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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이 부름을 받다
삼상 3:1-9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는지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6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8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이르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삼상 3:1-9 / [사무엘을 세 번 부르심] 어린 사무엘은 엘리를 도와가며 제사장의 일을 정성껏 수행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여호와께서 어떤 사람에게 직접 말씀을 하시거나 꿈에 나타나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 2) 더구나 엘리는 늙은데다가 눈까지 어두워져서 거의 앞을 보지 못하고 지냈다. 어느날 밤에도 엘리는 늘하던 대로 자기의 침실에서 자고 있었고, 3) 사무엘은 성소에 있는 법궤 옆에다 자리를 정하고 누워 잤다. 그런데 성소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은 새벽녘이었다. 4) 이때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어린 사무엘은 `예!' 하고 대답하면서 5) 즉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엘리에게 가서 `저를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엘리는 `아니다!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다시 돌아가서 자거라!'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사무엘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6) 그때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아!' 하고 다시 부르셨다. 사무엘이 또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저를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엘리는 이번에도 `아니다!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가서 자거라!'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7) 사무엘은 그것이 주님의 음성인 줄을 미처 몰랐다. 그는 주님의 음성을 이제까지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8) 여호와께서 세번째로 사무엘을 부르셨다. 사무엘은 이번에도 일어나 엘리에게로 가서 `저를 부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엘리는 그제야 사무엘을 부르는 분이 여호와이신 줄을 깨닫고 9) 사무엘에게 이와 같이 일러주었다. `너는 다시 가서 누워 있거라! 그러다가 또 너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여라.' 그래서 사무엘은 자리로 돌아가 다시 누웠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엘리 시대의 이스라엘을 개혁하기 위해 어린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말씀이 희귀하여(1) 여호수아로부터 사무엘 시대 중간에 세 명의 선지자가 활동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었으며(삿 4:4; 6:8; 삼상 2:27-36), 계시는 다섯 번 기록되었습니다(삿 2:1-3; 6:11-23; 7:2-11; 10:11-14; 13:3-21). 그러나 엘리 대제사장 시대에는 말씀이 희귀하였고, 이상(꿈 또는 계시)이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엘리 가문에게 말씀하지 않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이 성소에서 저지른 범죄는 하나님의 긍휼의 한도를 넘어설 만큼 악하였습니다(삼상 2:12-17, 22). 하나님은 엘리 가문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고,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면 하나님의 징계가 가까워집니다(사 59:1-2).
사무엘을 부르심(2-4)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갔다”는 표현은 엘리 가문의 영적인 어둠의 상태를 회화적으로 보여주며, 아울러 엘리 가문의 마지막을 예고합니다. 엘리의 어두운 눈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등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습니다(출 27:21). 이는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불순종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반드시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약궤가 아니라 그 위에 임재하여 계신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언약궤 가까운 곳에 누워있던 순수한 영혼의 이름을 부르심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십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5-9) 어린 나이의 사무엘은 아직 여호와의 존재를 몰랐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마치 전령처럼 빨리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사무엘의 달려가는 행위는 그의 충성심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엘리는 대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의 임재에 민감하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이 두 번이나 달려갔지만 엘리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심을 눈치 채지 못했고, 세 번째에 가서야 눈치 챘습니다. 성직자의 영광은 높은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영성에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반복적으로 부르시는데 본문에는 ‘부르다’는 단어가 총 11회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는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을 대대적으로 개혁하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한 것입니다.
적 용 : 현재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나이가 들면 이 세상을 마감할 때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대부분이 많건 적건 남겨진 재산을 우선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신앙의 유산을 남겨야 함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를 실감하지를 못합니다. 믿는 부모가 그 어떤 재산보다도 소중한 신앙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못한다면 삶의 실패요 불행임을 엘리 제사장의 모습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의 가정이 영적 중심의 삶이 되지못할 때 실패가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녀들과 함께하는 신앙생활이 시급한 때임을 깨닫게 합니다.
호크마 주석
=====3:1
아이 사무엘 - 여기서 '아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 )는 넓은 의미로는 유아(infancy)의 나이로부터 청년기(adolescence)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나, 대체적으로는 '소년(boy)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이때의 사무엘의 나이를 12세로 보았다(Antiquities, V.10, p4). 한편 히브리 사회에서는 12세부터를 성전으로 간주했으므로(눅 2:42), 하나님께서는 그 통념을 인정하셔서 그때 사무엘로 하여금 본격적으로 당신의 일을 시작토록 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 - '엘라 앞에서'는 '엘리의 감독을 받으면서'란 뜻이다. 그리고 '섬긴다'(* , 솨라트)란 말은 구약 성경에서 성전 봉사 활동을 언급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출 28:35, 43 ; 29:;30 ; 민 16:9 ; 신 10:8 ; 대상 15:2 ; 대하 8:14). 따라서 이 말은 결국 사무엘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희생 제사의 직무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여호와의 말씀 -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던 신적 계시 (神的 啓示, divine revelation)을 일컫는 일반적 명칭이다(사 38:4 ; 렘 1:2, 4 ; 6:10). 희귀하여...보이지 않았더라 - 이 표현은 그 시대의 타락하고 부패한 영적 상황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즉 계시의 희귀는 성경 전반의 가르침에서 볼 때, 백성들의 영적. 도덕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종이었다(암 8:12). 한편 여기서 '보이지'(* , 니프라츠)란 말은 '크게(널리) 퍼지다'(* , 파라츠)란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곳곳에 충만히 퍼지다'의 뜻이다(Driver, 잠 3:10). 따라서 '보이지 않았더라,는 말의 의미는 (1)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지 않았고(시 74:9), (2)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에 지극히 무관심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마 7:6). 이상 - (* , 하존). 또는 '환상'(사 29:7)으로도 번역되는 이 말은 정상적인 시각(視覺)이 아닌 꿈과 황홀경 등의 특수한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전달되는 묵시(默示, revelation)를 가리킨다(Lower). 그러나 이것은 아예 오감(五感)이 완전히 마비되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절대로 아니다. 이것은 자아 의식은 분명한 가운데 다만 초자연적으로 임하는 신적 계시의 전달 방법 중 하나이다.
=====3: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 이와같은 사실은 나이 100세를 바라보는 엘리의 고령(4:15)을 감안할 때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본절의 표현은 단순히 엘리의 육체적 노쇠 뿐만 아니라, 그와 비례하여 점점 약해져가는 엘리 제사장의 영적 무감각을 암시해준다. 그러므로 본절은 또한 엘리 제사장이 왜 4-9절의 내용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자기처소에 누웠고 - 대제사장 엘리의 '처소'는 분명치는 않으나 사무엘이 잠자던 곳과는 다소 떨어진 곳 곧, 성막의 입구쪽 별관 정도였을 것이다(Klein). 당시 성막은 실로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의 원활한 수행을 위한 제반 부대(附帶) 시설들 - 예를 들면 당직 제사장들의 처소, 사무엘처럼 성소에 헌신한 자들 및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처등 - 이 성막 주변에 세워지고 준비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R. Payne Smith).
=====3:3
하나님의 등불 - 이것은 매일 저녁마다 성소(the Holy Place)의 안을 밝히기 위하여 켜지는 일곱 가지로 된 등잔의 등불이다(출 27:21). 이 등불은 저녁에 점등되어 등의 기름이 완전히 떨어지는 새벽까지 계속 켜져 있었다(출 30:8 ; 레 24:2). 출 27:20, 21 주석 참조.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 그러므로 이 말은 때가 아직 완연한 새벽기 되지 않았음을 암시해주는 말이다(Keil). 사무엘은...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 이말은 사무엘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봉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성막(taberna-cle)안에 머물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여기서는 '여호와의 전'(* , 헤칼 예호와)은 법궤 또는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the Ho;y of Holies)나 분향단이 있는 성소(the Holy Place)를 의미하지 않고, 단순히 건물로서의 성막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시 11:4). 바로 이러한 읨에서 맛소라(Masoretic Text)는 1:9에 이어 여기서도 성막을 '궁전' 또는 '궁궐'이란 뜻의 '헤칼'(* )로 취한 듯하다(Keil Delitzsch, Vol. -ii, p. 49). 하나님의 궤 있는...전 안에 누웠더니 - 이것은 사무엘이 지성소(支聖所, the Holies)안에서 잠을 잤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언약궤가 지성소 안에 안치된 것은 사실이지만(출 26:33), 그 언약궤는 넓게 생각하면 또한 '전'(殿, * ,헤칼)안에 안치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지성서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차례씩 들어갈 수 있는 여호와의 전 뜰 주변에 제사장, 레위인, 헌신자들을 위해 지어놓은 거처에서 잠을 잔 것이다(Keli, Fay). 한편 여기서 저자가 본절에 '하나님의 궤' 라는 말은 본절에 특별히 삽입하여 기록함으로써, 그 다음 절에서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3: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 사사 시대 말기의 타락상으로 인해 여화와의 말씀이 휘귀하던 때에, 마침내 여호와의 계시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본절은 나실인으로서 레위 지파의 헌신자에 불과했던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소명받는 순간이요' 또한 이스라엘 역사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는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총과 은혜의 순간이라 할 수 있다.
=====3: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 밤중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사무엘은 엘리가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부르는 줄로 착각하고 즉시 일어나 엘리의 눈이 어두워서거의 보지 못했다는 2절의 언급으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이는 당시사무엘이 대제사장 엘리의 인정을 받고, 그의 개인 시종의 역할도 감당했다는 사실을암시해 준다.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 이때 엘리는 사무엘이 깊은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헛 것을 들은 줄로 생각해버린 듯하다.
=====3:6
내 아들아 - (* , 베니). 본래 이 말은 나이나 신분상의 차이가 현격할 때,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다정하게 부르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어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러한 의미에 덧붙여 난처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의 난감한 심정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한편 이같은 표현은 특히 본서에 많이 나온다(16절 ; 2:24 ; 4:16 ; 24:16 ; 26:17).
=====3:7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 본절은 사무엘이 세 차례에 걸친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이 있었음에도, 하나님께 제대로 응답치 못했던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즉 그 이유는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알지 못했다'란 말의 의미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와 전이격적인 개인적 교제가 아직 없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알다'(* , 야다)란 말은 단순한 지식적 깨달음 뿐만 아니라, 남녀가 동침하듯(창 4:1)체험적으로 아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 '알지 못하고'는 사무엘이 율법을 배움으로써 여호와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으나,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만남은 아직 없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그처럼 사무엘이 그때까지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를 경험하지 못한 탓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식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3:8,9
엘리가...깨닫고 - 당시 엘리 제사장은 영육이 노쇠했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계시도 희귀(稀貴)한 상황 탓으로 처음 두 번은 사무엘의 행동을 단순히 착각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세번째 사무엘의 행동을 보고,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그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줄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무튼 사무엘을 세번씩이나 부르신 이가 여호와인 줄 늦게나마 깨달은 엘리 제사장은 이제 동일한 부르심이 있을 때 해야 할 일을 사무엘에게 가르쳐 주었다. 말씀하옵소서...듣겠나이다 - 이것은 말씀하시는 분께 대한 존경과 겸손,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태도이다(Klein).
< 설 교 >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삼상 3:1-10 / 홍문수목사
여러분,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비행기가 공중을 날고 있는데 교신이 끊겼습니다. 치명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도 알고 있는 대로 항공기 사고의 상당부분이 교신이 잘못된 경우입니다. 관제탑으로부터 정확한 정보와 지시를 받을 때 안전 운항과 착륙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교신이 끊어지는 것은 정말 치명적입니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망망한 하늘에서 얼마나 당황스럽고, 얼마나 위험할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이 꼭 이와 같지 않나 생각됩니다. 인생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가 ‘불확실성’ 혹은 ‘불가예측성’ 아닙니까? 내 인생이라고 큰 소리를 치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갈팡질팡 할 때가 허다합니다. 중요한 순간일수록 그렇습니다. 어떻게 결정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과 해야 되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있나, ...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지금 해야 되나 나중에 해야 되나, 어떤 업종을 택해야 되나, 누구하고 손잡고 하나, ... 대학에 진학을 해야 되는데 어느 대학에 가야 되나, 전공은 뭐로 해야 되나, ... 정말 고민이 됩니다. 그렇다고 침을 튀겨 볼 수도 없고 ... 그러다가 답답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남 하는 대로 따라 합니다. 너무 너무 답답하면 심한 경우 점쟁이한테 찾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날 같은 문명사회에 무슨 소리냐 할지 모르지만 인간이 별 수 없습니다. 합리적이라는 서양 사람들도 문명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점술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역설적이죠.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영적으로 무지하고 나약한 게 인간인 것입니다.
이럴 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인생길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면 얼마나 평안히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확실히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비유컨대 ‘하나님으로부터 교신이 끊어진 존재’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한, 교제가 가능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단절된 것입니다.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 ”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시지만 인간이 듣지 못합니다. 영적인 귀머거리가 되었고, 교신이 끊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결국 공중에서 교신이 끊긴 비행기처럼 허둥대다 추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됩니다. 하나님과 의 교신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얻는 축복이 바로 이겁니다. 장차 우리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큰 축복이지만, 이 세상 살 동안 하나님의 인도를 받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무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사무엘처럼 하나님과 교제하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디 그렇게 하심으로 승리하는 복된 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1. 사무엘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하나님
본문 보면 사무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 12세 쯤 됐을 겁니다. 엘리 제사장 밑에서 성막의 일을 수종들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한밤에 성막의 숙소에 누워있는데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입니다.(3절 참조) 그는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줄 알고 얼른 달려갑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세번째는 엘리 제사장이 과거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안내를 해 줍니다. 8절(하)~9절. “ ...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그후 어떻게 됩니까? 네 번째 ... 이번에는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 ” 즉, 하나님께서 가시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사람은 다 죄인이므로 하나님이 직접 볼 수 없으니까 아마 천사를 보내심으로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무엘은 비로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고, 또 하나님과 말씀으로 교제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 사무엘의 생애는 승승장구하는 승리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놀라운 모습입니다. 일개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 대화를 나눈다는 것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인간끼리도 유명 인사, 유력 인사를 만나면 대단한 영광으로 아는 법인데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나 대화할 수 있다면 세상에 무엇이 어렵고, 무엇이 힘들고, 무엇이 두렵겠는가?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얼마나 든든합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니 얼마나 확실합니까?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하는 복된 인생이 됩니다. 아마 누구라도 이렇게 살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나도 그럴 수 있냐? 하는 겁니다. 성경에만 나오는 옛날 이야기 아니냐? 또 위대한 인물들, 특별한 인물들이나 그러는 게 아니냐? 이런 의문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나 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나타나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당시의 사무엘은 아직 대단한 위인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에 불과합니다. 그에게도 나타났다면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여전히 나를 만나주실 수 있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경에 기록된 방법과 오늘날의 방법의 차이를 구분하면 충분히 하나님을 만나 교제하면 대화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승리하는 인생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방법
계시의 과정으로 보아 대략 두 시대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성경 시대와 오늘날입니다.
① 성경 시대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법 : 성경 시대는 구약 시대와 신약 성경 기록이 완성되기 전 (A.D. 1세기 경)까지를 가리킵니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말씀(계시)하시는 방법이 다양했습니다.(히1:1 참조) 본문에서처럼 청각적인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천사를 보내서 말씀하시고, 혹은 꿈으로, 환상으로, ... 다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장 보면, 처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 잉태를 예고해 줍니다. 창세기 28장 보면,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다가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잡니다. 그때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로 서 있는데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에스겔 37장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마른 뼈의 환상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른 뼈가 살아 있는 군대가 되는 환상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예언합니다.
② 오늘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 :
A. 성경 :
성경 시대에 하나님이 음성, 꿈, 환상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신 것을 받은 사람들이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의 책임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기록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조금의 오류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반영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간섭하셨습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기록되어서 완성된 것이 구약 39권, 신약 27권 도합 66권입니다. 이렇게 완성된 성경을 가리켜 흔히 정경(正經)이라 부릅니다. 표준 성경이란 뜻입니다. 영어로는 캐논(Canon)이라 부르는데, 캐논은 본래 ‘갈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옛날에는 갈대를 자(ruler)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캐논은 표준, 규범 등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신구약 66권의 성경에 고스란히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당면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문제, 인생의 각종 문제들 ...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성경만 잘 읽어 보면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매개체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죠. 성경이 대체적인 원리야 제시해 주지만, 구체적으로 꼭 찍어서 말씀하고 있지는 않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결혼 문제의 경우 믿는 자와 하라는 원리는 나오지만, 구체적으로 아무개 하고 결혼하라는 말씀은 나와 있지 않다는 겁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하나님이 직접 보여주고 소리로 드려주시면 더 좋을텐데 ...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준다는 것은 기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어느 책을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어디를 봐야 되나 생각하다 성경책 가운데를 펼쳤습니다. 그랬더니 “가룟 유다가 ...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하는 구절이 나오더랍니다. 이게 뭐지? 하면서 다른 데를 펼쳤더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10:37)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펼쳤더니 이번에는 “ ...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 ”(요13:27)는 구절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이렇게 기계적으로 성경을 사용하면 곤란합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것이 개개인의 구체적인 상황을 지적해서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할 때 영감을 불어넣으신 성령님이 여전히 오늘날 순간 순간 역사하십니다. 조명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해 주시고 ...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우리 마음에 구체적인 뜻을 깨우쳐 줍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을 나를 위한 말씀으로 바꾸어 깨닫게 해줍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 성경 공부를 할 때, 설교나 강의를 들을 때 등 언제라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어느 때든지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음성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갖고 대해야 합니다.
■ 어느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토요일 저녁 내외분이 함께 어떤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주일 에배 때 목사의 설교 중에 그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남편은 혹시 아내가 쓸데없이 그런 이야기 교회 가서 했나 오해를 했습니다. 아니라고 해도 ... 그 다음 토요일과 주일 희한하게도 동일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다그쳐 물었답니다. 하지만 오해죠. 만일 목사가 그 문제에 대해 들었다면 오히려 그런 설교 못했겠죠. 시험 받을 게 뻔한데 말입니다. 이런 경우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분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깨닫게 하시려는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중요한 게 ‘묵상’입니다. 특별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조용한 분위기 가운데 정규적으로 경건의 시간(Quiet Time)을 갖는 게 유익합니다. 기록된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 지금 나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마음의 귀’로 듣는 것입니다. 폴 트루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가 경건의 시간을 꾸준히 가질 때 침묵 가운데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곧 하나님의 음성이다.”
B. 기도 :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처럼 기도할 때에도 우리 마음 하나님이 주시는 깨달음이나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음성이요 생생한 말씀입니다. 이때도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겁니다. 흔히 기도 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요청하고 부르짖는 것, 즉 ‘말하는 기도’만 생각합니다. 물론 맞죠. 그러나 그것은 기도의 반쪽에 불과합니다. 기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요청하고 아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듣는 기도’라고 부릅니다. 이때 질문식 기도가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며 좋을까요? 이런 경우 예수님이라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요? 마음을 비우고 이렇게 여쭈어보면 고요한 중에 마음에 깨달음과 확신을 주십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물론 육신의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의 귀로 듣는 음성입니다.
■ 아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모나미 볼펜 사장님이 부도 위기에 처하게 됐답니다. 울면서 기도하는데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하나님이 책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너 사업한답시고 주일 잘 지켰냐? 십일조는 제대로 했냐? 성경은 얼마나 읽었냐?” 정곡을 찌를 음성이었습니다. 한번만 살려 주시면 잘 하겠다고 고백하고 성경을 읽는데 요한복음 21장이 눈에 띄더랍니다. 거기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명한 후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그때 물고기 수가 153입니다. 거기서 힌트를 얻어 모나미 153 볼펜을 만든 겁니다. 한국 국민들, 더 나아가 세계인 전체가 1자루 이상 사도록 50억개를 생산할 것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50억개 목표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기도 가운데 확실한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과 기도가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 방법(main method)입니다. 그 가운데 성령이 역사함으로 우리가 그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C. 기타 방법 : 물론 이외에도 다른 사람들 통해서, 즉 상담이나 권면 등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조심해야 합니다.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인도받는 사람이어야지 아무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환경이나 사건 등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난을 당할 때 큰 깨달음이 오면 그게 곧 하나님의 음성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시대에 말씀하시던 방법(꿈, 환상, 천사 등)도 가능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시대에 제한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꿈의 경우만 생각해 봐도 ... 꿈이라는 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마음 속에 잠재된 생각이나 감정이 표출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혹은 개꿈일 수도 있고, 심한 경우 마귀가 시험하려고 주는 꿈도 있습니다. 결국 이런 경우들은 성경의 정신과 일치하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이 한번은 돼지꿈을 꾸었답니다. 좋아라고 돈을 다 털어 증권을 왕창 샀답니다. 그후 왕창 망했죠. 1992년도인가 이장림의 다미선교회가 예수님 재림 일자와 시간을 예언한다고 난리였습니다. 그때 무엇을 보았니 들었니 하면서 미혹할 때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성경과 불일치하는 내용을 보고 가짜임을알아야 하는데 많은 교역자와 평신도들이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의 손녀 댁 이야기입니다. 밤에 내외가 자는데 어린 딸이 흔들어 깨우더랍니다. “아빠, 하나님이 아빠 깨우래.” 밖으로 나가봤더니 그 아파트에 불이 났습니다. 부리나케 대피해서 위험을 모면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체험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 방법은 성령을 통해 성경 말씀과 기도를 사용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이런 방법들은 보조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경 말씀 묵상 훈련이 되지 않아서, 기도 훈련이 되질 않아서 자급자족이 안 되니까 엉뚱하게 이런 보조 수단에 목숨을 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겁니다. 꿈이나 환상을 볼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성경의 원리와 일치하나 확인해 봐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어렵고 힘든 세상! 방황할 수밖에 없는 우리!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잘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무엘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자세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이 순종함으로 항상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말씀하옵소서, 듣겠나이다!
