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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가문의 몰락 예고
삼상 2:27-36
27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28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내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31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32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33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36 그리고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이르되 청하노니 내게 제사장의 직분 하나를 맡겨 내게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
삼상 2:27-36 / [엘리에게 선포된 형벌]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람인 예언자 한 사람이 엘리를 찾아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조상 아론이 온 가족을 거느리고 애굽에서 바로의 권세에 붙잡혀 종노릇하고 있을 때에 내가 그의 앞에 나타나 자신을 똑똑하게 보여주었는데, 너는 그것을 벌써 있었느냐? 28) 나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가운데서 레위 지파만을 선택하여 나의 제사장으로 삼고, 그의 후손인 아론의 자손들이 에봇을 제사장의 옷으로 입고 내 앞으로 나아와 제단에 제물을 불살라 분향하게 하였다. 또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내게 불살라 바치는 모든 번제물 가운데에서 일정한 몫은 그들이 차지하도록 특별히 생각해 주었다. 29)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내 백성이 나의 명령에 따라 내게 바치는 제물과 예물들을 탐내며 더럽혀 놓느냐? 너 엘리야, 너는 왜 네 자식들을 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며, 이스라엘 백성이 내게 바치는 제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만 골라다 먹고 너희들만 살찌느냐? 30) 비록 내가 예전에는 `너와 네 집안이 언제까지나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집안이 될 것이라'고 약속한 적이 있었으나 이제는 내가 그 약속을 깨버리고 새로운 선포를 하겠다. 누구든지 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나도 귀하게 여기겠다. 그러나 나를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자들은 나도 그들을 깔보아 수치를 당하도록 내버려 두겠다. 이는 내가 온 세계의 주인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하는 말이니 그대로 될 것이다. 31) 잘 들어라! 이제 세월이 얼마남지 않았다. 그때가 오면 내가 너희 집안의 사내들은 물론 이요, 너희 지파에 속한 사내들까지 모조리 요절시켜 어느 한사람도 노령에 이르지 못하게 할 것이다. 32) 그때에는 내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온갖 좋은 것들을 선물로 주어서 그들 모두가 번영과 장수를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 집안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부러운 나머지 괴로워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너희 집안에서 장수를 누리고 존경받는 사람은 하나도 없게 할 것이다. 33) 너희 집안의 모든 자손이 한창 피어날 나이에 죽을 것이며, 혹시 내가 한 사람을 남겨 놓는다 할지라도 그는 네게 고통과 슬픔만을 안겨 줄 것이다. 34) 이제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게 되리니 그것이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될 표징인 줄 알아라. 35) 그날에는 내 마음에 드는 일만을 하며 내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만을 제사장으로 세울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훌륭한 후손들을 주어 그가 집안을 튼튼하게 세워 놓으면, 그의 후손들이 제사장이 되어 내가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울 메시야까지 섬기게 될 것이다. 이렇게 그의 후손들이 언제까지나 나의 제사장이 될 것이다. 36) 그때에 혹시 네 집안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단지 몇 푼의 은전과 한덩이의 떡을 얻기 위하여 왕을 찾아가 엎드려 이렇게 애걸할 것이다. `제발, 제사장 일이라도 맡겨 주어 밥술이라도 얻어 먹고 살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상반되는 심판과 예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27-29) 여호와께서 엘리에게 엘리의 조상 가문인 아론의 집에 제사장의 직분을 맡겼다고 하십니다(출 28, 29장). 에봇을 입고 각종 제사 후 일정량의 분깃을 받는 특혜를 누리지 않았냐고 반문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성막에서 자행된 각종 악행들을 들춰냅니다. 아들들의 악행에 대해 아버지인 엘리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엘리의 책임은 자기의 아들들을 하나님 여호와보다 더 중히 여겨 그들의 악행을 방치한 것입니다. 엘리는 그 누구보다도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올라야 하는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어야 했지만 그릇된 인본주의로 살았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30-34)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뒤를 잇는 엘리의 가문만으로 제사장을 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출 27:21; 29:9).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로써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한 구속사적인 이유가 더 분명해집니다(히 7:17). 인간의 실패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는 명구를 낳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대명제입니다(벧전 5:1-10). 이 말씀이 엘리 가정에 그대로 적용되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 그분을 경외하는 사무엘은 하나님에 의해 높여졌습니다.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35-36) 하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도 줍니다.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사무엘에게 이루어집니다. 사무엘은 레위 지파이기는 하나 제사장 및 제사장 가문의 후손은 아니어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수 없었으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으로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는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말씀을 3중적인 예언으로 봅니다. 사무엘에 이어 솔로몬 왕을 세우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사독 제사장과, 속죄의 예표로서 희생 제사를 폐기하시고 완성시키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예언으로 봅니다(히 10:1-14). 반면에 대제사장 엘리 가문의 후손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은 생계를 위하여 성소 주변을 맴돌며 떡 한 덩이를 구걸하는 비참한 상태에까지 이를 것이란 예언을 받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좋은 것을 빼앗아 스스로 살찌운 범죄에 대한 보응입니다(13-16, 29).
적 용 : 지금 당신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받고 있습니까? 단지 떡 한 덩이를 위해서 성직과 성전 주변을 맴돌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사람은 그의 지성, 감정, 의지가 모두 길들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의 존재가 하나님께 길들임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이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조건 믿을 때 이것이 진정한 온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므로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다가와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길들임을 잘 받아 지적으로, 정적으로, 의지적으로 온유한 성도가 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다 누리기를 원합니다.
호크마 주석
=====2:27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 '하나님의 사람'(* , 이쉬 엘로 힘)이란 칭호는 사사기, 사무엘소, 열왕기서 등에서 약 40회 가량 나오는데, 대부분 '선지자'란 말과 동격으로 사용되었다(9:6 ; 삿 13:6 ; 왕상 12:22; 13:1-14 ; 왕하 1:9-13 ; 5:8등). 한편 사악한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을 두 차례 대조시켰던(11, 12, 25, 26절) 저자는 이제 '익명의 한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의 신진 대사를 의한 서막(序幕)을 본격적으로 연다. 너희 조상의 집 - 이것은 엘리 가문이 속한 레위 지파, 그중에서도 특히 제사장의 직분을 위임받은 아론의 가문을 가리킨다고 복 수 있다.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 즉 엘리의 뿌리요 조상 가문인 아론의 집이 바로의 통치 하에서 노예 노릇을 하고 있었던 비참한 때를 가리킨다.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 익명의 선지자는 엘리 가정의 죄악을 책망하고 심판을 선언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셨던 크신 은혜를 먼저 언급한다(신 5:6).즉 그 은혜는 (1) 엘리 가문의 뿌리인 아론의 일가가 애굽의 바로 치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이며(출 4:27 ; 7:8), (2)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구출하셨을 뿐만 아니라(출 12:41, 42), 특별히 모세와 더불어 유원절 규례를 준비케 하심으로(출 12:1-28), 장차 제사장 가문으로 삼고자 하셨다는 점이다(Keil, Fay).
=====2:28
모든 지파 중에서...택하여 - 이 선택은 특별히 아론의 일가에게만 베풀어진 하나님의 주권적인 귀한 은혜였다. 즉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조상 가문인 아론의 가문 위에만 제사장의 직분을 맡기신 것이다(출 28, 29장).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으냐 - 여기의 '에봇'(ephod)은 18절에서 언급된 일반 에봇과는 다르다. 이것은 가슴에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 있는 우림과 둠밈이 들어 있을 뿐 아니라, 각종 화려한 색상의 실로 규례를 따라 엄격히 만들어진 대제사장만의 특별한 의복인 것이다. 출 28:6-14 뿐 주석을 참조하라. 모든 화제를...주지 아니하였느냐 - 이 말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각종 제사 제물 중에서 제사 후 제사장들에게 돌아갔던 일정량의 분깃(응식)을 가리킨다<레위기 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이외에도 제사장들은 레위인들에게 돌려진 백성들의 십일조 중의 십일조를 받았다(민 18:26-29).이같은 각종 혜택에 의하여 제사장 가문은 모두 유족했고 부유했다.
=====2:29
너희는 어찌하여...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 여기서 '너희'는 엘리의 두 아들 뿐만 아니라 엘리 제사장까지도 가리킨다. 그리고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는 희생 제물의 기름이 태워지기도 전, 곧 그것이 하나님께 바쳐지기도 전에 엘리의 두 아들이 먼저 그 제물을 가로챘던 사실을 가리킨다<2:12-17>. 실로 이같은 범죄 행위는 하나님께서 명하사 세우신 구속의 제사 제도를 업신여기고 짓밟는 사악한 범죄 행위였다. 한편 이같은 범죄는 비록 엘리의 두 아들들에 의해서 이뤄졌을지라도, 대제사장이요, 부친인 엘리는 마땅히 여호와의 전(殿)과 거기서 시행되는 제사를 거룩히 보존 유지시켜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도 아들의 악행을 방관했다는 점에서, 엘리 역시 하나님께 대해 아들과 같은 범죄자인 것이다.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 대제사장으로서 엘리(Eli)는 그 누구보다도 신본주의적 삶을 살아야 했고,또한 성소의 규례를 유지시키는데 그 누구보다도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올라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신성한 제사 제도를 짓밟는 두 아들의 행위에 대해 점잖게 타일렀을 뿐(24절), 별다른 제재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는 분명 엘리가 대제사장으로서 직무를 유기했음을 의미하며, 또한 인본주의적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 두 아들의 범죄 행위에 엘리가 결부되어 있듯이, 그들이 저지룬 죄악도 이중저(二重的)이다. 즉 (1) 응당 하나님의 몫인 가장 좋은 것을 자신들이 취함으로써,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대신(對神) 범죄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2) 가장 좋은 것으로 여호와께 드린 백성들의 정성어린 마음까지 강탈함으로써 대인(對人) 범죄까지 저질렀던 것이다.
=====2:30
전에 네 집과...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 이것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론의 가문만으로 특별히 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규정하시면서 그들에게 맹세하셨던 내용을 가리킨다(출 27:21 ; 29:9). 그리고 이 맹세는 후일 아론 가문의 후손인 비느하스에게 다시 갱신되었다(민 25:12, 13). 그런데 여기의 '네 집'은 엘리의 가문을 가리킨다. 물론 하나님께서 엘리의 가문에게 직접 위와 감은 맹세를 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엘리의 가문도 아론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아론 가문 전체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는 마치 그 후손들인 엘리의 가문에게 하신 맹세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 이것은 (1) 좁은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엘리 가문의 제사장 직분을 박탈하실 것이며 (2)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엘리 가문의 제사장 직분의 권위를 약화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하나님의 징계는 첫째, 일차적으로는 죄악과 보응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진노에 따른 심판적 의미가 있다. 둘째, 이차적으로는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한 구서속사적 의미(히 7:17)가 있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또 하나의 문제는 '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철회될 수 있는 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구속사적으로 진행되어가는 하나님의 신적 경륜과 섭리에는 하등의 변화가 철회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경륜이나 목적을 향해 역사가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개인과 국민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순종과 불순종, 그리고 조건과 상황 등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본절도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 익명의 선지자에 의해 엘리 가정에 선포된 여호와의 이 말씀은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자들에게 공히 적용되는 대명제이다(벧전 5:1-10). 즉 생사 화복과 빈부 귀천의 유일한 근거가 오직 하나님인 줄 바로 깨닫고 모든 일을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할 때, 하나님께서도 역시 그를 높이 드사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고 그분의 말씀을 멸시할 때, 하나님께서도 역시 그를 끌어내리사 만인의 경멸거리로 만드실 것이다. 바로 이러한 원리가 조만간 엘리 가정에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났으니
=====2:31-34
본문은 엘리의 가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결국 멸절하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이 예언은 (1)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서 한날에 죽임 당한 것을 표징으로(4:11) (2) 엘리의 후손들인(14:3, 8 ; 22:9) 놉지역의 제사장들이 사울 왕의 사주를 받은 에돔인 도엑에 의하여 대량 학살되고(22:11-23) (#) 또한 엘리 집안의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솔로몬에 의하여 제사장직에서 파면됨으로써 (왕상 2:27, 35) 성취되었다.
