이고 오늘 완성되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서를 읽는 사람에게 있어서 말씀은 들은 말씀대로 오늘 완성되어야 한다. 말씀이 완성될 때가 바로 오늘이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바로 오늘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미래에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들은 말씀 그 자체는 오늘 이루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말씀이다. 다만 그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만, 그것도 말씀을 듣는 자세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읽을 때 과거의 이야기로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지도 모르는 이야기로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한번도 말씀이 내 안에서 오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읽는 말씀은 바로 오늘 나에게 말씀대로 이루워지게 하는 은총의 말씀이라는 믿음으로 읽고 들어야 한다. 아무리 놀라운 은총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은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총의 말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를 펼칠 때마다 은총의 말씀, 은혜를 받게 하는 말씀이라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아마도 말씀이 은총의 말씀으로 느껴지고 받아들이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읽고 들은 말씀이 그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아직 내 안에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거나 아니면 오늘 이루어질 수 없는 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읽은 말씀이 어떻게 하면 은총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그분의 말씀을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 95,7)고 말씀하신 대로 나의 마음이 말씀 앞에서 활짝 열려져 있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닫혀져 있으면 안 된다. 귀, 눈, 지성 등 나의 존재 전부가 말씀 앞에서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라고 하였듯이 우리의 모든 인격이 열려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말씀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나의 존재 자체가 모두 눈이 되어야 하고 온통 귀가 되어야 한다.
영성적이라 할 수 있는 나의 존재의 모든 모공이 열려 있어야 한다. 온 대양을 흡수하기 위해서 열려 있는 스펀지의 모공처럼 말이다.
우리의 영적 감각이 모두 열려 있을 때 오늘 내가 읽은 말씀이 내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어려운 주문인가?
말씀이 오늘 내 안에서 은총의 말씀으로 다가왔을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반응은 무엇인가?
놀라움이다. 즉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놀란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바로 은총임을 깨닫게 된다. 그때부터 말씀은 진 꿀보다 더 달기 시작한다. 즉 비로소 말씀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말씀을 은총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은혜를 전한다는 것이다. 은혜는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전할 수 있다. 은혜 없이 전하는 모든 말씀은 공허할 뿐이다. 또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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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말할 입도, 들을 귀도>
“내가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매일 강론을 하고 강의를 하는 사람에게 이 말은 참으로 가볍게 들어 넘길 수 없는 말씀입니다. 자칫하면, 그리고 실제로 많은 경우 하느님의 신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 자기의 주장을 펼치고 자기의 유식함과 지혜로움을 펼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신부 되고 처음 본당에 나가 미사를 드릴 때 저는 나름대로 강론 준비를 많이 하고 당시에는 평일 미사 강론을 보통 하지 않을 때인데도 저는 매일 미사 강론을 하였습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주일,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신자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는데 그날따라 많은 분들이 오늘 강론 참 좋았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역시 열심히 준비를 하였더니 반응이 좋구나 하고 속으로 흐뭇해했습니다.
마지막 분도 마찬가지 인사를 하기에 어떤 점이 좋았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인 즉 이러이러한 내용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애써 얘기하고자 한 얘기가 아닌데.. 미리 생각하고 준비한 것도 아니고 지나가다 한 얘기인데...
그때 깨달았습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저를 도구로 하여 말씀하시는 것이지 제가 잘 나서 제가 좋은 말을 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말,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도 비슷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오로는 지금 편지를 쓰는 코린토로 가기 전에 그리스 수도인 아테네에서 선교를 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그리스 철학자들과 토론도 하고 철학적인 말로 아레오파고스에서 그 유명한 설교도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명 설교요 제가 좋아하는 설교이지만)
그런데 그때의 반응은 시큰둥한 것이었습니다.
“저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이방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군.”(사도 17,16-34)
이때의 실패 때문에 코린토에 갔을 때는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전하려 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며 성령에 의지하여 선포를 합니다.
말할 입을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고 들을 귀를 주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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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사람이 몸이 너무 아파서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갔습니다. 이곳의 한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진찰을 받고 처방전을 받아 그대로 하면 어떤 병이든 낫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이 사람 역시 이 의원을 찾아가 진찰을 받았고 처방전을 받았습니다. 이 처방전에는 몇 가지 열매와 허브, 그리고 플레인 요구르트가 적혀 있었습니다. 위장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진단해서 낸 처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환자는 처방전에 적혀 있는 것을 따라 먹은 것이 아니라, 골방에 들어가서 계속 처방전만 꼼꼼하게 읽기만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병이 더 심각해져서 용하다는 이 한의사도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의 병이 낫는 방법은 그저 처방전만 읽는 것이 아니라, 처방전을 따라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성경만 읽는다고 주님과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을까요? 그저 성당에 나가서 미사에 참석하면서 미사를 주례하는 신부님 얼굴만 본다고 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릴까요?