삼상 3:8-9 / 박신진목사
어느 해인가, 중학생 때였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한때 유명 부흥강사였던 고용봉 목사님이 안동제일교회에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말씀을 경청하는데,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며 늦은 밤까지 집회를 하였다. 강사님 본인 간증을 하실 때, 6.25때 다쳐서 상이군인이 된 이야기를 실제적으로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겨냈음을 실감나게 말해서 많은 교우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 병 고친 사람도 있었고 입신한 사람도 있었다. 신기해서 드나들며 유심히 보았던 것이 내가 기억하는 제일 오래된 부흥회이다.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겨울방학 때 충청도 홍성 집에 내려가 있는 동안 백문현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할 때도 참 인상이 깊었는데, 얼마나 찬송들을 잘 부르는지 박수가 “짝짝짝!” 맞으면서 어깨를 들썩이며 신나게 찬송 불렀다. 강사님이 이 교회 교인들은 정말 은혜가 충만하다면서 칭찬을 하였고 둘째 날 저녁부터인가 강사님 설교 끝나고 은사 시간을 가졌다. 온 교인이 거의 다 방언을 하였고, 방언 통역하는 사람에 입신 치유 등, 완전히 무논에 개구리 울듯이 굉장하였다. 나는 그런 열광은 처음 보았었고,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이번 주간 수요일부터 우리교회 2025년 부흥회를 한다. 요즘은 그런 신비와 은사 위주의 부흥회는 잘 하지 않지만, 부흥회는 어느 때보다 성령충만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어서 ‘은혜받는 기회’로 다 생각하고 있다. 주로 말씀부흥회가 될 것이다. 심령부흥회가 너무 감정 위주의 부흥회를 조장하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말씀부흥회는 말씀과 간증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다. 또 결국 부흥은 말씀부흥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번 부흥회는 기대되는 부흥회이다. 이번에 오실 강사님은 책도 써내셔서 독자층을 가지고 있고, 우리나라에서 말씀을 잘 전하는 뛰어난 설교자로 알려진 분이다.
사무엘의 부흥
본문은 어린 사무엘이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엘리 제사장의 지도를 따라 말씀에 대해 바로 응답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지도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시작함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제사장 심부름하는 아이에 불과했던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이 임하였고, ‘이게 무슨 일인가?’, 처음에는 당황했던 사무엘이 그 말씀을 바로 받았으며, 말씀에 바로 응답할 때 사무엘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사무엘이 응답하고 있다. 말씀을 전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말씀을 듣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의 말씀, 계시의 말씀을 전해도 말씀 받는 믿음이 없을 때, 그 말씀은 허공을 맴도는 무의미한 말씀이 되고 말 것이다. 어린 사무엘은 제사장의 지도를 따라 말씀을 바로 듣고 응답할 준비를 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계획과 뜻을 전해주신다. 말씀이 들려오는 것! 이것이 사무엘 시대의 위대한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고 바르게 응답함으로 이스라엘의 위기가 극복되고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사무엘이라는 이름도 하나님을 들으신다, 즉 하나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다. ‘사무’는 듣다, ‘엘’은 하나님이다. 사무엘은 이름 자체가 하나님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히브리어로는 ‘순종한다’라는 말과 같다. 즉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순종하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말씀 부흥이 믿음 부흥이고 심령부흥이며, 교회부흥이다. 여러분 안에서 말씀이 부흥되기를 축복한다! 말씀이 깨달아지고, 말씀이 생각나며, 말씀에 눈물이 솟고, 말씀이 달콤하고 즐거워지기를 축복한다!!
부흥의 필요성
우리 시대는 어느 때보다 부흥이 필요하며 갈급한 시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흥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러나 부흥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 여기서 부흥은 외적 부흥, 양적 부흥이 아니라, 내적 부흥, 심령의 부흥을 주로 말한다. 사람들이 육적이고 물질적인 생활에만 너무 치우쳐 있어,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감수성이 무디어져 있다. 말씀이 들려와도 좀처럼 깨닫지 못하고, 말씀에 대한 응답이 거의 미미하다. 이런 시대에 부흥이 왜 필요한가?
첫째로, 생활이 너무 분주하여 마음이 병들고 약하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부흥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한결같이 바쁘다고 한다. 바쁘지 않으면 견디지를 못한다. 집에서 생활하며 비교적 시간이 많은 가정주부들도 모임이나 취미활동, 그것도 없으면 무엇을 배우거나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한 운동 등으로, 무언가 자기 일을 만들어 바쁘게 뛰어다닌다. 아니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아도 생활할 만한데 왜 그렇게 애쓰느냐 하면, 가만있으면 잡념이 생겨서 안 된단다. 남들보다 빨리 가야 하겠고 많이 벌어야 하겠으니 그냥 뛰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바쁜 것이 과연 괜찮은가? 심리학자들, 문화 전문가들은 이런 현대인들의 분주함은 지금 마음이 병들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마음이 병들어 있어서 바빠야만 괜찮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없이 바쁘다보니 말씀 들을 겨를이 없다. 말씀에 대한 목마름은 있는데, 차분히 말씀을 내 마음에 심을 만한 마음의 자리가 없다.
둘째로, 왜 부흥이 필요한가? 사람들이 너무 다양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공허한 마음에 부흥이 필요하다. 규범이 없는 ‘무규범사회’가 되었다. ‘아노미’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무너졌다. 현대는 다원주의사회이다.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쉽게 공감하지 못하고 동화되지 못한다. 보통 사람들은 복음과 신앙에 대해 냉담하다. 무슨 얘기이든지 한번 의심해보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가 어릴 적에 교회에 오는 이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그대로 받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그렇게 순수하지 못하다. 말씀을 자꾸 다시 되짚어보고 의심해본다. 말씀을 들을 때는 공감도 하고 은혜도 받는데, 돌아서 나가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다른 가치관, 다른 기준, 다른 생각들이 자꾸 일어난다. 단순해져야 내 마음에서 부흥이 일어날 수 있다. 우리시대는 은혜받기 힘들고 부흥이 어려운 시대이다. 사람들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닫혀있고, 영적 바탕이 메마르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부흥이 필요하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도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 어느 시대보다 사람들이 갈급한 영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흥이 필요하다. 복잡하고 각박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바람이 불고 있으며, 영적으로 갈급한 세대를 살고 있다. 음악에서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뛰어넘어 초월을 추구하는 음악들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사실 사람들이 영적인 갈급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기 있는 일본 피아니스트 유키 구라모토 같은 이들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초월과 신비에 대한 현대인의 갈급함을 표현하는 음악을 하고 있다. 모든 뉴에이지나 신비주의 음악, 락음악이나 재즈를 해도 현대인의 갈급함이 참으로 해소되지는 않는다. 심령 부흥은 그런 현대인의 외롭고 빈 마음을 채워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으므로 필요하다.
부흥은 무엇인가?
그러나 사실 부흥이란 것도 하루아침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우리는 성령의 강한 역사가 임하기만 하면 외롭고 방황하는 우리가 갑자기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이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던 쌓여있는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된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먼저 우리는 부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먼저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는 죄를 넘어서는 구원에 대한 확실한 말씀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어떤 교인들은 교인들이 기도나 집회 중에 감정적 흥분상태에 빠져 진동하거나 입신하거나 방언하는 등, 특별한 현상에 빠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고 이단적인 것으로 경계한다. 그러나 신앙에는 어떤 형태로는 하나님과 마주칠 때 이런 초월의 특별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종교학자들은 ‘누미노제’라고 한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가 종교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신앙에 대해 쓴 말이 ‘누미노제’라는 말이다. “누미노제란 ‘신비스럽고, 두려우면서도 환상적인 것’과의 만남이다.” 다시 말하면 이 영적 체험이란 인간이 거룩한 존재 앞에 섰을 때 느끼는 “거룩의 경험”을 뜻하는 말이다.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어떤 신비하고 거룩한 존재를 경험할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놀라움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그런 경험을 말한다. 부흥회 때나 개인의 특별한 신앙경험을 통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경험을 했나,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여러 번 신비와 놀람의 경험을 주셨다. 말씀 공부 집회에서 방언기도하는 다른 사람들, 주로 목사님들이 모였는데, 그 사람들과 함께 방언이 터져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중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누워있었다. 기도소리도 들리고, ‘내가 왜 누워있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아주 몸이 편안하고 기분이 좋았다. 지금 생각하니 그게 입신 경험이고, 일종의 누미노제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있으면 놀라지 말고, 특별하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경험으로 알기 바란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평범하고 상식적인 말씀을 통해 우리를 만나주신다. 그동안 부흥이라면 성령 충만한 하나의 현상으로 감정적으로 흥분시키는 것을 주로 가리켰다. 하지만 이런 감정적으로 충만한 상태는 사흘을 넘기기 어렵다. 모든 문제는 여전할 것이고, 우리 삶의 문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못한 채 여전히 힘들어하고 외로워하고 어려움에 빠져있게 된다.
한편, 그동안 부흥이라는 말은 믿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양적인 부흥이 일어나, 교회를 새로 짓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제 발로 많이 찾아와서 교인들의 수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부흥은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하나님 백성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부흥은 말씀이 들려지는 것이다. 신비체험도, 숫자가 늘어가는 것도 아니고, 말씀의 부흥이다! 사무엘이 소년일 때 당시 엘리 제사장이 지도하였던 이스라엘은 병든 사회였다. 그 중에서도 그들의 생활과 정신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가 병들어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예배가 바르고 은혜롭게 드려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언약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셨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막혔던 성령의 역사는 회복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새롭게 하기 위해 말씀으로 찾아오신다.
김서택 목사는 부흥의 현상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교회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위치를 바로 깨닫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아가기로 결단을 하면, 성령의 부으시는 역사는 회복되게 된다. 그래서 뜨겁고 체험적인 역사는 부흥이 나타나는 결과로 보아야 한다.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자신들이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던 성도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리 떠나있는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를 열망하게 된다.”(김서택, 살아있는 말씀 살아있는 교회, p.82f)
우리가 말씀 앞에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겼던 우상을 버리고 잘못된 생활과 습관을 청산할 때, 하나님은 성령을 강하게 부으시고 축복하셔서 삶의 변화와 진정한 기쁨을 충만하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부흥이다.
부흥을 이루기 위하여
나는 이 시대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부흥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하지만 부흥은 하나님 말씀의 부흥이다. 말씀이 부흥되고 삶이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복된 삶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가던 길을 잠시 멈추자. 너무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우리가 이번 주간 수 목 금, 사흘 동안 새벽과 저녁 시간만이라도 좀 멈추라! 가던 길을 멈추고 하나님께 집중하자. 달려가면서 쓰는 글씨는 잘 알아보기 힘들다. 달려가던 걸음을 잠깐 멈추고 우리 마음에 주시는 말씀을 새기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분주히 달려오던 우리가 멈추고 부흥을 이루기 위해 집중하라!
2)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말씀은 귀를 기울여야 들린다. 사람들이 말씀에 도무지 집중을 못하니까 설교자들이 말씀에 당의정을 싸서 전해준다. 그것이 만담이요, 이야기요, 여러 가지 방법들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방법까지 듣고 말씀을 깊이 듣지 못하고 만다. 당의정만 먹고 약은 쓰다고 안 먹으면 무슨 약효가 있겠는가!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 마음 중심을 내어놓아야 한다.
3)하나님의 임재를 모셔 들이자. 교회의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는 다르다. 세상의 기쁨이 감각적이고 표면적인 기쁨이라면, 신앙생활의 기쁨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내 생활에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기쁨이다. 깊은 기쁨, 영혼의 기쁨이다. 부흥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고 내 마음에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영혼의 동반자로서 하나님을 모셔들이자!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 이따금씩 말에서 내려 자기가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선 다시 말을 타고 달린다고 한다. 지친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다. 혹시 너무 빨리 달려서 미처 자신의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할까 봐 영혼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 한참을 기다려 자기 영혼이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다시 말을 타고 달린다고 한다.(최이우, 부흥리메이크, p.23)
1년이나 2년에 한번 정도 부흥회로 모인다. 작년에는 지방집회만 한번 열었다. 지방이나 삼척시 기독교연합회의 집회가 우리교회에서 모이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니 오랜만에 모이는 부흥회이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절호의 기회로 알고 열심히 참여하자! 준비 지침이다. <1)시간마다 참여하여 큰 은혜를 누립시다. 2)준비한 예물을 정성껏 드리십시오! 3)이웃과 친구들을 권하여 데리고 나옵시다. 4)부서별 맡은 역할 들을 잘 감당해 주세요. 5)문제가 해결되고 소원이 이뤄지는 부흥회가 되게 합시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번 부흥회가 말씀이 충만한 진정한 부흥회가 되도록 하자. 우리 마음을 열고 말씀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자!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가 새롭고 힘있게, 은혜 가운데 한 해를 살아가도록 하자! *
하나님을 아는 것
김영준목사(기쁜소식교회) / 삼상 3:1-14
기독교 문화권에 속해 있는 것과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도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수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세상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비록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절대자의 존재를 믿고 절대자에게 자기의 소원을 빌고자 하는 마음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습니다. 설문조사를 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다 인격적으로 알고 있느냐? 그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모른다고 가정하고,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셔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너무 진부한 얘기가 될 것이고 저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목회자로서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본문의 상황만을 봐도 그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본문에 나타나는 사무엘의 배경을 보면 그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선택된 민족의 믿는 부모에게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성전에서 자라났습니다. 그의 스승이 엘리 제사장입니다. 이보다 더 신앙적인 배경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어머니가 사무엘을 갖기 전에 벌써 하나님에게 드렸습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가 어떻게 얻은 아들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들으셔서 얻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의 환경 전체가 신앙적이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7절 말씀을 보면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배경, 신앙의 문화, 신앙의 환경에 사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당신을 아는 것을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으셨느냐? 쉽게 만들어 놓았으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지 않을까? 이것은 쉽다, 어렵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수영이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능하고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사람의 몸이 어떻게 물에 가라앉지 않고 뜰 수 있느냐. 수영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수영이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자전거가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바퀴가 두 개밖에 없는데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서서 앞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냐. 그러나 자전거를 타본 사람은 자전거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넘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방언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방언이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언어를 입으로 할 수 있다는 얘기냐. 제 대학교 룸메이트는 방언이 사람이 자기의 신경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말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러나 방언을 해본 사람은 자기가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임의로 시작할 수도 있고 임의로 멈출 수도 있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기도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의 열쇠는 본문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이것이 열쇠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어떤 방법도 이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엇을 보는 것도 아니고 기적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기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타난다는 말을 주목해야 됩니다. 그 말은 우리의 노력이나 소원에 좌우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타나도록 해 주셔야 됩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야 됩니다. 나타나도록 해주셔야 됩니다.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된 계기는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 하나님이 밤중에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을 경험함을 통해서 입니다. 예배 중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어떤 경건한 행위를 하는 중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사무엘이 전혀 기대하지 않고 밤중에 자기 자리에 누워있는 중에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귀로 들은 것인지 마음으로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귀로 듣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듣는 것이 훨씬 더 분명합니다. 마음으로 듣는 것은 이미 그 뜻을 우리가 압니다. 귀로 듣는 것은 귀로 듣고 해석해야 되지만 마음으로 듣는 것은 이미 감각의 장벽을 초월해서 우리의 마음에 인격적으로 다가온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훨씬 더 가깝고 훨씬 더 분명하고 훨씬 더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처음에는 누구의 음성인지 몰랐어요. 엘리 제사장이 그를 부르는 줄로 생각하고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 그가 말하지 않습니까.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에게 하고자 하는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단 몇 마디 말씀만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긴 말씀을 하신 게 아니고 모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 게 아니고 당신이 하고자 하는 몇 마디 말씀만을 사무엘에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에게는 이것은 장족의 발전을 가져온 것입니다. 마치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수영을 할 수 있는 쪽으로 건너온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 전과 말씀을 들은 후에는 하나님이 몇 마디 말씀을 하셨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음성을 이제는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사무엘에게는 더 이상 막연하거나 애매하거나 멀리 있는 분이 아닌, 가깝고 또 확실하고 중요한 존재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을 안다는 말로 규정한 것입니다. 몇 마디에 불과했어요. 그러나 그것으로 사무엘은 이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나타날 수 있다면 대박이겠네요.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섭렵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건 아닙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나님이 그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시는 것은 아니에요. 사무엘이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든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든가 어떻게 하면 자기 소원을 이룰 수 있다든가 이런 것을 말씀하지 않았어요. 본문을 보면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한 가지 일만을 말씀하셨어요. 이것은 어린 사무엘이 감히 생각할 수도 없고 그의 관심사도 아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관심사에 대하여 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에요.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고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에요. 아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고등수학을 아셨을 것 같지 않아요. 물리학의 원리를 아셨을 것 같지 않아요. 예수께서 러시아어를 아셨을 것 같지 않아요. 예수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신다고 이 세상의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섭렵하신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안다고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섭렵하는 것은 아닙니다. 라디오 수신기가 있다고 세상의 모든 방송을 한꺼번에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지금 방송되고 있는 것만 들을 수가 있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만을 알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미 장족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전에는 숨겨져 있는데 이제는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식투자를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로또에 당첨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자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큰 자산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자산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보다 더 귀중한 보배는 없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갈구해서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면서까지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는데 그 결과로 어떤 이득을 얻었느냐. 그 결과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습니까? 아니에요. 아버지의 재산은 형 에서가 다 가졌습니다. 그럼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유익이 있었다는 얘기냐. 그것은 그가 하란으로 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심을 통하여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꿈속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에서는 아버지의 재물을 다 가졌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은 받았지만 집을 떠나 멀리 떠나는 방랑객의 신세가 됐는데 그러나 하나님이 벧엘에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너의 조부 아브라함과 너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내가 네 누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이 모든 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의 일생에, 이건 우리 어느 누구도 일생에 한번 경험할까 말까 한 것인데 한번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생에 가장 귀중하고 가장 보배스러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계시는 것조차도 반신반의하는데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꿈속에 나타나셔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경험이 야곱의 삶에 가장 큰 자산이 되어서 야곱은 가난할 때든 고통스러울 때든 고독할 때든 어떤 환경이든 어떤 인생의 장애물도 넉넉히 극복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다 경험할 수 있는 축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제껏 신앙생활을 하면서 발견하는 사실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분명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봐도 다르고 사고방식을 들어봐도 다르고 사는 방식을 봐도 뭔가가 달라요. 그렇다고 그들이 완벽하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완벽하냐?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본인들이 제일 먼저 그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나는 흠이 많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특별한 면이 있어요. 그 이유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종종.
제가 과거에 존경했던 목사님 중에 오랄 로버츠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름이 아주 특이합니다. 이분이 특별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종종 그에게 나타납니다. 한 예를 들면 그분이 사모님과 식사를 하는 중에 별안간 마음속에 하나님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잠깐 기도하고 오리다.’ 하고 방에 혼자 들어가서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이건 그분이 설교 중에 말씀하신 예화입니다.
제가 이러한 사례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정말로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운동을 하는 중 갑자기 마음속에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가 있어요. TV를 보는 중에 갑자기 우리에게 뭔가를 깨닫게 하실 때가 있어요. 책을 읽는 중에 그 책의 내용과는 연결되지 않았는데도 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이 떠올라요. 음성이 들린다는 말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 신기한 생각, 믿음을 돕는 생각, 위로가 되는 생각, 도전이 되는 생각, 깨달음을 주는 생각, 힘을 주는 생각, 하나님을 느끼게 하는 생각,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돕는 생각. 이게 하나님의 말씀인줄 아는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우리의 영혼으로 그분을 느낄 수가 있고 영혼의 귀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누누이 등장하는 성경구절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신앙생활의 성공,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은금보다도 더 귀중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더라도 내게 있는 것, 내게 있는 가장 귀한 것,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할렐루야.
영적 황무지를 벗어나려면
삼상 3장 1~14절 / 김영준목사(기쁜소식교회)
우리가 믿음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빈도만큼 믿음이 뭔지를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개는 믿음이 좋다"라든가 "믿음으로 살라"와 같이 믿음이란 단어를 많이 쓰지만, 정작 믿음이 무엇이고, 믿음이 어떻게 오고, 믿음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를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을 마치 초능력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듯 합니다. 수퍼맨이 초능력을 갖고 있듯, 사람이 믿음이 있으면 임의로 그것을 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실제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시 기본적인 차원에서 믿음은 무엇이고 믿음이 어떻게 오고, 그리고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1. 일반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이것은 일반적인 믿음에 해당합니다. 일반적인 신뢰, 의지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성품을 믿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도와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의거하여 과거에 나를 도와주셨던 것처럼 미래에도 나를 도와주실 것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의미로서의 믿음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도 중요하고 대체로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할 때 대체로 이러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도 이러한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특별한 믿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일회적이고 특별한 상황에 해당하고, 은사적인 믿음입니다.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특별한 구체적인 약속을 주셨을 때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이 이 믿음에 더 가깝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일반적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는 다른, 하나님이 무엇을 특별히 약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할 수 있다(God can do it)” 이것은 일반적인 믿음이라면,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 것이다(God will do it)", 여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그것을 지금 하실 것이다”, 이렇게 믿는 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두 번째가 특별하고 구체적이며 기적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이에요.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주님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두 가지를 말했는데, “주님이 원하신다면(if you are willing)”, 주님의 의사에 대해서 물어봤습니다. 그러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You can)”, 그러니까 주님이 깨끗케 할 수 있는 것은 알지만 과연 지금 나를 깨끗케 하실지에 여쭤본 것인데, 예수님이 “내가 원한다(I am willing)”고 답하실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믿음은 사람의 의지로 얻을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구체적인 약속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들을 때 믿음이 발생하는 뜻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그냥 일반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모두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들에 주신 구체적인 약속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갖게 된 인물들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그의 몸이 죽은 자와 방불하였지만, 하나님이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너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것을 믿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의 경우에,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으로 주신 "내가 너 누운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주리니 너는 동서남북으로 편만할지며 내가 너에게 약속한 이 모든 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믿고 그것이 야곱의 믿음이 된 것입니다. 모세 또한 자신의 의협심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겠다고 덤빈 게 아니고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그에게 명하셨습니다. “너는 애굽에서 내 백성을 건져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지라." 이 약속을 믿고 모세가 믿음으로 그 어려운 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엔 위와 같은 사례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보편적인 믿음을 가졌던 것뿐 만 아니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듣고, 그 들은 것이 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는 것은 그냥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믿음을 갖고 간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란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성립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왜 나에겐 이런 일이 없습니까?", "왜 하나님은 나에게 구체적인 약속을 주시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한 이유가 있습니다.