=====2:31
팔을끊어 - 성경의 수사학적 용례상 '팔'은 주로 '힘'또는 '권세'를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이다(욥 22:9 ; 시 10:15 ; 37:17). 그러므로 본절은 엘리 집안의 권세를 꺾고 빼앗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엘리의 두 아들이 권세를 남용한 대가이다(Matthew Henry). 노인이 하나도 없게 - 고대 가부장적 제도 하에서 한 집안의 노인들은 그 집안(가문)을 떠받쳐 주는 힘이요 권세였다(Bottcher). 그러나 가문의 팔이 꺾이운 엘리 집안에는 당연히 노인이 없을 것이었다. 결국 이 말은 엘리 가문의 후손들은 조사(早死)하리라는 심판이었다. 날이 이를지라 - 히브리 원문(Masoretic Text)에는 '보라'란 말과 연결되어, 곧 '힌네 야밈 바임'(* - Behold ! the days come, KJV)으로 되어 있다. 즉 이 말은 '미래의 일'을 예언하거나 선포할 때 선지자들에 의해 상용되는 관용구이다(왕하 20:17 ; 사 39:6 ; ;렘 7:32 ; 암 4:2 ; 8:11 ; 9:13 등).
=====2:32
복을 베푸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 본절은 해석상 어려움이 있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내 처소의 환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르 마온(* )은 직역하면 단순히 '처소의 환난'(distetess in hadi-tation)이란 의미로, 그 '처소' 가 엘리 집안의 처소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처소(성소)인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환난'으로 번역된 '차르'는'환난'(distress)이나 '고통'(affliction)이란 뜻 이외에 '적'(enemy)또는 '원수'(foe)란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본절은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이해된다. (1) 엘리 이후 이스라엘이 사무엘이 사무엘, 사울, 다윗, 솔로몬의 통치로 이어지면서 날로 번영해 가는 중에서도 엘리 집안은 조사(早死), 학살, 폐위 등 비극적인 각종 재난을 당할 것이라는 의미(Pulpit Co-mmentary, RSV, Living Bible), (2) 엘리 시대로 부터 하나님의 처소, 곧 성소가 블레셋을 비롯한 각종 대적들로 말미암아 피폐해잘 것이라는 의미(Keil Delitzch, Lange, KJV, NLV)등이다. 아무튼 본절은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들의 모든 후손, 나아가 하나님의 성소까지 각종 재난에 직면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임에는 틀림없다.
=====2:33
내 단에서...슬프게 할 것이요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엘리 집안의 후손들로 제사장의 직분은 계속 수행하게 하되, 그 세력이 하도 미약하고 비참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슬픈 마음이 들 정도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 구체적인 예가 36절에 언급되어 있다. 젊어서 죽으리라 - 한 예언 속에 조사(早死)에 관한 저주가 3중 반복되어 있다. 즉 "노인이 하나도 업게"(31절), "영영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32절),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33절)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한 저주는 실제로 실로(4:11, 20, 21)와 놉(22:11-19)에서 일어났다(Pulpit Commentary). 뿐만 아니라 유대 전승에 의하면, 후일 제사장 가문 중 18세 이상을 살지 못하는 조사(早死)의 집안이 있었는데, 확인 결과 엘리 가문의 후손들이었다고 전해진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p.293).
=====2:34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 여기서 '표징'(* , 오트)은 곧 '표시'(mark), '증거(evdence), '암시'(sign), '징조' (omen)등의 뜻이다. 그가데 엘리 생전에 닥칠 두 아들의 동시적 죽음은 익명의 선지자가 선포한 심판이 하나도 어김없이 그대로 성취될것을 보여 주는 뚜렷한 표징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예언대로 이 표징은 실제 블레셋과의 전투 중 그대로 일어나고 말았다(4/:11).
=====2:35
내가...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니니 - 이것은 사무엘, 사독 그리스도에 대한 삼중적인 예언으로 볼 수 있다. 첫째로, 이 예언이 사무엘(Samuel)에 대한 것임이 확실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비록 그가 제사장 및 제사장 가문의 후손은 아니었디만, 제사장 및 제사의 권의를 회복했고(16:22) (2) 또한 실제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기도 했으며(7:9,17) (3) 그리고 본절의 예언이 끝남과 동시에 새로이 사무엘이 등장한다는 점(3:1이하) 등이다(Theodoret,the Rad-bins). 둘째로, 이 예언이 사독(Zadok)에게 해당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그는 정통적인 왕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고(왕상 1:45) (3) 엘리의 후예인 아비아달 대신 대제사장에 임명됐다는 점(왕상 2:27,35)등이다(Auggustine, Thenius, Gerlach). 셋째로, 이 예언이 그리스도에게 해당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리스도는 예표로서의 희생 제사를 폐기 완성시키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점에서 궁극적으 이 예언의 성취자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히 10:1-14).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 하나님께 성실치 않았던 엘리의 가정이 파멸에 이른 것과는 달리, 새로이 세움을 받을 제사장 가정은 커다란 축복을 받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 여기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곧 이스라엘의 '왕'를 가리킨다(10절). 그러므로 이 말은 왕과 제사장의 과두(寡頭)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다스려질 것이라는 예언이다(렘 33:14-26). 즉 지금까지와는 달리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별도로 기름 부음 받은 왕이 세워져야 하는 마당에, 제사장은 그 왕과 함께 하나님의 신정 왕국 이스라엘을 잘 다스릴 필요성이 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사무엘과 사독 그리고 사독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을 도와 제사장의 직분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2:36
하나님의 징벌(31-34절)로 파멸한 엘리 집안 후손들의 빈핍하고 처참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 여기서 '한 조각'(* , 아고라트)과 '한 덩이'(* , 키카르)는 구걸하여 동냥으로 얻은 동전 한닢, 빵 한 조각을 가리킨다(Keil). 곧 대제사장 엘리 가문의 후손들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하여 이처럼 비참한 상태에까지 이를 것이란 예언이다. 결국 이러한 징벌은 엘리 집안이 하나님의 좋은 것을 빼앗아 스스로 살찌운 범죄(13-16, 29절)에 대한 정당한 보응의 결과였다(Mattew Henry). 청하노니...제사장의 직분을 맡겨...먹겨...먹게 하소서 - 이말을 의리를 맡겨 주어 생계를 잇게 하소서'란 뜻이다. 영광과 존귀 중에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수행한 정당한 대가로서,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서 생계의 걱정 없이 유족한 생활을 누려야 할 제사장이 이토록 비천하여져서 단지 생계를 위하여 성소 주변을 맴돈다는 것은 엘리 집안이 먼저 하나님을 멸시한데 대한 필연적인 결과였다(30절). 한편, 여기서 우리는 대제사장으로서 엘리 집안의 영욕(榮辱)에 대해 간략히 고찰할 필요성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 지파를 택하사 제사장 가문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모든 제사장의 머리로서 대제사장 제도를 두셨는데,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은 '아론' (Aron)이었고, 그 다음은 '엘르아살'(Eleazar) '비느하스' 계열로부터 '이다말' 계열로 옮겨져 '엘리(ELI)가 사사 시대말기에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되었다.(대상 24:1-3). 이와 같은 변화가 생기게 된 이유로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추론할 수 있다. (1) 엘르아살 계열의 후손이 끊어졌기 때문일 가능성 - 그러나 후일 엘르아살 계열의 인물이 다시 등장하는 사실(삼하 8:17 ; 20:25_로 보아 이 추측은 타당성이 없다. (2) 엘르아살 계열의 마지막 대제사장 - 요세푸스는 이를 '오시'(Ozi)로 본다 - 의 아들들이 당시 대제사장으로 오르기에는 너무 어렸거나, 아니면 사사 시대의 혼탁한 인물이 없었을 가능성 - 이것은 상당히 일리가 있는 추측이다. 아마도 바로 이러한 때 이다말 계열의 제사장이었던 '엘리(Eli)가 탁월한 지도력과 정치력을 발휘하여 대제사장직에 올랐고, 아울러 사사(士師)로서도 활약을 한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이때가엘리 가문의 세력이 절정기에 달한 때인 것 같다. 그러나 엘리 말년에 이르러 자신은 늙고 아들들은 방탕하게 되자, 급속도로 그 세력
사장직에 임명되나(삼하 15:24-36), 이때에는 엘르아살 계열의 사독(Zadok, 대상 24:1-3)도 대제사장으로 함께 임명된다. 이처럼 다윗 치하에서는 사독과 아비아달이 함께 제사 업무를 관장했으나, 후일 솔로몬 즉의 시에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함으로써 결국 추방당하게 된다(왕상 2:26, 27). 따라서 사독만이 대제사장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된다(왕상 2:35). 그리고 이때 이후로 대제사장직에서 이다말 계열, 곧 엘리의 계열은 떨러져 나가게 되고 엘르아살 계열이 대대로 대제사장직을 이어받게 된다. 그리고 그후 엘리 집안은 점차 몰락하여 예언자의 예언대로(33, 36절) 겨우 제사장직만을 근근히 이어갈 뿐이었다(Keli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id Testament,Vol. -ii, pp, 39-40).
< 설 교 >
은총 받는 믿음으로 섬깁시다
삼상 2:26 / 강성찬목사
하나님께서 성도를 택하신 목적은 성도로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거룩하심을 증거하여 영광을 받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의 삶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죄인을 택하시고 구원 역사를 진행시키셨는데, 성도는 거룩한 삶을 삶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이루어 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성도에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라고 명하면서 주께서 그들을 용서하심같이 하라고 교훈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새 계명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던 것과 같이 서로 희생적인 사랑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간에 서로 용서하지 못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임하게 되며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으로서 최고의 복된 삶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존재로서 옛 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언제나 자신의 신분의 변화를 기억하여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열매를 맺는 자만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 같아서 마지막 날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언제나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항상 베푸신 은총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모든 일을 행할 수 있어야 함을 교훈합니다.
골 3:12-17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예수께서 유월절을 맞이하여 그의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있어야 할 곳은 성전입니다. 성전이 그의 집이며 그가 머무를 곳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의 정하신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머무심은 절기에 국한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것은 그의 사역을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오르신 예수는 부모의 손길에서 벗어나 홀로 성전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들과 토론을 하셨습니다. 성전에서 가르치던 선생들은 자신의 일에 열심이었는지 모르지만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인 구세주를 만나고서도 그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예수는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머무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말씀하셨고, 그의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아버지의 집이며 그 곳이 진정한 우리의 집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 부모에게 순종하시며 받드심은 인간의 삶에도 충실하신 메시야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기까지 성실과 근면으로 생활하시며 진실한 순종으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것을 맛보시며 체험하시는 것은 우리들을 속속들이 이해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들을 구원하시되 인간의 내면과 생활을 모두 경험하시고 세밀하게 구원의 길과 방법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총과 자비의 손길을 느낄수 있습니다.
성장해 가는 예수님은 매년 하나님을 경배함과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역사에 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배워나갔음을 말씀 합니다.
눅 2:41-52 /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사무엘의 생애는 사실 ‘섬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 한나의 간절한 기도 응답으로 태어난 후 젖을 떼고 나서 바로 여호와께 바쳐진 사무엘에 대한 첫 기록이“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11절)였기 때문입니다.
11절과 18절에서“섬겼더라.”(매솨레트’ 원형 ‘솨라트’)는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 공적인 업무를 수행할 때나 예배에서 레위인과 제사장처럼 특별한 역할을 수행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사무엘이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제사장 의복인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다(18절)고 하면서 장차 제사장직이 사무엘에게 승계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 옷은 어머니 한나의 애틋하면서 한결같은 사랑이 담긴 것으로, 부모가 매년 제사를 드리러 오면서 주고 간 것입니다(19절).
엘리는 하나밖에 없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린 엘가나와 한나에게 다른 자녀를 허락해 달라는 기도를 해주었습니다(20절).
엘리의 아들들의 행실은 점점 극악무도해졌고, 반면에 사무엘은 점점 자라나면서“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게 되었습니다”(26절).
