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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에 마른땅이 나타나자 그들은 어린양들처럼 뛰었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18,14-16; 19,6-9
14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15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
16 그는 당신의 단호한 명령을 날카로운 칼처럼 차고 우뚝 서서,
만물을 죽음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가 땅 위에 서니 하늘까지 닿았습니다.
19,6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7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8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9 그들은 풀을 뜯는 말들 같았습니다.
또 어린양들처럼 이리저리 뛰면서,
주님,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parable of the persistent widow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주님의 자녀들은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는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졸라대는 과부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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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서의 저자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던 날을 묘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달라고 조르는 과부의 비유를 드시며,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냐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제1독서인 지혜서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행하신 업적을 노래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말씀이 육을 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도 줄곧 졸라대며 매달리는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데,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지 않은 채 미적거리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분명 제자들에게 낙담하지 말고 계속 간청하라고 권고하시는 말씀입니다.그런데 오늘 복음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부가 청한 것은 다름 아닌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올바른 판결이란 하느님 뜻에 맞는 판결을 뜻합니다. 재판관이 불의한 자, 곧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였지만, 과부는 그에게 하느님 뜻에 맞는 판결을 내려 달라고 청합니다. 결국, 불의한 재판관은 올바른 판단, 곧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들이 내리는 판결을 내려 줍니다.여기서 한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간청해야 할 것은 “올바른 판결”입니다.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로서 하느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우리가 늘 올바른 것을 간청하였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나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한 것은 아닌지, 나에게 득이 될 것이라 여기지만 결국 나와 공동체에게 해가 될 무엇인가를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나는 모두를 위하여 유익이 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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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비유를 하나 드십니다.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시비를 법정에서 가리지 않고 원로들에게 가서 중재를 부탁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쟁의를 재판에 넘기게 되면, 주된 재판관은 로마 총독이 임명합니다. 재판관은 뇌물을 많이 받았기에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고 합니다.
한편 과부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불의한 재판관에게서 공정한 판결을 기대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한 가지 강력한 힘이 있었는데 바로 끈질김이었습니다.
재판관은 불의하고 탐욕스러운데도 그 끈질김에 견디다 못해 과부의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선하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의 요구를 당연히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생각해야 할 점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기도는 먼저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어 공동체를 위해서,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그 뒤 내가 바라는 바를 겸손하게 청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기도가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의 뜻을 파악하고, 그 실행 방법을 찾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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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느님도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라도 끈질기게 찾아오는 과부 때문에 결국 재판을 해 주고야 만다는 비유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께 꾸준히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볼 때, 이 기도는 종말에 대비하여 믿음을 잃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기에,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였지만, 힘도 돈도 없는 과부가 오로지 재판관이 서둘러 판결을 내려 주기를 간절히 바라듯이,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아버지의 나라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지도 않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도하지도 않겠지요. 이렇게 믿음이 점점 더 사라지고 나면,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세상에서 주님에 대한 믿음은커녕 관심마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내가 곧 간다.”(묵시 22,20)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우리는 참으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정말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도는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진실성은 어렵고 우아한 어휘로 바치는 기도의 기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쉽고 단순한 말을 되풀이해서 기도하는 ‘끈질긴 노력’에 있음을 오늘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말씀으로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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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빈다는 것은 인간의 심성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행위입니다. 자신이 종교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때때로 자신이 모르는 절대자에게 절실하게 소원을 빌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 또한 청원 기도를 자주 바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청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청원 기도보다는 감사와 찬미의 기도가 더 높은 차원이라는 영적 지침을 듣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청원 기도를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신앙인들의 청원 기도와, ‘먼 곳에 있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올리는 비신앙인들의 염원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청하는 과부는 재판관과 같은 고을에 살아 그가 바로 가까이에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기도하는 이들이 가져야 하는 주님의 ‘현존 의식’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청원이든, 감사와 찬미이든, 묵상이든, 모든 기도의 진실성과 간절함은 하느님의 현존을 ‘가까이’ 느끼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먼 곳’을 향해 보내는 ‘기약 없는 편지’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하는 대화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과학자이자 신학자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테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의 묵상 한 대목이 기도 생활의 기초가 되는 하느님의 ‘현존 의식’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안에, 그리고 성자로 강생한 모든 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주변에서 보고, 만지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세상과 완전히 떨어져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 안에서, 현재의 일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중략) 하느님께서는 나의 연필 끝에도, 나의 붓 끝에도, 나의 바늘 끝에도, 내 마음과 생각 안에도 현존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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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억울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범인으로 지목되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하소연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의 죄상이 언론에 게재되어 사회의 여론마저 그의 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대법원에서도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내내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 뒤 몇십 년이 지난 어느 날, 법원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국가는 뒤늦게 유족에게 배상을 해 주었습니다. 사형수를 대신해 유가족이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한 덕분이었습니다. 1970-1980년대에 빨갱이로 내몰려 희생되었던 사람과 그 유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기도는 주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대화는 서로 진실을 이야기하면서, 상대방 이야기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제대로 잘 풀리지 않으면 소통이 되도록 끊임없이 믿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끊임없이 주님의 은총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고 믿을 때만, 우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꼭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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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30대의 어느 여성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이기에 직업도 안정되었으며 다른 외적 조건도 잘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여성은 이제 딱 한 가지, 멋진 남자를 만나서 혼인만 하면 인생의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녀의 매일 기도 주제는 좋은 남자를 만나 혼인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족도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어떤 응답도 받지 못한 채 그녀의 나이는 어느새 마흔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여성은 지쳤고 절망했습니다. 친구들도, 사람들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냥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일 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인생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응답 없이 침묵하시는 하느님은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계셔도 그만 안 계셔도 그만인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자 삶은 더욱 외로워지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져갔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였지요. “내 생??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8-9).
하느님의 뜻은 우리 뜻과 다를 때가 매우 많습니다. 하늘과 땅의 높이와 깊이만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뜻 안으로 하느님을 끌어들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얼굴을 감추시고 맙니다. 만일 마흔에 이른 그 여성이 그토록 바라던 혼인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을 실패한 것으로 여기고 슬프게만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하느님마저도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분으로 여긴다면, 그녀의 인생은 늘 공허하고 외로울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느님께서 더 큰 무엇을 주시려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운명을 주신다고 넓게 받아들인다면 어떨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그에게 끊임없이 졸라대는 과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과부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이득을 위한 판결이 아니라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 깃든 하느님 뜻을 올바르게 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올바른 판결은 깊고 높은 하느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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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어른이든 어린이든, 마음을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은 경건한 느낌을 줍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이러한데, 주님께서도 어여쁘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니, 억지 기도나 ‘후다닥 바치는 기도’는 가능한 삼가야 합니다. 한두 번 청하고 ‘그만두는’ 기도 역시 피해야 합니다. 기도를 ‘끊임없이’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즐겁다면 ‘쉽게 자주’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의 항구함은 분명 즐거움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쁨의 기도’를 체험하게 해 주시기를 청해야 합니다. 기도는 은총의 이끄심이기 때문입니다.
‘토머스 머튼’은 트라피스트 수도회 소속 사제로 영성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종교에 대해 냉소적이었습니다. 그를 바꾼 것은 28세 때 체험한 수도원의 침묵입니다. 어느 수도회의 단기 교육에 참가했던 것이지요. 이후 그는 삶의 자세가 바뀌었고, 죽을 때까지 침묵을 사랑했습니다.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애썼습니다.
기도가 기쁨이 되려면 ‘침묵’을 연습해야 합니다. 기도가 힘들다는 ‘이유’를 말하지 않는 일입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일입니다. 행동하는 기도일 때, 은총은 ‘마음의 눈’을 열어 줍니다. 기도 생활의 문제점은 늘 자신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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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보고 굿을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한 장에 천만 원이 넘는 부적도 있다고 하니 놀랄 일입니다. 그까짓 종이 한 장이 무슨 힘이 있을는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매달립니다. ‘참믿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힘과 기운을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거액을 투자합니다. 그렇게 정성을 쏟으면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고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지요.
과거를 족집게처럼 알아맞히는 점쟁이가 있다면서 놀라워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집어내는 과거는 모두가 ‘아픈 과거’입니다.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의 과거를 더 잘 알아냅니다. 그런 뒤 그들이 내리는 처방은 대개 비슷합니다. ‘곧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머지않아 큰돈이 생길 것이다. 좋은 인연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서 조건을 다는 것이지요.
지난 일을 점쟁이에게 물어볼 이유가 없습니다. 과거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앞날은 언제나 ‘본인의 몫’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공평한 주사위입니다. 그러니 늘 기도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힘과 기운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나와 함께 있으면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중단 없는 기도만이 ‘하느님의 보호’를 체험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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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한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 왔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가르침은 누누이 들어 온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기도하면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즐겁고 행복하다면 자연스레 바치게 됩니다. 기도할수록 피곤함이 사라진다면 누구나 매 순간 기도할 겁니다.
기도의 항구함이 부족한 것은 이렇듯 기도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진정 즐거운 것일까요? 기쁨을 줄까요? 그것은 경험의 문제입니다. 그러한 경험을 한 번만 해 보더라도 기도의 기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시도해 보십시오.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기도해 보십시오. 아무 생각도, 아무 상상도 하지 말고 십자가만 바라보십시오. 시간을 내어 그렇게 한다면, 기도를 이끌어 주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는 이끄심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힘이 이끌어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먼저 조용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아무리 할 일이 많고 감정이 복잡하더라도 그것을 제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재판관은 사람을 우습게 보는 거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도 과부의 청원에는 마음을 움직입니다. 주님께서는 거만하지 않으십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청원을 들어주실 분이십니다.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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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웃는 자가 가장 잘 웃는 자이다.”라는 독일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노라면 한때 잘살 때가 있고, 공부도 한때 잘할 수가 있고, 한때 인기도 누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까지 잘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꾸준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데에도 역시 꾸준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재판관에게 꾸준하게 졸라 대는 과부처럼 말입니다.
어느 책에서 나무늘보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느리고 잠을 많이 자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솔직히 거북이보다도 느리다는 사실은 저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보통 70㎝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나무늘보는 1분에 20㎝ 정도밖에 움직일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생기지 않습니까? 이렇게 느리다면 포식자들의 먹잇감이 되어 멸종의 위기를 겪어야 정상일 것만 같습니다.
나무늘보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독을 내뿜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느릴 뿐입니다. 하지만 이 느린 점이 오히려 다른 동물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거의 움직이지 않아서 몸에 이끼까지 자생할 정도라고 합니다. 이 이끼가 자연스럽게 보호색 역할까지 하지요. 여기에 주식은 다른 동물이 잘 먹지 않는 나뭇잎입니다. 느리다는 것이 큰 걸림돌인 것 같았지만, 이 느림이 지금까지 멸종하지 않고 살아 있게 하는 나무늘보의 가장 큰 장점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단점이라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나를 특징짓는 그리고 나를 성장시키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무늘보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처지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포기할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 나갈 때 분명히 삶은 내 편이 되어서 큰 기쁨과 행복의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갈 때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두 번 기도하고서 “주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는다.”라고 포기한다면 결국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일을 찾아서 해나간다면 그를 통해 또 다른 삶을 주님께서는 선물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길게 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끊임없이 하는 기도였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더 잘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하고 많은 말로 기도하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를 전해주시지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었지만 성가시게 계속 졸라 대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들어주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과 비유에 나오는 재판관과의 비교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처럼 하느님도 불의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재판관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정의롭고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의 청을 얼마나 더 잘 들어주시겠습니까?
인생의 소나기 먹구름 뒤에는 언제나 변함없는 태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채규철).
쉽다는 이유로...
예전에 어떤 분께서 몸에 좋다면서 어떤 물이 담긴 물통을 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약재를 우려서 만든 물인데 몸의 면역력을 키우는데 최고라는 것이었습니다. 맛이 궁금해서 물통의 뚜껑을 여는 순간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냄새가 너무 고약했습니다. 여기에 들어간 약재 중에는 오징어 말린 것도 들어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비린내가 심하게 났던 것이었습니다.
이분의 정성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먹어야 하겠지만, 하루에 세 번 이상을 무조건 먹으라는 명령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힘든 물이었습니다. 이런 고충을 동창 신부에게 이야기했더니 이런 말을 해줍니다.
“먹지 마! 이 물 마시는 것보다 30초씩 손을 닦는 것이 더 효과가 있어. 30초만 소비하면 손의 나쁜 세균이 90% 이상 없어진다고 하잖아. 손만 잘 닦아.”
우리는 어렵고 힘든 것에만 길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곁에 이미 길은 놓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단지 저 멀리에 있는 것, 그리고 남의 길만 바라보고 있기에 나의 쉬운 길을 놓치는 것이 아닐까요?
건강을 지키는 손쉬운 방법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쉽다는 이유로 효과가 없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을 자비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불의하고 매정한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가 한 판 붙었습니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더 집요하고 고집스러웠습니다. 결국 과부가 판정승을 거두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끈질김이었습니다. 결국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을 자비로 바꾸어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닌 상태에서, 승리에 찬 종말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이 중간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박해와 고통 앞에 서게 됩니다. 그날이 너무 더디오는 것 같고, 주님은 너무 멀리 계시는 듯한 느낌에서 오는 실망과 좌절감이 상당합니다.
이런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비유는 기도할 때, 대충, 적당히 기도할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집요하게, 목숨걸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예루살렘에는 대사제와 70여명으로 구성된 최고의회격인 산헤드린이 설치되어 있어서, 절차에 따른 재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방 소도시나 시골에서는 대체로 회당을 지키는 율법 교사가 재판관 역할까지 도맡았습니다.
유산이나 금전 관련 소송이 발생했을 때, 공인 재판관들은 재판을 열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판관은 무관심하고 심술까지 궂어, 과부의 재판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과부는 재판만 열리게 되면 이길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인가?’가 과제였습니다. 과부는 뇌물을 제공할 처지도 못되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몇번을 거절 당한다 할지라고, 가고 또 가고, 청하고 또 청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마치 투견장에 들어간 큰 불독 한 마리처럼 말입니다.
그녀의 집요한 압박에 재판관은 점점 그녀 존재 자체가 귀찮아지게 되었습니다. 틈만 나면 찾아와서 징징거리며 졸라대니, 스트레스가 점점 치솟았습니다. 과부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파악한 재판관은 마침내 두손 두발 다 들고 만 것입니다.
과부의 끈질김 앞에 불의한 재판관도 두 손 두 팔 다 들고 도움을 주었듯이,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끈질기게 간청할 때 절대로 나몰라라 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때로 우리를 좀 기다리게 하실지언정, 때로 우리의 조바심을 유발시키실지언정, 절대로 우리의 청을 거부하지 않으심을 믿어야겠습니다. 청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해 손톱만큼의 의심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할 때,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서진 마음과 꺽인 영을 안고 밤낮으로 청하고 또 청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기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끈질기게 청하고 물고 늘어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의 간절한 기도 지향들을 읽어보며, 어이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 지향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될 때도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 역시 좀 더 큰 기도, 더 하느님 뜻에 맞갖은 기도, 더 영적인 기도로 성장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빨리 임하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통과 십자가,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희망하기를 바라는 기도...
죄송하지만 청하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때 믿음의 기도가 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제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최 루카 형제님이 스테파니아 반장님께 카톡으로 보낸 글들을 소개시켜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분이 병자성사를 받으시며 느낀 ‘기도에 대한 체험’을 함께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병자성사 시작 직전에 문득 제가 저지른 잘못이 제 머리를 스쳤습니다.
저는 영과 혼과 육을 포함하여 제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하였고, 늘 그렇게 되새기며 지냈습니다. 불면의 밤이 계속되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쳐갔을 때, 또는 참을 수 없을 만큼의 통증이 왔을 때 ‘주님, 저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고, 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이 몸뚱이도 당연히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일 뿐이요, 저는 살아가는 동안 그저 주님의 것을 선량하게 관리할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잠을 못자거나, 참기 어려운 통증이 오면 그것은 주님께 큰 손해(?)입니다. 그러니 주님 뜻에 다 맡기니 알아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며 투정(일종의 항의??) 섞인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해도 될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초심자이니 감안해 주실 것이고, 저의 깊은 속마음까지 꿰뚫는 분이시니, 무슨 기도를 못하겠냐는 마음으로 고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저를 재워주셨고, 통증을 없애주셨습니다. 물론 저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언제나 저의 잘못에 대한 가슴 깊은 회개가 있었을 때에만 그러한 응답이 있었습니다.
오늘 병자성사 전, 갑자기 제가 주님께 봉헌한 저의 육신을 그리고 영과 혼을, 그동안 너무나 소홀히 다루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조금 피곤하다는 핑계로 운동을 소홀히 하였고, 특히 기도와 성경읽기를 최근 들어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제 모습을 깨닫고는 참회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또 다시 제 기도에 바로 응답을 주신 것 같습니다. 제 왼쪽 복부에 기분 나쁜 통증(?) 같은 것이 있었는데, 성사 중에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지요.”
루카 형제님은 세례 받으신 지 얼마 안 된 분이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참으로 잘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주님께 기도로 무언가를 청할 때 그분이 당연히 그런 은총을 주셔야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께서 이미 많은 은총을 주셨음에도 감사하지 못한 자신을 먼저 회개합니다. 이미 너무 많이 받았기에 더 청하기 민망하고 죄송하지만 청하지 않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청하니 주님은 이런 경우엔 들어주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제가 강론을 공유하게 된 것도 유학 때에 저에게 강론을 원했던 몇 분들 때문이었습니다. 해외에서는 특강 같은 것이나 다른 신부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적기 때문에 몇 번 저를 만나신 분들이 귀찮더라도 메일로 강론을 보내주기를 청하셨습니다.
만약 그분들이 “당신은 사제이니까 당연히 목마른 양들에게 양식을 보내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면 묵상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제가 공부하러 나온 입장에서 매일 묵상을 써서 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청하면서도 매우 미안해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사제로서 당연히 강론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힘든 일이긴 했지만 기꺼이 매일 강론을 올려드렸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강론을 매일 쓰는 것은 마치 피를 말리는 것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피의 값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흘리고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것은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우리는 그 피를 청할 때 죄송한 마음이지만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청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청할 때 은총을 충만히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과부가 재판관을 귀찮게 하는 비유말씀을 해주십니다. 그 과부처럼 지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 세상에 오실 때 그 과부와 같은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며 가슴아파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연히 주셔야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는 성령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기도는 그 성령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고, 하느님은 그 성령을 주실 때 죽을 듯한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래도 그 가치를 알고 청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내어주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기도로 받는 은총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도 너무 감사하지만 그 은총이 조금이라도 끊기면 살 수가 없기에 청할 수밖에 없을 때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은총의 필요함이 절실할 때 청하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런 죄송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기도가 은총을 얻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동창 신부님이 서울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잘 움직이던 차였습니다. 공항 가는 날, 엔진 오일을 교체하라는 표시가 났습니다. 간단한 문제인 줄 알고 정비소에 갔습니다. 정비소에서는 엔진 오일이 세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기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차량을 정비하는데 하루는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차를 맡기고, 차를 빌려서 공항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운전 면허증이 정비소에 맡긴 차에 있었습니다. 면허증 없이 차를 운전하는 건 불법 운전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걱정이 가득한데 고마운 분이 나타났습니다. 저의 사정을 아시고, 공항으로 함께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덕분에 동창 신부를 공항에서 잘 만났습니다. 동창 신부님 덕분에 차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혹시 모를 더 큰 사고를 미리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님 덕분에 고마운 이웃을 만났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게는 천사가 많았습니다. 지난여름입니다. 스위스 여행을 했습니다. 기차에서 지갑을 분실했습니다. 카드, 면허증, 신분증을 잃어버렸습니다. 현금도 잃어버렸습니다. 함께한 일행들은 저보다 더 걱정해 주셨습니다. 하루 지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래도 여권과 스마트폰은 분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 지갑도 얻을 수 있었고, 헤어질 때는 약간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저의 세례명이 천사인데 천사가 되어 주기보다는 천사의 도움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신자분들이 제게 부탁하는 것들은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자녀들의 혼인성사 주례를 부탁하기도 하고, 미사를 부탁하기도 하고, 축성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가끔 글을 부탁하기도 하고, 강의를 부탁하기도 하고, 면담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별일이 없으면, 제가 할 수 있으면 그런 부탁을 들어 드리는 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간절히 청하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미안해서, 양심에 부끄러워서 하느님께 청을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신앙인이라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하고, 더 오래 기다려준다면 힘들고 어려워도 바로 그런 곳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바로 그런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리소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의로우신 하느님
제가 의롭다면
더욱 의롭게 하시고
제가 불의하다면
가차 없이 내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의로우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깨끗하신 하느님
제가 깨끗하다면
더욱 깨끗하게 하시고
제가 더럽다면
가차 없이 쓸어내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깨끗하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제가 자비롭다면
더욱 자비롭게 하시고
제가 매몰차다면
가차 없이 물리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자비하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온유하신 하느님
제가 온유하다면
더욱 온유하게 하시고
제가 거칠다면
가차 없이 꺾어주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온유하심을
저를 통해 드러내소서
살리시는 하느님
제가 살린다면
저가 더욱 살리게 하시고
제가 죽인다면
가차 없이 저를 죽이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살리시는 분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함께하시는 하느님
제가 예 하며 따른다면
더욱 따뜻하게 품어주시고
제가 아니오 하고 거부한다면
가차 없이 저를 팽개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함께 하시는 분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당신처럼 되라 하시는 하느님
제가 당신을 닮는다면
더욱 믿고 바라고 사랑해주시고
제가 당신을 지운다면
가차 없이 저를 버리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모든 것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하느님께 끝임 없이 청원하는 기도
곽승룡 비오 신부님
“밤낮으로 부르짖는데”(루카 18, 7)
성경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용서와 사랑을 끝임 없이 드러내고 있는 ‘자비의 책’이다. 인간이 의심을 멀리하고 하느님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상의 현실적인 경험 안에서는 그 자비가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다. 신앙인이라면, 얼마나 부끄럽고 온전하지 못하는 모습일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시 기도하면서 끊임없이 자비를 청하라고 격려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 7)하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청하는 기도는, 우리에게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느끼도록 초대하시는 또 하나의 자비일 수 있다. 우리가 성숙하다는 것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원들을 들어주시듯이, 우리에게 청원하는 벗에게도 우리가 그렇게 자비를 선물하라는 초대장일 것이다.