❶ 하나님이 가장 최근에 주신 말씀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고 침묵하시는 경우입니다. 군대에서 이러한 지시 체계를 따릅니다. 군대에서 새로운 지시 사항이 없을 때는 가장 최근의 지시가 유효합니다. 새로운 지시가 올 때까지 가장 최근의 지시를 순종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이 새로운 지시를 주실 때까지 가장 최근에 주신 말씀을 믿고 따라야 되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새로운 말씀이 오지 않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할 때 이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설교 아이디어를 주셨는데 제가 그걸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주저할 때 그리고 새로운 설교거리를 찾으려고 할 때 하나님이 아무런 영감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럴 때 가장 최근에 주신 감동으로 되돌아가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묵상하노라면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던 많은 지혜가 담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이처럼 이미 주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귀담아 듣지 않은 게 아닌지 되돌아 봐야 되는 것입니다.
❷ 하나님이 나에게 아무런 특별한 약속도 주시지 않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여쭤보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 하나님의 관심사가 내 관심사가 되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멀리했을 때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아무런 교제도 없고, 대화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황무지와 같은 것입니다. 먹을 양식이 없어서 황무지가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황무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황무지 현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습니다. 듣는 사람이 없었어요.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이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영적인 황무지가 발생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하지도 않고 설령 알려주시더라도 순종할 의지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듯이 내게 한번 말씀해 보시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순종할 의사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당신의 뜻에 대해 관심도 없고 순종할 의사도 없을 때에는 하나님도 섣불리 당신의 뜻을 말씀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회개해야 됩니다. 마음을 돌이켜야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간 것을 회개하고 오랜 기간 동안 성령을 섭섭하게 한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성령을 슬프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성령을 슬프게 할 경우, 성령이 우리 안에 침묵하십니다. 성령이 안 계시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이 위축이 되어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무시하고, 영적으로 무지하고, 무관심한 것을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 엘리 제사장이 그에게 뭐라고 이르냐면 “주님이 너의 이름을 부르시면 이렇게 대답하라,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우리가 약속의 말씀을 들으려면 사무엘처럼 대답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듣겠다는 말은 그냥 귀를 기울이겠다는 뜻 뿐만 아니라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자기를 일컬어 ‘주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나’라는 말보다는 우리 자신을 ‘주의 종’, ‘주의 여종’이라고 불러야 됩니다. 그건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주의 종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주의 종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늘 우리의 주장만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주님이 주님이고 우리는 주의 종이에요. 그래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영적인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은 깊은 회개와 헌신입니다. 듣겠다는 말은 헌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시간을 정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되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헌신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무슨 요구를 하시든지 순종하겠다고 다짐을 해야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둑이 터져서 물이 쏟아져 흘러나오는 것처럼 지금까지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이 이상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천사가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으로 와서 "네가 하나님 앞에 겸비하기로 결심하던 첫 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 앞에 겸비하기로 결심하던 둘째 날도 아니고 첫째 주도 아니고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비하면, 겸비하기로 결심하면 첫 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이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기 시작하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깁니다. 들음으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말씀 드린 두 번째 종류의 믿음, 은사로서의 믿음, 특별한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는 여러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❶ 믿음은 응답을 요구합니다. 그냥 들어놓고 그걸 벽장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고 테니스 게임처럼 하나님이 공을 쳐서 우리 코트 쪽으로 공이 보내시면 내가 그 공을 맞받아 쳐야 됩니다. 순종과 응답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받았으면 “아멘,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고 받아쳐야 됩니다. 그래야 주님이 계속해서 그 말씀을 우리 코트 쪽으로 보내주십니다.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❷ 그 믿음을 도전하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후에 아말렉이 그들을 대적한 것처럼,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믿음을 반대하고 그 믿음을 싫어하고 그 믿음에 대적하려는 도전이 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믿음을 시험하여 의심 하게 만드는 것인데, 이럴 때 뒤로 물러나면 안됩니다. 뒤로 물러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일 수록 더 주님을 가까이 하고 믿음을 간수하고 그 믿음을 일깨울 수 있도록 기도하고 예배 드리고 찬양하고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도전 앞에서 믿음이 더 강건해지고 믿음이 더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❸ 우리가 미약한 자로 남지 말고, 강하고 담대해야 됩니다. 그게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얻는 것과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별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얻었지만 여전히 미약한 사람으로 남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으로 활동하지를 못합니다. 아기와 같습니다. 아기들은 엄마가 안 보이면 불안하지요. 엄마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모차를 보면 옛날에는 아기가 앞을 바라보게 했는데, 요즘에는 오로지 엄마만을 바라보게 뒤를 보고 앉게 만들었어요. 아기를 데리고 밖에 나가면 아기도 좀 밖을 보게 해야지, 엄마만을 보게 만들었어요. 여러분, 이것은 아동으로 하여금 엄마만을 의존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동이 소년이 되면 엄마가 같이 가지 않아도 스스로 학교도 갈 수 있고, 물건을 사 가지고 올 수도 있고 심지어 외국에 비행기를 타고 다녀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엄마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고 어른이 돼 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늘 우리 손을 잡아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보이지 않아도 함께 계심을 믿고 골짜기로 내려갈 수 있어야 됩니다. 다윗이 그랬고, 에스더가 그랬고, 모든 믿음의 인물들은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고 위험의 골짜기로 내려가서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증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속성을 느낄 수가 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믿는 게 어려운 게 아니고 안 믿는 게 더 어려워요. 믿으면 손해 보는 게 아니고 안 믿을 때 대가가 더 많아요. 인생의 모든 황무지는 영적 황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회복은 영적인 회복에서 비롯됩니다. 영적인 황무지를 우리는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해야 됩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할렐루야.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
조영태목사(임마누엘교회) / 삼상 3:1~21
오늘 본문은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2:11절에 엘리 제사장에게 보내진 이후로 소년 사무엘은 여전히 엘리 밑에서 여호와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2장 18절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2장 21절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아이’라고 했을 때 보통 청소년 시기가지를 포함하는데 당시 사무엘의 나이를 10~12살 정도로 봅니다. 또한 사무엘을 소개할 때 ‘섬겼다는 것’과 ‘여호와 앞에서’ 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엘리 앞에서’ 라는 말은 ‘밑에서, 지도 아래서’ 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종합해보면 사무엘은 엘리 밑에서 여호와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때였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때였다는 말입니다. 사사시대가 그랬습니다. 말씀이 없어서 기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침묵하신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지나면서 이스라엘에 영적 지도자가 끊겼습니다. 가나안 정복을 하고 땅을 분배하고 여호수아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면서 신앙의 결단을 촉구했을 때 장로들과 백성들은 결단코 우리도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했지만 여호수아가 죽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우상숭배로 돌아섰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경고하고 섞이지 말라고 했던 세상문화를 따라하고 우상숭배하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해 둔 레위인과 제사장들마저도 영적 어두운 시대 속에서 잠들어 버렸습니다. 엘리 제사장도 눈이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때였습니다. 눈이 어두웠다는 것은 육신의 눈과 영적인 눈을 함께 의미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드물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침묵을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로 시작된 창조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의 말씀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때로는 회개와 심판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9:13
그 말씀이 희귀했다는 것은 생명의 역사가 멈췄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소망이며 은혜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까? 그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을 때리고 있습니까?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습니다.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 또는 성령의 조명을 의미합니다. 어두운 시대였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은 비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 있었습니다. 소년은 궤 있는 성막 안쪽에서 기거를 했습니다. 엘리의 방과 가까이에 있으면서 노쇠한 제사장의 손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가장 가까이에서 엘리의 아들들이 부패하고 죄악을 저질렀지만 또한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4절부터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저녁이 되어 사무엘은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있었는데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주 익숙하게 대답을 하고는 엘리에게로 달려갑니다. 당신이 나를 부르시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엘리는 사무엘을 부르지 않았으니 가서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어떻게 부르셨을까요?
10절에 보면 네 4번째 부르실 때 그의 이름을 두 번 반복하시는 것을 보아 실제로 이름을 부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똑같은 장면이 세 번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고 사무엘은 엘리에게 달려갑니다. 그러나 엘리는 부르지 않았다고 돌려보냅니다.
이유는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도 이와 같이 나타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섬기고 있었지만 아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때였습니다. 그런 중에 엘리에게 달려간 것은 평소에도 눈이 어두워 있는 엘리가 사무엘을 불렀고 사무엘은 그 때마다 그에게 달려가 심부름이나 엘리의 일을 대신 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엘리에게 순종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누군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해야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 훈련의 시간이 중요합니다.
부모님 또는 또는 윗 사람 아래서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순종은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삶 속에서 당장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역사가 금방 일어나지 않는다고
은혜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나는 교회를 오래 다니는데도 하나님이 계신 줄 모르겠어” 하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자리, 말씀 듣는 자리를 지키다 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어쩌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보다 더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지금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금방 알아듣지 못했던 것은 엘리가 그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 역시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하지 않았던 때에 하나님과의 체험적인 만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금방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을 세 번을 불렀다는 것은 충분히 불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이 대답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사무엘을 불러서 하나님의 일을 시키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 때서야 엘리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늦긴 했지만 어떻게 응답을 해야 하는지 잘 알려줍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말씀을 받는 태도에 대해서 한 번 따라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맞습니다.
사무엘은 다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임하셨습니다. 사무엘에 가까이 서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아 사무엘아 두 번 부르셨습니다. 당시 말씀도 희귀하고 이상도 흔하지 않던 시대에 하나님께서 직접 사무엘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만큼 사무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사랑이 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것이며 귀중하게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하게 여기고 받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상을 받을 때도 얼마나 중요하게 여깁니까?
우리가 높은 사람의 말은 얼마나 주의 깊이 듣습니까?
하물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 앞에서 겸손하게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생명의 주권자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 중에 드리는 것과 받는 것이 있습니다. 드리는 것은 찬송을 드리고 예물을 드립니다. 산제물로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습니다. 축복기도를 받습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릴 것은 잘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 또한 잘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하옵소서’ 라고 하는 것은 한 번 들어보고 판단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시면 그대로 행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나님은 듣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듣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써가시는데 사용하십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 그루터기를 남겨두십니다. 희망이 없어지고 가능성이 없을 것 같은 그 때에도 사람을 남겨두십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40년 간 바로의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힘도 있었고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았습니다.
40세에 쫓겨가듯이 자신의 터전을 떠나 40년 동안 미디안의 광야에서 장인인 이드로의 양떼를 쳤습니다. 외진 곳이었습니다. 전혀 사람들이 찾아오지 못할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불은 붙었으나 타지 않는 가시떨기나무 아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노예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침묵하셨습니다. 400년간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멈췄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오시기까지 침묵하시다가 바로 직전에 세례요한을 부르셨습니다.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그가 있는 곳은 들판이었습니다.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에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빈들에서 외쳤습니다.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에 로마황제가 있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또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포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시고자 합니다.
우리 임마누엘 교회가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을 불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묵묵히 섬기는 자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이 시대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쓰실지? 어떤 말씀을 주실지?
오감을 동원해서 귀를 기울여야 할 시대입니다.
현재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는 말씀사역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시대가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주님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직은 여호와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두움이 깊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실 것입니다.
12절부터 14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엘리가문에 임할 심판입니다. 이는 2장 하반부 내용인데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자들과 동침하는 죄악을 범함으로 엘리 가문의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제사장으로서 가장 세력이 컸던 엘리 가문의 세력이 꺾일 것이다. 노인이 없게 하시고 엘리의 집안에서 출산하는 자들은 젊어서 죽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번영이 떠나고 슬픔만이 남게 된다. 마지막으로 제사장 직무를 상실한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존귀한 제사장 직을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서 엘리에게 보낸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다 이루ㄹ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게서 확정하셨다는 것이고 곧 시행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11절에 “이를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릴 것이다” 는 말은 엘리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듣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리라는 뜻입니다. 이는 엘리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강하게
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며 이들의 죄는 제물로나 예물 곧 '피흘림이 있는 제사'와 '곡식의
제사' 어떤 것으로도 속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심판을 작정하셨을 때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고 기다려 주실 때 돌아와야 합니다. 구원의 문이 열려 있을 때 주님께로 돌아오십시오.
15-21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엘리에게 전하고 선지자로서 세움 받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엘리가 사무엘을 불렀습니다. 전 날 밤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지 엘리 제사장도 매우 궁금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미 2장에서 심판의 메시지를 들었던 터라 두려운 마음으로 사무엘을 불렀을 것입니다. 사실 어린 사무엘로서 하나님의 엘리제사장 가문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는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숨김없이 이야기할 것을 명령하고 사무엘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않습니다. 이 모습은 사무엘이 선지자로서의 첫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입니다. 아직 앳된 소년으로서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인 엘리에게 그것도 얼굴을 맞대고 그의 가문의 파멸을 예언합니다.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사실을 그대로 선포합니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의 영적지도권이 엘리에게서 사무엘로 넘어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 말씀 앞에 엘리는 하나님의 뜻이 선하게 이루어지실 것이라고 그의 선포의 말씀을 받아드립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셔서 말씀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예언적인 선포입니다.
이제 사무엘에 대한 소개가 좀 더구체적으로 달라집니다.
19절에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이 선지자로 세워진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예언자로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언이라는 것은 알아맞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는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증거를 삼습니다. 성경과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품 그분의 구원역사와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게 됩니다. 그것을 확증하면 우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순종은 듣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듣고도 행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어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4절
그렇습니다. 반석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순종하는 행위까지 가는 사람의 믿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주님이시구나 라고 믿고 주님께 나오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왜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인가? 내 힘으로는 못가는 가? 내가 뜻하는 방향으로 가자 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의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 드리면 그분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공급받습니다.
문을 두드리노니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먹고 마실 것이다. 보통 이 말씀과 연관이 되어있는 성화에 보면 예수님께서 문 앞에 서계십니다. 그런데 문 밖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손잡이가 없다는 것은 안에서 열어주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왠지 예수님은 연약해 보입니다.
조심스럽게 노크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그림을 조금 수정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두드리시는 것은 적극적인 두드림입니다. 빨리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나의 초청의 메시지를 듣고 문을열고 구원에 잔치에 동참하라는 주님의 외침입니다.
그러니 그림에는 당당하게 서서 꽝꽝꽝 하고 두드리는 예수님의 모습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지금도 애타게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 어두운 시대 속에서 다시금 개인과 공동체의 거룩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현장에서 쓰임 받을 그 한 사람이 오늘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할 때
인명진목사 / 삼상 3:1-14, 롬 1:18-32, 막 14:57-65
오늘 사무엘 이야기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귀먹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 3장 1절에 따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야훼를 섬길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현상,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현상은 그리 유별나거나 독특한 현상만은 아닙니다. 여러 시대에 나타났고, 오늘 우리 시대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말씀이 희귀했다는 현상은 곧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침묵하십니다. 더 이상 선지자도 보내주시지도 않고 친히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4백 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근대 역사를 이야기 하자면 계몽주의 시대부터 1차 대전까지 약 2백년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급속하게 발달한 계몽주의와 산업화 시대에 인간은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시계수리공으로써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세계가 하나님 없이도 잘 돌아가니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끔 시계가 고장 났을 때 시계수리공처럼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홀대하고 뒷방 늙은이로 밀어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인간의 닫쳐진 귀로 인해 약 2백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이 꿈꾸었던 장밋빛은 핏빛으로 변했습니다. 문명의 이기로 얻어진 힘과 자본을 가지고 약한 나라를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한 나라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들이 앞을 다투었습니다. 이 정복의 역사는 세계열강들의 충돌로 이어졌고, 이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 세계 1차 대전이었습니다. 이 참혹한 전쟁을 치루고 나서야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인간성을 더 황폐화 시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때 등장한 신학자가 칼 바르트라는 독일 신학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deus dixit)"는 주제 아래 로마서 강해 초판을 내놓았습니다. 이 로마서 강해 초판을 가리켜 후대의 학자들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세계 1차 대전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세대에 대한 첫 번째 폭탄이라면,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는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만으로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노니는 운동장 떨어진 두 번째 폭탄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을 때 인간이 얼마나 타락하는가를 역사를 통해서 목격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 때 세상은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두움 속에 갇혀서 참 빛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한 인간뿐만 아니라 역사 전체가 어둠 속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 침묵하실까요? 언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집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때 침묵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역사를 심판하실 때 하나님은 입을 다물고 계십니다. 음란하고 불결한 삶을 살았던 엘리의 아들처럼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고 그저 침묵하고 계실 뿐입니다. 엘리와 그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사욕을 쫓을 스승을 두고 욕심과 탐욕에 이끌려 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침묵이라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침묵의 심판을 가리켜 “하나님의 진노”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바울 사도는 로마서 말씀에서 경건치 않은 삶, 의롭지 못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육안으로 쉽게 분별되는 방식으로 찾아옵니까? 큰 소리를 찾아내며 찾아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어떻게 나타난다는 말입니까? 로마서 1장 24절, 26절, 28절에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내버려 둔다’는 말입니다. 상실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마음대로 살아도 아무런 책망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심판이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사람이 망할 때 귀부터 망한다.’고 했습니다. 옛 현인들의 정확한 통찰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 듣는 귀가 닫쳐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면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의 징조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또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욕심을 따라가는 스승을 많이 두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자기 듣고 싶은 말씀만 들으려하는 시대입니다.
이것은 우리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을 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려 할 때, 내 인생의 경고등이 켜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를 소리 없이 쳐다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마치 엘리 제사장 시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진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하나씩 둘씩 불순종할 때, 다시 말해서 경건치 않은 삶의 양식을 취할 때 하나님의 진노는 소리 없이 시작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 시대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은 가볍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을 과신했던 세계 1차 대전 전처럼 오늘날도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하나님은 중요한 존재로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마치 그분이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교회에서도 그런 대접을 받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신중하게, 그리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집 가장이신 하나님은 주일마다 베풀어지는 자신의 말씀의 식탁에서조차 더 이상 가장 자리에 앉지 못하고 말석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점차 쇠퇴하고 퇴보해 가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종교 고객인 교인들의 필요와 요구에 부응하는 일이 본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 중심의 교회로 점차 탈바꿈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복음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외칩니다.
데이비드 웰스라는 신학자는 가벼워진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의 교회는 분노하지 않는 하나님을 설교 하되,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 대한 언급 없이 사람을 인도하여, 심판에 대한 언급 없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점점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점점 귀머거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와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희귀해져 가고 있습니다. 마치 엘리 제사장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이 갈릴리 강단에서 무슨 말씀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듣기를 원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때로는 좌우에 날선 칼처럼 우리의 영혼을 찔러 쪼개기도 하지만 내 영혼을 살리는 원시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왜 갈릴리교회입니까? 선교사역이 세련되어서 갈릴리교회입니까? 아닙니다. 갈릴리교회의 힘은 하나님만을 예배하겠다는 예배와 갈릴리 촌사람 예수의 생생한 복음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갈릴리교회입니다.
엘리 시절 하나님의 침묵은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하나님은 입을 꽉 다물고 계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어떤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거룩한 곳 성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때문입니다. 대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들은 성소 입구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그들은 희생 제물로 드리는 가축의 일등급 부위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자기들이 먹어 치웠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는 엘리의 두 아들이 지은 죄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를 경멸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습니까? 그들의 아버지 엘리입니다. 사무엘상2장 29절에 따르면 “어찌하여 너는 나보다 네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나의 백성 이스라엘이 나에게 바친 모든 제물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만 골라 스스로 살찌도록 하느냐”고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을 다그칩니다.
왜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제물을 경멸하고 멸시하였습니까? 그들의 아버지가 그랬기 때문입니다. 부전자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하나님의 물건을 존귀하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자녀들이 교회로부터 멀어지고 떠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자기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경멸하는 투로 교회에 대해 말하는 자녀들을 보아왔습니다.
부모의 입술로부터 나오는 그러한 경멸적인 언사는 뼛속 깊이 파고드는 독약과 같습니다. 그것은 어린 자녀들의 영적인 생명 속에 파고들어 피어오르는 새싹을 죽입니다. 만일 부모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일들에 대해 불손하게 말한다면, 그들의 자녀들도 그럴 것입니다. 부모들이 신령한 문제들을 경멸하는 투로 다룬다면, 그들의 자녀도 그럴 것입니다. 만일 부모들이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들의 자녀도 그럴 것입니다.
이 세상의 선교사 중에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있다면 머나먼 이국땅으로 파송되어 가는 이들이 아닙니다. 가장 위대한 선교사는 자신들의 전 생애를 바쳐 자녀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존중하도록 가르치는 헌신된 아버지와 어머니들입니다. 자녀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교회를 존중하도록 가르치는 일은 드라마틱한 요소가 없습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의 연속입니다. 기도하고, 성경 읽어주고, 교회에 출석하고, 감사하고, 복된 말을 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일에는 특별한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부모를 통해서 예수 믿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를 신실한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부모의 충성스런 모습을 배우고 배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는 나쁜 아버지였으며 못된 제사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성소에서 타오르고 있어야 하는 하나님의 등불이 거의 꺼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꺼질 듯 가물거리는 등불처럼 어린 소년 사무엘이 거기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일상적인 일들을 마쳤습니다. 성전의 모든 문들을 다 걸어 잠갔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에 순수한 올리브기름을 가득 채웠습니다. 90세가 다 된 엘리 대제사장이 침대에 눕는 것을 도와드렸습니다. 이제 비로소 사무엘은 자신의 방에 들어가 누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한밤중에 깨어 일어났습니다.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님 당신께서 저를 부르셨습니까?” “아니다. 아들아. 네가 꿈을 꾸었나 보구나. 어서 가서 자거라.”사무엘은 다시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사무엘아!” 그는 다시 엘리의 방으로 건너갔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부르셔습니까?” “아니다. 아들아. 너를 부르지 않았어. 다시 건너가서 자거라.” 시간이 흘렀습니다. 세 번째로 누군가가 또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은 세 번째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엘리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여기 제가 왔습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래서야 제사장 엘리는 알아차렸습니다. 백성들이 드린 최상급의 고기만 먹어서 흉측하게 살찐 제사장 엘리는 그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지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지만 영이 어두워 하나님의 음성마저 들을 수 없게 되었을 때 희미하지만 등불을 밝히고 있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준 것입니다.