이러한 균형잡힌 사무엘의 성장에 대한 내용은 예수님의 성장하는 모습을 기록한 누가복음 2:52“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와 동일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한나는 남편인 엘가나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엘가나의 또 다른 아내 브닌나로부터 단지 자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수모와 치욕을 받아야 했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신의 약점을 끄집어내어 괴롭히는 브닌나의 독기어린 말투와 눈동자는 그를 괴롭혔습니다. 한나는 여느 때와 같이 매년 실로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올라갔다가 너무도 괴로워 하나님 여호와께 울면서 서원기도를 드리다가 제사장 엘리를 만나 기도를 받고 마침내 사무엘을 낳게 되었고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서원기도대로 젖만 뗀 후 엘리에게 맡겨 놓고 내려왔지만 하나님의 전에서 바르게 자라고 있는 사무엘의 모습을 보는 기쁨과 감격은 그 아쉬움을 덮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계속 수군거리며 퍼져나가고 있는 엘리의 행실이 나쁜 아들들에 대한 소문 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환을 시켜 하나님께 드릴 화제의 제물을 빼돌려 나눠서 먹고 마시고. 뿐만 아니라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도 어울려 지낸다고 까지 합니다.
한나는 젖뗀 사무엘을 데리고 실로로 올라가 드렸던 자신의 기도를 되뇌었을 것입다.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들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며, 악인들을 어둠 속에서 멸망시키십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절대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맞서는 자들은 산산이 깨어질 것입니다. 하늘에서 그들을 쳐서 없애실 것입니다. 주께서 땅 끝까지 심판하시고,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 부어 세우신 왕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것입니다”(삼상 2:3b, 9-10).
한나는 남편 엘가나와 함께 실로로 올라가 제사장 엘리와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일 년 만에 다시 사무엘을 보는 순간 한나는 지금껏 자신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근심거리가 한꺼번에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훌쩍 커서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 아이 사무엘은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태어난 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처음 만나는 제사장 엘리를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부모와 헤어지는 것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서툰 몸짓이긴 했어도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것으로 성전에서의 첫 시작을 했던 아이, 나이를 점점 먹어갈 때마다 흔들림 없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만을 보고 배우면서 자라나고 있는 아이, 패역한 엘리의 아들들의 행동과는 비교될 정도로 경건한 신앙을 키워나가고 있는 아이었습니다.
비록 나이는 어리고 제사장 엘리를 섬기는 아이에 불과했지만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엘리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사무엘의 모습이 당당합니다. 한나는 더 이상 마음이 불안하지도 않았고 사무엘이 걱정되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한테서만이 나오는 평강이 어린 사무엘의 모습에서 넘쳐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엘리가 엘가나와 한나 부부를 바라보는 엘리의 마음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들을 주면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완전히 수행했고 그 이후에도 매년 올라와 사무엘을 돌보는 엘가나와 한나의 한결같은 사랑과 믿음은 엘리를 완전히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엘리는 엘가나와 한나에게 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복, 즉 사무엘을 대신할 자녀를 주겠노라는 놀라운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엘가나와 한나의 기쁨은 무척이나 컸지만 그 무엇보다도 기뻤던 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기뻐하시고 품안에서 키워 주고 계심을 확인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로도 사무엘을 위한 한나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졌고 사무엘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 속에 거하며 여호와 앞에서 계속 자라나갔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엘리는 자기 아들들의 패역한 행동과 소문을 듣게 되었고 심한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늙은 몸을 이끌고 아들들 앞에서 엘리는 타이르기도 하고 야단도 쳐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삼상 2:23-25 /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아들들의 이러한 모습때문에 엘리는 더 일찍 아들들에게 관심을 갖고 부지런히 훈계를 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반드시 죽이실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절망은 더 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몰라보게 키가 커버린 사무엘은. 제나 그렇듯이 반듯하게 세마포 에봇을 갖춰 입은 그의 모습이,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몸만 자라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엘리를 모시며 하나님 말씀을 익혀 나갔기에 그 지혜도 점점 깊어졌습니다. 또 한 하나님과 동행하며 얻게 된 평강으로 인해 사람들을 만나고 섬겨 나가면서 영적인 성장도 함께 키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자라나면서 가족의 자랑거리가 되었고 성전에 오가는 사람들에게도 본이 되어 많은 칭찬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섬기는 그 순전함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어머니가 드렸다는 기도를 기억하며 더욱 은총 가운데 성장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하셨으므로 내 기쁨이 큽니다. 하나님과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로 내려가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다시 돌아오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십니다.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는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삼상 2:1-2, 6-8).
엘리의 두아들과 사무엘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합니다.
진정 은총받는 믿음으로 섬겼는지 점검하며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나는 어디로...
삼상 2장 21절 / 김우영목사
요절 :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삼상2:21)
며칠 전 저녁, 제가 밖에서 들어오는데 어떤 집사님이 교회에 오셨습니다. “집사님, 이 시간에 무슨 모임이 있으신 가요?" “아니예요" "그런데 이 시간에 어떻게 오셨어요?" “속상한 일이 있어서 기도하러 왔어요" 속상한 일이 생김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나 속상한 일로 기도하러 온 것은 최선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가 기도하며 통곡했고(삼상1:10,11), 제사장 엘리에게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하며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다(삼상1:15-16)"라고 합니다. 한나가 근심을 갖고 살았던 여인이었음은 “가서 먹고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삼상1:18)"는 말씀에 잘 묘사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괴롭고, 아파 심히 방황될 때 어디로 가시렵니까?
인생 Ⅰ : 고민
한나에게는 남들이 다 낳는 자식을 못 낳는 괴로움이 있었는데다가, 엘가나의 다른 아내 브닌나는 자식을 잘 낳음에 괴로움이러 가중되었을 것이며, 이에다 브닌나가 그녀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였으니 고통과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지금 까지는 남편이 자기가 자식을 낳지 못해도 사랑했지만 훗날에도 그럴 것인가? 라는 불안과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괴로워서'라는 히브리어 ‘마라트 나페쉬'는 ‘영혼이 괴로워서'라는 뜻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아픔과 슬픔' 을 나타냄입니다. “기도하고 통곡하며'는 자기 슬픔과 괴로움을 하나님께 숨김없이 내어놓고 울며 애원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너의 고통에 잡힘이 구로하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렘13:21)" 고민, 고통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다만 사람에 따라 어떤이는 좌절, 절망, 자포자기 하고, 어떤이는 용기, 소망을 갖고 해결의 길을 찾아 나섬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고민과 고통속에서도 바른 길을 찾아 가는 사람입니다. 생의 괴로움은 나와 동반하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내가 괴로워하고 있음은 내가 살아있는 사람임을 뜻합니다. 어제 우리교회에서 두 쌍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두 번 다 축가 순서가 있었는데 한 쪽은 ‘행복해라, 축복받으라, 서로 사랑하라'고 자기 마음으로 비는 축가였고, 한 쪽은 ‘하나님, 행복하게 해 주세요.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소서' 라는 간구가 담긴 축가였습니다. 후자의 축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축가였습니다. 성경속에, 고난, 고통, 환란, 시험이 많이 나옴은 그만큼 이세상에 괴로움이 많다는 것을 의미함입니다. 허나 중요한 것은 역경이 많은 이 세상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입니다. 똑 같은 고민이지만 믿음 있는 그리스도인은 고민이 작게 느껴지고, 믿음 없는 교인은 고민을 고민자체보다 크게 느낌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시118:5)"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시18:6)." 믿음의 사람, 시편기자의 노래들입니다. 한나는 남다른 고민속에서 남 달리 간절히 기도했고, 남다른 아들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아마도 한나가 자식을 잘 낳고, 고민은 한나도 하여금 없었다면 사무엘과 같은 아들을 낳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나의 고민은 한나로 하여금 애통하며 기도하게 했고, 그 기도는 그녀에게 복으로 임했습니다. 나의 괴로움은 남다른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차를 타고 가다보면 어느 지점에서 분기점을 만나게 됩니다. 분기점에서 나의 선택은 내가 목적한 곳으로 바로 갈 수도 있고, 정 반대의 곳으로 잘못갈 수도 있습니다. 삶의 고민은 생의 분기점입니다. 나의 선택에 따라 내 인생 여정이 복의 길이냐 저주길이냐로 결정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의 때를 복의 미래를 만드는 시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모든 고민은 자기 필요에 미치지 못하는 결핍에서 와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필요충족 해결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인생 Ⅱ : 성전
하나님께서는 고통의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 주시려고 성막을 짓게 하시고, 성막 앞 구름 가운데서 자기 백성들을 만나 주셨습니다(민11:25). 하나님께서 광야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성전을 허락하시고, 문제 있는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의 고난, 괴로움을 해결해 주시고, 복을 주시며, 만나 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지니라(합2:20)" 어떤 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기존 성전을 헐고 새 성전을 신축했습니다. 새 성전에서 처음 예배를 드리던 날, 어떤 사람들은 새 교회의 장엄함과 색다른 건축양식에 경외감을 느끼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커서 “옛날처럼 따뜻함이 없네". “사랑이 없는 것 같다" 등등, 이런저런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 분위기가 아주 어색해졌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아이가 큰 소리로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하나님이 여기 사세요?" “그럼! 전에 예배당에도 사셨고 지금의 새 성전에도 사신단다" 아이와 아빠의 대화로 인해 서먹서먹하던 분위기가 사라져 버렸답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내린 중대한 결단은 하나님을 만나러 성전으로 감입니다. 한나가 ‘여종의 기도를 돌아 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라고 삼중적으로 간구함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긍률과 자비를 구하는 애절한 심정을 표현함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슬프고 괴롭고 격동함이 많아 성전으로 기도하러 감은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들은 위한 거울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불신앙의 사람들을 위한 거울입니다. 하나님께 고민, 고통, 슬픔, 불행을 상담하십시오. 인생의 최고 상담자요, 해결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민을 제거하는 최선의 삶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최근 제가 기독교TV 방송국에 ‘오병이어 기도' 녹화 때문에 갔고, ‘말씀 365일' 녹화 때문에 가는데 PD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분장을 꼭 해야 한다고 해요. 그래서 할 수없이 분장사가 해주는 대로 메이크업을 하는데 제 마음에 한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에게 잘 보이기위해서도 이렇게 화장을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감이랴..."하나님앞에 나아가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분장은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인생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생의 가장 바른 길은 하나님을 만나러 성전으로 가는 것 입니다. 인간에는 후회형, 우회형, 전진형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음과 몸을 움직여 하나님께서 주저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검토되지 아니한 삶은 살 가치가 없는 삶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말입니다. 고통을 안고 하나님의 전으로 들어선 자는 이미 해결 속으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시21:2)"
인생 Ⅲ : 해결
한나는 기도함으로서 괴로움이 해결 되었고,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기도는 인생문제의 해결책이요 자기 실현입니다. 삶의 문제 해결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함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이루어집니다. 기도는 영, 육이 아픈자의 치료제이며, 슬픈자의 위로요, 고독한 자의 따뜻함이며, 피곤한 자의 침대요, 또한 기쁜자의 기쁨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과학만능, 황금만능을 믿고 있습니다. 허나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돈으로 음식은 살 수는 있으나 식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십자가 목걸이는 살 수 있으나 영혼구원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수술은 할 수 있지만 수한은 못삽니다. 물론 과학으로도 아니됩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사무엘을 허락하심은 ‘너는 내것'이라는 증명을 하심입니다. 나의 간구가 내게서 이루어짐은 내가 하나님의 것임을 드러냄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시121:1,2)" 한나의 처음 기도는 원통함과 비애를 풀기 위하여 자식을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성숙 단계로 들어가면서 자식을 주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칠 것을 서원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주심에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녀가 뺄셈공부를 잘한 것이지요. 뺄셈 공부를 잘한 한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외에 5남매를 더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곱셈 복을 주셨습니다. 한나에게 와진 곱셈의 복은 곱셈의 복에서 끝난것이 아니라 나눗셈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떻게요? 사무엘이 민족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요, 임금에게 기름을 붓는 하나님의 사람의 됨으로서 입니다. 2장 21절의 ‘권고하사'의 ‘권고'라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전에 말씀드린 바와같이 ‘방문하다'라는 말입니다. 헌데 이 ‘파카드'는 우연한 방문이거나 어쩌다 갑자기 생각이나서 방문함이 아니라 계획적인 방문을 뜻 합니다. 즉, 늘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찾아감을 의미합니다.
