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밥을 먹다 보면 입에서 ‘우두둑’ 소리가 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돌 씹히는 소리입니다. 지금이야 돌 씹을 일이 전혀 없지만, 예전에는 돌이 꽤 많아서 쌀을 일어서 밥을 안쳐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밥에 쌀보다 돌이 많지는 않습니다. 만약 돌이 더 많다면 그것은 쌀밥이 아닌 돌밥이겠지요. 그래서 돌이 있어도 밥을 먹습니다. 왜냐하면 돌이 있다고 먹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배를 채우기 위해, 돌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도 밥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밥을 먹을 때 오히려 큰 돌이면 눈에 잘 보이기 때문에 가려내기 쉽습니다. 문제는 모래알처럼 작은 돌입니다. 잘 보이지도 않아서 쌀과 구분하기 힘듭니다.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큰 고통과 시련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남들이 보기에 별것 아닌 어려움이 더 힘듭니다. 큰 고통과 시련에는 다른 이의 도움도 받습니다. 그러나 작아 보이는 고통과 시련에 대해서는 “그런 걸 가지고 뭐가 힘들다고~~”하면서 핀잔만 듣기 때문입니다.
어떤 삶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인간의 위로가 힘들다고 해도 주님께서는 더 큰 위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의 위로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 그 자체이신 분께서 내게 그런 아픔을 주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커다란 착각입니다. 세상 안에 고통과 시련을 겪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요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벌일까요?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계속 겪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때 주님의 손을 잡고 함께 하는 사람은 고통을 오히려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주님을 외면하는 사람은 고통을 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고통과 시련이 있다고 해서 주님을 떠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역시 은총으로 받아들이면서 주님 안에서 위로받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음에 길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 옛날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 역시 어리석음에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과 다르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면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대답이 되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주님을 보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그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면서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어제가 만들어 낸 길들을 밟고, 오늘이라는 길 위를 걷는다(김종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