엘리는 얼른 명령합니다. “아들아, 하나님이 너를 부르시는 것이다. 가서 누워라! 그리고 그분이 다시 부르시면 너는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습니다고 답하여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던 시대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엘리 제사장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 대해 물음표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제사장인가? 그는 신성한 하나님의 직분을 인식하며 살았는가? 의심과 회의가 가득합니다. 그는 제사장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최상급 부위의 고기를 아들들에게 주었습니다. 영이 어두워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못했습니다. 과연 이런 사람을 제사장이라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종이라 말할 수 있는가? 의심이 듭니다.
그러나 자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지만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 준 사람 아닙니까? 제사장이 될 수 없는 사무엘을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여 제사장으로, 그것도 이스라엘의 최고의 영적인 권위를 지닌 대제사장으로 세운 것 아닙니까? 엘리의 양면성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레위기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은 오직 레위지파 사람만 될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인 사무엘은 태생 자체가 제사장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여 사무엘에게 대제사장의 자리를 물려줍니다. 사무엘은 전무후무하게 레위지파가 아닌 사람이 대제사장이 된 사람입니다. 이 사무엘로 인해 3백년 동안 혼란을 끝내고 이스라엘이라는 왕국이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엘리의 혜안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엘리는 그래함 그린의 소설 “권력과 영광”가운데 등장하는 위스키 신부가 떠오릅니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히 유명한 작품입니다. “위스키 사제”라 불리는 한 타락한 신부의 도피와 고뇌를 통해 정치와 신앙의 대결, 그리고 신앙의 초월성을 암시한 이 작품은 발표 후 교황청의 수정 요구를 받는 등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의 멕시코입니다. 무신론 혁명 정부가 들어선 직후 멕시코 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부는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는 상황에서 혼자서 탈출하여 도망 중이었고,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려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한 시골 마을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미사도 집전하고 어린아이들에게 세례도 베풀고 고해성사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을 떠나 다른 마을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도 사제의 역할을 계속합니다. 무엇이 이 신부로 하여금 사제의 역할을 계속하게 했는지 아닙니까? 그가 지닌 힘의 근원은 신앙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다는 소명감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제의 역할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놀랍게도 그때그때마다 마시는 한 병의 위스키 때문이었습니다. 술기운에 그는 그런 일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위스키 신부”였습니다.
성도들이 순교 당하는 현실 속에서 양떼를 버리고 혼자 도망가는 타락한 신부, 위스키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어두운 신부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전달하는 통로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마음 놓고 죄를 짓자 그러면 은혜가 더할 것이라고 말하는 뻔뻔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결점과 약점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체포되어 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감방에서 최후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술에 취해 지내 왔지. 한 번도 제정신인 적이 없었어. 얼마나 많이 취했는지 기억도 나질 않아. 나는 간음죄도 지었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이 있어 내가 신부의 의무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우 성실하게 수행했단 말이야! 내가 얼마나 쓸모없이 살아왔던가! 내가 한 영혼이라도 하나님께 드렸는가? 하나님께 보십시오! 제가 이런 일을 했습니다. 하면서 한 번이라도 떳떳하게 말한 적이 없었어.”
이 위스키 신부는 엘리를 닮지 않았습니까? 아니 엘리가 이 위스키 신부를 닮았다고 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엘리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의 허물과 죄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잘못들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엘리는 사무엘을 도왔습니다. 지금 사무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사무엘 알려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무엘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여 대제사장으로 세워서 왕국 이스라엘 준비하게 만들었습니다.
엘리가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면, 하나님의 백성은 후에 사무엘 밑에서 그런 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엘리가 사무엘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혼돈의 시기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엘리는 도덕적으로 흔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정도로 어두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약점 중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차렸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습니다.
그 알아차림은 하나님의 백성 위에 쏟아지는 축복을 물꼬를 트는 첫 번째 삽질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축복의 방아쇠와 같았습니다. 이 신비를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연약함 안에서 나타난다는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영적인 귀머거리 엘리로부터 영민한 사무엘이 나왔고, 영적인 소경과 같은 엘리로부터 미래를 내다보는 사무엘이 나왔습니다. 이 역설을 인간의 지혜로 어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마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를 들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 혼탁한 시대에 사무엘처럼 자신의 의지와 감정마저 복종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 세상을 밝히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섬김의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무엘상 3:1,10~11,19~21 / 임원임명주일, 송기성목사
펄벅 여사는 섬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섬기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오로지 기쁨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스스로 우러나올 때에야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섬기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은 섬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 “섬김의 기쁨이 넘치는 교회”는 곧 섬김의 아름다움과 행복이 넘치는 교회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아이 때부터 제사장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때 사무엘의 나이를 12세로 보았습니다. 히브리 사회에서는 12세부터 성년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은 엘리의 감독과 지시를 받으면서 희생 제사의 직무 등 성전의 사역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섬김의 사람 사무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섬기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섬김의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본받고자 합니다.
1. 섬김의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사시대 말기에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상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말씀도 자주 들려 주시지 않았고 이상도 자주 보여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 아이 사무엘은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엘리 앞에서’(before Eli)란 제사장 ‘엘리의 감독과 지도를 받으면서’(under the direction of Eli)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전에서 주의 종의 지도와 교육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중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궤가 있는 성전 안에 누워 있었을 때에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모르고 엘리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엘리는 그가 사무엘을 부르지 않았으니 가서 다시 누우라고 했습니다. 당시 사무엘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세 번씩이나 듣고도 엘리에게로 달려가곤 했던 것입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너를 부르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가서 누웠다가 다시 부르시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사무엘에게 임하여 서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멀리 계시지 않고 친히 사무엘에게 가까이 오사 서서 그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불러 주셨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섬기긴 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도 못하고 이상을 직접 보지도 못했던 사무엘은 이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감격적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섬김의 사람이 아름답고 행복할 수밖에 없음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며 섬김의 기쁨과 보람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제22대, 24대 대통령이 될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대통령의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가 16세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심으로 학교를 더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역사상 대학을 나오지 못하고 대통령이 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화점 점원, 맹인학교 교사, 변호사 사무실 서기를 한 그는 너무 힘들고 좌절한 나머지 어느 날 한 친구와 어울려서 술집을 향해 가던 중 교회 앞을 지나가다가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설교 제목을 보았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는 친구에게 자신은 술을 마시러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술집으로 갔으며 그는 술집으로 가지 않고 교회로 갔습니다. 세월이 흘러 클리블랜드는 버팔로 시장이 되었고, 그 후에 뉴욕 주지사가 되었으며, 마침내 1885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날, 감옥에서 한 죄수가 신문을 보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수가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오늘 신문에 난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자기 친구였다며, 30년 전에 함께 술집으로 가다가 친구는 술집으로 가지 않고 교회로 갔다는 것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 친구는 대통령이 되고, 자기는 죄수가 되어 그 친구의 당선 기사를 읽고 있으니 울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과 죄수, 백악관과 감옥, 인생의 방향(direction) 선택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갈림길이 되었습니다. 술집을 향한 방향과 교회를 향한 방향, 두 길을 다 취할 수는 없습니다. 성전에서 제사장 엘리의 지도를 받으며 자란 사무엘처럼 클리블랜드 대통령,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신앙승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섬김의 사람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새벽기도 시간에 교회학교 어린이들을 위해 함께 무릎을 꿇고 안수기도를 드렸습니다. 새벽에 아이들을 교회로 데리고 온 부모들과 부모를 따라 나아와 준비해 온 기도제목을 펼쳐 놓고 기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앙교육은 그 첫째가 가정에서의 교육이고, 둘째가 회당에서의 교육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어디서 누구의 교육과 지도를 받으며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섬김의 사람으로 배우고 자라며 섬김에 충실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섬김의 삶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요셉처럼 범사에 형통해지시기를(창39:23)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섬김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명을 성취하게 됩니다.
98세 노인 엘리는 나이가 많아 눈이 점점 어두워져서 잘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처소에 누웠고, 사무엘도 하나님의 궤가 있는 성전 안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은 동트기 전이었을 때였습니다. 아이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엘리의 집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 대한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심판의 원인은 엘리가 아는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않고 바로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앙 교육과 훈육의 실패가 영원한 심판과 저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엘리에게 감히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그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숨김없이 다 말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사무엘은 그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엘리의 충격의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말씀을 하신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He will do whatever seems best to him.)라고 말하였습니다. 이후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인 줄 알고 받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로에서 당신을 거듭 말씀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무엘이 하는 말은 그대로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고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섬김의 사람이 아름답고 행복할 수밖에 없음은 하나님의 사명을 다 성취하게 되기 때문이며, 사람들로부터도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200년 전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패망으로 몰고 간 나일 해전의 전쟁 영웅 허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 영국의 해군 제독의 이야기입니다. 12세의 나이에 해군에 입대한 그는 전투 중에 오른쪽 눈과 팔을 잃기도 했습니다. 오른팔 전체를 절단한 그는 노트에 “나는 이제 끝났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를 물리쳐 영국을 구하고 전사하였습니다(1805.10.21.). 넬슨의 사망 당시 곁에 있었던 빅토리호의 외과의사 윌리엄 비티에 따르면 넬슨의 마지막 말은 “내 임무를 다 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였다고 합니다. 전투의 승전보와 넬슨의 전사 보고를 함께 받은 영국 국왕 조지3세는 “우리는 대승을 거뒀지만 얻은 것보다 잃은 게 훨씬 크다.”며 넬슨의 죽음을 비통해했다고 합니다.
영국 곳곳에 그리고 세계 여러 곳에 넬슨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중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의 중심지인 에든버러(Edinburgh)시 언덕위에 우뚝 세워진 넬슨 동상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에든버러 시민이 넬슨 동상을 세우는 것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구나 살아생전 그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직 국가가 의무를 요구할 때, 죽음으로써 그 임무를 다하는 그 삶을 내 자식들에게 가르쳐준, 그 교훈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교인에게는 교인의 의무가 있고, 국민에게는 국민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 맡겨진 의무를 따라 죽기까지 충성하며 그 임무를 다하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뿐만 아니라 그 사명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 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존경하며, 그런 사람에게서 교훈을 얻습니다.
사도행전 20:22~24에 사도 바울은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에 매여 사는 사람, 주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은 반드시 그 사명을 성취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섬김의 삶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성취하며 바울처럼 죽도록 충성한 사람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계2:10)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헨리 나우웬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하버드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데이 브레이크 센터의 지적장애인들을 섬기기로 하였습니다. 그의 결정과 결단에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버드대학을 떠나면서 아주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여러분, 하버드를 섬기지 말고 그리스도를 섬기십시오!”
우리는 종종 어느 어느 교회를 섬긴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물론 교회를 섬긴다는 말은 좋은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교회를 섬긴다는 말보다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이 바람직합니다. 교회는 엄밀히 말해서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장소이며 통로입니다. 섬김의 대상과 목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것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성도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섬김의 사람은 행복합니다. 섬김의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섬김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명을 성취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섬기는 것은 아름답고, 섬김의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
삼상 3장 1~9절 / 이강웅목사
서론: 반 고흐, 세잔과 함께 후기 인상파로 알려진 폴 고갱(6.7.1848-5.8.1903)은 그의 유언과 같은 말기 작품으로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이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그림을 통해서 고갱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근대인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중대한 질문을 던졌으며, 오늘 현대인들에게도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은 과연 어디로 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물론 현재 코로나팬데믹으로 인한 답답함과 좌절감, 그리고 절망감 속에 살아가야 하는, 절박한 이 현실 앞에서 전혀 적실성이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폴 고갱 자신도 지독히 고생을 많이 한 화가입니다. 배고팠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그림을 죽을 때까지 그렸습니다. 그런 그가 배가 불러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환경이 열악해도 인간이기에 언제가는 꼭 던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질문, 곧 자신의 존재가치를 규정하는 ‘정체성’에 대해서 폴 고갱은 질문한 것입니다. “당신은 어디서 왔으며, 당신은 무엇이며, 당신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인문학적인 질문으로 바꾸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오늘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이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의 기원은 무엇일까요?”“당신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당신이 살아가는 목적은 무엇이며, 그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덧붙여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바라보고, 어떤 보상을 바라며 살아가십니까?”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다고 눈 앞에 전개되고 있는 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집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질문에 대해 거의 암기해서 자동으로 나오는 정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로 갈 것입니다.”맞습니다. 정답입니다. 그런데 이 정답이 현재 코로나19이 진행되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다시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이 창조되고, 우리가 태어났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께로 간다는 사실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어떤 의미로, 어떤 원리로, 어떤 목적과 방향으로 적용되고, 작동되고 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던져야 할,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이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알아야 할 시기를 놓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주 나중에 이 고민을 한다가 인생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혼동과 혼란 속에서 방황하게 되고, 뒤늦게 잘못 살았다는 회한을 남기게 됩니다. 특히 위기를 만났을 때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인생이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갈 때 가장 먼저, 그리고 중요하게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이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이 질문의 해답으로부터 내 자신의 존재감, 소명과 사명, 자존심 및 자존감이 나오고 출발합니다. (이상 김준영의 “폴 고갱과 루이스 캐럴의 질문”에서 발췌)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우리는 어디로 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했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모세오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신 목적이 출애굽기 19장에 나와 있습니다. (출 19:3-6)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 자신의 소유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열방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 앞으로 나아와 복을 받도록 하려는 목적입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복을 얻도록 하기 위해 그를 부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동일한 목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 목적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사는 훈련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차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서 풍요롭게 살 때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이유를 망각했습니다. 사명을 저버렸습니다. 배부르게 먹고, 아름다운 집을 짓어 거주하게 되고, 소와 양이 번성하였습니다. 은금이 많아져서 소유가 다 풍부해졌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잊어버렸습니다.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사사시대의 비극적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 속에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1. 말씀이 희귀한 시대
사무엘이 태어났던 시대는 사사 시대 말기입니다. 그 시대는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불한당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성막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수종 드는, 영광스러운 제사장 직분들이었지만 정작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한당들이었습니다.(2:12) 제사장의 영적 상태가 그런즉 백성들은 오죽 했겠습니까? 사무엘상 4장을 보면 그들의 영적 수준이 드러납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하나님을 떠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마땅한 데 그 대신에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 오게 합니다. 언약궤만 있으면 자동적으로 승리를 가져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전쟁을 이기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무엇이든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붙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없이 우상숭배적인 신앙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 4:22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그 시대에 하나님 말씀이 희귀하여 그 이상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여기에서 ‘말씀’과 ‘이상’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참조/ 사 1:1; 2:1). ‘말씀’이란 단순한 언어적 의사소통 보다도 훨씬 더 아주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하나님의 의사소통 행위를 말합니다. 그것은 역사적. 자연적, 기적적 현상을 통한 하나님의 의사전달 행위를 포함합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듣는다고 하지 않고, 보았다고 종종 말하였습니다. 반면에‘이상’은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보여주시는 그림언어로서, 당대나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사전달 행위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즉 계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상’이 ‘말씀’이요, ‘말씀’이 ‘이상’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자라던 그 시대, 곧 엘리 제사장이 있던 그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역사를 돌아보면 불순종하는 세대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종종 침묵하셨습니다(참조/ 삼상 28:6; 시 74편; 사 29:9-14; 말 3:6-7). 지금은 제사장 엘리 가문의 타락이 시대의 불행의 원인입니다. 엘리 가문은 제사장으로서 제사행위를 감당하고 있었지만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면 사람들의 삶의 규모가 무너집니다. 질서가 흩뜨러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방자해 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 시대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2절을 보면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갔다’는 말은 나이 들어 단순히 육신의 눈이 어두워지는, 자연적 현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의 영적인 지각이 점점 떨어진 것을 함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영이 밝지 않아서 하나님 계시를 더 이상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백성에게 전해 줄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습니다.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도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흑암의 시대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신가요? 우리의 귀에 생생하게 듣는 육체적 음성이 말하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단체카톡방이나 교회 웹사이트를 통해 아침묵상을 할 때, 기도를 할 때, 예배를 드릴 때 ‘아무개야’부르시며 말씀하시는 음성이 있으십니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예배를 드리며 봉사를 합니다. 예수를 믿은 지 오래 되어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엘리 제사장에게도 하나님의 음성이 희귀해서 그 집안이 멸망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받은 직분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배의 자리에 와 앉아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이 여러분에게 들리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설교를 듣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는데도 절실하게 내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찬송가를 불러도 기계적으로 부를 뿐 내게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란 존재가 그저 희미하게 느껴집니다. 영적 위기입니다. 지금 아주 위험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희귀해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비극 중에 비극일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
이런 시대에 여호와의 말씀이 아이 사무엘에게 나타났습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새로운 말씀 선포자로 떠오르고 있음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일하심은 항상 이러하십니다. 지식과 경험이 많고, 일에 숙련되어 노련한 엘리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 어린 소년에 불과한 풋내기 사무엘을 불러 사용하십니다.
누가복음 10:21절을 보면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 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말씀을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또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계시는 자기 힘으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22절을 다시 보면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엘리 시대 때 현직 제사장들인 엘리와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인 사무엘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의 시대가 이제 끝이 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린아이인 사무엘에게 어떻게 말씀을 나타내셨습니까? 먼저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자신을 부르는 줄 알고,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여기서 사무엘이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말은 지식적으로 몰랐다는 뜻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개인적 체험을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아직 여호와를 직접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은 지금까지 여호와의 음성을 직접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부르심을 알아듣지 못하고, 엘리에게로 달려 간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 엘리도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인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달려온 사무엘에게 자신이 부르지 않았다고 하며 가서 자라고 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무려 그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을 알고, 사무엘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준비란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실 때 ‘여호와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라는 것이었습니다.(9절)
사무엘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서 맡겨진 사명을 순종하여 감당하였습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는 사무엘과 함께 하시고,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러지지 않게 하셨습니다.(19절) 드디어 말씀이 희귀한 시대가 끝나고, 다시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최북단 단에서부터 최남단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습니다.(20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21절) 그래서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 되었습니다.(4:1)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어린 사무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제 온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그가 하나님이 세운 참된 선지자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3. 사명자
사사 시대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구절이 사사기 17장 6절과 21장 25절 말씀입니다. (삿 21:25)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저마다 멋대로 행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던 시대, 그것이 바로 사사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있어서 사사 시대는 한 마디로 ‘재앙’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은 크게 실패하였습니다.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져서 언약에 불성실한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과 거의 구별이 안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혼란한 시대를 끝내 준 사람이 선지자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자기 소견대로 생각하고, 자기 소견대로 행동하던 혼란한 사사시대를 끝내고 영적인 새 질서의 시대를 연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였고, 왕정 시대를 연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또한 블레셋의 침략 시대를 끝낸 사람입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결코 패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종교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에 빠져서 더 이상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을 때 그들은 전쟁에서 계속 패했습니다. 쫓겨서 산속이나 동굴 속에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는 여호와의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미스바 금식기도집회를 선포하며 백성의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여 전투에서 크게 승리합니다. ‘그날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다’(삼상 7:10, 13). 사무엘은 블레셋의 침략과 압제 시대를 끝내고 이스라엘의 독립 시대를 연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은 또한 다윗 왕국의 새 시대를 연 사람입니다. 다윗은 오실 메시야를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사무엘은 메시야 시대를 연 사람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진행하시는 구원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어드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르심 받은 목적 대로 살아간 사명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고 구원 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가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 가게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우주적인 계획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메시야가 탄생하게 하시고, 그리고 메시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승천하시고, 보좌에 앉으시고, 장차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냐? 그것은 결국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하나님의 시민,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즉 혈육으로 이루어진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피로 구속함을 받은 참 이스라엘, 교회를 목표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우리를 동참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사단에 속하였습니다. 사단에게 속아서 물질과 정욕의 종이 되어 세상 헛된 것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영적으로 캄캄한 흑암에 갇혀 있었습니다. 걸려 넘어져도 무엇에 걸려 넘어지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더러움과 방탕에 뒹굴어도 염치와 수치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단의 권세로부터 건져 주셨습니다. (골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흑암의 권세에서 빛의 나라로, 사탄의 노예생활에서 은혜의 왕국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나라로 만들어 만방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입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결론:
오늘 이 시대를 영적으로 볼 때 사사시대와 같이 혼탁하고 혼란한 시대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여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펼치며 살아가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전 사람이지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을 보십시오.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을 정확히 그려주지 않습니까? (딤후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들은 진리에 제제를 받거나 통제 아래 놓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대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감각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심지어 말씀을 들어도 자기 입맛에 맞는, 자기 귀를 긁어줄 수 있는 말씀을 가려 듣습니다. 듣기에 딱딱하고 거칠고 걸림돌이 될만한 말씀은 부담스러워 피합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더 무력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시대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상실하였고 오히려 세속화되어 세상을 좇아갑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교회는 비판과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과연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전진하며 확장되어가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 두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비록 미약하지만 부족하지만 그 부르심에 따라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021년 한 해 동안 우리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사는 사명자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등불은 켜져있고
삼상 3:1-3 / 박신진목사
흥청망청 파티장이 젊은이들로 붐비고 있다. 한 젊은이가 그곳에서 나와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박기 시작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바닥을 박치기 할 때 마침내 바닥으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보던 한 여자가 깜짝 놀라 급히 구급차를 불렀고 이 남자는 병원에 실려간다. 이 젊은이는 몇 바늘을 꿰매고 치료를 받았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큰일 날 뻔하였다. 잘못했다가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이 남자의 행동은 우울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이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남자는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의 영향력 있는 사람 100위 안에 들었으며, 할리우드의 출연료를 가장 많이 받는 배우 4위에 오르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바로 브래들리 쿠퍼, 아카데미 후보에 아홉 번이나 오른 명배우였다. 배우 브래들리는 앞에서 말한 그런 침체기를 겪으며 인생이 요동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조지 타운이라는 명문대학을 나와 안정되게 살 기대도 있었다. 그는 배우가 될 꿈을 가지고 전문 배우학교에 들어갔다. 이런 노력 끝에 연극배우를 거쳐 영화배우로 성공한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의 나타난 결과를 가지고 쉽게 판단하는데, 그들에게도 어두운 시절, 침체와 혼돈의 시기가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총체적인 침체에 빠질 때가 있다.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일까 싶을 정도로 떨어져 버려서 바닥을 치는 정도가 아니라, 어둡고 더러운 지하바닥으로 떨어져버린 지경이 되는 것이다. 가정에 큰 어려움을 겪거나, 사업상의 어려움이 있었거나, 시험에 계속 낙방하고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거나, 질병이 겹쳐 찾아와 도저히 해쳐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오늘은 어떻게 영적인 침체를 회복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려 한다.
