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作意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1. 취준생이 여기저기에 입사원서를 내고 결과를 기다리는데, 마침내 어느 한곳으로부터 최종 합격통지서를 받으면 그때부터 그의 마음은 그 회사(입사 준비 등등)로 마음을 기울이고 마음을 쏟습니다(저는 이런 것을 作意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일들이 생겨납니다(저는 이런 것들이 法의 集이라고 이해했습니다).
2. 방금 큰외삼촌이 오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자 어머니 마음은 외삼촌을 맞이하는 쪽으로 쏠렸습니다(作意). 그래서 집안을 정리하고 음식을 만들고 선물로 줄 참기름을 챙겼습니다(法의 集).
3. 어떤 수행자가 느낌을 대상으로 사띠 수행을 하려고 마음을 쏟았습니다(作意). 그러자 몸도 감촉도 몸의 알음알이도 몸의 감각접촉도 몸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긴 느낌도 알아지기 시작했습니다(法의 集)
(3번 예문은 다음 동영상 법문을 듣고 유추하여 만들었습니다.)
https://youtu.be/oJYc7FdQaJM?si=mSGZDpDZEj1KLJfo
(11분 17초 ~ 11분 47초) (다음과 같은 취지의 내용입니다.)
“다른 방법도 있어요. 느낌을 관찰하는 데 너무나 통증이 심해서 더 이상 관찰할 수 없을 때 ... 대상을 바꾸는 방법이 있어요. 평소에 익숙했던 배의 부풂과 꺼짐으로 딱 붙여버리니까 마음이 더 이상 통증을 대상으로 하지 않아요. 마나시까라(作意)가 없어진다라고 하지요. 통증을 마음에 넣지 않고 부풂과 꺼짐에 마음이 딱 밀착이 되어서 집중이 생기니까 통증이 분리가 되는 거지요. 괴로운 느낌이 분리가 되는 겁니다.”
4. 일반적으로 어떤 일에 주의를 기울이면(마음을 쏟으면), 그것이 큰 일(대상)이든 작은 일(대상)이든 상관없이 모두 작의(作意)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에 마음을 기울이면(어떤 대상을 마음에 넣어두면(배운 표현)) 거기에 따라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法의 集). 저는 이런 뜻으로 作意의 集이 法의 集이라고 이해했습니다.
◌ 참고: 저는 法을 이런 취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학교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학교에 대해서 여러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위치는 어디이고, 다른 사회 제도와는 어떤 차이가 있고, 건물과 운동장은 어떠하고, 선생님은 어떠하고, 학생은 어떠하고, 교과서는 어떠하고 학습 도구는 어떠하고, / 공부는 어떻게 하고, 우수한 성적은 어떻게 달성하고, / 사제지간은 어떠하고, 교우 관계는 어떠하고, ... 등등.
이와 같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도 많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학교에 대해서 여러 부분을 많이 말할 수 있듯이, : 사람에 대해서, 존재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 등등. 저는 이런 모든 것들에 관한 것을 法이라고 부르고, 그중에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법을 다른 가르침과 구분할 때에는 佛法이라고 부른다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에게서 법이 생겨나게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예를 들어 그에게 사띠가 생겨나고 계발되고 확립되면, 이것도 자신에게 법이 생겨난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참고: 어떤 다른 분의 동영상 법문에서 들은 내용입니다.
“재가자의 몸으로, 재가자의 신분으로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까? 밀린다왕문경에 나옵니다.
-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아라한이 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날 동이 트기 전까지 출가를 하거나 출가할 인연이 없다면(가사를 구하지 못하면, 등등) 입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의 과라는 덕목이 너무나 크고 너무나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재가자의 몸으로는 재가자의 옷으로는 짊어질 수가 없습니다(어울리지 않습니다)”.
◌ 참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에 대한 저의 생각
‘저기에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이라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 대상들은 잘못이 없다고 합니다. 즉, 선법, 불선법의 문제가 아니라고,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 대신 감각적 욕망이, 욕탐이 문제라고 합니다.
그럼,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까? 아니면 여기서 마쳐야 합니까? 더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까? 아니면 더 고려해야 할 다른 사항이 없습니까?
여기서 저는 그만두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에 멈추면 아마 이런 인식이 생겨날 위험이 있습니다. 즉, ‘저기 날아가는 새들도 저기 헤엄치는 물고기도 각자 자신의 본성에 따라 생동하며 살아간다. 저기 숲속의 나무도 저기 계곡도 자연의 한 부분을 이루며 아름다운 경치를 만든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성품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조화롭고 아름다운가? 만물에 깃들어 있는 道가 발현되어 조화를 이루니 이 모습 그대로가 행복이구나.’라는 인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 새가 지저귀고 계곡물이 맑고 숲속이 울창하고 곡식이 풍족하고 사람들이 착하고 도시가 번성하여 ‘아, 이곳은 참 아름답구나, 아름다운 곳이구나.’라고 말하면 바르게 잘 말했습니다.
* 그런데 이런 것들속에 道가 깃들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교는 대상에 대해서 무상, 고, 무아로 관찰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저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에서 멈추지 말고 :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은 (그리고 법은)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다 라는 것 까지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것
첫댓글
자료를 모으다가 많이 인용하는 경문
[vedanāsu vedanāññatarāhaṃ, bhikkhave, evaṃ vadāmi yadidaṃ —
assāsapassāsānaṃ sādhukaṃ manasikāraṃ.
비구들이여, 이 들숨날숨을 잘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은
느낌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태의] 느낌이라고 나는 말한다.]
‘두 겹의 정수관(正隨觀, =sammā-dvayatānupasasnā)’[SN. vol.2. pp,15~16]
.......... 이 .......................
올바른 作意(yoniso manasikāra, =法의 이치에 합당한 작의)입니다.
예, 두 분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제가 종종 겪는 일이 있습니다. 저는 ‘아, 이제 나도 이 주제에 대해 좀 정리하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면, 어느새 다른 분들께서 ‘아닙니다. 아직 (또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이것을 한번 살펴 보십시오.’하시면서 필요한(또는 공부해야 할, 알아야 할) 내용을 들려주십니다.
오늘도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