어떤 기독교인 의사가 개인 병원을 개업, 돈을 갈퀴도 긁는 것처럼 벌었답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면 혼자 돈을 세는 재미가 여간 아니더랍니다. 돈은 쌓이고, 또 쌓이고...얼마나 좋은지... 그러던 어느날, 여느날과 똑 같이 돈을 세는 데 갑자기 “야 이놈아! 너는 돈만 세다가 갈래? 죽으면 다 놓고 갈 것을... 그게 기쁨이냐? 하나님을 믿는 다는 사람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라는 생각이들며, 양심에 가책이 되었답니다. 그는 회개를 했고, 돈을 헤아리되 목적이 달라졌으며, 모든 환자는 전도 대상이 되었고, 밤이면 전도 대상자들인 환자의 명단을 놓고, 하나 하나 기도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졌답니다. 재력, 권력, 지식... 어느 것도 기도의 위력을 넘지 못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된 방문을 받게 하는 강대한 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해결이란 변색도 없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승리의 트로피를 받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인생의 고달픈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VIP는 기도하고 전도하며, 전도하며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엘리
이동휘목사 / 삼상 2:22-35
1. 기원전(B.C.) 430년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이렇게 항의합니다.
(말2:17)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이 땅에 불의하고 불법하는 자들이 잘 되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사람들에게 개입하셔서 처벌하지 않으십니까? 과연 진실과 정의가 살아 있습니까?” 라며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말을 명심하여 듣지 않고서, 내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서, 너희가 누리는 복을 저주로 바꾸겠노라. 만일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진심으로 내 이름을 높이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 축복이 저주가 되게 하겠노라. 내가 너희 자녀를 벌할 것이며 너희 희생제물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니 너희가 똥처럼 던져질 것이니라. 특별히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하는 제사장들은 들으라. 제사장의 입술은 참된 지식을 간직해야 하고 사람들은 그 입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느니라. 제사장은 전능하시고 거룩한 여호와의 사자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너희 제사장들은 바른 길에서 떠나 잘못된 너희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였느니라. 너희가 내 뜻을 따르지 않고 율법 문제를 취급하는 데 있어서 편파적이었으므로 나도 너희가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였느니라. 너희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서 더럽고 추악한 악행을 서슴지 않았고,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성소를 더럽히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 여자들과 결혼하였느니라. 누구든지 이런 짓을 하면 그가 비록 전능하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다고 해도 여호와께서는 그런 자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제거하실 것이니라. 너희는 또 이런 일도 행하고 있으면서 오히려 여호와께서 너희가 드리는 제물에 무관심하시고 그것을 기쁘게 받지 않으신다고, 너희가 눈물로 여호와의 단을 적시고 울며 탄식하면서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데, 결혼한 사람들이 음행을 밥 먹듯이 행하고, 너희 아내는 너희와 결혼 서약을 한 너희 짝이었으나 너희는 너희 아내에게 신의를 지키지 않았느니라.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아내와 한 몸이 되게 하시지 않았느냐? 이렇게 하신 목적이 무엇이냐? 이것은 여호와께서 경건한 자녀를 얻고자 하시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나는 이혼 자체를 미워하며 자기 아내에게 그런 끔찍할 짓을 하는 자를 미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마음을 지켜 너희 아내에게 신의를 저버리지 말아라.’>(말2:1-17)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갖 비리와 불의와 불법, 그리고 음행과 악행을 다 저지르면서,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며 항의한다는 것이 적반하장(賊反荷杖)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 특별히 거룩한 제사장들에게 한 마디로 “너희가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복을 저주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말2: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오늘날 예수 믿는 성도들을 두고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2:5-9)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 여러분은 이 시대의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성도 여러분을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을 영광스러운 ‘거룩한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엘리’를 제사장으로 세워 그를 영화롭게 해주셨습니다. ‘엘리’는 대제사장 아론의 넷째 아들 이다말의 자손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되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가장 큰 특권이며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엘리 제사장에게 두 아들을 주셔서 그를 더욱 영화롭게 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결혼한 부부는 가문의 이름을 이어가면서 가족의 기업을 지킬 수 있는 자녀들을, 특히 아들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직무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대제사장의 가정에 아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거룩한 제사장의 가문을 이어갈 수 있도록 복을 주시고 그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주신 가장 큰 영광은 어린 사무엘을 잘 가르치고 훈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길 수 있도록 그를 준비시키는 특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훗날 사무엘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그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인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다윗의 가문을 통해 오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엘리는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어린 사무엘이 성전에서 양육받을 때였습니다. 사무엘은 그의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께 서원 기도해서 얻은 아들로 이렇게 서원했었습니다.
(삼상1: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는 서원한대로 사무엘이 젖을 떼자 곧 바로 하나님께 바쳐 성전에서 자라도록 했습니다. 그 어린 사무엘이 엘리 밑에서 여호와를 섬기고 있을 당시에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가 매우 힘들었고 환상을 보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만큼 타락하여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엘리 제사장은 자기 방에 가서 누웠고, 사무엘은 법궤가 있는 성전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른 줄 알고, ‘예, 네가 여기 있습니다.’ 하며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가서 ‘나를 부르셨습니까? 내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자리에 누워라.’ 말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다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일어나 다시 엘리에게 가서 ‘나를 부르셨습니까? 내가 여기 왔습니다.’ 하자 엘리는 ‘얘야, 아니다.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다. 가서 자거라’하고 대답합니다. 이때까지 사무엘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본 적도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번에도 벌떡 일어나 엘리에게 달려가서 ‘나를 부르셨습니까? 내가 여기 왔습니다.’ 했습니다. 그제서야 엘리는 여호와에서 사무엘을 부르신 줄 알고 어린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돌아가서 누워 있다가 다시 부르는 소리가 나면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하고 말하라.’ 이렇게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이 한밤중에 어떤 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의 분별력은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영적인 가정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보호하시고 그가 해야 할 사역을 준비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음성, 말씀을 듣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 역시 영적으로 어두울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귀가 항상 열려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는 엘리를 영광스럽게 하셨지만 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말라기 시대에 하나님께서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말 1:6)고 말씀하신 것처럼, 엘리 제사장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엘리는 당시 매우 늙고 눈이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역을 아들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따라 아들들을 감독하지 못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께서 정한 법대로 예물을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바쳐진 예물들 중 가장 좋은 것들을 자신들을 위해 빼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예배를 업신여기고 동물의 가장 좋은 부분으로 자신들을 살찌웠습니다.
(삼상2:12-17)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삼상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참조말1:8-9).
이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자신들의 배를 채워 예배를 멸시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보다 더한 것은 그들이 성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한 것이었습니다.
(삼상2: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거룩한 제사장의 신분으로서 하나님께 헌신된 여인들을 더럽힌 엘리의 두 아들의 이 사악한 행위는, 하나님을 심히 욕되게 한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엘리는 그 자신이 늙었다는 이유로 자식들의 죄악이 면죄되는 것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엘리는 사실상 자식들의 엄청난 죄악에 대해 책망 조차도 엄하게 하지 못하고, 이미 타락과 방종의 길로 치닫고 있던 두 아들의 악행을 저지시키기에는 매우 위약(危弱)했습니다. 이러한 악행은 일반 백성들에게 악영향을 끼쳐 그들로 하여금 얼마든지 더 큰 죄악을 범하게 할 구실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실로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들로 참으로 수치스럽고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는 악행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엘리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아들들을 징계하지 않았고, 그의 가벼운 책망으로는 그들의 행동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엘리는 하나님께 그들을 저지시켜달라고 간청하거나, 자신이 직접 그들을 저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 상황을 어떻게 보건 간에 엘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두 아들을 양육하지 못한 경솔한 제사장이었고, 불순종하는 제사장이었음에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엘리가 그의 아들들의 악한 행동을 묵과하고 있는 것을 경고하고, 그도 그들과 다를 바 없으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자(使者)를 보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무엘상2:27-36입니다.
(삼상2:27-36)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내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그리고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이르되 청하노니 내게 제사장의 직분 하나를 맡겨 내게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고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을 분명히 하시며, 결국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삼상2:23-25)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4.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멸시한 엘리와 그 두 아들들을 하나님께서 경멸하셨습니다. “경멸하다”는 단어는 “저주를 받다, 수치를 당하다, 멸시를 당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축복하고 그들에게 복이 되는 삶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와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 그리고 하나님의 예배를 멸시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이들의 죄악에 대해 이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하루만에 엘리의 삶에 심판에 심판이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이 전쟁에서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패배했습니다. 4천명이 전사한 것입니다.
(삼상4:1-2)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이렇게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를 블레셋 사람에게 패하게 하셨을까? 여호와의 법궤를 실로에서 이리로 가져 오자. 우리가 그것을 전쟁터로 메고 나가면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셔서 분명히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며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워 전쟁에 나가면 승리하리라며, 패배의 원인을 하나님의 법궤에 돌렸습니다. 전쟁에서의 패배하게 된 원인이 자신들과, 그리고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엘리 제사장 가정을 심판하시기 위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자신들의 생활과, 예배를 멸시하는 죄악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패배의 원인을 하나님의 법궤에 돌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말씀이 담긴 법궤를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법궤를 진지로 가져와 전쟁에 다시 나갔는데, 이번에는 지난 전쟁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무려 3만명이나 전사한 것입니다. 거의 전패하다시피 패배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이번 전쟁에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때 엘리는 하나님의 법궤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몹시 걱정하며 길가에 의자를 놓고 앉아 전쟁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엘리의 나이는 98세였는데 눈이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전쟁에서 도망쳐 온 한 사람이 엘리에게 전한 소식은 ‘이스라엘군이 블레셋 군에게 전패하여 수많은 병사가 전사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으며 살아 남은 자들은 도망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습니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 그만 나자빠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나이 많아 늙은 데다가 살까지 쪄서 몸이 무거웠던 탓이었습니다. 이러한 소식, 즉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과 엘리 제사장이 목이 부러져 죽었다는 소식이 엘리의 며느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때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하여 산기가 가까왔을 때였는데, 시아버지와 자기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진통을 겪다가 아이를 낳고 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죽기 바로 직전에 옆에 섰던 여자들이 ‘정신 차려라. 아들이다!’하고 말해 주었지만,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다가,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불렀습니다. 그 이름 뜻은 ‘영광이 없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입니다.(삼상4:1-22)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예배를 멸시한 엘리 가문에서 제사장 직분을 제거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약 30년 후, 사울 왕 당시 놉에서 85명의 제사장들이 학살을 당했는데 이들이 바로 엘리의 후손들이었습니다.(삼상 35:18-19). 이렇게 해서 엘리와 그의 가족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선언한 예언,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는 말씀은 결국 다 이루어졌습니다.(삼상 2:30-35) 가장 큰 비극은 엘리가 그의 아들들과 며느리를 잃은 것이나 엘리 자신의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섬길 수 있는 특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가문의 남자들은 어린 나이에 죽어 제사장으로서 섬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고 예배를 경멸한 자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 여러분을 영화롭게 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그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존중이 여기며, 예배를 소중이 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려고 살기도 하셨고 죽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붙잡혀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에게 고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법정에서 예수님에 관해 무슨 말을 했건, 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 무슨 조롱을 했건 간에,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신실하게 행하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어떠하든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가 여러분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판단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실하게 따르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음에 이르기까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직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우리의 삶을 마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를 기뻐하실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 환난 날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환난에서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실 것입니다.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
(시91:15)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범사에 감사하므로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감사로 예배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모든 일에 첫 열매로 하나님을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가장 우선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차고 넘치는 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잠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하나님을 정직하고 진실되게 섬기시기 바랍니다.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시84: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한 알의 밀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를 귀하게 여기시고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요 12:23-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이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사는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 영광된 성도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가정 - 나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삼상 2장 22~31절 / 김철한목사(오목천교회)
코헨이라 불리우는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소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키고 보호하는 파수꾼으로 이해된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사다리 역할을 하는데 제사장의 역할은 ①하나님의 뜻을 묻고 알게 하며 ②성소를 지키고 ③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④제의를 관장하고 ⑤백성을 축복하며 ⑥또 병든 사람이 공동체 속에 살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제사장은 왕과 선지자와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지도자였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 가정이 몰락하는 이야기가 사무엘상서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다. 왜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소개해줄까? 사사시대에는 종교계마저도 썩었다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일까? 이스라엘은 총체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메시지일까? 나는 관점을 달리하여 신앙 없는 부모가 자녀를 망치고 결국 가정도, 사회도 무너뜨린다는 것으로 보고 싶다.