결국 자비는 우리를 위해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이 또한 우리를 통해 이웃에게 돌아가는 선물이 될 것이다. 밤낮으로 부르짖는 자를 우리는 존중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들려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과 진정한 친교와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하느님과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 안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모든 바람을 아시고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관계 안에서도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누가 계속 바라기만 한다고 했을 때도 그것이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더욱 기꺼이 우리의 모든 바람을 아시고 들어주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강요성 기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오늘 기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에서 핵심어는 '낙심하지 말고'와 '끊임없이'가 아닐까 생각을 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와 연결시켜 볼 때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졸라대고 심지어 떼까지 쓰라는 말일까요?
실제로 과부는 재판관에게 졸라댔다고 복음은 얘기하고 있잖아요?
그런 것은 아닐 거고,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고려하면 계속해서 간절히 청하라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졸라대고 떼쓰는 것과 간청하는 것은 어떤 차이일까요?
졸라대거나 떼쓰는 것은 상대가 요청을 들어주지 않겠다고 하는데도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때까지 계속 강요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중에도 오늘 주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이런 강요성의 기도를 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은 우습게 여기는 재판관도 떼쓰면 들어주는데 재판관보다 좋은 분이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마음 약해서 우리가 계속해서 떼쓰면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기적이기에 귀찮으면 안 들어줘야 할 것도 들어주지만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안 들어줘야 할 것은 당신이 귀찮아도 끝까지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어긋나는 것을 봐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진리에 맞갖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사랑이고요.
노자가 말하기를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하였지요.
천지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때 천지는 결코 인자하지 않다는 뜻인데 하느님도 진리와 정의에 어긋나면 벌을 주시지 눈감아 주시지 않고, 아무리 우리를 사랑을 하셔도 진리와 정의에 어긋나는 것을 들어주실 수 없기에 그래서 아무리 졸라대고 떼써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씀하신 대로 불의한 사람에게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게 해 주는 것이 사랑인 거지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올바른 판결'이라는 말을 또한 주목해야 합니다.
과부는 지금까지 불의한 사람들에 의해 희생을 당하였고 그래서 그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재판관들에게 얘기했지만 재판관들 또한 불의하여 지금까지 그 억울함이 풀리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또 다른 재판관을 찾아간 것이고, 마지막이기에 들어줄 때까지 끊임없이 졸라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졸라댈 필요가 없습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시기에 진리와 정의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다 들어주실 것이고, 특히 가난한 사람의 억울한 사정을 못 본 체 않으십니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간청을 들어주시는지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청하는 즉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끼고 청하는 그대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여기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들어주시기도 하고 사랑으로 안 들어주시기도 합니다.
들어주셔도 사랑이고 안 들어주셔도 사랑이라는 말이고, 빨리 들어주셔도 사랑이고 늦게 들어주셔도 사랑이라는 말이며, 청한 그대로 들어주셔도 사랑이고 달리 들어주셔도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강요성 떼쓰기나 졸라대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믿기에 좀 늦어져도 낙심하지 않고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낙심이란 희망 포기와 다른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빨리 안 들어주신다고 낙심치 않고 원하는 대로 안 들어주신다고 삐지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영적 탄력 좋은 삶,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믿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아침성무일도 아침기도중 시편92장 첫 두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좋으니이다 지존하신 님이여,
주님을 기려 높임이, 그 이름 노래함이 좋으니이다.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
오늘 복음의 과부는 올바른 퍈결을 간청했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주님 사랑만을 간청합니다.
분도회 수도자들은 오늘 성녀 제르투르다 동정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성녀 제르투르다는 서울 분도 수녀원의 주보성인이기도 합니다. 성녀는 만46세까지 참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분이였습니다. ‘얼마나 많이’가 아닌 ‘어떻게 잘’ 살 것인가가 영적 삶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성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의 체험과 헌신이었고 영성사에서 “예수성심의 신학자’라 불리어 졌으며, 예수성심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첫 사도로 여겨졌습니다. 참으로 분도회 삶의 기본과 일상에 충실했던 건강하고 건전한 신비가로 분도회 영성의 모범과도 같은 성녀였습니다.
하여 13세기 독일의 위대한 신비가로 인정받아 ‘독일의 데레사’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성녀는 탁월한 영성의 깊이로 ‘위대한’ 이란 칭호가 부여되었으며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올려지지 않았지만 성인으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위대한 신비가 제르투르다였습니다. 1302년 11월16일, 만46세 선종시 임종어도 신선한 충격입니다.
“아, 신랑이 오신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한 삶이었는지,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자신의 영적정배인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환호하며 맞이한 성녀입니다. 참으로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은 예수님께 대한 항구하고 열렬한 사랑입니다. 성녀 사후 주님은 한 신비가에게 나타나시어, “제르투르다는 자유로운 나의 영혼이다” 말씀하셨다는 일화도 전해 집니다.
참으로 성녀에게 단 하나의 간절한 소원은 주님과 사랑의 일치였음을 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 역시 단 하나의 소원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과부의 간청을 들어 주는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우리라면 하느님은 불의한 재판관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참으로 집요하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청하는 과부처럼 기도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특별한 비법은 없습니다. 참으로 결코 포기함이 없이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하는 것 하나 뿐입니다. 바오로 서간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기도의 원리도 간절함과 항구함 둘입니다.
과부의 간청의 명분과 원의는 뚜렷했고 정확했습니다. 다른 무슨 부당한 청이 아니라, ‘올바른 판결’로 이 말마디만 무려 4차례 나옵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이었지만 과부의 간절하고 항구한 청에 마침내 항복하여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 거리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참으로 올바른 원의라면 하느님 보시기에 가장 적절한 때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올바른 청, 올바른 소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청하겠습니다. 명분히 뚜렷하고 올바라야 복음의 과부처럼 간절하고 항구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영적 탄력 좋은 과부의 기도입니다. 탄력좋은 용수철처럼 좌절로 결코 무너지지 않고 즉시 튀어나와 간청하는 과부처럼 기도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수도원의 개들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지칠줄 모르고 따르는 탄력 좋은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육신의 탄력은 떨어져도 영혼의 탄력이 떨어져선 안되겠습니다. 성인성녀들의 특징도 영적 탄력 좋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청은 무엇입니까? 하느님 뜻대로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평생공부에 항구하여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삶의 여정중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닮게 해달라는 기도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비전을 변화시킵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저절로 따르는 내적변화입니다. 이런 사랑의 갈망을 담아 매일 평생 간절히 항구히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입니다. 참으로 우리 수도자들에게 맞는 순수하고 올바른 기도입니다.
그러니 복음의 과부처럼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참으로 영적 탄력 좋은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이래야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기도는 감상이나 기분이나 마음이 아니라 한결같이 깊고 올바른 지향에 따른 의지적 행위이자 평생 나와의 싸움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길 소원하며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칠 때 내뜻은 하느님의 뜻과 일치되어 모든 것은 잘 될 것입니다.
바꿔야 할 것은 외적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이기적 ‘나’입니다. 끊임없이 기도로 주님을 닮아갈 때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내적변화에 이탈의 삶이요 무엇보다 보는 눈이 바뀌어 집니다. 모두가 좋고, 새롭고, 놀랍게 보일 것입니다. 저절로 문제들은 해결이 아니라 해소될 것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런 내적변화의 기적같은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 땅에 나타나고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그들은 어린양들처럼 이리저리 뛰면서 주님,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했습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마치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처럼 보입니다. 바로 간절하고 항구한 찬양과 감사의 기도의 사람들에게 선사되는 내외적 기적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화답송 시편 후렴,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말마디도 우리의 무딘 마음을 일깨웁니다.
그러니 문제는 우리의 기도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탄력좋은 기도에 탄력좋은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화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오늘의 현실에 그대로 드러맞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기도도 믿음도 증발되고 실종되어 생각없이, 영혼없이, 영성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 같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뜻대로 간절히, 항구히, 충실히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우리의 모든 소원이 담긴 행복기도 한 연을 강론을 끝맺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찬미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다양한 주제들 너머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루카 18,3).
예수님께서 비유 속에 재판관과 과부, 두 사람을 등장시키십니다. 재판관은 힘과 권력을 지닌 기득권자에 강자인 반면, 과부는 가장 약하고 힘 없는 존재를 대변합니다. 그런 과부가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졸랐다"고 합니다. 그녀가 바란 것은 "올바른 판결"입니다.
"올바른 판결"(루카 18,3.5.7.8)이라는 말씀은 이 대목 안에 네 차례나 나옵니다. 이는 졸라대는 사람에게 유리한 판결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는 판결을 가리키지요. 어쩌면 이 과부는 대담한 배팅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스스로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양쪽 입장과 정황을 듣고 공정히 판단해서 내려야 하는 "올바른 판결"이 꼭 재판 청구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비유 속의 그 불의한 재판관도 결국 과부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는데, 공정하고 정의로우신 하느님께서야 어련하시겠냐고 하십니다. 귀찮을 정도로 졸라대면 하느님도 사람도 안중에 없는 재판관도 버틸 재간이 없는 것처럼, 하느님도 "밤낮으로 부르짖는" 청원 앞에서 당신 귀를 활짝 여시리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초대에 충실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바라는 바를 주님께 지치지 않고 청해야 합니다. 기도는 들어주실 때까지 청하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잠시 이 "올바른 판결"에 대해 숙고해 봅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꼭 올바르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더 멀리 더 넓게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한계와 본능적인 자기중심성 때문입니다. 이는 죄라기보다 지극히 인간다운 한계입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고민이 깊어지실 것 같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바라는 것의 진의를 꿰뚫어 보시기에 "진짜로"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하고 선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올바른 판결"이 지금 당장 기도한 이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음을 감수하셔야 합니다. 실망하고 돌아설 그의 반응까지 각오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그분은 "올바른 판결"을 뒤집으실 수 없습니다. 그분이 곧 진리시니까요. 그분은 감언이설로 포장해 우리 환심을 사려고 하시기보다, 당신이 우리를 잘 알고 계시고 또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한 이들이 쏟아붓는 온갖 오해와 실망과 비난을 묵묵히 들으시며 감내하십니다.
사실 "올바른 판결"은 청한 이가 "올바른 판결"이라고 믿고 수긍하고 받아들일 때 완성됩니다. 그가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에게는 영원히 잘못된 응답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여기가 바로 "믿음"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올바른 판결"은 우리에게 유리한 판결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느님의 진리와 자비와 정의에 비추어 딱 알맞는 판결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판결은 모두 올바르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분은 올바르지 않은 것을 하실 수 없으신 하느님이시니까요.
우리에게 주신 기도의 응답이 "올바른 판결"이라 인정하는 것은 체념이나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적극적인 수용과 믿음의 증언입니다. 당장 우리에게 이익이 되건 그렇지 않건, 또 그렇지 않아 보이건 하느님의 응답은 늘 옳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오늘 복음 대목에서 "기도"가 언급되기는 했지만 문맥상 앞에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 즉 종말에 대한 말씀이 이어졌지요. 그리고 여기서 잠시 기도 이야기를 하시는 듯하더니 결론에서는 다시 "사람의 아들이 올 때"를 언급하십니다. 그날의 관건은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바에 대해 관심이 많으십니다. 저마다 부족한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모자라고 결핍된 것을 채워 주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과 하나 될 그 때를 위해 우리를 완성에 이르도록 차곡차곡 이끄시지요.
제1독서에 잘 드러나 있듯이, 그분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온 피조물의 본성"(지혜 19,6)까지도 바꾸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물이 마른 땅이 되고 홍해는 장애물 없는 땅이 되고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이' 되었지요. 이처럼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의 본성을 뒤집어 흔드신 일시적 혼돈의 이유는 오직 하나, 당신 백성의 구원이었습니다. 자유와 해방, 즉 진정한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복원시키기 위한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런 엄청난 기적도 일으키실 수 있는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서 우리의 간절한 청에 "올바른 판결"로 응답하십니다. 그러니 이 응답이 당장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 꼭 알맞는 맞춤형 응답임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서 이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때는 좋은 일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하고 궂은 일에 대해서는 주님께 서운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좀 자라고 나서는 욥처럼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욥 2,10)느냐고 고백하며 기꺼이 받아들이려 노력했지요. 그런데 산전수전을 겪으며 지내던 어느날 이런 기도가 제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다 좋은 것이다!'라고요.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불운이고 고통이고 실패고 징벌같지만 그분께서 주시는 건 다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좋은 분이시라 좋은 것밖에는 내어놓으실 수 없는 분이니까요.
이런 믿음으로 주님의 응답을 "올바른 판결"이라 인정해 드릴 때 비로소 이 세상에 그분의 진심이 통하게 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 이 믿음을 견지하는 이는 복됩니다. 이미 진심이 통한 그와 주님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요. 이미 닮은 꼴이 된 그의 존재가 곧 구원일 테니까요.
'올바른 판결'(루카 18장 1~8)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신다.'
하느님 믿고 따라 살면 막막하다고 여기는 일이 예상치 않게 술술 풀리게 됩니다.
마른 땅이 기름지게 되고 바다가 갈라져 걸어가게 하며 장애물을 치워주십니다.
땀 흘리며 노력하고 애써 두드리고 두드리며 할 수 있는 최선을 합시다.
우리 주님은 귀먹지 않으셨으니 ~
다 들으시고 올바른 판결을 내리십니다.
'주님께서 나의 맘 아십니다.'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지혜 19, 6)
(For every creature according to its kind was fashioned again as from the beginning, diligently serving your teachings, so that your children would be preserved unharmed.)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11월 중순 우리 주변 늦가을의 정치가 우리의 마음을 스산하게 합니다. 겨울로 하루하루씩 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의 이치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지혜 18,14 ~ 19,9) 지혜서의 말씀에서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삶을 보살펴 주시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지혜 19, 6)
저는 이 대목에서 "피조물의 본성이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 자녀들이 보호를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당신이 만드신 것들을 좋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시고 나서, 사람을 보시니 매우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하느님의 좋은 뜻에 따라 창조된 것이고, 또 하느님 마음에 드는 창조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그들을 짝을 지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번성하도록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만든 세상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관리한다는 뜻이지요.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혼인으로 축복하시고, 세상 만물을 혼인선물로 주신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에 대해서 감사드려야 되지요.
그래서 모든 혼인한 부부는 자기 배우자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평생 삶의 반려자되어, 사랑의 결실로 얻은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행복을 맛보고 또 세상의 수많은 하느님의 창조물들을 인간의 완성과 구원을 위해서 활용하도록 마련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물에게 필요한 본성을 주셔서 그 본성대로 살아가도록 해주셨습니다. 인간에게는 특별히 자유의지를 주셨고, 이성과 감성 그리고 자유의지로 하느님을 따르고, 자유로이 하느님을 섬길 수 있는 심성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명령에 따라서 피조물의 본성을 저마다 새롭게 형성하게 하셨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 속에 하느님의 뜻을 새겨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으로, 명령으로 이루신 것이지요.
우리도 컴퓨터에 무엇을 하도록 명령을 하면, 즉 클릭을 하면 정해진 순서와 법칙에 따라 컴퓨터는 그것을 수행하듯이,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모든 피조물에 그러한 생존의 법칙을 입력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주셔서 하느님의 명령을 자유로이 따르도록 했다는 것, 그것이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라고 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 있습니다. 식물, 동물, 광물, 하늘 위에나 땅 위에 그리고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서 있습니다. 인간의 선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 집단인 인류 공동체를 위해서 사용해야 되는 것이며, 그래서 공동선의 가치가 존중되어야 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자연 사물의 공정한 활용과 분배는 우리 인간의 윤리의식과 함께 생각 되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도록 하셨다는데, 우리 인간들이 해를 입는 것은 피조물들의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인간들이 악에 흔들리거나 악의 권세에 물들어 이기주의적인 욕심과 악한 세력에 흔들린 때문에 그렇다고 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악에 기우는 경향과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유혹을 물리쳐서 하느님의 뜻과 본성을 따라서, 인류 공동체 전체를 위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하느님의 아들로 오셨고,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악한 마음에서 벗어나 새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마음이 되도록 기쁜 소식을 전파하시고 진복팔단의 마음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전하신 것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마음으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 모든 창조물들을 인간 구원과 자기 완성을 위해서 활용하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나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을 어떻게 의식하고 있습니까?
• 나는 하느님의 선물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정의를 실천합시다.
2세기 어느 저술가의 강론에서(Cap. 18,1-20,5: Funk 1,167-171)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악인의 부류에 들기보다 하느님을 섬겼음에 대해 그분께 감사드리는 사람들의 부류에 들어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도 무수한 죄를 범한 인간이고 아직 유혹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이며 마귀의 올가미에 포위당하여 있는 몸이지만, 미래의 심판을 두려워하면서 의인의 길을 따르고 그 정의에 더욱 가까이 이르고자 힘써 노력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진리의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내가 주는 이 권고의 말도 들으십시오. 내가 써 보내는 것에다 주의를 환기시켜 여러분과 여러분을 통하여 그것을 읽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끔 하십시오. 한 가지만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진심으로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구원과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만 한다면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섬기는 데 헌신하는 젊은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게 됩니다. 누가 우리를 꾸짖으면서 악에서 의에로 전환시킨다면 화를 내거나 마음 괴로워하지 맙시다. 그렇게 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악을 행할 때 영혼의 이중성과 불신앙, 그리고 공허한 육정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져 이따금 그 악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의를 실천합시다. 이들 훈계의 말에 순종하는 이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잠시나마 시련을 겪어야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부활의 썩지 않는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경건한 이여, 이 현세에서 불행을 겪는다 해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축복된 시기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에 조상들과 함께 일어나서 슬픔이 조금도 없는 기쁨을 영원토록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악인들이 잘되고 하느님의 종들은 어렵게 사는 것을 볼 때 마음 괴로워하지 맙시다. 형제 자매들이여, 이 점을 마음에 굳게 새깁시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시련을 보내시고 우리 생활에서 시험을 주시는 것은 후세의 월계관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의인들 중에 재빨리 상급을 받는 이가 없습니다. 모두 다 기다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의인들에게 재빨리 상급을 주신다면 그에게 즉각적인 유익은 되나 하느님께 사랑을 보여 드릴 기회를 잃고 맙니다. 그때에 우리의 의는 거룩한 의가 아니고 자기 유익만 생각하는 의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의 뜻은 아직 의에 도달치 못한 영혼을 시험하시고 사슬에다 던져 넣습니다.
불사 불멸의 조성자이시고 천상의 진리와 생명을 계시하시며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 주신 진리의 아버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영광이 영원토록 있으소서.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은 가끔 이해가 잘 안 갈 때가 있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하시며, 자꾸 되지도 않는 것을 청하여 하느님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드십니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루카 18,2-5)라고 하시면서 다시 또 이르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6-8절) 그러시면서 또 다른 안타까움을 표시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중에 우리가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이 더 없게 되면 그나마 예수님께 기도나 할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전후 밀가루 신자들을 기억하면서, 어려울 땐 이것 저것 달라고 기도라도 하겠지만, 오늘이 피곤하고 힘겨울 때는 내일을 평안케 해달라고 청하기라도 하겠지만, 이러저러한 복지가 늘어나고 여러 가지 삶의 여건이 호전되면 예수님을 바라보기나 할까 우려됩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저 먹고 마시는 데 필요한 것만을 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풍요와 완성, 그리고 행복과 구원을 향한 것임을 새삼 되새기게 됩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라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보다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 성숙해지고 거룩해지며, 나와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 애씀으로써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소명을 다하기로 합시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 <루카 18, 1-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광대한 우주를 빈틈없이 관리하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바람을 말씀드리고 듣는 것은 참으로 필요하고 마땅합니다.
자연이 주는 모든 것 외 필수 불가결한 일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없으면 불편하고 살아가기 힘듭니다. 하느님의 도움이 없다면 갓 태어난 아기가 부모님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울음으로 표시합니다.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울고 끙끙거립니다. 어머니는 쉽게 알아듣고 도움을 줍니다. 아이는 몸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듯이 우리도 몸으로 기도에 임해야 합니다.