이런 식으로 보기만 해서는 그 어떤 변화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 되어서 우리 구원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그 말씀을 따라야 하고,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저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에 가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다 함께 기뻐할 일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순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말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오히려 주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고, 고향 사람들은 어떤 하느님의 은총도 체험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그저 예수님을 보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쫓아내면서 자기들에게 다가온 은총 자체를 걷어차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혹시 보고만 있으면서 주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은총을 나의 것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주님의 은총 속에 사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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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있는 말>
거짓말하는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양을 치다가 지루해서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정작 늑대가 나타나서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외쳤을 때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이 아이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계속된 거짓말에 이제 진정성을 느낄 수 없었고 결국 아무도 듣지 않는 힘없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실한 말을 사용하는 것은 내 말에 힘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때로는 거짓된 말로 진정성을 없애고 결국 힘없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주님의 말에는 힘이 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바로 진실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역시 진실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진정성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내 욕심을 채우는 기도를 통해서는 주님께 실망만 드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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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여정>
-끊임없는 주님과의 만남-
아침 성무일도시 아름다운 찬미가 2-3절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주님은 이세상의 참된 새벽별/그빛은 다가오는 태양알리니
주님은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잗다란 아침 별빛 아니오이다
밝기는 태양보다 더하옵시고/주야로 한낮같이 빛나시오니
우리맘 깊은 곳도 밝혀 주시고/은밀한 생각까지 알고계시네.”
밤 일찍 일어나 문밖을 나서니 찬 바람이 스치듯 지나가고 요즘 몇해동안 듣지 못했던 청아淸雅한 풀벌레 소리들을 듣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바라본 맑은 별빛 가득한 하늘이었습니다. 아, 가을이 온 것입니다. 코로나19사태로 사람들이 좀 조용해 지니 자연이, 지구가 살아난 듯합니다. 내일부터는 9월 순교자 성월로 본격적 기도의 계절로 진입합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참으로 주님과 깊이의 만남을 추구할 때입니다. 새벽 인터넷 뉴스중 정은경 방대본부장의 국민을 향한 간절한 호소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코로나19 시대에 연대하는 방법은 모두가 흩어지는 것이며 사람 간 거리를 두는 것이다. 사람 간의 접촉을 줄이는 것 이외에 지금의 유행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심정으로 앞으로 한주 간은 단단한 연대와 협력으로 모임 자제와 거리두기 참여를 통해 지금의 위기국면을 전환하는 데 함께 해주실 것을 요청드린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와는 정반대 현실입니다. ‘모이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역설적 코로나19시대입니다. 흩어짐의 고독의 깊이와 함께 하는 연대입니다. 그러니 종파를 초월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삶의 깊이를 추구하며 마음으로의 연대에 힘써야 할 때입니다. 삶의 깊이를 상실해 가는 시대, 참으로 내적, 영적 삶의 깊이를 회복해야 할 절호絶好의 시절입니다. 반가운 카톡 메시지 둘을 소개합니다.
“당분간 집에만 계세요.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최대한 집콕입니다.”