제사장 엘리의 가정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고 제사장 엘리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전쟁의 비보를 듣고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가 목이 부러져 죽는다. 그리고 그의 며느리,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도 출산 시 죽는다. 그때 그녀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말하고 죽는다. 며느리로서 내뱉는 이 말은 죄를 피하지 않는 삶에 다가올 가족의 몰락을 슬퍼하는 절규다. 무너지는 이 엘리의 가정을 들여다보자.
1. 자녀들의 사는 모습
① 악행을 저지르면서 산다. (삼상2:22)
삼상2:22을 보면 엘리의 아들들이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다. 그들의 악행은 모든 백성들의 입으로 전해져 공개되었다. 이런 제사장 자녀의 삶은 악한 누룩과도 같아 여호와의 백성으로도 범죄하게 하는 전염성이 되었다.
② 예배를 망가뜨리면서 산다. (삼상2:12~17)
삼상2:12~17을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고 하였다. 여호와가 살아계심을 모르는 영적 무지, 여호와가 내 삶을 살펴본다는 것을 모르는 제사장의 아들, 그에게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시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려고 가지고 온 고기를 삶을 때, 그리고 기름을 태워 하나님께 드리려고 할 때 제사장의 사환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 고기를 가져가는데 빨랐고 기름도 억지로 빼앗아갔다. 그것이 망가져버린 제사드리는 모습이었는데 엘리의 두 아들도 그렇게 하였다.
삼상2: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오늘의 시대도 예배가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아이들에게 지루한 예배, 아이들에게 감동이 없는 예배라고 예배를 외면하고 멸시하도록 하지 말고 예배를 살려내야 하고 예배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부모가 예배를 진정으로 대하려 하면, 아니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 앞에 경외하는 모습으로 서면 아이들 앞에도 예배는 망가지지 않는다.
2. 아버지의 사는 모습
① 자식을 우상으로 섬긴다. (삼상2:25)
엘리 제사장은 두 아들의 악행을 나무란다. 삼상2:25을 보면 아들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훈육은 형식적이었다. 두 아들들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을 미리 건드리고 가져갈 때 제사장 엘리는 그것을 비통해하지 않았다. 삼상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아들들이 잘 먹고 배부르는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이 되는 것보다 우선이었다는 말이다. 제사장으로서 아버지의 삶이 잘못 되었음을 볼 수 있다.
아들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 자식이 아무리 중요하기로 재물을 함부로 다루도록 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멸시다. 자식이 우상이 되었기에 하나님이 외면당하고 하나님이 차선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삼상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그래서 환란이 예고되고 단명하는 가문이 예고되고 두 아들이 한낮에 죽을 것이 예고된다. 자식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 자리에 대신 놓으면 안된다.
② 관습이라는 미명 하에 죄를 막아서지 않았다. (삼상3:13)
삼상3: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라고 하였다. 아비가 아들의 죄악을 안다. 또한 자신의 태도가 잘못된 죄악임을 안다. 저주를 자청하는 불경죄의 죄악이다. 예배도 무시하고 제사법도 무시하고 부모도 무시하고 자기 소견대로 사는 아들의 죄악을 알면서도 금하지 아니하는 채찍과 훈육이 없는 부모의 죄악이 문제다.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들에게 매를 들지 않는 것이 아니다. 왜 버려두는가? 그것은 죄를 심각하게 보지 않고 죄가 익숙해지다 보니까 죄의 두려움에 마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죄가 익숙해지고 죄가 반복되어 관습이 되어버리면 그 죄를 막아서지 않는다. 처음 죄를 범할 때는 마음이 고통스럽고 두렵다. 그러나 그것이 시대적으로 통용되는 관습이 되면 무감각해진다.
삼상2:13을 보라. 제물로 가져온 고기를 제사 드리기 전인 날고기로 가져가는 일이 관습이 되어 있었다.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엘리 제사장의 실수가 바로 이것이다. 죄를 죄인 줄 모르는 시대적 관습, 종교적 관행에 마비되어 아들이 저지르는 불경죄를 가로막지 못했다. 부모는 관습이란 미명 하에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 주일을 어기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어기고 자기 소견대로 사는 것이 이 세상 풍조라고 방치해서는 안된다. 죄를 막아서지 않은 엘 리가 가족을 무너뜨렸다. 두 아들이 문제아이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막아서는 아버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3. 어머니의 사는 모습
① 어머니가 실종되어 있다.
아버지는 의의 상징이라면 어미는 사랑의 상징이다. 아버지는 가정의 울타리라면 어미는 따뜻한 침대와 베개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의 삶 속에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사로서 40년의 생애를 마치고 98세로 죽을 때까지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 가정에는 어머니가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눈물과 다정한 마음, 기도의 가정을 만드는 이다. 어머니는 가정을 용기있게, 사랑스럽게 만드는 뜨거운 심장이다. 어머니의 기압에 따라서 가정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안타까운 것은 어머니, 그 소중한 어머니가 없다. 어머니가 텅빈 가정, 얼마나 삭막하고 허전할까?
여기 엘리 가정과 대조적으로 ②어머니가 있는 가정이 있다.
다른 각도에서 상상해보자. 동시대에 일어난 가문이었다. 몰락하는 이 가문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이 일으킬 충실한 제사장 가정에 대한 예언이 삼상2:35에 나와 있다. 그 사람이 사무엘이다. 사무엘은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로서 여호와와 사람 앞에 은총을 받고 존경을 얻는 자가 된다. 한 가정이 몰락하고 한 가정이 사사의 가정으로 일어나는 이야기 뒤편에는 한 가지 중요한 열쇠가 있다. 일어나고 잘된 가문의 중심에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이다. 본래 아기를 잉태하지 못하여 슬퍼하던 여인이지만 기도하여 아기를 잉태하고 아들에 대한 서원을 기도한대로 지키고 살아가는 한나라는 어머니가 있다. 남편과 더불어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아들 사무엘에게 입히던 사랑의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의 눈물, 어머니의 기도, 어머니의 사랑이 있는 이 가정,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의 가눔이 명문 가문이 되었다.
우리는 두 가문을 바라본다. 무너지는 한 가족의 몰락과 또 한 가족이 충실한 제사장 가문으로 일어나는 것을 본다. 전환기의 시대에 이 두 가정의 이야기를 보며 우리는 신앙 교육,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존중하는 가정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나의 가정, 가문이 흥할 것인가, 아니면 몰락할 것인가? 그 대답이 여기에 있다.
아버지들이여! 어머니들이여!
기도를 심으라. 예배를 심으라. 훈육을 심으라. 거룩을 심으라. 사랑의 눈물을 심으라. 시대를 가로막는 믿음을 심으라. 올바른 물질을 심으라. 경건을 심으라. 아버지가 실종된 가정, 어머니가 실종된 가정, 자녀마저 실종된다. 그러나 어버지가 아버지되고 어머니가 어머니되면 명문 가정이 된다. 복 받는 사회가 된다.
하나님이 존중히 여기는 사람
김광일목사 / 삼상 2:27~36
조지 베버리 쉐아(George Beverly Shea)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교회보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꿈꾸던 사람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쳐오자 대학을 중퇴하고 보험회사에 근무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방송국 공개홀에서 ‘가라 모세’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NBC 방송국의 전속가수로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의 나이 23세였습니다. 앞에는 돈과 인기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교회에서 그리고 집회에서 찬양할 기회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던 주일 아침입니다. 찬송을 연습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건반 위에서 종이를 발견했습니다. 거기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금이나 은보다 차라리 주 예수를 가지라 큰 재물을 갖느니보다 차라리 주 예수의 것이 되겠네 큰 집과 넓은 땅을 갖느니보다 차라리 주 예수를 가지라 못 박힌 손에 이끌림이 차라리 나으리라.” 어머니가 평소 애송하던 레아 밀러(Rhea Miller)의 시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시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제 목소리, 제 존재, 제 젊음 모두 주를 위해서만 드리겠습니다.” 그토록 꿈꾸던 기회였지만 방송국 출연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에 곡을 붙였습니다. 찬송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그는 찬송을 부르면서 고백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주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이제 주님만이 참된 행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빌리 그레이엄 부흥단에 들어가 노래하는 전도자가 되어 찬송을 불러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1983년 74세가 된 백발의 조지 베버리 쉐아는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전도대회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 설교 후에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불렀습니다. 사람들의 뜨거운 갈채에 “저는 여러분의 박수갈채도 예수님과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조지 베버리 쉐아,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이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다함께 찬송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부릅니다. “주 예수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않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본문은 사무엘의 경건한 성장과 엘리 제사장 아들들의 패역한 모습을 대비하는 기사에 이어 엘리 가문의 멸망과 새로운 제사장 가문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아들들의 죄악을 방관한 제사장 엘리의 잘못을 지적하며 책망하고 엘리 가문의 제사장직을 대신할 새로운 제사장을 세우시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존중받아도 좋은데 하물며 하나님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 복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첫째로 예배를 귀히 여기라
‘순종(under cover)’의 저자 존 비비어(John Bevere)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남동부 교회에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초청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 교도소에서도 예배를 인도해달라고 물어왔습니다. 교도소는 주일 오전 8시에 예배가 있고 교회는 11시에 예배가 시작되기에 비비어 목사는 허락했습니다. 주일 아침이 되어 교도소에 갔는데 백여명의 재소자들이 찬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존중하는 자세로 비비어 목사를 대했습니다. 자신들을 찾아와 말씀을 주신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예배를 귀히 여기는 마음이 넘쳤습니다. 범죄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날에 기름 부으심이 강력하게 임하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병이 낫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도소 예배가 끝나자 비비어 목사는 초청받은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인가 기대감에 차 있었습니다. 초대받은 교회에서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분위기가 굳어 있었고 무언가에 짓눌려 힘이 들었습니다. 숨이 막히는 듯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교인들이 마치 비비어 목사를 이렇게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 들어본 얘기다. 유명한 강사의 설교도 많이 들어봤다. 당신이라고 뭐 다른 내용이 있겠는가?” 같은 목사에 의해 드려진 같은 예배인데 교도소와 교회가 왜 이렇게 차이가 났을까? 그것은 예배를 존중히 여기는 태도의 차이였습니다. 하나님에게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싶습니까? 예배를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귀하게 여겼던 사람은 하나님께서 존중히 여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도 존중히 여기십니다.
본문 29절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네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하게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를 살지게 하느냐.” 여기의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는 원어로 ‘티브아트 뻬지브히 우베미느하티’인데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제사 즉 예배를 귀히 여기지 않고 더럽힌 죄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배보다 제물을 가로챈 행동이 얼마나 극악한 것인가 고발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수준을 능가하는 삶도 없고, 삶을 능가하는 예배도 없습니다. 예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제사장 엘리는 아들들을 예배보다 더 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마음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존중히 여겨주시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말씀을 귀히 여기라
인간 관계론의 대가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는 ‘카네기 인간관계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무기는 입이 아니라 귀다. 대화의 질은 서로 상대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들어주는가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같은 요구라 해도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의 요구에 더 잘 따른다.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는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판단하였고, 사무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세워서 잘 들어야 합니다. 설교 시간에 귀를 세워야 합니다. 내게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경청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존중히 여긴다고 판단하십니다.
본문 30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는 원어로 ‘네움 예흐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바를 틀림없이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말씀의 약속은 저절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은 인간이 말씀을 귀히 여기며 실천할 때 이루어집니다.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위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이라고 책망받았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제사 드리는 사람이 가져야 할 부분까지 빼앗으며 하나님의 것마저 가로챘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무시하고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내 감정대로 행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길 때 하나님이 존중히 여겨주십니다.