기도는 흔히 하느님과 대화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대화적 관계가 아니라, 입만 움직이며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대화를 나눕니다. 그래서 뜻도 모르는 주의 기도문을 외우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기도는 진실과 사랑이 있는 너와 나의 직접 관계 지은 대화라야 합니다. 멀리 있는 분이 아니고 바로 자기 안에 현존하시는 자비로운, 어머니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며 응답을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진실히! 진실히! 이르노니” 하십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거짓이 없고, 이루어질 것이고,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진실로 참된 것을 놓고 대화를 하십니다. 우리도 진실한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야 참 기도가 됩니다. 아버지는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의 말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것같이 기도에 임해야 합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분과의 대화는 격식은 없지만, 존경과 신뢰를 갖추어 기도에 임해야 합니다.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굳게 믿고 임해야 합니다. 강한 믿음은 희망을 낳게 됩니다. 저는 상담할 때 실패하리라,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실오라기만큼도 하지 않고 이루어지리라 믿고 하느님과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상담자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하나의 간구로 듣고 아버지께 전합니다. 그러면 응답을 주십니다. 제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전달됩니다. 울며 들어오신 분이 웃으며 나가실 때 “하느님 감사합니다.”하며 안수하고 집으로 보냅니다. 이것은 기도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하느님을 진실과 사랑으로 대화하듯 기도하는 사람은 바로 희망입니다.
저는 가끔 급한 일이 있으면 “주님! 보세요. 이 어려운 사정을 함께 보고, 함께 말하고 함께 해결합시다.” 하면 힘든 사정이 풀리는 일을 자주 체험하게 됩니다. <화살기도>
또, 아주 힘든 일은 십자가의 길 기도를 통해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듯이 묵상 기도를 하면 십자가는 가벼워집니다. <각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진실과 사랑으로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도는 언제나 희망을 줍니다. 아멘! 아멘!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나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신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가 필요한 때 입니다.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프란치스코 교황은 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건전지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진정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기도의 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이 기도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오늘 복음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준다는 이야기 입니다(루가18-4-5). 끈질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마음을 다해 청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 그렇다면 떼를 써야 하지만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응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복된 삶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거기에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절)고 하신다.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계속 졸라 대어 결국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든 과부의 예를 드셨다. 그 여자가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이나 동정심에 호소해서가 아니라,지치지 않고 졸라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항구하게 기도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와 인간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겼다. 과부의 끈질김이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이란 두 나뭇가지를 변화시켜 그 성격과는 맞지 않는 달콤한 열매를 맺게 했다. 불의한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여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정의가 우리의 본성에 맞는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게 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간구하는 사람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실지 깨닫기를 바라신다. 정의가 우리를 변호하고 은총이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게 하면 억눌린 자들은 정당한 보상으로 정의의 열매를 받고, 환난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은총의 열매가 생기를 줄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끈질기게 졸라대니 사악하고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결국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 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고 더 좋은 때에 들어주실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기도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더 좋은 방법으로 들어주실 것이다.
사람들은 의로움의 말씀을 팔아넘기고 많은 사람이 건전한 신앙을 버리게 만든다. 악마의 손에 놀아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입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예고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고 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갈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에 옳고 흠 없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사람을 속이는 영들을 따라가 양심이 마비된 거짓말쟁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1티모 4,1-2)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거스르는 자들의 사악함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고 그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고 또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 내가 원하는 대로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에게 풍성히 이루어주시도록 맡겨드리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며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 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도도
낙심한 마음도
하느님을
향합니다.
우리의 아픔
우리의 억울함에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들어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각자에게 맞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이름은
간절한 기도입니다.
산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간절함과
절박함 속에서
우리 삶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러고보니
가장 향기로운
마음또한
기도입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우리가
있습니다.
끝내 우리를
지켜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재판관이시며
지체 없이 우리에게
오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사랑의 믿음을
키워나가는 기도의
위령성월 되십시오.
올바른 재판관이신
주님을 알고 있는
믿음이 올바른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하느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가장 확실한 관계임을
믿습니다.
역사를 보면 세상을 바꾼 주인공들은 낙관론자, 믿음이 있는 자, 꿈꾸는 자, 행동에 나서는 자 그리고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결코 비관론자들이 세상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미래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명확해집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밝은 미래의 실현 가능성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래를 만드는데 필요한 온갖 도전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 회복력, 긍정적인 태도, 낙관적인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감정들은 주위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미국의 하트믹스 연구소는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면 그것이 신체의 모든 세포로 전달되어 바깥으로 퍼지는데, 이에 따라 멀리는 3미터 떨어진 사람에게도 감정이 전달된다.”
언젠가 어느 사무실에 들어갈 일이 있었는데, 이 안이 분위기가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직원 한 분에게 “분위기가 이상하네요. 무슨 일이 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장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어요.”라고 답변하십니다. 사장님의 화가 난 감정이 직원들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이고, 그 감정을 저 역시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감기를 옮기는 것과 비슷하게 나쁜 감정도 또 좋은 감정 역시 충분히 전달된다는 것을 종종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감정을 전달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어떤 존재로 살아가십니까? 나쁜 병균 같은 존재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요? 아니면 활력을 주는 비타민 C와 같은 존재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다른 이들과 함께 밝은 미래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모습을 말씀해주시지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이었지만 귀찮을 정도로 포기하지 않고 조르는 과부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만약 그 과부가 낙심하고서 그냥 포기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이러한 결과를 얻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불의한 재판관도 계속 조르자 부탁을 들어주었는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어떠하시겠느냐는 것이지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이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할 것이며, 미래에 대한 굳은 희망의 길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내 안에서 계속 일어나는 부정적인 마음들을 잠재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 바로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이란 걸림돌을 디딤돌 삼는 것(월호).
위대함 뒤에는 무수한 노력과 실패가 있습니다.
현재 미국 마이애미 말린스 소속으로 정확한 타격, 빠른 발, 넓은 수비범위, 강력한 송구능력 등을 보이고 있는 유명 야구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2016년 8월, 메이저리그 통산 3,000번째의 안타를 치면서 전설이 되었습니다. 이 3,000 안타의 기록은 메이저리그 역대 30번째에 해당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 야구선수 스즈키 이치로입니다.
3,000 안타 기록을 축하하는 기자회견장에서 그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저는 3,000개의 안타를 쳤지만, 그 뒤에는 7,000타석의 범타가 있었습니다.”
3,000개의 안타를 성공이라고 친다면, 7,000개의 범타는 실패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는 그 실패를 바라보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위대함 뒤에는 이렇게 무수한 노력과 실패가 있었던 것이지요.
실패만을 바라보면서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딛고 일어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실패 역시 위대함을 만드는 가장 큰 도구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하철 3호선 약수 역에서 좋은 시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고 오지 않는 사람”
가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
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
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갈증을 풀어주는 시원한 약수와 같은 글이었습니다. 신앙인이라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하고, 더 오래 기다려준다면 힘들고 어려워도 바로 그런 곳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바로 그런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원고 청탁을 받았습니다. 1년 동안 잡지에 글을 써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잡지이고, 글을 부탁한 분과도 오랜 인연이 있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힘들 일도 있을 것입니다. 편집과 수정도 있을 것이고, 좀 더 깊이 샘을 파라는 요구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1년은 지나갈 것이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저 역시 영적으로 다듬어 질 것입니다.
신자분들이 제게 부탁하는 것들은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자녀들의 혼배 주례를 부탁하기도 하고, 미사를 부탁하기도 하고, 축성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가끔 글을 부탁하기도 하고, 강의를 부탁하기도 하고, 면담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별일이 없으면, 제가 할 수 있으면 그런 부탁을 들어 드리는 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간절히 청하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미안해서, 양심에 부끄러워서 하느님께 청을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이 세상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자녀, 내 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그것들을 상실하면 화가 나고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잠시 소유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것들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는 가족, 이웃, 물건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고, 심판하시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여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말씀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 이 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얼마전 서가에 진열되어 있는 책 제목이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행동하는 예수’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즉시 떠오른 ‘기도하는 예수’라는 말마디였습니다. 루카 복음은 기도의 복음이라 할 만큼 유난히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많습니다. 오늘 루카복음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통해서도 주님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지금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순교자 성월 9월, 묵주기도 성월 10월, 그리고 대림을 앞둔 11월 위령성월 모두 기도가 중심을 이룹니다. 말 그대로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어제 텅 빈 배밭을 산책하여 써놓은 ‘비움예찬’이란 글을 나눕니다.
-만추의 가을/텅 빈 배 밭/텅 빈 나무들
비움은 지혜다/비움은 겸손이다/비움은 생명이다
비움은 침묵이다/비움은 기쁨이다/비움은 평화다/비움은 자유다
비움은 사랑이다/비움은 충만이다/비움은 아름답다
비움은 모두다/비움의 여정이다/하느님은 비움자체이시다-
삶은 비움의 여정입니다. 비움의 여정에 결정적인 것이 바로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피정자들을 위한 강의도 대부분 기도 이야기로 끝납니다.
1.기도는 무엇입니까? 하느님과 소통의 대화입니다. 소통의 생명이요 불통의 죽음입니다. 2.기도는 왜 합니까? ‘살기위하여’ 기도합니다. 절박한 말마디 ‘살기위하여’입니다. 기도하면 살고 기도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살기위하여 밥을 먹고 숨쉬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런 기도입니다. 3.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기도를 잘 할 수 있습니다. 4.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늘 날마다 평생 간절히 항구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만큼 살고 사는만큼 기도합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는 얼굴인가 둘중 하나입니다. 기도는 사랑이요 사랑하면 닮습니다. 기도하면서 주님을 닮아 참 나의 얼굴이 되어가고 주님 앞에 갔을 때도 주님은 ‘당신을 얼마나 닮았는가’ 우선 우리 얼굴을 볼 것입니다. 피정할 때 마다 단골 메뉴같은 기도에 관한 언급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는 기도와 삶의 모범입니다. 결코 좌절함이 없이 끝까지 간청함으로 불의한 재판관의 항복을 받아내는, 비굴하지 않고 당당한 가난한 과부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좋을 때, 잘 나갈 때 기도는 누구나 합니다. 어렵고 힘들수록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잡고 있어야 할 끈은 ‘기도의 끈’입니다. 기도의 힘은 하느님의 힘이며, 기도의 끈은 하느님의 끈입니다. 기도의 끈을 놓치는 순간 안팎으로 속절없이 무너지는 삶입니다.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들려 주신 후 주님은 제자들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 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문제는 올바른 판결입니다. 우리 방식이 아닌 하느님 방식대로, 우리의 때가 아닌 하느님의 가장 적절한 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체없이와 우리의 지체없이는 이렇게 다릅니다. 저는 이것을 ‘어둠의 터널’에 비유하곤 합니다. 항구히 기도할 때 언젠가 어둠의 터널을 통과할 것이고 그 기간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올바른 판결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겸손한 믿음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수록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알아 겸손해 집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원하는 것에서 정말 필요한 것을 청하게 되고 결국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청하게 됩니다. 정말 필요한 것 하나는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도의 끝에 남는 것은 하느님과 나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당연하고 자연스런 귀결이요 이때 진정 자유롭고 행복한 참 나의 실현이자 발견입니다.
기도는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내적성장과 성숙의 내적변화도 이루어 지며 기쁨과 평화의 선물도 받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에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기도하는 이들의 내적현실을 상징적으로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삶은 기적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 기적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기도해야 주님 손길의 보호를 받으며 하루하루 기적같은 파스카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화답송 후렴처럼 늘 주님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이 긴 여운을 남깁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이래서 기도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늘 기도해야 믿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부족한 믿음을 더해 주시고, 늘 간절히 항구히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막바지 길에서 “기도”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비유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어떤 기도를 말하는 걸까?
흔히 기도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이 기도를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Laus perennis), ‘항구한 기도’, ‘지속적인 기도’, ‘중단 없는 기도’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교회전승 안에서, 서방교회에서는 주로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형태로, 동방교회에서는 주로 <예수기도>(ε?χη Ιησοu)의 형태로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선, ‘끊임없이 주 하느님을 향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도가 주님을 향하여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넋두리요, 하소연이요, 자기 한탄이요, 독백일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 어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주님을 향하여 있고, 우리 주님과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것은 주님을 믿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사무엘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1사무 12,23)라고 말합니다. 만약 하느님과 관계 맺지 않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는다면, 곧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말한 대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 지워진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보다 앞서 우리의 주 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루가 18,1)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과부가 판결해주지 않는 재판관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간청하기를 포기하지 않듯이 말입니다.
사실, 이처럼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온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의 믿음을 찾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2,8)
그러기에, 이 “끊임없는 기도”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의 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루카복음의 소묵시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토록 “사람의 아들이 올 때”까지 믿음으로 우리 주님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며 유대와 연대의 관계를 맺고, 희망으로 그분을 향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끊임없는 기도”의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러 있기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살아있는 증거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향하여 있지는 않는지, 또 주님 아닌 다른 것에 희망을 두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재물이나 그 어떤 우상들에 희망을 두고, 그것을 향하여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아멘.
청할 것과 청하지 말아야 할 것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18년, 20년 동안 친 아들, 친 딸 처럼 애지중지 키우던 애완견들과의 사별이 너무나 슬퍼, 어떤 견주들은 돌아가신 그들을 위해 은근슬쩍 세례명까지 붙여 연미사를 넣는 사람들이 있다는군요^^
그렇게까지 하는 그분들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그 누구도 그 강아지처럼 큰 기쁨을 준 존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며, 그저 나만 바라봐주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저 하염없이 나만 기다려준 녀석과의 사별은 너무나 큰 상실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뜬 강아지들을 위한 연미사는 봉헌하시면 안됩니다. 연미사는 오로지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 인간들,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가치인 영혼의 소유자인 우리 인간들만을 위한 은총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제단에 올라오는 다양한 청원들을 바라보며, 청원에 있어서도 세심한 식별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마치 개념없는 일곱 살 아이처럼 무턱대고 이것 저것 하느님께 졸라대기만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하느님 눈에 그리 예뻐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우리에게 사막의 성자 샤를르 드 푸코 신부님의 생애는 참으로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그는 휘황찬란한 도심을 떠나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 기도에 전념하던 중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청원 가운데 많은 것들이 그릇된 청원이라는 것, 그분께 청할 것이 있고 청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청할 것은 무엇이고, 청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하였습니다.
그 깨달음 이후 샤를르 드 푸코 신부님은 더 이상 자신의 건강과 안위, 자신의 성공과 개인적인 청을 드리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대신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겼습니다. 자신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것이든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다짐했습니다.
샤를르 드 푸코 신부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간절한 청원 기도 두 가지를 드렸는데, 첫째, 나자렛의 예수님을 따라 철저하게 잊혀지고 숨겨진 삶을 살기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순교의 월계관을 청했습니다.
샤를르 드 푸코 신부님께서는 얼마나 간절히 두 가지 기도를 바쳤던지, 마침내 사하라 사막의 영웅적인 순교자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 하신 주 예수님, 저는 마음 속으로부터 제 목숨을 당신께 바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매순간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찾습니다. 당신께 제 목숨을 바칩니다. 저를 살리시던지 죽이시던지 당신 좋으실데로 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영예로운 목표, 즉 순교자가 되기를 열렬히 청합니다.”(샤를르 드 푸코 신부)
항구한 믿음과 인내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변호해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과부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18,2), ‘불의한’(18,6)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해달라고 귀찮게 조릅니다. 이 과부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뇌물로 쓸만한 돈도 기댈만한 사람도 없었던 사회적 약자였음이 분명합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과부가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의로움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청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항구한 인내의 끝에 자비이신 주님께서 기다리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가 ‘올바른 판결을 해달라고’ 계속 귀찮게 청하자 그렇게 해주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18,5). 과부의 인간적 끈질김이 아니라 그가 믿었던 주님께서 재판관의 불의를 물리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십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귀찮게 조르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준다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을 때 그 청을 지체 없이 들어주신다.'(18,7-8)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구한 믿음과 인내로 당신을 성실하게 섬기는 이들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온갖 부정의 과녁이 되기 때문에 고통도 많이 겪습니다. 그럼에도 정의이시고 사랑이신 그분께 달려가 청해야 합니다. 정의가 아니고서는 정의롭게 할 수 없으며, 사랑이 아니고서는 사랑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18,1)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은 자기 뜻을 성취하기 위해 만사 제쳐두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고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으려고 결코 미적거리지 않으실 것입니다(18,7).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때와 방법은 오로지 주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인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때때로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요. 우리는 청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기도를 들어주시기 않을 때 쉽게 포기하고 낙심하며 다른 세상적인 해결책을 찾아 나서기도 하지요. 그러나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을 굳게 믿고 인내해야만 할 것입니다.
기도는 ‘인내하는 사랑’이요, ‘항구한 믿음 안에서의 기다림’입니다. 기도는 기획안을 제출하여 정해진 때에 답을 받아내는 사업이 아님을 상기해야겠습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온전히 맡겨드리는 것이 참 신앙이겠지요. 오늘도 항구한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갈망하며 주님을 관상하도록 합시다. 기도는 주님 안에서만 답을 찾을 수 있는 ‘사랑의 기다림’이기 때문입니다.
김종오 신부님
때로 밤낮으로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목 놓아 울며 탄식하며 당신께 애원하지만 허사였습니다. 당신께 매달리느니 차라리 내 능력을 믿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속으로 되뇌기도 했습니다. 허탈감이 엄습할 때 당신은 무의미했습니다.
침묵 속에 계시는 주님은 때로 현실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이 느껴졌고 물에 빠지면서 잡는 마지막 희망의 끈이라고 여겼지만 당신은 여전히 가만히 계셨습니다. 침묵으로 응답하던 당신을 원망하던 어느 날 어떤 책에서 잠자는 저를 흔들어 깨운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큰 홍수가 진 마을에 사는 어떤 신앙인이 있었다. 물이 그의 집에 1미트 정도 찼을 때 몇몇 신도들이 배를 저어 문까지 와서 타라고 권하였지만, 그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가세요, 괜찮아요. 하느님이 저를 돌보고 계십니다.’라며 거절하였고 신도들은 떠났다. 물은 2층까지 차올랐고 걱정스러워진 신도들이 다시 배를 타고 왔다. 다시 함께 타자고 했지만 그는 또 거절하였다.
그 배가 세 번째 돌아 왔을 때에 그 집은 완전히 물에 잠겼고, 그 사람은 집 굴뚝 위에 서 있었다. ‘형제님, 이리 오세요! 아니면 물에 빠져 죽어요.’라고 했지만 그 사람은 ‘괜찮아요. 하느님이 돌보아 주시니까요.’라고 대답하였다.
사람들은 떠났고 그는 물에 빠져 죽었다. 후에, 천당에서 그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 화를 내며 ‘제게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저는 당신이 시키시는 그대로 했습니다. 저는 기도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저를 돕지 않았어요.’라고 따졌다.
‘너를 돕지 않았다고?’ 하느님은 놀라면서 대답하셨다. ‘무슨 소리냐? 내가 너에게 세 번이나 배를 보냈었는데.’”
김대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루카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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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본다.
기도의 의미를 모르는 이는 적다.
또한 ‘끊임없이’란 말이 ‘24시간 내내’가 아닌 그만큼 강조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음도 알고 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기도(祈禱)라는 글자의 의미보다는 기도가 가지고 있는 내용상의 의미를 이해해보도록 하자.
기도란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이다.
무릎을 꿇고 드리는 기도가 좁은 의미의 기도라 한다면, 넓은 의미의 기도는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을 말한다.
우리의 약함은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는 순간 죄에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어떤 유혹 앞에서도 하느님을 의식하는 순간 건강한 갈등과 함께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의식한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매 순간을 선택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 그 선택의 삶 속에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주님, 이것은 해서는 안 되겠지요?”
“주님, 이것은 힘들더라도 해야겠지요? 도와주셔야 합니다.”
24시간 십자가 앞에 고개를 숙이고 기도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은 가능하다.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그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극복하고, 옳은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이 되라는 말씀이다.
어쩌면 우리가 유혹에 지고, 죄를 짓게 되는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는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죄는 우리를 스스로 죽이는 길로 이끌게 되어있다.
그 죄를 벗어나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국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이다.
부담으로서가 아니라, 기쁜 동반자로서 그분을 의식하는 것이다.
곧 그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겠는가?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될 때, 지금까지 이해 못했던 많은 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삶과 죽음, 삶의 의미, 기쁨과 고통, 진실과 거짓, 참된 행복과 같은 실존적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음을 믿어야만 한다.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 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믿는 만큼
함께할 수 있습니다.
믿는 만큼
보게 됩니다.
믿음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믿음의 나그넷 길입니다.
믿음 없이는
도달할 수없는
구원의 길입니다.
모든 순간들이
믿음의 순간들이었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걸려 넘어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연코 믿음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으로
우리를 끌어안습니다.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랜 기다림의 역사가
믿음의 역사입니다.
기다림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만나게됩니다.
지금 우리의 시간이
바로 믿음의 시간입니다.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되찾는
믿음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몇 년 전, 본당에 있을 때 고등학생들과 함께 노래방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냥 노래방비만 내주려고 함께 들어갔다가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놀라면서 나 먼저 가겠다는 말을 했지요. 그랬더니 함께 놀자면서 저보고 노래 한 곡을 불러 달라는 것입니다. 계속된 권유에 저는 그래도 흥을 돋울 수 있겠다 싶어 트로트 한 곡을 선택해서 불렀습니다. 반주가 나오자마자 나온 반응은 ‘이게 뭐야?’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싸한 분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1절을 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스톱 버튼을 누르고 “재미있게 놀아.”라고 말하고는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간다는 것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말리던 아이들도 저의 노래를 듣고는 아무도 말리지 않더군요. 하긴 요즘 최신 가요에 심취해 있는 아이들 앞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유행했던 트로트 노래를 불렀으니 어떠했을까요? 분위기가 좋아지리라 생각했다면 그것은 ‘저의 착각’인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때 분명히 깨달은 하나가 있었습니다. 단 하나의 노래가 분위기를 확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런 경우는 이 세상에 참으로 많습니다. 단 한 자루의 촛불이 방 안의 어둠을 몰아내지요. 또 단 하나의 희망으로 어렵고 힘든 순간을 이겨낼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전체를 살려 내기도 합니다. 한 걸음이 여행이 시작이며, 한 단어가 기도의 시작인 것입니다. 사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생각지 못한 커다란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얻을 수 있지요. 문제는 많은 이들이 거창한 기도, 시간을 내어서 바치는 기도만이 참된 기도처럼 착각해서 한 단어가 기도의 시작이라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자주 하나 봅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도 없어.”