“신부님, 세상이 참 어수선합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누리던 것들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래도 믿음이 있어 삼망에 빠지지 않고 하루하루 인내를 배우며 기쁘게 살고자 노력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건강하세요.”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三望이 아닌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三感의 삶을, ‘상쾌, 유쾌, 통쾌’의 삼쾌三快의 삶을, ‘진실, 성실, 절실’의 삼실三實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진선미眞善美의 삶을 추구하고 살아야 합니다. 답은 참으로 좋으신 분,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개안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날로 삶의 깊이를 더해가는 길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는 예수님’을 만나고, 제1독서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바오로’를 만납니다. 두 분 다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을 만나 눈이 활짝 열린 분들입니다. 광야피정중 참으로 홀로의 고독중에 삶의 깊이에서 하느님과 세상에 연대하셨던 예수님의 진가가 오늘 복음에서 환히 드러납니다.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라는 말마디에서 한결같이 평범한 영적 삶의 일과에 충실하셨던 정주定住의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통해 눈이 활짝 열려 자신의 신원을 깨달은 주님이십니다. 흡사 예수님의 출사표出師表처럼, 오도송悟道頌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는 모두가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복음의 진수입니다. 예수님의 전 삶을 요약합니다. 이런 예수님과 함께하는 ‘개안의 여정’중의 복된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개안의 여정중에 삶은 나날이 깊어지고 심화되는 깨달음과 더불어 눈은 나날이 밝어져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비로소 무지의 치유에 무지로부터 해방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는 주님의 은총의 말씀에 저절로 경탄敬歎하게 됩니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편견의 무지로 반신반의하지만 우리는 전폭적으로 주님을 믿습니다. 무지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 위해를 가하지만 예수님의 행보는 자유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표표漂漂히 떠나는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대자유인, 참 멋진 예수님이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을 찾는 이들과 개안의 여정을 함께 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오늘의 우리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이 키워드입니다. 코로나19를 퇴치할 궁극의 힘도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이에 앞서 우리 모두의 기도가, 협력과 연대가 필수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과 만남을 통한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이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세상 모든 이들과 주님 안에서 하나로 연대하여 날마다 기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남양주시 불암산 기슭에 위치한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수도 가족들입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제가 당신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온종일 그 가르침을 묵상하나이다.”(시편31,20;119,9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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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혼을 내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게 여의치 않자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아닌 척하면서 자기 뜻을 관철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쓴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오히려 자기발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눌러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남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게 우리를 지배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좋게 생각했습니다.(사도10,38) 그가 하는 말씀이 진리요, 은총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려지면서 그 권위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은총의 보유자이시고 권위를 가지고 계셨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은 주어진 은총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는 게 병’입니다. 사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얻게 됩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시라는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미에 맞는 표징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자로 단죄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육받은 편견대로 판단하며 자기들 식으로 구원을 상상하였습니다. 고은 시인이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통찰한 것처럼 힘이 빠지고 내 것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고 그러다가 의심하며 심지어 예수가 밥 먹여 주냐?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기대가 자기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혼란을 겪으며‘다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루카 4,30)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결국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지 않고 주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같지 않습니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 그분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를 바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시고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내 생각과 욕구에 맞지 않으면 내 것을 바꾸어야지 주님께 바꾸라고 떼를 쓰고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너 죽을래!’'살려면 내 입맛에 맞춰!' 하고 구박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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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공생활이 요약되어 나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 4,18)
예수님의 공생활은 성령과 함께 시작합니다. 세례 때 성령께서 그분께 내리셨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지요. 예수님은 기름부음받은이, 메시아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아버지에게서 파견된 참 그리스도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께서 봉독하신 이사야서의 대목(이사 61,1-2)은 억압받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는 주님의 목소리입니다. 이는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이나 50년째 해인 희년에 종들을 자유롭게 내보내라는 주님의 명을 근거로 하지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자유와 해방의 주체이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말씀이신 분의 입을 통해 그 말씀이 발설되어 다양한 억압과 빈곤과 장애의 고통을 겪고 있는 청중의 귀로 들어가 마음에 스며들면서 이루어집니다. 말씀이 실현되고 완성되는 것이지요. 나자렛 회당에서 울려퍼진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 즉 그분 사명의 청사진과 같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간적 계보를 너무 잘 알아서 걸려 넘어집니다. 기적과 자비를 베푸시는 예수님께 출신과 권한을 따져 묻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미리 비추는 듯합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 닥칠 미래를 암시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게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그러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가십니다. 한 번 피한다고 수난과 죽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나, 예수님께는 앞으로 채워나가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복음 선포자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의 말과 복음 선포는 ...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4)
바오로 역시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합니다. 그의 사도직분은 언변이나 인간적 출신 성분,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영감과 도움으로 지탱됩니다. 사도로서 그의 출발이 인간적 조건이 아니라 "성령의 힘"이었기에, 열두 제자에 속하지도 않는데다 예수님 추종자들을 박해하는 자였으면서도 주님께서 부여해 주신 소명을 꿋꿋이 펼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코린 2,5)
그래서 사도는 우리에게 당당히 요구합니다. 믿음이 출신과 지혜, 신분 등 인간적 조건과 자격에 기인하게 되면 역시 인간적 조건 때문에 쉽게 무너지고 약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적 논리와 인과관계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힘을 믿을 때에는 실패와 업신여김과 모욕과 죽음까지도 견딜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 신비를 우리는 믿음이라 부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복음 속에서 한눈에 조망된 예수님의 삶과 사명은 사도 바오로나 다른 제자들, 우리들의 그것과 별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길에 들어선 주님의 동반자들이니까요.