더 답답한 것은 아무 어려움이 없고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흘러가는데 나만 내적으로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힘들어하는 경우이다. 브래들리 쿠퍼처럼 친구들과 파티하다가 그냥 뛰쳐나와 길바닥에 머리를 박치기하고 싶은 상황 같은 것이다. 내가 문제다, 남모르는 내 문제가 심각한 상태인 것이다. ‘너무 힘들어요. 기도해주세요’ 하는 이들이 있다. ‘기도도 잘 안되고요 자꾸 흔들려요.’ 영적인 침체기를 지나는 것이다. 놀라거나 낙심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고 침체를 극복하라. 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이 누구든지 영적인 침체기를 겪을 수 있는데, 이런 영적인 침체가 찾아오면 방치해두지 말고 빨리 극복하여 회복해야 한다.
영적인 침체와 회복
오늘 성서 말씀은 영적 침체가 어떻게 진행되고, 또 어떻게 극복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본문을 2004년판 대한성서공회 관주 해설을 보면, 이렇게 설명이 나온다. ‘시대가 바뀐다는 조짐이 나타난다. 눈이 어두워진 엘리의 모습에서 실로의 제사장직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지금 제사장에게서 영적 침체가 나타나 유다 전체에 어두움이 임한 현실을 보여준다. 여호와의 말씀, 그때그때 하나님이 내리시는 지시를 제대로 전해 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사무엘은 사사시대가 끝나고 영적인 전환기요 공백시대에 활동을 시작하였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무엘 이전시대였던 엘리 제사장 시대는 암흑기였다. 이때 사무엘이 소망의 빛으로 나타나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이스라엘의 예언시대, 즉 왕정시대를 열었다. 사무엘은 영적인 침체기에 등장하여 회복의 주인공이 된 사람이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낮이 있으면 밤이 있기 마련이다. 잘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안 될 때가 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도 있다. 광명한 시절이 있기도 하고 어두운 암흑기가 찾아오기도 한다. 영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늘 기억되는 심령부흥의 시기가 있다. 그러나 심령이 메마르고 영적으로 암울한 시기도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민족적으로도 영적인 부흥기와 쇠퇴기가 교차한다.
그런데, 어두운 밤이나 암울한 시기에 사실은 구원과 희망이 빛이 비쳐오는 것을 성서는 가르쳐준다. 영적인 암흑기였던 엘리 제사장 시대에 사무엘로부터 위대한 영적 회복의 여명이 비쳐오고 있다. 영적인 관점에서 가장 바닥을 칠 때가 가장 중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이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의 뜻에 순종하면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며, 놀라운 부흥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오늘 이스라엘의 영적 암흑시기에 어떻게 영적 침체가 극복되었는지를 본문을 통해 생각해보자. 지금을 영적인 침체의 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정말 그럴까? 사실은 영적으로 갈급하여 가능성이 많은 때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이야말로 기도할 때이고, 젊은이들이 교회로 돌아와야 할 때다! 사무엘 3장은 엘리 시대가 끝나고 사무엘 시대가 시작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영적인 침체와 새로운 부흥이 함께 나타나는 시대이다. 영적인 침체의 모습은 어떠했고, 그것을 극복하여 영적인 회복을 가져오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영적 침체의 현상: 말씀 희귀, 꿈이 사라짐
사무엘 이전시대는 영적으로 침체했는데, 이것은 두 가지 현상으로 나타났다. 말씀이 희귀해지고 이상이 없어지는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언어와 풍습이 다르지만, 지금도 영적인 침체 현상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여러분에게 영적인 침체가 있는가 없는가를 알려면 여러분도 이러한 문제들이 있는가를 보면 된다. 말씀이 메말랐고 희망과 비젼이 사라지는 것이다.
1. 먼저, 그 시대에는 여호와의 말씀의 희귀하였다. 상당한 기간동안 모세도 사사들도 없이, 예언자들의 소리도 없이 이스라엘은 말씀의 메마른 광야를 지나갔다. 그러나 정말 그랬는가? 잘 생각해보면 문제가 있다. 그들에게 이미 오경의 말씀이 전해지고 있었다. 문서화된 형태로 전해진 것은 나중이지만, 분명히 그들의 생활과 예배와 영적인 필요를 채울만한 말씀은 이미 주어졌다. 제사장도 있고 나름대로의 선견자들이나 영적 지도자들이 있었으며 성전이 있었다.
그러면 왜 말씀이 희귀하였는가? 백성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 사사시대와는 달리 말씀을 듣고 행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과거의 말씀을 오늘에 되살리는 노력은 백성들의 몫이다. 사무엘 시대보다는 훨씬 후대이기는 하지만, 성전 연보궤에서 발견한 두루마리 성경 말씀 앞에 통회하고 자복했던 요시아왕 시대는 영적인 부흥의 시대가 되었다. 포로 잡혀갔다 돌아와서 수문 앞 광장에서 학사 에스라의 읽는 말씀을 종일 서서 들었던 이스라엘은 위대한 영적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말씀을 서서 듣는 열심을 회복하라! 말씀을 듣고 회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오늘날도 사무엘 이전 시대와 똑같이 말씀은 있으나 말씀이 희귀하다! 이 무슨 현상인가? 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가 변화되기를 바란다. 말씀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소낙비는 오는데 그릇을 엎어놓으면 한방울도 담길 수 없다. 말씀을 아멘으로 받고 말씀을 놓치지 않고 붙들려는 몸부림을 회복하라! 뼈를 깎는 노력으로 말씀을 생활 속에 적용해야 한다. 사무엘은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하였다. 이런 말씀에 대한 집중, 말씀 사모함이 있을 때 영적 침체가 극복되었다!
2. 다음, 영적인 침체는 꿈이 없고 비젼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시대는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꿈과 비젼이 잘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 그냥 먹고 사는 일에 바빠서 살았다고나 할까,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루실 세상과 인생에 대한 기대와 떨림이 없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정말 이 1절 말씀은 그 시대를 한마디로 정리하는 ‘뼈 때리는’ 말씀이다. 그냥 하루하루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일상생활을 영위해갔다. 사람들이 영웅을 꿈꾸지 않고 위대한 도덕을 상상하지 않은 채, 그냥 배부르게 먹고 편하게 사는 일에만 몰두하게 될 때, 그때를 우리는 영적 침체의 시대라고 부른다.
요셉은 꿈의 사람이었다. 야곱은 어린 요셉이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하니까, 아들에게 묻는다.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창37:10) 여러분은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사람은 꿈꾸는 것 이상을 살 수는 없다. 꿈은 어린 아이가 끌고가는 황소의 코뚜레와 같다. 아이는 황소를 이길 수 없지만 코뚜레에 꿰어가면 힘센 황소를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과 같이 주 안에서 꿈을 가지면 삶을 위대하게 끌고 갈 수 있게 된다. 요엘의 예언에 의하면, 여호와의 영이 임하면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다(욜2:28). 늙은이도 꿈이 없고 젊은이조차 이상을 보지 못한다면, 그 시대를 우리는 침체의 시대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면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체결하시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동서남북을 바라보라”(창13:14), “뭇별을 보라”(창15:5)였다. 보라, 보아라, 비젼을 가져라. 막연하고 너무 큰 것이라도 자꾸 보고 품고 희망하면 그만큼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 시대의 영적 침체 이유는 인간적인 생각, 세속적인 생각으로 빨리 타협해버리는 데 있다. 영적인 침체는 곧 비젼의 침체이다. 침체된 영혼은 위대한 꿈과 비젼을 품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전 세대의 신앙인들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꿈들을 품었다. 하나님이 이루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너무 이상주의적이다. 너무 실현가능성이 없다! 그런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꿈이 도처에서 현실이 되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우리는 위대한 꿈을 간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영적인 침체를 극복하는 길이다. 신앙인은 벽을 문이라 하고 기도해서 문을 내는 사람이다. 광야에 길을 내고 마른 땅에 샘을 파고야 만다. 여러분의 비젼이 이런 능력을 가질 때 침체는 극복된다.
침체의 극복: 영적 회복
영적인 침체가 극심했을 때, 이스라엘이 영적 암흑기에 빠졌을 때 침체를 극복하고 영적인 회복을 가져온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다. 여러분도 사무엘처럼 영적 회복의 주인공이 되시라. 사무엘의 역할은 등불을 켰다는 데 있다. 어두운 시대에 제단의 등불을 켰기에 영적인 침체기를 끝내고 회복의 아침을 열었다.
❶ 사무엘은 여호와를 섬겼다. 섬겼다는 말씀은 일했다는 말이다, 주님을 위하여 노동했다. 교회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 필요하다. 죄인과 일꾼이다. 죄를 회개하며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아져야 교회가 은혜스러워진다. 자기 의와 영적인 교만에 빠져서 잘난 척하는 사람이 많으면 교회는 시험에 들고 영적으로 메말라진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죄 고백이 있는 곳에 사죄하는 은혜의 보혈이 흐른다.’ 마음 깊은 곳에서 죄인의 통회와 자복이 터져나오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
또 교회에는 회개한 죄인들이 모두 일꾼이 되어 섬겨야 한다. 교회 왜 다니는가? 정답은 ‘일하러 다닌다’ 이다. 여기에 불만이 있으면 아직 여러분은 바른 믿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일하느라 수고했는데 교회에 와서는 목사님이 섬기고 전도사님이 일할 것이지 우리가 왜 일해야 하느냐 하는, 왕자병 공주병에 걸린 사람은, 죄송하지만 영적으로 메마른 사람이다. 교회에서 일하는 재미를 모르면 필경 마귀의 시험에 빠진다.
‘예배한다’는 말은 동시에 일한다, 섬긴다는 말도 된다. 영어로 예배를 ‘worship service’라고 하지 않는가! 예배하는 성도는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 하나님을 섬긴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섬기도록 가르칠 책임이 교회에는 있다. 성전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어린 사무엘이 있었기에 한밤중에도 제단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참 기막힌 말씀이다! 섬기는 한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했다! 사무엘뿐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❷ 영적 회복은 등불을 켜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3절,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이 말씀은 사무엘서 전체에서 등불처럼 빛나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제단 등불이 꺼질 때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가 버렸을 때, 제사도 없고 레위인들도 성전을 떠나가 버린 적이 있다. 이 시대도 거의 그런 상황까지 갔으나,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등불을 켜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등불은 하나님이 켜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등불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켠다. 하나님은 제단에서 인간이 켜는 등불을 당신의 등불로 비추신다.
기도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자. 여러분 가정에 기도의 등불이 켜져있는가? 여러분은 새벽마다 제단에서 기도의 등불을 켜고 있는가? 산 위에서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였을 때 여호수아의 군대는 아말렉과 싸워 승리한다.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깨어 기도하심으로 십자가를 준비하였다. 예루살렘교회가 박해를 받으면서도 깨어 기도할 때 베드로가 살아 돌아온 역사를 우리는 안다.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생활에 기도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
여러분은 애써 어두움을 밝히려고 하지 말라. 그냥 등불을 끄지 말고 켜기만 하면 저절로 어두움은 물러간다. ‘왜 이리 내 마음이 어두운지 모르겠어요.’ ‘우리 속회가 영적인 어두움이 가득하네요.’ ‘우리 교회가 영적으로 좀 어두어진 것 같애요.’ 이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거든, 바로 여러분이, 바로 내가 기도의 등불을 오늘부터 켜면 된다.
등불을 켜놓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성전 안에 있었다. 여러분의 생활이 교회 중심이 되게 하고, 여러분의 시간 계획이 예배 중심이 되게 하며, 여러분의 삶의 촛점을 주님의 임재에 맞추어야 한다. 말씀이 희귀하고 비젼이 사라질 때 등불을 끄지 말자.
맺는 말
1997년 칸영화제에서 황급종려상을 수상한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향기>라는 영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튀르키예 사람이 의사를 찾아가 이야기했다. “손으로 몸을 만지면 몹시 아파요. 머리를 만져도 아프고, 다리를 만져도 아프고, 배를 만져도 아프고, 손을 만져도 아파요.” 의사는 신중하게 진찰을 한 후 그에게 이렇게 답해주었다. “그럴 거예요, 당신은 몸이 아픈 것이 아니고, 손가락이 부러졌네요.”
부러진 손가락으로 몸을 만지면, 그곳이 머리이든지 가슴이든지 다리이든지 상관없이 아플 수밖에 없다. 문제는 몸이 아니라, 바로 손가락이다. 부러진 손가락이 모든 문제를 일으키고 고통을 주는 것이니, 먼저 손가락부터 고쳐야 한다. 이 얘기는 우리 삶에도 적용된다.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내 마음이 병들어있고, 영적 침체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러분의 형편은 어떠한가? 침체에 빠져있는가? 총체적인 난국인가, 위기인가? 어려움이 여러 가지가 겹쳐있는가? 어떤 오래된 고질적인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가? 영적인 침체에 빠져있는 것이다! 말씀이 희귀해지고, 이상이 사라졌다. 어떻게 해야 영적인 회복을 가져올까? 등불을 켜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라! 여러분, 교회 중심의 생활, 예배 중심으로 시간을 배치하고, 삶의 초점을 바로 맞추라! 기도의 등불 켜기, 섬기는 자가 되기!! “주여, 지금 우리를 회복의 길로 인도하소서!!” *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세대
삼상 3장 1~10절 / 성홍모목사
새벽기도회 시간에 사무엘상서를 읽고 강해하는 중에 있습니다. 사무엘이란 사람이 활동하기까지는 그의 어머니 한나에 대한 말씀부터 드려야 할 것입니다. 에브라임 산지의 라마다임소빔이라는 동리에 레위 사람으로 고핫의 후손인 '엘가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부인으로는 '한나'라는 여성과 또 하나의 부인이 있었는데, '브닌나'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고 한나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식을 가지지 못한 한나는 여간 고민하고 속이 상하여 지냈습니다. 한 집안에 두 여성이 있으니 서로가 대적하게 되고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자식이 있는 브닌나는 한나의 마음이 상하도록 한나 앞에서 자식 자랑을 늘어놓고 자기는 어머니가 되어 자식들 때문에 한없는 보람과 기쁨을 얻고 있는데, 자식이 없는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사느냐? 노후에 남편 죽고 나면 어떻게 하겠느냐? 별 신경 쓰이는 말을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제사를 드리고 나서 제물의 분깃을 나누어주는데 사랑하는 한나에게는 브닌나에게 주는 것보다 갑절을 주면서 위로하였습니다. 그것을 보는 브닌나는 한나의 마음을 격분시켰습니다. 엘가나라는 이 집 가장은 자상한 사람이고, 무던한 사람이어서 해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어도 가정을 잘 이끌어가려고 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 엘가나의 집은 사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환경입니다. 한 남자에 두 부인이라는 설정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실로의 성막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던 한나는 이제 자식을 주시면 평생 나실인으로 기르겠다고 하는 서원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였던지 입술만 움직이었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응답으로 자식을 얻었으니 그가 유명한 사무엘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자식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생각하셨습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어머니 한나는 이제 하나 얻은 아들을 젖을 떼는 때까지 자기가 길렀고, 바로 이어 성막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성막에서 자랄 수 있도록 엘리 제사장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서원의 기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동기와 자발성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떤 강요나 권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 있다면 즉시 이행하여야 하고, 비록 그에게 손해가 되고 힘이 든다고 하여도 실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산에 거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서약하였으면 파약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대로 이행하여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 서원하신 것이 있습니까? 갚기를 더디 하지말고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여야 합니다. 서원하는 기도는 유대인의 간절한 소원을 비는 습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서원의 기도를 드리라는 명령은 없어도 금하지는 않았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 우리는 서원의 기도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서원의 기도는 강도 높은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도 서원의 기도를 드리고 머리를 깎은 적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대하여 그렇게 무용론을 말하던 바울이지만 서원기도를 드리고 머리를 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로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막이 있었습니다. 벧엘이라는 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세겜이란 도피성이 나오는데 바로 큰 길 옆으로 중간 지점에 실로라는 동리가 있습니다. 이곳은 여호수아의 시대로부터 사무엘 시대까지 언약궤가 모셔진 성막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기면서 실로는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면서 예루살렘이 정치,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사사 시대와 들어와 실로는 아주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무리 제사장들이라고 하여도 자기가 먹을 수 있는 제물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제물로 사용한 고기는 각을 떠서 가마솥에 넣고 삶아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삶은 고기는 싫고 날고기를 내놓으라고 뺏어다가 구워먹었습니다. 제사 드리러 오신 분들이 '무슨 말이냐 먼저 제사를 지내고 나서, 고기는 가마솥에 넣고 삶은 후에 가져가라'고 하면 억지로 빼앗다시피 하여 날고기로 가져갔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마솥에 고기를 삶으면 삼지창을 가지고 와서 푹푹 찍어 가져갔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제사장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였습니다. 이 두 제사장이 성막에 일하는 여인들과 동침하고 타락하여 가는데도 엘리는 두 아들에게 따끔하게 경고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아이 사무엘은 점점 자라나고 있었고,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어떤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찾아와서 무서운 경고를 주고 갔습니다. 삼상2:30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엘리의 집안에서 노인이 없을 정도로 일찍 죽을 것이며,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집에 태어나는 사람은 모두 젊어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엘리는 무감각하였습니다. 통회자복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존중히 여김 받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경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물질,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역을 귀중히 여기고 모든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모른 것처럼 처신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말씀해주지 않아서 몰랐다고 하실 것입니까? 하나님도 처음에는 엘리 집안을 두고두고 영원히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으니까 버리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시대적인 상황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영적으로는 암흑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희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 정도로 나타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것입니까? 당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어둠의 시대였습니다. 영적으로 캄캄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엘리 시대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엘리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 제사장들이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영적으로 나태해졌으며,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엘리의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이것은 엘리 제사장이 연로하여 눈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말이지만, 그 말에는 영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성소의 일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한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찾아와서 "나를 부르시기로 내가 여기 있습니다"고 말할 때에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가서 누우라"고 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무엘이 세 번이나 찾아왔을 때에야 깨닫고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아도 엘리의 영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새대는 어떻습니까? 그야말로 지식이 폭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 신문이나 잡지가 산더미 같이 쌓이고 있습니다. 아침에 배달되는 신문을 전부 읽으려고 하면 하루 종일 걸려도 다 읽을 수 없을 정도가 기사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지식의 폭주입니다. TV를 보는데 채널이 하도 많아서 여기 저기 돌려보면 정말 다양한 지식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내가 서있어야 한다는 그런 뜨거운 생각을 가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4-5)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지식이 폭주하고 다양한 정보가 마구 들어오는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습니다. 부단한 자기 헌신과 노력, 그리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고 성경책을 종일토록 붙들고 사는 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나의 생명을 살리는 말씀으로 들어야 하고, 친근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아직 영적인 체험이 많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말은 구체적인 영적 체험이 없었다는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도 그에게 들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장 엘리와 말씀을 나누셔야 하는데, 아직 어리고도 너무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세 번씩이나 찾아와 부르셨느냐고 물어오는데도 영적으로 침체되고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엘리는 세 번째에 와서야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고 있다고 깨달았습니다. 엘리는 영적으로는 쇠퇴의 길을 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10절에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임하여 서시고 있습니다. '임하여'라는 말은 친히 다가와고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귀한 자세요,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이 날 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을 다 들으면 두 귀가 울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말씀이고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공포와 전율로 귀가 멍멍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장 엘리 집안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먼저 법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길 것이며 실로의 성막이 파괴되고, 엘리의 두 아들은 전쟁터에서 한 날에 죽을 것이며, 엘리의 며느리는 해산하다가 죽을 것이고, 그런 소식을 들으면서 엘리는 98세의 일기로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성막 앞 의자에 앉아 있다가 두 아들이 죽고 법궤는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뒤로 넘어져 뇌진탕인지 심장마비인지 몰라도 죽어야 했습니다.
엘리의 비극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떠한 형편인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이른 것은 그가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고 있으나 금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제물로나 예물을 드린다고 해도 심판은 시행될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자식들이 혹시 저주를 자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막아야 할 것인데 방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아침에 엘리가 사무엘을 불렀습니다. 사무엘이 차마 어른에게 나아가서 자기가 들을 말씀을 먼저 이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어린 사무엘을 불러놓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얼마나 고자세이고 강압적인지 모릅니다. "내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나이 100살을 바라보는 제사장이 이제 10대의 어린 아이에게 너무나 가혹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너 거짓말로 고하면 천벌을 받아라"는 말입니다.