기도를 내가 해야 할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거창한 나의 일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어떤 거창한 형식에 맞춰서 하는 기도만이 참 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실 한가해서 시간이 많이 날 때만 기도하겠다고 말하지만, 그러한 시간은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기도는 긴 시간을 이용한 주님과의 대화가 아닌, 편하게 나누는 한 마디 단어를 통해서 시작되는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재판관에게 청하는 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이 과부는 모욕적인 말을 들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이 말하는 과부의 청을 결국 들어준다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우리 역시 특별한 기도를 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기도는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가서는 주님과의 ‘대화’임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열심히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기도는 특정 장소나 정해진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팎이 한결 같다는 말이 있지요. 이처럼 기도 역시 언제나 한결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모습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성당에서는 거룩한 모습으로 살면서도, 성당 밖만 나가면 사회 사람들과 별 차이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라면 주님께서 절대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성당 안에서만 신앙인이 아니라, 성당 밖에서도 똑같이 신앙인의 신분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하지요. 이처럼 우리의 기도도 특정 장소에서 하든 내 일상의 삶 안에서 하든 똑같이 한결 같은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장소에 있든, 또 어떤 시간이 주어지든 상관없이 올바른 모습으로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의미..
김대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루카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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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본다.
기도의 의미를 모르는 이는 적다.
또한 ‘끊임없이’란 말이 ‘24시간 내내’가 아닌 그만큼 강조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음도 알고 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기도(祈禱)라는 글자의 의미보다는 기도가 가지고 있는 내용상의 의미를 이해해보도록 하자.
기도란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이다.
무릎을 꿇고 드리는 기도가 좁은 의미의 기도라 한다면, 넓은 의미의 기도는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을 말한다.
우리의 약함은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는 순간 죄에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어떤 유혹 앞에서도 하느님을 의식하는 순간 건강한 갈등과 함께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의식한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매 순간을 선택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 그 선택의 삶 속에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주님, 이것은 해서는 안 되겠지요?”
“주님, 이것은 힘들더라도 해야겠지요? 도와주셔야 합니다.”
24시간 십자가 앞에 고개를 숙이고 기도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은 가능하다.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그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극복하고, 옳은 삶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이 되라는 말씀이다.
어쩌면 우리가 유혹에 지고, 죄를 짓게 되는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는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죄는 우리를 스스로 죽이는 길로 이끌게 되어있다.
그 죄를 벗어나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결국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이다.
부담으로서가 아니라, 기쁜 동반자로서 그분을 의식하는 것이다.
곧 그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겠는가?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될 때, 지금까지 이해 못했던 많은 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삶과 죽음, 삶의 의미, 기쁨과 고통, 진실과 거짓, 참된 행복과 같은 실존적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음을 믿어야만 한다.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이 행복한 삶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일에 '영원성'이 깃들이게 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프랑스에 페르디낭 슈발(Ferdinand Cheval 1836-1924)이라는 가난한 농부출신 우편배달부가 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농부로 태어나 배운 것도 없는 사람도 충분히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고 정열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43년 동안은 이렇다 할 만한 특별한 일은 해 놓은 것이 없었습니다.
슈발은 여느 때와 같이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길을 걷다가 그의 시선을 잡는 것에 이끌렸습니다. 그것은 매일같이 개울가의 돌밭을 밟고 지나가던 그가 단 한 번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돌무더기였습니다. 그 돌은 길이가 4인치 정도 되는 흙투성이의 석회석이었는데 슈발은 이 돌에 ‘탈출의 돌’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돌을 주머니에 간직한 채 집에 돌아온 슈발은, 그 때부터 이상하도록 생긴 돌이나 벽돌, 굴 껍질, 유리조각, 철사, 쇠붙이, 등등... 몇 가지 잡동사니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집 정원에 터를 마련하여 벽 쌓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조개껍질로 된 연못과 조약돌로 만들어지게 되는 작은 동굴은 그가 매일 30Km를 돌아다녀야 하게 되는 우편배달 도중 오며 가며 우연히 모은 자갈들을 모아 붙여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작은 동굴, 정원, 탑, 성채, 박물관과 조각 등이 포함된 ‘동화의 궁전’을 짓고 싶었습니다. 건축의 원리에 대해 무지하고 벽돌 쌓을 줄 모르고 미장도 할 줄 모르는 우편배달부의 꿈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죽는 날까지 이룰 수 없다고 해도 한 번 직접 성을 쌓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 돌은 쪼아지고 쌓아지면서 그의 꿈속에 깊이 잠들고 있었던 성곽이 구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의 외벽을 건축하는 데만 20년을 보냈습니다. 작은 조각에서 큰 조각으로, 조각이 기둥으로, 벽으로, 층계로 그리고 지붕으로, 마침내 기적의 성으로 솟아올랐습니다. 그 성의 이름은 ‘이상의 성(Palais Ideal)’이었습니다. ‘우체부의 꿈의 궁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조형물은 근 30년 동안 매일함께 반복된 수고의 결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돌을 주어다 정원을 채워놓는 미친 사람”이라고 백치 취급당했던 지칠 줄 모르던 우편배달부가 만들어 놓은 작품은 이렇게 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이 궁궐 입구 정면 문 위엔 이런 말을 적어놓았다고 합니다.
“이 곳을 지나면서,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은 한 농부가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나의 꿈으로부터 나는 이 세상의 여왕을 끌어낸 것입니다.”
누구나가 꿈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그 꿈을 대하는 자세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루어질 것이라 믿고 죽을 때까지라도 끈기 있게 도전하고, 어떤 사람은 꿈은 꿈으로 남겨놓고 시작하려 하지 않거나 조금 하다가 포기하고 맙니다.
세계 최고의 석학 아인슈타인은 일곱 살 때 겨우 글을 깨우치기 시작한 늦둥이였습니다. 베토벤은 음악 교사로부터 ‘음악에 전혀 소질 없는 아이’로 평가받았습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담임은 그를 ‘교사생활 12년에 이처럼 멍청한 아이는 처음’이라고 평했습니다. 월트 디즈니는 한때 신문기자로 재직했는데, 편집국장은 그를 향해 ‘자네는 아이디어도 글재주도 없으니 스스로 사표를 쓰라’고 종용했습니다. 영국인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윈스턴 처칠은 6학년을 두 번 다닌 학습 지진아였습니다. 세계적인 기업가 울워드는 점원노릇을 하던 20대 초반, 가게 주인으로부터 ‘사업에 소질 없는 무능력자’라는 핀잔을 들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결과만 보고 나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들이 우리와 달랐던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기도에 관해서만 말씀하시지만, 사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하는 그 일에 ‘영원성’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영원한 것들만 있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이 세상과 함께 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영원히 남을 정신으로 무언가를 이루려고 했다면 하늘에서도 그 정성은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한번은 사람들이 벤자민 프랭클린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수많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프랭클린은 오직 지치지 않는 꾸준함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일하는 석공을 자세히 관찰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석공은 아마 똑같은 자리를 백 번 정도 두드릴 것입니다. 갈라질 징조가 보이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백 한 번째 망치로 내리치면 돌은 갑자기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맙니다. 이처럼 돌을 두 조각으로 낼 수 있었던 것은 한 번의 두들김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마지막 한 번이 있기 전까지 내리쳤던 백 번의 망치질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몇 번 망치질을 했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포기하는 것은 훌륭한 목공이 못 됩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혹은 영원히 하지 않을 것은 아예 붙잡지도 시작하지도 마십시오. 어차피 하느님은 영원한 것에 관심 있으시고, 또 하늘엔 영원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도 지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개인적으로 기도가 대체 무엇인가 고민과 생각과 연구를 많이 해왔습니다. 최근에야 하느님께서 제게 아주 조금 기도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시더군요.
“기도는 삶의 모든 국면에서 하느님과 나와의 연결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와 상호 소통하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기도는 매사 매순간 내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일입니다.”
보십시오. 기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폭넓은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한 가지 생깁니다.
그간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기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요한 끈질긴 과부처럼 지속적으로 간절히 청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시지만 사실 기도는 단지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하는 청원기도를 훨씬 능가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도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불안정한 우리 인간 조건에서 완벽한 평화이신 하느님 현존으로 나아가는 일, 불완전한 우리 인간 세상에서 완전한 하느님 나라로 넘어가는 일, 그리고 거기서 힘을 얻고 다시 인간 세상으로 넘어오는 일, 그리고 그 기도의 결실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 그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또한 기도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만남, 대면입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나 자신이 진정한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거짓되고 포장된 나, 부풀려진 나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나, 티끌이요 먼지인 나, 흙 부스러기같은 연약한 나, 하느님 도움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유한한 나 자신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우리의 기도는 이래야 하겠습니다. “진실하신 하느님, 모든 거짓된 포장과 허위를 떨쳐버리고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하느님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 상이 거짓 하느님, 그릇되고 왜곡된 하느님 상이라면 빨리 참 하느님 상으로 수정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자주 청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바램들들 그때 마다 척척 들어주시는 자동판매기 같은 하느님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힘겨움은 나 몰라라 하시고 나만의 어려움만 헤아려주시는 나만의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 하느님은 고통과 시련은 멀리하시고 달콤함과 편안함만 추구하시는 세상의 통치자 같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고통의 인간, 십자가 죽음을 넘어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신 십자가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의 잘잘못을 하나하나 따지시고 일거수일투족은 감시하시고 벌주시는 작은 하느님이 아니라 돌아갈 때마다 용서하시고 모든 것을 품어 안으시고 끝까지 기다려주시는 크신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우리의 기도는 이래야 합니다.
“주님 무슨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당신에 대한 모든 허상을 버리도록 도와주십시오.”
기도를 바칠 때 지향의 문제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기도를 바치자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6잘 39절에 보면 이런 예수님의 기도가 나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우리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예수님께서는 몸소 모범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의 편리함이나 안락함, 만사형통이나 승승장구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뜻, 주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작은 것, 이기적인 것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이타적인 것, 더 큰 것, 이 세상 전체를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큰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는 나머지 것들,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것들, 현세의 축복들을 덤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 끝에 이 기도를 덧붙이면 좋겠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모든 것이 끊임없는
생명의 기도이기를
주님께 청하여 봅니다.
믿음과 항구함은
언제나 우리가 걸어가야 할
참된 신앙의 길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믿음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믿음으로 아름다워집니다.
믿음이란 인내와 끈기로
깊어지는 주님의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노력과 성찰로
절망의 문을 열어줍니다.
주님과 한마음이 되기위해서는
항구한 끈기와 성실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며 살아야 할는지를
다시금 가르쳐 줍니다.
낙심하고 불평하는
하루가 아니라
믿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믿음의 하루되시길
응원합니다.
기도는 언제나
우리의 시간에 충실한 믿음입니다.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기도의 위령성월 되십시오.
어렸을 때,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그때에 누군가가 “노래 한 번 해볼래?”하면 자신 있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춤 춰봐~~”라고 말하면 신나게 개다리 춤을 췄습니다. 그림 그려보라고 하면 마치 세상에서 그림을 잘 그리는 것처럼 자신 있게 그렸습니다.
실제로 유치원을 방문했던 어떤 사람이 노래 부를 줄 아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전원 즉각 속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춤을 출 줄 아는 사람, 그림 그릴 줄 아는 사람을 물었을 때에도 유치원생들은 똑같이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이 똑같은 질문을 대학생에게 했을 때 어떻게 되었을까요? 손을 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면서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할 수 없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즉,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줄어드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감탄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항상 감탄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를 보고서도 “와~ 개미다!!”라며 감탄하기 때문에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하지 않지요. 그래서 모든 면에서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큰 것을 보고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못합니다. 실제로 강의를 나가서 보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무표정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도 ‘피식’ 웃을 뿐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도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보니, 무슨 일에 적극적으로 어떻게 임하겠습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마음이며, 그래서 감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은 매사에 적극적이며, 자그마한 일에도 감탄하며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을 어른이 되면서 점점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의 시작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말씀을 해주시지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과부의 끈질긴 청을 결국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의한 재판관도 들어주는 끊임없는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받아들이시겠느냐는 것이지요.
만약 그녀에게 올바른 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매달릴 수가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매달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거역하는 불의와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는 의미가 이곳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보십시오. 과연 우리들은 끊임없는 기도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지요? 보통의 어른들처럼 점점 약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좋은 삶은 과정이지 체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이다(칼 로저스).
하느님은 내게 괜찮다고 하신다(케이린 호트)
너무나도 감동적인 글이라 그대로 옮겨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인생을 멜로드라마처럼 살아도 괜찮은지.
하느님은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키가 작아도 괜찮은지 물었습니다.
하느님은 물론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또 물었습니다.
매니큐어를 발라도 괜찮은지, 혹시 그러면 안 되는 건지.
그분은 대답하셨습니다.
아가야(그분은 가끔 나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네 맘대로 하려무나.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저는 또 물었습니다.
편지를 쓸 때 문단 나누기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지.
내 귀여운 강아지야(대체 그분이 이런 말을 어디서 배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대답은 언제나 똑같단다.
괜찮다, 괜찮아, 괜찮고말고...
하느님께서는 괜찮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안 괜찮다고 할까요?
얼마 전 텔레비전의 어떤 프로를 보다가 상추가 미백효과에 좋다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방송에 등장한 한 자매님은 상추가 미백효과에 좋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서 양치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상추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것이었지요. 그 방법은 생각보다 아주 쉬웠는데요. 상추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3분만 돌리면 바삭바삭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삭바삭해진 상추를 잘게 부순 뒤에, 이 상추 가루를 칫솔에 묻혀서 양치하면 된다고 합니다. 어렵지 않은 방법이지요?
마침 제 냉장고에는 며칠 전 야식 때 시켜 먹고 남은 상추가 있었습니다. 저는 얼른 그 상추를 냉장고에서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돌렸습니다. 물기가 많이 묻어 있었기 때문에, 3분이 부족할 것 같아 4분 예약에 맞춰서 돌렸지요. 그리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인가가 터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깜짝 놀라서 전자레인지를 보니 상추에 불이 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긴 시간 동안 돌려서 바싹 마른 상추에 불이 붙은 것이었지요. 다행히 얼른 불을 꺼서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지만, 만약 먼 곳에 제가 가 있었다면 큰일 날 뻔했었습니다.
물기가 많았기 때문에 4분 정도는 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방송에 나왔듯이 사실은 3분이 맞았던 것이지요. 더군다나 쉽게 탈 수도 있기 때문에 근처에서 지켜봐야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과 판단을 내세워 위험한 상황을 연출했던 것이지요.
우리의 생각과 판단, 사실 부족함 투성입니다. 심지어는 경험하지 않았으며 또 잘 알지 못하는 것조차 내 생각과 판단을 내세우면서 잘못된 길로 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려는 주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런 의미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끝까지 매달리는 과부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비록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끝까지 매달려서 부탁하는 과부의 청에 귀찮아서라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하시지요. 이렇게 불의한 재판관도 이런데,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어떠하시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도 전에 이미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내 생각과 판단만을 내세워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한 이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절대로 외면하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끝까지 매달려야 합니다. 나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생각과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주님께 대한 믿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성공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며,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데이브 가드너).
별별 착각
인터넷에서 보았던 착각입니다. 그런데 공감이 크게 가네요.
남자: 자신이 보통 이상의 외모인 줄 안다.
여자: 뒤에 오는 남자가 관심 있어 따라오는 줄 안다.
아이: 울고 떼쓰면 다 되는 줄 안다.
엄마: 자식이 공부만 잘하면 다 되는 줄 안다.
육군 병장: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줄 안다.
부모: 자식이 훗날 효도할 줄 안다.
남편: 살림하는 여자는 집에서 노는 줄 안다.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착각은 무엇인가요? 주님 안에서 머물러 있을 때 우리들은 이러한 착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의 기도
안승태 신부님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고 의지하는 하느님께 우리의 현실을 말씀드리고 필요한 은총을 청하는 사람들이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있어서 믿음의 정도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 등장하는 과부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청하는 이들의 기도’가 받아들여짐을 보여 준 인물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불의한 재판관처럼 우리의 기도가 귀찮거나 괴로워서 들어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먼저 아시고 섭리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온전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은 실망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믿는 대상에게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기대는 상대방의 뜻에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상대방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청하면서도 기다리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믿음을 지니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에페 3,20)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위대한 비약
이대훈
절망은 희망을 꺾는다는 부정적인 뜻을 갖고 있지만, 오히려 그런 꺾임을 경험하지 않은 희망은 비누거품 같을 수 있다. 배고픔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배고프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고 쉽게 말하며 웃을 수 있는데 그런 낙관은 사람들을 낙담하게 만든다. 절망의 바다를 거치지 않은 희망은 희망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위대한 비약에는 사건이 필요하다. 카이로스적 사건인데 오랜 문명의 지혜가 말하고 있듯 그 사건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일이 필요하다. 곧 카이로스의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사건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현재 지구촌은 인류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부의 독점 상태에 처해 있다. 지금까지 경제부국의 소수가 이렇게 많은 자산과 자원과 지식과 권력을 독점한 예가 없었다. 20대 80은 이미 옛날 얘기이고 지금은 그 격차가 더 심해지고 있다. 상위 1퍼센트의 인구가 생각을 조금만 바꿔도 지구촌 기아와 빈곤과 저소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어떤 법체계도 어떤 정의감도 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지 못하고 있다. 풍요로운 사람들은 밤낮으로 부르짖고 있는 다수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그 모습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위에서 수많은 희망의 메시지가 비눗방울처럼 터진다. 현재의 카이로스는 그 절망의 바다에 빠져들고 있다.
진정 지성이면 감천인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인간의 청을 들어준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들어줄 마음이 없는데도 인간이 하는 것이 지극정성이면 들어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도 비슷한 맥락이 있습니다.
비유에서 재판관은 과부의 청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하도 끈질기게 요청을 하니 그 재판관은 귀찮아서라도 들어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과부처럼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문제는 하느님은 인간의 요청을 들어줄 마음이 없는 분,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해주시고 안 해주시는 그 주도권이 하느님에게 있지 않고 인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라면 이 비유의 가르침은 큰 문제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아무리 졸라도, 그것이 사랑의 이유에서건 정의의 이유에서건, 들어주지 않으실 거라면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주도권에 따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시기도 하고 안 해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비유의 가르침은 어떻게 이해해야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그 사랑만큼 우리의 믿음과 갈망이 강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과 갈망이 작을 때 청하지 않거나, 청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빨리 들어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 사랑을 의심하며, 쉽게 낙심하고, 그래서 더 이상 청하는 것을 포기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은 철석같이 믿는다는 표시이고 지성을 다한다는 것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예의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 사랑의 표시이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끝까지 믿는다는 표시이며,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포기치 않으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끊임없는 신뢰의 표시이고, 한시도 우리에게 눈길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항구한 갈망의 표시입니다.
거저 주신 은총의 선물
김수만 신부님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 이런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오늘도 지구의 수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있을 텐데, 과연 하느님께서는 내 기도 소리를 들으시기는 할까?’ 하고 말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진실하지 않고 믿음 없이 하는 기도에는 열매도 열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결코 낙심하는 일 없이,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끈질기게 청하는 과부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은 반드시 거기에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되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과연 우리 믿음 상태를 점검해보면 어떨까요? 매우 양호일까요? 아니면 양호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매우 불량일까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기도라는 끈으로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쪽에서는 계속해서 말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침묵을 지키고 계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척 조바심을 내거나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인내와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의 끈을 놓지 않을 때, 하느님은 믿음의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제1독서에도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믿음의 원천이신 주님, 기도에 대한 대답이 너무 늦어지더라도 주님을 변함없이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믿고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 믿음의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과부의 간청
안문기 신부님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있습니다. 재판정에서조차 돈 없는 사람보다는 돈 많은 사람이 유리하다는 뜻이지요. 이런 현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여 여러 차례 재판관을 찾아갔지만 그 사건을 다룰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과부는 힘써줄 배경이나 돈이 없었기에 끈질기게 간청하는 수밖에 없었고,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결국 그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고 맙니다.
그 과부의 집념이 응답을 받은 셈입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거늘 하물며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자신이 선택한 이들의 간청을 물리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기도해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신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만 끝까지 계속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의 참 뜻은 과부의 의로움이나, 재판관의 불의가 아닙니다.
과부의 끈기 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굳건한 믿음과 항구한 기도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종말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落心.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오늘 주님은 가르치십니다.
落心.
떨어질 落, 마음 心.
마음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마음을 놓는 것과는 다른 뜻인 것 같습니다.
마음을 놓는 것은 긴장을 푸는 뜻이 있기에 좋은 면도 있지만 낙심을 하는 것은 희망과 용기를 잃어버려 무엇을 할 의지가 전혀 없는 것이기에 100%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 우리는 낙심을 합니까?
우선 너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헤쳐 나갈 나의 힘이 부칠 때입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봐도 도와 줄 사람이 없을 때입니다.
한 마디로 인간적인 상황은 어디에도 희망이 없을 때입니다.
그러니 낙심한다는 것은 자신이든 남이든 인간을 바라볼 때입니다.