주님의 길에서 저마다 고유한 소명을 살아가면서 너무 인간적 시각으로 주님을 가늠하고 재단하게 되면 나자렛 주민들처럼 자기 오류와 모순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우리에게 영감을 주시고 마음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는 성령의 힘을 믿고, 자격도 조건도 안 되는데 불러주신 하느님의 힘을 믿으며, 온갖 어려움과 죄악과 나약함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예수님과 함께 뚜벅뚜벅 나아갑시다. 예수님과 사도 바오로에게 내렸던 그 주님의 영이 벗님에게도 충만히 내리시길 축원합니다.
8월 한 달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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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수난이나 귀양살이일까요?
인생을 귀양살이라 비유하면 모든 인간이란 죄인이 되고, 하느님은 인간에게 귀양살이라는 벌을 내리는 심판자자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면 모든 것을 자비로움으로 받아 주시는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어서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의 인생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며, 내가 가진 인생관에 의해서 내 마음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내 행복은 오로지 큰돈을 버는 것인가, 그러면 돈 벌 때만 행복하고 그렇지 못할 때면 늘 불행합니다. 인생의 행복이 자식 잘 키우고, 공부 잘하고, 착할 때는 행복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자신마저 망가집니다.
내가 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좀 더 고차원적인 인생관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은 인생을 ‘배움의 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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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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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고 갈릴래아로 와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이 자란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면서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 희년선포는 ‘에덴’의 회복, 곧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래의 신원인 하느님의 자녀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곧 해방을 실현하십니다.
그것은 단지 빚진 이가 탕감 받거나 눈먼 이가 보게 되거나, 혹은 억압과 묶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가난한 이가 기쁜 소식을 듣거나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인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 자유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가보다, 무엇에로의 해방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해방이 선포되고 빛이 왔건만,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던 것만이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강제로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또한 원하시면 빠져나가십니다(요한 18,7-8). 원하지 않으실 때는 잡혀가지 않으시고, 당신이 원하실 때에는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한편,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습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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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주님,
제가 들은 말씀이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 말씀이 저를 찌르고 고통스럽게 하더라도 말씀을 이루소서.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와 굳은 심장을 녹이소서.
이기심과 자애심에 묶인 저를 해방하소서.
제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들은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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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제목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8.31)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루카4,29)
<하느님의 고통!>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오셨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지금 코로나로 인해 또 다시 미사가 중단된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체를 받아 모시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이 멈춤이 우리에게, 특히 믿는 이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나)의 고통 말고, 하느님의 고통, 예수님의 고통, 성령님의 고통을 바라보라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미사 중단의 고통과 이로 인해 신자들이 당신의 몸을 받아 모시지 못하는 고통일까?
아니면 당신의 몸을 받아 모시고도 내 뜻대로 살아가는 '모령성체(冒領聖體)'에 대한 고통일까?
우리의 고통은 전자(前者)이겠지만, 하느님의 고통은 후자(後者)일 것입니다. 곧 '모령성체'에 대한 고통일 것입니다
멈춤으로 인한 우리의 고통 안에만 머물러 있거나, 이 멈춤에 대해 불평불만만을 드러내지 말고, 한번 이 멈춤 안에서 그동안 얼마나 성체의 삶을 살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는지 성찰해 보는 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면서도 매일 싸우고, 끝끝내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의 나약함 때문에 겪게 되시는 하느님의 고통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우리의 나약함 때문에 겪으셨던 하느님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내 뜻에서 하느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이 멈춤이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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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cRDXWN9AMk&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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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
오늘 우리
마음에
필요한 것은
말씀이다.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오늘은
참 좋은 날이다.
말씀이 길을
열어준다.
말씀이 우리의
결핍을
채워준다.
오늘을
되살리는
말씀의 힘이다.
오늘의 빛은
말씀의 빛이다.
오늘은 말씀이
열매를 맺어야 할
오늘이다.
나와 너
사람과
사람 사이
말씀이
이루어진다.
말씀을 통해
무엇을 위해
오늘을
살아야할지를
듣게 된다.
오늘을
오늘답게 하는
말씀이다.
말씀과 오늘은
하나이다.
생명의 모습은
말씀의 모습이다.
우리의 오늘을
하느님께
올려 놓게 하는
말씀이다.
말씀처럼
말씀따라
오늘을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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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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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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