셋째로 충실을 귀히 여기라
13세기 아프가니스탄의 신비주의 시인 루미(Jalal ad-din Rumi)가 들려주는 우화입니다. 중국인과 희랍인이 누가 더 훌륭한 예술을 하는지 말다툼을 벌이다가 시합을 하기로 했습니다. 왕은 두 사람에게 방을 하나씩 주어 누가 더 예술적으로 꾸미는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휘장으로 가로막아 놓은 방의 이편과 저편에서 각자의 벽면을 꾸미기로 했습니다. 중국인은 왕에게 백 가지 물감과 붓을 청하여서 아침마다 벽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희랍인은 물감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다만 벽을 닦아 광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날마다 닦고 닦아, 마침내 하늘처럼 순수하고 깨끗하게 만들었습니다. 중국인은 여러 가지 색깔로 벽을 장식하는 길을 택했지만, 희랍인은 무색의 길을 택했습니다. 마침내 약속된 날이 왔습니다. 중국인은 작업을 마치고 행복했습니다. 완성의 기쁨에 취해 북을 울리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방에 들어간 왕은 현란한 색깔과 세밀함에 감탄하였습니다. 그러자 희랍인이 휘장을 걷었습니다. 중국인이 그려놓은 온갖 형상이 그대로 희랍인이 말갛게 닦아놓은 벽에 비치는데 거기서 그림은 빛에 따라 몸을 바꾸며 더욱 아름답게 살아났습니다. 아름다움의 길은 인위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깨끗이 닦는 길임을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충실히 살면 삶은 아름다움으로 빛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존중히 여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본문 35절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잎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여기의 ‘충실한’은 원어로 ‘네에만’인데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를 의미합니다. 충실한 제사장은 사무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충실은 하나님의 사람이 갖추어야 할 전제 조건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격에 맞아야 합니다. 제사장 엘리와 두 아들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고 충실하게 일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직분상으로만 하나님의 사람이고 실상은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아닌지? 자기 판단만 앞세우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그 뜻을 충실히 실행할 때 하나님이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일본이 자랑하는 지성인입니다. 천황숭배 시절에 제일고보 교사였습니다. 제일고보는 일본에서 일류고입니다. 학교 경축식 날 천황 숭배의식이 거행될 때 참배해야 했으나 우찌무라 간조는 거부했습니다. 그 시대에 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기득권을 부정해야 하는 용기입니다. 일본인들은 매국노라고 침을 뱉었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언론은 연일 그의 타도에 나섰습니다. 마침내 그는 사표를 냈습니다. 각오했던 일입니다. 미국으로 떠나 맨해튼에서 음식장사를 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 기자들이 질문했습니다. “왜 이러한 초라함을 자초했습니까?” 그러자 우찌무라 간조는 의연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부귀와 영화를 원치 않습니다. 명예도 원치 않습니다. 오직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뿐입니다. 어렸을 때 예수께서 반드시 재림하신다고 배웠습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고로 나는 현재의 평안을 위해 우상에게 절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자의 가치관이며 하나님이 존중히 여겨주시는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혀 존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사랑받고 존중받기를 바랍니까? 아무나 하나님이 존중히 여겨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만 높이고 복종하고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존중히 여기며 존귀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충실을 귀히 여겨 충성함으로 하나님이 존중히 여기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장 존중히 여기는 것은?
삼상 2장 27~30절 / 조영식목사(김포한신교회)
들어가는 글
2월 첫 주일이며, 설 명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사사 시대의 말기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하나님이 영적 암흑기를 끝내기 위해 준비했던 믿음의 인물이 사무엘입니다(35절).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세우기 직전에 영적으로 타락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금주 명절을 보내면서 우리 가정도 영적으로 타락한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가정으로 세워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영적으로 타락한 이유는?
사사 시대의 말기에 대제사장 엘리는 매우 늙었고 영적인 능력을 거의 상실했습니다(22절).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12절). 엘리 제사장이 영적인 능력을 상실하고 신앙 교육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간접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대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는 간접 신앙이었습니다. 당시에 대제사장이면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말씀을 듣고 백성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름 없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27절). 이처럼 하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고 전해 듣는 간접 신앙은 사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지금도 간접 신앙은 어떤 사건이 터지면 실족하여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부디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신앙이 되어서 실족하지 않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는 영적인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3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더라”(1절)와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2절) 것이 연결되었습니다. 이것은 눈이 어두워져 가는 것을 하나님을 말씀을 보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합니다(신34:7). 모세는 엘리 제사장보다도 수십 년을 더 살았지만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죽을 때까지 영적인 눈이 흐리지 않았습니다. 한국 교회는 모세처럼 영적인 능력의 충만으로 시작했다가 인생의 후반부에 엘리처럼 영적인 눈이 흐려져서 타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디 인생의 마지막까지 모세처럼 영적인 눈이 흐리지 않음으로 믿음의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는 말씀의 부재 때문입니다. 사사 시대가 말씀의 부재로 영적인 암흑기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면 영적인 능력을 상실합니다. 지금의 시대가 걸어 다니면서도 스마트 폰을 볼 정도로 온통 보는 것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한주를 보내면서 말씀 한 장 보는 사람을 찾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또한 자녀 세대로 내려가면 더 심각합니다. 우리 자녀들도 스마트 폰은 정신없이 보면서도 말씀을 보는 일은 정말 힘들어 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이 사사 시대처럼 말씀을 멀리하는 영적인 암흑기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 가정을 영적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만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금주처럼 명절이 되면 잠시 말씀을 떠나 세상적으로 행해도 하나님이 눈감아 줄 것처럼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평상시에도 전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간접 신앙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번 명절 기간에는 우리 가정이 말씀을 만나는 은혜를 자녀들에게 신앙의 본으로 보여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가장 존중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은 영적으로 타락한 엘리와 아들들을 어떻게 책망합니까?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합니다(30절). 여기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다는 것은 그분을 높이며 귀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말씀으로 풀면 말라기에서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고 합니다(말3:16).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존중히 여기는 것을 동급으로 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존중히 여기는 믿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면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첫째는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변화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아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했습니다.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라고 합니다(15절). 그들은 육신의 만족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을 존중하여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합니다(삼상3:19). 그가 하나님을 존중하여 말씀대로 순종했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들도 육신의 만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서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는 예배를 존중히 여기는 믿음으로 변화됩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아서 예배를 멸시했습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고 합니다(17절).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을 존중하여 예배까지 존중히 여겼습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고 합니다(18절). 하나님은 예배를 멸시하는 자가 아니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들어서 사용합니다(35절). 우리들이 교회만 오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존중히 여기며 섬기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도 어려서부터 예배를 존중히 여기는 믿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새해에는 우리 가정이 예배를 존중히 여기며 섬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기는 믿음으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은 무엇을 더 중히 여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엘리 제사장은 자녀들에게 육신적으로 가장 좋은 것을 주었지만 그들의 믿음을 세워주지 못했습니다(29절). 그는 하나님보다도 자신의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겨서 신앙 교육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사무엘을 주신 하나님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세마포 옷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고 합니다(18절). 그녀는 자녀를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세우는 것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기는 우선순위가 무너지면 영적 싸움에서 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기는 믿음으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성령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지금까지 개척한 교회를 예수님보다 더 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눈이 흐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예수님보다도 교회를 더 중히 여겨서 내린 결정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덜컥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더 중히 여겨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개척한 교회를 더 중히 여겨서 교회에 헌신하는 것과 예수님을 더 중히 여겨서 교회에 헌신하는 것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자는 저를 존중히 여기는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새해에는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더 중히 여겨서 헌신함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믿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들이 간접 신앙이 아니라 직접 주님을 만나는 믿음이 되게 하시며, 영적인 눈이 흐리지 않아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게 하시며, 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하는 믿음이 되게 하소서.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며, 예배를 존중히 여기게 하시며,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더 중히 여김으로 하나님을 가장 존중히 여기는 믿음을 회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
삼상 2장 27~36절 / 박봉수목사
우리나라에서는 부부가 서로를 부를 때 대부분 ‘여보’ 또는 ‘당신’이라는 말을 씁니다. 갓 결혼한 사람들은 어색해서 부르기 힘들어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부부들은 그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호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그 뜻을 새겨보면 너무도 좋은 말입니다. ‘여보’라는 말은 같을 ‘如’(여)와 보배 ‘寶’(보)를 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보배 같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여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내게 ‘보배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라는 말은 당할 ‘當’(당)과 몸 ‘身’(신)을 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당신은 내 몸’이라는 뜻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당신’이라고 부를 때 ‘내 몸과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부부가 행복한 관계를 이루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여보!‘ 즉 ’내게 보배 같은 사람‘이라고 존중하여 부릅니다. 아내는 ’당신‘ 즉 ’내 몸과 같은 사람‘이라고 존중하여 답합니다. 이렇게 피차가 존중하여 대할 때 행복한 부부관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해 드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정말 가까운 사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0절에서 하나님께서 이 점을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존중히 여기시고, 반대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기 않는 사람 더 나아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 그들을 존중히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경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상]은 이 말씀을 그대로 확인해 줍니다. 전반부에 두 인물이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사무엘과 엘리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존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경멸을 당했습니다.
후반부에 또 두 인물이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다윗과 사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존중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경멸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사무엘 상]을 읽으면서 이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무엘처럼 그리고 다윗처럼 하나님께 존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사무엘처럼 그리고 다윗처럼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삶을 살 것인가? 이 점을 깊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중심으로 엘리와 사무엘을 비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존중히 여기시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
엘리와 사무엘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비해 사무엘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무엘이 등장하기 전에 엘리와 그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상 전반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 제사장과 그 두 아들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2:1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제사장으로서 제사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제사 직무를 수행하다보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주 단절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들이 목회하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봉사자들이 교회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배자들이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저 직무 상 또는 몸에 밴 습관을 따라 교회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달랐습니다. 삼상 1-4장을 보면 원어로 네차례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섬겼다.” 삼상 1:28, 2:11, 2:18, 그리고 3:1입니다. 당시 엘리를 비롯하여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동안에 사무엘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렇게 기본 태도가 잘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늘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넬슨 제독과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저마다 두 나라를 대표하는 전쟁의 영웅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대조적인 지휘관이었습니다. 한 번은 나폴레옹이 전쟁에 나가려는데 부하가 “각하, 목사님을 모셔다가 기도를 하고 나가시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야. 전쟁과 하나님은 아무 상관이 없어.” 안타깝게도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영국의 해군 제독 넬슨은 달랐습니다. 전쟁에 나갈 때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허사로다”(시 127:1)라는 성경 말씀을 늘 암송했습니다. 그리고 전투에 나가기 전에 군목과 함께 갑판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겪는 그 모든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이야 말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첫 걸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히 여기셔서 그 모든 일들 가운데서 형통케 인도하십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성실한 사람
엘리와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습니다. 엘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성실했습니다.
본문에 엘리는 무려 나이가 98세였습니다.(삼상 4:15) 이에 비해 사무엘은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엘리는 제사장이요 사사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이끈 지 40년이나 되었습니다.(삼상 4:18) 이에 비해 사무엘은 제사장 훈련을 받고 있던 인턴과 같은 초보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임하는 자세가 노 제사장 엘리가 훌륭하고 사무엘은 그저 실수하면서 배워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삼상 3:2-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저녁이 되어 엘리 제사장은 자기 집에 편히 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상 1:9를 보면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낮에도 엘리 제사장은 그저 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삼상 4:1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지금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전황이 좋지 않아서 언약궤를 전쟁터로 내 보낸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영적 지도자라는 사람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소중한 직무를 부여 받은 사람들일 지라도 성실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그 직무를 대할 수 있습니다. 게을러서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아예 다른 일에 바빠서 거들떠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성실치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성실하지 못한 것은 곧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교인이 하나님 앞에 성실하지 못합니다. 교인으로서의 기본 의무를 제대로 담당하지 못합니다.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십일조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맡은 바 봉사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성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달랐습니다. 삼상 3:15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의 문을 열었으나” 사무엘이 아침 일찍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해 놓고 여호와의 전의 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성실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무엘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것입니다.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 패코 철강의 백영중 회장의 자서전입니다. 부제가 재미있습니다. “No Money No English"입니다. 돈 없이 영어도 못한 채 미국에 와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백 회장은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한인 사업가입니다. 현재 연 매출이 2억 달러가 넘고, 미국 내 경량철골분야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는 패코 철강회사를 설립해서 키웠습니다. 1999년에는 미국의 올해의 기업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해서 기자와 인터뷰 중 성공 비결을 털어놓았습니다. “어려운 이국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돌봐주신 것이고, 다음으로는 매사에 성실하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 붙였습니다. “나는 물건을 팔겠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저 고객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성실하게 그 필요에 응하려고 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이런 성실함을 고객들이 알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실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성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도 성실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실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 사람
엘리와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도 달랐습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삼상 2:27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에... ”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선 잘못을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29절을 보면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안타깝게도 엘리는 그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꾸짖음이 있었는데 그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3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일이 이를지라...” 안타깝게도 엘리는 하나님 앞에 이 저주를 거두어 달라고 간구하지 않습니다. 이 무서운 저주를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삼상 3: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점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귀에 경 읽기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 점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져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을 닫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달랐습니다. 삼상 3:10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이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을 보였습니다. 경청하려고 귀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삼상 3:19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경청하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 하나까지 다 이루어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경청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니까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국행동과학연구소에서 전국고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답니다. “문제가 생기면 누구와 상담을 하는가?”는 물음에 44.7%가 ‘친구’, 27.2%가 ‘부모’ 그리고 15.4%가 ‘형제’의 순으로 답했답니다. 그리고 “왜 부모나 선생님께 상담하지 않고 친구와 상담을 하느냐고?”는 물음에 ‘친구’는 내 말을 들어주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하실 때 귀담아 듣는 사람들 그들과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저 듣기 보다는 자기 말만 많이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말하고 싶어하지 않으십니다.