정말 인간만 보면 상심이 되고 낙심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런 희망도 없는 절망의 때가 진정한 희망의 때입니다.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 오고 밤이 깊으면 별이 빛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별이 빛나고 새벽이 오기 위해서는 밤이 깊어져야 합니다.
옛날 등화관제 훈련이 있을 때입니다.
싸이렌이 울리고 그래서 모든 불이 꺼져 서울이 캄캄해졌습니다.
방에 있어봤자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서울이 얼마나 캄캄한지 보려고 옥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참으로 신기한 것은 서울 하늘에도 별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불이 휘황찬란했을 때는 하늘의 별이 보이지도 않았고 하늘의 별을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인간이 만들어 놓고 켜놓은 불들이 다 꺼져야 하느님의 빛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빛을 볼 때라야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들볶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로마에서 공부하면 손님이 참 많이 찾아옵니다. 바쁘기는 하지만 연락을 하고 오는 손님을 그냥 보낼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좀 한가한 편이지만 바쁠 때 손님이 많이 오면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손님이 오면 거의 하루 종일 걸어야 하고 공부도 할 수 없기에 몸도 마음도 힘이 드는데 언제 한 번은 새끼발가락 옆에 난 티눈 때문에 걷기가 더 힘든 것이었습니다. 걷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티눈이 있어도 뺄 생각을 잘 하지 않았는데 꼭 많이 걸어야 하는 날 더 아파오는 것이었습니다.
다니면서 계속 빨리 티눈을 빼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집에 들어와서는 피곤해서 쓰러져 잤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학교에 가려고 하는데 티눈이 또 생각났습니다. 아침에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티눈을 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 갈 때 또 괴롭힐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침을 먹지 않는 한이 있어도 티눈부터 빼야겠다고 생각했고 앉아서 손톱깎이로 티눈을 뜯어냈습니다. 결국 아침은 먹지 못했지만 티눈을 떼내니 속이 시원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꾸준한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재판관은 하느님도 안 무서워하는 사람이었지만 과부가 자꾸 괴롭히니 귀찮아서라도 그의 청을 들어주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재판관은 마치 발에 난 티눈처럼 과부의 청원이 귀찮고 싫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귀찮더라도 빨리 해결을 짓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도 티눈때문에 재판관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치시며 이렇게 결론을 지으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창세기 32장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불리게 된 경위가 나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 올 때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야뽁강을 건너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느닷없이 어떤 사람이 나타납니다. 야곱은 밤새 그 사람과 씨름을 합니다. 야곱을 이기고 빨리 가려던 그 사람은 야곱이 끈질기게 축복을 청하자 야곱의 엉덩이를 쳐서 환도뼈를 부러뜨립니다. 날이 밝아오는데도 야곱이 쩔뚝거리며 끈질기게 축복을 청합니다. 그 사람은 결국 야곱에게 져 축복을 해 주시고 이름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시고 떠납니다. 야곱과 씨름을 했던 사람은 하느님이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 인간과 씨름을 해서 질 수 있을까요? 이는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야곱의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뼈가 부러지는 아픔으로 이젠 포기해 버릴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기도를 드리다가도 안 될 듯싶으면 금방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나 청원은 마치 티눈처럼 하느님을 괴롭혀 은총을 얻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금방 포기해버리는 것은 어쩌면 믿음이 약해서일지도 모릅니다. 나무에 달린 사과가 가만히 밑에서 기다린다고 떨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은총도 쟁취해 내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무엇을 사달라고 할 때 부모가 응답이 없으면 사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끝까지 조릅니다. 몇 대 맞고서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부모가 보여주기 전까지는 끝까지 달려듭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그런 믿음을 보여야합니다.
성당에 안 나오는 남편, 사업의 어려움, 공부 등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에 열두 해씩이나 하혈 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께서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 분의 옷자락에 손을 댐으로써 병을 치유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믿음으로 들볶임을 당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미국에서 금광을 찾던 한 사람이 버려진 광산 하나를 싼 값에 샀습니다. 그 사람은 그 폐광을 더 파 들어가면 반드시 금맥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금맥을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다시 그 폐광을 팔아버렸습니다. 새로 그 탄광을 산 사람이 곡괭이질을 해서 1미터 정도 더 파 들어가자 누런 금광이 발견되었습니다. 만약 처음 사람이 한 번만 더 휘둘렀다면 평생의 노고가 보상받았을 텐데 마지막에 포기했기 때문에 평생 고생해서 남 좋은 일만 시키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한 번만 더 하면 들어주려고 준비하고 계실 수 있음을 기억하며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물은 100도에 이르지 않으면 결코 끓지 않습니다. 단 1도 차이로 물이 끓지 않는 것처럼, 혹은 단 1점 차이로 시험에서 떨어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도도 100도까지 완전히 도달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그 기도가 완전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99도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지금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지향으로 기도를 하던 마치 하느님 발의 티눈처럼 기어코 빼내지 않고는 못 배기실 정도의 집념으로 청원을 드려야겠습니다.
<주님, 에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은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인 동시에 재미있는 순간입니다. 언젠가 한 아이의 간절한 청원기도를 듣고 다들 뒤집어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너무도 단순하고 순수한 아이였기에 기도 역시 너무나 솔직했습니다. 이런 저런 청원 기도들이 대충 끝난 후 마무리 기도인 주님의 기도가 언제 시작되나 기다리고 있는데, 그 아이가 큰 목소리로 자신의 간절한 바램을 솔직하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장가, 에헴, 제발 저 장가들게 좀 해주십시오."
아이들은 사감수사님의 심각해진 얼굴 때문에 대놓고 웃지는 못하고 속으로 웃느라고 다들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 와중에도 다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를 빼먹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아이는 기도시간이 끝난 후 사감수사님에게 불려가 장시간에 걸친 정신교육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요즘 저희와 살고 있는 아이 가운데 역시 대단히 단순하고 솔직한 한 아이가 있습니다. 때로 오바도 많이 하지만 천사 같은 마음을 지닌 아이입니다. 이 아이의 특기는 청원기도입니다.
이 아이는 전체 아이들이 하는 7-8개의 청원기도의 절반을 도맡아서 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리고 더욱 기특한 것은 아이가 바치는 청원기도의 내용입니다. 언제나 나가서 고생하고 있는 친구들, 병원에 입원해 있는 형, 아픈 동생들, 재판을 앞두고 초조해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아주 간절히 기도하곤 합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는 언제나 기도거리들을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나간 아이들이 별탈 없이 귀가하곤 합니다. 그 아이의 "기도빨"은 상당한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봤을 때, 모든 기도가 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생각하면서 "나는 과연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 하고 반성해봤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부끄럽게도 너무나 이기적인 기도를 바쳐왔습니다. 내 한 몸 고통이 없기를, 내가 행하는 사목이 무난히 돌아가도록, 만사형통하기를, 건강 잃지 않기를, 나와 연관된 사람들의 일이 잘 풀리기를 등등. 정말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기도였습니다.
다시 한번 한 차원 높은 기도를 바쳐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그 기도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치셨던 기도입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구하셨던 예수님의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보다 보편적이고 크며 이타적인 기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고통을 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기도를 바치고 싶습니다.
나 자신의 사리사욕이 아니라 이웃의 선익을 위한 간절한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신다는 것을 늘 체험하며 삽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투자에 도움을 청할 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여러 천사들을 보내시어 간단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가 이웃의 결핍과 고통에로 향하는 이타적인 기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한 평생을 두고 천천히 흘러가야 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절실한 정도를 너머 처절한 기도를 드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가끔씩 삶의 기로에 서서, 또는 절박한 상황 앞에서 간절히 하느님의 도움을 청한다든지 그분의 뜻을 찾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분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드리는 간곡한 기도는 절대 허공을 맴돌다가 사라진다든지,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우리가 뜻하는 모습으로 뒤바뀌는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간절한 기도는 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실히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을 인식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어렴풋이 나마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진실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취약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기도가 지나치게 이기적인 기도, 너무도 허무맹랑한 기도였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삶은 정직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간절한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서서히 자신의 기도를 정화시켜나갑니다. 정화의 과정을 거친 우리의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결국 그 기도는 보다 순수한 기도, 지극히 이기적인 바램이 배제된 기도, 세상을 위한 기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한 기도이기에 100% 이루어질 기도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진정 올바른 기도인지 아닌지는 열매를 맺는가 맺지 못하는가를 통해 식별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도의 열매는 다름 아닌 희생입니다. 봉사입니다. 자기 낮춤입니다. 자기 비움입니다. 겸손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걷는 삶입니다. 한 인간의 삶이 총체적으로 바뀌는 긍정적 변화입니다.
간절한 기도란 꾸준한 기도입니다. 진지한 기도입니다. 자신의 인격 전체를 동원해서 하느님께 바치는 정성스런 봉헌입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하느님을 향해 높이 들어올리는 절실한 부르짖음입니다.
기도란 것은 속전속결로 끝낼 성질의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단기간에 해치울 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계속되어야 할 하느님과의 일상적인 대화입니다. 기도란 강물이 유유히 흘러가듯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 한 평생을 두고 천천히 흘러가야 할 그 무엇입니다.
어제 강의를 마치고 본당으로 운전을 하면서 돌아오다가 깜짝 놀랄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글쎄 3차선에 있었던 봉고차가 제가 운전하는 1차선으로 갑자기 끼어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운전하는 차선으로 진입하겠다는 표시도 없이 말이지요. 저는 깜짝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대로 충돌이 있을 뻔 했지요. 그런데 그 봉고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왼손을 내밀어 흔들고는 그냥 가는 것이 아닙니까? 순간적으로 화가 너무 나서 쫓아갔지요. 그리고 마침 신호등 때문에 선 그 차 옆에 서서 창문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 운전사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이렇게 말을 하네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순간적으로 내가 왜 쫓아갔나 싶었습니다. 차에서 내린 뒤에 그 운전사의 멱살을 잡고 싸워야 했을까요? 아니면 욕을 퍼 부어야 했을까요? 사고가 날 뻔 했던 것이지, 사실 아무런 일도 없었지요. 이 사실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인데, 싸우기부터 하려고 했던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던 지요.
참, 그래서 그 운전자에게 어떻게 했냐고요? 무작정 쫓아간 제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끼면서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운전 조심해서 하세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이렇게 묵상을 하고 묵상 글을 써왔으며, 또한 사람들 앞에 강론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자고 그렇게 강조했던 저였지요. 또한 저도 그렇게 살라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나오는 나의 행동은 전혀 뜻밖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제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다시금 느끼시는 순간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또한 늘 주위를 경계하면서 악으로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도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그 필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부의 청을 결국 들어주는 못된 재판관의 비유 말씀을 해주시지요. 이 재판관이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이유는 과부가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었고, 또한 하느님이 두려워서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끊임없이 재판관에게 매달리는 과부가 귀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우리의 능력만 가지고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비유 말씀에 등장한 과부처럼 주님께 끊임없이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못된 재판관이 아니라,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닙니까? 따라서 약간의 노력만 한다면 분명 우리가 원하는 길로 분명히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해 사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싸우지 맙시다.
잘못을 바로잡은 청지기(‘좋은생각’ 중에서)
이은은 정조 때 좌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어느 날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며 창릉에 갔다가 돌아온 날이었다. 먼 길을 다녀오느라 허기가 진 이은은 관청의 아전에게 다과상을 차려 오라고 명했다. 그러나 아전이 이를 거절했다. 이에 잔뜩 화가 난 이은은 그 아전을 해임시켰다. 그러고는 자기 집에서 청지기를 하던 김완철을 아전 자리에 앉혔다.
얼결에 아전이 된 김완철은 관청 사람들에게 왜 예전 아전이 일을 그만두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아전은 잘못이 전혀 없었다. 당시 관청에는 반과법이라는 법규가 있는데, 정승이 외출할 때면 반드시 음식상을 차려 바치고 그 이후에는 음식상을 차리지 않도록 돼 있었다.
김완철은 이은에게 아전 자리를 내놓겠다고 말했다. 뜻밖의 반응에 당황한 이은은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물었다. 김완철은 이렇게 대답했다.
“외출할 때 음식상을 받고 나가신 대감은 법규를 어기면서까지 음식상을 또 차려 오라고 명하셨지요. 그 명을 거절한 것은 아전이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감은 평소 아전을 아랫사람이라고 업신여겼기에, 대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고 그를 해임시켰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른 대감께서 법규를 어기고 아랫사람을 업신여기며 백성을 속이는데, 제가 대감 밑에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김완철의 이 말을 듣고서야 자기 잘못을 알게 된 이은, 결국 그는 뒤늦게 잘못을 인정하며 해임시킨 아전에게 사과하고 그를 복직시켰다.
갈망을 간절하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끊임없이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시기 위해 주님께서 드신 비유를 보면서 불경스럽지만 과연 적절한 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은 비유의 재판관처럼 성가시게 굴어야지만 들어주시는 분인가?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분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청하지 않아도 들어주실 분이신데 우리가 꼭 필요한 것을 청해야 하고 그것도 성가실 정도로 끈질기게 청해야 하는가?
우리 인간 가운데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필요에 무감각할 정도로 인간에 대해 불성실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 가운데는 자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웬만한 자리에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 가운데는 자기의 호의가 더 드러나게 하기 위해 웬만한 요청은 의도적으로 들어주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도 이러한 의도로 우리의 청을 쉬 들어주지 않으시는가?
만일 그러하시다면 하느님도 아닌 좀팽이다.
만일 그러하시다면 하느님 자리 내 놓고 그런 하느님을 떠받드는 좀팽이들의 왕국에로나 가시라!
그러나 하느님은 절대 그러실 리 없다.
하느님은 체면 떨어지게 인간을 상대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호의를 뽐내실 분이 아니시다.
그러니 하느님이 우리에게 끈질기게 기도하라 하심은 우리의 갈망을 더욱 간절히 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호의가 은총이 되게 하심이다.
갈망이 간절하지 않으면 보석도 짱돌이 되나니!
갈망이 간절하지 아니 하면 하느님의 사랑과 호의도 흘려버리는 물이 되나니!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임영인 신부님
조그만 회사를 운영하는 어느 교우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최근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한꺼번에 겪고 있습니다. 경기가 나빠져서 집에 생활비를 제대로 갖다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직원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해왔기 때문에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아졌고 부부 싸움도 잦아졌습니다. 게다가 회사 일에 바빠 아이들에게 신경 쓰지 못했더니 아이의 성적이 떨어지고 행동이 빗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성당은 가뭄에 콩 나듯이 다녀 신부님의 얼굴도 잘 몰랐습니다.
그분은 고민 끝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신부님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늘 기도하고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씀은 옳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의 도전적인 질문에 신부님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기도하세요!” 그 교우는 신부님에게 바짝 다가가며 계속 물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통해 지금 겪는 일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부님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말했습니다. “비록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교우님은 그 기도를 통해 분명히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과부와 재판관의 이야기
윤지중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하나 들어주셨는데, 어떤 과부와 재판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아주 고약한 재판관이 한 사람 있었는데, 어느 날 과부가 찾아와 그에게 억울한 일을 호소하며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늘 그를 찾아와서 졸라대며 성가시게 합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과부의 소원대로 재판을 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좋은 뜻에서가 아니라 자꾸만 졸라대니까 더 시달리지 않으려고 생각을 바꿔 먹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 말씀을 통해 그렇게 지독한 재판관도 과부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청하니까 성가셔서라도 그 청을 들어주는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야 오죽 하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잃지 않고 언제나 기도드리면 하느님은 지체없이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계속 기도하기만 하면, 그것을 무조건 다 들어주실까요?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다 이루어 주실까요?.... 글쎄요.
어린 아이들은 보통 부모님께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청합니다. 가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온갖 떼를 다 쓰고 울며불며 그것을 사달라고 조르곤 합니다. 그러면 아이의 부모는 어떻게 합니까? 무조건 아이가 사달라고 하는 것을 다 사 줍니까? 솔직히 어느 부모인들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가 아무리 떼를 쓰고 울어대도 그것이 아이에게 맞지 않거나 좋지 않겠다 싶으면, 결코 아이의 요구대로 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삶 전체를 보고 아이의 장래까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이의 요구대로 해주지 않으면, 아이는 섭섭해 하고 부모님을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모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아이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마음도 부모들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 주고 싶어 하는 부모 마음처럼 우리를 향한 하느님 마음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아이의 미래와 전체의 삶을 생각해서 때론 마음 아프지만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부모처럼 하느님도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들을 다 들어 주시고 싶으시지만 때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실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청하는 그것이 고작 내 욕심이나 채우고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들이라면 어찌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우리가 청하는 그것이 우리 삶 전체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얼마나 좋은 것인지조차 제대로 모를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당장 필요한 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되면 좋을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우리에게 맞지 않고 결국 나쁜 결과를 빚게 되어 우리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한다고 해서 다 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매일 사탕 한 봉지만 한 봉지만 그러는데 매일 사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왜 그런 비유를 드시고, 마치 하느님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졸라대면 무슨 기도든지 다 들어주실 것처럼 말씀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절대 거짓말을 하실 분도 아니고 쓸데없이 빈 말씀을 하실 분도 아니신데,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용기를 잃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언제나 기도를 드리면 하느님께서 올바른 판결을 해주신다는 것이지, 그것이 어떤 기도이든지 무조건 하느님께 매달리고 청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주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은 아이가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해주는 그런 어리석고 무책임한 부모같은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하느님께서 잘 안 들어주시는 것 같다면,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청하는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청해서는 안 되는 그런 것이라든지, 하느님 보시기에 아직 때가 안 되었다든지, 혹은 하느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 주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든지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기도가 여러분의 욕심이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면 실망하지 마시고 믿음을 가지고 부단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여러분의 기도가 하느님 뜻에 맞지 않는 기도이거나 사욕을 위한 것이라면 먼저 하느님 뜻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하시고, 조금 욕심을 줄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하느님 뜻에 맞는 합당한 그런 기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사욕이나 채우려는 그런 어리석은 기도입니까?
병원 응급실에 아기를 안은 여자와 어린아이 하나가 막 뛰어 들어오면서 서로 울고 있었습니다. 간호사는 그 여인에게 다가가 물었지요.
“아니, 무슨 일이세요?”
그러자 여인이 울면서 말합니다.
“엉엉~~ 우리 아기가 동전을 삼켰단 말이에요.”
그런데 간호사가 보니 이 여인의 옆에 있는 어린아이도 펑펑 우는 것이에요. 그래서 어린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이지? 동생이 동전을 삼켜서 걱정되어서 우니?”
이 어린아이는 더욱 더 서럽게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엉엉~~ 그게 내 동전이란 말이에요.”
하나의 상황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두 사람의 차이를 볼 수가 있지요. 여인은 동전보다는 아기의 건강을 생각합니다. 반대로 아이는 아기의 건강보다는 동전을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똑같이 체험하는 하나의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인들도 그렇습니다. 똑같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인데, 어떤 이는 너무나도 힘들어하면서 주님께 원망의 기도를 바치는 반면에 또 다른 이는 힘들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주님의 큰 뜻이라면서 오히려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더 행복할까요? 긍정적인 생각과 함께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다가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바로 주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 대화의 통로는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오만한 재판관이 끈질기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과부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비유 말씀이지요.
이 비유 말씀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즉, 이 여인은 이곳저곳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들과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판결을 내려서 지금의 상황을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단 한 명의 재판관만을 찾아가서 매달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이곳저곳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만 매달리라는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렇지 못합니다. 돈에도 매달리고, 권력에도 매달리고, 때로는 명예에도 매달립니다. 그러다보니 주님의 자리는 항상 맨 마지막 자리가 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제는 주님께만 매달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과 깊은 대화의 시간을, 즉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십니다.
기도하세요.
날개의 쓰임(‘좋은 생각’ 중에서)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다. 원래 새는 땅을 걸어다니는 작고 약한 동물이었다. 한참 다른 동물들이 사는 모습을 관찰하던 새는 자신의 불품없는 모습이 불만스럽게 여겨졌다. 아무래도 신은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 자신의 못난 점만 꼽아 보던 새가 드디어 신을 찾아가 항의했다.
“이건 너무 불공평합니다. 땅을 기어 다니는 뱀은 독이 있고, 무서운 사자는 날카로운 이빨이 있고, 늠름한 말에게는 말굽이 있습니다. 이들은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이 가진 재주로 위험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들은 너무나 약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당하기만 합니다. 우리에게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무언가를 주십시오.”
새의 말을 듣고 곰곰이 궁리하던 신이 새의 손을 날개로 바꿔 주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새가 다시 찾아와 툴툴거렸다.
“신이시여, 새로 주신 이 손은 너무 넓적하고 무겁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동물이 나타났을 때 뛰어서 도망가기가 전보다 더 어렵습니다. 또 손이 없어지니 영 불편합니다. 전에는 손으로 했던 일도 입으로 해야만 합니다. 불만이 많은 저를 골탕 먹이려고 ‘날개’를 주신 것 같은데, 이것을 다시 사라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신은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 어리석은 새야! 너에게 손을 대신해 날개를 준 것은 하늘로 높이 날아올라 적으로부터 피하고 넓고 푸른 하늘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저 손이 없어 불편해졌다고 생각했던 새는 신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두 날개를 퍼득였는데 몸이 서서히 날아오르는게 아닌가.
이처럼 나에게 짐이라고 생각되는 그것이 때로는 하늘을 날아오르게 하는 날개일 수 있다.