이에 사무엘은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의 집안을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 들은 엘리는 정말 한심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다른 사람 같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당사자인 엘리는 그 자리에 엎드러져야 합니다. 통회자복하고, 우리 가정에 임하는 모든 심판은 저 한사람이 질 터이니 우리 자식들은 살려달라고 하던지, 이제라도 정말 다시 한번 잘하겠다고 금식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들은 말씀이려니 하고 하지 않은 것입니까?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반응이 없습니다. "다 좋은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때 그곳에서 그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의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무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주요 포인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요즈음에 통회자복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헐떡거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노인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아져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중에라도 돌이시키시고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실하게 살아가기 위한다면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 백부장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고넬료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아모스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기갈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고 있었는데 우리는 세상의 소리에 심취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잡을 영역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엘리에게도 말씀하시지 않고, 한참 일하는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에게도 말씀하지 않고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강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베뢰아 교회의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순종하기 위하여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우리는 말씀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서 승리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여호와만 섬기라
삼상 3장 1~10절 / 이성희목사
‘프리메이슨’(Freemason)이란 단체가 있습니다. ‘자유석공조합’이란 뜻인데 이 단체는 ‘사탄숭배조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단체에서는 최고의 인간 우두머리를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라고 합니다. 컴퍼스와 삼각자는 중요한 상징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고, 이집트의 신 호루스의 눈도 중요한 상징입니다. 또 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피라미드입니다. 이 단체에는 상당한 역사적 위인들까지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의 인물들까지 이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고 거명되기도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교황청 안의 인물로부터 상당수의 대주교들까지 연루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외에 숭배의 대상이 있을 수 있습니까?
미국 풀러신학대학교의 교수였던 피터 와그너박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번은 비행기를 타고 남미에 강의 차 가던 길이었습니다. 비행기에 올라 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옆 좌석 사람이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비행기에서 신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그래서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10분이 되도 그 기도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기도가 끝났습니다. “참 반갑습니다. 비행기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옆 좌석의 승객은 “난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놀라서 “그럼 방금 당신이 뭘 했습니까?”라고 했더니 “기도했지요”라고 합니다. “누구에게 기도했습니까?” 다시 물어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태연하게 “사탄에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마을의 사탄숭배자들이 다 함께 한 달 동안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동네의 모든 교회가 다 망하고, 목사들이 다 망하도록 기도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와그너박사님은 “사탄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열심히 교회를 멸망시켜 달라고 기도하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서 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교회를 멸망하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바울 서신 전체에 예수님이란 단어가 219회 나옵니다. 주님이라는 단어가 272회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389회 언급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사탄이란 단어는 10회 나타납니다. 마귀라는 단어는 6회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탄은 상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대결구도를 유지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여호와만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탄은 “나만을 섬기라”고 합니다. 현재도 사탄숭배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탄은 높게 시작해서 낮게 끝이 납니다. 천상의 천사장으로 시작하여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전락합니다. 먼지를 먹고 파리들의 대왕이란 이름의 바알세불이 되었고 이제 밑도 끝도 없는 구덩이 안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합니다. 둘째는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2계명은 1계명의 부속계명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역대상 16:26에는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고 합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신도 없습니다. 모든 신은 헛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만났을 때에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모세가 지팡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모세 자신의 경험, 미디안의 범신적인 사고, 광야의 미신을 다 버리라고 하십니다. 다시 하나님께서는 뱀이 된 지팡이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소유권까지 다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전까지 그 지팡이는 내가 의지할 힘입니다. 내가 겨우 지탱할 지팡이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의지할 힘입니다. 이전에는 내 지팡이이지만 이 후에는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할 때 지팡이는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는 것은 신령한 지혜입니다. 가장 큰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만을 섬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이 지혜의 길잡이입니다. 이 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첫째, 세상을 얻으려는 욕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8절을 보세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라고 합니다. 사탄은 천하만국을 보여주었습니다. 9절입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합니다.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경배하면 다 주겠다고 합니다. 천하만국이 사탄의 것이 아닌데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다 주겠다고 하는 것이 사탄적입니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이라면 욕심나지요. 엎드려 경배만 하면 주겠다는데 욕심나지요. 여러 번 평생이 아니라 한 번만 하면 주겠다는데 욕심나지요. 세상을 한꺼번에 얻겠다는 욕심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개인의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들은 세상을 얻으려는 욕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꺼번에 일확천금을 얻겠다는 욕심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1억 원을 투자해서 100억 원을 벌겠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만일에 벌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수법은 하나님과 어긋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인간의 탐욕을 충족하기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칼빈은 스스로를 야심의 권세 아래 굴복시키는 사람은 머지않아 혼돈의 미로를 헤매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혼돈의 미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음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함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알면 절대 혼돈이 없습니다.
2005년 미국 플로리다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에서는 4미터 급 미얀마 산 비단뱀이 길이가 1.8미터나 되는 악어를 통째로 삼키다 배가 터져 죽었습니다. 세상에도 자기보다 큰 것을 삼키다 배가 터져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예수님을 꼬이는 사탄의 수법은 변치 않습니다. 첫째는 물질을 가지고 유혹합니다. 아담에게는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는 “떡으로 돌을 만들라”고 합니다. 둘째는 명예심으로 유혹합니다. 아담에게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는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셋째는 영적 유혹입니다. 아담에게는 “하나님 같이 될 줄을 아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는 “절하면 모든 것을 주리라”고 합니다.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면서 하나님이 아닌 사탄을 섬기라고 하는 유혹은 지금도 끊임없이 인간에게 도전해 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물질을 동시에 섬기지 못합니다. 옛말에도 충신에게 군주는 오직 하나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에게 주인은 하나이지 않겠습니까? 물질이 주인이 되면 그리스도는 자연히 주인의 자리에서 물러갑니다. 물질의 욕심에서 벗어나면 비로소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고 하나님만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 때문에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왔던 젊은 관원입니다. 이 사람은 재물이 많은 것이 오히려 화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삭개오를 보세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재물을 모두 버렸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를 갚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세리들은 많이 빼앗았으므로 그것을 다 갚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빈털터리가 되었을 이 때 완벽하게 채워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면 물질을 채우십니다. 이 순서를 절대로 바꾸지 말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애국 때문에 살인하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 때문에 핍박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과학이나, 지식이나, 율법을 벗어나야 참 하나님을 만납니다.
락탄티우스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보다 나쁜 것은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아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하나님과 버금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치할 수 없습니다. 지은 자와 지음 받는 것이 어찌 같을 수 있습니까? 세상 것에 마음을 두지 마세요.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세요. 이것이 하나님만을 섬기는 비결입니다.
세상을 다 얻으려는 욕심은 하나님을 잃게 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권력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식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성경을 모조리 다 외우고 있다 할지라도 은혜와 사랑이 없다면 그게 무슨 유익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이 없는 지식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별들을 관찰하고 우주선을 띠우면서 자신의 영혼을 무시하는 오만한 학자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미천한 농부가 하나님을 더욱 기쁘게 하는 법입니다.
둘째, 사탄에게 경배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10절에는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입니다. 아무 것에나 경배하려는 인간의 심리가 있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신을 만들고, 미신을 믿고, 무속이 발달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시대에도 얼마나 우상숭배가 심했는지 나와 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망칠 때 라헬이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쳐 가지고 옵니다. 이 드라빔이라는 것이 집안에 보셔두는 작은 우상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러 호렙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우리를 이끌 신을 만들자”고 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습득한 우상숭배의 모습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농경신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는 번영의 신을 경배하려는 인간의 욕구가 깊이 숨어 있습니다. 우상이란 오랜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태백산에 가면 신 내림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와글거립니다. 미국 애리조나 세도나에 가면 레드락이라는 붉은 돌들로 이루어진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영감을 얻고 기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몰려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엇엔가 기대보려고 우상을 만들고 자연의 영기를 얻으려고 합니다.
케이블 TV에도 보세요. ‘엑소시스트’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귀신을 불러 죽은 사람이 다시 말하게 하고 죽은 이유, 원한, 부탁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미신이나 점이나 궁합이나 작명 같은 것들이 버젓이 공중 매체를 통하여 소개됩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엉뚱한 것에 의지하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상은 우리 우상숭배의 원인이 아닙니다. 우상 그 자체는 그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떠난 모든 예배는 우상숭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면 우상숭배를 하게 되고 우상을 만듭니다. 예배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하며 사람이 드러나면 우상숭배가 되고 맙니다.
사람 숭배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마음이 식어져 갈 때에 우리는 더욱더 인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인기를 얻은 사람들을 숭배합니다. 인기 연예인을 그래서 좋아합니다. 연예인을 보면 환호하고,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습니다. 인기를 얻은 사람들은 동시에 자신의 팬을 숭배하는데 열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기인들이 인기가 떨어지면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자기 앞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다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터지면 그 때부터 죽고 싶답니다. 사람을 숭배하는 것도 인간에게 깊은 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적 우상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 중생했나?”, “방언할 줄 아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 중생했는지 모르고 중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사실은 나도 잘 모릅니다. 뒤에 알고 보니 태어날 때 이미 선택되고 구원받았습디다. 율법에 신앙을 맞추려는 율법주의는 우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에나 절하고 싶은 우리의 심성이 있습니다. 큰 나무를 봐도 절하고 싶고, 큰 바위를 봐도 절하고 싶고, 바다를 보고도 절하고 싶고, 심지어 이상하게 생긴 돌을 봐도 절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혼합주의적인 의식이 이렇게 우상을 숭배하게 하였습니다. 문화인류학적으로 보면 비빔밥, 국밥이 발달하여 말아먹고, 비벼먹는 습관 때문에 모든 것이 섞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무속인이 약 200만 명이라고 합니다. 무속인들에게 들어가는 돈이 일 년에 약 2조 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약 30%가 기독교인들이 가져다주는 돈이라고 합니다. 한국 기독교인의 의식구조를 보면 어디든지 가야하고, 줘야 적성이 풀린다고 합니다.
저의 선친이 목회하시던 교회 이전 예배당의 종탑을 봉헌한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아주 옛날에 돈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봉헌하여 종탑을 세웠는데 대구 근교에 절에 가면 법당에도 그 분의 이름이 크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분은 기독교 천당에 못가면 불교 극락에라도 가야한다고 했답니다. “골라, 골라”는 시장에서나 하는 말이지요.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숭배하고, 섬기고, 예배하는 하나님 제일주의가 우리 믿음의 핵심이며 관건입니다.
버지니아공대 총격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조승희씨는 그의 미니 홈페이지에 ‘Ismail Ax’ 즉 ‘이스마엘의 도끼’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이브라힘 즉 아브라함이 유일신 알라를 믿었다고 합니다. 이브라힘의 아들 이스마엘은 이슬람교도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이브라힘이 우상숭배를 타파하기 위하여 도끼로 예배소의 작은 우상들을 죄다 파괴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장사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우상을 모두 도끼로 찍어 없앴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긴 사람들은 수 없이 많습니다. 성경의 다니엘은 당시에 왕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다가 죽을 뻔 했습니다. 서머나의 폴리캅은 당시에 로마 황제 숭배가 심했지만 하나님만을 섬기다가 화형을 당했습니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천황숭배가 있었습니다. 사람을 숭배하려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사무엘상 3:1에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합니다. 아이 사무엘은 어렸지만 누굴 섬길 것인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섬길 자를 분명히 아는 것은 놀라운 지혜입니다. 흔히 일반 사람들은 사람을 섬깁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 누구도 섬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보러 왔던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할 줄 아는 지혜를 가졌습니다.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세상에 오시는 왕이라는 사실을 아는 신령한 지혜를 가진 것입니다.
결론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한 마지막 말을 들어보세요. ‘여호와만 섬기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여호수아 24:14에는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합니다. 15절에는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합니다. 24장은 온통 여호와 섬김의 장입니다. 이 때 백성들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나이다”, “여호와만을 섬기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저는 우주를 보고 싶지만 저는 못 갑니다. 영어도 가야하고, 피아노도 가야하고, 미술도 가야돼요.” 어느 초등학교 아이의 고민입니다. 가장 가야 할 곳을 못가면 아무리 많은 곳을 가도 선하지 못합니다. 최우선을 빼놓고 하는 그 무엇도 선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예배가 가장 소중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이 제일입니다. 아무리 있어도 믿음이 제일입니다. 아무리 섬겨도 하나님이 우선입니다. 여호와만 섬기며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신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소명을 받았다는 확신
삼상 3장 1~10절 / 박찬길목사
셰익스피어의 일화 중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셰익스피어가 하루는 런던에 있는 유명한 레스토랑에 갔습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그 안에 있던 손님들이 일어나서 경의를 표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서 명성있는 분이기 때문에 반갑게 맞이한 겁니다. 그 순간 현관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젊은 청년이 들고 있던 빗자루를 집어던지면서 탄식하는 거예요. 이 모습을 셰익스피어가 보고는 들어오던 길을 멈추고 그 청년에게로 돌아갑니다. 현관에서 탄식하고 있던 젊은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묻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젊은이답지 않게 왜 탄식을 하고 있어?"
청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처럼 원통하고 한탄한 일이 없습니다. 선생님이나 저나 똑같은 남자로 태어났는데 선생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저는 한낱 선생님이 지나간 발자국을 쓸어야 하는 청소부에 불과하니 저의 신세를 생각하면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이 말을 들은 셰익스피어는 젊은 청년의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이렇게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자네는 결코 내가 지나간 발자국을 쓸고 있는 것이 아니야. 자네는 빗자루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의 한 부분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거야. 나는 펜대를 들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우주의 한 부분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을 뿐이야. 자네나 나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똑같은 사람이야" 이 말을 들은 젊은 청년은 환하게 웃으면서 놓았던 빗자루를 들고 다시 일을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중세의 종교개혁자들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소명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일을 맡겨주셨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는 겁니다. 정확하게 본 거지요. 소명이라는 말은, calling은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부르셔서 목사가 되고, 하나님이 부르셔서 선교사가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 일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부르셔서 저 일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보면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죄를 짓고 나무사이에 숨은 아담을 부르시지요.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동생을 죽은 가인을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가인아, 네 동생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지요.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은 성전에 있는 이사야를 부르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울을 부르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예수님도 제자들을 일일이 부르십니다. 로마서나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하나님을 "부르시는 이"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4에서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가 기도하여 얻은 아들입니다. 원래 한나가 아들이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들 하나만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서원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게 사무엘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은 후에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바칩니다.
어느 날 사무엘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이 그 소리를 듣고서는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갑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부르지 않았다는 거예요. 사무엘이 잠자리로 돌아가서 잠을 자는데, 하나님이 또 부르시는 거예요.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이 듣고는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갑니다. 제사장은 부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세 번의 부름을 받는데도, 사무엘이 듣지 못합니다. 이때에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줄을 깨닫고 사무엘에게 알려 줍니다. "누가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세요.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라고 알려주고서는 돌려보냅니다.
그런 뒤에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 오셔서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알려 준 대로 대답합니다. "주님 말씀하세요.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으로 듣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사무엘의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나서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제사장이 되고 선지자가 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주님의 일을 잘할 수 있는 비결을 오늘 본문에서 찾는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성도가 세상에서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을 오늘 성경에서 찾는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불러주셨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이 일을 맡겨주셨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Calling 소명의식이 있어야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잘 감당하는 줄로 믿습니다.
보세요. 주님의 일은 교회에 다닌다고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사무엘이 성전에서 삽니다. 사무엘에게는 성전이 자기 집이요, 일터요, 놀이터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무엘에게 소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콜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교회로 부르셔서 이 제단에 오게 되었고,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 일을 하게 되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 교회가 수도 없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이 교회입니까? 샌프란시스코에 많은 교회가 있는데 왜 좋은교회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좋은교회로 온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셨기 때문에 온 겁니다. 좋은교회에 가서 신앙생활해라. 좋은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좋은교회에 가서 은혜 받고, 좋은교회에 가서 헌신하고, 좋은교회에 가서 충성하고, 좋은교회에 가서 섬기라고 불러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좋은교회에 와서 말씀 듣고 은혜 받고 헌신하고 충성하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몇 가지의 원칙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보내 주신 교우들과 함께 목회하자는 겁니다. 이제껏 제 손으로 교우들을 끌려고 하지도 않았고 끌지도 않았습니다. 환영카드를 억지로 쓰게도 하지 않았고, 강권해서 심방하지도 않았어요. 교회에 오셨으니까 감사해서 땡큐 전화하는 것 외에는... 찾아가서 우리교회에 오서 신앙생활하자고 강권하지 않았습니다.
개척 초기에 어느 교인이 왔어요. 그 분이 등록을 안 해요. 저도 가만히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교인이 그래요. "목사님, 심방해야 하잖아요. 심방 하세요" 제가 심방하지 않았어요. 개척 초기였으니 한 명의 교인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도 인위적으로 인간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하면 목회가 안될 것 같았는데... 되더란 말입니다. 이유가 뭔지 아세요? 하나님이 불러 주신 교우들이 있거든요. 지금도 변함이 없는데, 하나님이 보내주신다는 확신이 있어요. 여러분이 그런 분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귀하고 귀한 분들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은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소명이 있어야 자신이 맡은 부분에서 최선을 다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일은 내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부르셔서 시키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맡겨주셨기 때문에 교사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부르셔서 맡겨주셨기 때문에 찬양대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부르셔서 맡겨주셨기 때문에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음악의 대가로 불리우는 작곡자 바하가 있습니다. 이 분이 성 토마스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헌신하고 있을 때에 주일마다 부르는 성가대의 곡을 작곡했습니다. 출판한 것도 아니고 작곡료를 받는 것도 아닌데 매 주일마다 보수도 없이 작곡해서 불렀다고 합니다. 그분은 자신이 하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했어요. 훗날 바하가 음악의 세계를 이룩하는데 있어서 매주일 작곡했던 그 곡들이 주가 되었다는 겁니다. 바하가 만든 265개의 오르간곡이 있습니다. 263개의 합창곡이 있습니다. 162개의 피아노 곡과 수백 개의 오르간 곡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매주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작곡했던 것이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직장에서의 일도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직장으로 불러 주셨다는 콜링이 있어야 직장생활을 잘할 수가 있는 겁니다. 직장은 돈버는 곳이 아닙니다. 밥 벌어먹기 위해서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일하라고 불러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해야 하는 겁니다. 앞으로 우리 교우들은 직장에서 일할 때에 하나님이 나를 보내주셨다는 확신을 갖고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직장에서 복의 통로가 되는 겁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문창모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96세를 사시면서 7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인술을 펼친 분입니다. 한국의 의료계는 물론 교육계 정치계 종교계 등 각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강원도 원주에서 문 이비인후과를 개원해서 43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진료를 하셨어요. 이 분이 생전에 계실 때에 진료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얼마나 사명감이 투철한지 모릅니다. 언젠가 국회의원 할 때에는 제가 거기에서 40여분 떨어진 곳에서 목회를 했어요. 경기도 여주라는 곳인데, 마침 어느 교우가 치료받을 일이 있어서 갔었는데 안 계신 거예요. 어디 가셨냐고 했더니 국회에 가셨대요. 조금만 기다리면 오신다고 해서 기다리는데 나중에 오시더라구요.
서울에서 원주가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회 일정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려와서 진료를 하시는 거예요. 저에게 한 시간 늦게 왔다고 얼마나 죄송해하시는지, 너무 겸손한 분이에요. 이 분은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진료를 했는데, 시골지역에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위하여, 직장에서 일하느라고 시간 내기가 힘든 환자들을 위하여 매일같이 아침 6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장로님, 은퇴하실 때가 훨씬 지났는데, 진료를 계속하고 계십니까? 이제는 좀 쉬셔도 되지 않습니까?" 장로님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이 나를 의사로 부르셔서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눈감는 순간까지 진료를 멈추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의사가 된 것이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거예요. 그 소명을 감당하려고 죽기까지 진료를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소명이 있으면 사역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기 전에는 성전에 머물러 있었어요. 엘리 제사장이 시키는 일만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소명을 받고 나서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할 일을 알려주시잖아요. 엘리 아들들이 계승해야 할 제사장직을 계승했습니다. 사사시대를 마감하고 왕을 세워 왕정시대를 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사로,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이 모든 일을 감당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어요. 그야말로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데 어떻게 대충 대충합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데 바쁘면 쉬고 빠지고, 시간 여유가 있으면 하고..., 사무엘은 아니에요. 사무엘은 소명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앙생활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하나님의 콜링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헌신하고 충성했습니다.
몇년 전에 이 지역의 청년들이 연합수련회를 갔었는데, 저도 강사로 갔고 저녁 집회 강사로 남가주 사랑의교회의 오정현 목사님이 오셨어요. 지금은 서울로 가셨지요. 제가 목사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남가주 사랑의교회는 40일 특별새벽기도회를 매년마다 한답니다. 어느 교우가 1시간 거리에 살고 있으면서도 40일을 개근했다는 거예요. 오 목사님이 감사하기도 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려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성도님, 교회가 멀어서 힘드셨지요." 이 교인이 하는 말이 "목사님, 교회는 멀지 않습니다. 집이 멉니다." 교회가 먼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집이 멀다는 거예요.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교회로 보내주셨고, 이 일을 맡겨주셨기 때문에..., 그 일이 새벽기도회이든 뭐든 충성하는 겁니다. 이것이 소명을 받은 사람의 자세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소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많은 성도들이 소명의식이 없이 살아갑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세 번씩이나 듣지 못했던 원인을 성경에서는 몇 가지로 말씀합니다. 1-2절에 보면 첫째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엘리 제사장의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시대상을 말해주는 겁니다. 종교가 타락했어요. 침체되었어요. 예언자의 자취도 끊어졌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영적으로 타락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아예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얼마나 영적으로 침체되었는지 지도자마저도 영적인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총체적으로 영적인 암흑기였다는 겁니다.
여러분, 성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안테나가 하나님께로 곧게 향해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일치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내 심령 속에 들리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입술의 언어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말합니다. 밥 먹었냐? 어디에 있다가 왔니? 교회 가자. 이것이 입술의 언어입니다.
둘째는 머리의 언어가 있습니다. 신문을 보거나 어느 책을 보거나 성경을 읽고서 알게 된 것을 서로 교환하는 언어입니다. 신문을 보니까 이런 일이 있던데, 어느 가게에서 세일을 하던데..., 정보를 교환하는 언어가 머리의 언어입니다.
셋째는 가슴의 언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입니다. 누가 아프데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병원에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넷째는 영혼의 언어가 있습니다. 이 언어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말은 하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영혼 깊은 곳을 터치해주셔서 그것이 인간의 언어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영혼의 언어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심령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면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런 일을 해라. 이렇게 살아라.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도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음성이 있을 겁니다. 이것이 영혼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혼의 언어를 들을 수 있도록 심령을 맑고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인본주의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자신의 철학과 가치기준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방해하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생각할 때에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소명을 깨닫지 못해도 안 되고, 소명이 넘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명의식을 깨닫지 못하면 곤란합니다. 신앙생활이 너무나 힘듭니다. 소명의식이 없으면 한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고민하지요. 이 교회로 갈까 저 교회로 갈까... 이 교회 저 교회 기웃거리게 됩니다. 소명의식이 없으면 주의 일을 해도 열정이 없습니다. 하는 둥 마는 둥 하지요. 영적으로는 얼마나 불쌍한지 모릅니다.