인간 관계론의 대가 데일 카네기는 [카네기 인간관계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무기는 입이 아니라 귀다. 대화의 질은 서로 상대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들어주는가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같은 요구라 해도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의 요구에 더 잘 따른다.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는 하나님을 멸시한다고 판단하셨고, 사무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귀를 종긋 세워서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설교 시간에 귀를 세워야 합니다. 내게 뭐라 말씀하시는가를 경청해야 합니다. 기도 시간에 귀를 세워야 합니다. 기도 중에 뭐라 말씀하시는가를 경청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존중히 여긴다고 판단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을 존중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존중히 여김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존중해 여겨야 합니다. 우선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성실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면
삼상 2장 27~36절 / 이응효목사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 대제사장을 찾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본문에 기록 된 하나님의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성령의 지시를 받고 엘리에게 온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대언한 그 말대로 엘리의 가문에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 신명기18:22절에는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드라도 그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아니고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그가 말한 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날도 소위 예언한다는 사람들이 일어나 제 마음대로 말하면서 하나님이 계시하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성경 66권을 정경으로 인을 쳐 이미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들이 구원을 얻어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충분한 말씀들을 다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에서 내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 말씀 안에 내 모든 삶의 좋은 길이 다 들어 있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점치는 영을 받아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매일 묵상집을 통해 묵상하시고 그 속에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을 통한 책망
27절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너희 조상이라고 한 것은 아론을 말한 것입니다. 또 28절에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제사장으로 삼아 제사를 집전하도록 하였고 제물 중 분깃을 주셨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제사를 위해 택한 지파는 레위지파를 말하는 것입니다.
엘리의 가문은 바로 이 레위지파에 속하였고 그 중에서 아론의 반열에 속하여 대제사장으로 특혜를 누리면서 살아왔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우습게 알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를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29절에는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엘리>도 그 아들들이 제물을 가로채고 예배를 짓밟은 죄에 동참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들들이 저지른 죄지만 <엘리>가 하나님 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겨 죄를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아들들의 죄에 엘리도 공범으로 동참한 것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자식들이 잘못되면 부모의 책임이 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부모에게 그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자녀들이 탈선하거나/ 성격장애자가 되어 사회생활에 뒤처지는 경우나/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우울하게 되거나/ 일하지 않고 게으른 생활을 하는 것은 그 가정에서 아버지들이 아내에게 폭언 하고 폭행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였거나 아니면 술과 도박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고 게으른 모습을 보였거나 어린 자녀들에게 폭군의 모습을 보인 것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고 뒤틀린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내 허물과 죄가 생각나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녀들에게도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삶을 통해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그리하면 자녀들이 변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의 범죄는 곧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니 배은망덕한 죄요 아들들의 죄는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소중히 여긴 엘리의 죄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30절에서 전에 모세를 통해 아론의 집이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 후손들이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리라고 하셨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도 그 집을 경멸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엘리의 가문에 반드시 일어날 일
31절에는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팔은 힘과 젊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팔을 끊는다는 것은 그 집안의 힘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젊은 나이에 죽는다는 말입니다.
32절에도 그러므로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고,
33절에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34절을 보면 “네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고 못을 박듯 예언하였는데 과연 그대로 되었습니다.
4장11절에는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겨 아들들의 심각한 죄에 대하여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엘리는 아들들의 죽음과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그의 며느리도 해산하다가 죽고 맙니다.
여러분 절대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를 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일제시대 조선일보에 실린 실화입니다.
어느 부부가 결혼을 한지 오래되었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웃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부부는 하나님께 서원하며 기도하기를 아들만 주신다면 더욱 더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이 많은 이 부인이 임신을 하였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너무나 기뻐하며 아들을 키우는데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잊어버리고 교회당에 오면 아들만 바라보고 웃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뒷전입니다.
보다 못한 목사님이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자 화를 내고 시험에 들어 교회당에 나오지 않겠다고 하면서 신앙을 버렸습니다.
그 후에 그 노부부가 오냐오냐 하면서 키운 그자식이 못된 망나니가 되었고, 술 도박을 좋아하더니 집안을 말아먹기 시작하였습니다. 노름 빛에 문전옥답이 다 날아갔습니다. 아버지가 결국 화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소문이 나자 근동에서 아무도 이 아들에게 시집을 오지 않으려고 하여 노총각으로 늙어갔습니다.
이제는 늙어 허리가 구부러진 어머니가 이집 저집 다니며 구걸을 하여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 사람이 보니 그 집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저 집 굴뚝에 연기가 끊어진지 오랜데 무슨 일일까?” 하고 그 집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부엌에서 그 집 아들이 솥에 무엇을 삶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물으니 개를 한 마리 잡아 삶고 있다고 하면서 솥뚜껑을 열어 보여주는데 마을 사람이 기절할 뻔하였습니다. 그 솥 안에는 죽은 어머니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미쳐버린 자식의 눈에 어머니가 개로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 자모님들 자모실, 그 좁은 공간에서 어린 자녀들을 힘들게 안고 달래며 불편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지만 자녀들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옆 사람과 말하지 말고 오직 모니터를 바라보시며 하나님께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자식을 더 중하게 여긴 엘리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주님 나라가는 그날 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멸시하거나 예물을 멸시하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거나 더 소중히 여기는 이런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겨주시는 하나님
30절 하반절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5절는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 곧 사무엘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무엘은 어린 아이로 부모를 떠나 실로의 성소에서 자라났지만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 그 일생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성경에서 요셉을 보면 그가 형들의 손에 팔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지만 비참하고 비통한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므로 하나님이 그를 높여 모든 사람위에 높여 주시고 감옥 안에 갇혀 있던 죄수를 하루아침에 높이 들어 국무총리로 세워주시고 애굽 전역을 다스리는 인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들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잊혀진 존재였고 형들이나 집안 모든 사람의 관심 밖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들에서 양을 지키며 별이 빛나는 그 밤에 하늘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수금을 타면서 찬양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다윗을 주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주님을 존중히 여기는 이 젊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고 메시야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성경에 그 이름이 가장 많이 기록되는 복도 함께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다윗과 그 가문을 영원히 축복하셨습니다.
성경의 다니엘을 보면 그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노예가 되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존중히 여기므로 하나님이 그를 들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과 벨사살왕때 국무총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며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고, 바사의 다리오왕 시대에도 역시 국무총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비록 포로로 잡혀와 비참한 자리에 떨어졌지만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 다니엘은 나라가 망하고 왕조는 바뀌어도 하나님이 한 없이 높여주신 것입니다.
에스더는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자 하나님은 그를 아하수에르왕의 왕비가 되게 하여 주셨고 그의 삼촌 모르드게는 포로출신이지만 역시 국무총리가 되어 바사의 대제국을 다스리게 됩니다.
느헤미야를 보십시오. 역시 노예로 잡혀온 사람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자 하나님이 그를 높여 아닥사스다왕 때 그는 술 맡은 관원장이 됩니다. 왕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 아니면 술 맡은 관원장으로 세우지 않습니다.
그가 이런 높은 벼슬을 하고 왕의 신임을 얻었지만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조국 유다의 성이 파괴되고 성문은 불타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수일을 울며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한 뒤 왕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왕은 그를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성을 중건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예로 있을 때나 높은 관직에 있을 때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겨 구원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보통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변하기 쉽지만 이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힘든 노예 신분으로 있을 때나 고관대작이 되어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히 여기므로 하나님이 그와 그의 후손들을 존중히 여기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볼 때 출신이나 학력이나 외모나 환경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느냐 하나님을 무시하느냐에 따라 당신과 당신의 자녀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만났거나 견딜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있다고 하여도 위에 열거한 분들이 겪은 고난 보다는 덜할 것이고 그들이 처한 환경보다는 훨씬 더 좋은 환경 속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집중하여 은총을 부으시므로 그들을 그 시대에 위대한 인물로 세워주셨습니다.
두말할 것 없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십시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앞세우고 언제나 하나님을 인정하시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십시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시고 늘 주님한 분만으로 만족한다고 고백하시고 실재로 그 고백이 당신의 삶이 되도록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엘리와 한나의 가정교육
삼상 2장 29~30절 / 김홍도목사
오늘은 어린이주일이고 다음 주일은 어버이주일입니다. 그리고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날 가장 큰 위기 중의 하나는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교실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이혼으로 말미암아 아이들이 버리워지거나 고아원에 갖다버려진 아이들이 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자녀교육에 실패한 제사장 엘리와 자녀교육에 성공한 한나를 대조해 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엘리는 자식들의 죄에 무관심했고
한나는 자식을 거룩하게 키웠습니다.
엘리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되었으면서도 두렵고 떨림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거룩한 제사를 짓밟고 신성을 모독했습니다. 백성들이 제사드리러 오면 세살 갈고리로 솥에서 찔러내어 구워 먹고 삶아 먹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헌금이 들어오면 마음대로 끄집어내다가 제멋대로 써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상 2장 17절에 보면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22절에 보면 소위 제사장들이란 사람들이 회막문에서, 즉 거룩한 성전 안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는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무관심했습니다. 23~24절에서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하는 정도로만 이야기했지, 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야단을 치거나 심하게 책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3장 13절에 두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는 말이 히브리어에는 “그들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아들들이 저주받을 짓을 했는데도 눈살도 찌푸리지 않았으니 어찌 죄의 심판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는 평범하게 나무랄 뿐 호되게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렇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다”는 뜻은 거룩하게 구별해 키웠다는 뜻입니다. 어려서부터 성전에서 수종 들며 구별된 생활을 했습니다. 결국 제사장 엘리에게는 계시가 끊어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지만 어린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결국 엘리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에나갔다가 법궤도 빼앗기고 자기들도 전사해서 나라를 망하게 했지만 사무엘은 큰 회개의 운동을 일으켜 나라를 구원했습니다.
부모는 어려서부터 잘못을 바로잡고 죄를 지으면 징벌이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합니다. 잠언 14장 9절에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했고, 잠언 13장 24절에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했습니다. 잠언 29장 15절에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을 툭하면 화풀이로 때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잘못된 교육철학이 나라들을 어지럽게 하고 부패하게 만듭니다. 체벌도 못하게 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해도 때가 되면 다 고쳐지니까 가만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된 짓 다 하고, 부모를 구타하거나 멀리 갖다버리기도 하고, 스승의 머리를 깎거나 구타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2. 엘리는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존중히 여겼고, 한나는 하나님을 더 존중했습니다.