기도
서현승 신부님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바로 전,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처절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하지만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가장 궁극적인 기도의 원형과도 같습니다. 이를 묵상할수록,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하느님께 대한 예수님의 무한한 신뢰가 느껴집니다. 제자들에게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시며 ‘과부와 고약한 재판관’ 비유를 통해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기도를 잘 들어주는지를 강조하십니다. 평상시 우리의 간절한 바람들조차 잘 안 들어주시는 듯한 하느님을 원망해본 적이 있다면, 어쩌면 ‘고약한 재판관’쯤으로 하느님을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필요와 욕구만을 요청하는 기도에 머무는 것이 아닌 하느님과의 친교를 위한 기도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하느님의 눈으로 배워 알게 될 것입니다. 알면 알수록 이미 우리의 삶 안에서 얼마나 많이 그것들을 무상으로 받았는지 깨달아가는 놀라움과 기쁨의 나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이 부족하여 나약하고 흔들리기 쉬운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더 더욱 우리는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
이인옥
아들이 공부를 그만두고 기타를 치겠다고 했을 때, 적성 때문에 선택했다는 확신도 없었거니와 예능 방면으로 뒷받침해 줄 형편도 아니어서 속이 많이 상했다. 말려도 되지 않고, 저 하는 대로 보고 있자니 가슴에 돌을 눌러놓은 것처럼 답답하고 한숨만 나왔다. 성적이 아닌 인간 됨됨이로 평가해 달라고 담임 선생님께 간곡한 편지를 쓰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다. 기도는 계속되었지만 응답은 곧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더 나빠졌다. 열심히 하던 기타 연습도 시들해졌고, 지도하던 선생님마저도 무성의해졌다. 매사에 자신이 없고 무력한 채 지내던 아들이 우여곡절 끝에 올해 대학에 들어갔다. 진짜 적성을 찾아 뒤늦게 합류한 아들은 적극적이고 밝은 예전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방황한 만큼 더욱 철이 들었다. 자신감이 살아나고 활기 넘치는 아들을 볼 때마다 감사가 절로 나온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드린 결과는 아들한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나한테도 나타났다. 기도하는 동안 아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기도하는 동안 나 자신의 욕심을 포기하고 아들의 행복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기도하는 동안 아들이 어떤 상태이건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매번 느끼게 되었다. 이런 생각과 느낌은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다시 분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다. 기도하는 동안,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 옳고 선하고 아름답고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동안, 그 영향이 주위 사람들에게 줄기차게 전달되어 마침내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재판관과 부의 청
김상균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 비유 말씀을 한 가지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과부가 한 재판관에게 어떤 문제에 대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는데, 그 재판관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과부가 계속해서 귀찮게 하자 그 청을 들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이 당신 백성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재판관이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나쁜 사람, 못된 사람이지요? 하느님과 그 재판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극명한 비교를 통해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청을 잘 들어주실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듯이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주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며,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완전히 의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죠?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이처럼 하느님께 완전한 의탁과 그분의 뜻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오늘 복음에 이어서 나오는 내용을 보더라도, 우리의 기도가 믿음을 필요로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서 나오는 내용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 관한 비유 말씀과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는 내용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랑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신의 공로를 더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리는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느님의 은총만을 믿고 바랐습니다. 바로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 앞에, 나 자신이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만을 믿고 바라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이들을 안으시며 “하느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요,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가 엄마, 아빠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자라듯이, 우리의 기도도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고 완전히 의탁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그 자비하신 마음으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믿음없이 드리는 기도라면, 하느님께서도 받아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 뜻에 내어맡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믿는 마음으로 기도드리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드려야 겠습니다.
"절망의 상태이지만 주님 안에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홍성만 신부님
이따금, 기도에 임하는 제 자신을 뒤돌아보면 나의 기도가 얼마나 편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약 35넌 전 신학생 시절에는 남북통일에 대해 기도를 드린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만해도 남북통일에 대해서 일말의 작은 희망도 갖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희미하나마 인간적으로 희망이 감지될 때에만 이를 바탕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이는 틀림없이 저의 잘못된 믿음의 소치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끝나는 오늘 복음 말씀이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믿음은 궁극적으로 주님 안에서 희망을 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상태이지만 주님 안에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권세 당당한 재판관이지만,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끈질기게 졸라대는 힘없는 과부에게 백기(白旗)를 들고 맙니다.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사실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희미하게나마 희망이 보일 때 이를 바탕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물론 이 희망이 기도를 더 적극적으로 드리는 데 매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믿음은 궁극적으로 주님 안에서 희망을 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상태이지만 주님 안에서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수록 더욱더 주님께 의지하고 희망을 두어야합니다.
희망하고 의지하는 나를 주님께서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방법대로 나를 거두어 주십니다.
결국 나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께 의지하고 희망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
최금자
이탈리아에서 계획했던 공부를 마치기 위해 장학금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있었습니다. 장학금을 주겠다는 독일 장학재단에서 나에게 어려운 조건을 요구했습니다. 소속 교구 주교에게 학업을 마친 후에 일자리를 보장하겠다는 고용계약서를 받아 제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공부를 마치지도 않았으며, 평신도인 나에게 주교님이 고용계약서를 써준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어서 무척 난감했습니다. 나는 주교님께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고용계약서가 필요하다는 간곡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주교님의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나 자신은 물론 한국교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지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한참 후에 장학재단은 주교님의 확답을 받았다며 나에게 장학금을 주겠다고 알려왔습니다. 그 순간 나는 날아갈 듯이 기뻤고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이 들면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며 나아가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는 완고한 재판관이 끈질기게 간청하는 과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정당한 판결을 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서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어려운 가운데서도 희망의 불을 끄지 말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비록 원하는 때를 넘겼더라도 그 길만이 자신이 살 길이라면 결코 포기하지 말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까지 항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귀하고 사랑스런 존재
백광현 신부님
제가 사는 곳은 숲이 우거져서 새들이 많이 날아듭니다. 다람쥐도 살고 있는데 저희와 친숙해져서 겁 없이 다가오곤 합니다. 등산로가 옆에 있어 사람들의 소리, 열심한 개신교 신자가 아침마다 외쳐대는 ‘야훼’소리도 이곳 환경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날아와서 아침의 단잠을 깨우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수도원 가까이에서 새벽부터 망치질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이 트기가 무섭게 시작되는 망치질이 2주째나 되어 그동안 아침잠을 설친 저는 이젠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충 옷을 걸쳐 입고 나가는데 인기척이 있어 고개를 돌렸더니 제 방 옆에 딱따구리 한 마리가 붙어서 처마에 구멍을 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딱따구리는 인기척을 듣자 곧바로 달아났습니다. 그 뒤에도 딱따구리와의 실랑이는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돌을 하나 집어 들고 벽에 붙어 있는 딱따구리에게 던지려고 했는데 딱따구리의 색이 너무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슬그머니 다시 돌을 내려놓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귀찮게 구는 놈이라도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용서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께 이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라는 생각이 저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나만의 기도방
임종심
나 같은 외짝교우들은 드러내 놓고 기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성체조배실은 나에게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는 나만의 기도방이다. 나는 매주 화요일 성체조배를 한다. 정해놓은 시간에 맞춰 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바쁜 가운데 용케도 그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은총이었다. 뭔가 해 달라고 졸라대는 기도가 아니라 그냥 그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지친 육신과 영혼을 어루만져 주시도록 오롯이 맡긴다. 주님 품에 안기는 그 시간이 행복해서 또 찾아오게 된다. 기도는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성체조배실처럼 꾸며져 있는 곳에서는 더 잘 되는 느낌이다.
지금도 나 혼자서는 묵주기도 5단을 제대로 바치지 못한다. 여럿이 함께할 때는 쉽지만 모든 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음잡고 묵주기도를 하려고 하면 어느덧 꿈나라로 향한다. 그래서 묵주기도를 하기 전에 시작은 제가 하지만 기도를 마치지 못할 땐 성모님께서 마무리해 주십사고 말씀드린다.
예수께서는 과부의 비유를 들어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과연 이 과부처럼 끊임없이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는가? 혹 나의 기도는 적당히 핑계를 대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반성해 본다. 늘 기도 속에서 제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청한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겠느냐?”
<신앙생활 안에서 스윗스팟(Sweet Spot)의 체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주 기쁘게, 그리고 열심히 사시는 한 택시기사님을 만나니 하루 온종일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문을 여는 순간부터 피부에 와 닿는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멋진 백발에 선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기사님이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가 자리에 앉자마자 저 기분 좋으라고 덕담 한마디를 던지십니다.
“제가 사주팔자를 조금 공부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손님 참 관상이 특별합니다. 귀인 얼굴입니다.”
“기인(奇人: 기이한 인간)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귀인(鬼人: 귀신같은 인간) 말씀하십니까?”
“둘 다 아니고요, 귀인(貴人)상이십니다. 손님, 보아하니 스님 되실 상인데, 스님이 되셨더라면 큰스님이 되실 관상입니다.”
직업상 하시는 말씀인줄 알고 있었지만, 듣고 있노라니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속으로 ‘이양반 사람 볼 줄 아시네’하는 ‘교만한’ 생각도 은근히 들었습니다.
할 수 없이 요금을 계산할 때 ‘복채’를 웃돈으로 더 얹어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작별인사도 무척 요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서비스 만점인 기사님을 뵈면서 ‘고객만족’ ‘고객감동’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부, 집요함을 넘어 지독하리만치 졸라대는 과부의 전력투구를 높이 평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졸라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함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이웃들의 행복을 위해 집요하게 졸라댐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달란트를 발견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효과적으로 활용하려고 노력함이 필요합니다.
스윗스팟(Sweet Spot)이란 말이 있습니다. 골프채를 휘두를 때, 야구장 타석에 들어설 때, 축구시합에서 상대방의 골대 앞에서, 아주 가끔씩 느끼는 감동입니다.
중심 가운데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중앙을 정확하게 때리는 순간, ‘딱!’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높이 날아간 골프공이 정확하게 홀 안으로 들어갔을 때의 그 짜릿한 느낌, 제대로 맞은 야구공이 날개를 단 듯이 날고 날아 펜스를 넘어갈 때의 그 황홀한 기분. 그런 체험을 한 사람만이 진정한 프로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스포츠 경기에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안에서도 우리는 스윗스팟을 체험해야 합니다. 스윗스팟을 맛본 삶이 순풍에 돛단 듯 신나게 나아가듯이 스윗스팟을 찾은 신앙생활 역시 날개를 단 듯 수직상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그저 그런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비결은 스윗스팟을 찾는 일입니다. 스윗스팟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를 찾기 위해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장점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선물로 주신 것 가운데 이 세상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 혼자만의 고유한 영역을 찾아야 합니다. 나의 강점, 나의 경쟁력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순간 스윗스팟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신만이 지닌 독특한 능력으로 하느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자신만이 지닌 특별한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하느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자신의 강점, 경쟁력을 활용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는 하느님을 세상에 증거 하기 위해, 하느님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스윗스팟은 반드시 하느님과 연관되어야만 합니다.
세상과 이웃들을 위한 우리들의 봉사활동에도 스윗스팟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봉사가 가치를 발하고 의미를 더해갑니다.
우리가 행하는 사도직이나 봉사활동이 하느님께도 영광을 드리는 일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달란트를 잘 개발하였는가? 갈고 닦은 나의 전문성이 십분 발휘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이웃을 향한 봉사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가 하는 문제도 더없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충족될 때 우리의 봉사활동은 지속적인 스윗스팟을 체험하는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 봉사활동이야말로 제대로 된 봉사활동이며 하느님과 이웃들이 기뻐하실 봉사입니다(맥스 루케이도, ‘일상의 치유’ 청림출판 참조).
항구한 기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하신 일들이 얼마나 크옵시며, 생각하심 그 얼마나 깊으시니이까.”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측량할 수 없이 깊고 깊은 신비의 하느님이십니다.
비단 하느님뿐 아니라, 사람 또한 얼마나 깊고 깊은지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삶의 무한한 다양성과 깊이에 놀라게 됩니다.
결코 단일한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하느님만이 아시는 그만의 고유한 깊이를 지닌 사람들임을 봅니다.
새삼 하느님의 신비는 사람의 신비이고, 사람의 신비는 하느님의 신비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사람을 모르고, 사람을 모르면 역시 하느님을 모릅니다.
바로 여기서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게 기도입니다.
항구한 기도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보이는 것 넘어서의 참 사람과의 깊은 신뢰 관계와 내적 탐구를 위해 진실하고 항구한 기도는 필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든, 사람 간의 관계든 본질적인 것은 형식이전의 신뢰관계입니다.
신뢰관계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형식의 공동체가 진정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한 가정 안에서 남남으로 무관하게 살아가는 부부가 있듯이, 한 수도원 안에서도 하느님과 남남으로 무관하게 살아가는 수도자도 있을 수 있는 법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깊어지는 신뢰관계가 우리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고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긴 간청을 통해 그 소원을 관철시키는 과부가 바로 항구한 기도의 모범입니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할 때 하느님은 분명코 응답해 주십니다.
들어주시면 들어 주시는 대로, 안 들어 주시면 안 들어 주시는 대로, 당신의 뜻에 따른 응답입니다.
그러니 들어 주셔도 좋고 안 들어 주셔도 좋으니 다 하느님의 뜻에 따른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항구한 기도가 하느님은 물론 이웃 간의 신뢰관계를 깊게 하며 더불어 서로 간의 앎도 깊게 합니다.
이런 항구한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기도에 소홀한, 하여 믿음 부족한 오늘날 사람들을 분발시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요한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떠난 이들’을 돌보아 줄 때 바로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협력자’라는 용어가 참 아름답습니다.
진정 항구한 기도의 사람들, 진리의 협력자들이 되어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떠난 모든 믿는 이들을 잘 돌보아 줄 것입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하느님과 우리와의 신뢰관계를 깊게 해주며 진리의 협력자들 되어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들이여!”(시편112,1).
아멘.
당신 백성이기에 보호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님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하실 때 하느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한 땅 이집트로 뛰어내렸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상태에서 풀어주지 않으려고 하는 이집트 백성의 모든 장자와 가축의 맏배를 쳤다. 또한 광야로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던 이집트 군대를 쳤다. 그리하여 이집트 땅이 멸망한 땅처럼 온 땅을 시체로 채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며 낮에는 시원한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따뜻한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이끌어주셨다. 그들이 홍해를 건널 때에는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목장에서 풀을 뜯는 말들처럼 배불리 먹고, 양들처럼 뛰놀면서 구원의 주님을 찬양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는 당신 백성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듣고 계셨다. 때가 이르자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시어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계시며 모세의 힘이 되어주셨다. 그리하여 모세로 하여금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셨다.
모세는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표로서 여러 가지 이적을 보였다. 그러나 파라오는 모세의 말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적대시하였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적대시하고 죄악에 빠져있는 완고한 이집트 백성을 죽음에 빠트리셨다. 이집트 백성의 장자들을 모두 죽게 하셨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던 이집트 군대를 홍해 바다에 빠져 죽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시키셨다. 홍해 바다를 말리시어 그들이 마른 땅을 밟고 홍해 바다를 건너도록 하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덮어주시어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시며 시원하게 해주셨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덮어주시어 밤의 차가운 냉기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시며 따뜻하게 해주셨다. 먹을 것이 없어 고통을 당하던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시어 배불리셨으며(출애 16,14-31), 고기를 그리워하던 그들에게 메추라기를 보내시어 고기를 배불리 먹도록 하셨다(출애 16,13).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불평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귀여겨 들어주셨다(출애 16,12).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당신 백성을 애지중지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던 것이다. 오직 당신의 백성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보살피시고 인도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거부하는 이집트 백성을 벌하시어 죽음에 빠트리시지만, 당신 백성 이스라엘은 구원하시어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실 뿐만 아니라 철저히 보호하시고 지켜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거부하고 적대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철저히 벌하시지만, 당신을 따르고 순명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음으로써 벌을 받기도 하지만, 오직 당신 백성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불평을 들어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그들을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백성이요 자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자. 우리가 하느님 백성이요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신다. 당신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를 보호해주신다. 당신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다. 그러니 하느님 백성이요 자녀임을 자랑스럽고 기쁘게 생각하자.
저는 스스로 자전거 마니아라고 할 만큼 자전거 타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래서 지난 8월에 자전거를 타고 부산을 갔다 오기까지 했지요. 사실 부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더군요. 더운 날씨, 갑자기 내리는 비, 점점 아파오는 다리의 통증 등은 부산까지의 자전거 여행을 쉽지 않게 만드는 커다란 장애물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장애물을 제치고 부산을 갔다 왔지요. 그런데 이렇게 부산을 다녀와서 그런지 사람들은 제가 자전거 타는 것에 있어서는 도인이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신부님, 이제 한 100Km 정도 가는 것은 우습겠어요?”
“신부님께서는 아무리 자전거 타도 안 힘들죠?”
부산까지의 거리. 상당한 거리임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보다 적은 거리를 자전거 타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불과 10Km를 가는 것도 힘들 때가 있답니다. 예를 들어, 정말 오랜만에 자전거를 탔을 때 또는 오르막 언덕만 계속되는 길을 갈 때에는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부산을 갔다 왔다고 해도, 꾸준히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면 짧은 거리라 할지라도 이렇게 힘이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체력이 장사라 할지라도, 오르막만 계속되는 언덕을 자전거 타고 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문득 어쩌면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도 이렇지 않을까 싶어요.
주님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 순간에는 어떠하세요? 이 길이 너무나 좋은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제 열심히 기도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빠짐없이 기도하고, 매 순간의 삶 안에서도 주님을 느끼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그때에는 분명히 기쁨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행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쁜 일상의 일로 인해서 기도를 한두 번 빠지게 됩니다. 그 한두 번의 횟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처음에 가졌던 열정은 사라집니다. 특히 안 좋은 일까지 겹치게 되면 기도는 뒷전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자전거도 꾸준히 타야 쉬운 것처럼 기도 역시 꾸준히 해야지만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행하는 기도에 대해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지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 끈질기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한 가난한 과부의 소원을 결국 들어준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사실 이 과부는 돈도 그리고 권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 어디에서도 의지할 때가 없었습니다. 즉, 이 여인은 어떤 공정한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매달렸기 때문에 여인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밤낮으로 부르짖는다면 올바른 판결을 우리에게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봅시다. 나는 과연 과부의 모습처럼 끊임없이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도하고 있을까요?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나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할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맙시다.
가죽 두 조각이면(최용우, '햇볕같은 이야기' 중에서)
어리석은 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울퉁불퉁한 자갈길에서 잘못하여 넘어져 발에 상처가 났습니다.
화가 난 임금은 발을 보호하기 위해 온 나라의 길이란 길에는 모두 소가죽을 깔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때 현명한 신하 하나가 황급히 달려와 말했습니다.
"폐하... 발을 보호하려면 작은 가죽 두 장이면 충분하옵니다. 가죽을 폐하의 발에 붙이면 온 나라가 다 가죽 아래 있사옵나이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의 발에 가죽을 붙였습니다.
세상이 온통 다 썩었다고 희망이 없다고 망해간다고 말하지 마세요. 나 하나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나 하나 마음 바꾸면 세상이 마음을 바꿉니다. 바로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저는 요즘에 책을 읽는데 아주 열심이랍니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고 해서 특별히 읽는 것은 아니구여, 어떤 책이 새로 나왔기 때문에 읽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 많은 분들이 아실꺼에요.
“해리포터와 혼혈왕자”
지금까지 꽤 많은 양이 나온 책이지요. 그리고 남녀노소 좋아하는 책이기도 하고요. 더군다나 영화로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 이 책을 처음 나올 때부터 보기 시작했고, 이번에도 책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있답니다. 지금이 6부인데, 전에 5부까지 읽었던 시간이 너무나 오래된 것입니다. 즉,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전의 내용들이 잘 기억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등장인물도 헷갈리기도 하더군요.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만약 제가 그 책을 쉬지 않고 처음부터 쭉 읽었다면 어떨까요? 분명히 지금처럼 헷갈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용 파악이라든가, 등장인물 파악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신앙도 이렇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때, 더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종종 이런 분들을 만납니다. 지금 바쁘다고 성당을 나가지 않고, 지금 힘들어서 성당을 나가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심지어 입시 중인 자녀들에게는 입시 중에 무슨 종교활동이냐고 하면서 성당을 못나가게 한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이 모두 끝난 뒤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그 뒤로 이어지는 것은 오랫동안 계속되는 냉담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 중에서 하나는 신앙생활이 생활의 여유가 있는 사람의 몫이라는 착각인 것입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수록 주님께 더욱 더 의지해야 하는 것이며, 주님의 자비를 끊임없이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과부의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이 과부는 고약한 재판관인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청합니다. 결국 귀찮음을 느낀 재판관도 과부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못된 재판관도 이렇게 귀찮을 정도로 청하면 들어주는데, 사랑 가득하신 하느님께서는 어떠실 것인가 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요.
내가 어렵고 힘든 순간에 얼마나 하느님께 매달렸는지요?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주님께 철저히 의지하는 마음, 이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수험생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좋은 글' 중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풋볼을 몹시 좋아한 소년은 키도 작고 몸도 여위었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풋볼 팀에 들었다.
그러나 늘 후보선수로 남아 경기에 한 번도 출전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팀이 경기가 있을때마다 어김없이 관중석에서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하였다.
대학에 들어간 소년은 또 다시 풋볼팀에 지원을 하였다.
몸은 왜소하지만 그의 놀랄만한 투지를 높이산 감독이 그를 합격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4년동안 치뤄질 대학풋볼 경기 입장권을 모두 사버렸지만 소년은 4년동한 한 번도 경기에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관중석을 지키고 계셨다.
