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들의 여행법 1
장석주
우리는 멀리서 온다.
멀리서 오기 때문에 우울하지 않고
다만 거칠고 성마른 상태일 뿐이다.
멀리서 오기 때문에
우리 트렁크에는 비밀과 망각들이 없다.
우리는 당신들이 흔히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그런 부류다.
우리는 멀리서 온다.
그것은 과거로의 이동,
순결한 타락이다.
우리가 멀리서 온 것은 죽은 고기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별이 밤하늘을 선택하지 않았듯
우리가 이 죽음의 도시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불꽃이 석탄에서 오고
벌레들이 축축한 낙엽 밑에서 기어 나오고
우리 야만인들은 검푸른 숲에서 온다.
먼 검푸른 숲에서 와서 잠시 머물고
더 먼 곳으로 떠날 것이다.
천 년 된 자두나무들이여, 가지에 열린
저 망각의 풍요한 열매들을
바람이 불 때 모조리 땅으로 떨궈라.
대지에 대한 너희의 순정을,
중력의 법칙에 숨긴 저 무서운 정치들을 증언하라.
우리는 멀리서 온다.
더는 떠나지 않기 위해서 온다.
먼 곳은 없다.
—《시사사》2012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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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 1955년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햇빛사냥』『완전주의자의 꿈』『그리운 나라』『어둠에 바친다』『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어떤 길에 관한 기억』『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붉디붉은 호랑이』『절벽』『몽해항로』『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