소명의식이 넘치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 맘대로 합니다. 소명의식은 자기 생각하고는 다른 것인데, 소명의식이 지나치면 자신이 있어야만 뭐가 되는 줄로 알아요. 자신이 중심에 서야만 되는 줄로 알아요. 그러다 보니 자기 분수도 모르고 간섭하지요. 월권을 하지요. 평생 잊지 마세요. 소명을 받았다고 해도 내가 없어도 됩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들이 참 열심히 하시는데 죄송하지만 권사님이 없어도 좋은교회는 됩니다. 박목사가 없어도 좋은교회는 됩니다. 주님의 교회잖아요.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주님이 역사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소명을 받아서 시작해야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러한 소명이 있어야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거예요. 소명감이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 뿐만이 아니라 직장에서도 여러분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소명은 너무너무 중요한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가정과 교회와 세계를 위하여 일하고 있다는 소명이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세상의 어떠한 일이라도 기쁨으로 즐겁게 감당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에 어떤 일이든지 능력있게 감당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한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질 때에 내 삶이 근사하고 아름다운 거예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을 깨달으시고 죽도록 충성하여 잘했다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무엘에게 소명을 허락하셔서 사용하셨듯이 저희들에게 소명을 주셔서 불러주시고 주의 일을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잘 감당하도록 능력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일도 잘 감당하게 하시고, 직장에서의 일도 잘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때
삼상 3장 1~14절 / 김영준목사
영화 늑대와의 춤을 보면 주인공 케빈 코스트너가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 미국 서부 개척지에 부임하기를 자원합니다. 당시 미국의 영토는 아직 애리조나 정도까지였고 그 변방을 프론티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케빈 코스트너가 마차에 보급품을 가득 싣고 며칠이 걸려서 프론티어에 도착합니다. 그는 미국 육군 장교의 자격으로 거기 부임한 것이지만 원 맨 포스트, 한사람으로 구성된 부대를 만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타지에서 들어오는 소식을 접하기도 어렵고 상부의 지시를 받기도 어렵습니다. 지금처럼 전화나 무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만일 누가 소식을 전하려면 며칠 동안 말을 타고 와야 됩니다. 그런 외딴 막막한 평원에 초소를 만들고 홀로 근무를 하면서 줄거리가 전개됩니다. 저는 가끔 목회를 하면서 캐빈 코스트너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처럼 생겼다는 말은 아니고 그처럼 먼 변방에 초소를 만들고 보초를 서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본부로부터 멀리 떠나와 있고 상부에서 연락이 오지 않습니다. 세상 다른 곳에는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쟁을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그리고 제가 근무하는 초소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을 해야 되는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태평양의 외딴 섬에 일본군 패잔병이 살아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있었지요. 그들은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전쟁중인줄 알고 정글 속에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목회전선에서 목회하는 목사들도 그렇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물론 세상의 소식은 듣지요. 우리가 소속된 노회도 있고 총회도 있고 주변에 교류하는 목회자들도 있고 또 한국교회 돌아가는 소식을 접합니다. 그러나 그걸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 그건 어디까지나 뉴스일 뿐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오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상부에서 ‘지금 우리는 이런 상태에 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해야 되니까 너는 이렇게 해라.’ 이렇게 말을 해준다거나 ‘우리는 이 방향으로 나가야된다.’라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유일한 메시지는 네가 알아서 하라는 거예요. 알아서 하라. 노회장도 계시고 총회장도 계시고 한기총도 있고 NCC도 있고 이런 단체들이 많이 있지만 또 한국교회의 어른역할을 자처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행사도 많이 열립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정말 어른을 찾기가 어렵고 리더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조금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러나 필요한 얘기이고 언젠가는 해야 되는 말입니다. 한국교회 형편에 대한 말이에요. 제가 평소에 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는 것이지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하려고 합니다.
1. 지도자들이 지도력을 상실했습니다.
한국교회는 큰 교회들이 많아요. 많은 목사님들이 목회를 크게 일구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브랜드 네임이 됐어요. 외국에도 잘 알려진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일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들에게 능력이 있고 들을만한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향력만으로도 얼마든지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영향력이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한때는 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그들을 바라보고 흉내 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빛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몇 가지를 살펴보면 첫째로 본인들은 늘 남을 가르치려고만 하고 자기들은 배우려고 하지 않았어요. 늘 남들에게는 말을 하는데 본인들은 남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누가 감히 그런 위치에 있는 분들에게 바른 소리를 할 수 있고 또 그 말을 누가 들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그들의 메시지에 담긴 왜곡현상이 심화되어도 그것을 바로잡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교회가 숫자적으로는 성장했는데 그것이 왜곡된 신학과 왜곡된 신앙에 근거한 것입니다. 교회가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윤리적인 개혁이 있기 전에 신학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되는데 지금 한국의 대중화된 기독교 브랜드는 그 신학이 심히 왜곡되었어요. 그러나 그 위에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돌이키는 것은 아주 어렵게 된 것입니다.
2. 그들은 교회의 성장을 하나님의 축복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이만큼 성장한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방식을 기뻐하시는 모양이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어떤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면 그 영화의 내용이 반드시 옳고 바르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뿐이지요.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면 그 내용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뿐입니다. 인터넷에 접속 숫자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그 내용이 옳은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군중을 먹이실 때는 남자만 오천 명이 있었지만 십자가 얘기를 하시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얘기입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오히려 대중은 하나님의 뜻에 가까워질수록 불편해하고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형교회 주역들은 기독교 신앙의 대중화에 성공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대중화에 성공한 것뿐이지 예수님의 정신을 가르치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른들이 후배들 제자들에게 해 줄 말이 이제 별로 없게 된 것입니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은 여러분도 열심히 해서 교회를 성장시키라는 것입니다. 목회의 성공은 숫자에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많이 모아라, 이 말밖에는 해 줄 말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도 설렁탕집 ․ 치킨 집과 같은 원리에 움직입니다. 경쟁 ․ 시장경제의 논리 ․ 성공의 논리에 따라서 움직이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목회전선의 젊은 목사님들도 눈이 혈안이 돼서 어떻게든지 교회를 성장시켜보려고 남에게 뒤질세라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불행한 현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외딴섬에 병사들을 방치하고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원래 소스와의 연결이 끊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예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종들에게 하신 말씀이 그저 목회 열심히 해서 교회나 부흥시켜라 이것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이 하고 싶은 말씀이 그것뿐이겠습니까. 상부에서 오는 지시사항이 그것뿐이겠습니까. 그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국의 개신교는 그야말로 오합지졸입니다. 모래알과 같습니다. 우왕좌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보다는 목회자 개인의 개성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목회자가 이런 스타일이면 이런 쪽으로 가고 저런 스타일이면 저런 쪽으로 갑니다. 감독하는 사람이 없어요. 지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마다 자기가 주인이에요.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됩니다. 불쌍한 건 교인들입니다. 가톨릭교회가 부러워요. 가톨릭교회는 절도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질서가 있습니다. 성당과 성당 간에 차이가 없습니다. 이 성당에 갔다가 저 성당에 가더라도 비슷한 신앙칼라와 비슷한 메시지와 같은 미사, 같은 목적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우리나라 가톨릭만 그런 게 아니고 전 세계가 그렇습니다. 일관성이 있습니다. 지도력이 먹힙니다. 그렇다고 그게 반드시 옳다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도력이 통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제가 목회자에 대해서 말씀드렸지만 일반 성도들은 더 나으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장단을 맞춰줬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중세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판 것에 대해서 비판하지요. 중세 가톨릭 지도자들이 얼마나 타락했으면 면죄부를 팔았을까. 그런데 우리가 간과한 것은 사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판 것입니다. 일반 교인들이 사줬기 때문에 그걸 판 게 아닙니까. 왜 판 사람은 욕하고 사준 사람은 생각하지 않습니까. 일반 교인들이 면죄부를 사면 천당 보내준다니까 우르르 몰려서 산 게 아닙니까. 그들이 사기를 거부했다면 팔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들이 실수하는 것이 있다면 교인들이 그것을 허용했기 때문이요 장단을 맞춰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성도들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세상에 더 이상 계시지 않지만 당신의 백성들을 홀로 방치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래서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보혜사를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상부의 지시를 따라가는 것은 결국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길입니다. 성령의 인도 하에 감독도 있고 교단도 있고 리더십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 성령께서 신부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결국 우리가 교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은 교회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교회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잘못하고 아무리 실수를 해도 결국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요 궁극적으로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결국은 승리할 것을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들으니까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을 불러서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엘리는 어른입니다. 지도자입니다. 제사장입니다. 반대로 사무엘은 아직 아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엘리 제사장이 들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는 못 듣습니다. 인간의 신앙적인 직분과 지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그 당시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다, 이건 오늘날 우리의 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바다에 물이 많지만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이 시대가 말이 많지만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은 희귀한 것입니다. 정보의 홍수시대를 이루지만 거기에 참된 생명의 말씀은 드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행과 트렌드에 따라서 판단력을 잃고 이리저리 우르르 움직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제 그만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절제를 가르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갈 때까지 가는 사회가 됐어요. 어느 누구도 이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일합시다 라든가 이제 우리가 우리 본연의 자리로 돌아갑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전부다 자기의 감정에 치우치고 자기의 열정이면 문제가 해결되는 줄 알고 소원이 강하면 하나님도 들어주실 줄로 생각하고 떼를 쓰면 통할 줄로 생각하는 사회가 됐어요. 어느 누구도 이제 그만 스톱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의 욕심을 믿음과 혼동해요. 그래서 욕심을 따라 구하면서 그게 믿음이라고 주장해요. 더 크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줄로 알아요.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욕심을 따라 구하는 한 목이 터져라 외쳐도 하나님은 그것을 듣지 않습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인간의 욕심과 믿음이 같은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욕심을 따라 구하는 것을 마치 믿음인 것처럼 가르치는 목회자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추기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정신을 가르치는 게 아니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 어린 사무엘이 세상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보니까 하나님은 사무엘 개인의 신상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당신이 이스라엘에 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1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문제에 연연해하는 사람이어서는 안됩니다. 자기 문제가 있지요. 하나님이 거기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의 문제, 한 사람의 관심사에 대해서만 말씀하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나라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고 세상에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또 교회가 지금 어떤 형편에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무관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자기 일에만 연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한 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한 손에는 신문을 들어야 된다고 했는데 그 말은 세상의 돌아가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웃의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되요. 나와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형편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나와 인종이 다른 나라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되요. 다른 나라에서는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고 있을까, 일본 선교, 중국의 교회는 지금 상태가 어떠할까, 왜 유럽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고 돌아서고 있는가. 이건 남의 일이 아니에요. 만약 이게 남의 일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선교를 할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남의 일인데요. 어린 사무엘에게도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하시고 자기 스승 엘리제사장에 대해서 심판할 것 까지도 하나님이 말씀하시지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회복해야 됩니다. 경건을 회복해야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즐기는 일, 세상의 좋은 것을 엔조이하는 법에 대해서는 남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되는데 경건을 유지하는 것은 배워야 됩니다.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에 우리가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듣는 귀의 은총을 아는가
삼상 3장 1~14절 / 오정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에 투자가 인생 최선의 투자”입니다. 세상에서 주식이나 어떤 특정한 사업에 투자하여 낭패 당한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투자하여 낭패당한 사람은 역사 이래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을 투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여러 복들이 있지만,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복인 “말씀과 동행할 수 있는 은총”을 우리 모두는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삶과 사역의 능력을 얻습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성도의 삶과 하나님의 말씀의 역학관계로 나타나는 복된 삶의 원리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4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지라”(4절a). 세상의 모든 여타 종교는 사람이 신에게 아뢰기 위하여(告) 찾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사람에게 오시고 말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던 그 때 하나님께서는 당시 어린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1절).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말씀하시고 부르실 때 인간에게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주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하신 말씀을 믿음의 귀를 열어 잘 포착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6절a). 주님께서는 사무엘을 계속 부르셨습니다(6,8,10절). 계속적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성도들이 거절하기 때문에 실족하게 됩니다. 듣는 귀가 막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세상과 자아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 내면 질서가 믿음안에서 회복됩니다.
성경은 인쇄된 책 이상입니다.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만 하면, 이 말씀이 평생 우리와 동행할 것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6).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것은 성도의 특권입니다(1절).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1절). 아이 사무엘이 여호와의 앞에 ‘머물러’ 있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 각자가 성전(聖殿)입니다(고린도전서 3:16). 우리 속에 주님을 모셨기에 우리는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교회 울타리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목자의 인도와 돌봄에서 떨어져 있는 양은 위태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교회 안에 머물러야 주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집에서 주님을 섬긴 사무엘처럼 ‘봉사’할 때 우리는 주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습니다. 봉사지수와 말씀체험지수는 비례합니다. 손을 놓고 있는 성도보다,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고 섬길 때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겠습니까?
① 영적인 무지(無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7절).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7절). “여호와의 말씀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교리적으로 지식적으로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무지를 깨뜨려야 합니다. 사무엘은 그 이후 여호와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마음속 깊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특권에 평생 감격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21절)
② 영적인 편견(偏見)을 깨뜨려야 합니다(8절).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8절). 엘리는 세 번째로 사무엘이 찾아왔을 때에야 여호와께서 그를 부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아이에게도 말씀을 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은혜 받는 데에는 나이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사모하는 자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한때 베드로가 지녔던 민족적인, 문화적인 편견들을 깨뜨려야 합니다(사도행전 10장). 하나님의 자녀 모두는 축복의 현장뿐 아니라 고난의 현장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믿습니다. 언제나(Anytime), 어디서나(Anywhere) 주님의 음성에 열려있는 ‘영적인 유비쿼터스(Ubiquitous)’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③ 순종하기 위해서 경청(傾聽)해야 합니다.
듣는 "마음의 귀"가 있을 때 "육신의 귀"가 열리게 됩니다. 육신의 귀를 열어야 마음의 귀를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목적은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스티븐 코비/Steven Covey)”이란 책에서 대인관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경청한 이후 이해시키라(Seek first to understand, then to be understood)"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공감적 경청이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에 대한 적극적 경청(Active Listening)이나 반사적 경청(Reflective Listening)과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적극적 경청이나 반사적 경청의 동기는 항상 자기중심적(自己中心的/autobiographical)인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함정이란 단지 상대방에게 대답하기 위하여(to reply), 통제하기 위하여(to control), 교묘하게 조종하기 위하여(to manipulate)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서 또한 사람들로부터 공감적 경청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이웃을 이웃답게" 이해하고 용납하려는 동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순종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려는 강한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경청의 수준을 높여가야합니다.
들음의 5단계는 ①상대방의 말을 무시하는 단계 ②듣는체하는 단계 ③선택적으로 듣는 단계 ④신중한 경청 ⑤공감적 경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귀는 어느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까?
우리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전인격적으로 듣는 ‘공감적(共感的) 경청(Empathic Listening)’을 지향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듣는다면 우리의 삶에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성도의 경청의 목적은 순종에 있습니다. 순종(Obedience)은 듣는다는 뜻의 라틴어단어(Audire)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잘 듣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할 수 있습니다. 탁월한 순종은 그 뿌리가 하나님께 때한 공감적 경청, 순종적 경청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청지수(傾聽指數)는 얼마입니까? 경청지수가 순종지수(順從指數)를 결정합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주의 백성된 우리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과 신뢰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인생을 투자합시다. 하나님의 진리에 우리의 삶을 올인(All in)합시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우리의 삶을 온전히 내어 드립시다!
세상과 자아(Ego)의 음성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육신과 마음의 귀를 활짝 열어 주님의 음성을 믿음으로 받읍시다. 영적인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 기울여 순종함으로 ‘듣는 귀의 은총’을 누리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됩시다.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가정과 우리교회를 하나님의 제단위에 말씀의 제물로 올려드립시다.
역충성 공동체
삼상 3장 1~9절 / 이수영목사
이 시간은 장애인들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우리들이 신앙 안에서 약자들을 어떻게 돌아보아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장애인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용어 사용을 조심하는데서 부터 장애인 사랑이 시작됩니다.
① 장님, 소경이라는 비속어보다는 시각 장애인, 맹인이라는 표현이 바른 표현입니다. 또 벙어리, 귀머거리라는 비속어보다는 언어장애인, 청각장애인, 농인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② 영어로 handicap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 표현보다는 different ability라는 표현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장애인은 엄청난 핸디캡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또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관점에서 보는 용어가 바로 different ability입니다.
2. 장애인들의 몇 가지 바램을 살펴보겠습니다.
① 장애인은 자신을 도울 때 반드시 먼저 도와주어도 될지 의사를 물어보기를 원합니다.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장애인을 돕는 것은 큰 실례입니다.
② 또 동정심으로 돕는 것인지, 진심으로 돕는 것인지를 장애인을 쉽게 압니다. 그러기에..동정심보다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돕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③ 장애인들을 위한 엘리베이터나 주차구역, 화장실은 함께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다만 장애인이 있을때 우선권을 주기 원할 뿐이라고 합니다.
3. 특별히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① 보행자 도로, 차도, 인도의 구분들 짓는 경계지점에 대한 시각 장애인들을 위한 배려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횡단보도 진입부분에 있는 차량진입방지용 지석이 어중간한 높이로 돌출되어 있어서
시각장애인들이 지석에 지팡이로 인지할 수 없어서 가장 큰 사고가 난다고 합니다.
② 버스를 탈때도 시각장애인에게는 “버스가 도착했습니다”라고 말해주고 버스 앞으로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버스가 도착 했습니다”라는 말만 해주고 버스 앞으로 인도해주지 않아서 시각장애인들의 교통사고를 유발시키기도 합니다.
③ 관청이나 큰 건물 바닥에 있는 점자블록을 따라가 보면 마지막 부분은 언제나 벽과 부딪치거나, 지하철 같은 경우에는 벼랑으로 떨어지도록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정부종합청사의 예를 들면 점자블록을 따라가 보면 화장실로 진입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이와같이 정부가 규정하는 가정 기본적인 시설만 하는데 급급해서 정작 장애인들에게 실제적으로 필요한 적재적소의 곳에 설치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④ 법에 명시된 기본적인 사항만 가지고는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외국으로 이민 가는 것이 가장 큰 꿈이라고 합니다. 좀 더 자세하고 세부적인 부칙을 통해서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4. 시각장애인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선천적 시각장애인은 색깔과 용어를 설명하기 힘듭니다. 빨간색은 뜨겁고, 정열의 색깔이라고 가르쳐 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감귤의 색깔도 일단 먹어보면서 맛을 통해 감귤의 색깔을 짐작할 뿐이라고 합니다.
② 후천적 시각장애인은 주로 사고에 의해 장애를 갖게된 장애인입니다. 이들은 색깔과 용어를 설명하는데는 쉽지만 마음의 상처가 많다...
③ 시각 장애인은 소리에 민감합니다. 당사자 앞에서 작은 소리로 다른 일반인에게 말하는 것은 자신을 욕하는 것으로 쉽게 오해합니다. 시각 장애인 앞에서는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밥을 먹을 때에는 시계방향으로 위치를 알려주면 정확하게 밥과 반찬을 찾아서 먹습니다. 10시 방향 불고기, 12시 방향 김치, 2시 방향 콩나물, 3시 방향 국, 9시 방향 밥이라고 위치를 설명하면 일반인들이 식사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④ 시각장애인들의 문화는 터치의 문화입니다. 예를 들면 맹교회에 교역자가 부임을 하면 시각장애인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저~ 한번 만져봐도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한다고 합니다. 교역자의 얼굴과 손발과 몸을 만져보면서 교역자의 모습이 어떠한지 인식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시각장애인의 문화는 터치의 문화라고 합니다.
5. 사사시대의 영적 시각장애 상태
사무엘상 3:1-3절에는.. 사사시대의 영적 시각장애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다.. 라고 말씀합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지고 잘 보지 못한다는 말은 사사시대의 영적 신앙상태 즉, 이스라엘의 영적 시각장애 상태를 언어유희(메타포어)로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사사 시대 말기에 이르러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히 부패하게 되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이 희귀하게 된 이유는 백성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의지한다 하면서도 모두 자기 소견대로 살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에 향한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지자 이스라엘에는 ‘비전(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게’(3:1)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영적 시각장애 상태 속에서 말씀 부재 상태를 겪고, 비전의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잠언 29:18절에 ..계시의 말씀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해진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온 백성들이 말씀 없는 방자함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6. 그렇다면 비전을 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① 현실을 정확히 통찰하는 분별력(insight)과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의 눈을(foresight) 동시에 가지며 대안을 모색하는 영적 세계관입니다.
② 비전을 본다는 것은 ‘현상에 대한 분노에서 어떤 대안에 대한 진지한 탐색으로 성장해가는 것“ 입니다. 따라서 공동체가 비전을 상실할 때는 현상에 대한 분노 대신 오히려 현실에 순응하다가 점점 ’백성이 방자해져서‘ 고삐 풀린 말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처럼 사회적 혼란이 가속화되는 것입니다.
7. 사무엘 시대의 말씀운동
사무엘은 이와같은 사사시대의 현상 앞에서 ‘현상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대안을 제시해주는’ 말씀 운동을 일으킨 것이 사무엘상 전반부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를 신앙인들의 영적시각장애 상태를 타파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에 투신할 수 있는 말씀운동의 시대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말씀 운동]이라 함은.. 성령의 조명과 새로운 인식의 틀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며, 그 말씀을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의 모든 분야, 국가와 세계, 궁극적으로 세상의 하층민인 약자들을 돕는 문제 등을 창조적으로 적용시키며 실천하는 것이며,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바른 말씀의 기초 위에서 우리에게 주신 에너지를 세상의 약자들을 위해 발산하는 것입니다.