그러다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시합이 있기 일주일 전 소년의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시합날 소년은 자기를 출전시켜달라고 감독에게 빌었다.
그의 팀이 아슬아슬하게 지고 있어서 감독은 거절하였다.
그러나 소년이 열성적으로 매달리자 결국 그를 출전시켰고..기적적으로 1분을 남겨놓고 소년이 승리점을 올렸다.
경기가 끝난 후 감독이 믿을수 없는 표정으로 소년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소년이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셨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경기를 보러 오셨지만 내가 뛰지 못한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어가셨기 때문에 오늘 처음으로 제가 경기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실 수 있었을 겁니다.
아버지 사랑해요!"
至誠이면 感天
강영구 신부님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
그대에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습니다.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재판관도 과부의 끈기와 인내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뚫고
부드럽게 흐르는 물이 모난 돌을 깎아 둥글게 만듭니다.
기도란 단순히 자신의 억울함과 아쉬움을 하늘에 호소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란 자기를 깎는 일이자 하늘을 감동시키는 일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스스로 한 방물의 물이 되어
꿈쩍도 하지 않던 파렴치한 재판관을 감동시킵니다.
모든 기도가 다 하늘에 가서 닿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고 하늘을 닮는 사람의 기도가 하늘에 닿습니다.
바위를 깎고 다듬기 위해서는 물이 되어야 하듯이
하늘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하늘을 닮아야 합니다.
하늘을 닮으려면 비어있어야 합니다.
비어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품어주고 감싸 안을 수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 예수는 하늘 닮은 사람입니다.
당신도 하늘 닮은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당신의 기도가 하늘에 가 닿기를 바랍니다.(一明)
오늘’내가 드리는 기도는...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복음의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루가복음에만 있는 고유사료이다. 비유의 소재는 루가가 즐겨 주제로 삼아 보도하는 기도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인내와 끈기를 동반한 기도의 자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중요한 점은 비유자체의 이야기에 있다기보다는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격려에 있다. 그것은 오늘 복음이 기도에 대한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종말(8b절)을 대비한 유비무환의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비유의 내용처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언제나 기도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하는데 있어서 얼마만큼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하는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는 거만한 재판관의 비유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으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신 후에 성가실 정도로 끈질긴 친구의 청에 빵 세 개를 내어주는 비유(11,1-13)를 상기시킨다. 성가실 정도의 끈질긴 간청을 어제는 친구가 들어주고, 오늘은 거만한 재판관이 들어줄지언정 내일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b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쉽게도 예수께서는 종말을 기다리다 지쳐 이미 믿음을 포기한 사람들을 내다보시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간청하기를 수도 없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염치 불구하고 끝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11,9)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인내와 끈기를 동반한 기도뿐이다.
이미 지나간 복음에서 인자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표징들이 언급되었다.(17,20-37) 노아의 홍수(창세 6-7장) 때나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창세 19장)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그리고 ‘여기’라는 일상(日常) 안으로 종말이 들이닥칠 것이 분명하다. 일상 안으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종말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더욱이 그 날이 언제가 될지를 모르고 살아간다면 다리를 펴고 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잃지 말고, 언제나 기도하되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하라는 것이다. 사실 종말의 ‘그 날’이 언제일지 정확히 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만큼 불안하고 힘든 일이다. 알고 있다면 그 날을 향하여 한 걸음씩 다가서는 두려움과 각박함,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모르고 있다면 넉넉함과 막막함의 엇갈린 긴장으로 불안한 인생을, 그래서 지치고 쉽게 포기할 수도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그 날’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기뻐하고 감사하며 희망을 가지고 ‘오늘’ 기도하는 사람은 늘 기도하는 사람이다.(로마 12,12; 골로 4,2; 1데살 5,17) 우리들 가운데 고통을 받거나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오늘’ 기도해 주어야 한다. 올바른 사람의 기도는 ‘오늘’이 가기 전에 바로 효과가 있을 것이다.(야고 5,13.15-16) 성령의 도우심으로 ‘오늘’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의 터전 위에 스스로를 세우는 것이다.(유다 1,20) 그것은 하늘나라의 원로들이 향이 가득 담긴 금으로 된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리기 때문이다. 그 향은 곧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이다. 그 때 대천사가 금향로를 들고 와서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를 향에 섞어 향로에 넣고 황금제단에 태워 올린다. 그러자 대천사의 손으로부터 ‘오늘’ 우리가 바친 기도를 태운 향의 연기가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묵시 5,8; 8,3-4)
사랑을 얻어내는 거룩한 고집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신론자였던 듯합니다. 그가 원로들이 아닌 법정으로 가서 분쟁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유대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 재판관들은 뇌물이나 권력을 이용하지 않는 한 억울한 이들의 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악명 높은 사람들이었지요.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변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 과부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18,2), ‘불의한’(18,6)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해달라고 귀찮게 조릅니다.
이 과부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뇌물로 쓸만한 돈도 기댈만한 사람도 없었던 사회적 약자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억울함을 풀고 의로움을 얻고자 끈질기게 불의한 재판관에게 청한 것이지요. 하느님은 의로우시기에 의로움은 포장하거나 방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자체가 바로 가장 큰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지닌 힘과 재물에 기대어 대단한 존재인 양 착각을 하지만 하느님 앞에 먼지에 지나지 않지요! 우리 모두 자신을 재판관처럼 하느님도 사람도 무시하며 추하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어 늘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과부와 같은 처지에 있음을 명심해야겠지요.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가 귀찮아 할 정도로 ‘올바른 판결을 해달라고’ 계속 청하자 올바른 판결을 해주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18,5).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을 때 그 청을 지체 없이 들어주실 것입니다."(18,7-8)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란 제자들과 하느님을 성실하게 섬기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온갖 부정의 과녁이 되기 때문에 고통도 많이 겪게 되지만, 하느님께 정의로 갚아 주시기를 청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정의가 아니고서는 정의롭게 할 수 없으며, 사랑이 아니고서는 사랑을 줄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중요한 태도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8,1)는 것입니다. 여기서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한 것은 청한 것을 받을 때까지 그치지 말고 언제나 기도하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지요. 우리는 청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쉽게 포기하고 낙심하며 다른 세상적인 해결책을 찾아 나서곤 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들어 주신다”는 신뢰를 가지고 끈기있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정해진 시간 안에 성과를 내는 사업이 아니라 ‘인내하는 사랑’이요, ‘믿음 안에서의 버티기’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온전히 맡겨드리고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기도의 호흡 안에서 ‘끝까지’ 청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사랑의 기다림’인 셈입니다.
오늘도 과부처럼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굳게 믿고 모든 것을 내맡기며 끈질기게 기도하는 거룩한 고집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으로 기다리는 차 한잔의 여유를 가지는 넉넉한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 국민은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하였습니다. 미국 국민은 민주당과 공화당에게 국가의 권력을 맡기는 것 같습니다. 지난 8년 민주당은 미국이라는 배를 운항하였습니다. 이제 공화당은 새롭게 미국이라는 배의 선장이 되었습니다. 국민의 선택과 공정한 선거, 국민을 위한 정치가 있기에 선거는 한바탕 축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승리한 후보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고, 패배한 후보에게 위로를 전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한국은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새로운 정부와도 상호 협력할 수 있는 관계가 계속 유지되면 좋겠습니다.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지닌 대통령과 행정부가 국민의 질책을 받고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힘에 의해서 국정이 농단 되었고,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비리가 저질러졌고, 수많은 의혹들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부의 무능과 잘못을 밝혀낸 것은 검찰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인들도 아니었습니다. 의혹과 비리의 고리를 찾아서 밝혀냈던 언론과 방송이었습니다. 언론과 방송에서 밝혀내지 않았다면 아직도 국정 농단은 계속될 것이고,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을 것입니다.
양심과 정의에 입각해서 온몸으로 취재를 한 기자들이 있었습니다. 언론이 살아있다면 권력은 함부로 부정과 비리를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론이 살아있다면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불의한 국가 권력에 맞서서 정의를 이야기하는 국민들이 있었습니다. 사회의 목탁이 되는 언론이 있다면, 깨어있는 시민이 있다면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흔들리지 않고, 험한 파도를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릴 때, ‘숨은그림찾기’를 해 보았습니다. 어린이 신문에 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신문에는 옛날이야기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안에는 또 다른 물건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제가 찾았던 그림들은 ‘주걱, 신발, 곰방대, 복주머니’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어쩌다 숨겨진 숨은 그림을 찾으면 보물을 찾는 것처럼 기뻤습니다.
숨은 그림을 찾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다른 방향에서 보는 것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참된 지혜라는 그림을 찾기 어렵습니다. 사랑, 나눔, 봉사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아름답고,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보석이 많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경쟁과 승리를 위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퇴근길에 아내를 위해서 장미꽃을 사 가는 남편, 부모님의 생일을 기억하고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자녀들, 남편의 바지 주머니에 ‘여보! 사랑해 우리 가족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할게요. 오늘도 힘내세요!’라는 편지를 넣어 주는 아내는 각박한 세상에서도 하느님께서 숨겨두신 아름다운 그림들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정과 불의를 찾아내는 기자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진실을 찾아서 드러내려는 언론에게도 박수를 보냅니다. 깨어 있는 시민들에게도 박수를 보냅니다. 그들은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진리의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 -기도와 환대歡待-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루카복음은 기도의 복음입니다. 공관복음 중에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가장 많이 부각됩니다. 오늘 역시 복음의 비유에 앞서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과부는 말그대로 가난한 이의 상징입니다. 할 것은 기도뿐이 없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남편도 자녀도 의지할 가정도 친지도 없이 혼자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사람 하나하가 다 외롭고 가난한 이들입니다. 마침내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항구한 기도에 그 청을 들어줍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나를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과부의 불퇴전不退轉의 항구한 기도 자세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기도만이 답입니다. 주님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항구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정말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아 가면서 마침내 하느님의 뜻에 일치된 기도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 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 거리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불의한 재판관까지 청을 들어 주는데 하물며 하느님께서야 얼마나 잘 들어주시겠느냐는 예수님의 대비 논법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자세에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어찌보면 기도는 하느님과는 물론 나와의 평생 줄다리기 싸움 같기도 합니다. 하여 우리는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한마음, 한목소리로 미사와 시편 성무일도를 함께 바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내적성장도 성숙도 없습니다. 진정한 변화도 없습니다. 기도를 통한 내적 혁명입니다. 기도해야 변화變化의 발효醱酵 인생이지 기도하지 않으면 변질變質의 부패腐敗 인생이 됩니다.
제가 자주 강조하는 바, 발효인생인가 부패인생인가 하는 것입니다. 발효할 때는 ‘삶의 향기香氣’이지만 부패할 때는 ‘삶의 악취惡臭’입니다. 세월 흘러가면서 인생은 이 둘로 나눠집니다.
진보進步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保守는 부패로 망한다는데, 분열과 부패의 예방과 치유에 기도보다 더 좋은 효소酵素의 약도 없습니다. 효소를 넣으면 부패가 아니라 발효시켜 향기로운 술로 변하듯 바로 기도의 효소가 그러합니다. 예수님이 우려하는 것은 바로 부패인생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오늘의 우리 현실에 화두같이 주어지는 주님의 물음입니다. 과연 변절變節, 변신變身,변질變質된 부패인생이 아닌 향기로운 믿음의 발효인생은 얼마나 되겠는가 묻습니다. 요즘 만추晩秋의 단풍이 절정인데 과연 이런 아름다운 믿음의 가을 노년 인생일 수 있겠는가 묻는 것입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기도와 더불어 깊어지는 믿음이요 내외적 변화에 성장입니다. 믿음을 통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운명도 바뀝니다.
어제 읽은 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듯한 우리나라 역사에 통찰을 주는 글입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설령 과거가 똑같이 거듭되지는 않더라도 그 운율은 반복된다고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운율은 반복되는 소리의 길고 짧음이나 높고 낮음이 보이는 질서 있는 흐름이다.”
개인이나 나라의 역사를 봐도 비약이냐 도약은 없고 계속되는 반복같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조선시대 왕정제도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같고 정치권의 현실을 보면 반복되는 조선시대 당쟁의 재현같습니다.
예전 조선실록 20권을 대략 보면서도 이씨 조선 500년 동안 반복되는 악순환의 현실이 한권만 읽어도 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내적성장과 성숙에 이르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입니다. 기도와 환대는 함께 갑니다.
오늘 요한 3서 독서의 주제는 환대입니다. 환대의 모범이 가이오스입니다. 요한 사도는 가이오스의 환대에 감사하면서, 앞으로도 순회설교가들을 환대해 줄 것을 청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잘 전파될 수 있었던 것도 지역 교회의 환대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로 이교인들에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한 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진리의 협력자가 됩니다.”
참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순회 설교가들뿐 아니라 수도원을 찾는 형제자매들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환대로 잘 돌보아 줄 때 우리 역시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개방, 환대의 연대입니다. 바로 이런 환대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기도 역시 사랑이자 개방이고 연대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수도원은 기도의 집이자 환대의 집이고 수도자는 기도의 사람이자 환대의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기도를 통해 우리를 환대하시고, 우리 역시 주님과 이웃형제들을 환대하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언젠가 해외 토픽에 뜬 이런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독일 남자가 아내와 4살짜리 자녀를 데리고 자신의 자동차로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아내와 아이를 그곳에 두고 그냥 혼자서 출발한 것입니다. 마치 도망을 치는 사람처럼 미친 듯이 달렸다고 합니다. 과연 왜 그랬을까요?
아내와 대판 싸우고서 보복성으로 그랬던 것이 아닐까 하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아주 급하고 위험한 일이 생겨서 혼자 자동차를 타고 떠났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내와 아이는 항상 뒷자리에 있었으니까.... 있는 줄 알았죠.”
글쎄 무려 320Km를 달리고서야 아내와 아이가 뒷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고 합니다. 늘 뒷자리에 아내와 아이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확인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안일한 마음이 내 발목을 스스로 잡을 수도 있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안일한 마음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래서 내 가족에 대해 또 내 이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늘 나와 함께 할 것이라는 안일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데도 이러한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습니까? 물론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기는 합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의 모습으로 다가올 때에는 불평과 불만을 갖고 주님께 원망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지요.
당연하게 생각하는 안일한 마음에서 벗어나서 감사한 마음을 갖고 또 자신의 의지를 세워서 스스로 노력할 수 있는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비유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재판관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재판관이기에 올바른 판결을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그런 그에게 끝까지 매달립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겠지요.
“저 재판관은 원래 저러니까 그냥 포기하는 편이 훨씬 빠를 거야.”
당연한 모습과 행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매달렸고, 그 결과 자신이 원하는 올바른 판결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도 이런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냐고 되물으십니다. 즉,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마음을 벗어나는 노력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올바른 판결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마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오늘의 명언: 매일 반성하라. 만약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 반성해 보라(주희).
화가 날 때(고대승)
화가 나서 한 번 치받으려다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행복할까?’
아주 짧은 글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글이 내 마음 안에 깊은 여운으로 남습니다. 생각의 전환이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행복한 날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사랑과 정의를 이루시는 하느님
최민석 신부님
오늘 복음은 감히 하느님을 불의한 재판관에 빗대어 이야기합니다. 옳고 바른 것을 원하고 요구하고 청하면 들어주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정의’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아시고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사랑과 정의’를 이루는 과정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순탄하지 않은 길이지만 구원을 믿기에 당당하게 걷는 것입니다. 믿음은 승리의 결과를 앞당겨 사는 것이기에 힘이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알고자 하는 모든 것을 미쁘신 스승께 여쭈어 봅니다. 물론 그분은 제 질문에 모두 대답하지는 않으십니다. 해답 없는 물음만이 우리 사이에 남아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스승이신 그분께 하나하나 배우고 있습니다.
알아야 할 새로운 지식이 있다면 어떤 경로를 거쳐서든 읽어야 할 책이 들어옵니다. 깨달아야만 할 일이라면 때맞추어 적절하게 발생합니다. 작든 크든 모든 경험 속에 당신의 가르침을 담아주십니다. 귀를 기울이면 언제든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고 친절하게 일러주십니다.
그분은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스승 예수님이 앞장 서고 제자인 저는 따라갑니다. 제가 앞서고 스승에게 따라오라고 하는 것은 스승을 방해하는 길입니다. 생각해 보면 스승 예수님을 모신다면서도 말을 앞세우고 주제넘게 우쭐거려 주님의 길을 방해한 적이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스승 예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말과 행실이 어긋나는 자신에 대해 낙심하거나 실망하는 대신 다만 그분에게 길을 묻고 그 길을 따르면 그분은 어김없이 ‘사랑과 정의’를 이루어 주실 것임을 믿습니다.
<기도>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은 루카복음 18장 1절-8절,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어떤 고을에 불의한 재판관이 하나 있었는데, 그 재판관은 과부 한 사람이 와서 자기와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달라고 졸라도 들어주지 않다가 계속 찾아와서 조르자 결국 그 과부가 바라는 대로 판결을 내려 줍니다.
이 이야기를 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7-8)."
하느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는 올바른 재판관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하느님은 불의한 재판관처럼 미적거리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미적거리신다고 느낄 때가 많고, 또는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 주시는 것으로 느낄 때도 많습니다.
그렇게 느낄 때가 많다는 것이 신앙생활의 어려운 점입니다.
(물론 기도하자마자 바로 응답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여라." 라는 말과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라는 말은 겉으로만 보면 모순입니다.
지체 없이 판결이 내려진다면 끊임없이 기도할 필요가 없고 그냥 한 번만 기도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지체 없이(즉시) 판결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생각하면, "하느님은 미적거리시는 분이 아니다."는 "하느님이 미적거리신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도 사실은 미적거리시는 것이 아니다."입니다.
늦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고, 사실은 가장 적합한 때에 응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지체 없이' 라는 말은 '인간들이 바라는 때에 즉시' 라는 뜻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즉시' 라는 뜻입니다.
'올바른 판결'은 '인간들이 바라는 판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공정한 판결'입니다.
내 욕심대로 청하고, 내가 청하는 대로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신앙은 이기적인 기복신앙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善)이 되고 이익이 되는 것을 청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적합한 것인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에 자기에게만 이익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해가 되는 것을 청한다면, 그것을 기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올바른 지향으로 청한다고 해도 그 시기를 우리가 마음대로 정하면 안 됩니다.
'때'를 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요나서'가 좋은 예입니다.
요나는 니네베가 멸망을 당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화를 냈습니다(요나 4,1).
그때 하느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것은 당신의 뜻이 아니라고 요나를 타이르셨습니다(요나 4,11).
어떻게든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
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없다." 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믿음을 찾아볼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미적거리신다고 생각되어도 믿음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은 '기다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지 못하면 기다리지 못합니다.
믿는 사람만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또 처음에는 믿고 기다린다고 해도 시간이 흐를수록 믿음이 점점 더 약해질 수 있고, 결국 기다리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믿는다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일에는 무한정 기다릴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시험은 응시 자격에 나이 제한을 두어서 그 나이가 넘으면 시험 응시를 포기해야 합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지향 자체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또 원래 실력이 안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시험공부를 제대로 안 한 것일 수도 있고,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희망이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기도할 때에는 네 가지를 잊으면 안 됩니다.
'올바른 지향, 끊임없는 기도, 노력, 끈질긴 기다림'이 그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것을 청해야 하고, 끝까지, 즉 기도가 이루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고,자기 자신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하고, 끈질기게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 방법
염철호 요한 신부님
열심한 교우분들 가운데 종종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도대체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합니까?” 그럴 때마다 저는 농담 삼아 이런 대답을 하곤 합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세요.” 저도 종종 하느님께서 제 기도에 답해 주지 않으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저와 같은 이들에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간구하고 매달리라는 의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도 계속해서 청을 하고 매달리면 그 청을 들어주는데,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은 채 미적거리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낙담하지 말고 계속 청하고 간구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내용입니다. 다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지금 올바른 것을 청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내가 나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 나에게 해가 될 만한 무엇인가를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나는 모두를 위하여 유익이 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고 있는지 등등을 말입니다.
어제 낮에 식사를 하다가 당뇨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가족력에 의해 당뇨로 고생하고 있다는 신부님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이 이야기를 들은 한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부모님께서는 내게 엄청나게 건강한 육체를 물려주셨거든.”
이 말에 다른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도 원망할 것이 있을 것 같은데? 유전적으로 머리카락이 없잖아.”
그러자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아니야. 나를 보고 남이 불편할 뿐이지, 나는 전혀 불편하지 않아.”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남들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떤 이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행복해하는 반면에, 또 어떤 이는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워 보이는데도 불행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을 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내가 태어날 확률은 로또복권 당첨확률보다 훨씬 더 낮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나는 3억 개의 후보 정자 중에서 난자가 선택한 단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서 의기소침해서 다닌다면 선택받지 못해 버려진 정자는 어떨까요?
이렇게 운이 좋은 당첨자가 바로 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최선을 다해 살면서 행복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심지어 고통과 시련이 밀물처럼 밀려들어도 최선만 다한다면 어떻게든 이겨내고 행복도 나의 것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이 나오지요. 솔직히 좀 궁금한 사항이 많습니다.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또 이 재판관은 자기 임무를 왜 지키지 않는지 등등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궁금증을 답해 주지 않습니다. 궁금증의 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재판관에게 끊임없이 성가시게 졸라대는 바람에 과부의 청을 들어 주기로 했다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과부는 남성위주의 사회였던 당시에 가장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계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에 등장하는 과부는 어려운 난관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어려운 난관 속에서 굴하지 않고 극복하는 신앙생활의 집요한 노력이 가장 중요함을 이야기하시는 것이지요.