엘리는 자식들을 너무 사랑하고 귀중히 여긴 나머지, 하나님을 모독하고 거룩함을 짓밟는데도 심상히 여겼습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요, 그 자식을 멸망케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 29절에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고 하나님의 분노에 가득찬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전혀 그와 반대입니다. 한나는 기도 응답으로 받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젖떨어지자마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성전에서 자라며 수종 드는 일을 했습니다. 웬만하면 “서원은 그렇게 했지만 몇 년만 더 데리고 있겠습니다.” 했을 터인데 한나는 젖떨어지자마자 냉정하게 떼어 성전으로 보냈습니다. 결국 그 아들이 영적으로 큰 부흥을 일으켰고 나라도 구원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백 세나 돼서 받은 아들을 너무 귀히 여긴 나머지 하나님만 차지해야 될 마음의 지성소에 아들이 차지한 것을 보시고 “번제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보시고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고 하시면서 아들을 돌려주실 뿐 아니라 엄청나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TV에서 연속극이나 보고 만화나 보면서 교회에 안 가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내버려두는 부모는 하나님께 큰 책망 받을 것을 각오하시기 바랍니다. 자식을 밥과 옷으로만 키운다고 다된 것이 아닙니다. 자식들이 일류 대학엔 못 가도 신앙교육은 바로 시켜야 합니다. 자식의 육신이나 정신의 교육보다 영원한 영혼을 바로 이끌어 주는 것이 정말 복 받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신앙으로 바로 키우지 못한 사람은 자식을 낳지 않으니만 못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임마누엘 교회 김국도 목사가 초등학교 때 몹시 추운 겨울날 교회에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니까 저의 어머니께서 밥도 안 주고 옷을 다 벗기고 밖으로 내어쫓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영하 20도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도 혼만 내고 금방 들어오게 한 것이 아니라 5분, 10분, 15분, 문을 꼭 잠그고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감기 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할 때 “얼쿠려면 바싹 얼쿠어야 감기가 안들지 찬바람만 쏘이면 도리어 감기 든단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7남매가 엄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4형제가 모두 목사가 되고 딸들은 목사 혹은 장로의 부인이 되었고, 손자들도 모두 목사 혹은 목사 부인이 되었습니다. 평생 “너희들 공부 잘 해라” 혹은 “돈 많이 벌어라” 하는 말씀은 듣지 못했으나 “내 평생 소원은 너희들 예수님 잘 믿는 것이다” 하는 말씀만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말 안 듣고 속 썩히는 자식들이 있었지만 결국 다 예수님 잘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자녀들을 제멋대로 하도록 버려두는 부모는 마귀의 일을 하는 사람이며 신앙을 무의미하게 하며 구원을 불가능하게 하며 자녀들의 육신과 영혼을 멸망케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3. 엘리는 기도하지 않았고 한나는 간곡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2~13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한나는 “오래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간절히 깊이 있게 기도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으면 엘리가 “술 취한 사람”인 줄 알았겠습니까? 사무엘상 1장 15절에 있는 한나의 대답을 보십시오.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사무엘상 1장 16절에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한나는 어려운 문제를 기도로 해결한 사람이며 억울하고 분한 것을 사람에게 복수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도로 하나님 앞에 물 쏟듯이 쏟아놓은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는 것이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엘리가 한나의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았는지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할 때에 한나는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한 말씀을 보면 한나는 참믿음의 기도를 드린 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종 엘리의 축원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될 것을 믿었습니다.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한 말씀을 보면 “주의 종의 기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신 것 같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 엘리는 기도했다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의 눈이 어둡고 영의 귀가 어두워서, 간절히 기도하고 오래 기도한 한나를 술취한 사람이라고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은 엘리의 자식들은 타락하고 방탕하다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법궤도 다 빼앗기고 나라를 망쳤지만 기도의 사람,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영적으로 큰 회개운동, 기도운동, 부흥운동을 일으켜 나라를 구원했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 배후에는 거의 다 위대한 기도의 부모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4형제가 다 목사가 되고 부흥사가 된 것은 저의 어머님의 기도의 영향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Augustine의 어머니 모니카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방탕한 아들을 위하여 여러 해 동안 기도하고 눈물을 흘려도 응답이 없어서 유명한 암브로드 감독에게 찾아가 상담을 했더니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이 망하는 법이 없으니 계속 기도하라”고 말씀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Augustine은 세계적인성자가 되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자식들이 무서운 죄를 지어도 꾸짖지도 않고 안타까워하지도 않고 심상히 여기고 간절히 기도하지도 않았고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귀중히 여기더니 그 가정이 비참하게 망해서 제사장 대도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 군사의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엘리는 전쟁에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꼬꾸라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 자부는 남편과 시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아기를 낳다가 “이가봇” 하고 죽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하루에 제사장 엘리와 두 아들과 자부가 다 죽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나라를 구원했고 영적인 큰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이 나라의 장래는 여러분 부모들의 자녀교육에 달려 있습니다.
존중히 여김을 받자
삼상 2장 30절 / 오창우목사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 보면 ‘나(하나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하나님이) 존중히 여기고 나(하나님)를 멸시하는 자를 나(하나님)이 경멸하리라’ 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마음은 모두가 존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귀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사무엘상은 엘리와 두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라는 제사장 가문과 한나의 아들 사무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가문은 저주를 받는 내용이 나오고, 한 가정은 무 자식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축복받은 가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무엘 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있는 형편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존중히 여김을 받기도 하고, 멸시하기도 한단 말입니다. 내가 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는 것이지, 제사장이냐 아니냐에 따라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존중히 여김을 받는 가정, 성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존중히 여겨야 하고 그 일로써 존중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노부부가 시골에 내려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사시느냐고 물었더니, 소나무처럼 산다고 대답합니다. 소나무 이야기를 하는데, 소나무는 날이 가물거나 땅이 척박하게 되면 잎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겨울에 나무들은 잎이 다 떨어져서 추운 겨울을 보냅니다. 소나무는 환경이 나빠지면 잎이 다 떨어지는데, 떨어진 솔잎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썩으면 거름이 되어 잡초가 자라기 때문에 썩지 않고 벌레가 날아와도 항균작용을 하는 물질이 나와서 그 주변엔 어떤 벌레나 잡초도 생성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노부부 는 나이가 많이 들어 소나무처럼 살아간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시골에 내려가서 호박을 심었는데, 씨만 뿌리면 될 줄 알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아 낙심을 했다고 합니다. 농부에게 가서 물었더니, 그 땅을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땅을 30cm 이상 파고 거름을 준 후, 3년 정도는 두어야 옥토가 된다고 합니다.
어디에 가서 분뇨를 구하겠습니까? 고생을 해서 거름을 구한 뒤, 3년동안 그 땅을 옥토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 호박을 심었는데, 얼마나 잘 자라던지 정말 꽃피고 열매 맺히는 호박 하나하나에 정성과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 하나하나에 부모님의 사랑을 담아서 자식들에게 주었습니다. 자식들이 이것을 보고 기뻐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갖다 주어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이걸 어떻게 다 먹느냐며 투덜대는 소리를 들으니 얼마나 실망이 되더랍니다.
그러면 호박농사를 안 짓느냐고 물었더니, 그래도 짓는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무엇이라 하건,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확인시켜드립니다만, 자식은 남입니다. 너무 기대 하면 상처받고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식은 도와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남이 아닙니다. 나에게 늘 무거운 분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의 애굽 땅 종되었던 곳에서 구출해 내었다’, ‘많은 가정 중에서 너의 가정을 제사장 삼았다’, 그런데 엘리의 가정은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너는 나보다 아들들을 귀하게 여기었다’ , 이 가정의 중심은 자식들입니다. 아무렇게나 불량자 노릇을 해도 아버지가 책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조건 오냐오냐 받아주면서 가정의 중심이 자식이 되니, 하나님이 그 가정을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제사장도 아니지만, 얼마나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지 하나님의 성전에 가고, 항상 성실하게 예배드리고, 하나님은 그 가문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의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가정이 축복된 가정입니다.
오늘 ‘엘리의 가정’ 을 비유로 간단하게 세가지만 말씀드리려 합니다.
1.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날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사야 58:13-14 / ‘안식일을 가리켜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가 그렇게 하면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하나님의 날을 존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주일을 지키는 나라는 선진국이지만, 주일을 지키지 않는 나라는 대부분 얻어먹는 나라들입니다.
일주일의 6일은 육의 축복을 받는 날이지만, 안식일은 영의 축복을 받는 날입니다.
미국이 서부개척시대에 서부에 금이 있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동쪽에서 달려왔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주일동안 쉬지 않고 달려오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청교도들은 엿새동안 달리고 안식일은 예배드리며 긴 여정을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서부의 금광에 도착한 사람들 중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사람들은 중간에 오다가 말들이 병이 나고 사람들이 병이 나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일주일에 한번은 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성별되이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엘리 가정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날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어디에 가면 기다리지 않습니까? 주일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날 나와서 예배드리는 자가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시간에 지각안하고 일찍 오시면 좋겠습니다. 음악회에 가면 기왕이면 로얄석이 좋지 않습니까? 예배드릴 때도 앞자리가 좋지 않겠습니까? 구경하듯 예배드리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하겠습니다. 순서를 맡은 분들은 순서를 빼먹으면 안 됩니다. 주일 예배 성공하는 것은 신앙의 성공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가정은 주일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십니까? 자녀들에게 만사를 제쳐놓고 이 날은 주의 날이니,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된다고 가르치십니까?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어려서부터 배웠던 것은 이런 것입니다. 토요일은 안식일 예비일이다, 목욕 갔다 오고 주일날 입을 옷 미리 준비하고 헌금도 깨끗하게 준비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신령’ 이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을 이야기합니다. 영의 가장 높은 수준이 무엇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이날에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고자 나오는 것입니다.
늦게 와서 허둥지둥 하면 은혜가 절감됩니다. 그러나 일찍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 큰 은혜로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날을 존귀히 여길 수 있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것을 드림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단순히 축복을 받고 안 받고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고백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신명기14장22-23절 / 너는 마땅히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를 먹으며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하나님의 것을 바치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29절에 보면 ‘너희는 어찌하여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받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말라기3장8-11절 /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의 것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는 것이고, 축복의 문을 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십일조와 봉헌물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는 정확히 십분의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정확히 십분의 일을 드리기 위하여 농사를 지어도 조 농사는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는 너무나 작기 때문에 십분의 일을 골라내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조 한말의 십분의 일을 골라내려면 한달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 농사는 안 지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하나님께 십분의 일을 드리기 위해 힘썻다는 것입니다. 봉헌물도 잘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주일헌금 드리는 것도 우리가 내 믿음과 헌신을 주께 다 바쳐 드리는 것입니다. 이름을 써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고 소홀히 드려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헌신이 늘어나게 될 때 하나님이 존귀히 여기실줄 믿습니다.헌금은 항상 즉시 드려야 됩니다. 받으면 받는 대로 빨리 드려야지, 늦게 드리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늘 시험에 들게 되어 있습니다.
후라이보이 곽규석씨가 간증을 했는데, 자기가 생활이 너무나 어려워 하나님의 십일조 2만원을 꾸었답니다. 하루는 아들이 늦도록 안와서 기다리는데, 친구집에서 놀다가 이마를 다쳤습니다. 병원에 가서 이마를 고치는데 병원비가 딱 2만원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꾸어서 절대 이익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먹어도 안됩니다. 이것은 씨앗입니다. 농부는 씨앗을 먹지 않습니다. 씨앗을 베고 자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이 씨앗은 절대 안 먹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십일조, 봉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안하는가에 대한 측정의 척도라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일조의 성공은 삶의 축복의 성공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것을 드림으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살았던 집에도 도둑이 들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십일조 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둑이 들어와서 다른 것은 갖고 가고 십일조만은 안 가져 갔습니다. 도둑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나 봅니다. 십일조는 도둑놈도 안 갖고 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 속에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을 존귀히 여김을 받게 해야 합니다.
로마서12:1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우리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거나 물질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 하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날, 하나님의 것을 무시합니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서 이 고생 저 고생 하며 다니다가 마침 사울이 잠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의 부하 아비새가 사울임금의 잠든 것을 보고 다윗에게 사울을 죽이자고 합니다. 그 때에 다윗이 무엇이라 합니까?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종 하나님이 처리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어찌 하겠습니까? 사울 임금은 다윗을 쫓는데 다윗을 도와주는 제사장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히멜렉 입니다. 왜 자신을 돕지 않고 그를 숨겨주었냐며 제사장 85명을 다 죽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 특별히 선택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가문을 하나님께서 당대에 다 없애 버리십니다. 하나님의 종을 두려워 하는 사람,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늘 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이 다른 가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이면 하나님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어떤 집에 심방 가면 아이들이 성경책을 밟고 다녀도 그냥 두는 집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예배 후에 성경찬송을 치워야지, 그냥 두니 밟고 다닙니다. 하나님의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러 형편과 처지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내 감정, 내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당장은 손해가 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이 높여주시고 은혜 주신다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갖고도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고난이 오고 시험이 와도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자가 없으리라 우리의 문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열려 해도 하나님이 열어주셔야 우리의 길이 열려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역대상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가정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 중심의 가정, 하나님 중심의 성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즘 너무 자식들이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고 은혜주신다는 사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이 존중히 여기신다 했고, 오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날을 존중히 여김으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것을 존중히 여김으로 드리고 우리의 삶에서도 내가 먼저가 아니고, 내 앞에 하나님이 늘 계신 것처럼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