8. 하나님의 말씀은 편안한 신앙주의를 극복하게 합니다.
신학자 개리 콜린스는 Easy Believism 이라는 책을 통해서 오늘날 현대인들의 신앙의 모습을 분석하고 정리하였습니다. 이 책에 보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Easy Believism 즉, 편안한 신앙 주의󰡓라는 말로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① 편안한 신앙주의는 성공의 보장을 원합니다.
② 편안한 신앙 주의는 자기중심적입니다.
③ 편안한 신앙주의는 세상적인 기준을 받아들입니다.
④ 편안한 신앙 주의는 죄, 훈련, 회개, 희생과 같은 것들을 말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⑥ 편안한 신앙주의는 자기희생을 거부합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신앙인들 사이에. Easy Believism 즉, 편안한 신앙 주의가 만연하여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뿐만 아니라,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 희생을 담보로 한 약자에 대한 배려와 희생 그리고 인자함과 후대하는 성품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말씀의 기초 위에서 우리에게 주신 에너지를 세상의 약자들을 위해 발산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세상에 즐비한 약자들을 돕는 문제에 있어서 더욱더 창조적이고, 실천적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조명된 말씀으로 영적 시각장애 상태를 타파하고, 편안한 신앙주의를 버리고 , 약자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아가길 바라고 계십니다.
9.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비창조 부분을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되지 않는 나 자신의 인생의 언저리를 지속적으로 창조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비창조된 부분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속적으로 창조해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내 영혼 속에, 내 삶 속에 태초의 모습과 같은 혼동의 상태가 존재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주신 말씀을 통해 내 신앙의 혼동상태를 지속적으로 정복하길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해 놓고 그저 세상에 던져버리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정치가도 아니고, 비즈니스맨도 아닙니다. 창조한 인간의 삶 속에 여분으로 남아있는 비창조의 영역을 포기하지 않고 함께 재창조해 나가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내 삶 속의 혼돈과 무질서를 깨치고.. 아직도 창조되지 않은 악의 잔존물들을 해체시키고, 빛이 드리워지지 않은 영역에 빛을 주시며, 나를 향해 집중되어져 있는 에너지를 약자를 위해서도 그 에너지를 나누는 말씀의 삶, 질서의 삶을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10. 창조와 악의 잔존
신학자 존 레벤슨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와 악의 끈질긴 잔존’ (Creation and the Persistence of Evil)이라는 책에서 아직도 내속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에 저항하는 항신적 세력들을 유폐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후 현세에 이르기까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인식론적 부조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속에 비창조된 부분의 세력이 내 삶의 모든 에너지가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하고 항신적 세력으로 남아 있기에 여전히 이웃과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함을 꼬집고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주인 되심에 순종하고, 동시에 하나님도 인간에게 협력하는 존재로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항구적인 위협세력인 잔존하는 악의 프로그램이 내 속에서 구동되고 있어도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그 가운데서도 협력적인 복종에 의하여 완전해져가는 것을 꿈꾸는 창조관을 소유할 때 비로소 내 속에 남아있는 무질서를 정복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는 텅빈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존재케 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불의, 혼돈, 무질서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 .. 내 속의 혼돈 세력을 무장해제 시키고 유폐시키는 하나님의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의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7일째 안식하신 궁극적 의미는 혼돈과 무질서의 신적 세력에 대한 창조주의 승리를 기리는 축제의 안식을 누리고, 창조신의 수위권에 도전하던 경쟁적 신들의 반역과 저항을 제압했음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맞이하는 주일도 일주일동안 내 속에 자리잡고 있는 혼돈과 무질서와, 하나님을 향해 반역하고 저항하는 속사람을 제압하고, 하나님이 주신 영적 에너지를 이웃과 약자를 위해 사용하였음을 고백하는 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1. 하나님의 말씀은 나 자신의 늑대 상태를 정복하게 합니다.
자연의 시민사회의 무질서 상태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통해 사람들이 살기 쉬운, 살고 싶은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것이 성경이 시작된 때부터 시작된 운동이었습니다. 성경이 시작된 때부터 시작 된 이 운동은 “땅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땅을 다스린다” 함은 하나님 나라를 약자를 위한 사랑과 우애의 질서로 재편하는 것입니다.
“땅을 다스린다” 함은 내 속에 있는 야수성을 인간성이 정복하는 것이며, 내 속의 인간성이 야수성을 이겨갈 뿐만 아니라 땅의 무질서와 혼돈을 정복해나가는 것입니다.
짐승스러운 질서와 자연적 시민사회의 무질서 변혁 시켜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성령에 의해 조명된 말씀을 통해 [호모 호미니 루퍼스(homo homini lupus) 상태 즉, 만민의 만민에 대한 늑대 상태로부터 호모 호미니 데우스 상태(homo homini deus) 즉, 인간의 인간에 대한 신의 상태]로 변화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속의 늑대 상태를 정복하게 하고, 내 속의 악한 지배세력 교체하며, 약자들이 살기 쉬운 공동체, 약자들이 살고 싶은 공동체를 만들어가게 합니다.
12.이 시대는 약자를 위한 역충성(헤세드)이 필요한 시대 입니다.
전통적인 충성은 하위자의 상위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충성은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성경적인 충성은 봉건주의적 충성도 아니고 유교적 효도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약자가 곤궁에 처해 있을 때 강자가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보이는 역충성입니다.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보이는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이 성경이 말하는 역충성의 개념입니다. 역충성은 나의 인생의 여로속에 찾아온 미약한 자들을 위해 나의 에너지를 베풀 수 있는 마음 씀씀이를 말합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는 법적인 의무와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역충성은 믿음의 공동체에서는 언제나 요구되는 미덕입니다.
인생의 복을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이 복은 누군가가 복의 통로가 되어 수혜자(약자)를 위한 협조자가 되기 전에는 실현되기 힘든 것입니다.
약자를 위한 역충성은 수직으로 일어날 일들을 수평적으로 감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하실 일을 나의 삶의 자리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약자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역충성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몰두하고 골몰하는 신앙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는 만큼 내 눈에 보이는 약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충성(역충성)할 것인가를 돌아보는 믿음의 식구들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할 때
삼상 3장 1~4절 / 이정선목사
여러분, 어린 사무엘의 이야기를 잘 아시죠? 우리가 어렸을 때 아주 많이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어른이 되어서는 이 이야기를 별로 들어본 것 같지 않아요. 어른들은 이 이야기가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귀가 닳도록 들려주면서, 어른들에게는 하지 않는단 말이죠.
뭐, 잘 아는 이야기이지만 한번 살펴봅시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집이라고 불리는 성소에서 제사장 엘리의 심부름을 하며 일하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사무엘이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어요. 사무엘은 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엘리 제사장이 밤중에 무슨 심부름을 시키려고 하나 보다 생각하고 엘리 제사장에게 가서 왜 부르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사무엘이 들어와서는 왜 불렀느냐고 하니까 얘가 무슨 바람소리를 잘못 들었나 보다 생각하고는 가서 자라고 했습니다. 사무엘도 자기가 잘못 들었나 보구나 하고 돌아와서 다시 자려고 하는데 또 누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람소리가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다시 엘리에게 갔더니 엘리는 안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세 번째 일어났을 때에야 엘리는 하나님이 이 아이를 부르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또 너를 부르시면 ‘하나님, 말씀하십시오, 제가 듣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몇 가지 사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하나님이 사무엘이라는 아이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어린 아이에게 말씀하시려고 찾아오셨다는 사실 때문에 이 이야기가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처럼 취급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왜 하나님이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려고 했는지를 살펴본다면 결코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사사시대가 끝날 무렵 엘리 제사장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지도하고 있던 때입니다. 어느 시대이든, 또는 어느 조직이든 지도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엘리 제사장이 말년에 이르러 판단력이 흐려져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절에 보면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단순히 시력이 나빠졌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판단력과 총명함까지 상실했다는 의미를 함축하는데, 이삭 역시 늙어서 눈이 어두워져 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야곱이 에서로 변장하고 찾아왔을 때 깜빡 속아 넘어가고 말았었지요. 엘리의 눈이 어두워져서 사리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리더십이 등장해야 할 때라는 뜻입니다. 만일 엘리가 눈이 어두워졌으면서도 리더십을 넘겨주지 않고 버틴다면 그야말로 재앙 아니겠어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고, 아무리 큰 일을 성취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때가 지나면 물러나야 합니다. 그것은 아름답게 피었던 꽃들이 때가 되면 떨어져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꽃이 아름답다고 지기를 거부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잖아요? 눈이 어두워진 엘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사무엘이라는 아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엘리의 시대는 가고 사무엘의 시대가 오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이라는 아이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미래였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장인 엘리를 제쳐놓고 어린 사무엘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어른들은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우선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인정을 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낫다고 믿습니다. 또 어른들이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맞는 역할이나 대우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엘리가 제사장이니까 하나님은 당연히 엘리에게 말씀하셔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제사장 엘리를 제쳐두고 심부름하는 아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엘리 제사장의 지위나 역할이 더 중요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나이나 지위에 따라서 만나시는 것이 아니니까요. 물론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제사장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러나 지금 엘리 제사장은 눈이 어두워지고 판단력이 흐려져서 아주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어요. 자기 아들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능멸하고 성소에서 악을 행하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단 말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제쳐두고 어린 사무엘에게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저는 제가 목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저를 만나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사도 영이 흐려지고 게을러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직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신실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 가까이 계시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들처럼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믿음을 예수님은 어른들의 계산적인 믿음보다 훨씬 높게 쳐주신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어른들을 제쳐두고 아이들에게 말씀하실 확률이 더 많지 않아요?
사실 어른들이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목사도 하고 집사도 하잖아요? 그런데 그 어른들이 잘못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여기서도 엘리 제사장이 그렇게 잘못하니까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해졌어요. 전에는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시기도 하고 때로는 천사를 보내셔서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는데, 이제 그런 것이 통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서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사사시대를 통해 그 땅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언제나 커뮤니케이션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광야에서 구름이 머물면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치고 머물다가 또 구름이 이동하면 백성도 이동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아주 필수적인 것이었는데, 그것이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마치 아주 깜깜한 밤을 지나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도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게 되어버리지는 않았나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담을 쌓고 삽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꿈이나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거나 천사를 보내시는 것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름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게 됩니다. 또한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성도가 교통함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함께 바라보며 생활하게 됩니다.
이처럼 풍부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지만, 우리도 엘리의 시대처럼 말씀이 희귀한 삶을 살게 되는 수도 있어요. 바쁘다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기도 하고, 게을러서 말씀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낙심하고 실망해서 마음이 닫히기도 하고, 범죄하고 회개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히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이 희귀한 삶을 산다는 것은 물고기가 물 없이 사는 것과 다를 게 없잖아요? 특히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잘 살다가 영적으로 눈이 흐려지거나 잘못해서 말씀이 희귀해져버렸다면 정말 답답한 일이지요.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어야 하나님으로부터 능력도 받고 위로도 얻을 수 있잖아요? 우리가 시험에 들거나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버리면 어떻게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가 고통 중에라도 하나님께 부르짖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이 되고 있어야죠. 아무리 교회생활을 바쁘게 하고 예수믿는 시늉을 많이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겠습니까?
그렇게 말씀이 희귀해졌을 때,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마치 어린 아이였던 사무엘에게 찾아와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 자녀들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도 있고 나보다 훨씬 믿음이 연약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상을 통해서나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아야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문을 닫고 있을 때,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게 되었을 때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얼마나 큰 은혜인가요?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고달픈 세상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힘으로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 속에서 날마다 살아 숨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것
삼상 3장 1~14절 / 김명혁 목사
지난 주일 무질서하고 혼란한 사사 시대의 죄악상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사사 시대란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사울왕이 즉위하기까지 이스라엘의 혼란한 시대를 말하는데 사사 시대의 죄악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 현실과 너무나 비슷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자기 소견만을 너무 강하게 나타내고 주장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고 거추장스러운 사람이고 불필요한 사람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웃을 무시하고 자기의 소견과 자기의 이익만을 내 세우는 이기적이고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사사 시대는 종교 질서도 가정 질서도 나라 질서도 무너진 혼란한 시대였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사사 시대 말기의 죄악상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엘리는 15명 사사들 중 14번째 사사인 동시에 제사장이었습니다. 사사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종교 지도자요 정치 지도자요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아침 엘리의 죄악상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엘리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엘리는 그 당시 한 집안의 가장이었고 종교의 지도자였고 정치와 군사의 지도자였는데 엘리는 그 당시 가정과 종교와 정치의 현주소를 나타내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엘리뿐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엘리의 죄에 동참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엘리의 죄는 한 마디로 눈이 어두운 것이었습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삼상3:2). 육체적인 눈뿐 아니라 영적인 눈도 어두웠습니다. 엘리가 처음에 사사와 제사장이 되었을 때는 눈이 밝아서 잘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지면서 눈이 어두워졌고 잘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의 죄는 한 마디로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첫째 엘리는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이상이 보이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엘리의 시대는 종교적으로 캄캄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도 않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입니다. 사무엘 3장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이 사무엘게는 들렸지만 노인 엘리에게는 들리지 않은 것을 보여줍니다. 아이 사무엘은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시는 음성을 네 번이나 들었지만 노인 엘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엘리의 죄는 한 마디로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많아질 때 눈이 어두워질 수 있고, 안일에 빠질 때 눈이 어두워질 수 있고, 종교적 형식과 의식에 빠질 때 눈이 어두워질 수 있고, 세상 염려에 빠질 때 눈이 어두워질 수 있고, 세상 일에 바쁠 때 눈이 어두워질 수 있고, 죄와 타협할 때 눈이 어두워질 수 있고, 자기의 소견과 고집이 강할 때 눈이 어두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도 않는 불행한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의 찬송이 “구속한 주는 간 곳 없고 세상과 나만 보이도다” 란 유행가로 바뀌어질 수가 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도 주님을 만난 후 처음에는 눈이 밝아서 잘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눈이 어두워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6). 눈이 어두워서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부자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자들도 눈이 멀어서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강변교회에 와서 주님을 보고 듣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번 강변 소식지에 주님을 만나고 보고 듣게 된 감사의 간증들이 많이 실려있습니다. 다음은 어느 새신자 출신의 간증입니다. “포도주와 떡이 주님의 진정한 피와 살이 되어 내 속에 들어와 뜨거운 어떤 것이 가슴을 꽉 채우며, 벅찬 은혜로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나의 죄로 인해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구나 나의 죄가 너무나 커서 하나님이 하나뿐인 아드님을 이 땅에 보내신 거 였어… 하나님! 저의 죄를 회개하나이다.” “오늘은 내가 거듭난 날,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날, 내 못된 자아가 깨어진 날, 주님 감사합니다. 진실로 감사합니다.” 눈이 열려서 주님이 보이고 십자가가 보이고 나의 죄가 보이게 된 것을 고백한 감사의 간증입니다. 다음은 어느 청년의 간증입니다. “기적은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악인이었던 나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이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난 듯 합니다. 더 이상은 지난 날의 내가 아닙니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을 용서할 것이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할 것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 눈이 열려서 하나님이 보이고 나의 죄가 보이고 불쌍한 사람들이 보이게 된 것을 고백한 간증입니다. 마음이 열려서 사랑까지 하게 된 것을 고백했습니다. 다음은 어느 성가대원의 간증입니다.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며 믿음의 친구들과 자라게 하셨고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강대상과 가까이 있던 성가대 석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가까이 들으며 믿음도 자라게 하셨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사랑을 눈물로 알게 하시고 저에게 음악과 믿음의 모델이신 박치원 선생님을 통해 하나님의 그릇으로 쓰임 받으려면 많은 기도와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시고 청년부 안에서 성숙한 믿음의 친구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제가 잘나서도 아니고 기도를 많이 해서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된 것을 고백하는 감사의 간증입니다. 다음은 어느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꿈은 여기까지입니다. 꿈에서 마음껏 찬양하고 깬 저의 몸은 새 털같이 가볍고 구름 위를 나는 듯한 즐거움과 기쁨이 가득하여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기도 응답임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사랑합니다.” 눈과 귀와 영혼이 열려서 주님을 보고 듣고 찬양하는 감사의 간증입니다.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듣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인데 엘리는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둘째 엘리는 눈이 어두워져서 자신도 자녀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엘리는 눈이 어두워져서 자기의 죄도 자녀들의 죄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삼상2:29). 이 말씀을 보면 엘리는 성소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했고 아들들을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했습니다. 종교를 하나의 의식으로 직업으로 하나의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불량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제사를 멸시하며 제물을 갈고리로 낚아채어 훔쳐가곤 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성소에서 간음행위까지 자행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를 멸시하고 주일 성수를 멸시하고 하나님께 드린 또는 드려야 할 헌금을 자기 마음대로 착복하고 그리고 간음행위까지 자행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그런 악행을 금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저 이렇게 부드럽게 타이를 뿐이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삼상2:23,24). 그런 부드러운 책망에 불량배 아들들이 아비의 말을 들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상상2:25). 이와 같은 부드러운 책망을 한 엘리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징계하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아이 사무엘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했습니다.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삼상3:13). 엘리는 자기의 죄와 아들들의 죄를 심각하게 느끼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에서 자기의 죄가 보이지도 않고 자녀들의 죄가 보이지도 않는 불행하고 위태로운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예배할 예배의 직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면서도 그 죄의 심각성을 느끼지도 보지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집사의 직분 권사의 직분 장로의 직분 교역자의 직분을 망각하고 예배를 멸시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면서도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물질과 시간과 몸을 내 사욕을 채우는데 사용하면서도 그 죄의 심각성을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는 불행하고 위태로운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예배와 주일 성수를 멸시하고 다른 짓들을 자행해도 “너 왜 그러냐 너 왜 그러냐”라고 부드럽게 책망을 하면서도 실상은 그것을 묵인하고 눈 감아주는 무서운 죄, 저주 받을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배와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를 가리켜 “저주를 자청하는” 죄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김선도 김홍도 김국도 목사님의 어머니는 자녀들이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갈 때 엄하게 매를 때리기도 했고 집에서 내 좇아버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저의 어머니도 제가 어렸을 때 가끔 잘못된 짓을 하면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리고 방에서 내어 쫓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런 적이 별로 많지는 않았지만 매를 맞으면서 울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저의 어머니는 저를 너무너무 사랑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사무엘을 아기 때부터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기 때부터 성소에 머물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했습니다. 한나에게 있어는 신앙교육이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자식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키지 못했습니다. 아들들이 제사를 멸시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엘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자기의 죄와 아들들의 죄를 심각하게 직시하지 못했습니다.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엘리는 눈이 어두워져서 정치 사회 현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엘리가 나이 많아 눈이 점점 더 어두워졌을 때 이스라엘에 국가적 위기가 닥쳐왔습니다.불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나가서 싸웠지만 패하고 말았습니다. 사 천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엘리는 국가적 위기가 닥친 원인을 분석할 수 있는 영적 지각이 없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자를 엘리에게 보내어 엘리와 그 아들들의 죄를 지적하시면서 이스라엘에 환난이 임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찌라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삼상2:30-32).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싸인인 것을 깨닫고 엘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의 제사를 드렸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두 번째 나아가서 불레셋 군대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실로에 가서 법궤를 가지고 전쟁에 나아갔습니다. 실로에는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는 대신 법궤를 가지고 전쟁에 나아갔습니다. 종교의 외부적 시설과 의식에 의존한 것이었습니다. 엘리는 그저 보고만 있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또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적 형식주의를 미워하십니다. 그들의 종교적 형식주의와 의식주의는 하나님의 진노를 더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보병 삼만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법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은 전장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패전의 소식을 들은 98세의 노인 엘리는 의자에서 자빠져서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으로 나라가 크게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나라가 처했던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위기의 때를 돌이켜 봅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부산으로 피난 갔던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은 각각 부산 중앙교회와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자들 수백 명들과 함께 민족의 죄와 교회의 죄를 통회 자복하는 회개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누구를 증오하며 대적하기 전에 누구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민족의 죄와 교회의 죄를 통회 자복하는 회개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유엔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한국교회 제2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제1의 부흥은 일제의 강점으로 인해서 일어났고 제2의 부흥은 6.25전쟁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엘리는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도 보지 못했고 자신과 자녀들의 죄도 보지 못했고 민족의 운명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교회와 사회와 나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제멋대로 자라도록 방치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멸망에서 구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였습니다.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삼상1:7). “여호와께 통곡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삼상1:10). 가정에 괴롭고 슬픈 일이 있었던 것이 오히려 한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했습니다. 한나는 마음을 열고 심정을 통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은 한나는 다음과 같은 영혼의 노래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다”(삼상2:1,2). 한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사무엘을 젖을 떼자마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좋은 학교나 유학을 보내는 대신 하나님의 집에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평생 하나님께 제사드리며 봉사하게 했습니다.
아이 사무엘도 아이 때부터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삼상3:19). 사무엘은 나라와 민족이 처한 패망을 바로 불 수 있는 눈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을 모두 미스바 광장에 모이게 했습니다. 누구를 대적하고 타도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레셋을 대적하고 타도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통회 자복하는 회개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모인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약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삼상7:6).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였더라”(삼상7:9). 그 이전에도 엘리때 이스라엘이 광장에 모여서 큰 소리로 외친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 불레셋 원수를 갚자고 크게 소리를 지른 일이 있습니다. 법궤를 의지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크게 소리를 지른 일이 있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삼상4:5). 그러나 그 소리는 분노의 소리였지 회개의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엘리 시대의 소리는 분노와 타도의 소리였고 사무엘 시대의 소리는 회개와 헌신의 소리였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가득한 소리도 회개와 헌신의 소리보다는 분노와 타도의 소리인 것 같습니다.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자신을 보고 자녀들을 보고 민족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영적인 지도자들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우리들 하나하나가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고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과 자녀들의 허물을 바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민족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바로 직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과 민족의 죄를 통회 자복하는 회개의 제사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눈을 뜨게 해주시옵소서. 우리들의 귀를 열게 해주시옵소서. 우리들의 무릎을 꿇게 하시옵소서.