많은 이유를 들어 내가 불행한 이유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그러한 궁금증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만이 나를 진정한 행복의 길로 성큼성큼 다가서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요, 바로 너의 마음이다(혜능선사).
넘어져도 좋다(닉 부이치치, ‘닉 부이치치의 허그’ 중에서)
강연을 하다 보면 대부분 높은 연단이나 무대, 탁자 위로 올라가는데, 한번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윤을 낸답시고 왁스를 칠해 놓은 까닭이다. 결국 나는 강의를 포기하고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좀 일으켜 주시겠어요?”
휴스턴에서 열린 모금 행사에서도 곤혹스러운 장면이 다시 연출됐다.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나는 여느 때처럼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쓰러진 채로 계속 이야기를 했다.
“너나없이 가끔은 이렇게 쓰러지고 넘어집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한, 넘어짐은 실패가 아닙니다. 절대로 꿈을 잃지 마십시오.”
그런데 다시 일어설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기 직전에 강당 뒤편에서 한 여성이 종종걸음을 치며 달려 나왔다. “도와드릴게요.”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전 지금 중요한 포인트를 보여 주고 있는 겁니다.” 그제야 여인은 자리로 돌아갔다.
아마, 지켜보는 이들로서는 내가 몸을 일으키는 것만큼이나 그녀가 그만두기를 목매어 기다렸을 것이다. 내가 바닥에서 일어서는 과정 하나하나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청중들은 가슴이 뭉클해진다. 다들 나만큼이나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고난과 시련은 나뿐 아니라 온 인류가 겪는 인생사의 일부다.
낙심하지 마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복음을 보면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예수님께서 드신 비유가 적절한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과 끈질기게 청하는 것이 같은 것인가?
오늘 비유의 과부는 넌더리가 날 정도로 귀찮게 청하는 여잡니다.
그렇다면 과부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욕심을 채우고 남을 성가시게 해서라도 욕심을 이루는 탐욕스러운 여자입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과부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과부는 욕심을 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고 고아와 마찬가지로 힘이 없어서 권리를 챙기지도 못함은 물론 자기 것마저 빼앗기는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억울한 일이 많은 여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제 어렸을 적 일이 생생이 기억납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나이 먹은 남자가 없어서 농사짓는 시골에서 그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큰물이 난 여름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침 일찍부터 오셔가지고는 우리 때문에 당신 집 밭이 물에 잠겼다고 큰소릴 내는 것이었습니다.
옥신각신하다가 그 아주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서방 없는 한탄이나 하라고 저의 어머니께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힘이 없는 설움입니다.
그래서 힘이 없으면 싸움이 나도 지레 지고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비유의 과부는 욕심 많은 여자가 아니라 힘이 없어서 힘센 적대자와 싸움에서 으레 당하기만 하고 그래서 보통의 과부는 지레 지고 들어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오늘 비유의 포인트는 낙심하지 않는 끊임없음입니다.
악착스럽고 탐욕스런 끈질김이 아니라 가엾고 선량하지만 낙심하지 않는 끊임없음입니다.
요즘 정부가 하는 일을 보면 힘으로 밀어붙입니다.
특히 4대 강 개발을 보면 그렇게 반대를 하는데도 개발이 아니라 살리기를 한다면 밀어붙입니다.
이 정부는 한다면 끝까지 하고 어떻게 해서든 한다고, 그렇게 사람들이 믿게 하고 사람들을 낙심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힘으로 밀어붙일 때 힘없는 사람들은 보통 낙심합니다.
우리 같이 힘없는 사람은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힘을 믿고 함부로 하는 짓에 대해 우리 국민이 낙심을 하고 지레 지고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매주 금요일 저희 수도원에서 4대 강을 위한 미사가 있었는데 이때 미사에 오는 많은 사람들 중에도 이렇게 미사를 드린다고 될까 하는 회의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저희는 매일같이 4대 강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우리 형제들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형제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들 때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약자의 소리를 묵살해버리지만 하느님은 가엾은 이의 소리를 끝내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이런 하느님이심을 믿으라는 것이고 이런 하느님께 호소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인 복음전파
경규봉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상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유언)이며 명령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 말씀을 따라도 좋고 따르지 않아도 좋은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누구나 지키고 따라야 하는 말씀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면서, 때로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오늘날에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국땅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가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2디모 4,2)라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에 따라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우리가 직접 복음을 전하기 어렵다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영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도움으로써 복음전파의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 요한 3서에서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복음을 전하는 협력자가 되도록 격려한다.
초대 교회의 선교사들은 여러 곳을 여행하며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15,40-41; 로마 1,5). 이들은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에 충실하였다. 이들은 교회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야 마땅했지만(1고린 9,12-14; 필립 4,10-18), 지원을 받기 어려웠다(1고린 9,14-18; 2고린 12,16-18).
때문에 가이오처럼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가이오는 나그네와 같은 그들을 최선을 다해 환대하고 대접하며 도왔으며 여행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했다. 그러나 당시 이단자들에 대해 요한이 경고했기 때문에(2요한 1,10) 그로 인하여 가이오가 그들을 환대한 행위는 교회의 일부 사람들로부터 이단자들을 돕는 행위로 오해를 받아 냉대와 소외를 당하기도 했다.
요한은 선교사들로부터 가이오의 진심어린 사랑의 환대에 대해 듣고 그를 격려한다. 요한은 선교사들을 환대하고 지원하는 것이 그들의 복음전파에 동참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리의 협력자가 되는 것임을 말하며 가이오를 격려하는 편지를 보냈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히브 13,2)는 말씀처럼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소중한 덕목이다. 더욱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두루 다니는 이들을 대접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소중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들을 돕는 것은 곧 하느님의 일을 돕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많은 선교사들이 남미나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충실히 행하고 있다. 이들은 그 나라의 열악한 사정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오직 주님께 의지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많은 이들의 도움과 협조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기도와 희생을 통한 영적인 도움도 필요하고, 복음 전파를 위한 물질적인 도움도 필요하다.
오늘 우리도 복음전파를 명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자.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전하는 하느님의 사자가 되자. 나아가 해외에서 많은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을 위하여 영적, 물질적으로 협조함으로써 복음전파의 협력자가 되자.
어느 수도원에서 한 수사님이 사과나무 묘목을 심고서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여린 뿌리가 먹고 자랄 수 있는 비가 필요해요. 부드러운 소나기를 보내 주세요.”
그러자 주님은 부드러운 소나기를 보내 주셨습니다. 수사님은 또 기도했습니다.
“주님, 나무에겐 태양이 필요해요. 태양을 비춰 주세요. 주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자 방울진 구름 사이로 햇빛이 미끄러지듯 내리비쳤습니다.
“나의 주님, 이제는 서리를 내려 주세요. 세포를 지탱하려면 서리가 필요해요.”라고 수사님은 또 외쳤습니다. 그런데 어린 나무는 서리를 맞고 반짝이며 서 있다가, 저녁이 되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 수사님은 다른 선배 수사님의 방을 찾아가 그 이상한 경험을 말해 주었지요. 그러자 “나도 작은 나무를 심었었지. 그리고 이 나무는 아주 잘 자라고 있다네.”라고 말했습니다. 그 방법을 묻자,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나는 나무를 하느님께 맡겼어. 하느님은 이걸 창조하신 분이시니 나 같은 인간보다 필요를 더 잘 아시니까 말일세. 어떤 조건도 걸지 않았어. 방법도 수단도 정하지 않았지. 나는 ‘주님, 이 나무에게 필요한 것을 보내 주세요. 햇살이건, 바람이건, 비이건, 서리이건, 주님이 창조하셨으니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기도했다네.”
이글은 딜로우(Linda Dillow)의 '만족'(Calm my Anxious Heart, 좋은씨앗)이란 책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주시니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무조건 내 뜻대로 해달라는 기도가 아닌, 하느님께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의탁의 기도를 바쳐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만 바치는 기도가 아닌,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항구하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무엇일까? 말의 나열만 계속되는 긴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만이 자신이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복음에 나오는 끈질긴 과부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지요.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비유에 등장하는 불의한 재판관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정의로우시며, 특히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분께서는 분명히 올바른 판결을 내리십니다.
이런 판결을 전혀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약간의 기도를 통해서, 또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하느님을 쉽게 단정 짓고 판단해 버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아. 너무나도 불공평하신 하느님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매달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정의로우시며 사랑 넘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내게 꼭 필요한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3년의 공생활을 위해 자그마치 30년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일은 모두 ‘놀이’라는 태도를 가져야만 행복이 일어난다(오쇼 라즈니쉬).
한 남자와 과부(‘좋은 글’ 중에서)
한 남자가 젊은 과부집에 자주 드나들자,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며 그 남자를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과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은 그 남자가 암에 걸린 젊은 과부를 기도로 위로하고 돌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가장 혹독하게 비난했던 두 여인이 어느 날 그 남자를 찾아와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그들에게 닭털을 한봉지씩 나눠주며 들판에 가서 그것을 바람에 날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닭털을 날리고 돌아온 여인들에게 그 남자는 다시 그 닭털을 주워 오라고 하였습니다. 여인들은 바람에 날려가 버린 닭털을 무슨 수로 줍겠느냐며 울상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여인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나에게 용서를 구하니 용서해 주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담지 못합니다. 험담을 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인은 한 사람만 상하게 하지만 험담은 한꺼번에 세 사람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첫째는 험담을 하는 자신이요, 둘째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들이며, 셋째는 그 험담의 화제가 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남의 험담을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부족함만 드러내고 마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아닌, 용기와 힘을 북돋아 줄 수 있는 말을 하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를 갔을 때, 성지에 계신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가장 완벽한 기도가 무엇인지 물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성호경’이 가장 완벽한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늘 성호경을 정성껏 바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성호경을 떳떳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바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충실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성호경의 또 다른 표현을 말씀하셨습니다. 동방교회에서 바치는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성부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성자와 왼편의 것을 오른편으로 변화시키시는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단순히 성호경을 바칠 때와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자녀, 내 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그것들을 상실하면 화가 나고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잠시 소유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것들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는 가족, 이웃, 물건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으로 하느님의 뜻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와 같은 파격은 없습니다. 마음을 바꿀 수는 있어도 존재의 양식 자체를 바꾸는 것은 모든 것을 내어 준다는 결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분에게서는 ‘권위, 군림, 소유’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권위가 있으면서도 겸손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성령께서는 근심, 걱정, 불안, 초조를 용기, 희망, 인내, 여유로 바꿀 수 있는 분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우리들의 삶을 밀과 같이 바꾸실 수 있는 분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용감하게 거리로 나가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완고한 바오로 사도를 복음의 사도로 변화시켜 주신 분입니다. 늘 술을 가까이 하고, 욕을 자주하던 남편을 부드러운 남편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뜻 모를 불안과 초조는 소유하려는 욕심에서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런 우리들의 나약한 모습을 뜨거운 신앙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신자분들이 제게 부탁하는 것들은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자녀들의 혼배 주례를 부탁하기도 하고, 미사를 부탁하기도 하고, 축성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가끔 글을 부탁하기도 하고, 강의를 부탁하기도 하고, 면담을 부탁하기도 합니다. 별일이 없으면, 제가 할 수 있으면 그런 부탁을 들어 드리는 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간절히 청하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미안해서, 양심에 부끄러워서 하느님께 청을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번에 수험생들을 위한 미사와 안수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시험 때만 성당에 오는 것에 대해서 미안해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시험 때라도 성당에 와서 기도하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예쁘게 봐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사막과 낙원, -역설적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역설적 삶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수도원은 사막이자 오아시스임을, 더불어 인생 역시 사막이자 오아시스임을 깨닫습니다. 이미 토마스 머튼은 '사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사막은 낙원이 된다'는 깊은 진리를 설파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 아주 넓고 고요하며 평화로운 뉴튼수도원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은 그대로 세상 사막의 낙원이자 오아시스였으나, 잠시 지나면서 보니 수도원은 무미건조한 침묵과 고독의 사막이자 섬이었습니다. 새삼 세상의 유배자 같은 수도자들임을 깨닫습니다. 사막 안의 수도자들은 그대로 세상 사막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얼마 전 읽은 '한시로 읽은 다산(정약용)의 유배일기-한 밤중에 잠깨어-'란 책이 생각납니다.
오랜 동안의 사막 같은 유배기간동안 일상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결과인 한시들로 그대로 기도와 같이 느껴졌습니다.
수도원은 물론 세상 살이 어려움에, 때로 이런저런 걱정에 '한 밤중에 잠깨어' 생각하거나 기도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믿는 이들 모두 외로운 유배자들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왜 끝기도가 끝날 때 바치는 성모찬송가에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구절이 들어있나 평소에 의문을 품었었는데 비로소 깨닫는 느낌입니다.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나이다, 슬픔의 골짜기에서.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여,
불쌍한 우리,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
귀양살이 끝날 그때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를 뵙게 하소서-
이런 고해와 같은 인간 현실, 또한 진실입니다. 세상 사막의 유배자 같은 우리들입니다. 사막과 오아시스의 낙원, 우리 삶의 양면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입니다. 사막 같은 수도원에서 오아시스의 낙원시간은 바로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시간입니다. 개인은 물론 함께 바치는 하느님 사랑의 '순수한 열정'에서 샘솟는 끊임없는 기도가 사막을 오아시스의 낙원으로 바꿔 줍니다. 기도가 없으면 곧장 막막한 일상의 사막일 뿐이지만, 끊임없는 기도가 일상의 사막을 일상의 낙원 오아시스로 바꿉니다. 아, 이래서 살기위해, 사막에서 낙원을 살기위해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입니다. 호흡이 기도이듯이 살아있음이 기도입니다. 이런 사막과 낙원의 역설적 체험이 삶을 깊게 합니다.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합니다.
사실 이런 기도 자체가 낙원의 오아시스요 사막 같은 일상을, 사막 같은 우리 내면을 낙원의 오아시스로 바꿔줍니다. 하여 바로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들려줍니다. 어떤 형태든 기도는 집요하고 항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수도자들은 이런 청원 기도보다는 찬미와 감사 기도에 항구합니다. 사실 이런 기도가 건강한 기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주님의 결론 같은 말씀이 은혜롭고도 심오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방식이 아닌 당신 방식으로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며, 찬미와 감사의 기도에 항구한 이들에게는 사막 같은 삶을 낙원의 오아시스 삶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과연 당신이 오실 때 기도에 항구함으로 믿음을 보여주는 이들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말씀 하시며 우리의 분발을 촉구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사막 같은 광야에서 하느님을 찾아 나선, 1독서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길을 나선' 사람들입니다. 서로 모두가 주님 안에서 형제이자 도반이요, 요한은 이를 '진리의 협력자'로 일컫습니다. 참 아름다운 말마디, '진리의 협력자'입니다. 기도에 항구하며 진리의 협력자로 겸손하고 충실히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낙원의 오아시스 삶을 선사하실 것입니다.
바로 매일의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시편112,1ㄴㄷ).
아멘.
믿고 바라고 사랑하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고, 믿고 사랑하자!”하고 말합니다. 기도를 할 때는 무엇보다 믿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또한 믿는 바는 반드시 이루어 주시니 미리 감사해야 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입었으니 그분께서 바라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그분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나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신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가 필요한 때 입니다.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이지 말고 기도하십시오.“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고 그리하여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실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기도의 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이 기도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예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 카18,1)는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재판관이 한과부의 끈질긴 청을 못 이겨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자신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 두고 싶을 때에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다가 “얼마나 더” 청해야 하는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야 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끈기 있는 기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끈기 있는 기도가 ‘꼭 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되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한 두 번이 아니라 천번 만번 거절을 당해도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열릴 때까지 두드리지 않으니까 문이 안 열리는 것입니다. 문 안에는 반드시 그 문을 열어줄 하느님의 손이 있습니다. 모든 기도는, 그냥 한번 건성으로 해보는 기도가 아니라면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조금도 의심을 품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의심을 품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흔들리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예 주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일편단심으로 하느님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시편에도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라고 적고 있습니다. 부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청하면 그 청을 반드시 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떼를 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한없는 사랑의 기다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신론자였으며 아마 유대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분쟁이 생기면 원로들에게 가서 해결했지 법정으로 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따르면 법정은 원고 측에서 내세운 사람, 피고 측이 세운 사람, 별도로 선임된 사람 등 셋으로 구성 되었다. 별도로 선임된 재판관은 로마 정부나 헤로데 왕이 유급으로 임명한 치안판사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당시 재판관들은 뇌물이나 권력을 이용하지 않는 한 억울한 이들의 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악명 높은 사람들이었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변호해야 했다.
그런데 한 과부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18,2), ‘불의한’(18,6)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해달라고 귀찮게 졸랐다. 이를 귀찮게 여긴 재판관의 태도를 보면, 이 과부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뇌물로 쓸만한 돈도 기댈만한 사람도 없었던 사회적 약자였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녀는 억울함을 풀고 의로움을 얻고자 끈질기게 불의한 재판관에게 청했던 것이다. 의로움은 다른 포장이나 무장이 필요 없으며 그 자체가 바로 가장 큰 힘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정의이시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자신을 겸허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자신이 지닌 힘과 재물에 기대어 대단한 존재인 양 착각을 하지만 하느님 앞에 먼지에 불과한 미물이요 과부와 같은 존재이지 않은가! 우리 모두 자신을 재판관처럼 하느님도 사람도 무시하며 추하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고 힘없어 늘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과부와 같은 처지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가 귀찮아 할 정도로 ‘올바른 판결을 해달라고’ 계속 청하자 올바른 판결을 해주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18,5).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도 귀찮게 조르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준다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을 때 그 청을 지체 없이 들어 주신다(18,7-8)고 가르치신다.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란 제자들과 하느님을 성실하게 섬기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온갖 부정의 과녁이 되기 때문에 고통도 많이 겪게 된다. 그러므로 정의로 갚아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고 의지해야 한다. 정의가 아니고서는 정의롭게 할 수 없으며, 사랑이 아니고서는 사랑을 줄 수 없기에, 정의이시고 사랑이신 그분께 달려가 청하지 않을 수 없음을 새겨야 하리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중요한 태도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8,1)는 것이다. 여기서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한 것은 언제나 중단 없이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다. 청한 것을 받을 때까지 그치지 말고 언제나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청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기도를 들어 주시기 않을 때 쉽게 포기하고 낙심하며 다른 세상적인 해결책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기도할 때 언제나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들어 주신다”는 신뢰를 가져야 한다. 기도는 ‘인내하는 사랑’이요, ‘믿음 안에서의 버티기’이다. 기도는 시간표를 세우고 기획안을 제출하여 정해진 기일에 답을 받아내는 사업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온전히 맡겨 드리고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기도의 호흡 안에서 ‘끝까지’ 청을 드려야 한다. 어쩌면 기도는 답이 없는 ‘사랑의 기다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부’와 같은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며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굳게 믿고 끝까지 기도하도록 하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바탕 위에서 모든 것을 맡겨드리며, 사랑으로 기다리는 ‘거룩한 여유’를 찾아보도록 하자!
왜? 하느님 외에는 답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기도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어제부터 오늘까지 대구 시내 본당에서 오신 할머니들이 수도원에서 작은 그룹 피정을 하고 있네요. 수도원 기도 때마다 열심히 정성껏 참석하십니다. 그런데 피정을 지도하고 있는 신부님이 미사 신자들의 기도 때 할머니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단체 이름을 듣고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름아닌 ‘소화 데레사회’. 소화 데레사 성녀는 젊은 나이로 귀천하신 분이신데 어르신들 단체 이름과 안어울리면서도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잡한 수도원 기도를 따라하기 위해 기도서를 이러저리 넘기는 모습을 볼 때 참 귀여움이 더 했습니다. 몸은 세월의 나이테를 두르셨지만 그 마음만은 소화 데레사 성녀처럼 간절히 주님께 향하고 계십니다.
주 님은 애절하고 끈기있게 청을 하는 과부의 비유를 통해 중단없는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간절한 기도는 하늘도 감동시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깊은 믿음이 기도를 계속하게 합니다. 가난한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은 부유한 은총으로 반드시 보답하십니다. 믿으십시오, 신뢰하십시오, 희망하십시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소중한 목숨은 소금기둥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가는 의미있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지녔기에 우리가 지닌 많은 것들로 서로를 죽여 가고 있는 아프고 슬픈 현실이 되었습니다.
결코 잡을 수 없는 것을 끝까지 잡으려 애쓰는 롯의 아내같은 우리들입니다.
욕망은 결코 나이를 먹지 않는 치명적인 유혹의 산실인 소돔과 고모라로 반복될 뿐입니다.
생명의 길을 욕심으로 채우는 불행한 우리들에게 종말은 새로운 변화의 시간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자신을 끝내 저버리고 파멸로 몰고가는 주체는 위험수위를 너무나 자주 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자신들입니다.
또다시 우리 삶의 자리에서 불행을 반복하며 사는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말씀하십니다.
행복한 사람은 없고 집착의 결정체인 소금기둥만 즐비한 우리들 모습을 반성해보는 한 해의 마무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 옆에 있는 가족을 바라보십시오.
롯의 아내또한 두고온 재물이 아니라 가족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하느님께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주님을 향해 가는 기쁨과 희망의 길임을 기억하는 위령성월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모든 것의 끝은 모든 것의 새로운 출발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